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 - 거장은 어떻게 탄생되는가
이종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 『파블로 피카소』는 그가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탐색한다. 부제도 「거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로 피카소의 생애와 작품을 중심으로 그가 '거장'임을 내세우고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한 피카소는 역사상 가장 많은 미술품을 남긴 화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피카소가 그린 유화는 1만 3,500점이었으며, 700여 점의 조각품, 판화, 데생은 물론 도자기 등 다양한 형태의 미술품 5만 점을 생전에 제작했다. ‘피카소 재단’은 피카소가 78년 동안 1만 3,500점의 그림, 10만 개의 판화, 3만 4,000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창작했다고 적었다. 작가와 비평가들은 피카소를 마술사로 여겼으며, 붓을 한 번 휘둘러 주변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설명한다.

피카소의 작품은 한 화가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시기별로 극명하게 다르다. 92세에 달하는 장수의 영향도 있지만 이는 전적으로 피카소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피카소는 단순히 자수성가한 부유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일중독자'였다. 거의 매일 8시간씩 그림을 그렸고, 죽기 1년 전에도 200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또한 죽기 12시간 전까지도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피카소는 평생에 걸쳐 5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기네스북에 오른다는 자체가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피카소가 예술 분야에서 이를 추구했다는 것은 더욱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피카소가 현대인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불굴의 투지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많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운명했지만 그가 갖고 있던 인간의 투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 10. 25~1973. 4. 8)는 흔히 입체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양식과 매체의 변경에도 기교, 독창성, 해학에 한계가 없이 작품을 제작했던 20세기 최고의 거장임도 분명한 사실이다. 초기 청색시대를 거쳐 종합적 입체주의까지 입체주의 미술양식을 창조했다. 아방가르드 미술 모임의 핵심 인물로,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했고, 상대적으로 20세기의 모든 미술가들은 그의 그늘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같은 대선배들의 계보를 잇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피카소는 기교, 독창성, 해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없었다. 피카소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양식과 매체를 변경해가며 많은 작품들을 제작했으나,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페르낭 레제와 같은 동시대의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아실 고르키, 윌렘 데 쿠닝, 데이비드 호크니를 포함한 후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는 일찍이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라코루냐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피카소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놀라운 사실주의 작품인 〈첫 영성체〉(1896)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옛 거장들의 구도와 색채, 그리고 기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카소는 다른 미술가들의 양식을 받아들였는데, 그 결과 그의 작품 <페파 아주머니의 초상>(1896)은 마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처럼 보이고, 〈푸른 옷을 입은 여인〉(1901)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04년에 피카소는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작가들의 모임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피카소가 초기에 제작한 회화와 판화, 그리고 조각 작품들은 청색 시대(1901~1904), 장미 시대(1905~1907), 원시 시대(1908~1909),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1908~1912),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1912~1913)로 나뉜다.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피카소는 청색의 색조를 자주 사용했고, 알코올 중독자, 거지, 매춘부, 방랑자, 빈민들이 마치 엘 그레코의 인물들처럼 길쭉하고 수척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징의 작품으로는 〈비극〉(1903)이 있다. 장미 시대에는 핑크색과 오렌지색의 색조가 두드러지며, 〈곡예사 가족〉(1905)에서처럼 어릿광대, 곡예사, 서커스단원들이 등장한다. 원시 시대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 그리고 오세아니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선구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을 선보였다. 인물들을 각이 지게 묘사한 이 그림은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피카소는 구상 작품인 〈기타를 든 여인〉(1911)과 정물화인 〈죽은 새들〉(1912)을 제작하면서,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또한, 피카소는 〈기타〉(1912~1913)와 같은 입체주의 조각들에서 3차원의 물체들을 거의 그림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간적인 순서를 반대로 처리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식탁 위의 병과 포도주 잔〉(1912)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신문, 종이, 헝겊을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 위에 덧붙였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조각상처럼 견고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상 작품들을 제작하다가, 192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양식으로 옮겨갔으며, 1930년대에는 뛰어난 기교를 선보인 에칭 작품인 〈미노타우로마키〉(1935)에서처럼, 신화적인 주제들을 탐구했다. 그는 활동기간 내내, 구성과 공간, 그리고 기법과 색채에 신경을 썼고, 투우, 기타, 어릿광대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채택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 중에는 벽화 〈게르니카〉(1937)를 제작하여 파시즘에 저항했다. 그는 〈게르니카〉 이후에도 드로잉, 에칭, 회화 연작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는데, 에칭 작품인 〈우는 여인〉(1937)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피카소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 〈시녀들〉(1957)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선배 미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1960년대에는 색채주의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이 중 일부는 신표현주의로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의 개인사는 그의 미술 양식의 변화 과정만큼이나 유동적이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여자로부터 네 명의 아이를 가졌다.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항상 독창적이었던 거장 피카소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는 방탄유리 뒤편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이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에칭 연작 '전쟁의 참화'(1810~1820경) 이후로 전쟁의 공포와 잔혹성을 가장 잘 요약한 작품일 것이다. 1936년에 스페인 내란이 발생했을 때 피카소는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공화국에 충성하던 피카소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1937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작품을 출품해 줄 것을 의뢰받았다.

 


 

공화정부에 불복한 파시스트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요청으로, 독일의 비행대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을 하여, 사망자가 1,600여명에 달했다. 피카소는 이 참사를 의뢰받은 그림의 주제로 채택하여 파시스트들에게 강력히 항의하고자 했다. 가로 23피트(7.8미터), 세로 11피트(3.5미터)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에 회색과 흰색의 제한적인 색채가 칠해졌다. 단색의 색조는 참사의 슬픔을 나타내고 신문 보도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황소, 말, 백열전구, 믿기지 않는 공포에 괴로운 표정으로 허둥대며 달리는 사람들, 꽃을 든 팔, 부서진 검 등 풍부한 이미지들에 다양한 해석이 내려져왔으나, 피카소는 그들에게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울부짖고 있는 여인상의 의미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파리를 시작으로 해서 유럽을 순회하며 전시되었고, 이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스페인이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을 때 반환해 달라는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프랑코가 죽은 후, 1981년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피카소는 1937년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죽은 아이들과 불길에 휩싸인 집, 깨진 동물의 머리 등을 그려 전쟁의 참혹상을 고발했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에서 유독 붉은색을 쓰지 않았다.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검정, 흰색, 회색만을 썼다. 흑백의 대조만이 강조되는 거대한 화폭에는 폭탄도 전투기도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전쟁의 참혹상을 처절하게 보여주었고 지도상에서 사라진 마을 게르니카를 사람들에게 증언해 주었다.

 


 

1944년 파리가 해방 된 후, 피카소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치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한동안 그의 주제는 ‘전쟁과 평화’였다. 1951년에는 〈한국에서의 대학살〉, 1954년에는 〈전쟁과 평화〉를 그렸다. 그가 〈한국에서의 대학살〉을 그렸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였다. 1953년 한 잡지의 표지화로 스탈린의 초상을 그리면서 그는 다시 공산당과 충돌했다. 표지에 실린 스탈린의 얼굴이 너무도 젊었던 것이다. 공산당원들의 비난 중 하나는 이러했다. “오늘 스탈린의 가혹한 죽음이 찾아온 것에 이어 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피카소는 혼란과 몰이해의 씨를 뿌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피카소는 이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역사를 포기했다. 가장 강한 것은 그림이다. 그는 어느 노트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다. “그림은 나보다 강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든다.” 그는 대가들을 상대로 버거운 대결을 시도했다. 대가들의 그림이 심하게 변형되어 그의 화폭 안으로 들어왔다. 1957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그의 화폭에서 변형되었다. 그리고 1960-61년에는 세잔의 〈풀밭 위의 점심〉도 변형되었다.

80대로 접어들어서도 그림과 도예 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이 시기는 판화의 시기였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실험을 계속했다. 피카소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판화의 역사가 쌓아온 기존의 규칙들을 무시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남부 무쟁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흔두 해 삶 동안 많은 친구와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사게마스의 자살은 그의 그림을 청색으로 가득 차게 했고, 페르낭드는 그 청색을 화폭에서 몰아냈다. 러시아의 발레리나 올가는 그의 그림에 한동안 질서와 안정을 부여했다. 도라 마르는 〈게르니카〉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으로 나타났고, 프랑수아 질로는 빛이 가득한 앙티프 시절을 지배한 여인이다. 그의 임종을 지켜 본 부인 자크린은 화가와 모델 연작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이다.

 


 

1989년 〈라팽 아질에서〉가 4070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한때 자신의 캔버스를 땔감 삼아 추위를 녹여야 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점도 사지 않았던 프랑스의 미술관들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피카소의 국적은 에스파냐이지만, 그를 키운 토양은 분명 프랑스이다.” 피카소가 없었다면 큐비즘이 있었을까? 에디슨이 없었더라도 전구는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큐비즘은 그렇지 않다. 20세기 미술 최대의 혁명, 큐비즘은 피카소의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큐비즘도 없었을 것이고, 현대 미술은 많은 부분이 현재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피카소 이후 화가들은 남의 마음에 드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 번도 어린아이처럼 서투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던 그 사내 덕분에···.

 

저자 :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와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 등에서 연구했다.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한국발명교육학회 논문상, 고려대학교 이정덕 건축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탐사하며 연구해 기초 없이 빌딩을 50층 이상 올릴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을 비롯해 특허 10여개를 20여 개국에 출원하는 등, 이론과 실제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과학저술가)으로 신문, 잡지 및 인터넷에도 활발히 기고하는 등 과학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직업』, 『로봇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피라미드』,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영화 속 오류』,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유적으로 보는 우리 역사』 등 100여권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엄마에게 인정받으려고, 상처 주려고 모든 힘을 쏟아부었던 딸. 어머니와 딸은 각자의 생을 통과해 다시 마주 앉아 모녀의 삶을 되새기는, 하나의 서사로 엮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표제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유명한 문장이라고 한다. 이 선언 같은 문장은 모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고,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선언은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며,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여성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없다. 이 책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작가 하재영이 어머니의 생애를 인터뷰하며 그와 교차하는 본인의 이야기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재해석한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사적’으로 자신과 가장 가깝고 자신이 거의 모르는 한 여성,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필경사가 되었다.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어머니라는 텍스트를 읽기 위한 저자의 치열하고 용감한 시도 끝에 피어난 두 여성 사이의 교감이 우리 시대 어머니를 해석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아이의 자존감, 문해력, 창의성, 영어, 수학, 과학, 미술, 돈···. 제목에 ‘엄마’가 포함된 책을 검색하면 자식을 키우는 일에 관한 어머니의 온갖 책무가 쏟아진다. 먹이고 입히는 일이 당연함은 물론이고 한 인간의 성장과 관련한 일이 오로지 어머니의 손에 달린 것만 같다. 시대에 따라 ‘훌륭한 어머니’ 상은 달라지고 있지만, 오늘날 ‘어머니 역할’은 더 촘촘히 분화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이 모든 영역을 관장하기를 기대하는 것,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가까스로 다가서면 상찬을 바치고 미치지 못하면 가혹한 평가를 쏟아내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어머니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찬양과 불가능한 기대로 박제된 명사 ‘어머니’를 넘어 한 ‘인간’으로 그를 대면하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저자 하재영은 "나와 가장 가깝지만 내가 거의 모르는 한 여성, 바로 ‘어머니’를 쓰기로 한 것은 자신이 아니면 어머니의 존재마저 잊혀지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다. 어머니를 잊는다면 자신의 존재감마저 무의미해질지도 모르는 위기의식에서였을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엄마’는 한 사람의 개별자이자 생을 통해 연결된 존재이기에, 그를 알고자 하는 모든 자식들에게 ‘난제’다. 특히 딸이면 더욱 어려운 문제로 닥칠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의 삶을 경청하고, 해석하고, 감응하려는 치열한 시간을 통해 또 한 번 모녀의 성장을 이루어냈다. 저자와 어머니의 관계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어쩌면 가장 평균적인 가정일지도 모른다.

1955년생, 남 앞에서 엉덩방아 찧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스케이트를 배우지 못한, 문학과 영화를 사랑하는, 결혼 후 목소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30년 시집살이를 견디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을 부양한,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고된 시간을 통과한 지금의 내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고선희. 어머니의 이력서에 쓰일 만한 일반적 사항이다. 이는 이 무렵의 어머니 나이를 가진 분들의 평균, 혹은 조금 윗 줄에 자리할지 모르겠다. 딸인 저자도 마찬가지다. 1979년생, 고집 세고 자신만만하던, 발레와 함께 어린 날을 보낸, 타고난 신체로 평가하는 세계에서 환영하지 않는 몸이기에 좌절한, ‘일’과 ‘폭력’의 관계 안에서 수없이 꺾이고 꺾여야 했던, 생존자임를 감각하는 행위로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자, 하재영.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모녀 관계의 두 여성을 만날 수 있다. 저자 하재영은 유년에서 청년,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선희의 삶을 인터뷰하며 엄마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딸이자 그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되새긴다. 누군가의 딸로 살아가는 여자들은 알 것이다, 엄마와 마주 앉아 생을 돌아보는 일의 지난함을. 딸과 엄마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혹은 알아주기를 기대하기에 어쩌면 상대의 진실에서 가장 먼 사람들일지 모른다. 서로에게 닿지 않았던 시절을 지나 모녀는 타이핑한 문서와 육필로 쓴 글을 사진으로 찍어 서신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서로의 삶으로 들어서고 물러나는 시간을 통과해 공동의 회고록을 완성해냈다.

이 책은 “누구의 아내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니었던 시절, 내가 그저 나였던 시절”을 떠올리는 엄마의 이야기. “내가 처한 상황을 견디느라 엄마를 멀리했던 시절” 감당해야 했던 생의 무늬를 돌아보는 딸의 이야기다. 앞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 여성의 시간이 교차하는 기록 속에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아왔는지 그 세월의 흔적이 남긴 상처와 긍지가 섬세한 필치로 펼쳐진다. 동시에 모녀가 ‘여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세대를 넘어 경험한 공동의 지형은 무엇이었는지 짚어가는 동안 독자들은 자기의 시간을, 어머니의 역사를 떠올릴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우리는 모녀라는 관계의 타자로서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 또는 알기에 엄마에 대해 쓰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을 실행하기에 이 작업의 결말은 확실시된 실패이지만 의미 있게 실패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엄마와 딸 외에도 중요한 인물이 한 사람 더 등장한다. 바로 하재영의 할머니이자 고선희의 시어머니, 송영임이다. 고선희는 송영임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며느리이자 딸이고, 말동무이자 시녀였어. 그분의 세계에서 그 모든 역할을 감당하는 유일한 사람.” 하재영의 기억 속 송영임은 고선희의 그것과 다르다. “나에게 할머니는 애증의 대상이다. 할머니를 사랑하기에 두렵다. 나의 글쓰기로 우리의 사랑을 배반할까 봐, 할머니를 단순하고 납작하게 ‘나쁜 시어머니’로 만들어버릴까 봐.”(p.194)

하재영은 모녀도, 자매도, 친구도 아닌 두 여성의 관계를 둘러싼 시간의 흔적을 살피며 가부장제 안에 있던 ‘두 명의 갇혀 있는 자’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 고선희의 어머니 채무식은 어디로 갔을까? 저자의 글이 ‘모계의 기록’에 충실하려면 책의 첫 장은 엄마의 엄마에게서 시작되어야 했고, 마지막 장은 엄마의 엄마에게서 끝나야 했을 것이다. 이 책에 채무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재영은 “이 책의 숙명적 한계는 어느 장에서도 나의 모계,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에 대한 ‘서사적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엄마의 삶을 기록해야 했던 이유는 “우리의 계보에 ‘비존재’인 할머니가 있음을 기억하고, 할머니와 달리 엄마를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저자는 미시사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앞 세대 그리고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의 사유를 종횡무진 통과하며 삶과 공부를 하나로 직조해낸다. 에밀리 디킨슨, 시몬 드 보부아르, 에이드리언 리치, 베티 프리던, 수전 구바, 샌드라 길버트, 수전 손태그, 리베카 솔닛, 정희진, 김영옥, 하미나… ‘글 쓰는 여자’의 계보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유려한 문장을 따라 독자들은 ‘여성-딸-어머니-인간’으로서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 책을 덮은 뒤에도 어머니와의 관계는 독자 각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어머니를 낯설게 바라보며 대화를 시도하는 이도, 끝내 해결할 수 없는 의문과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백 쌍의 모녀에게는 백 가지, 아니 그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가 어떤 텍스트이든 흉터로 영광으로 내 안에 남고 우리는 그로부터 나아간다.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수많은 어머니의 경험과 기억이 흩어지고 부유하다 휘발하지 않도록 하는 일, ‘모계를 기록’함으로써 단독자이자 연결된 자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돌아보게끔 하는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엄마에 대한 모름을 앎으로 바꾸기 위한 저자의 시도로 시작된 글은 다음과 같은 어머니의 말로 끝을 맺는다. “나는 네 덕분에 또 조금 성장한 것 같다.”(p.263) 생을 용감하게 마주하고 살아내는 또 하나의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

 


 

기나긴 문학사에서 소수자인 여성 작가의 책을 읽었더라면, 버지니아 울프의 선언처럼 “여성이 글을 쓸 수 있으려면 먼저 ‘집 안의 천사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천사와 괴물 둘 다 ‘죽이는’ 울프적인 행위”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더라면, 그리하여 여성 작가가 되는 것은 저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로부터 이어져온 계보의 말단에 나를 위치시키는 일임을 깨달았더라면 나의 삶과 글은 달라졌을까?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쓴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를 다루는 첫 장 ‘여왕의 거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작가에게 자아 정의는 자기주장보다 반드시 선행한다. 창조적인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면 언어화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에게 자아 정의의 본질적 과정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모든 가부장적 정의 때문에 복잡해진다.(p.73)

 

저자 : 하재영

 

논픽션 작가.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18년부터 논픽션을 쓰고 있다. 버려진 개들의 삶과 죽음을 담은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집과 여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어린이를 위한 동물권 논픽션 『운동화 신은 우탄이』를 썼다. 개인의 미시적 서사가 사회에 대한 증언으로 확장하는 이야기, 공적 주제가 한 사람의 내밀한 삶으로 수렴하는 이야기, 그리하여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타자와 연결되는 글쓰기를 소망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에게 다가온 러시아 오페라 HK 러시아ㆍ유라시아 연구시리즈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 러시아.유라시아 연구사업단 지음 / 뿌쉬낀하우스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나라와 러시아는 다른 문화권이긴 하지만 국가간 관계는 나쁘지 않았다. 러시아는 유럽 문화권이었고, 우리나라는 동양, 중국 문화권이었기 때문에 서로 다툴 이유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멀리 아메리카까지 길게 뻗쳐 있는 최대의 영토를 가진 나라다. 그러나 주축을 이루고 있는 러시아 인들은 슬라브족이어서 유럽 지향 사람들이고, 국가 정책도 유럽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지리적 특성으로 볼 때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이고자 했으나 서구 유럽의 기존 강대국들의 힘에 밀려 선뜻 나서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1905년 러일 전쟁에도 패배함으로써 아시아에서의 러시아의 존재는 미미했을 정도다.

러시아 다시 제정 러시아처럼 강한 힘을 갖게 된 것은 혁명을 통해 공산주의 체제가 들어서고, 이를 바탕으로 주변의 수많은 나라를 병합해 이른바 소비에트 연합(소련)으로 재탄생하면서부터이다. 1차 세계대전 후 들어선 공산 소련은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서는 발판을 다졌다. 명실공히 세계 최강국의 미국과 맞설 만한 힘을 갖게 된 것이다. 정치·외교·군사 강국의 러시아가 미국에 맞설 만큼 강대국으로 들어선 것은 스탈린 체제 하의 에너지 자원과 광활한 영토 덕이었으리라. 주변 수많은 유럽 국가는 물론 아시아에 걸쳐 대부분의 소련 국경 지역은 러시아의 위성 국가 형태로 존속을 유지하게 됐다. 2차 대전 중 최대 인명 피해국이면서 이를 딛고 세계 최강국으로 올라선것은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서구에 뒤떨어졌지만 유럽의 오페라가 러시아에 수입된 것은 18세기이다. 예카테리나 여제와 표트르 대제의 관심과 노력으로 러시아에 오페라가 정착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작품 활동이 이루어진 것은 글린카의 〈황제를 위한 삶〉부터라고 이 책 『우리에게 다가온 러시아 오페라』는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1836년 글린카의 〈황제를 위한 삶〉 초연작에서 시작하여 2013년 로디온 셰드린의 〈왼손잡이〉에 이르기까지 200년의 러시아 오페라 역사를 조망한다. 특히 러시아 오페라에 있어 러시아 5인조와 차이콥스키의 시대라고 말할 수 있는 19세기 후반의 대표작들, 즉 〈보리스 고두노프〉, 〈호반시나〉, 〈이고리 공〉,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스네구르츠카〉, 〈사드코〉 등을 분석하고, 20세기 소비에트 시대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 등의 작품들도 분석한다.

이 가운데 수교 이후 30여년 동안 우리나라에서 공연된 러시아 오페라는 〈예브게니 오네긴〉, 〈스페이드의 여왕〉, 〈보리스 고두노프〉, 〈이고리 공〉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다양한 영상 매체를 통해 언제든지 오페라 전막 공연을 찾아서 즐길 수 있게 됐다. 이 책을 읽은 음악애호가나 독자들이 러시아 예술에 좀더 가까이 다가가 문화대국인 러시아 예술의 깊이를 느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출간됐다. 이 책은 한양대학교 아태지역연구센터의 노력과 애정의 산물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러시아 오페라의 현재를 전체적으로 살펴보고, 유럽에서의 수입 시대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오페라의 거의 모든 것을 언급한다. 물론 이 책 한 권에 러시아 전제의 오페라를 분석하고 살펴본다는 것은 다소 무리가 있겠지만 역사가 짧고 걸작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에서 가능한 일이라는 평가도 있다고 독자는 생각한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러시아 오페라는 주로 러시아어(語)와 러시아적인 음악으로 이루어진 오페라를 일컫는다. 책에 따르면 러시아는 18세기 전반 군악과 함께 예술음악을 수입하여 주로 이탈리아인의 지도를 받았기 때문에 G.파이지엘로나 D.치마로자 등의 이탈리아 오페라 양식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다가 19세기 중엽 러시아 국민악파의 아버지로 불리는 글린카의 출현으로 고유의 민족적 작품을 가지게 되었다. 글린카는 대표작 〈루슬란과 류드밀라〉에서 후일의 러시아 오페라가 지닌 모든 특징, 즉 당당한 레치타티보풍의 선율, 동양적인 분위기를 찬양한 전음음계풍의 패시지(經過句), 힘있고 색채감이 넘치는 합창과 무용, 대담한 화성 등을 전개했다. 이와 같은 민족적 오페라는 다르고미지스키를 거쳐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로 꽃피게 되고, 다시 보로딘의 〈이고리공(公)〉, 림스키코르사코프의 〈삿코〉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이루었다.

이에 반하여 서구적인 작곡양식을 기반으로 하고 어느 정도 민족적 색채를 가미하여 성공한 것에 차이콥스키의 〈예프게니 오네긴〉이 있다. 19세기에 비롯된 이 2개의 흐름은 20세기에 들어서 프로코피예프의 〈3개의 오렌지에의 사랑〉, 쇼스타코비치의 〈무첸스크의 맥베스부인〉으로 계승되고 있다. 이상과 같은 러시아의 오페라 작품은 그 선이 굵고 생명력이 넘치는 특성에 의하여 오늘날에는 오페라 레퍼토리의 중요한 부분을 형성하고 있다. 19세기 러시아의 찬란한 문화는 문학과 음악에만 그치지 않았다. 진보적인 문학의 기초를 이루고 있던 리얼리즘·민중성·휴머니즘 등의 원칙이 모든 분야로 확산되면서, 오페라·발레·연극 등의 무대예술과 회화·조각 등의 미술 분야에서도 시대와 국경을 뛰어넘은 걸작들을 탄생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로 '시대정신'의 폭발이라고나 할 거대한 흐름이었다. 그 배경에는 러시아의 고통에 찬 역사와 사회, 새로운 러시아를 세우고자 하는 고민과 정열이 있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오페라의 본고장은 이탈리아다. 거기에 프랑스가 가세해 이탈리아와 쌍벽을 이루며 오페라를 융성시켰다. 러시아에서도 18세기 초엽 이래 약 1세기 동안 이탈리아 오페라가 무대를 주름잡고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들어 민족문화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러시아의 작곡가들이 오페라 창작에 정열을 쏟고 연기자들의 기량이 향상됨에 따라 러시아의 오페라 무대는 큰 변화를 겪는다. 1825년에는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 1860년에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 등, 오페라와 발레를 상연하는 대형극장이 들어서서 많은 사람들이 오페라를 접할 수 있게 됐다.

19세기 전반에 글린카의 〈이반 수사닌〉과 〈루슬란과 류드밀라〉, 다르고미슈스키의 〈루살카〉 등에서 민족성과 민중성, 이국 정서가 가미된 독특한 오페라를 개척한 러시아의 오페라계는 19세기 후반에 들어 '5인조'의 음악가들과 차이코프스키가 등장하면서 세계적인 수준의 작품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러시아 작곡가의 오페라들은 정부와 관영극장의 무관심 또는 노골적인 악의, 일부 가수와 관객의 고전 취향으로 인해 공연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예를 들어 혁신성이 두드러진 무소륵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19세기 말, 〈호반시치나〉는 20세기 초에 와서야 황실극장의 무대에 오른다. 이에 반발해 1880년대에 연극계의 후원자 마몬토프의 지원하에 사영 '마몬토프 오페라'가 등장한다. 젊은 가수와 화가들이 적극 참여한 이 그룹은 관영극장의 보수적인 운영을 비난하고 오페라의 혁신을 주장하면서 뛰어난 러시아 오페라들을 적극적으로 무대에 올렸다. 그와 더불어, 키예프, 오데사, 하리코프, 티플리스, 빌나, 리가, 카잔, 사라토프 등지에 훌륭한 오페라 극장이 들어서고 뛰어난 가수와 연출자들이 활약하면서 지방의 오페라도 크게 발전했다.

 


 

러시아 오페라가 독특한 성격으로 세계 오페라계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러시아 발레는 19세기 말 이후 세계의 선두에 서서 발레를 발전시켜왔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도 러시아의 〈볼쇼이 발레단〉이나 〈레닌그라드 발레단〉은 우아하고도 힘찬 동작과 아름다운 구성으로 전 세계의 애호가들을 매혹시키고 있다. 오페라와 마찬가지로 발레의 본고장 역시 이탈리아와 프랑스다. 18세기 초에 서유럽 문화가 도입되면서 이탈리아와 프랑스 출신의 대가들이 러시아에 초빙되어 발레가 상류사회의 고급 취미생활로 자리 잡아갔다. 외면적인 효과와 명인의 기예 감상에 치중해 있던 러시아의 발레에 새 시대가 열린 것은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다. 당시 러시아의 진보적인 미학은, 발레는 무용극으로서 등장인물의 성격 · 사상 · 감정을 표현해야 하며, 진실과 단순함을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에 호응하여 러시아의 많은 작곡가들이 오페라 가운데에 발레 장면을 삽입하여 발레가 가미된 오페라의 전범을 만들어내면서 발레의 발전을 촉진했다. 차이콥스키와 글라주노프는 오로지 발레를 위한 음악인 걸출한 발레음악을 여러 편 작곡하여 러시아 발레의 도약대를 마련했다. 발레에서는 작곡가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음악에 맞추어 춤을 고안해내는 안무가다. 안무가의 머리에서 음악이 아름다운 춤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러시아에 걸출한 안무가가 나타나니, 이가 곧 프랑스에서 귀화한 페티파다. 1847년 무용가로 러시아에 건너온 페티파는 1869년 최고의 발레마스터에 오르고, 이후 30년간 러시아의 발레계를 이끌면서 러시아 발레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 그는 조수 이바노프와 함께 아당의 〈지젤〉 등 서유럽의 많은 명작을 새로이 안무하여 원판을 능가하는 러시아 판을 만들고, 차이콥스키의 3대 발레음악을 비롯한 러시아 작곡가들의 작품을 안무하여 무대에 올렸다. 그는 또한 러시아의 특성을 가미한 독특한 춤 기법을 개발하여 이탈리아나 프랑스와는 다른 러시아 유파를 확립했다.

 


 

페티파는 이탈리아의 빼어난 무용수들을 데려와 공연을 하면서 러시아 무용가들의 교육에도 힘을 쏟았다. 곧 러시아 무용가들이 도전을 시작했다. 얼마 안 있어, 레베데바, 프레오브라젠스카야, 크세신스카야 등의 명 발레리나와 소콜로프 등의 뛰어난 남성 무용수들이 세계 수준에 손색이 없는 기량을 뽐냈다. 그러는 사이에, 이탈리아 무용가들을 보조하던 러시아의 발레단은 훌륭한 발레단으로 성장해 있었다.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단은 고전 발레에서 민속춤까지를 두루 소화한 후 이제 세계무대로 눈을 돌린다. 이것이 20세기 초에 전 유럽을 풍미하는 발레 뤼스(러시아 발레단)의 뿌리이다. 유럽의 한 후미진 구석에서 발레는 그 꽃을 활짝 피우고 이제 그 빛을 세계에 되돌려주기에 이른 것이다.

1881년 황실극장의 독점이 폐지되고 각지에 민간극장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대상인 마몬토프 같은 사람들이 극장의 설립과 운영을 도우면서 연극과 오페라와 발레는 시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뿌리를 내려갔다. 이어 1890년대에는 배우이자 연출가인 스타니슬라프스키와 극작가 단첸코가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만들어 활동을 시작하면서 러시아의 연극은 새로운 도약의 시기를 맞는다. 19세기의 러시아인이 이루어낸 위대한 문화는 러시아를 뒤진 나라로만 생각하고 있던 당대의 서유럽인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19세기 말 프랑스의 한 민요 연구가는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인은 우리에게 대단히 새로운 길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민중 속으로 파고들어 거기에서 새로운 생명의 원천을 찾아냈다."

 


 

이 책에 실린 오페라에 대한 설명은 아직 러시아 오페라에 대해 지식을 갖고 있지 못한 독자들에게는 귀중한 설명이 된다. 그러나 어떤 예술 작품이든 그것을 대하는 수혜자인 관객 입장에서는 호불호가 갈릴 것이다. 독자는 이들 작품 중 톨스토이 원작의 〈전쟁과 평화〉, 니콜라이 레스코프 원작의 〈왼손잡이〉가 가장 눈에 띈다. 이 책에선 〈전쟁과 평화〉를 '뼈를 갈아 만든 오페라'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이에 따르면 『전쟁과 평화』를 오페라로 만들 수 있을까? 한때 그것은 불가능한 꿈이었다고 한다. 5권의 분량에다가 559명이 등장하는 대하소설을 3시간짜리 오페라로 만드는 일은 불가능해 보였다. 하지만 천재 작곡가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1891~1953)는 이 불가능한 일을 시작했고, 아주 멋지게 끝마쳤다. 1941년 시작된 작업은 그가 죽는 1953년까지 12년에 걸쳐 이어졌고, 그 성과는 사후 6년이 지난 1959년에야 빛을 본다. 완성까지 걸린 18년이란 세월은 그만큼 오페라 작업이 힘들었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하지만, 또한 그만큼 프로코피예프가 혼신의 힘을 다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 책의 마지막에 실린 〈왼손잡이〉는 공연된 극장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오페라는 작곡가 로디온 셰드린(1932~ )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2013년 5월 2일 공식 개관된 마린스키 극장 본관 건물과 운하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축된 신관 건물은 2003년 건축 공모전을 시작으로 약 10년 간의 우여곡절 끝에 220억 루블(한화 약 8,000억원)을 들여 마침내 건축되었다. 극장 측은 신관 개관을 기념하기 위해 2000년대 들어 적극적으로 협업을 해온 셰드린에게 새로운 오페라 창작을 위촉하였고, 셰드린은 신관 개관일과 겹쳐진 마린스키 극장 예술감독이자 총감독인 발레리 게르기예프(1953~ )의 환갑을 기념하며 자신의 신작 오페라를 게르기예프에게 헌정하기도 했다. 셰드린이 악보에도 몇 차례 'Valery Gergev'를 모노그램으로 표시해 둠으로써 그 헌정이 형식적인 것을 넘어서는 것임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이 책은 모두 15개의 러시아 오페라가 실려 있으면 각 오페라마다 저자가 다르다. 필진의 이력과 오페라와의 관계는 이 책의 마지막 부분에 별도 처리돼 있으니 관심 있으신 독자들은 별도의 글을 살피면 된다. 또 사진 및 화보, 영상물의 출처를 밝힘으로써 더 정확하고 세심한 설명에 만전을 기했음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러시아 오페라 소개 책자로는 국내 첫 시도인지도 모르겠다. 독자가 워낙 러시아 오페라에 대해서는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다만 이 책을 통해 러시아 오페라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미래를 생각해볼 기회가 된 것은 매우 감사할 일이다. 독자는 이 책을 덮으면서도 러시아 영웅서사시 브일리나가 19세기 러시아의 예술인들에 의해 문화 현상으로 새롭게 환기된 이유를 되새겨보면서 유럽 예술을 원형으로 삼아 모방하는 관계를 탈피하여 진정한 러시아적 예술을 창조하려는 당대의 예술인들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하고 싶다.

"예술이 특정 계급에서만 향유되는 한계를 극복하여 모든 러시아인이 감상할 수 있게 하려는 경향, 짓눌린 민중의 삶을 들여다보고 그들의 세계관을 드러내어 러시아를 위한 진정한 예술을 추구하려는 노력으로 요약할 수 있다. 러시아성을 구현함으로써 서유럽 예술에 대한 모방을 피하고 민중의 현실과 세계를 드러내기 위해 이들은 러시아의 자연, 역사, 민속 문화에 시선을 돌렸다.(p.288)

 

편집 : 심지은

 

연세대학교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노어노문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상트페테르부르크 러시아학술원 러시아문학연구소(푸시킨스키 돔)에서 푸시킨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양대 아태지역연구센터 HK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문학지리. 한국인의 심상공간(공저)』, 『현실과 기호의 이질동상성(공저)』, 『나를 움직인 이 한 장면: 러시아 문학에서 청춘을 단련하다(공저)』, 『백년의 매혹: 한국의 지성, 러시아에 끌리다(공저)』, 『세계를 바꾼 현대작가들(공저)』, 역서로는 『러시아인, 조선을 거닐다』, 『대위의 딸』, 『적자색 섬』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검사의 죄
윤재성 지음 / 새움 / 202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법쩐〉이 꽤 인기가 있었나 보다. 종영 후에도 가끔씩 화제에 오르기도 한다. 내용이야 상투적이다. 법을 다루는 검사들과 돈을 다루는 사채업자, 기업인과의 면모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대체적으로 검사들은 갑의 위치고, 기업이나 사채업자들은 을의 위치다. 그러나 한 가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권력자들의 돈 욕심이다. 구태여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돈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해? 하는 식의 의문을 가지면서도 드라마 내내 몰입했다. 독자에게 검사는 사실 '정의의 사도'보다는 '머리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연수원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사람이 판검사가 주로 된다니까. 사법시험과 연수원 성적이 모두 좋다면 당연히 대한민국 머리 좋은 사람 1순위에 꼽히는 게 당연할 터,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는가. 그런데 요즘 검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물론 독자만 느끼는 것이라고 바랄 뿐이다.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도 정치를 하고자 하는 검사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계로 옮겨간 사람이 많다. 우리 정계에서도 말깨나 하고, 일찍 입지를 다진 사람들은 대부분 검찰 출신이라고 한다. 머리가 좋아서? 독자 생각으로는 대통령이 검사 출신이다 보니 정계에 뜻을 둔 검사들이 더 많아졌나 싶다. '검찰 공화국'인가? 라는 비아냥도 등장하니 더욱 씁쓸하다.

 


 

이 책 『검사의 죄』는 철저하게 검사들 내부의 이야기다. 저자 윤재성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랜 취재를 바탕으로 탁월한 상상력을 조합하여 검사의 세계를 파헤친다. 주인공은 살해당한 선배 검사의 뒤를 캐면서 사건의 실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데, 검사들의 권력구도, 좌천과 승진, 차별 받는 여성 검사, 전관예우, 브로커들, 정재계의 결탁 등도 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루며 실감나고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사실 지금까지 대두됐던 문제들이다. 다만 그것을 내부적 시각에서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검찰로서는 자성의 계기가 되어, 검찰 본연의 임무인 정의가 충만한 사회로의 발전에 힘을 보태주길 바랄 뿐이다. 소설 작품으로 엮어낸 저자 윤재성의 집중력도 높이 산다. 또 그 속도감과 힘 있고 짧은 문체는 윤재성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한다. 독자들은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기 전에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할 것이다.

평검사 권순조는 어릴 적, 납치당했던 보육원에 불을 질러 12명의 원생을 살해한 범죄자다. 또한 강박과 불안에 사로잡힌 현대인처럼 여러 가지 약을 달고 사는 심신불안증 환자이다. 중앙지검의 검사(칼잡이)가 된 그의 눈앞에서 선배 검사가 피살당하고 옛 원죄는 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는데……. 재계와 정계, 법조계마저 결탁한 카르텔을 상대로 평검사 권순조의 주저없는 법의 집행이 시작된다.

 

 

이 책에는 '검사의 원죄(原罪, original sin)'라는 말이 나온다. 이 가운데 '원죄'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원죄는 창세기 성서에 등장하는 아담이 선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먹으면서 발생하였다는 죄다. 원죄의 개념은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Adamah)과 이브(Eve, 혹은 하와)의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하느님(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면서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으며 그의 아내인 이브와 함께 축복받은 땅인 에덴동산에 살았다. 하지만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의 권유를 받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게된다. 선악과(열매)는 하느님이 먹지 못하게 금지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먹음으로써 하느님께 죄를 짓게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죄이며 그로 인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짓고 있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이후 힘든 노동을 하는 삶과 고통과 죽음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검사 집단은 ‘가족 윤리’, 그 가운데서도 이 소설의 특별한 점은 ‘검사 집단의 가족 윤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이다. 어느 집단이고 ‘가족’으로 묶이는 순간 선악의 경계가 흐려진다. 범죄 집단인 마피아도 그렇지 않은가. 대신에 이 소설의 중요 장치인 ‘동물의 세계’처럼, 함께 사냥하고 함께 나눠 먹는 시혜를 누린다. 반면 조직을 거스르는 배신자는 통영과 같은 먼 바닷가 지청으로 유배당하며 철저하게 매장된다. 가족의 일원이, 그것도 검찰의 수뇌부가 엄청난 죄를 묻고 가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갈린다. 가족의 이름과 윤리로……. 결국 그 죄의 대가도 ‘검찰 가족’이 치르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어떤 속 시원함을 느낄 수도 있다.

 


 

주인공은 ‘법전과 합법’만으로는 세상의 ‘거대한 악’을 단죄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위법과 탈법,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들만의 카르텔을 오직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향해 달린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는 주인공의 견해는, 현실 속 검사들도 아마 고민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검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일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인데, 아마도 공정하지 않은 법집행, 답답하고 성에 차지 않는 단죄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검사의 칼 끝이 척결의 대상을 달리하여, 혹시라도 평범한 당신을 향한다면. 가정만이라도 끔찍하지만 법망을 벗어난 무차별한 방법들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내가 검사라면’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저자 윤재성은 말한다. 기존 법의 체계를 답답해하고, 공정한 법의 집행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법체계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시원하게 단죄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원죄를 안고 사는 심신불안증환자인 평검사 주인공, 결혼을 통해 ‘계층 상승’을 하고 싶은 여성 검사, 좋은 검사가 될 거라는 출발점에서 너무 멀어진 검사장, 재벌집의 데릴사위 검사, 강직해서 결국 살해된 검사, 그를 사랑해서 매장된 검사, 브로커들. 그들은 검사이면서 동시에, 마음속에 깊은 상처 하나씩 간직한 우리들과 같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책에서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돼 있다고 믿고 있다. 이 객관적이고 보편적 진리 위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는 사회에서 겪다보면 '과연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 너무나 많다. 너무 잦고 심지어는 직접 겪기도 한 사람의 경험담(신문, 출판물, 방송)을 통해 결코 법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이 바뀌어 간다. 검사의 법 적용보다, 범죄자의 항변에 더 연민이 가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유전무죄 무전유죄〉만 예를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젠 그 보편적인 진리마저 신뢰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법이 정의의 잣대로 작용하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법의 유용성에 의문을 갖게 되지 않을까. 그나마 사회의 발전을 위한 올바른 작동에는 '법'에 기반한 것이 아니던가.

죄를 지은 이들에게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성한 법이 요즘은 그야말로 법기술자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유린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법조계를 소재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현실의 반영이지 왜곡이나 비틀림으로 생각될 수 없다. 어떨 때는 '설마?' 할 정도로 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큰틀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어딘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처벌을 결정하는 사법 시스템이 문제가 되거나 오작동 한다면 그 피해는 일차적으로 오롯이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선량한 시민들이다.

 

 

이 책의 저자 윤재성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의 말' 「모호하고 폭력적인,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서」를 통해 "죄 지은 이가 타인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폭력으로 구현한 정의는 몇 퍼센트의 불의일까에 대해서도, 그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책이 마침표를 찍었다"고 전제하고, "보다 사실적인 검사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무디고 이가 빠졌던 칼이 긴 퇴고로 조금은 날카로워졌길 바란다"고 썼다. 소설이 아무리 권선징악으로 끝나도 예전처럼 맘이 후련하지 않다. 그 방법이 오롯이 법대로가 아니라 뭔가 법 이외의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 해결이 나는 듯 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이 허구여서 일까.

소설 속 그는 어릴 적, '보육원'에 불을 지르고 원생을 모두 그 화염 속에서 숨지게 한 원죄를 가지고 있는 검사이다. 그가 정계와 재계, 언론이 결탁하고 있는 이 공고한 카르텔을 부수어 가는데 과연 법의 잣대만으로 가능할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검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를 돕던 수사관도 살해당한다. 그 사건 뒤에는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대기업과 그들과 손 잡은 법조계의 요직인사들,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고 치장해 주는 언론들. 그들의 결탁에는 비록 이 사건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읽히고설켜 있다. 얼마 전 봤던 드라마 〈법쩐〉도 그랬다. 예전에는 이런 소설이나 드라마 등을 보면 허구니까 가능하다라고 생각했다, 또 실제는 이렇게까지 가능할까 하고 법 쪽에 무게를 더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정의의 소신 검사'라는 말은 들은 지 오래됐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검사의 표상을 본 지가 아득하다.

 


 

'정의의 칼'을 든 검사가 하나 둘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독자의 지식 부족일 것이다. 법조계에는 한 다리 건너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일반 시민이어서 그럴까. 예전에 가끔씩 들리는 '정의의 검사'가 아예 문구 자체가 사라진 듯하다. '검사는 으레 그런 거야' 하며 외면하면 그들 집단에서 자각한 검사가 스스로 등장해 시민을 위한 정의의 검사가 나와서 해결해 줄까? 소설이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지만 이런 드라마, 영화 등이 단지 허구라는 이유로 인기가 있을까? 옛날에 머릿속에 그렸던 올곧은 검사, 소신의 검사, 정의의 검사는 이젠 없는 걸까? 검사가 되면 다들 변하는 걸까? 소설의 결말을 봐도 개운치 않은 현실 감각에 오히려 현실이 무뎌진 것인가. 어쩌면 상식적으로 흐르지 않는 법 적용의 실태를 알게 되면 소설 속의 응징, 드라마 속의 폭로도 아무 힘이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오늘도 소시민으로서 '정의'라는 단어가 올바른 의미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저자 : 윤재성

 

현실의 지평을 꿰뚫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서울에서 출생했다. 지은 책으로 외로움을 살해하는 대행업체 직원의 이야기 『외로움 살해자』(2016), 화마에 맞서는 알콜중독자를 그린 『화곡』(2019)이 있다. 『검사의 죄』는 대한민국 사법의 총본산, 서초동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검사들(칼잡이들)의 이야기다. 『13번째 피』로 ‘한국전자출판대상’을 수상했다. 모호하고 폭력적인,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서 죄 지은 이가 타인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폭력으로 구현한 정의는 몇 퍼센트의 불의일까에 대해서도. 그 의문에서부터 이 책은 시작되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