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일제 침략사 - 칼과 여자
임종국 지음 / 청년정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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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임종국 선생의 책을 읽었다. 그는 지금의 중년 세대에게는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에게는 꼭 읽어야 할 책을 쓰신 분으로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분이다. 그가 쓴 명저 『친일문학론』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 이후 나라를 재정립하고 동족 상잔의 어둠을 헤쳐 나오면서 당면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그야말로 생존 투쟁을 벌일 때 우리의 역사 의식은 얄팍해져만 갔다. 당장 먹고 살기에 바쁜데 지난 일제 치하의 어두운 과거를 다시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다. 이런 틈을 타 친일파들은 일제 치하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해 정ㆍ관ㆍ재계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먹고 살기에 바빴고, 일부 학생 계층이나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우리의 역사를 알 기회가 없었다. 이럴 즈음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은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물론 제목에서 보여진 만큼 문학가들의 친일 행적을 파헤쳤지만 알게 모르게 연루되거나 우리의 일제 잔재의 청산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한 무게가 실린 책이었다. 그를 통해서 우리의 어두운 역사가 다시 들춰져 재조명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제기됐고, 친일했거나 그들의 그늘에서 연명했던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책 『밤의 일제 침략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칼과 대포로 병탄했다고만 생각했던 우리의 역사가 정치 경제적으로 침탈당한 것뿐만 아니라 철저히 우리의 문화와 민족을 철저히 유린했다는 점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野史)나 유행 등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의 우리 민족 침탈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깨닫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런 사실들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은 일이 대부분이라 정사에 기록된 부분과 떠돌던 말, 그리고 야사에 기록된 부분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기술하기에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일제의 만행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우리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저자의 소신이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이 책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라 독자는 생각한다. 비록 학교 다닐 때 읽어보진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접하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은 우리 의식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뿌리 깊은 침략의 얼굴에 쓰인 가면을 벗겨내는 것보다 정확하게 드러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의 힘을 키워야 된다는 자각심과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식적인 조약이나 정책이 정사(正史)로서의 '낮의 얼굴'이라면, 그 이면에 숨겨진 측면을 '밤의 얼굴'이라고 지칭하며 관련된 사건들을 이 책은 파헤치고 있다. 합병 후 36년간, 밤의 세계에서 이루어졌던 일제의 침략과 착취와 억압의 음모, 여자와 술과 노래에 빼앗긴 조선의 저항의식, 수많은 친일매국노들이 탄생 등을 통해 밤에 거행된 일제의 침략사를 살펴본다. 이 책은 서장(들어가는 말)을 비롯해 모두 13장으로 나뉘어 기술돼 있다.

서장 「들어가는 글- 낮의 얼굴 속에 가려진 일제 침략 이면사」

1장 「일본인 기생촌의 발달」

2장 「이리떼들의 침입」

3장 「이토 : 화류계의 제왕」

4장 「소네 : 패륜의 계절」

5장 「데라우치 : 횡령과 침략의 시대」

6장 「하세가와 : 비루먹은 강아지의 장」

7장 「사이토 : 정탐과 모략의 계절」

8장 「야마나시 : 화려한 독직의 시말서」

9장 「사이토 : 에로·그로·넌센스의 시대」

10장 「우가키 : 팽창과 모략의 쌍주곡」

11장 「미나미 : 칼과 계집의 수출업」

12장 「고이소 : 배덕의 장」

13장 「아베 : 패망의 전야」

 


 

이 책은 일제가 가지고 있는 밤의 얼굴을 밝힌다. 한일합방과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가 조선을 삼키기 위해 자행했던 일들이 일제가 보여 준 낮의 얼굴이라면 요정과 기생, 여자 등을 동원해서 이 모든 일을 조종한 것은 일제의 밤의 얼굴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제 침략의 야사로서 할머니 이야기처럼 재밌게 읽힌다. 우리가 배우는 일제강점기는 딱딱하고 아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흘러간 과거의 한 페이지로서, 죽어 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사 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은 훨씬 더 풍부한 일반 삶에 기대 있다. 말하자면, 낮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한밤 기생집에서, 요릿집에서 돈과 여자를 이용해 달성한 것이었다는 것을 역사는 기록할까?. 매국노를 매수할 때,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올 때, 철도 부설권을 따낼 때… 덕분에 밤에 일어난 일들에 들어간 국채를 담배를 끊고 술을 끊으며 나라를 살리고자 했던 민중의 애국이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한 줄 역사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역사는 말할까?.

일제는 한 손에는 대포, 한 손에는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 1906년 3월 초대 총감 이토의 부임행렬 속에는 그의 정부인 화류계 여자가 섞여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출병 일본군의 진주와 함께 시작된 묵정동에 자리잡기 시작한 공창가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로 거대한 인육 시장으로 번성해 갔다. 한때 번성했던 공창가들이 일제로부터 비롯되었던 문화라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 합병, 그리고 36년…. 밤의 밀실에선 일제의 침략과 착취와 억압의 음모가 이루어졌고, 수많은 친일 매국노들이 탄생했으며, 악의 꽃들이 거기서 피고 졌으며, 여자와 술과 노래 속에 빼앗긴 자들의 저항의식은 마비되어 갔고, 빼앗은 자들의 오만한 환성은 새벽을 밝혔다. 이렇게 일제의 무서운 침략은 밤에 이루어졌다. 이 밤의 일제 침략사야말로 추잡한 일본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일 전쟁에서 부족한 전승의 대가를 조선에서 갈취했다. 일본이 갈취한 것은 돈을 비롯해 사람까지 구석구석 훑어갔다. 하다못해 부엌의 숟가락 하나까지도… 일제에게 조선은 화수분이었다. 그렇게 닥닥 긁어가기 위해 그들이 발휘한 수단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을 협박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여자와 밤의 문화를 조선에 심음으로 그들의 목적은 점점 더 성취하기가 쉬워진 것이다. 조선의 기생은 손님들 옆에 하나씩 앉아서 술을 따라주지 않았던 것을 아는가? 일본인들이 일본요정에서 조선의 지배층을 접대할 때 그들의 문화에 어색해 할 것을 대비해 기생들을 하나씩 옆에 끼고 앉아서 먹여주게 한 것이 그 시작이다.

지금은 우리가 당연히 그런 줄 알지만 그 또한 일제의 철저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일본의 밤문화. 그것은 일제가 조선을 휘두르기 위해 들여온 것이며 그 밤의 자리에서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기생들의 치마폭에 이 땅의 민중들이 뼈 빠지게 얻은 노동의 대가를 착취한 일제 주구들은 아낌없이 쏟아 넣는다. 오늘날 한국에서 성행하고 있는 밤 문화는 오로지 일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홍씨와 특별한 사이였던 하기하라는 질투의 불꽃이 끓어올랐다. 홍씨는 1906년 11월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도일할 때 동행하면서 명함이 필요하여 홍洪 자에 경卿 자를 붙여 이홍경이라 일렀다가 훗날 이옥경으로 개명한다. 그녀(홍씨, 즉 이옥경)는 남편 이지용이 방탕하여 고종에게 누차 견책될 때 엄비에게 매달려 용서받게 하고 중용되게 했기 때문에, 남편도 그 큰소리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가 처음에 하기하라와 통通하고, 다시 구니와케와 통하고, 다시 또 하세가와와 통하자 하기하라는 분노와 질투를 참을 수 없었다."(p.57)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 요시다 다케코의 비파소리 값으로 지불한 1천 원(쌀 200가마의 값)은 이토에게서 차관에 대한 흔쾌한 답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차관은 조선이 아닌 일본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하지만 차관을 갚는 건 조선의 몫이었고 이 차관 때문에 금연, 금주를 해가면서 그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여야 했다. 요시다 다케코가 받은 비파 한 곡조 1천 원의 전무후무한 화대를 뒤치다꺼리하기 위해서, 조선인은 범국민적으로 담배까지 끊어야 했던 것이다. 일본의 국제무역을 담당한 미쓰이 물산의 초대 경성출장소장 오다카키는 게이샤촌 요릿집에서 혼자 도미찜 50인분을 시킨 후 모두 방에 엎은 다음 그 위에서 뒹굴었다. 그리곤 요릿값, 그릇값, 다다미 값까지 몽땅 현금으로 지불하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였다. 이렇게 흥청망청 쓴 돈은 모두 부정수입으로 생긴 돈인데 현재 물가로 매월 수억 원의 수입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부정수입이니만큼 모든 것은 조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나간 것이다. 이렇듯 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 여자를 끼고 노는 등에 쓰인 모든 돈은 조선의 피 같은 돈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은 죽어야했고, 만주로 도망해야 했다.

 

"이곳 어뢰면 천성동 마성참에서 산골 밭을 매던 이기영의 처와 이기주의 처 두 여자가 풀밭 속으로 끌려가서 순사에게 벌거벗겨진 채 취조를 받았다. 단오가 며칠 안 남은 1924년 음력 5월 2일, 양력으로 6월 3일 정오 무렵에 일어난 사건이었다."(p.241)

 


 

조선에 파견된 통감들은 모두 첩을 하나씩 끼고 지냈다. 일본에서 멀어졌으니 마음대로 살았다고 할까. 통감들은 저마다 여자 취향이 달랐다. 손발이 큰 여자, 손발이 작은 여자, 어린 여자, 늙은 여자, 무모(無毛)인 여자 등등. 이 취향에 따라 많은 게이샤들이 울고 웃었고, 밤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는 자들 또한 울고 웃었다. 이렇게 여자를 끼고 노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첩살림을 하려면 당연지사이다. 게이샤를 사와야 하고, 먹여야 하고, 입혀야 했으니까. 이 돈들은 당연히 조선에서 뜯어낸 돈이었고 일제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조선이었던 때였다.

 

"쾌락을 사는 관리, 쾌락을 파는 게이샤, 그 사이에서 요정재벌로 급성 장해 가던 온갖 출신의 포주·요정주들…. 조선에서의 이권에 눈독을 들 이던 기자 … 대륙낭인 패거리하며, 그자들과 한 통속이 되어 매국의 음 모에 여념이 없던 송병준 같은 망국도배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백 귀가 야행하면서 남의 나라를 송두리째 꿀꺽하는 도깨비 같은 수작을 뚝 딱 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p.87)

 


 

저자 : 임종국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 씨의 4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 해방되던 해, 그는 중학교 3학년의 나이로 일본군의 퇴각을 경험했고, 그후 고려대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끝내 문학으로 돌아와 1959년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함으로써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다. 1965년 한일회담은 임종국 선생의 생애에 전환점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로,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즈음 그의 연구 테마는 문학사회사였다. 이것이 한일회담의 반민족적 행위와 접목되면서 본격적인 친일연구의 계기가 되었고, 그 결실이 『친일문학론』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1980년 그는 건강 문제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서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지어 요산재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일제 침략사와 친일파들의 배족사를 구명해 나갔다. 83년 『일제 침략과 친일파』 84년 『밤의 일제 침략사』 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86년 『친일문학 작품선집』 87년 『친일논설집』을 차례로 발간했고, 이후 친일문제 연구에 체계를 세우고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친일파 총서’(10권)를 펴내기로 계획했다.

1988년 『일본군의 조선 침략사』를 내놓은 이후, 임종을 불과 8개월 앞둔 1989년 3월에 1994년 완간 계획으로 친일파 총서 10권 중 총론 〈사상 침략과 친일파〉, 〈정치 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등 4권의 집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후 계속되는 지병과의 싸움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989년 11월 12일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고, 재야사학자인 임종국 선생은 그의 큰 뜻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타계하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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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 - 한 글자로 시작된 사유, 서정, 문장
고향갑 지음 / 파람북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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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작고 슬퍼서 아름다운 것들』은 저자가 사유를 통해 빚어낸 세상과 삶에 대한 에세이다. 이 글은 저자의 인생과 주변, 그리고 가치관이나 삶의 관점을 엿볼 수 있다. 저자는 정작 독자들에게 위로와 평온함을 주기 위해 썼지만 읽는 이들은 저자가 의도하는 많은 것을 읽어낼 수 있다. 또 좀 더 신중하게 읽는다면 저자의 삶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알아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글들에 담겨 있는 저자의 진정성이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기에 한 가지 의문이 더해진다.

한 글자로 된 언어(낱말)에 관심을 두게 된 이유가 뭘까? 수많은 언어 중에 우리말로 된 한 음절의 말은 얼마나 되는지 파고 들어가면 언어의 본질에 대해서도 생각이 가 닿을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도 준다. 저자는 주변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통안 깊은 사색의 결과를 우리에게 보여주지만 사색의 내용보다 더 관심이 가는 것은 독자 개인의 사적인 이유이다. 사실 독자는 지금보다 훨씬 어렸던 어느 해 365개의 단어를 선정해 하루 한 단어씩 사색을 하기로 해본 경험이 있다. 그러나 한 달도 안 돼 이 계획이 무산됐다. 이유는 독자가 아는 언어(사색에 필요한)의 부족과 지식의 결핍 탓이었다. 그때 독자는 한 음절이든 두 음절이든 가리지 않고 삶에 꼭 필요한 가치관 정립을 위해 이런 시도를 했었다. 그때 주로 생각했던 단어들이 성실, 배려, 사랑 등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단어들에 대한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출판사 측에 따르면 이 책은 농후한 서정성과 주변을 향한 따뜻한 시선, 무엇보다 빼어난 문장이 빛을 발하는 산문집이며 한 글자 제목의 총 69편의 글을 담았다고 밝힌다. 지역 신문인 경기신문에 ‘고향갑의 난독일기(難讀日記)’라는 타이틀로 연재 중인 글과 미발표 글을 가려 뽑았다고 전한다. 저자는 연극과 뮤지컬 시나리오를 주로 써 온 희곡작가이다. 그러나 연극이나 뮤지컬보다 휴머니스트의 냄새가 더욱 가득 담겨 있다는 느낌이다.

출판사 측은 "우리 시대의 탁월한 에세이스트"임을 내세우지만 독자가 읽기에는 세상이나 주변에 대한 저자의 따뜻한 시선이 더 짙게 느껴진다. 이 책이 첫 산문집이라는데 믿을 수 없을 만큼 완벽한 문장을 구사한다. 읽는 이로 하여금 에세이의 참맛을 느끼기에 충분하다. 우리에게 충분히 알려지지 않았을 뿐, 운문과 산문의 경계를 넘나드는 매혹적인 문장과 가슴의 밑바닥으로부터 스며오는 정서적 울림이 주목할 만하다는 출판사의 평가는 아무 거리낌없이 우리들에게 다가온다고 독자는 느낀다. 이번 책 출간이 대한민국이 내놓은 큰 작가의 출현을 예고하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다. 이 책은 우리에게 한때 밑줄을 긋고 입으로 되뇌던 산문 읽기의 기쁨을 다시 누리게 한다. 가히 '산문 미학'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책 머리에」를 통해 다음과 같이 썼다. "헤아려보니 예순아홉 꼭지의 이야기입니다. 사건과 배경이 어떠하든 주인공은 늘 당신입니다. 문장에 등장하는 주인이 나였어도 달라질 건 없습니다. 나라는 주어를 빌려 썼을 뿐, 흑백 원고지를 관통하는 빨간 외투의 소녀는 당신입니다. 내 글의 주인공은 늘 당신입니다. 그대이고 귀하이고 연인이고 이웃이고 동료입니다. 아들이자 딸이고 아내이자 남편입니다. 내 글 속의 당신은, 밤새워 이력서를 쓰는 절박함이고 우는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애틋함입니다."

이 글은 저자의 삶과 주변에 대한 인간애와 따뜻한 시선, 그리고 우리들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사람 냄새가 나서 좋다. 시대를 아파하고 좋은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려 함이 느껴진다. 깊은 사유로 사회의 옳지 못한 방향을 지적할 땐 예리하기 그지없다. 우리 사회를 아름답고 풍요롭게 만드는 데 어떤 역할을 해야 할지에 대한 충분한 고민의 결과로 보여지는 대목이다. 그의 이러한 고민은 지금까지 써온 글이나 삶의 이력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보고도 본 것이 무언지 꿈결처럼 아득한 게 봄이다. 아득한 숨결 같은 봄이라서, 호흡기로 연명하는 환자의 맥박에 잡히고, 잠에 취한 노숙자의 굽은 등에 눌리고, 새벽을 열어내는 환경미화원의 빗자루에 쓸린다."

- 「봄」 중에서

 


 

책에 따르면 말이 소리와 다른 이유는 뜻을 지녔다. 태고의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위해 말에 뜻을 담아 이름을 붙이기 시작했다. 가장 짧은 말로, 가깝고 요긴한 것들부터. 몸, 불, 숲, 길, 집, 밥, 땅과 같은 것들이 그렇게 만들어졌다. 그런 점에서 한 글자로 부르는 것만큼 사람에게 소중한 것은 없을 것이며, ‘말’과 ‘글’이 소중한 까닭도 그래서일 것이다. 저자는 그 ‘한 글자’에 주목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따라서 글도 저자의 일상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것들을 살피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를테면 집, 가족, 이웃, 일….

가깝게는 주변, 멀게는 세상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자본주의의 거대한 담벼락에 가려지고 그늘진 자리에 자주 머문다. 그 시선에 슬픔을 어루만지는 물기와 온기가 담겨있다. 그늘 속에서 힘겹게 생명을 이어가는 것들, 삶을 꾸려가는 존재의 가여운 몸짓에 마음을 주고 공감하고 응원하는 것이다. 저자는 책 머리의 말미에 “그늘진 땅에 피어난 꽃, 그 꽃을 닮은 당신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라고 쓰기도 했다. 미루어 짐작하겠지만, 이 책에는 화려한 등장인물이 없다. 기운 어깨를 맞대고 있는 가족, 가난한 예술가이거나 노동자들, 말하자면 사회의 비주류이다. 그러나 사회의 비주류일지언정 인생의 비주류일 순 없어, 저자는 이들의 어깨를 두드린다. 그들은 삶에 있어, 2022년 대한민국 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주역들이다.

 


 

1장 글이 고이는 샘

2장 살아내는 이유

3장 그늘에 핀 꽃

4장 어두움 너머

 

저자 : 고향갑

 

대학을 중퇴하고 글을 쓰며 노동현장을 전전했다. 조선소와 그릇공장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노동야학에 참여하며 ‘삶의 시울 문학’에서 습작했다. 민예총(한국민족예술단체총연합)이 설립되고 전남지회 사무처장으로 일했다. 1997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희곡이 당선되었다. 이후 오래도록 글 쓰는 일을 찾아 ‘글 노동자’의 삶을 살고 있다. 〈또 하나의 진실〉 〈아버지의 나라〉 〈무등산 타잔〉 〈최용신-다시 살아도〉 등의 연극과 뮤지컬,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 특집 〈왜, 나를 쐈지?〉, 전태일 50주기 특집 〈너는 나다〉 등의 다큐멘터리를 썼다. 공저로 『기본소득, 지금 세계는』이 있으며, 현재 경기신문에 연재 칼럼 〈고향갑의 난독일기〉와 장편소설을 쓰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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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마흔의 온도
이다루 지음 / 북랩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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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이라는 나이는 인생에 꽤 많은 경험과 충고를 담고 있다. 지구상의 한 생명체로서 40년을 살았다면 적잖게 산 것이다. 그리고도 남은 삶의 시간도 그만큼 남아 있다. 그래서 마흔이라는 나이는 앞으로 삶의 척도가 가능한 나이일지 모른다. 일찍이 공자는 유혹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 '불혹(不惑)'이라 했고, 링컨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질 나이'라고 정의했다. 그건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한데 적어도 자신이 그렇게 살았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모두 그렇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말로 생각할 수 있다.

인간으로서 40년을 살아도 '삶'에 대해 제대로 알기엔 부족한 것 같다. 사회가 복잡해서일까, 아직 성숙하지 못해서일까. 서른의 나이에 방황하면 '그럴 수 있'어도 마흔의 나이에 방황한다면 '아직 삶에 대해 잘 모르는 미성숙자'일 뿐이다. 그렇게 인간의 나이 마흔은 삶의 변곡점을 가져올 수도, 지금까지의 삶을 돌아보고 새로운 삶의 방향을 재정립해도 좋을(?) 매우 애틋한 나이다. 한 시인은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라고 적었다. 서른이 그런 나이라면 마흔은 어떤가. 대한민국의 여성으로서 겪는 마흔은 또 어떤가.

 


 

‘40대에는 누구나 사회의 성공을 위하여 발버둥 치며 달려가고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다가오는 노년을 위해 가장 왕성하게 뛰는 나이’라고 전경일은 ?마흔으로 산다는 것?에서 설파하고 있는데 저자는 소설 속 주인공을 통해 ‘서른 살이 인생의 젊음에서 마침표를 찍는 나이였다면, 마흔 살은 인생에서 노화의 시작점‘이라고 읊조린다. 또 이 책 뒷 부분에 「부록」 ’마흔과 커피‘에서는 ‘마흔은 커피 중독과 어울리는 나이다. 쓰고 아프고 고된 시간을 넘어와 커피의 향과 맛에 취해도 좋을 나이. 그래서일까, 커피는 달고 인생도 달게만 느껴진다.’라고 인생의 나이 ‘마흔’에서 느낄 수 있는 솔직한 심정을 적었다.

이 책 『마흔의 온도』는 '피할 틈도 없이 찾아온 마흔이라는 나이'인 마흔 살을 맞는 네 명의 여성을 등장시켜 네 편의 소설로 질문에 답한다. 세월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고, 살아 있는 한 마흔 살은 온다. 갑자기 눈앞에 닥친 마흔이라는 나이가 영 어색한 것은 젊은 시절 꿈꿔왔던 마흔 살 자신의 모습과 현실 사이의 괴리 때문일 것이다. 책에 실린 소설 네 편에는 모두 마흔 살의 여성이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믿었던 연인에게 약혼자가 있음을 알게 된 후 복수를 꿈꾸거나, 무신경한 남편과 종 부리듯 대하는 시부모에게 시달리기도 한다. 해리 장애로 인해 환상을 현실로 믿기도 하며, 남편의 가출 후 억척스레 두 딸을 키우기도 한다. 모두 마흔을 겪어내고 있는 대한민국 여성들의 이야기다. 관절은 예전 같지 않고 흰머리도 나기 시작하지만 여전히 뜨거운, 마흔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본다.

 


 

네 편의 단편소설을 통해 마흔에 접어드는 여성들의 심리를 이야기함으로써 개인적으로 독자는 공감이 많지는 않았다. 정직하게 고백하자면 독자가 남성이라 정반대의 입장이어서 그랬을 것이라는 느낌을 가졌다. 다만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도 있고, 서로 삶의 환경이 다른 탓이지 적대적 감정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다. 다만 지나치게 마흔의 나이에 집착하고 대한민국 여성이라고 내세운 저자의 현재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이 공감을 주는 곳은 글 속 여러 곳에서 발견한다.

저자는 네 편의 소설 모두 40을 맞이하는 여성을 등장시켜 "40대에는 ‘불필요한 앎’의 단계를 생략하고 본론에 들어간다"는 솔직 담백한 멘트를 통해 시원시원한 이야기 전개를 이끌어가고 있어 읽는 내내 독자들을 한층 더 소설 속으로 몰입하게 만든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저자는 책 뒤에 부록으로 ‘마흔 살의 9가지 이야기’도 담아놓고 있다. 그 모두 40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우리의 인생살이 얘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저자의 마음을 담아놓은 네 편의 마흔 살 여자 얘기를 간략 소개해 본다. 네 편의 작품이 모두 마흔 살의 한국 여성이 주인공인데 제목은 모두 영어로 돼 있다. 이 또한 저자의 의도적 장치인 것 같아 의미를 두고 싶다. 그만큼 우리 문화가 서양 특히 미국의 문화에 젖어 있음을 암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Two Bathroom」 는 40대 여자인 ‘나’는 40대 직장인 성진을 만나게 되고 그러던 어느 날 늦은 시간에 성진의 오피스텔에 가 40대의 연애는 불필요한 ‘앎’의 단계를 생략한다며 서로는 곧바로 사랑을 나눈다. 그렇게 결혼을 전제로 사랑도 몇 차례 나누는 사이가 되고... 벽에 뜻 모를 숫자 ‘50.1.11/26’이란 쓰여 있는 걸 보게 된다. 그러다가 크리스마스이브 날 “결혼하고 싶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라는 말을 듣고는 서로 다투고 헤어지게 된다. 얼마 후 성진의 계정에 새로운 사진 하나가 업로드되는데 그 해시태그를 통해 성진이 양다리 걸치고 놀았다는 생각이 들어 화가 치밀어 오른 그녀는 오피스텔을 구하던 중 마침 성진의 오피스텔이 나왔음을 알고 공인중개사와 함께 가 방을 살피던 중 전에 못 봤던 두 개의 목욕실이 있음을 알게 된다. 오피스텔을 심하게 가격을 후려치고 안달이 나게 만들다 결국 매매를 결렬시키며 골탕을 먹이는 스토리다.

「How Are you」 결혼을 하고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후 남편이 혁이와 수시로 다투는 40대 주부인 승아. 남편은 무엇이 그리도 못마땅한지 계속 짜증을 내고 수없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가 되고... 시어머니 집에 가 반찬도 담그는 등 종 부리듯 대하는 시부모에게 이리저리 치이는 생활이 계속되던 어느 날... ‘잘 지내?’라는 보낸 이가 불분명한 메시지를 받게 된다. 그러다 남편인 혁이가 자정이 지나도록 오지 않던 그 날 밤 메시지 답장을 보낸다. 고승아인 본인을 ‘꼬승아’라고 불렀던 유일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동안 지쳐있던 심신에 활력이 솟기 시작한다는 얘기. 그 뒤 결론은 없다.

 


 

「Our Man」 2022년 1월 1일 AM 05:00 핸드폰 알람을 듣고 마흔이 되기에 부디 새해가 오지 말라 빌었는데 어김없이 찾아왔다며 한탄하는 솔로의 미지. 옛 애인 진우와의 사랑을 잊지 못하는 그녀는 악몽에 시달리기도 한다. 유일한 대학 친구로 스스럼없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인 영주가 집을 사 초대하게 되는 데 친구 남편을 진우로 착각하는 환상에 빠지기도 한다. 직장 동료였던 윤숙으로부터 과거 늦은 시간에 함께 술을 잔뜩 먹고 나면 데리러 왔던 진우에 대한 추억을 더듬어 가다가 진우가 발간한 ?봄의 사랑?과 ?여름의 사랑?, ?가을의 사랑? 그리고 지금 집필 중인 책은 ‘겨울의 사랑’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윤숙의 남자 친구가 진우가 아닐까라는 해리 장애를 겪고 있기에 가능한 아리송한 환상과 착각의 얘기가 펼쳐진다.

「Tunnel House」 가상의 서울 가외산동 터널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허름한 ‘터널 하우스’에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여동생 성희와 나 연지가 살면서 벌어지는 가슴 아린 얘기로 시작된다. 할머니가 죽고 곧이어 아버지는 가출을 하게 되자 먹고 살기 위해 엄마는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일을 한다. 마음을 의지하는 안 보살의 얘기를 듣고 집 나간 사람이 돌아온다는 말에 명태를 두들겨 패는 엄마... 나이 마흔에 있는 돈 없는 돈 다 모아 치킨집을 차리지만 그것도 한 달여 만에 망한다. 몇 년이 지나 아빠가 죽었다는 전갈이 오고... 결국 가족들은 뿔뿔이 헤어지게 되는 데 연지는 안 보살 집으로 엄마랑 동생은 외가로 가게 되는 가슴 아픈 얘기다.

 


 

마침 술기운을 빌어 솔직해지기로 했다.

“성진씨! 계속 이렇게 혼자 살 거야?”

“아니, 난 독신주의자는 아냐.”

“그럼 언제쯤 결혼하고 싶은데?”

“당장이라도 하고 싶지, 결혼.”

성진씨의 대답에 나는 주저하지 않고 당돌해지기로 했다.

“성진씨 마음이 내 마음이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나는 이런 단칸방도 좋아.”

그 순간 나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려왔다. 나는 어려서부터 거짓말을 할 때마다 눈꺼풀이 진동하곤 했다.(p.19)

 

저자 : 이다루

 

아나운서, 승무원, 기자, 쇼호스트, 리포터, 홈쇼핑 게스트, MC, 강사 등 17가지 직업을 거쳤다. 말과 글의 힘을 나누는 언어코치이며, 생각을 던지는 글을 쓰는 작가다. 경희대학교 언론정보대학원 전략커뮤니케이션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익숙한 낯섦을 이야기 하며 사는 게 곧 글이라 여긴다. 일상에서 만나는 당연하거나 혹은 익숙해서 말하지 않은 모든 것들을 글로 표현한다. ‘말은 깊게, 글은 진하게’ 언어를 다루며 엮는 일을 날마다 하고 있다. 저서로 『내 나이는 39도』, 『기울어진 의자』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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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 은둔의 역사 - 혼자인 시간을 살아가고 사랑하는 법
데이비드 빈센트 지음, 공경희 옮김 / 더퀘스트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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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낭만적 은둔의 역사』는 코로나 팬데믹 이후 비대면 일상으로 바뀐 우리 인간의 삶에 대한 고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독자의 책에 대한 판단은 개인의 책 읽기 결과이지만 이 책이 인간의 '혼자 있기'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팬데믹 상황에서의 사색이며 역사 기록 훑어보기란 점에서 독자의 판단도 책의 가치를 더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인간은 집단 생활을 함으로써 엄청난 문명의 발전을 이뤄낸다.

처음 집단 생활을 시작한 것은 가족과 친척 단위였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수많은 생물들 중 인간도 위협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생명의 안전을 위한 방법이었지만 차츰 집단과 협력이 삶을 지속하는 데 엄청난 시너지를 갖고 풍요와 발전을 가져다 주는 요인이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이후 집단 공동 생활을 하면서 진화를 거듭하고 자신의 삶을 영위하는 가장 큰 힘은 혼자의 힘보다는 집단으로 함께 있을 때 훨씬 좋다는 것을 알게 됐을 것이다. 이는 '혼자 있기'는 자신의 생명과 안전은 물론 먹을 것을 확보하는 데도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고, 혼자 있는 것은 불안과 공포를 더욱 가중시켰을 것으로 독자는 추정한다.

 


 

인간이 집단 생활을 한 후 뛰어난 지능으로 놀라운 발전을 이루지만 '혼자 있기'는 여전히 어색하고 불안한 마음을 떨칠 수 없는 공포감으로 다가오게 되고, 이에 따라 공동 생활을 저해하는 사람은 인간 집단에 의해 혼자 있게 되는 처벌을 주었을 것이란 생각으로 발전한 게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집단 생활은 많은 제약이 있기 마련이어서 오래 되면 깊은 생각을 하지 못하고 뛰어난 지능을 발전시키는 데도 방해가 되기 때문에 스스로 '혼자 있기'를 원하는 사람도 생겨나기 마련일 터다. 이들이 택하는 것은 고독이다. '고독'과 '외로움'은 혼자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지만 이를 혼동해 쓰지 않고 엄격히 구별해 쓴다.

흔히 말하는 깊은 생각을 위해 자발적으로 선택하는 것은 고독이고 원하지 않지만 비자발적으로 홀로 있게 된 경우는 '외로움'으로 표현한다. 언어적으로 구별이 되지만 인간이 혼자 있는 데서 느껴지는 감정이란 것은 다르지 않다. 특히 근대 르네상스를 거치고 학문도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위대한 발명이나 문명은 인간의 '생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아낸 인간은 홀로 있는 것도 그리 큰 불안을 느끼지 않고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더 이상 세상이 있다고 생명에 위협을 받거나 신체적 안전에 위협이 되지 않는 사회적 조건이 성숙됐기 때문이다.

 


 

이 책은 케임브리지와 옥스퍼드대학교에서 역사를 연구한 저자 데이비드 빈센트가 약 400년 동안의 혼자 있기를 최초로 다룬 대중서로, 우리에게 특별한 시간여행을 권하는 책으로 평가된다. 저자는 수 세기 동안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왔고, 사랑했는지를 따라가다 과거의 시간과 현재의 내가 연결되며 흔치 않은 위로를 느끼게 된다는 사실을 증명해 낸다.

이젠 혼자 있고 싶을 땐 누구나 혼자 지낼 수 있지만 아직 감정적으로 외로움이나 불안감을 떨쳐내지는 못한다. 오히려 '대중 속의 고독'을 선택하는 게 낫지 일반적으로 늘 함께 웃고 우는 공동 생활을 더 바란다. 일부 학문을 하는 사람이나 예술을 하는 사람은 혼자 있을 때 영감을 잘 얻고 생각도 깊이 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혼자 있을 때 외로움을 느끼는 것은 생물학적 진화의 결과라고 생각된다. 그래서 혼자 있고 싶지만 외로움을 견디지 못해 혼자 있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요즘 같은 팬데믹 상황에서 일상이 혼자 있기의 연속이지만 쉽지 않다. 함께 웃고 울며 살아가는 인간으로 변화해왔기 때문이다. 지금도 혼자 있기란 인간으로서 해결하지 못한 숙제 같다.

 


 

이 책 『낭만적 은둔의 역사』는 눈부신 범위의 문학과 자료를 아우르며 변화하는 혼자의 역사를 세세히 따라간다. 무인도에 고립됐던 로빈슨 크루소는 속편에서 런던으로 돌아와 자신은 “수많은 인파 속에서 진정한 혼자”가 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사람들 속에서 혼자만의 여유를 갖는 일 또는 집단에서 벗어나 혼자 된 시간을 즐겁게 마주하는 법은 현재까지도 우리의 관심사이다.

그 방편으로 독서, 우표 수집, 자수, 애완동물의 유행부터 단독 세계일주라는 극한의 은둔까지 각종 여가활동이 탄생하고 취미로 자리 잡는 과정이 펼쳐진다. 대표적으로 ‘걷기’가 그 시작이 된다. “프랑켄슈타인 박사님, 전 비참한 혼자가 아닌가요?”라고 슬프도록 외친 괴물이 새봄의 자연에서 한 줄기 희망을 찾듯이, 자연 속에서 산책하기는 여전히 낭만적 은둔의 핵심을 이룬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독자에겐 혼자 있는 시간의 의미가 전혀 새롭게 다가왔다. 『낭만적 은둔의 역사』는 외로움과 고독을 잘 구분하여 홀로인 시간을 건강하게 보낼 용기를 낼 수 있는 힘을 준다. 역사, 사회경제, 심리, 종교, 문화를 종횡무진하는 모험을 함께하며 풍성한 교양과 귀한 재미를 느끼길 바란다.

 


 

코로나 팬데믹이 2년 이상 지속되면서 재택근무, 방역 수칙 등의 전 세계가 안전을 위한 시스템을 마련하고 시행하면서 백신, 치료제 개발 등으로 숨통이 트이지만 아직은 엄연히 팬데믹 상황의 지속이다. 서로 접촉하지 않는 비대면으로 일상을 살아가면서도 소통과 교류를 위해 틈을 뚫고 수시로 밖으로 돌아다닌다. 사람과의 접촉이 그립다는 핑계를 대지만 실은 혼자 있는 상황을 못 견뎌 하는 것 아닐까. 이것이 이 책이 쓰여지는 이유가 되기도 했을 것이라고 독자는 생각해본다. 팬데믹을 자기 내면과 마주할 흔치 않은 기회로 활용하자는 수많은 구호도 수상쩍기는 마찬가지다. 또 소통 부재에서 오는 정신적 우울감, 심할 때 공포감을 치유하기 위해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온 모든 지혜가 총동원되어도 말끔하게 불안과 공포를 없애기에는 역부족인 듯한 느낌도 든다.

아직 최악의 순간에 이르지 않아서일까. 혼자 있기가 그만큼 쉽지 않아 보인다.옛 사람들은 어땠을까. 2000년도 더 된 고질병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이 책의 표현대로라면, ‘혼자 있기’와 ‘함께 있기’ 사이에 인간의 갈등의 역사는 그만큼 길다고 한다. 그런 생각에 따라 혼자 있는 막막한 시간을 견뎌내거나 선용하기 위해, 혼자와 함께 사이에서 흔들리면서, 사람들이 어떤 것들에 매달렸는지를 광범위하게 저자는 추적했다. 18세기 이후 영국의 시와 산문, ‘대중관찰 조사’ 같은 사회학 보고서, 출판문화 등을 훑은 사회문화사 성격이다.

 


 

이 책은 이 같은 '혼자 있기'의 역사를 짚어가며 고독의 다양한 형태들-산책, 등산, 낚시, 바다항해, 뜨개질, 책 읽기, 수도원과 수녀원의 삶, 교도소 독방 등 -에 투영된 삶의 조화로운 가치로서 은둔, 은거, 고독의 변화를 탐사한다. 도시와 노동의 답답함에서 풀려나와 시냇물 거품을 바라보며 들판 목초지를 한가로이 거니는 산책 속의 고독을 노래하는 1820년 자작시 <고독>의 시인 존 클레어의 '군중의 회오리에서 달아나는 달콤함'이라는 고독의 이상성으로 글을 연다. 이를 시작으로 당대 걷기의 유행과 도보 여행, 등반 여행에 이르는 혼자 있기의 갈망의 형태에 스며든 삶의 철학들을 소개한다. 이른 아침의 산보에서 다가오는 평화로운 고독의 울림을 노래하는 워즈워스의 시 <서곡>에서부터 <<보물섬>>의 작가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의 자유의 충족과 열린 마음을 가져오는 도보 철학에 이르기까지 고독한 산책자는 공동체와 하는 삶으로부터의 도피라는 은밀함이 주는 고독의 절대 요구성을 말하고 있다.

그런데 당대에 이러한 혼자 있기에 대한 찬양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뚜렷한 목적 없이 배회하는 사람들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부랑자 단속법이란 것이 만들어지면서 산책이 부도덕한 행위로 간주되었다는 것이다. 당대의 귀족과 고위 관료들에게 평민들의 혼자 걷기는 유약하고 이기적이며 불온한 행동으로 보였기에, "단독 도보는 단체보다 윤리적으로 훨씬 아래다."라며 단체 행동, 공동의 추구에 따라야 한다고 했다고 하니 고독을 즐기기 위한 산책마저 금지 당하던 인간 역사의 추레함을 다시 확인하게 되기도 한다. 결국 코로나 팬데믹은 지나갈 것이며 인류는 살아 남을 것이다.

 


 

서장에서는 ‘고독에 관한 세기의 고전’이 된 책 『고독에 관하여』 이야기를 소개한다. 사색적으로 보이고 싶은 18세기 당대 젊은이들이 품에 껴안고 다닌 이 책은 어떻게 행복한 혼자가 될 것인가에 관해 지금도 유효할 만큼의 엄청난 통찰을 보여준다. 1장에서는 ‘산책’의 역사가 펼쳐진다. 존 클레어, 윌리엄 워즈워스를 포함해 19세기 낭만주의 시인들이 산보의 기쁨을 노래한다. 도보 거리나 속도를 치열하게 경쟁한 신사들을 비롯해 런던 골목골목을 활달히 걸으며 인파 속의 고독을 즐긴 찰스 디킨스 이야기, 귀부인들과 노동자 계층의 서로 다른 산책 생활 등을 엿본다. 2장에서는 혼자 시간을 보내는 ‘여가활동’의 탄생을 다룬다. “이 게임은 생각을 멈추고 종일 시달린 업무를 밤에 떠올리지 않게 해준다”는 기록처럼, 빅토리아시대 독신 여성들이 1인용 카드게임에 몰입한 나머지 최강의 권위자가 되어 안내서를 출판하기에 이른 일부터 낭만과 괴기가 섞인 고딕소설이 유행하여 책 읽기가 위험천만한 오락으로 여겨진 에피소드 등이 펼쳐진다. 3장에서는 매혹의 대상인 수도원과 공포의 대상인 감옥의 뿌리가 된 ‘독방’을 이야기한다. 18세기 독자를 휩쓴 소설 『수도사』나 금서로 지정된 『수녀』, 독방에 감금된 수감자가 신과의 대화를 시도한 감옥의 역사는 은둔이 지닌 어둠과 낭만의 양면성을 들춘다.

4장에서는 지금의 각종 ‘취미’ 산업들이 자리 잡는 과정이 펼쳐진다. 도보와 독서, 수집, 흡연 등 어떻게 사회경제적 특권층의 여가활동은 전 계층의 오락이 되었을까? 2022년 한국에서 ‘TV를 배경으로 켜두고 안 본다’고 대답한 조사결과와 1980년대 영국의 조사결과가 일치한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5장에서는 ‘회복’하는 은둔으로서 행해지는 자연 탐험, 홀로 먼 대양을 항해하기, 최근의 마음챙김 열풍이 지닌 역사적 맥락을 살핀다. 6장에서는 고독과 구분되는 ‘외로움’을 이해하게 돕는다. 찰스 디킨스가 스크루지 영감을 “독거한다”고 묘사할 때만 해도 외로움이란 말은 탄생하지 않았지만, 19세기 ‘멜랑콜리’라는 신조어와 20세기 최고의 영어소설로 꼽히는 『노스트로모』 이야기 등을 통해 외로움이 현대사회의 병으로 오해받는 이유를 밝히고 정작 간과되고 있는 불평등 구조와의 연관성을 짚는다. 7장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이 몇백 년의 역사에 걸쳐 디지털시대 우리의 혼자 있는 시간과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를 돌아본다.

 


 

저자 : 데이비드 빈센트(David Vincent)

 

근대 서양 역사에 관한 석학으로 영국 왕립 역사 학회와 왕립 예술 학회의 회원이다.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수여받고 킬 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강의, 사회사 교수 및 부총장을 역임했다. 옥스퍼드 대학교 및 케임브리지 대학교 예술, 사회과학 및 인문학 연구 센터의 방문연구원으로 초빙됐으며 현재 영국 오픈 대학교의 사회사 명예교수로 재직 중이다. 계급과 문화, 비밀, 사생활, 정치 등에 관한 폭넓은 주제를 연구해온 그는 저서 《낭만적 은둔의 역사》에 18세기부터 현재까지 혼자라는 매일의 일상에 관한 흥미진진한 역사를 최초로 조명하여 ‘숙련된 역사가의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역자 : 공경희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성균관대학교 번역TESOL대학원 겸임교수를 지냈으며 서울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 대학원에서 강의했다. 1987년 시드니 셀던의 《시간의 모래밭》을 시작으로 35년 동안 300여 권이 넘는 책을 번역했다. 현재도 소설, 비소설, 아동서까지 다양한 장르의 좋은 책들을 번역하며 활동 중인 명실상부한 영미 번역의 대가다. 대표 역서로 《비밀의 화원》,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파이 이야기》, 《우리는 사랑일까》, 《마시멜로 이야기》, 《타샤의 정원, 《엔조》 등이 있으며, 에세이 《아직도 거기, 머물다》를 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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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계절 2 - 어느 교수의 전쟁 잊혀진 계절 2
김도형 지음 / 에이에스(도서출판)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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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에세이는 사건 수사 기록, 주인공인 김도형의 사이비 신흥 종교단체에 대한 폭로 및 피해자 입장에서 법적 대응, 도주하는 범죄자를 찾아내는 수사관 같은 행적 등 한편의 추리소설 같기도 하고, 르포 문학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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