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다의 인문학 - 아주 사소한 이야기 속 사유들
박홍순 지음 / 숨쉬는책공장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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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수다의 인문학』은 우리가 안고 있는 사회 문제 중 법적으로 처리할 수도 없고, 제도적 시스템을 마련하기도 어려운 언어 생활이나 생활상의 문제 등에 관한 것들을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문제들은 대한민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의 문제이기 때문에 법적으로 제재할 마땅한 수단이 없다. 이 때문에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알고도 정부의 공권력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 가령 국민의 언어생활은 법이나 권력으로도 제한할 성격의 문제가 아니다. 또 법적으로 제한하는 일은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헌법에도 위배되는 일이어서 공권력이 미치지 못한다. 다만 올바른 방향으로의 꾸준한 계도와 노력밖에는 달리 단 시일 안에 해결 방법이 없기 때문에 확산 속도가 빠르다는 불편한 점도 있다.

또 일상 중 문화에 관한 문제도 마찬가지다. 즐겁고 유쾌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은 인간이라면 당연한 일이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해 국가가 존재하니만큼 제도적 제재 틀을 마련하는 일도 쉽게 할 수 없다. 정치적 문제도 이미 법적으로 제한할 수 없는 행위 이외에는 다른 제재가 불가능하다. '음모론' 같은 경우 분명 국민 여론을 호도하지만 실체나 음모론을 퍼뜨리는 실체가 파악되지 않는다면 법적 제재가 불가능한 헛점도 있다. 이런 문제는 국민의 건강한 삶을 위해 저해되는 요소임에도 공권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점이 특징적 요인이다. 국가는 그런 음모론이 나오지 않을 사회 유지에 실패한 잘못만 남기 때문이다. 또 이런 문제는 거의 모든 국민들이 알고 있는 문제고, 이런 상태에서 사석에서 '잡담'처럼 나누는 경우가 많아 여론에 호소하는 수밖에 없다. 이런 문제는 결국 국가의 부담이 되기 때문에 당초 이런 일이 발생되지 않도록 못한 책임은 오롯이 국가가 져야 한다.

 


 

이 책의 저자 박홍순은 국민들이 사적인 자리에서 쉽게 나누는 '잡담' 중에서 많이 주고받는 말, '수다'에서 찾아내고 있다. 국민들도 다 알고 느끼지만 올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지 못한 것들-이 책은 특히 '언어' 생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에 대한 올바른 방향 제시이다. 국민의 언어 생활의 건전성을 되찾자는 의미에서 저자는 지적하고 바른 방향으로의 흐름으로 바뀌길 바라는 입장이어서 독자들의 지지를 받을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이 '수다'라는 범주에 일상의 대화, 방송 언어, 특히 인터넷 언어 생활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들은 먹고 사는 생활을 소재로 한 흔한 수다, 문화적으로 흥미로운 현상을 둘러싼 수다, 술자리 안주처럼 다루어지는 정치 관련 수다 등이 대상이다. 저자는 책의 앞 부분 '작가의 말' 「모래알에 담긴 우주」에서 "이런 수다에서 단지 잡담에 머물지 않고 그 이면의 역사적인 맥락이나 사회구조로 이야기의 지평을 확장해보려고 한다. 나아가 철학적으로 깊어진 인식까지 나아갈 가능성을 탐색한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위해 사회의 흐름을 짚으려면 큰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작은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모래알'의 의미부터 짚어본다. 저자는 우리 일상의 큰 것은 본연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기보다는 주로 작은 것을 통해 스며든다고 말한다. "본래 작은 것과 큰 것 사이의 경계는 분명치 않은 법이다. 그런 점에서 영국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남긴 '한 알갱이의 모래 속에서 세계를 보며, 한 송이 들꽃 속에서 우주를 본다'는 문장은 단순히 문학적 수사가 아님"을 강조한다. 저자의 이 말은 설득력과 파급력이 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사실 모래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간단치 않다. 처음부터 왜소한 돌 조각이었던 게 아니다. 해안의 큰 돌에 파도가 쳐서 오랜 기간 부서지고 갈려 작은 모래알이 만들어진 것임을 우리는 안다."(p.6)

 


 

이 책은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일상의 흔한 수다〉, 2부 〈문화 흥미를 돋우는 수다〉, 3부 〈술자리의 수다〉이다. 3개의 각 부에는 사안에 따라 각각 6개의 장을 두어 '수다'를 집중 분석한다. 1부에서는 「오늘도 먹방이 날 유혹해!」, 「요즘 애들 말은 도무지 못 알아먹겠어!」, 「우리가 화장실 선진국이란다」, 「혹시 나도 꼰대인가?」, 「이번 생은 망했어!」, 「뭐 재미있는 거 없나?」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2부에는 「벼룩시장에서 문화를 만나다」, 「텔레비전과 독서에서 서성이다」, 「사랑으로 사나, 정으로 살지!」, 「K팝과 드라마로 국뽕을 맞다」, 「돈만 있으면 한국이 최고야!」, 「씨름 한판 할까?」 등 6개 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또 3부에서는 「음모가 세상을 움직인다고!」, 「정치가 무슨 코미디냐?」, 「권력은 거짓말에서 나오지!」, 「정치평론가 전성시대에 살다」, 「전문가의 말을 믿어야 할까?」, 「너는 진보야, 보수야?」 등이다.

이 책은 여러 SNS를 통해 자주 접하고 또 일상의 이야깃거리로 종종 등장하는 ‘먹방(먹는 방송)’이 어떻게 생겨나게 되었는지 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지 살피며, 로마시대의 만찬과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 축제’, 우리의 오곡밥 풍습 등을 비교해 본다. 또한 현대 한국 먹방문화의 심리적 요인은 무엇인지도 짚어 본다. 이와 함께 역사적인 맥락이나 사회구조, 문화의 흐름 등을 살펴본다. 이 밖에 꼰대, 줄임말, N포세대, K팝, 음모론, 진보와 보수 등 일상의 수다 속 여러 소재에서 인문학, 철학적 이야기로 뻗어간다. 인문학 또는 철학이 너무 먼 이야기인 듯하고 어렵다고만 느껴진다면 ‘아주 사소한 이야기 속 사유들’을 담은 이 책 『수다의 인문학』과 함께하기를 권한다.

 


 

먼저 1부의 내용은 우리의 과시적 '먹방' 문화를 지적하고, 미국 인류학자 마빈 해리스의 저서 『문화와 수수께끼』를 인용, 로마 제국의 향락적 먹방 문화와 태평양 연안에 사는 콰키우틀족의 '포틀래치 축제'는 과시와 경쟁이 있기는 하지만 원주민들간의 경제적 조건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어려움에 닥친 주변 사람들에게 음식을 분배한다는 의미가 더 크다고 말한다. 포틀래치 축제의 나눔으로서의 먹방 문화를 비교한다. 이에 비해 우리의 먹방 문화는 길거리 음식이나 배달 음식처럼 서민도 충분히 즐길 수 있는 음식으로 컨텐츠를 만들어 부의 정도와 관계없이 모든 계층에서 향유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이 주장은 독자도 어느 다른 책에서 접하지 못한 신선한 설득력을 준다. 이 점에서 우리의 먹방문화와의 차이점을 설명하기도 한다.

책에 따르면 인간의 세 가지 본능인 수면욕, 성욕, 식욕 중 수면욕과 성욕은 우리나라에서 개인이 많이 억제하고 감수해야 하는 욕구로 저자는 강조한다. 이에 따라 수박 서리, 오곡밥 서리 등 나눔으로서의 '서리 문화'가 존재하지만 현대 우리 사회에서 지금 유행하는 먹방문화는 수면욕과 성욕을 억압당하고 있는 사회적인 집단 신경증 증상이라고도 파악한다.

먹방문화가 유행하는 현상을 자연스럽게 여기는 견해가 있다. 식욕이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이므로 먹을거리에 끌리는 게 당연하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게다가 복잡하고 고단한 세상살이에서 잠시나마 벗어나기 위한 자기만족의 행위이니 문제될 게 없다는 논리다. 그렇다면 먹방 신드롬은 비판적으로 볼 필요가 없을까?(p.15)

 


 

저자는 우리의 언어 생활 중 최근 유행하는 신조어에 대한 통사적 고찰도 내놓는다. 이 장 「요즘 애들 말은 도무지 못 알아먹겠어!」는 독자도 가장 공감하는 부분이다. 저자는 얼마 전 10대 중반 정도로 보이는 한 학생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탄 적이 있다고 한다. 우연찮게 함께 탄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 학생은 친구와 통화하는 바람에 괜히 엿듣는 것 같은 기분에 조금 찜찜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괜한 걱정이었다고 밝힌다. 그 학생의 통화 내용 중 절반 이상을 못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암호 같은 단어에다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운 신조어가 수시로 등장했다. 사실 그날의 경험이 특별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사람들과 대화하거나 인터넷을 보다가 신조어 때문에 당황하는 일이 부쩍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그 학생이 친구와의 대화 도중 '엘베'라는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엘리베이터의 준말이었다니. 저자는 텔레비전에도 자주 등장하는 '현타'를 검색해봤더니 '현실 자각 타임'의 준말이란 것도 알게 됐다. 사실 이 말은 독자도 텔레비전에서 자주 나오기에 그냥 감으로 '현실 타파'의 뜻인가보다 하고 막연히 생각해 왔는데 이 책을 보고 '현타'의 정확한 뜻을 알게 됐다.

그래도 '갑분싸(갑자기 분위기 싸하다)', '낄끼빠빠(낄 땐 끼고 빠질 땐 빠져라)', '갑툭튀(갑자기 툭 하고 튀어나온다)'라는 말은 어찌어찌 뜻을 파악할 수도 있는데 '텅장·열폭·솔까망·즐·샵쥐·본캐·문찐·틀딱, 등은 검색해보지 않고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단 말에 실소를 금할 수 없다. 이 가운데 독자 역시 처음 들어본 단어들의 퍼레이드다. 텅장은 텅 빈 통장을 줄여서 통장에 돈이 없거나 부족한 상황을 의미한다. 열폭은 열등감의 폭발, 솔까말은 솔직히 까놓고 말하는 것이다. '즐'은 꺼져, 닥쳐와 같은 의미이며, 샵쥐는 시아버지를 빠르게 말하면 비슷한 발음이 나오는 데서 비롯됐고, 본캐는 게임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관리한 가장 중요한 캐릭터를 뜻한다. 상대를 비하하는 의미의 부정적인 신조어도 있다. 문찐은 문화 찐따를 줄여 부르는 것으로 유행에 느린 사람을 지칭한다. 틀딱은 자신의 나이를 빌미 삼아 사람들을 훈계하거나 공공장소에서 예절을 어기는 노년층을 비하하는 말인데, 틀니를 딱딱거린다라는 표현에서 생겨났다.

 


 

저자는 또 '꼰대'라는 의미를 우리의 지난 역사 속에서 찾아내고 지적하기도 한다. 특히 「이번 생은 망했어!」 장에서는 사회의 흐름을 꼬집고 있다. 덴마크 최초의 여성 화가로 꼽히는 베르타 베그만의 〈절망〉은 그림 속 여인의 몸과 분위기만으로도 그림의 주제를 충분히 묘사한 점을 들어 우리 사회 분위기를 비유하고 있다. 이 장의 제목이 된 '이번 생은 망했어!'는 '이생망'으로 표기하고 있다며 지금 한국 사회에서 이 그림과 가장 잘 어울리는 유행어로 꼽고 있다. 책에 따르면 처음에는 20~30대 젊은 층에서 주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국민적인 유행어로 자리 잡았다. 자기 나름대로 아무리 노력해도 도무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 상태를 표현할 때 쓰인다. 다시 태어나지 않는 한 어려운 처지가 바뀔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절망을 담고 있다. 워낙 보편적으로 쓰이다 보니 이제는 자기 얼굴이 마음에 안 들거나 기대한 만큼 성적이 나오지 않을 때도 불쑥 튀어나온곤 한다.

이때도 본래의 의미는 여전한다. 한국처럼 외모를 능력으로 여기는 '외모 지상주의'가 판을 치는 사회에서는 비호감 얼굴과 지나치게 작은 키 등에 절망을 느끼기가 더욱 쉽다. 성적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어느 대학을 가느냐가 인생을 결정하는 입시 지옥이기도 하다. 성적은 초등학교와 중학교부터 누적되어온 결과이기에 마음을 고쳐먹고 한두 해 노력한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다. 절망적인 심정이 되어 이생망을 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자신에게 닥친 절망의 감정을 표현하는, 이생망과 비슷한 유행어가 있다. 우리에게 십여 년 전부터 익숙한 '삼포세대' 혹은 'N포세대'가 그렇다. 삼포세대는 연애·결혼·출산을 포기했다는 의미다. 여기에 취업과 내 집 마련까지 포기한 '오포세대', 건강과 외모 포기도 더한 '칠포세대', 인간관계와 희망도 포기했다는 '구포세대'까지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포함하여 N포세대라고 부른다.

 


 

글이 말의 기능을 수행하려면 속도가 중요하다. 가장 좋은 방법은 글을 압축하거나 긴 내용을 대체하는 짧은 기호를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인터넷 언어를 포함한 대부분의 신조어는 글을 말처럼 빨리 쓰고 싶은 욕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신조어를 사용하면 효율적인 의사소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길고 복잡한 설명 없이, 짧은 글로도 의도한 내용을 전달할 수 있다.(p.31~32)

 

‘사랑으로 사나, 정으로 살지!’는 적어도 사랑의 포기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나? 하지만 사랑을 순간의 욕구로 보고, 그러한 의미에서 사랑을 불신한다는 점에서는 더 비극적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과학의 이름으로 정당화해 사랑을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으로 가르친다는 점에서 개인을 넘어 사회적인 비극이 되기도 한다.(p.112)

 

저자 : 박홍순

 

글쓰기와 강연을 통해 사람들을 미술과 인문학으로 안내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앞만 보고 전력 질주하느라 성찰의 시간을 잃어버린 사람들이 고전과 미술 등을 매개로 인문학을 벗으로 삼도록 하는 데 애착을 갖고 있다. 특히 인문학이 생생한 현실에서 벗어나는 순간 화석으로 굳어진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일상의 사건과 삶에 밀착시키는 방향으로 글을 써왔다.

그동안 쓴 책으로는 서양 문명의 근간이 된 그리스 신화를 통해 새로운 인문학적 사유를 전달하는 『인문학으로 보는 그리스신화』, 옛그림과 선현들의 글로 오늘의 자신과 세상을 돌아보도록 돕는 『옛그림 인문학』, 인문학적 시각으로 방대한 서양 미술사를 풀어내며 진정한 미술 감상의 즐거움을 선사하는 『지적 공감을 위한 서양 미술사』, 다양한 소재로 인문학적 관점을 기르는 『저는 인문학이 처음인데요』, 『헌법의 발견』, 『일인분 인문학』 외 다수가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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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서 만나자
신소윤.유홍준.황주리 지음 / 덕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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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을 얘기하면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떠올린다. 70~80년대 서울 인사동은 그 이전 ‘명동‘ 자리를 이어받아 강남 시대 전까지 한국의 전통문화와 예술인의 일상을 책임졌고, 그때의 예술인들은 오늘의 인사동을 만들었다. 인사동은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국 문화의 거리 1번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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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에서 만나자
신소윤.유홍준.황주리 지음 / 덕주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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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인사동에서 만나자』는 80~90년대 과거의 인사동을 지켜내 오늘의 전통문화동네로 가꾸어온 문화계 인사 35명의 글을 모은 에세이다. 오늘날 인사동은 우리 전통 문화의 거리와 동네로 상징되고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한국 문화의 자부심을 지켜낸 주역들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사람들이 글의 주인공들이다. 그들이 기억을 더듬으며 빚어낸 에세이는 짧지만 짙고 큰 울림이 있다. 특히 중년 이상의 독자들에게는 어려웠던 시절 정겹고 따뜻한 아날로그 감성을 되살려줌으로써 코로나 팬데믹으로 지쳐가는 독자들의 심신의 피로감을 씻어주는 데 큰 몫을 할 것으로 독자는 기대한다. 35명의 저자들은 당시 인사동을 제집 드나들 듯 다니면서 지금은 작고해 이름만 남아 있는 인사동 지킴이들의 기억도 끄집어 인사동 제자리 찾기에 한몫을 더하고 있다.

이들 저자들이 꺼낸 기억의 편린들은 제각기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끈끈한 정과 문화 공유 인식의 감성을 하나로 모을 수 있어 더 의미가 있다. 이 책의 대표 저자인 인사전통문화보존회 신소윤 회장, 유홍준 교수, 서양화가 황주리를 비롯해 소설가, 시인, 화가, 조각가, 의사, 회사 대표, 정치인, 배우, 가수, 카페 대표 등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들려주는 에피소드는 유쾌하면서도 뭉클하고 따뜻한 감동을 전해준다.

 


 

이 책은 글과 더불어, 수십 년간 인사동 사진을 찍어온 사진작가 김수길과 조문호가 그 시절 인사동 모습을 담은 귀한 사진을 보태 읽는 이의 눈을 즐겁게 한다. 갤러리 씨네 노광래 대표가 이 책을 기획했다고 한다. 그는 인사동에 관해서라면 모르는 게 없는 인사동 터줏대감이자 산증인이다. 덕분에 한 권의 책에 35명이나 되는 여러 저자의 글을 담을 수 있었다고 밝힌다. 인사동 이전 한국전쟁 직후 명동의 역할이 인사동으로 옮긴 것 같은 느낌에 전통문화의 동네라는 인식도 더해지면서 오늘날 인사동은 한국 고유 문화의 색채가 가장 강한 동네로 남아 있는 데는 이들 문화계 인사들의 숨은 공로가 있었음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다.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강남으로 옮기기 전까지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후반까지는 종로, 특히 인사동이 그 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특히 수요일이면 신작을 내걸고 사람들을 맞이하는 갤러리들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고 한다. 오래된 고서점, 골동품 가게, 전통찻집, 술집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국적 불명의 물건들이 넘치고 전통가옥 대신 번듯한 건물이 하루가 다르게 생겨나고, 몇 달씩 술값을 달아놓아도 크게 나무라지 않던 푸짐한 인심은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최근 미술품에 대한 사회적 관심도가 올라가면서 인사동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책을 들고 보물찾기하듯 인사동 구석구석을 탐색하며 옛 흔적을 찾아보고, 아직도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가게들에 들러 차 한잔, 따뜻한 밥 한 그릇 먹어보면 어떨까. 여기 기웃 저기 기웃 어슬렁어슬렁 걷는 것만으로 마음이 풍성해질 것이다. 인사동을 잘 모르는 사람들도 '인사동'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통의 거리, 그림이 가득한 예술의 거리이다. 심지어는 외국인들도 '한국전통문화'의 요람으로 인사동을 찾는다. ‘갤러리’라는 이름으로 변화한 그림을 전시 판매하는 곳도 예전에는 ‘화랑’이라 불렀다. 인사동은 우리나라 화랑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다. 당시 인사동 단골손님(?, 어쩌면 당사자는 주인이라고 할지도 모른다)인 유홍준 명지대 교수(미술평론가)는 화랑이 들어서기 시작할 무렵의 인사동 분위기를 글로 전하고 있다.

"1970년대 인사동에는 많은 상업 화랑들이 들어섰다. 1970년 4 월 현대화랑이 인사동에 문을 연 것은 우리나라 화랑 역사의 시작이다. 그때만 해도 화랑이라는 단어에 익숙지 않아서 당시 한 신문에서는 ‘그림을 판답니다’라고 소개했다. 마치 1980년대에 ‘이태원에 피자집이 생겼답니다’ 같은 기사다. 화랑이 생기기 전 인사동엔 고서점과 함께 통인가게, 고옥당을 비롯한 고미술상, 구하산방으로 대표되는 필방, 박당표구, 상문당, 동산방 등 표구점들이 자아내는 고미술의 향기가 풍기고 있었는데, 여기에 상업 화랑이 들어서면서 현대미술이 더해지게 된 것이다.(p.83)

 

 

이들 인사들은 화랑 이야기를 비롯해, 카페, 찻집, 술집, 밤거리 등에 얽힌 ‘그때 그 시절 그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준다. 맘 잡고 하기 시작하면 밤새워 얘기해도 다 못할 것이라고 한결같이 입을 모은다. 그만큼 인사동을 자주 드나들었고, 깊이 관여하고, 많은 만남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요즘 젊은 세대 10대는 물론 20~40대들까지도 인사동 이야기를 마치 옛날 조선시대 얘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사실은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는 의미가 아니라, 오래된 문화 이야기라고 해야 더 정확하게 들릴지 모르겠다. 이 책 『인사동에서 만나자』를 읽으며 중년 이상의 사람들은 옛 기억을 소환해 살포시 미소 짓게 될 것이고, 젊은이들은 인사동의 옛 모습에 대한 궁금증과 호기심이 생겨날 것이다. 이 책을 통해 과거의 인사동, 현재의 인사동의 모습을 살펴보고, 미래에도 지속 가능한 인사동을 위해 인사동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지길 희망한다고 이 책의 저자들은 말하고 있다.

이만주 춤비평가이자 시인은 「우리들의 인사동 시대」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사동에는 개점 100년이 다가오는 서울의 오래된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다. 1924년 문을 연 ‘통인가게’는 지금도 인사동의 얼굴로 한국의 고미술품부터 예술품에 가까운 생활 소품까지 다양한 물건을 팔고 있다. 지금은 화랑까지 운영하고 있다. 필방으로는 1913년 진고개에서 개점하여 명동을 거쳐 인사동으로 옮겨온 ‘구하산방’(1920년 무렵 개점했다는 설도 있음)과 1932년 문을 연 ‘명신당필방’이 꿋꿋이 버티고 있다. 1934년 개업한 고서적상 ‘통문관’은 또 하나의 인사동 얼굴이다."(p.17)

 


 

인사동에는 이처럼 백년가게도 많다고 한다. 1902년 대한제국 시절 개업한 이문설농탕, 1913년 문을 연 우리나라 최초의 필방인 구하산방, 1919년 시작한 낙원떡집 역시 100년이 넘는 역사를 자랑한다. 서울시 유형문화재인 승동교회는 조선시대 교회 건물로 3·1독립운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인사동의 또 다른 대표명사라 할 수 있는 작은 찻집 ‘귀천’에 들러 고 천상병 시인과 부인 목순옥 여사의 향기도 한번 느껴보길 권한다.

보물찾기하듯 인사동 구석구석 명소를 찾아보자. 갤러리, 고미술, 한지·필방·표구, 공예, 카페·식당, 복합문화공간으로 나누어 업종별로 색깔을 달리하여 한눈에 보기 쉽게 표시하였다. 이 책에 등장하는 장소는 총 80곳이다. 이 책의 77페이지에는 인사동 곳곳에 숨어 있는 표지석을 모아두었는데, 표지석 찾는 재미도 쏠쏠할 것이다. 268~269페이지에는 화장실 벽면을 가득 메운 낙서들을 실었다. 허름한 가게에 들어가 화장실 낙서를 찾아보자. 인사동 거리를 탐방한 뒤 시간이 남는다면 인사동 건너편에 자리 잡은 운현궁 산책을 해보자. 또 다른 즐거움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저자들은 갤러리, 고미술품점, 필방, 카페, 식당 들이 없다면 인사동 거리는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인사동 거리를 만든 가게들과 거리를 사랑하는 사람들 모두가 인사동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은 인사동의 오늘을 만들었다는 데 작지만 한몫한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긍지이기도 하다. 이 책은 저자들의 글과 별도로 80군데 갤러리, 고미술품, 카페 등의 상세 정보를 실었다. 인사동을 잘 모르는 독자들을 위해 가이드도 할 셈이란 말이다. 책을 읽다 마음에 드는 곳이 있으면 한번 들러 보기 독자들에게 바란다는 마음에서다. 갤러리에 들어가 그림을 구경하는 것도 좋고, 전통찻집에 앉아 느긋하게 향긋한 차 한잔 마셔보는 것도 좋다. 필방에 들러 붓 한 자루, 한지 한 장 사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일 것이다.

 


 

사실 인사동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어슬렁거리며 거리를 걷는 것만으로도 눈과 귀가 풍요로워진다. 인사동에서는 언제 가더라도 버스킹을 하는 예술가들을 만날 수 있다. 보물찾기하듯 인사동 구석구석 명소를 찾아보자. 최영남 화가 겸 수필가는 「수요일의 인사동」에서 버스킹 문화가 시작된 곳이라는 소개와 함께 인사동의 변화에 아쉬움도 있는 듯 느낌을 표현한다. "그동안 인사동은 재화보다 문화 예술을 중시했던 예술인들의 아지트였다. 가난하지만 개의치 않거나, 가난하다는 사실조차도 인지하지 못한 채 정신적 풍요를 누리는 예술인들이 모여 예술을 논하던 곳이었다. 그들의 아지트가 하나둘 사라지고 현대적 상업 시설이 새로 들어서는가 하면, 아예 허름한 건물이 통째로 사라지고 큰 건물이 번듯하게 들어서기도 했다. 일일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화랑, 표구사, 필방과 골동품 가게 등이 없어지고 천연 염색이 아닌 옷가게와 중국산 기념품 가게, 짧은 시간만 머물러야 하는 식당 등은 늘었다. 나무 기둥이 손님들의 손자국으로 반질거리던 전통찻 집이 없어진 대신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깔끔한 카페는 늘었다. 인사동이 변한 것을, 변해가는 것을 나라고 모를 리가 없다. 다만 나는 인사동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해 가는 모습을 늘 지켜보았기에 놀랄 일이 없었고, 오랜만에 인사동을 찾은 그는 몇십 년 만에 흰머리로 뒤덮인 친구를 만난 양 변해버린 모습에 놀랐을 뿐이다."(p.131~132)

이제 우리들이 변했듯 인사동도 변했다. 낡았던 인사동은 젊은 옷으로 갈아입어 카페와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며 골목의 풍경이 바뀌었다. 그러나 지금도 그곳엔 여전히 시와 그림과 조각들이 있고, 앞으로도 문학과 예술을 사랑하는 낭만들이 각자의 표정으로 새롭게 연출되며 인사동의 이야기는 계속해서 진화할 것이다. 그래서 인사동은 우리들의 인생동(人生洞) 아닐까.(p.226)

 


 

"인사동에 가면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도 들여다보고, 사지도 않을 한지 부채를 폈다 접었다, 한복 치마를 요리조리 들여다보고 하는 등 눈이 호사를 누린다. 어디선가 이름을 부르면 나도 모르게 고개가 휙 돌려지고, 아는 얼굴들이 금방이라도 나타날 것 같은 생각에 혼자 씨익 웃는다. 그러다 우연히 진짜로 마주치면 반가워 폴짝폴짝 뛰기도 하고 팔짱을 끼기도 하면서 난리법석이다. 누구나 한 번쯤은 괜스레 어슬렁거리고 싶은 인사동은 옛날과 달리 많이 변했다지만 그래도 그 거리, 그 골목, 그 추억은 잊을 수 없다."(p.251~252) - 장순향(민중춤꾼) 「인사동에서」

 

저자 : 유홍준

194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미학과,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석사),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동양철학과(박사)를 졸업했다. 1981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으로 등단한 뒤 미술평론가로 활동하며 민족미술인협의회 공동대표,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 등을 지냈다. 1985년 2000년까지 서울과 대구에서 ‘젊은이를 위한 한국미술사’ 공개강좌를 십여 차례 갖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를 맡았다. 영남대학교 교수 및 박물관장, 명지대학교 교수 및 문화예술 대학원장, 문화재청장을 역임하고, 현재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제주 추사관 명예관장도 맡고 있다.

평론집으로 『80년대 미술의 현장과 작가들』, 『다시, 현실과 전통의 지평에서』, 『정직한 관객』, 답사기로 『나의 문화유산답사기』(국내편 1~10, 일본편 1~4), 미술사 저술로 『조선시대 화론 연구』, 『화인열전』(전2권), 『완당평전』(전3권), 『유홍준의 한국미술사 강의 1』 『추사 김정희』 등이 있다. 한국간행물윤리위원회 저작상(1998), 제18회 만해문학상(2003) 등을 수상했다.

 

저자 : 황주리

화가. 서울에서 태어나 이화여대 서양화과, 홍익대 대학원 미학과, 뉴욕대 대학원을 졸업했다. 32회의 국내외 개인전과 200여 회의 단체전에 참가했으며, 석남미술상(1986)과 선미술상(2000)을 수상했다. 화려한 원색과 열린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특한 회화세계를 구축한 신구상주의 계열의 가장 주목받는 화가다. 그에게 있어 이 세상의 모든 사물들은 그림이 그려지기를 기다리는 빈 캔버스다. 캔버스 외에도 안경과 돌과 오래된 목기 등에 그린 그림들과 화가의 시각으로 써 내려간 독특한 문구들은 사라지는 순간순간들을 지금 여기에 못 박아두는 ‘시간채집’이다.

다양한 소재와 장르를 통해 도시적 인간의 내면세계와 인간 상황을 시적 언어로 그려내며, 그림뿐 아니라 삶의 본질을 날카롭게 꿰뚫는 산문들과 그림소설까지, 그의 글들 또한 읽는 이들의 마음에 짙은 여운을 남긴다. 저서로 산문집 『날씨가 너무 좋아요』 『세월』 등이 있고, 그림소설 『그리고 사랑은』 『한 번, 단 한 번, 단 한 사람을 위하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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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엣과 줄리엣 - 희곡집 에세이
한송희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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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로 바뀌었지만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서양 문학의 원류는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꼽았었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문자로 적어 후세에 전한 서사시가 그것들이다. 호메로스의 사망연도는 부정확하지만 B.C. 750년 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비해 〈길가메시〉는 B.C. 2,750년 경의 작품으로 밝혀져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서 인정받았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작품이다. 기원전 2750년경에 실재했던 우루크의 왕인 길가메시에 관한 다양한 신화를 종합해 하나의 장대한 서사시로 엮은 것이다. 수천 년 전 작품이지만, 오늘까지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즉, 죽음의 문제와 그 극복의 과정이다. 길가메시는 긴 여정의 끝에서 불멸의 비결을 놓치고 말았지만, 다시 우루크로 돌아가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길을 펼쳐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류야 어느 것이든 서양 문학은 모두 서사시의 형태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그것들을 원형으로 보고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소설로, 혹은 연극으로, 요즘은 영웅들의 스토리로 각색하고 발전시켜 왔다. 즉 서양 음악의 원형으로서 이후 모든 예술에서 더욱 발전시켜 온 셈이니 말 그대로 서양 문학의 텍스트 역할을 해온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문학에 국한한 범위에서만 보더라도 다양한 문학 장르 중 시가 가장 먼저 문자로 기록되었고, 이후 연극을 위한 희곡으로서 모양을 갖췄으며 서사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풍부해지면서 소설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이로써 문학은 시-희곡-소설 순으로 발전되어 더 뒤늦게 발전 과정을 함께한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서양 문학의 원형을 꺼내는 이유는 희곡이 소설보다 먼저 나온 형식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이유는 독자로서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지만 소설의 기원은 고대부터 내려온 신화, 서사시 등의 이야기임을 감안할 때 서양의 그리스 신화나 한국의 주몽 신화 등의 신화에서부터 일리아드, 동명왕편 등의 서사시가 소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 근대적 소설의 바탕이 된 것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기사들의 영웅담 등을 소재로 한 로망스이다. 특히 로망스에서 프랑스 남부의 기사 영웅담은 환상적으로 미화된 기사가 주인공이 되어, 권선징악의 주제를 이끌며 낭만적인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이것들이 여러 방향으로 변형되어, 현재 환상적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뜻하는 로맨스라는 장르로 남았다. 한국의 춘향전도 이러한 성격을 다분히 지녔다. 근대 소설을 뜻하는 영어 Novel은 중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노벨라(이탈리아어: Novella)에서 온 것으로 이 말은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로망스와 달리 노벨라는 데카메론과 같이 현실의 세태를 반영한 이야기가 특징이다.

오늘날 소설은 문학의 가장 활발한 장르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의 대중적 인기에 편승해 소설이 가장 독자들에게 어필되는 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예부흥 이전까지는 서사는 희곡으로 그 모습을 꾸준히 반복 재생되며 이어왔고, 윌리암 셰익스피어에 와서 절정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물론 독자가 학교나 기타 문학가들에게 배운 내용은 아니지만 문학 책을 읽어온 독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니 '주장'이고 '가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소설이 이처럼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출판이 가능한 인쇄술의 발달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독자는 믿고 있다. 희곡은 말 그대로 연극을 위한 대본집이니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쉽게 말해 연극 연출자나 배우의 이해 능력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장소로도 한계가 있고, 일반 사람들이 직접 가서 보기에는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희곡의 서사가 로맨스, 비극 등이 권력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관객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귀족게급 이상이었고, 또 문학적 수용도 대부분 귀족이나 왕족, 유능한 학자을 대상으로 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 역시 르네상스 이전이어서 그의 문학적 능력이 희곡을 통해 발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이나 스토리가 너무나 독창적이어서 소설로 번안되어 수많은 소설에서 번역돼 나오고, 차용해 발전시키는 등 문학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해온 점이 그를 세계의 문호라는 칭호를 붙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거로 짐작된다. 하지만 소설이 책으로 등장한 이후부터는 희곡이 오히려 쇠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문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소설은 막강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인 작가들이 연극 연출자의 머릿속에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나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배우들의 심리, 무대 배경, 스토리 전개상 필요한 사항을 모두 작품 안에 설명해 주기 때문에 독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어 인기를 끌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현대에는 희곡이 출판되어 나온 경우가 드물다.

 


 

이처럼 희곡 쇠퇴기에도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경우 대히트를 치는 작품은 소설로 다시 쓰거나, 가끔은 희곡을 그대로 출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무대 위의 연그보다는 아무래도 독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수용되기 힘들어 소설처럼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판계에서 꺼리는 출판물이 되는 상태다. 이 책 『줄리엣과 줄리엣』은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희곡은 '여성퀴어극'으로 전례 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무대에 올린 연극 희곡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았다.

연극 상연 때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포토에세이로 펴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줄리엣과 줄리엣』을 16세기 베로나의 두 여성 ‘줄리엣 몬테규’와 ‘줄리엣 캐플렛’의 사랑 이야기로 변주한 이 작품은 2018년 산울림 소극장의 고전극장 프로젝트로 초연되었다. 이때 전석 매진과 기립박수 행렬, 관객들의 연이은 n차 관람이라는 대성황에 힘입어 2021년까지 총 네 번의 공연과 온라인 중계를 통해 앵콜이 이뤄질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이기쁨 연출가는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으로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수많은 지면과 KBS 등 언론은 이 작품을 “21세기의 새로운 고전(Classic)”이라 부르며 “셰익스피어의 문학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참신하다” “호기심의 한계치를 넘어서게 한다” “여전히 사랑하며 타협하지 않는 점이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와 같은 찬사를 내놓았다.

2021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공연을 마친 이 작품의 대본집을 구하는 글이 지금도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인기를 실감나게 한다. ‘텍스트가 너무 아름다운 연극’ ‘갓극 못 본 사람 없게 해주세요’ ‘줄&줄 다시 와야 해요’라는 평이 후기란을 수놓듯 그 여운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이 책 『줄리엣과 줄리엣』 희곡집 에세이는 이러한 마음에 보답하고자 정성껏 준비된 책이다. 책에 실린 연극 대본은 가부장적 어머니 캐플렛과 젠더퀴어 승려를 출연시키며 가장 높은 완성도로 호평을 받은 4연(2021년) 판이다. 독자는 아름다운 명대사의 향연 속에서, 세상의 반대를 넘어 활자 위로 날아오르는 두 여성의 지극한 사랑에 가슴이 온통 저릿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에세이는 팬들에게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확장된 작품세계를 안겨준다. “우린 줄리엣과 줄리엣을 할 거야”라는 연출가의 한마디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실 두 여성의 사랑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는 상상을 펼친 ‘첫’ 순간, 회의적인 반응과 의문들 앞에서 용기를 잃을 뻔한 저자에게 힘이 돼준 단 한 줄의 대사, 연극영화과 시절 학내 오디션을 치렀던 그 셰익스피어와 작가로서 다시 마주할 때의 긴장을 거쳐, 마침내 극이 대중과 만나 빚어낸 색색깔의 폭죽 같은 반응들에 울고 웃는 아름다운 과정을 함께할 수 있다. 또한 배우로서의 저자는 다른 캐릭터도 아니고 ‘줄리엣’을 연기해야 하는 여주인공의 고뇌로, 심장 윤곽이 그려질 만큼 가슴이 쿵쾅대는 공연 직전의 백스테이지로, 손깍지 낀 관객 줄리엣들을 무대 위에서 지켜보는 뭉클함을 에세이로 담아내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무엇보다 이 극을 세상의 모든 줄리엣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하나의 ‘기도’로 여기며 쓰고 연기했다는 저자의, 두려움을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보는 경험은 실로 감동적이다.

이러한 작품의 열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1열에서 관람하는 것 이상으로 생생한 현장사진과 배우들의 감정 연기를 담은 연습 모습, 책에만 실린 독점 비하인드 컷까지 『줄리엣과 줄리엣』 희곡집 에세이에 정성껏 담았다. 두 줄리엣 위로 마지막 조명이 사윌 때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할 소장본으로 이 책을 펴냈다. 이 책이 ‘줄앤줄’의 팬들과 여성퀴어 서사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를 가슴 뛰는 영원의 시간으로 안내할 선물이 되기를 독자는 기대한다.

 

꿈을 모두 이루어야 해? 이미 네가 꾸었던 꿈은 전부 이뤘는데 뭐가 더 필요해?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돈? 더 좋은 실력? 필요해? 필요하다면 꿈꿔. 이루어지지 못해도 뭐 어때. 움직여. 이루기 위해 움직여. 움직이다 보면 어디로든 갈 거야. 그곳이 네가 꿈꾸던 곳이 아닐지라도.(p.291)

 

 

“네가 나의 집이야”라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명대사 역시 있는 그대로의 나이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의 감동을 통해 심장을 적신다. 그래서인지 ‘그저 감사하단 말밖에’ ‘함께여서 행복했다’처럼 〈줄리엣과 줄리엣〉 관객리뷰에는 고맙고 행복한 눈물바다가 넘실댄다. 이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여운을 새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퀴어 작품은 새드엔딩이라는 불만스러운 기존 공식에 맞서기라도 하듯 〈줄리엣과 줄리엣〉은 그 슬픔의 깊이를 곡진히 그려가면서도 두 사람의 사랑을 꼭 감싸안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퀴어라면 한 번쯤 봐야 하는 작품’ ‘엔딩 연출이 돌았어요’라는 평을 이끌어냈고, 새로운 명작의 탄생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크나큰 기쁨을 선사한다.

영화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은 레즈비언을 ‘비극적 결함’에 빗대도 이상하지 않은 이 한국사회에서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은 불세출 로맨스의 원형 같은 이야기를 가장 낭만적이고 동시대적으로 풀어냈다며 칭송했다. 어쩌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원작보다도 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지워지지 않을 이야기, 멈춰지지 않을 이 사랑을, 독자들의 마음과 책장 한 곳에 간직함으로써 두 줄리엣 옆에 언제까지나 함께 서준다면 좋겠다.

 

“당신은 당신일 뿐이에요. 줄리엣. 나와 같은 이름 그대로 거기 있어요.”

 


 

‘줄리엣과 줄리엣’은 한송희의 세계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배우이자 극작가, 소설가로도 활동하는 창작자 한송희는 무엇이든 ‘진짜’로 만들어버린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헤테로 로맨스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짜로 만들고, 온 세상의 방해 속에 사랑한 두 여성이 진짜라고 말한다. 줄리엣 몬테규가 되어 줄리엣 캐플렛을 진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동료들과 만든 무대 위의 순간을 관객들이 빠져드는 진짜 세상으로 만든다. 두려워할지언정 포기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한송희의 용기는 아름답게 빛난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일까, 팬으로서 그의 연기와 글을 보며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그 모든 게 진짜로 진짜였구나. 그는 진짜로 고민하고 진짜로 애쓰고 진짜로 사랑하며, 쓴다. 그러니 모두가 진짜로 빠져들 수밖에. - 조우리 (소설가, 〈이어달리기〉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추천평.

 

저자 : 한송희

 

큰따옴표 안의 문장들을 말하듯 읽는 것이 좋아 배우가 되었다. 스스로에게 배역을 주려 극을 쓰기 시작했고, 잘 쓰고 잘 말하기 위해 나와 타인의 작은따옴표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려 한다. 창작집단 LAS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며 <종말의 바보> <윤희에게> 등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오래도록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희곡 <줄리엣과 줄리엣> <선택> <나, 혜석>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미래의 여름> <서울 사람들>을 쓰고 연기했고, 단편 소설 <사랑도 회복이 되나요?>를 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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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항의 기술 - 물러서지 않는 프로불평러의
러비 아자이 존스 지음, 김재경 옮김 / 온워드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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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얼마 전부터 우리 사회에 유행하는 신조어에 대해 불만뿐만 아니라 두려움을 갖고 있다. 우리말 한글은 구조나 형태상 분류로 고착어에 해당된다. 고립어와 굴절어의 중간적 성격을 지닌 것으로 어근에 접사(接辭)가 결합되어 문장 내에서의 각 단어의 기능을 나타낸다. 또한 어간에서의 어형교체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알타이제어가 대표적인 교착어이며, 한국어·튀르키예어·일본어 등이 이에 속한다. 첨가어라고도 한다. 언어를 구조나 형태의 관점에서 분류할 경우 교착어·고립어·굴절어 등 3종류다. 고립어는 낱말이 그 어떤 형태상의 변화가 없이 글 가운데 나타나고 다른 말과의 문법적 관계는 어순에 의해 표시된다. 대표적 고립어로는 중국어를 들 수 있다. ‘我看書’(아간서)를 한국어의 ‘나는 책을 읽는다’와 비교해 보면 한국어에서는‘나’에 ‘는’이, ‘책’에 ‘을’이 첨가되어 ‘나’와 ‘책’의 문법적인 기능이 나타나 있다. 영어의 ‘I read a book.’에 있어서도 ‘I’는 ‘나’라는 뜻 외에 ‘는’(주격)의 뜻을 가지고 있다.

중국어의 ‘我’(아)에는 ‘나는’이나 ‘I’처럼 문법적인 기능의 표시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영어에서도 대명사 대신 명사가 오면 그것이 어형상으로 주어라고 구별이 되지 않고, 중국어처럼 어순이 문법적으로 중요하다. 굴절어는 문장 속의 문법적 기능에 따라 단어의 형태가 변화하는 언어이다. 예를 들면, 라틴어 bonus(영어 의미: good)에서 접사 -us는 남성, 주격, 단수를 의미하며, 이런 특성 중에 하나를 바꾸려면 접사를 다른 접사로 대체해야 하는데, -um로 대체한다면 bonum은 남성 직접목적격 단수나 중성 직접목적격 단수 또는 중성 주격 단수를 나타낸다. 이처럼 세계의 언어는 구조나 형태상 분류는 각 언어의 특성에 따라 다르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단어들은 변화할 때 변화의 모습 역시 다르다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유행하는 신조어들은 영어의 특성처럼 변화시키는 특성을 갖고 있는 말들이 많다. 아마 단어가 길고, 발음상 문제로 축약시키기 위해 영어를 따라 한 것처럼 보인다. 이는 자칫 우리말의 문법 체계를 혼란시킬 위험을 안고 있다.

 


 

언어는 변화한다. 한 세대, 혹은 한 세기, 또는 한 시대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언어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총합이 이루어져 변화해 간다. 이럴 때 문법의 파괴가 있더라도 문법 체계를 고쳐야 하는 불편함이 있지만 그 말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뜻에 따라 문법이 바뀌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만큼 그렇게 오래 변화한 말의 뜻을 인정하고 사용하기 때문이다. 유행어가 문법 체계에 맞지 않으면서 일시에 문법 파괴적인 요소가 가장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유행어는 한동안 사용하다 일정 시간이 지나면 원형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에 큰 혼란을 일으키지 않고 일시적으로만 사용되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언어생활에 큰 문제를 주지 않는다. 그러나 언어의 축약은 어느 시대나 있어 왔다. 특히 영어의 경우 이니셜로 표현되는 축약이 가능한 것은 단어의 뜻을 변화시키지 않고 이니셜만으로 표현하기 때문에 다른 말과 겹칠 이유가 별로 없다. 또 겹친다면 다른 축약 형태로 쓰면 된다. 그러나 여러 언어가 혼합된 형태의 축약은 쉽게 겹치지 않은 특성은 있지만 뜻이 한 번에 전달되지 않은데다 일시적 유행으로 끝나지 않을 경우 결국 그 말을 쓰는 원형의 언어가 문법 체계의 피해를 입게 된다. 이 점을 중요시 한다면 국적 불명의 언어의 혼용 형태의 말이 축약어로 발전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축약어는 마치 우리말 한글과 영어가 혼용해 쓰고 있는 사회인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책 『반항의 기술』 부제에 붙어 있는 「물러서지 않는 프로불평러의」에서 '프로불평러'란 용어가 그런 느낌의 축약어다. 프로(영어)+불평(국어)+러(영어 어미, ~하는 사람)'의 형태로 혼용돼 있다. 즉 국어인 '불평하는 사람'을 짧게 줄여 '불평러'라고 표기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 유행하는 신조어에 영어 'er'을 붙여 '~하는 사람'이란 표현을 자주 하는데 이에 따른 표기법으로 보인다. 영어 원제는 'trouble+maker'로 돼 있는데 번역에서 '불평러'로 쓴 것이다. 이 용어가 그만큼 우리 사회에 자주 쓰이기 때문에 번역자나 출판사 측의 뜻에 따라 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이런 언어 생활을 다루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지나갈 수 있다. 실제 독자가 읽어도 '불평하는 사람'의 뜻으로 쓰이고 있다. 오히려 불평을 숨기지 말고 말함으로써 자신의 권리나 이익을 포기하지 말라는 뜻으로 쓰였다. 다만 한글을 사랑한다면 가급적 우리말의 범위 안에서 더 고심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독자가 제안하는 말이다. 이 책의 내용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에 표현한 측, 번역자나 출판사 측의 책임을 물을 수는 없다는 말을 미리 하고 싶다.

이 책의 저자 러비 아자이 존스는 아프리카 나이지리아계 미국인이다. 미국의 인종 차별은 아직도 미국 사회의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저자가 흑인 여성으로 미국에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뼈저리게 느끼며 산 사람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어디에 살든 인간의 삶은 하루에도 수십 번을 참으면서 산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가면을 쓰지 않고 밥벌이를 유지할 수 있다면 모두가 그쪽을 선택했겠지만 그런 행운은 누구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저자 역시 해야 할 말을 참지 않고 사는 건 특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특권층도, 처음부터 넘치는 자존감의 소유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지리아에서 태어난 흑인이자 여성이며, 어린 시절 찬 바람 부는 ‘윈디 시티’ 시카고로 이주한 이민자이자 25달러짜리 운동화도 쉽게 살 수 없었던 빈민이었다. 역설적으로 프로불평러가 되기로 했던 건 바로 그 이유였다. 저자는 말하기나 행동하기가 망설여진다면 그때야말로 용기가 필요하며, 다른 선택지는 없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솔직한 글을 보러 찾아오는 독자들과 자기 효능감을 위해 직장에 다니면서도 블로그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됐다. 트위터에서 한 말 실수로 미국 전역에서 뭇매를 맞았을 때도 책 쓰기를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됐다. 차별적인 강연료 지급 관행 앞에서 흑인이자 여성으로서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됐다.

 


 

우리는 상냥한 사람이 되려고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낭비한다는 말에 독자는 동의한다. 지금 저자는 미국에서 최고의 인플루언서가 됐다. 자기에게 놓인 어려움 앞에서 ‘참지 않음’으로써 자기 영향력을 키운 모범사례다. 저자는 어떻게 예쁜 말만 하고 사느냐고, 내가 할 말을 했다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상대의 몫이라고 분명히 말한다. 그리고 상냥한 사람이 되기보다 ‘필요한 말’을 삼키지 않는,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때문에 많은 직장인이 가면 증후군에 시달린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압박을 견뎌 지금의 자리에 있으면서도 정작 좋은 기회가 주어지면 자기 자격을 의심하며 겸손을 떤다. 연봉 협상은 어떤가. 소박하게 희망 연봉을 제시하고도 침묵이 흐르는 5초를 채 참지 못한다. 이내 “어려울까요?”라며 저자세를 취한다.

이런 겸손은 실패와 실망이 두려워서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그건 성공이 두려워서이기도 하다. 한번 맛본 성공을 유지하지 못하거나 그에 뒤따르는 책임감을 감당하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저자 역시 수많은 기회를 날려버릴 뻔했다. 10년 가까이 글을 써놓고도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에 비교하면서 자기에게 책을 쓸 자격이 있는지 망설였다. 수많은 강연을 했으면서도 TED 메인 무대 제의 앞에서 망설였다. 저자는 그럴 때면 할머니를 떠올렸다. 이 책에는 눈치 따위 안 보고 살았던, 그러면서도 주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할머니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 좀처럼 주눅 드는 법이 없었던 할머니는 칭찬을 들으면 온몸으로 감사를 표하고 받아들일 줄 알았다. 저자는 가짜 겸손이 자기를 작아지게 만들 때면 스스로 후광을 비출 줄 알았던 할머니에게서 귀감을 얻었다.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면 그건 지금까지 자기 노력의 결과다. 좋은 기회를 잡는 건 자신에게 찾아온 행운을 알아보는 것과 다름없다. 저자는 가면 증후군의 목소리를 이겨내고 꿋꿋이 살아갈 때 우리가 많은 것들을 회복하고 또 누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자기가 있는 자리의 자격을 의심할 필요가 없다며 우리를 다독인다. 두려움 없는 사람은 없다. 이 책에도 두려움을 없애는 법은 없다. 다만 두려워하고 있음을 알고도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두려움보다 해야 할 일에 집중할 때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모두 3부 1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부 〈자신이 되어라〉에서 저자는 우리를 두렵게 하는 일들 앞에서 우리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이야기한다. 저자는 공포에 맞서는 전쟁의 절반은 우리 자신과 불안, 스스로 지고 있는 짐들과 싸우는 것이라고 말한다. 2부 〈진실을 말하라〉에서는 자신의 목소리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며 내게 필요한 것들을 위해 말하는 법을 연습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즉,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세상과 맞서는 법을 알려준다. 마지막 3부 〈그대로 행하라〉에서는 "당신의 행동이 당신 말의 진실을 증명하지 못한다면, 당신의 말은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명언을 인용하며 침묵을 깨고 그동안 마음에 담아두기만 했던 일들을 이야기하고 직접 행동하는 법에 대해서 소개한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말도 거칠고 요란하지만, 누구보다 친절한 이 나이지리아인을 친구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건 아주 좋은 일이다. 나보다 더 ‘내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건 든든한 일이니까. 이제 억울함에 복받치거나 이불 속에서 나오기 싫을 때도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최악의 시나리오보다 최고의 시나리오를 떠올리게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저자의 '에필로그' 「두려움 가득한 세상에서 빛을 발하는 용기」는 '프롤로그' 「프로불평러가 두려움에 맞서는 법」 못지 않게 명쾌하고 두려움 없는 그의 글솜씨를 보여준다. 저자는 에필로그를 통해 "삶을 살면서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교훈이 하나 있다면 그건 삶이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만큼 무서운 게 없다. 지금 당장 확실한 건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불확실성은 불안을 불러일으키며 우리는 언제든 그 불안에 잠식당할 수 있다. (중략) 우리의 목표는 부정적ㅇ니 감정을 느끼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감정이 우리를 잡아먹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 것이다."(p.313~315)

 

이거 하나는 기억하자. 우리는 결국 ‘인간’이다. 인간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낙하산 없이 절벽에서 뛰어내리는 멍청한 짓을 하지 않는다. 문제는 인간이 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은 프로불평러에게 지지를 보내는 대신 침묵을 지키면서 이따금 공허한 빈말만 던진다. 회의가 끝나고 나서야 문제를 제기한 사람에게 가서 “와, 그 얘기 꺼내줘서 진짜 고마웠어요.”라고 말해봤자 빈말 잘하는 진상밖에 못 된다. 듣는 사람이 없으니까 하는 말인 게 뻔하다. 그리고 듣는 사람이 없다면 그 말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실제 회의 시간에 지지해 주지 못한다면 그게 다 무슨 소용일까?(p.127)

 

종종 사람들은 더 열심히 살라고 “영감”을 주는 문구를 서로 공유하고는 한다. 예컨대 이런 식이다. “비욘세의 하루도 당신의 하루랑 똑같이 24시간이다.” 아니, 현실은 그렇지 않다. 비욘세 본인조차 그렇게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비욘세의 하루는 240시간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삶이 매끄럽게 굴러가도록 갖가지 일을 처리해 주는 사람이 10명은 있을 테니까.(p.255)

 


 

저자 : 러비 아자이 존스(Luvvie Ajayi Jones)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18년 차 블로거, 팟캐스트 진행자,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연설가이자 최고의 인플루언서다. TED 강연 [편하게 불편해하기]로 일약 유명인이 되었다. 23개 언어로 번역된 이 강연은 조회수 870만 회를 넘겼고 이는 역대 TED 강연 중 조회수 상위 1%에 해당한다. 구글, 페이스북, 마이크로소프트, 트위터, 스포티파이, 나이키, 뱅크오브아메리카 같은 기업은 물론 칸 국제광고제,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 등의 유명 콘퍼런스에서도 연사로 활동했다. 2018년 2월부터 이 책과 동명의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다. 수많은 미국의 유명 인사들이 출연해 진솔한 대화를 나누는 내용으로 다운로드 수는 300만 건을 넘겼다. 애플 팟캐스트의 ‘주목할 만한 콘텐츠’에 선정되었고 ‘용감한 여성들’ 컬렉션에도 포함되었다. 스포티파이에서는 ‘특집 팟캐스트’로 선정됐고 에미상을 수상한 NPR의 미셸 마틴은 ‘꼭 들어야 하는 팟캐스트’로 꼽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두려움이란 스스로 지고 있는 짐’이라며, 눈치 보지 않는 ‘프로불평러’가 되라고 말한다. 이 ‘두려움 극복 매뉴얼’은 출간 직후 아마존 자기계발 분야 베스트셀러 1위에 올랐으며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월스트리트저널》, 《로스앤젤레스타임스》, 《퍼블리셔스 위클리》 등 수많은 매체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NPR, 《포브스》, 《포천》, 《시카고트리뷴》 등의 매체에서도 주의 깊게 다루었으며 출간 이후 수많은 베스트셀러 작가들과 독자들의 찬사가 쏟아지고 있다.

 

역자 : 김재경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다 텍스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번역가의 길로 들어섰다. 글밥아카데미 출판번역 과정을 수료한 후 바른번역 소속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매달, 무조건 돈이 남는 예산의 기술》, 《딱 1년만, 나만 생각할게요》, 《포스트트루스》, 《내 인생의 탐나는 심리학 50》(공역), 《2050 거주 불능 지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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