그의 자리주체는커녕 관찰자로라도 한국 시에 이런 자리가 등장한 적이 있던가. 괴롭지만 비굴하지 않게 그가 머문 몇 자리를 적어본다.도축장“죽음 대수롭지 않은 여기 목 떨어지고 다리 잘린, 속내까지 다 파헤쳐진 핏빛 축생의 응고되지 않은 주검을 이리저리 끌고 밀며 다니는 내가 안녕하듯 저렇게 지는 꽃그늘 속 또 다른 생은 안녕하다” 16폐광지대“모든 영롱함이 몰락하기 전까지 다만 일용을 위해 악착같았던 날들을 안일한 낭만이 밟고 지나가는 봄날 오후 나 그 증오와 사랑 사이에서 나고 자랐음이 분명한데 저 언덕배기 어디쯤에선가 검은 화차 위로 팔매질하던 하얀 국돌처럼 먼 곳으로부터 그리움 하나 챙기지 못 하고최초의 불길로부터 도망치듯 이곳을 떠난 지 너무 오래되었다” 23무덤“더 이상 흉질 곳 없는 이를 위해 굴삭기가 작은 구덩이를 판다 딴에는 저이도 떠돌 만큼 떠돌다 제일 마지막에 돌아가는 것이리라 부랑의 육신은 봉인 된 채 또 어디를 향해 떠나갈까문득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그의 얼굴이 궁금해지는 건 우린 서로 땅속으로 스며들 유전자를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겠지“ 84원양어선“뱃머리에서 얼음 깨는 우즈백 사내의 긴 이름을 외우다 이름만큼이나 낯선 그의 고향을 생각해보기도 했다 그곳은 생의 항로에서 밀릴 대로 밀려버린 자들의 마지막 영토였으므로” 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