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일제 침략사 - 칼과 여자
임종국 지음 / 청년정신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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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로 오랜만에 임종국 선생의 책을 읽었다. 그는 지금의 중년 세대에게는 매우 친숙한 인물이다. 특히 70년대와 80년대 대학을 다닌 사람에게는 꼭 읽어야 할 책을 쓰신 분으로 머릿속에 깊이 새겨진 분이다. 그가 쓴 명저 『친일문학론』 때문이다. 우리나라가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난 해방 이후 나라를 재정립하고 동족 상잔의 어둠을 헤쳐 나오면서 당면한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그야말로 생존 투쟁을 벌일 때 우리의 역사 의식은 얄팍해져만 갔다. 당장 먹고 살기에 바쁜데 지난 일제 치하의 어두운 과거를 다시 들여다볼 시간도 없었다. 이런 틈을 타 친일파들은 일제 치하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해 정ㆍ관ㆍ재계에 남아 있었다. 그들은 여전히 자신의 사회적 지위나 명성, 재산을 지키기 위해 일본과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국민은 먹고 살기에 바빴고, 일부 학생 계층이나 지식인을 제외하고는 제대로 된 우리의 역사를 알 기회가 없었다. 이럴 즈음 임종국 선생의 『친일문학론』은 굉장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물론 제목에서 보여진 만큼 문학가들의 친일 행적을 파헤쳤지만 알게 모르게 연루되거나 우리의 일제 잔재의 청산이 잘못됐다는 인식을 심어주기에는 충분한 무게가 실린 책이었다. 그를 통해서 우리의 어두운 역사가 다시 들춰져 재조명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제기됐고, 친일했거나 그들의 그늘에서 연명했던 사람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 책 『밤의 일제 침략사』는 일제가 우리나라를 칼과 대포로 병탄했다고만 생각했던 우리의 역사가 정치 경제적으로 침탈당한 것뿐만 아니라 철저히 우리의 문화와 민족을 철저히 유린했다는 점을 밝히는 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정사(正史)에 기록되지 않은, 야사(野史)나 유행 등을 따라가다 보면 일제의 우리 민족 침탈이 얼마나 악랄했는지 깨닫기에 충분하다. 다만 이런 사실들은 역사에 기록되지도 않은 일이 대부분이라 정사에 기록된 부분과 떠돌던 말, 그리고 야사에 기록된 부분을 합리적으로, 그리고 실증적으로 기술하기에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고 일제의 만행을 정확하게 파악해야 우리의 어두운 과거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저자의 소신이 힘든 과정을 이겨내고 이 책을 쓸 수 있게 한 원동력이라 독자는 생각한다. 비록 학교 다닐 때 읽어보진 못했지만 지금이라도 접하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의 내용은 우리 의식 깊숙이 침투해 들어온 뿌리 깊은 침략의 얼굴에 쓰인 가면을 벗겨내는 것보다 정확하게 드러내 다시는 되풀이되지 않도록 우리의 힘을 키워야 된다는 자각심과 자긍심을 심어주기에 이 책의 진정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공식적인 조약이나 정책이 정사(正史)로서의 '낮의 얼굴'이라면, 그 이면에 숨겨진 측면을 '밤의 얼굴'이라고 지칭하며 관련된 사건들을 이 책은 파헤치고 있다. 합병 후 36년간, 밤의 세계에서 이루어졌던 일제의 침략과 착취와 억압의 음모, 여자와 술과 노래에 빼앗긴 조선의 저항의식, 수많은 친일매국노들이 탄생 등을 통해 밤에 거행된 일제의 침략사를 살펴본다. 이 책은 서장(들어가는 말)을 비롯해 모두 13장으로 나뉘어 기술돼 있다.

서장 「들어가는 글- 낮의 얼굴 속에 가려진 일제 침략 이면사」

1장 「일본인 기생촌의 발달」

2장 「이리떼들의 침입」

3장 「이토 : 화류계의 제왕」

4장 「소네 : 패륜의 계절」

5장 「데라우치 : 횡령과 침략의 시대」

6장 「하세가와 : 비루먹은 강아지의 장」

7장 「사이토 : 정탐과 모략의 계절」

8장 「야마나시 : 화려한 독직의 시말서」

9장 「사이토 : 에로·그로·넌센스의 시대」

10장 「우가키 : 팽창과 모략의 쌍주곡」

11장 「미나미 : 칼과 계집의 수출업」

12장 「고이소 : 배덕의 장」

13장 「아베 : 패망의 전야」

 


 

이 책은 일제가 가지고 있는 밤의 얼굴을 밝힌다. 한일합방과 동양척식회사 등 일제가 조선을 삼키기 위해 자행했던 일들이 일제가 보여 준 낮의 얼굴이라면 요정과 기생, 여자 등을 동원해서 이 모든 일을 조종한 것은 일제의 밤의 얼굴이다. 쉽게 말하자면 일제 침략의 야사로서 할머니 이야기처럼 재밌게 읽힌다. 우리가 배우는 일제강점기는 딱딱하고 아무런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못한다. 그저 흘러간 과거의 한 페이지로서, 죽어 있는 이야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사 이면에 존재하는 이야기들은 훨씬 더 풍부한 일반 삶에 기대 있다. 말하자면, 낮에 일어난 모든 일들이 한밤 기생집에서, 요릿집에서 돈과 여자를 이용해 달성한 것이었다는 것을 역사는 기록할까?. 매국노를 매수할 때,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올 때, 철도 부설권을 따낼 때… 덕분에 밤에 일어난 일들에 들어간 국채를 담배를 끊고 술을 끊으며 나라를 살리고자 했던 민중의 애국이 ‘국채보상운동’이라는 한 줄 역사로 정리되었다는 것을 역사는 말할까?.

일제는 한 손에는 대포, 한 손에는 기생을 거느리고 조선에 건너왔다. 1906년 3월 초대 총감 이토의 부임행렬 속에는 그의 정부인 화류계 여자가 섞여 있었다. 1894년 청일전쟁 출병 일본군의 진주와 함께 시작된 묵정동에 자리잡기 시작한 공창가는 1904년 러일전쟁 이후로 거대한 인육 시장으로 번성해 갔다. 한때 번성했던 공창가들이 일제로부터 비롯되었던 문화라는 것을 누가 알고 있는가. 합병, 그리고 36년…. 밤의 밀실에선 일제의 침략과 착취와 억압의 음모가 이루어졌고, 수많은 친일 매국노들이 탄생했으며, 악의 꽃들이 거기서 피고 졌으며, 여자와 술과 노래 속에 빼앗긴 자들의 저항의식은 마비되어 갔고, 빼앗은 자들의 오만한 환성은 새벽을 밝혔다. 이렇게 일제의 무서운 침략은 밤에 이루어졌다. 이 밤의 일제 침략사야말로 추잡한 일본인의 진정한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러일 전쟁에서 부족한 전승의 대가를 조선에서 갈취했다. 일본이 갈취한 것은 돈을 비롯해 사람까지 구석구석 훑어갔다. 하다못해 부엌의 숟가락 하나까지도… 일제에게 조선은 화수분이었다. 그렇게 닥닥 긁어가기 위해 그들이 발휘한 수단은 혀를 내두를 만하다. 조선의 왕이나 대신들을 협박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의 여자와 밤의 문화를 조선에 심음으로 그들의 목적은 점점 더 성취하기가 쉬워진 것이다. 조선의 기생은 손님들 옆에 하나씩 앉아서 술을 따라주지 않았던 것을 아는가? 일본인들이 일본요정에서 조선의 지배층을 접대할 때 그들의 문화에 어색해 할 것을 대비해 기생들을 하나씩 옆에 끼고 앉아서 먹여주게 한 것이 그 시작이다.

지금은 우리가 당연히 그런 줄 알지만 그 또한 일제의 철저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알게 모르게 받아들인 일본의 밤문화. 그것은 일제가 조선을 휘두르기 위해 들여온 것이며 그 밤의 자리에서 조선의 운명을 좌지우지했다. 기생들의 치마폭에 이 땅의 민중들이 뼈 빠지게 얻은 노동의 대가를 착취한 일제 주구들은 아낌없이 쏟아 넣는다. 오늘날 한국에서 성행하고 있는 밤 문화는 오로지 일본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이렇게 되자 홍씨와 특별한 사이였던 하기하라는 질투의 불꽃이 끓어올랐다. 홍씨는 1906년 11월 이지용이 특파대사로 도일할 때 동행하면서 명함이 필요하여 홍洪 자에 경卿 자를 붙여 이홍경이라 일렀다가 훗날 이옥경으로 개명한다. 그녀(홍씨, 즉 이옥경)는 남편 이지용이 방탕하여 고종에게 누차 견책될 때 엄비에게 매달려 용서받게 하고 중용되게 했기 때문에, 남편도 그 큰소리를 막지 못했다고 한다. 그녀가 처음에 하기하라와 통通하고, 다시 구니와케와 통하고, 다시 또 하세가와와 통하자 하기하라는 분노와 질투를 참을 수 없었다."(p.57)

 


 

이토 히로부미의 애첩 요시다 다케코의 비파소리 값으로 지불한 1천 원(쌀 200가마의 값)은 이토에게서 차관에 대한 흔쾌한 답을 얻어낼 수 있었지만 정작 그 차관은 조선이 아닌 일본인들의 주머니로 들어갔다. 하지만 차관을 갚는 건 조선의 몫이었고 이 차관 때문에 금연, 금주를 해가면서 그 유명한 국채보상운동을 벌여야 했다. 요시다 다케코가 받은 비파 한 곡조 1천 원의 전무후무한 화대를 뒤치다꺼리하기 위해서, 조선인은 범국민적으로 담배까지 끊어야 했던 것이다. 일본의 국제무역을 담당한 미쓰이 물산의 초대 경성출장소장 오다카키는 게이샤촌 요릿집에서 혼자 도미찜 50인분을 시킨 후 모두 방에 엎은 다음 그 위에서 뒹굴었다. 그리곤 요릿값, 그릇값, 다다미 값까지 몽땅 현금으로 지불하고 밤새도록 술판을 벌였다. 이렇게 흥청망청 쓴 돈은 모두 부정수입으로 생긴 돈인데 현재 물가로 매월 수억 원의 수입이 생겼기 때문이다. 물론 부정수입이니만큼 모든 것은 조선 사람들의 주머니를 털어 나간 것이다. 이렇듯 일본인들이 조선에 와서 여자를 끼고 노는 등에 쓰인 모든 돈은 조선의 피 같은 돈이었고 이 때문에 많은 조선인은 죽어야했고, 만주로 도망해야 했다.

 

"이곳 어뢰면 천성동 마성참에서 산골 밭을 매던 이기영의 처와 이기주의 처 두 여자가 풀밭 속으로 끌려가서 순사에게 벌거벗겨진 채 취조를 받았다. 단오가 며칠 안 남은 1924년 음력 5월 2일, 양력으로 6월 3일 정오 무렵에 일어난 사건이었다."(p.241)

 


 

조선에 파견된 통감들은 모두 첩을 하나씩 끼고 지냈다. 일본에서 멀어졌으니 마음대로 살았다고 할까. 통감들은 저마다 여자 취향이 달랐다. 손발이 큰 여자, 손발이 작은 여자, 어린 여자, 늙은 여자, 무모(無毛)인 여자 등등. 이 취향에 따라 많은 게이샤들이 울고 웃었고, 밤의 힘을 빌려 자신들의 입지를 굳히려는 자들 또한 울고 웃었다. 이렇게 여자를 끼고 노는 데는 돈이 많이 들었다. 첩살림을 하려면 당연지사이다. 게이샤를 사와야 하고, 먹여야 하고, 입혀야 했으니까. 이 돈들은 당연히 조선에서 뜯어낸 돈이었고 일제의 주지육림(酒池肉林)을 위해 존재하는 곳이 조선이었던 때였다.

 

"쾌락을 사는 관리, 쾌락을 파는 게이샤, 그 사이에서 요정재벌로 급성 장해 가던 온갖 출신의 포주·요정주들…. 조선에서의 이권에 눈독을 들 이던 기자 … 대륙낭인 패거리하며, 그자들과 한 통속이 되어 매국의 음 모에 여념이 없던 송병준 같은 망국도배들…. 이거야말로 글자 그대로 백 귀가 야행하면서 남의 나라를 송두리째 꿀꺽하는 도깨비 같은 수작을 뚝 딱 해치우고 말았던 것이다."(p.87)

 


 

저자 : 임종국

 

1929년 10월 26일 경남 창녕군 창녕읍에서 임문호 씨의 4남 3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5년 해방되던 해, 그는 중학교 3학년의 나이로 일본군의 퇴각을 경험했고, 그후 고려대 정치학과에 진학했으나, 끝내 문학으로 돌아와 1959년 [문학예술]지에 시 ‘비(碑)’를 발표함으로써 정식으로 문단에 등단한다. 1965년 한일회담은 임종국 선생의 생애에 전환점을 마련한 중요한 계기로, 당시 그의 나이 37세였다. 그즈음 그의 연구 테마는 문학사회사였다. 이것이 한일회담의 반민족적 행위와 접목되면서 본격적인 친일연구의 계기가 되었고, 그 결실이 『친일문학론』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1980년 그는 건강 문제와 집필에 전념하기 위해서 천안 교외에 외딴집을 지어 요산재라 이름하고 이곳에서 일제 침략사와 친일파들의 배족사를 구명해 나갔다. 83년 『일제 침략과 친일파』 84년 『밤의 일제 침략사』 85년 『일제하의 사상탄압』 86년 『친일문학 작품선집』 87년 『친일논설집』을 차례로 발간했고, 이후 친일문제 연구에 체계를 세우고 총체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친일파 총서’(10권)를 펴내기로 계획했다.

1988년 『일본군의 조선 침략사』를 내놓은 이후, 임종을 불과 8개월 앞둔 1989년 3월에 1994년 완간 계획으로 친일파 총서 10권 중 총론 〈사상 침략과 친일파〉, 〈정치 침략과 친일파〉, 〈해방 이후 친일파〉 등 4권의 집필을 준비하였다. 그러나 그후 계속되는 지병과의 싸움에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1989년 11월 12일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고, 재야사학자인 임종국 선생은 그의 큰 뜻을 후학들에게 남기고 타계하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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