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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블로 피카소 - 거장은 어떻게 탄생되는가
이종호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3년 1월
평점 :
이 책 『파블로 피카소』는 그가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얻기까지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를 탐색한다. 부제도 「거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로 피카소의 생애와 작품을 중심으로 그가 '거장'임을 내세우고 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선정한 피카소는 역사상 가장 많은 미술품을 남긴 화가로 기네스북에 등재돼 있다. 피카소가 그린 유화는 1만 3,500점이었으며, 700여 점의 조각품, 판화, 데생은 물론 도자기 등 다양한 형태의 미술품 5만 점을 생전에 제작했다. ‘피카소 재단’은 피카소가 78년 동안 1만 3,500점의 그림, 10만 개의 판화, 3만 4,000개의 일러스트레이션을 창작했다고 적었다. 작가와 비평가들은 피카소를 마술사로 여겼으며, 붓을 한 번 휘둘러 주변의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예술가였다고 설명한다.
피카소의 작품은 한 화가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만큼 시기별로 극명하게 다르다. 92세에 달하는 장수의 영향도 있지만 이는 전적으로 피카소의 능력이라고 볼 수 있다. 피카소는 단순히 자수성가한 부유한 예술가가 아니다. 그는 매우 성실한 '일중독자'였다. 거의 매일 8시간씩 그림을 그렸고, 죽기 1년 전에도 200점의 작품을 완성했다. 또한 죽기 12시간 전까지도 그림을 그렸다고 전해진다. 피카소는 평생에 걸쳐 5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는데, 기네스북에 오른다는 자체가 일반인들이 범접할 수 없는 경지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피카소가 예술 분야에서 이를 추구했다는 것은 더욱 경이롭지 않을 수 없다. 피카소가 현대인들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예술가로서, 또한 인간으로서 한계를 뛰어넘으려 했던 불굴의 투지라고 말하는 평론가들도 많다. 1973년 92세의 나이로 운명했지만 그가 갖고 있던 인간의 투혼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y Picasso, 1881. 10. 25~1973. 4. 8)는 흔히 입체주의의 창시자로 일컬어진다. 양식과 매체의 변경에도 기교, 독창성, 해학에 한계가 없이 작품을 제작했던 20세기 최고의 거장임도 분명한 사실이다. 초기 청색시대를 거쳐 종합적 입체주의까지 입체주의 미술양식을 창조했다. 아방가르드 미술 모임의 핵심 인물로, 많은 미술가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피카소의 천재성은 20세기 미술을 지배했고, 상대적으로 20세기의 모든 미술가들은 그의 그늘에 가려진 것처럼 보였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와 같은 대선배들의 계보를 잇는 천부적인 재능을 지녔던 피카소는 기교, 독창성, 해학이라는 측면에서 한계가 없었다. 피카소는 마치 카멜레온처럼 양식과 매체를 변경해가며 많은 작품들을 제작했으나,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독창적이었고 때로는 도발적이기까지 했다. 그는 조르주 브라크, 앙리 마티스, 페르낭 레제와 같은 동시대의 미술가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아실 고르키, 윌렘 데 쿠닝, 데이비드 호크니를 포함한 후대의 미술가들에게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피카소는 일찍이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고, 열한 살이 되던 해에 라코루냐 미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림을 공부했다. 피카소는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놀라운 사실주의 작품인 〈첫 영성체〉(1896)를 그렸다. 이 작품은 그가 옛 거장들의 구도와 색채, 그리고 기법을 완전히 습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피카소는 다른 미술가들의 양식을 받아들였는데, 그 결과 그의 작품 <페파 아주머니의 초상>(1896)은 마치 페테르 파울 루벤스의 그림처럼 보이고, 〈푸른 옷을 입은 여인〉(1901)은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의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1904년에 피카소는 파리에 정착했다. 그곳에서 그는 아방가르드 미술가들과 작가들의 모임에서 핵심적인 인물이 되었으며, 죽을 때까지 프랑스에서 살았다. 피카소가 초기에 제작한 회화와 판화, 그리고 조각 작품들은 청색 시대(1901~1904), 장미 시대(1905~1907), 원시 시대(1908~1909), 분석적 입체주의 시대(1908~1912), 종합적 입체주의 시대(1912~1913)로 나뉜다. 청색 시대의 작품들은 우울한 분위기를 발산한다. 피카소는 청색의 색조를 자주 사용했고, 알코올 중독자, 거지, 매춘부, 방랑자, 빈민들이 마치 엘 그레코의 인물들처럼 길쭉하고 수척한 모습이 특징적이다. 이러한 특징의 작품으로는 〈비극〉(1903)이 있다. 장미 시대에는 핑크색과 오렌지색의 색조가 두드러지며, 〈곡예사 가족〉(1905)에서처럼 어릿광대, 곡예사, 서커스단원들이 등장한다. 원시 시대에는 고대 이베리아 조각과 아프리카 미술, 그리고 오세아니아 미술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선구적인 작품인 〈아비뇽의 아가씨들〉(1907)을 선보였다. 인물들을 각이 지게 묘사한 이 그림은 입체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작품이 되었다.
동료 미술가인 브라크와 함께, 피카소는 구상 작품인 〈기타를 든 여인〉(1911)과 정물화인 〈죽은 새들〉(1912)을 제작하면서, 3차원적인 형태를 2차원의 평면에 묘사하는 입체주의 양식의 독창적인 기법과 이론들을 정립시켰다. 또한, 피카소는 〈기타〉(1912~1913)와 같은 입체주의 조각들에서 3차원의 물체들을 거의 그림같이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공간적인 순서를 반대로 처리했다. 피카소는 브라크와 함께 종합적 입체주의 양식을 발전시켰는데, 〈식탁 위의 병과 포도주 잔〉(1912)과 같은 작품에서처럼 신문, 종이, 헝겊을 콜라주 기법으로 그림 위에 덧붙였다.
피카소의 후기 작품들은 분류하기가 쉽지 않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조각상처럼 견고한 신고전주의적인 구상 작품들을 제작하다가, 1920년대에는 초현실주의 양식으로 옮겨갔으며, 1930년대에는 뛰어난 기교를 선보인 에칭 작품인 〈미노타우로마키〉(1935)에서처럼, 신화적인 주제들을 탐구했다. 그는 활동기간 내내, 구성과 공간, 그리고 기법과 색채에 신경을 썼고, 투우, 기타, 어릿광대와 같은 주제를 반복적으로 채택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란 중에는 벽화 〈게르니카〉(1937)를 제작하여 파시즘에 저항했다. 그는 〈게르니카〉 이후에도 드로잉, 에칭, 회화 연작을 통해 전쟁의 고통을 표현했는데, 에칭 작품인 〈우는 여인〉(1937)이 여기에 속한다. 또한 피카소는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원작을 새롭게 해석한 〈시녀들〉(1957)과 같은 작품들을 통해 선배 미술가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1960년대에는 색채주의 작품들을 제작했으며, 이 중 일부는 신표현주의로의 첫걸음을 내디딘 것으로 보인다.
피카소의 개인사는 그의 미술 양식의 변화 과정만큼이나 유동적이었다.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세 명의 여자로부터 네 명의 아이를 가졌다. 언제나 변화무쌍하고, 항상 독창적이었던 거장 피카소의 작품들은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내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살아 있다. 마드리드에 있는 레이나 소피아 국립미술관에는 방탄유리 뒤편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걸려 있다. 이 작품은 프란시스코 고야의 에칭 연작 '전쟁의 참화'(1810~1820경) 이후로 전쟁의 공포와 잔혹성을 가장 잘 요약한 작품일 것이다. 1936년에 스페인 내란이 발생했을 때 피카소는 프랑스에 살고 있었다. 공화국에 충성하던 피카소는 스페인 정부로부터 1937년에 열린 파리 만국박람회의 스페인관을 위해 작품을 출품해 줄 것을 의뢰받았다.
공화정부에 불복한 파시스트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요청으로, 독일의 비행대가 스페인 바스크 지방의 소도시인 게르니카를 무차별 폭격을 하여, 사망자가 1,600여명에 달했다. 피카소는 이 참사를 의뢰받은 그림의 주제로 채택하여 파시스트들에게 강력히 항의하고자 했다. 가로 23피트(7.8미터), 세로 11피트(3.5미터) 크기의 거대한 캔버스에 회색과 흰색의 제한적인 색채가 칠해졌다. 단색의 색조는 참사의 슬픔을 나타내고 신문 보도의 이미지를 연출하고 있다. 황소, 말, 백열전구, 믿기지 않는 공포에 괴로운 표정으로 허둥대며 달리는 사람들, 꽃을 든 팔, 부서진 검 등 풍부한 이미지들에 다양한 해석이 내려져왔으나, 피카소는 그들에게 적절한 의미를 부여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아이를 끌어안고 울부짖고 있는 여인상의 의미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파리를 시작으로 해서 유럽을 순회하며 전시되었고, 이후 뉴욕 근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 스페인이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을 때 반환해 달라는 피카소의 요청에 따라, 프랑코가 죽은 후, 1981년에 스페인으로 돌아왔다.
피카소는 1937년 〈게르니카〉라는 대작을 완성했다. 죽은 아이들과 불길에 휩싸인 집, 깨진 동물의 머리 등을 그려 전쟁의 참혹상을 고발했다. 그런데 그는 이 그림에서 유독 붉은색을 쓰지 않았다. 참혹함을 강조하기 위해 오히려 검정, 흰색, 회색만을 썼다. 흑백의 대조만이 강조되는 거대한 화폭에는 폭탄도 전투기도 없다. 그러나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피카소의 그림은 전쟁의 참혹상을 처절하게 보여주었고 지도상에서 사라진 마을 게르니카를 사람들에게 증언해 주었다.
1944년 파리가 해방 된 후, 피카소는 공산당에 입당했다. 그는 정치적인 그림들을 그렸다. 한동안 그의 주제는 ‘전쟁과 평화’였다. 1951년에는 〈한국에서의 대학살〉, 1954년에는 〈전쟁과 평화〉를 그렸다. 그가 〈한국에서의 대학살〉을 그렸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불만을 터뜨렸다. 대중이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그림을 그린다는 이유였다. 1953년 한 잡지의 표지화로 스탈린의 초상을 그리면서 그는 다시 공산당과 충돌했다. 표지에 실린 스탈린의 얼굴이 너무도 젊었던 것이다. 공산당원들의 비난 중 하나는 이러했다. “오늘 스탈린의 가혹한 죽음이 찾아온 것에 이어 그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피카소는 혼란과 몰이해의 씨를 뿌릴 위험을 무릅쓰고 있다.” 피카소는 이제 다른 길을 걸었다. 그는 역사를 포기했다. 가장 강한 것은 그림이다. 그는 어느 노트의 마지막 장에 이렇게 썼다. “그림은 나보다 강하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그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게 만든다.” 그는 대가들을 상대로 버거운 대결을 시도했다. 대가들의 그림이 심하게 변형되어 그의 화폭 안으로 들어왔다. 1957년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이 그의 화폭에서 변형되었다. 그리고 1960-61년에는 세잔의 〈풀밭 위의 점심〉도 변형되었다.
80대로 접어들어서도 그림과 도예 작업을 계속했다. 특히 이 시기는 판화의 시기였다. 고령의 나이임에도 실험을 계속했다. 피카소는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판화의 역사가 쌓아온 기존의 규칙들을 무시했다.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피카소는 1973년 4월 8일. 프랑스 남부 무쟁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아흔두 해 삶 동안 많은 친구와 여인이 있었다. 그들은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카사게마스의 자살은 그의 그림을 청색으로 가득 차게 했고, 페르낭드는 그 청색을 화폭에서 몰아냈다. 러시아의 발레리나 올가는 그의 그림에 한동안 질서와 안정을 부여했다. 도라 마르는 〈게르니카〉에서 눈물을 흘리는 여인으로 나타났고, 프랑수아 질로는 빛이 가득한 앙티프 시절을 지배한 여인이다. 그의 임종을 지켜 본 부인 자크린은 화가와 모델 연작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이다.
1989년 〈라팽 아질에서〉가 4070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다.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은 한때 자신의 캔버스를 땔감 삼아 추위를 녹여야 했다. 그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단 한 점도 사지 않았던 프랑스의 미술관들은 이제 이렇게 말한다. “피카소의 국적은 에스파냐이지만, 그를 키운 토양은 분명 프랑스이다.” 피카소가 없었다면 큐비즘이 있었을까? 에디슨이 없었더라도 전구는 발명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큐비즘은 그렇지 않다. 20세기 미술 최대의 혁명, 큐비즘은 피카소의 것이다. 그가 없었다면 큐비즘도 없었을 것이고, 현대 미술은 많은 부분이 현재와는 달라져 있을 것이다. 피카소 이후 화가들은 남의 마음에 드는 그림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그릴 권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한 번도 어린아이처럼 서투른 그림을 그린 적이 없다던 그 사내 덕분에···.
저자 : 이종호
고려대학교 건축공학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하고 프랑스로 유학을 떠나 페르피냥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와 과학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문부성이 주최하는 우수 논문상을 수상했으며 해외 유치 과학자로 귀국해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한국에너지기술연구원(KIER) 등에서 연구했다. 과학기술처장관상, 태양에너지학회상, 한국발명교육학회 논문상, 고려대학교 이정덕 건축상, 국민훈장 석류장 등을 받았다. 프랑스 유학 시절부터 세계의 여러 유적지를 탐사하며 연구해 기초 없이 빌딩을 50층 이상 올릴 수 있는 ‘역피라미드 공법’을 비롯해 특허 10여개를 20여 개국에 출원하는 등, 이론과 실제를 넘나들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장(과학저술가)으로 신문, 잡지 및 인터넷에도 활발히 기고하는 등 과학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4차 산업혁명과 미래 직업』, 『로봇은 인간을 지배할 수 있을까?』, 『피라미드』, 『역사로 여는 과학문화유산답사기』, 『영화 속 오류』, 『유네스코 선정 한국의 세계문화유산』, 『유적으로 보는 우리 역사』 등 100여권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