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묘사화 조선 핏빛 4대 사화 3
한국인물사연구원 지음 / 타오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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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의 폭정을 지나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하고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악정을 개혁함과 동시에 쫓겨난 신진 사류를 등용하여 파괴된 유교적 정치 질서의 회복과 성리학의 장려에 힘썼다. 대의명분과 오륜을 존중하는 새로운 기운 속에서 점차 조정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이 조광조 등의 신진사류였었다.  조광조는 1515년 성균과 유생 200명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라 중종의 신임을 받았다. 조광조의 특채를 계기로 사림파의 중앙진출이 활발해졌다.  연산군의 악정에 대한 개혁을 진취적으로 진행하였던 조광조는 중종의 신임을 받은 성리학을 근본으로 삼고 고대 중국의 '왕도 정치(王道政治)를 이상으로 하는 이른바 지치주의(至治主義)정치를 실현하려 했다. 조광조는 시험으로 등용되던 인재천거방법보다 '현량과(賢良科)를 설치하고 많은 신진 사류를 등용하여 유교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했다. 이는 과거제도의 폐단을 혁신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들이 구현하고자 했던 '왕도정치'는 중종은 물론 훈구파에게 현실감과 괴리감이 들게 했으며 저돌적이고 급진적인 면으로 인해 정적들의 증오와 질시를 사게 되었다. 거기에다 철인(哲人)군주의 이상과 이론을 왕에게 역설한 것이 도리어 역효과를 내어 중종도 조광조의 극단적인 도학적 언행에 대해 점차 혐오감을 갖게 되었으며, 중종반정에 참여하지도 않고 부당하게 공신이 된 78명을 모두 가려내어 공신록에서 지우는 일까지 추진했다. 이에 훈구파세력들이 사림파세력들에게 앙심을 품게 되었으며, 그 유명한 '주초위왕(走 肖 爲 王)' 사건까지 만들게 되었으니, "이는 중종의 사랑을 받는 희빈 홍씨의 아버지인 홍경주를 움직여. 희빈과 짜고 나뭇잎에 꿀로 '주초위왕(走 肖 爲 王)'이라는 글씨를 써서 그것을 벌레가 먹게 했다. '走'자와 '肖'자를 합하면 조(趙) 자가 된다. 즉, 조씨가 왕이 된다는 뜻이니, 이것은 조광조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였다."는 사건이었으니 이 일로 중종은 왕의 권위에 불안을 느끼고 드디어 조광조를 사사하기에 이른다.

역사시간에 참으로 중요하다 별표도 세개이상씩 표해가면서 외웠던 이 사건이 조선시대의 그 유명한 핏빛사화들 중에 하나다.
다른 사화들과는 다른점이라 할만한 것은 무오사화와 같이 훈구파와 신진 사류간의 반목과 배격에서 일어난  사건이지만, 정치적 음모가 도사린 정쟁이었다는 점과 갑자사화와 같이 정치적 투쟁 목적이나 이념이 없었다는 점에서 특이함을 이야기한다. 

이 책에서는 조광조와 함께 사림파의 여러 인물들과 조광조의 주변인들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로 인해 조광조의 삶에 더욱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흘러간 세월 493년의 사림파들의 삶까지 함께 더 가깝게 접할 수 있다. 

타오름의 역사서들에서 우리에게 항상 주고자 하였던 것은 과거의 반 천년 전의 반칙과 무함의 역사를 깨끗이 청산하지 못하고 그 행위와 작태가 여전히 반복되는 현실을 걱정하여 과거의 얼룩진 역사를 표본으로 삼아, 그 당시 그 인물들의 치적과 행적을 분별하여 병든 역사와 진정으로 건강햇던 역사를 바로 익히고 다듬어 현재를, 그리고 미래를 청명한 미래를 보장받고자 책을 내놓는다 했다.  

주관적인 의견을 내놓는다 해도 역사서들을 통하여 과거의 악행을 되풀이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닫도록, 그리고 더 발전하는 청명한 모습들을 가다듬기 위해 역사서들이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조광조의 '왕도 정치(王道政治)가 중종의 시대에 그 큰 그릇을 담아내지 못했던 사회였었다는것을 493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이 아니라도 그 시대에 알고 있었던 조광조와 함께 했던 갖바치에 대해 더 많은 자료가 없음이 안타까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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