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엣과 줄리엣 - 희곡집 에세이
한송희 지음 / 더퀘스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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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수메르 문명의 〈길가메시〉로 바뀌었지만 불과 30~40년 전만 해도 서양 문학의 원류는 고대 그리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꼽았었다. 구전되어 내려오던 이야기를 문자로 적어 후세에 전한 서사시가 그것들이다. 호메로스의 사망연도는 부정확하지만 B.C. 750년 경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에 비해 〈길가메시〉는 B.C. 2,750년 경의 작품으로 밝혀져 인류 최초의 서사시로서 인정받았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길가메시를 주인공으로 한 문학작품이다. 기원전 2750년경에 실재했던 우루크의 왕인 길가메시에 관한 다양한 신화를 종합해 하나의 장대한 서사시로 엮은 것이다. 수천 년 전 작품이지만, 오늘까지도 중요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즉, 죽음의 문제와 그 극복의 과정이다. 길가메시는 긴 여정의 끝에서 불멸의 비결을 놓치고 말았지만, 다시 우루크로 돌아가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고자 했다. 삶을 긍정하고 사랑하는 인간의 길을 펼쳐 보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원류야 어느 것이든 서양 문학은 모두 서사시의 형태로 오늘날 전해지고 있다. 그것들을 원형으로 보고 인류는 수천 년 동안 소설로, 혹은 연극으로, 요즘은 영웅들의 스토리로 각색하고 발전시켜 왔다. 즉 서양 음악의 원형으로서 이후 모든 예술에서 더욱 발전시켜 온 셈이니 말 그대로 서양 문학의 텍스트 역할을 해온 것은 분명한 사실일 것이다. 문학에 국한한 범위에서만 보더라도 다양한 문학 장르 중 시가 가장 먼저 문자로 기록되었고, 이후 연극을 위한 희곡으로서 모양을 갖췄으며 서사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풍부해지면서 소설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이로써 문학은 시-희곡-소설 순으로 발전되어 더 뒤늦게 발전 과정을 함께한 것으로 독자는 알고 있다.

 


 

서양 문학의 원형을 꺼내는 이유는 희곡이 소설보다 먼저 나온 형식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어서다. 이유는 독자로서 자세히 알고 있지 못하지만 소설의 기원은 고대부터 내려온 신화, 서사시 등의 이야기임을 감안할 때 서양의 그리스 신화나 한국의 주몽 신화 등의 신화에서부터 일리아드, 동명왕편 등의 서사시가 소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다. 서양에서 근대적 소설의 바탕이 된 것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것은 기사들의 영웅담 등을 소재로 한 로망스이다. 특히 로망스에서 프랑스 남부의 기사 영웅담은 환상적으로 미화된 기사가 주인공이 되어, 권선징악의 주제를 이끌며 낭만적인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이것들이 여러 방향으로 변형되어, 현재 환상적 무용담이나 연애담을 뜻하는 로맨스라는 장르로 남았다. 한국의 춘향전도 이러한 성격을 다분히 지녔다. 근대 소설을 뜻하는 영어 Novel은 중세기 말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노벨라(이탈리아어: Novella)에서 온 것으로 이 말은 새로운 것, 신기한 것이란 뜻을 담고 있다. 로망스와 달리 노벨라는 데카메론과 같이 현실의 세태를 반영한 이야기가 특징이다.

오늘날 소설은 문학의 가장 활발한 장르로 평가받고 있다. 소설의 대중적 인기에 편승해 소설이 가장 독자들에게 어필되는 부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문예부흥 이전까지는 서사는 희곡으로 그 모습을 꾸준히 반복 재생되며 이어왔고, 윌리암 셰익스피어에 와서 절정을 이루지 않았나 싶다. 물론 독자가 학교나 기타 문학가들에게 배운 내용은 아니지만 문학 책을 읽어온 독자의 생각을 정리한 것이니 '주장'이고 '가설'일 뿐이라는 사실을 미리 밝혀둔다.

 

 

소설이 이처럼 인기를 누릴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출판이 가능한 인쇄술의 발달에 원인이 있는 것으로 독자는 믿고 있다. 희곡은 말 그대로 연극을 위한 대본집이니 많은 부분이 생략되어 있다. 쉽게 말해 연극 연출자나 배우의 이해 능력과 \문학적 상상력으로 표현되기 때문에 장소로도 한계가 있고, 일반 사람들이 직접 가서 보기에는 경제적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때문에 희곡의 서사가 로맨스, 비극 등이 권력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관객의 대부분이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귀족게급 이상이었고, 또 문학적 수용도 대부분 귀족이나 왕족, 유능한 학자을 대상으로 했었기 때문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가 활동하던 시기 역시 르네상스 이전이어서 그의 문학적 능력이 희곡을 통해 발휘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이나 스토리가 너무나 독창적이어서 소설로 번안되어 수많은 소설에서 번역돼 나오고, 차용해 발전시키는 등 문학 발전에 결정적 역할을 해온 점이 그를 세계의 문호라는 칭호를 붙이기에 충분한 이유가 되었을 거로 짐작된다. 하지만 소설이 책으로 등장한 이후부터는 희곡이 오히려 쇠퇴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문자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고 감상할 수 있도록 책으로 출판되어 나온 소설은 막강한 대중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저자인 작가들이 연극 연출자의 머릿속에 있는 문학적 상상력이나 무대 위에서 표현하는 배우들의 심리, 무대 배경, 스토리 전개상 필요한 사항을 모두 작품 안에 설명해 주기 때문에 독자들은 많은 생각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감상하고 즐길 수 있어 인기를 끌 수 있었으리라. 그래서 현대에는 희곡이 출판되어 나온 경우가 드물다.

 


 

이처럼 희곡 쇠퇴기에도 연극으로 상연되었을 경우 대히트를 치는 작품은 소설로 다시 쓰거나, 가끔은 희곡을 그대로 출판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무대 위의 연그보다는 아무래도 독자의 입장에서 제대로 수용되기 힘들어 소설처럼 잘 팔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출판계에서 꺼리는 출판물이 되는 상태다. 이 책 『줄리엣과 줄리엣』은 제목을 들으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법하다.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작품을 모티프로 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희곡은 '여성퀴어극'으로 전례 없는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무대에 올린 연극 희곡과 비하인드 스토리를 담았다.

연극 상연 때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 포토에세이로 펴냈다. 셰익스피어 원작의 『줄리엣과 줄리엣』을 16세기 베로나의 두 여성 ‘줄리엣 몬테규’와 ‘줄리엣 캐플렛’의 사랑 이야기로 변주한 이 작품은 2018년 산울림 소극장의 고전극장 프로젝트로 초연되었다. 이때 전석 매진과 기립박수 행렬, 관객들의 연이은 n차 관람이라는 대성황에 힘입어 2021년까지 총 네 번의 공연과 온라인 중계를 통해 앵콜이 이뤄질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고 한다. 이기쁨 연출가는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으로 제55회 백상예술대상 ‘젊은연극상’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수많은 지면과 KBS 등 언론은 이 작품을 “21세기의 새로운 고전(Classic)”이라 부르며 “셰익스피어의 문학성을 최대한 유지하면서 참신하다” “호기심의 한계치를 넘어서게 한다” “여전히 사랑하며 타협하지 않는 점이 우리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와 같은 찬사를 내놓았다.

2021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공연을 마친 이 작품의 대본집을 구하는 글이 지금도 올라오고 있다고 하니 인기를 실감나게 한다. ‘텍스트가 너무 아름다운 연극’ ‘갓극 못 본 사람 없게 해주세요’ ‘줄&줄 다시 와야 해요’라는 평이 후기란을 수놓듯 그 여운을 잊지 못하는 분들이 많다. 이 책 『줄리엣과 줄리엣』 희곡집 에세이는 이러한 마음에 보답하고자 정성껏 준비된 책이다. 책에 실린 연극 대본은 가부장적 어머니 캐플렛과 젠더퀴어 승려를 출연시키며 가장 높은 완성도로 호평을 받은 4연(2021년) 판이다. 독자는 아름다운 명대사의 향연 속에서, 세상의 반대를 넘어 활자 위로 날아오르는 두 여성의 지극한 사랑에 가슴이 온통 저릿해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이 에세이는 팬들에게 입체적이고 풍성하게 확장된 작품세계를 안겨준다. “우린 줄리엣과 줄리엣을 할 거야”라는 연출가의 한마디에 로미오와 줄리엣은 사실 두 여성의 사랑이야기가 와전된 것이라는 상상을 펼친 ‘첫’ 순간, 회의적인 반응과 의문들 앞에서 용기를 잃을 뻔한 저자에게 힘이 돼준 단 한 줄의 대사, 연극영화과 시절 학내 오디션을 치렀던 그 셰익스피어와 작가로서 다시 마주할 때의 긴장을 거쳐, 마침내 극이 대중과 만나 빚어낸 색색깔의 폭죽 같은 반응들에 울고 웃는 아름다운 과정을 함께할 수 있다. 또한 배우로서의 저자는 다른 캐릭터도 아니고 ‘줄리엣’을 연기해야 하는 여주인공의 고뇌로, 심장 윤곽이 그려질 만큼 가슴이 쿵쾅대는 공연 직전의 백스테이지로, 손깍지 낀 관객 줄리엣들을 무대 위에서 지켜보는 뭉클함을 에세이로 담아내 독자들을 감동시킨다. 무엇보다 이 극을 세상의 모든 줄리엣이 상처받지 않길 바라는 하나의 ‘기도’로 여기며 쓰고 연기했다는 저자의, 두려움을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을 지켜보는 경험은 실로 감동적이다.

이러한 작품의 열기가 느껴질 수 있도록 1열에서 관람하는 것 이상으로 생생한 현장사진과 배우들의 감정 연기를 담은 연습 모습, 책에만 실린 독점 비하인드 컷까지 『줄리엣과 줄리엣』 희곡집 에세이에 정성껏 담았다. 두 줄리엣 위로 마지막 조명이 사윌 때의 감동을 고스란히 전할 소장본으로 이 책을 펴냈다. 이 책이 ‘줄앤줄’의 팬들과 여성퀴어 서사를 사랑하는 많은 독자를 가슴 뛰는 영원의 시간으로 안내할 선물이 되기를 독자는 기대한다.

 

꿈을 모두 이루어야 해? 이미 네가 꾸었던 꿈은 전부 이뤘는데 뭐가 더 필요해? 더 많은 관심? 더 많은 돈? 더 좋은 실력? 필요해? 필요하다면 꿈꿔. 이루어지지 못해도 뭐 어때. 움직여. 이루기 위해 움직여. 움직이다 보면 어디로든 갈 거야. 그곳이 네가 꿈꾸던 곳이 아닐지라도.(p.291)

 

 

“네가 나의 집이야”라는 이 작품의 또 다른 명대사 역시 있는 그대로의 나이게 하는 존재가 있다는 것의 감동을 통해 심장을 적신다. 그래서인지 ‘그저 감사하단 말밖에’ ‘함께여서 행복했다’처럼 〈줄리엣과 줄리엣〉 관객리뷰에는 고맙고 행복한 눈물바다가 넘실댄다. 이 작품이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적인 분위기와는 사뭇 다른 여운을 새긴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퀴어 작품은 새드엔딩이라는 불만스러운 기존 공식에 맞서기라도 하듯 〈줄리엣과 줄리엣〉은 그 슬픔의 깊이를 곡진히 그려가면서도 두 사람의 사랑을 꼭 감싸안으며 ‘이 시대를 살아가는 퀴어라면 한 번쯤 봐야 하는 작품’ ‘엔딩 연출이 돌았어요’라는 평을 이끌어냈고, 새로운 명작의 탄생을 눈앞에서 지켜보는 크나큰 기쁨을 선사한다.

영화 〈윤희에게〉의 임대형 감독은 레즈비언을 ‘비극적 결함’에 빗대도 이상하지 않은 이 한국사회에서 연극 〈줄리엣과 줄리엣〉은 불세출 로맨스의 원형 같은 이야기를 가장 낭만적이고 동시대적으로 풀어냈다며 칭송했다. 어쩌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원작보다도 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이야기, 지워지지 않을 이야기, 멈춰지지 않을 이 사랑을, 독자들의 마음과 책장 한 곳에 간직함으로써 두 줄리엣 옆에 언제까지나 함께 서준다면 좋겠다.

 

“당신은 당신일 뿐이에요. 줄리엣. 나와 같은 이름 그대로 거기 있어요.”

 


 

‘줄리엣과 줄리엣’은 한송희의 세계에 매료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다. 배우이자 극작가, 소설가로도 활동하는 창작자 한송희는 무엇이든 ‘진짜’로 만들어버린다. 역사상 가장 유명한 헤테로 로맨스 ‘로미오와 줄리엣’을 가짜로 만들고, 온 세상의 방해 속에 사랑한 두 여성이 진짜라고 말한다. 줄리엣 몬테규가 되어 줄리엣 캐플렛을 진짜로 사랑하고, 신뢰하는 동료들과 만든 무대 위의 순간을 관객들이 빠져드는 진짜 세상으로 만든다. 두려워할지언정 포기 없이 자신의 이야기를 밀고 나가는 한송희의 용기는 아름답게 빛난다. 그럴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무엇일까, 팬으로서 그의 연기와 글을 보며 무척이나 궁금했다. 이 책을 읽고 깨달았다. 그 모든 게 진짜로 진짜였구나. 그는 진짜로 고민하고 진짜로 애쓰고 진짜로 사랑하며, 쓴다. 그러니 모두가 진짜로 빠져들 수밖에. - 조우리 (소설가, 〈이어달리기〉 〈내 여자친구와 여자 친구들〉) 추천평.

 

저자 : 한송희

 

큰따옴표 안의 문장들을 말하듯 읽는 것이 좋아 배우가 되었다. 스스로에게 배역을 주려 극을 쓰기 시작했고, 잘 쓰고 잘 말하기 위해 나와 타인의 작은따옴표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려 한다. 창작집단 LAS에서 동료들과 함께 연극을 만들며 <종말의 바보> <윤희에게> 등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오래도록 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 희곡 <줄리엣과 줄리엣> <선택> <나, 혜석> <헤라 아프로디테 아르테미스> <미래의 여름> <서울 사람들>을 쓰고 연기했고, 단편 소설 <사랑도 회복이 되나요?>를 썼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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