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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 -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
하재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23년 2월
평점 :
이 책의 표제인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I never had a mother)”는 에밀리 디킨슨이 편지에 썼던 유명한 문장이라고 한다. 이 선언 같은 문장은 모계에 대한 부정이 아니고, 내 안의 ‘여성적 힘’을 선포하는 것이다. 이 선언은 어머니의 시대를 넘어서는 것이며, 나를 낳은 여자의 분신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그 여성에게는 모두 어머니가 없다. 이 책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작가 하재영이 어머니의 생애를 인터뷰하며 그와 교차하는 본인의 이야기를 페미니즘 시각으로 재해석한 엄마와 딸의 '공동 회고록'이다. 저자는 이번 책에서 ‘사적’으로 자신과 가장 가깝고 자신이 거의 모르는 한 여성, 어머니의 목소리를 기록하는 필경사가 되었다. 한 인간으로 존재하는 어머니라는 텍스트를 읽기 위한 저자의 치열하고 용감한 시도 끝에 피어난 두 여성 사이의 교감이 우리 시대 어머니를 해석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아이의 자존감, 문해력, 창의성, 영어, 수학, 과학, 미술, 돈···. 제목에 ‘엄마’가 포함된 책을 검색하면 자식을 키우는 일에 관한 어머니의 온갖 책무가 쏟아진다. 먹이고 입히는 일이 당연함은 물론이고 한 인간의 성장과 관련한 일이 오로지 어머니의 손에 달린 것만 같다. 시대에 따라 ‘훌륭한 어머니’ 상은 달라지고 있지만, 오늘날 ‘어머니 역할’은 더 촘촘히 분화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한 사람에게 이 모든 영역을 관장하기를 기대하는 것, 도달할 수 없는 목표에 가까스로 다가서면 상찬을 바치고 미치지 못하면 가혹한 평가를 쏟아내는 것이 온당한 일인가? 어머니도 다른 모든 이와 마찬가지로 실패하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는 찬양과 불가능한 기대로 박제된 명사 ‘어머니’를 넘어 한 ‘인간’으로 그를 대면하는 경험이 필요하다는 것을 독자들에게 보여준다.
저자 하재영은 "나와 가장 가깝지만 내가 거의 모르는 한 여성, 바로 ‘어머니’를 쓰기로 한 것은 자신이 아니면 어머니의 존재마저 잊혀지기 때문이라고 털어놓는다. 어머니를 잊는다면 자신의 존재감마저 무의미해질지도 모르는 위기의식에서였을까? 사실 모든 사람에게 ‘엄마’는 한 사람의 개별자이자 생을 통해 연결된 존재이기에, 그를 알고자 하는 모든 자식들에게 ‘난제’다. 특히 딸이면 더욱 어려운 문제로 닥칠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의 삶을 경청하고, 해석하고, 감응하려는 치열한 시간을 통해 또 한 번 모녀의 성장을 이루어냈다. 저자와 어머니의 관계는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가정과 특별히 다르지 않다. 어쩌면 가장 평균적인 가정일지도 모른다.
1955년생, 남 앞에서 엉덩방아 찧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 스케이트를 배우지 못한, 문학과 영화를 사랑하는, 결혼 후 목소리를 잃을 수밖에 없었던, 30년 시집살이를 견디고 생활전선에 뛰어들어 가족을 부양한, 기쁘고 슬프고 즐겁고 고된 시간을 통과한 지금의 내가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 고선희. 어머니의 이력서에 쓰일 만한 일반적 사항이다. 이는 이 무렵의 어머니 나이를 가진 분들의 평균, 혹은 조금 윗 줄에 자리할지 모르겠다. 딸인 저자도 마찬가지다. 1979년생, 고집 세고 자신만만하던, 발레와 함께 어린 날을 보낸, 타고난 신체로 평가하는 세계에서 환영하지 않는 몸이기에 좌절한, ‘일’과 ‘폭력’의 관계 안에서 수없이 꺾이고 꺾여야 했던, 생존자임를 감각하는 행위로서 글쓰기를 멈추지 않는 자, 하재영.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모녀 관계의 두 여성을 만날 수 있다. 저자 하재영은 유년에서 청년,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고선희의 삶을 인터뷰하며 엄마의 지대한 영향을 받은 딸이자 그와 다른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으로서 자신을 되새긴다. 누군가의 딸로 살아가는 여자들은 알 것이다, 엄마와 마주 앉아 생을 돌아보는 일의 지난함을. 딸과 엄마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기에, 혹은 알아주기를 기대하기에 어쩌면 상대의 진실에서 가장 먼 사람들일지 모른다. 서로에게 닿지 않았던 시절을 지나 모녀는 타이핑한 문서와 육필로 쓴 글을 사진으로 찍어 서신을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서로의 삶으로 들어서고 물러나는 시간을 통과해 공동의 회고록을 완성해냈다.
이 책은 “누구의 아내도 며느리도 엄마도 아니었던 시절, 내가 그저 나였던 시절”을 떠올리는 엄마의 이야기. “내가 처한 상황을 견디느라 엄마를 멀리했던 시절” 감당해야 했던 생의 무늬를 돌아보는 딸의 이야기다. 앞 세대 그리고 다음 세대 여성의 시간이 교차하는 기록 속에 두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삶을 살아왔는지 그 세월의 흔적이 남긴 상처와 긍지가 섬세한 필치로 펼쳐진다. 동시에 모녀가 ‘여성’이라는 조건 안에서 세대를 넘어 경험한 공동의 지형은 무엇이었는지 짚어가는 동안 독자들은 자기의 시간을, 어머니의 역사를 떠올릴 것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우리는 모녀라는 관계의 타자로서 영원히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 불가능성을 알면서, 또는 알기에 엄마에 대해 쓰고 싶었다. 불가능한 일을 실행하기에 이 작업의 결말은 확실시된 실패이지만 의미 있게 실패하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엄마와 딸 외에도 중요한 인물이 한 사람 더 등장한다. 바로 하재영의 할머니이자 고선희의 시어머니, 송영임이다. 고선희는 송영임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며느리이자 딸이고, 말동무이자 시녀였어. 그분의 세계에서 그 모든 역할을 감당하는 유일한 사람.” 하재영의 기억 속 송영임은 고선희의 그것과 다르다. “나에게 할머니는 애증의 대상이다. 할머니를 사랑하기에 두렵다. 나의 글쓰기로 우리의 사랑을 배반할까 봐, 할머니를 단순하고 납작하게 ‘나쁜 시어머니’로 만들어버릴까 봐.”(p.194)
하재영은 모녀도, 자매도, 친구도 아닌 두 여성의 관계를 둘러싼 시간의 흔적을 살피며 가부장제 안에 있던 ‘두 명의 갇혀 있는 자’가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또 한 사람, 고선희의 어머니 채무식은 어디로 갔을까? 저자의 글이 ‘모계의 기록’에 충실하려면 책의 첫 장은 엄마의 엄마에게서 시작되어야 했고, 마지막 장은 엄마의 엄마에게서 끝나야 했을 것이다. 이 책에 채무식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이유는 그의 이야기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하재영은 “이 책의 숙명적 한계는 어느 장에서도 나의 모계, 엄마의 엄마의 엄마들에 대한 ‘서사적 단서’를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이라고 말한다. 결국 그가 엄마의 삶을 기록해야 했던 이유는 “우리의 계보에 ‘비존재’인 할머니가 있음을 기억하고, 할머니와 달리 엄마를 ‘존재’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는지 모른다.
저자는 미시사의 기록에 머물지 않고 앞 세대 그리고 동시대 페미니스트들의 사유를 종횡무진 통과하며 삶과 공부를 하나로 직조해낸다. 에밀리 디킨슨, 시몬 드 보부아르, 에이드리언 리치, 베티 프리던, 수전 구바, 샌드라 길버트, 수전 손태그, 리베카 솔닛, 정희진, 김영옥, 하미나… ‘글 쓰는 여자’의 계보를 유유히 가로지르는 유려한 문장을 따라 독자들은 ‘여성-딸-어머니-인간’으로서의 삶을 성찰할 수 있다. 책을 덮은 뒤에도 어머니와의 관계는 독자 각자의 몫으로 남을 것이다. 어머니를 낯설게 바라보며 대화를 시도하는 이도, 끝내 해결할 수 없는 의문과 상처를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백 쌍의 모녀에게는 백 가지, 아니 그 이상의 이야기가 있다. 어머니가 어떤 텍스트이든 흉터로 영광으로 내 안에 남고 우리는 그로부터 나아간다.
『나는 결코 어머니가 없었다』는 수많은 어머니의 경험과 기억이 흩어지고 부유하다 휘발하지 않도록 하는 일, ‘모계를 기록’함으로써 단독자이자 연결된 자로 살아가는 일의 의미를 돌아보게끔 하는 단초가 되어줄 것이다. 엄마에 대한 모름을 앎으로 바꾸기 위한 저자의 시도로 시작된 글은 다음과 같은 어머니의 말로 끝을 맺는다. “나는 네 덕분에 또 조금 성장한 것 같다.”(p.263) 생을 용감하게 마주하고 살아내는 또 하나의 길이 우리에게 열렸다.
기나긴 문학사에서 소수자인 여성 작가의 책을 읽었더라면, 버지니아 울프의 선언처럼 “여성이 글을 쓸 수 있으려면 먼저 ‘집 안의 천사를 죽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더라면, “천사와 괴물 둘 다 ‘죽이는’ 울프적인 행위”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더라면, 그리하여 여성 작가가 되는 것은 저 ‘다락방의 미친 여자’들로부터 이어져온 계보의 말단에 나를 위치시키는 일임을 깨달았더라면 나의 삶과 글은 달라졌을까? 샌드라 길버트와 수전 구바가 쓴 『다락방의 미친 여자』는 문학에서의 부권 은유를 다루는 첫 장 ‘여왕의 거울’에서 이렇게 말한다. “모든 작가에게 자아 정의는 자기주장보다 반드시 선행한다. 창조적인 ‘나란 존재’가 무엇인지 ‘내’가 알지 못한다면 언어화할 수 없다. 그러나 여성 예술가에게 자아 정의의 본질적 과정은 그녀와 자신 사이에 끼어든 모든 가부장적 정의 때문에 복잡해진다.(p.73)
저자 : 하재영
논픽션 작가. 2006년 계간 〈아시아〉에 단편소설을 발표하며 등단했고 2018년부터 논픽션을 쓰고 있다. 버려진 개들의 삶과 죽음을 담은 르포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개의 죽음』, 집과 여성에 대한 자전적 에세이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 어린이를 위한 동물권 논픽션 『운동화 신은 우탄이』를 썼다. 개인의 미시적 서사가 사회에 대한 증언으로 확장하는 이야기, 공적 주제가 한 사람의 내밀한 삶으로 수렴하는 이야기, 그리하여 불완전한 내가 불완전한 타자와 연결되는 글쓰기를 소망한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