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사의 죄
윤재성 지음 / 새움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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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모 방송국에서 방영된 드라마 〈법쩐〉이 꽤 인기가 있었나 보다. 종영 후에도 가끔씩 화제에 오르기도 한다. 내용이야 상투적이다. 법을 다루는 검사들과 돈을 다루는 사채업자, 기업인과의 면모가 극적으로 드러난다. 대체적으로 검사들은 갑의 위치고, 기업이나 사채업자들은 을의 위치다. 그러나 한 가지 아직도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것은 권력자들의 돈 욕심이다. 구태여 그렇게까지 해야 하나? 돈이 왜 그렇게 많이 필요해? 하는 식의 의문을 가지면서도 드라마 내내 몰입했다. 독자에게 검사는 사실 '정의의 사도'보다는 '머리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 사법시험을 통과하고 연수원까지 우수한 성적으로 통과한 사람이 판검사가 주로 된다니까. 사법시험과 연수원 성적이 모두 좋다면 당연히 대한민국 머리 좋은 사람 1순위에 꼽히는 게 당연할 터, 누가 그 사실을 부인하겠는가. 그런데 요즘 검사들의 움직임이 심상찮다. 물론 독자만 느끼는 것이라고 바랄 뿐이다.

지나치게 권력 지향적이라는 점이다. 예전에도 정치를 하고자 하는 검사들이 많았을 것이다. 실제로 정계로 옮겨간 사람이 많다. 우리 정계에서도 말깨나 하고, 일찍 입지를 다진 사람들은 대부분 검찰 출신이라고 한다. 머리가 좋아서? 독자 생각으로는 대통령이 검사 출신이다 보니 정계에 뜻을 둔 검사들이 더 많아졌나 싶다. '검찰 공화국'인가? 라는 비아냥도 등장하니 더욱 씁쓸하다.

 


 

이 책 『검사의 죄』는 철저하게 검사들 내부의 이야기다. 저자 윤재성은 이 소설을 쓰기 위해 오랜 취재를 바탕으로 탁월한 상상력을 조합하여 검사의 세계를 파헤친다. 주인공은 살해당한 선배 검사의 뒤를 캐면서 사건의 실체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데, 검사들의 권력구도, 좌천과 승진, 차별 받는 여성 검사, 전관예우, 브로커들, 정재계의 결탁 등도 소설의 중요한 축을 이루며 실감나고 적나라하게 펼쳐진다. 사실 지금까지 대두됐던 문제들이다. 다만 그것을 내부적 시각에서 본다는 것은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인데 아무튼 검찰로서는 자성의 계기가 되어, 검찰 본연의 임무인 정의가 충만한 사회로의 발전에 힘을 보태주길 바랄 뿐이다. 소설 작품으로 엮어낸 저자 윤재성의 집중력도 높이 산다. 또 그 속도감과 힘 있고 짧은 문체는 윤재성이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하게 한다. 독자들은 한 번 잡으면 끝까지 읽기 전에는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할 것이다.

평검사 권순조는 어릴 적, 납치당했던 보육원에 불을 질러 12명의 원생을 살해한 범죄자다. 또한 강박과 불안에 사로잡힌 현대인처럼 여러 가지 약을 달고 사는 심신불안증 환자이다. 중앙지검의 검사(칼잡이)가 된 그의 눈앞에서 선배 검사가 피살당하고 옛 원죄는 시시각각 목을 조여 오는데……. 재계와 정계, 법조계마저 결탁한 카르텔을 상대로 평검사 권순조의 주저없는 법의 집행이 시작된다.

 

 

이 책에는 '검사의 원죄(原罪, original sin)'라는 말이 나온다. 이 가운데 '원죄'라는 말은 성경에 나오는 말이다. 원죄는 창세기 성서에 등장하는 아담이 선악을 구분하는 열매를 먹으면서 발생하였다는 죄다. 원죄의 개념은 성서 창세기에 등장하는 최초의 인간 아담(Adamah)과 이브(Eve, 혹은 하와)의 이야기에서 등장한다. 하느님(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면서 흙으로 아담을 만들었으며 그의 아내인 이브와 함께 축복받은 땅인 에덴동산에 살았다. 하지만 뱀의 유혹에 빠진 이브의 권유를 받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열매를 먹게된다. 선악과(열매)는 하느님이 먹지 못하게 금지한 것이었는데 이것을 먹음으로써 하느님께 죄를 짓게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죄이며 그로 인해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원죄를 짓고 있다고 한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에서 추방되었으며 그 이후 힘든 노동을 하는 삶과 고통과 죽음을 알게되었다고 한다.

검사 집단은 ‘가족 윤리’, 그 가운데서도 이 소설의 특별한 점은 ‘검사 집단의 가족 윤리’를 집요하게 파고든다는 점이다. 어느 집단이고 ‘가족’으로 묶이는 순간 선악의 경계가 흐려진다. 범죄 집단인 마피아도 그렇지 않은가. 대신에 이 소설의 중요 장치인 ‘동물의 세계’처럼, 함께 사냥하고 함께 나눠 먹는 시혜를 누린다. 반면 조직을 거스르는 배신자는 통영과 같은 먼 바닷가 지청으로 유배당하며 철저하게 매장된다. 가족의 일원이, 그것도 검찰의 수뇌부가 엄청난 죄를 묻고 가려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갈린다. 가족의 이름과 윤리로……. 결국 그 죄의 대가도 ‘검찰 가족’이 치르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우리는 어떤 속 시원함을 느낄 수도 있다.

 


 

주인공은 ‘법전과 합법’만으로는 세상의 ‘거대한 악’을 단죄할 수 없다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위법과 탈법, 불법의 경계를 넘나들며, 그들만의 카르텔을 오직 무너뜨리려는 목적을 향해 달린다. ‘목적이 선하면 방법이야 어찌 되어도 좋다’는 주인공의 견해는, 현실 속 검사들도 아마 고민하는 부분일지도 모른다. 검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일부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인데, 아마도 공정하지 않은 법집행, 답답하고 성에 차지 않는 단죄에 대한 반감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검사의 칼 끝이 척결의 대상을 달리하여, 혹시라도 평범한 당신을 향한다면. 가정만이라도 끔찍하지만 법망을 벗어난 무차별한 방법들이 당신을 지켜줄 수 있을지 의문을 던진다.

이 책은 한편으로는 ‘내가 검사라면’으로 읽을 수도 있다고 저자 윤재성은 말한다. 기존 법의 체계를 답답해하고, 공정한 법의 집행을 의심하는 사람들은 법체계 속으로 직접 뛰어들어 시원하게 단죄하고 싶어할 수도 있다. 원죄를 안고 사는 심신불안증환자인 평검사 주인공, 결혼을 통해 ‘계층 상승’을 하고 싶은 여성 검사, 좋은 검사가 될 거라는 출발점에서 너무 멀어진 검사장, 재벌집의 데릴사위 검사, 강직해서 결국 살해된 검사, 그를 사랑해서 매장된 검사, 브로커들. 그들은 검사이면서 동시에, 마음속에 깊은 상처 하나씩 간직한 우리들과 같은 이 시대의 사람들이다.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학교에서, 책에서 "법은 만인에게 평등하다"고 배웠고, 그렇게 돼 있다고 믿고 있다. 이 객관적이고 보편적 진리 위에 기반을 두고 발전하는 사회에서 겪다보면 '과연 그런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할 일이 너무나 많다. 너무 잦고 심지어는 직접 겪기도 한 사람의 경험담(신문, 출판물, 방송)을 통해 결코 법은 평등하지 않다고 생각이 바뀌어 간다. 검사의 법 적용보다, 범죄자의 항변에 더 연민이 가기도 한다.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유전무죄 무전유죄〉만 예를 들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이젠 그 보편적인 진리마저 신뢰하지 못하는 지경이다. 법이 정의의 잣대로 작용하지 않는 한 많은 사람들에게는 법의 유용성에 의문을 갖게 되지 않을까. 그나마 사회의 발전을 위한 올바른 작동에는 '법'에 기반한 것이 아니던가.

죄를 지은 이들에게 그에 합당한 댓가를 치르게 하기 위해 존재하는 신성한 법이 요즘은 그야말로 법기술자라고 불리는 이들에게 이용당하고 유린당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법조계를 소재로 하는 소설이나 영화, 드라마가 자주 등장한다는 것은 현실의 반영이지 왜곡이나 비틀림으로 생각될 수 없다. 어떨 때는 '설마?' 할 정도로 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대부분 큰틀에서 어긋남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어딘가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처벌을 결정하는 사법 시스템이 문제가 되거나 오작동 한다면 그 피해는 일차적으로 오롯이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할 선량한 시민들이다.

 

 

이 책의 저자 윤재성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 '작가의 말' 「모호하고 폭력적인,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서」를 통해 "죄 지은 이가 타인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폭력으로 구현한 정의는 몇 퍼센트의 불의일까에 대해서도, 그 의문에서부터 시작된 책이 마침표를 찍었다"고 전제하고, "보다 사실적인 검사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무디고 이가 빠졌던 칼이 긴 퇴고로 조금은 날카로워졌길 바란다"고 썼다. 소설이 아무리 권선징악으로 끝나도 예전처럼 맘이 후련하지 않다. 그 방법이 오롯이 법대로가 아니라 뭔가 법 이외의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 해결이 나는 듯 해서일까. 아니면 소설이 허구여서 일까.

소설 속 그는 어릴 적, '보육원'에 불을 지르고 원생을 모두 그 화염 속에서 숨지게 한 원죄를 가지고 있는 검사이다. 그가 정계와 재계, 언론이 결탁하고 있는 이 공고한 카르텔을 부수어 가는데 과연 법의 잣대만으로 가능할까, 그것이 의문이었다. 검사가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나고, 그를 돕던 수사관도 살해당한다. 그 사건 뒤에는 그들을 쥐락펴락하는 대기업과 그들과 손 잡은 법조계의 요직인사들, 그리고 그것을 은폐하고 치장해 주는 언론들. 그들의 결탁에는 비록 이 사건만 연루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익과 권력을 위해 읽히고설켜 있다. 얼마 전 봤던 드라마 〈법쩐〉도 그랬다. 예전에는 이런 소설이나 드라마 등을 보면 허구니까 가능하다라고 생각했다, 또 실제는 이렇게까지 가능할까 하고 법 쪽에 무게를 더 두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정의의 소신 검사'라는 말은 들은 지 오래됐고, 좌고우면하지 않는 검사의 표상을 본 지가 아득하다.

 


 

'정의의 칼'을 든 검사가 하나 둘 우리 주변에서 사라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독자의 지식 부족일 것이다. 법조계에는 한 다리 건너도 아는 사람이 없는 일반 시민이어서 그럴까. 예전에 가끔씩 들리는 '정의의 검사'가 아예 문구 자체가 사라진 듯하다. '검사는 으레 그런 거야' 하며 외면하면 그들 집단에서 자각한 검사가 스스로 등장해 시민을 위한 정의의 검사가 나와서 해결해 줄까? 소설이 허구라고 생각하고 읽지만 이런 드라마, 영화 등이 단지 허구라는 이유로 인기가 있을까? 옛날에 머릿속에 그렸던 올곧은 검사, 소신의 검사, 정의의 검사는 이젠 없는 걸까? 검사가 되면 다들 변하는 걸까? 소설의 결말을 봐도 개운치 않은 현실 감각에 오히려 현실이 무뎌진 것인가. 어쩌면 상식적으로 흐르지 않는 법 적용의 실태를 알게 되면 소설 속의 응징, 드라마 속의 폭로도 아무 힘이 없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가시지 않기 때문인 듯하다. 오늘도 소시민으로서 '정의'라는 단어가 올바른 의미로 사용되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저자 : 윤재성

 

현실의 지평을 꿰뚫는 문장을 쓰고 싶었다 서울에서 출생했다. 지은 책으로 외로움을 살해하는 대행업체 직원의 이야기 『외로움 살해자』(2016), 화마에 맞서는 알콜중독자를 그린 『화곡』(2019)이 있다. 『검사의 죄』는 대한민국 사법의 총본산, 서초동 한복판에서 벌어지는 검사들(칼잡이들)의 이야기다. 『13번째 피』로 ‘한국전자출판대상’을 수상했다. 모호하고 폭력적인, 정의와 불의의 경계에서 죄 지은 이가 타인의 죄를 심판할 자격이 있는지, 언젠가 생각한 적이 있다. 폭력으로 구현한 정의는 몇 퍼센트의 불의일까에 대해서도. 그 의문에서부터 이 책은 시작되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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