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집 - 대한제국 마지막 황족의 비사
권비영 지음 / 특별한서재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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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에 의해 강제 한일합방된 후 우리 민족과 우리 나라는 일제의 식민 지배로 들어갔다. 이후 우리는 근대사에서 우리의 역사를 쓰지 못했고, 우리나라를 다스리던 조선의 마지막 왕들도 강제 폐위됐다. 고종과 순종이 일제의 입맛에 따라 차례로 폐위되었다. 이로써 518년 간 이어오던 조선이란 국호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고종은 1898년 청나라의 연호를 폐지하고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정하고 '광무'란 연호를 사용했다. 지금의 우리 국기인 태극기의 원형도 이때 처음으로 정식 국기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정식으로 황제라 칭했고, 자신을 칭할 때 '과인'을 '짐'으로 바꿨다. 그러나 이미 일제의 침략과 국력은 청과 러시아를 넘어 아시아 전역에 손을 뻗친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한 목표를 착착 진행해 나갔다. 역사는 고종과 그의 아들 순종이 이어받아 3년간 왕으로 앉아 있는 유명무실의 황제 칭호도 1910년 한일합방으로 박탈됐다. 순종이 역사적으로 마지막 왕으로 기록됐다.

고종은 조선 말 외세의 침략이 지속적으로 무력을 앞세워 나라를 개방하라는 압력에 버티지 못하고,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던 일제에 의해 강제 폐위되고 순종마저 짧은 기간 명칭만 왕이지 제대로 통치하지 못했다. 왕이 힘이 없으니 왕실 가족의 운명은 바람 앞에 촛불 신세였다.

이 시기 고종의 딸인 덕혜옹주의 삶을 소설로 쓴 권비영 작가의 『덕혜옹주』는 왕실 식구들의 비참한 운명과 삶의 모습을 그려내 독자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영화로도 제작돼 베스트셀러 작가로 뛰어올랐다. 작가 권비영은 대한제국과 운명을 함께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 이은과 직계손 이구의 이야기를 이 책 『잃어버린 집』에 담았다. 그들의 마지막은 비참하고 잠시도 자유가 주어지지 않은 감옥 같은 일본의 집에서 어떻게 생활했는지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이은은 덕혜옹주의 오빠이자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다. 이은은 고종의 일곱째 아들로 1907년 형인 순종이 즉위한 뒤에 황태자가 되었고,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이름뿐이지만 형식적으로 영친왕의 지위를 계승했다. 1907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제에 의해 일본 왕족인 마사코와 정략결혼을 하였으며, 일본 왕족으로 대우를 받으며 일본군 장성을 지내기도 한 인물이다. 우리는 그를 영친왕으로 부른다. 영친왕 이은의 어머니는 순헌황귀비 엄씨이다. 이은은 1900년 영친왕(英親王)이라는 봉호를 받았으며, 1907년 이복형인 순종이 자식이 없는 상태에서 황위에 올랐을 때 형인 의친왕을 제치고 황태자가 되었다. 그리고 1910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순종이 ‘이왕(李王)’으로 불리게 된 뒤에는 ‘이왕세자’가 되었다가 1926년 순종이 죽은 뒤에는 제2대 이왕으로 즉위하였다.

영친왕은 1907년 황태자가 된 뒤에 통감으로 부임한 이토 히로부미를 후견인으로 삼아 일본으로 건너가 생활했으며, 1911년 일본의 육군유년학교에 입학하였다. 1915년에는 일본의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 졸업하였다. 1920년 일본의 왕족인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梨本宮 方子, 한국이름 이방자)와 결혼하여 이듬해 아들을 낳았으나, 첫째아들인 이진은 1922년 한국을 방문하던 중에 사망했다.

이은은 1926년 순종이 죽자 창덕궁에서 이왕(李王)의 자리에 올랐으나 곧바로 일본으로 건너갔다. 1931년 둘째아들인 이구(李玖)를 낳았고, 일본 육군 장교로 복무하여 1940년 육군 중장이 되었다. 1943년 일본의 제1항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복무하다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뒤에 예편되었다. 그리고 1947년 일본 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의 지위를 상실했으며, 그해 10월 18일에는 일본 왕족의 명단에서도 제외되어 일본 국적도 잃었다.

 


 

영친왕은 상해임시정부로의 망명까지 추진하며 반일정신을 고수한 의친왕 이강(李堈)을 제치고 일제의 영향으로 황태자의 자리에 올랐을 뿐 아니라, 일본 왕족과 결혼하고 일본군 장성을 지내는 등 일제에 순응하는 무기력한 삶을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영친왕의 한국으로의 귀환은 반대에 부닥쳐 실현되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57년 일본 국적을 취득하였고, 미국으로의 이민을 추진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들인 이구의 대학 졸업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1959년 3월 뇌경색으로 쓰러진 뒤 다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러다 5·16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뒤인 1962년 12월 15일 한국 정부에 의해 영친왕 부부의 대한민국 국적 회복이 고시되면서 이듬해인 1963년 11월 22일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한국으로 귀국했다. 그 뒤 병상에 있다가 1970년 5월 1일에 사망하여 아버지 고종이 묻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의 홍유릉 영원(英園)에 안장되었다. 사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그에게 의민(懿愍)이라는 시호를 붙여 의민황태자라는 명칭이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는 문중에서 사적으로 붙인 것으로 공적인 시호는 아니라고 한다.

'친왕(親王)'이란 본래 황제가 귀비나 후궁들 사이에서 낳은 아들에게 붙이는 호칭으로, 시대에 따라서는 황태자를 제외한 황제의 아들이나 황제의 형제들에게 사용되기도 했다. 〈고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1900년(고종 37) 8월 8일 탁지부 대신인 조병식이 친왕(親王) 봉호망단자에 관해 고종에게 보고하자, 고종이 직접 의친왕과 영친왕의 봉호를 정했다고 전해진다. 곧 영친왕은 이은(李垠)의 대한제국 당시의 공식적인 지위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이 소설 『잃어버린 집』은 영친왕 이은과 그의 아들 이구의 삶에 대해 조명하고 있다. 제호로 쓰인 '아름다운 집'은 영친왕의 부인인 마사코와 함께 살던 일본의 집을 의미한다.

 


 

이 소설은 권비영 작가가 오랜 세월 품어 온, 『덕혜옹주』에 이어서 쓴 또 다른 대한제국의 이야기다. 『잃어버린 집』은 일제강점기에 조선과 일본 황실의 정략결혼으로 만난 이은(영친왕)과 마사코(이방자 여사)의 이야기부터 시작된다. 나라를 빼앗긴 황태자 이은은 그 어떤 사소한 행동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는 무력함에 고통스러워하고, 마사코는 그런 그의 옆에서 일본인으로서 죄책감을 느끼고 이은의 고통을 이해하며, 사랑하는 이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아픔을 남몰래 견딘다.

이후 소설은 그들의 아들인 이구와 부인 줄리아의 사연, 이승만 대통령의 환국 거부 등으로 뻗어나가며 독립 후에도 이어진 대한제국 황실의 고통을 이야기한다. 죽음으로 육신을 벗어난 이구의 영혼을 통해 독자들은 나라를 빼앗긴 당시 대한제국 황실의 무력감과 괴로움, 독립을 간절히 바랐던 조선인들의 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끼게 된다. 권비영 작가의 강점인 대한제국의 역사적 비극을 담담하게, 하지만 가슴 먹먹하게 그려내며 『덕혜옹주』의 계보를 잇는 소설이다.

『잃어버린 집』에서는 영친왕 이은과 그의 아들 이구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들의 배우자인 마사코와 줄리아 멀록의 이야기를 함께 담았다. 나라를 빼앗긴 영친왕 이은의 곁에서 일생을 헌신하며 살아온 일본인 마사코의 삶, 오직 사랑만으로 낯선 타지에 건너와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우크라이나계 미국인 줄리아 멀록. 정통성 논란에 시달리고, 때로는 사랑하는 이에게서도 거리감을 느끼고, 오랜 시간 한국에서 살아도 끝내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삶을 돌아보는 동안 우리는 전쟁과 인종, 국적을 가르는 사랑에 대한 숭고함을 느끼게 된다. 또한 마사코의 앞에만 나타나는 기묘하고 신비로운 ‘아리사’의 존재를 통해 무가치한 전쟁, 갈등에서 벗어난 화합의 의미가 무엇인지 되새기게 된다. 『잃어버린 집』은 저자가 오래 묵혀온 시간만큼 묵직한 여운을 주는 소설이다. 베스트셀러 작가 권비영은 대한제국의 비극에 전쟁과 인종, 국적을 품어 안는 사랑, 그 아름답고 아련한 이야기 속에서 독자들은 또 한 번 『덕혜옹주』의 아련하고 애틋한 처지를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

 


 

저자 권비영은 이 작품을 출간한 후 〈채녈 예스〉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소설을 쓴 동기에 대해 "경술국치 100년이 다가올 즈음, 일제 강점기 황족들이 겪었던 비사를 아무도 소설로 쓰지 않았다는 생각에 나라도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자료가 너무 부족해서 쓰다 말다 지쳐갈 즈음 일본인 작가가 쓴 『덕혜희』를 보고 결심을 굳혔지요. 우리 역사 속 인물을 내 손으로 써야겠다고요. 그 후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이 깊어져서 위안부 이야기 『몽화』와 여성 독립운동가 이야기 『하란사』를 썼고 이번에 『잃어버린 집』을 쓰게 된 것"이라고 말했다.

저자는 또 "마사코(이방자 여사)와 줄리아 멀록이라는 두 인물도 이 책에서 빠질 수 없는 중심 인물이었다. 두 여인이 몰락한 대한제국의 황손들과 결혼한 것은 운명이기도 하고 선택이기도 했지만, 그녀들이 사랑하는 남자를 위해 헌신한 일은 길이 기려야 할 것 같다. 특히 이방자 여사는 영왕이 하고자 했던 일을 대신해 장애인들을 위한 많은 사업을 했다. 두 여인의 삶을 보면 사랑은 고통을 수반하며 지극히 인내해야 하는 게 분명해 보였고, 이를 소설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두 인물에 무게를 두고 이번 작품을 집필한 이유를 밝혔다.

저자는 이와 함께 이구의 죽음의 원인을 정확히 밝히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진실이라는 것이 때로는 허구보다 힘이 없다는 생각을 때때로 한다. 이구의 사인은 심장 마비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고종의 독살설처럼 확실한 것은 아니다"며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상황으로 몰고 간 역사적 현실 앞에서 어떤 죽음의 방식을 겪었더라도, 그의 사인을 우리가 정확하게 알지는 못했을 것 같다. 독자의 상상이 가장 정확할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독자들에게 역사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귀띔했다.

 


 

 

“날씨가 참 좋지요?”

그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마사코를 한참 바라보더니 조용히 말했다.

“네, 날씨가 좋군요.”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하늘을 바라보다 마사코를 보고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스며 있는 어색함과 쓸쓸함이 오히려 측은하게 느껴졌다. 학업을 핑계 삼아, 어린 나이에 조국을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그의 마음을 헤아려보면 그 쓸쓸한 웃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인들 일본 여인을 배필로 맞으리라는 생각을 상상으로나마 했을까…….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소위에 임관된 그는 절제된 말투와 행동으로 군인다운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단둘이 있을 때는 부드러운 눈빛을 가진 외로운 청년이었다. 조선과 일본의 융화를 위해 진행되는 정략결혼이었지만 마사코는 그를 보는 순간 그의 가슴에 흐르는 따뜻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온화하고 마음 따뜻한 청년 이 은에게 시집가는 것이야.’

마사코는 스스로에게 그렇게 타일렀다. 처음 만나는 자리라 어색하고 부담스러웠지만 마사코는 그의 눈빛을 보고 마음을 놓았다. 온화하고 따뜻하며 말을 아끼는 사람. 마사코에게 이 은은 그렇게 각인되었다.(p.23~24)

 

저자 : 권비영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2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다. 어려서부터 글쓰기를 좋아해 소설가 되는 게 꿈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소설을 썼는데, 그걸 보신 선생님들로부터 칭찬과 주목을 받았다. 곧 소설가가 될 거라 믿었다. 정말 그런 줄 알았다. 그러나 소설가의 길은 멀고 아득했다. 신춘문예에도 몇 번 떨어졌다. 박완서 선생님을 마음의 멘토로 삼은 덕에, 늦게나마 1995년에 신라문학대상으로 등단의 과정을 거쳤다.

2005년 첫 창작집 『그 겨울의 우화』 출간 후 2009년 세상에 내놓은 장편소설 『덕혜옹주』는 독자들의 과분한 사랑을 받았다. 덕혜옹주는 영화화되었으며 러시아 외 5개 국어로 번역되었다. 이어 다문화가족의 이야기 『은주』, 일제강점기 세 여자 이야기 『몽화』와 중단편집 『달의 행로』, 이 시대 어머니들의 이야기 『엄니』를 펴냈다. 2019년 말에 『택배로 부탁해요』라는 동화도 한 권 냈다. 올해 2021년 여름 여성독립운동가 『하란사』를 출간하고, 가을이 깊어가는 시점에 창작집 『벨롱장에서 만난 사람』으로 소설 쓴 흔적을 더 보탠다. 현재 한국소설가협회와 소설21세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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닳아지는 것들
가재산 지음 / 작가와비평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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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만 보며 숨 가쁘게 달리는 삶에 익숙하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혼란과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은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처지였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일만 하면 굶지 않을 만큼의 급여도 주어짐으로써 그 시절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에 매달렸다. 통행금지 시간(밤 12시~새벽 4시) 이외에는 온통 일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직장까지 출퇴근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나마 형편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는 데 재미를 붙일 수 있었고, 격무와 힘든 노동자들의 삶은 새벽 별 보고 출근해서 야근까지 마쳐야 직장에서 풀려날 정도였지만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일부러 야근을 자청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몇 푼의 돈이라도 더 벌어야 가족이 굶지 않고, 또 자녀 교육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전후 태어난 '베이비 부머' 세대는 일생 일만 죽어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가 나아지고 나라가 부자가 되었어도 당시 자식들을 죽어라 가르친 사람들의 가정은 여전히 힘들게 공부한다. 학생 때는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에 전념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취업 준비에 매달리며, 사회인이 되어서는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분명 생활이나 경제적 면에서는 훨씬 나아졌는데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여전하다.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하며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보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가끔씩 정신을 가다듬을 땐 무언가 잊고 살았다는 자각을 하지만 삶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 책 『닳아지는 것들』의 저자 가재산은 앞서 언급한 전후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 될 듯하다. 이젠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노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그 무언가로서 저자는 ‘부지깽이’를 찾았다. 부지깽이란 아궁이 따위에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끌어내거나 거두어 넣거나 하는 데 쓰는 가느스름한 막대기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하찮은 물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비슷한 모양의 물건은 부지깽이로 쓰일 수 있다. 나무토막이든 쇠막대기든... 저자는 이처럼 주변의 닳아지는 것들을 돌아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에 닳아 없어지는 것들은 그 존재를 알아채기 어렵지만, 그 희생 덕분에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고 새로워진다. 중요한 발견이다. 어쩌면 자신의 삶이 그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렇게 닳아지며 삶을 완성한 것들에 대한 저자의 문학적 답례이자 한 템포 쉬어가도 된다는 독자들에 대한 따스한 권유이이고 하다.

저자의 사유는 닳아지는 것들로 맷돌, 빨래판, 부지깽이 같은 일상의 물건들만 포함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 학창 시절의 친구,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던 선생님, 스치며 만났던 특별한 인연 등 나와 함께 했고 스쳤던 모든 인연이 자아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고 사유의 확대를 거쳐 다양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이 에세이를 펴냈다. 책에 담긴 다양한 만남과 그에 얽힌 여러 에피소드는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색을 입히며 저자의 인생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

저자는 ‘녹스는 것’과 ‘닳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낡고 녹슬어가는 인생과 열심히 사용해서 닳는 삶에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하루하루 서서히 녹슬어 가기보다 닳아 없어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저자의 인간적인 다짐과 바람을 담고 있다. 지나온 생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찬 포부가 돋보인다. 자신을 돌보는 것을 넘어 주변의 어려움을 살피고, 가진 것을 베푸는 일의 보람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책이 가진 단단함은 어느새 독자에게 닿게 된다.

 


 

책에 따르면 고희의 나이를 넘긴 저자는 이제 흥미, 재미, 의미 즉 삼미(三味)를 찾아 낯선 여행을 시작하였다. 나이를 잊고 새로운 일이나 세상 변화에 호기심을 잃지 않는 흥미, 기왕 하는 일 즐겁고 신나게 하자는 재미,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일보다 남을 도우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의미까지.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기 위한 자신과의 약속으로 탄생한 『닳아지는 것들』이 삶의 전환점에 선 이들에게 미지의 여행을 시작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라 기대한다. 저자는 나를 위한 일보다는 남을 도와주고 봉사를 통해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시작해 이른바 '노년의 사치'라고 말하지만 봉사가 사치일 리 없다. 자신의 일을 겸허하게 표현하는 일일 게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한다. 실제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장수 시대를 멋지게 살아가려면 인생의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그간 살아온 습관부터 먼저 바꾸어야 한다. 나이 들면서 누군가의 강요에 따르지 않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이기심을 넘어 이타심을 발휘해 자유롭게 항해하는 삶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p.220)

고희(古稀)란 공자가 자신의 나이 70을 이르는 말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칠순'이란 뜻이다. 원래 공자의 뜻은 잘 모르지만 사전적 풀이에 따르면 "고래(古來)로 드문 나이"란 뜻이다. 2,500년 전 일이니 그때 나이 70까지 산 사람은 드물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단어는 두보의 「곡강시(曲江詩)」에도 나오는 말이다. 두보는 당나라 최고 시인으로 번영했던 조국이 안사지란(安史之亂)을 겪은 뒤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채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정의 기강은 흐트러져 있고 자신은 그저 술에 취해 곡강 연못가를 해맬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심정을 그리고 있다.

 


 

고희의 나이에 저자는 에쓴 보람이 있었던 듯하다. 새롭고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2년 전 꿈꾸지도 못했던 수필가로 등단해 문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세상을 즐겁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과 출판사와 함께 '디지털책쓰기코칭협회'를 만들어 그 산하에 시니어들의 책 쓰기를 지원하는 10개 대학을 만드는 중이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이 일을 재미로 하다 보니 보람도 있고 하는 일마다 흥과 신바람이 난다. 미얀마에 200명 장학생을 지원하고 교육시키는 일, 소주 가씨 문중의 일을 도맡아 시작한 일 그리고 '한국디지털문인협회'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도 봉사이자 의미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서 하는 일이니 어쩌면 내게는 '노년의 사치'일 수도 있다.

노년(?)의 트로피의 소개엔 저자도 흥이 저절로 나나 보다. 우리 나이로 올 76세인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사실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21년 4월의 일이다. 윤여정의 솔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수상 소감은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윤여정은 "전에는 생계형 배우여서 작품을 고를 수 없었는데, 이젠 마음에 드는 영화에는 돈을 안 줘도 출연한다."며 마음대로 작품을 고르는 게 '나이가 들면서 내가 누릴 수 있게 된 사치'라고 말했다고 소개한다. '노년의 사치'란 말이 저자의 말이 아니라 윤여정의 말이었음을 귀띔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준 〈미나리〉 출연도 이런 소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노년의 사치를 부리고 싶다면 윤여정의소망은 아카데미 트로피라는 커다란 선물로 돌아왔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여행은 무한한 즐거움과 꿈을 주지만 때로는 소중한 깨달음을 준다. 지금과는 다른 더 멋진 세상을 향한 저자의 인생 여행은 막 출발했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마음의 문」, 2장 「삶의 터닝 포인트」, 3장 「닳아지는 것들」, 4장 「마음의 날개」, 5장 「낯선 삼미(三味) 여행」, 6장 「추억의 두레박」 등이다. 1장 첫 글은 앞서 말한 '추억의 부지깽이'이고, 두 번째 글은 '마음의 문' 이야기다. 이에 따르면 세상에는 열 문이 있다. 쪽문, 창문, 대문, 성문, 자동차문···. 문은 살아가는 데 아주 유용하다. 밖이 시끄러운 때 창문을 닫으면 되고, 날씨가 더울 때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면 시원한 바람이 실내로 들어온다. 반가운 손님이 올 때는 미리 문을 열어 제쳐 두지만 도둑 침입을 막으려면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면 된다. 이런 문들은 손잡이나 문고리가 없어서 쉽게 여닫을 수 있고 밖에서도 남이 열 수 있어 편리하다.

19세기 영국의 윌리암 홀먼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작품 중에 〈등불을 든 예수〉라는 그림이 있다. 한밤중에 정원에서 그리스도가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문을 두드리는 그림이다. 예수님이 두드리는 문에는 보통 문과는 달리 문고리가 없다. 혹자는 문을 잘못 그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 그림은 '마음의 문'을 그려 유명해진 그림이다. 사람의 마음에도 문이 있다. '마음의 문'은 손잡이나 문고리가 없다. 꽉 닫힌 마음의 문은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 절대로 열 수 없다. 마음의 문이 열린 정도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열어젖혀 놓기도 하지만 아무리 노크해도 소용없고 힘으로는 열 수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권 중에는 의사표현과 그 전달방법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의사전달에는 7:3이라는 법칙이 있다. 언어가 차지하는 것은 단지 30%에 불과하고 말 이외의 것들, 즉 표정, 제스처, 분위기, 느낌 등으로 전달되는 것이 70%다. 이 30%의 언어적 표현 중에서도 말에 의한 것은 단지 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목소리의 억양, 톤, 크기 등으로 전달된다. 젖먹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이들의 불만이나 욕구를 울음소리 하나만으로도 금방 알아차리는 이유이다.(p.23~24)

 

 

두 번째 장 「삶의 터닝 포인트」의 첫 글은 '내 삶을 바꾼 한 권의 책'은 독자의 관심을 한껏 끌어올렸다. 미국 대통령이나 국내 유명인들도 인생의 전환 포인트로 한 권의 책을 소개할 때가 많다. 그 책을 읽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책을 읽고 인생의 목표가 바뀔 수도 있고, 더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책의 영향은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책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기에 관심 또한 높다. 저자는 '얼마 전 인천 계양산 밑에 꿈에 그리던 개인 도서관을 만들어 서재 겸 사무실로 꾸몄다고 한다. 40여 년간 모은 5천여 권의 책들을 서가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시력이 나빠져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서가에 꽂힌 책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저자가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제시한 책은 『오사카에서 부산에』라는 제목의 오기노 요시가즈의 작품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 책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그 책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30여 권의 책을 쓰게 도었고, 2021년 8월에는 〈한국산문〉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수필가로 등단까지 했다. 저자 오기노 요시가즈는 NHK 일본 국영방송 편집국장을 지냈고, 지한파로 한국을 꽤나 좋아했다. 그는 50여 년 전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 방송을 일본 최초로 기획했으며, 〈일본 속의 한국〉 등 한국 관련 소식을 일본에 확산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분이다. 저자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1980년 초 상사 주재원으로 오사카에 근무할 당시 경관이 좋아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녹지공원'이라는 조그만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그때 그가 바로 앞집에 단신 부임해 살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했을 정도로 친근하게 지냈다. 그는 한국 음식을 유독 좋아했고 한식당에 가면 한국에서 갓 들여온 김치와 소주도 함께 마시며 금방 친해졌다. 특히 그는 일본 사람들은 먹지 않던 곱창전골을 유독 즐겼다. 식사 자리에서 어느새 취기가 돌면 2차로 가라오케가 있는 술집에 들렀다. 서투르지만 저자가 일본 노래를 한 곡 부르면 그는 보란 듯이 유창한 한국어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며 응수했다.

 


 

이후 많은 만남을 이어가며 그와 친하게 지내다 88올림픽 때 업무 차 서울에 와 그가 내민 책이 『오사카에서 부산에』였다. 정년 퇴임식을 출판 기념회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가 이 책의 서문에서 "한일관계가 어렵게 한일협정을 통해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서로 마음과 마음이 열려야만 진정한 정상화라는 것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 책에 등장한 한국인 서른 세 명의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독립선언문 발기인과도 같은 의미 있는 숫자로 그와 친분이 두터운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 저자의 개인적인 이유와 저자의 터닝 포인트가 된 책 한 권은 그렇게 사연을 갖고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를 통해 제시한 말은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뒷모습은 삶의 이력서다.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려고 허둥대며 살아가는 것은 보기 좋은 앞모습일 수 있지만 뒷모습이 진정한 자신이 남긴 궤적이요, 꾸밀 수 없는 참모습이다."(p.319)

 

저자 : 가재산

 

삼성물산과 회장 비서실 등 계열사에서 25년간 근무 후 인사제도, 인재육성 관련한 강의와 컨설팅으로 제2의 삶을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살아왔다. 앞으로는 흥미로운 일을 재미있게 하되, 그 일이 의미(意味)가 있어야 하는, 즉 제3막 인생은 삼미(三味) 인생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현재 ‘한류경영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청소년 빛과 나눔 장학협회’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시니어들에게 기획부터 출간까지 원스톱으로 도와주는 ‘디지털책쓰기코칭협회’ 회장을 맡아 스마트폰과 챗GPT를 활용하는 디지털 방식의 책과 글쓰기 확산에 노력하고 있다. 《한국산문》으로 등단하여 수필가로 활약하며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책쓰기에도 열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형 팀제』, 『10년 후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삼성이 강한 진짜 이유』, 『아름다운 뒤태』, 공저로는 『경영 한류』, 『직원이 행복한 회사』, 『세상에 핸드폰으로 책을 쓰다니!』, 『왜 지금 한국인가』 등 35권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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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죄책 -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을 분석한 정신과 의사의 심층 보고서
노다 마사아키 지음, 서혜영 옮김 / 또다른우주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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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방류로 세계는 다시 한 번 떠들썩하다. 방사능 오염수 방류 결정에 북한 중국 러시아 등 인접 국가들은 반대 성명은 물론 이를 정치·외교적 문제로 다루고 있다. 우리 대한민국은 기준치 이하의 철저한 검증을 통한 방류는 이해할 수 있다는 외교적 견지를 보이고 있다. 일본의 방사능 오염수 방류를 둘러싸고 수산자원 오염을 우려하는 민간의 요구보다는 국가 정책의 외교적 해결을 택한 일본의 오염수 방류는 과연 안전할까? 근현대사에서 일본의 씻을 수 없는 침략 잔혹 행위의 피해국인 대한민국에서의 묵인은 의외라는 시사 논평이 있긴 하지만, 오늘 신문·방송의 보도에서도 기준치 10분의 1 수준이라는 '용인'에 무게를 두고 있다. 독자는 사실 일본의 오염수 방류는 인근 국가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방류 강행'을 선택한 것은 외교적 자신감과 미국의 찬성에 힘입은 바 크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입장에서는 세계 패권국가로서의 입지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일본을 앞세운 '실험'에 가까운 찬성이 아닐까 생각도 해본다. 중국과 러시아의 반대는 당연히 미국과의 관계에서 대립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이 책 『전쟁과 죄책』은 일본의 정신과 의사인 노다 마사아키는 과거를 부인한 채 물질주의로 치달아온 일본 사회의 병리 현상을 해부하기 위해 아버지의 전쟁을 조사하고 아버지뻘의 전범들을 인터뷰하며 인간성 회복의 길을 찾아 나선 기록이다. 이 책에서는 권위에 복종하는 개개인의 심리에서 한층 더 나아가 수직적인 위계질서 속에서 인간을 도구화하며 감정을 마비시킨 일본 사회와 문화에 초점을 맞춘다. 한반도, 중국, 남아시아를 침략하고 지배했던 일본 천황제 군국주의는 사람들의 정신을 황폐하게 하고 아직도 그 잔재가 일본과 일본이 침략했던 국가들에 깊숙이 남아있다. 한국 근현대사는 일본 군국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한국 독자들은 가해 군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다가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마주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저자 노다 마사아키는 이 책을 통해 인간이 얼마나 쉽게 권위에 복종해 부도덕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보여준 밀그램 실험*으로 ‘악의 평범성’을 입증하고 더욱 깊은 의미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군국주의 시대 일본은 한국과 중국, 동남아시아 사람들을 침략하고 지배하며 끔찍한 고통과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겨줬다. 특히 ‘731부대’의 생체실험, 난징대학살, 위안부 강제동원 등 일본군의 만행은 ‘인간은 과연 어디까지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가해자인 일본군은 이 끔찍한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이 책의 부제는 「일본 군국주의 전범들을 분석한 정신과 의사의 심층 보고서」다. 저자인 비교문화정신의학을 전공한 일본 교토여자대학의 노다 마사아키 교수는 1993년부터 전쟁의 상흔에 시달리는 일본인들을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군국주의 시절 잔혹행위를 벌였던 군의관, 장교, 특무, 헌병들을 만나 그들의 정신세계를 깊숙이 들여다본다.

이 책은 일본 군국주의가 평범한 일본인 개인을 어떤 정신상태로 몰아넣었고, 학살극을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양심을 지킨 극소수의 사람들은 무엇이 달랐으며, 전쟁범죄를 죄악으로 인정하지 않고 부인하며 망각하길 강요하는 일본의 극우적 분위기가 어떻게 사회를 빈곤하게 만들어왔는가를 치밀하고 솔직하게 분석한다. 2000년 『전쟁과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우리말 번역본이 출간됐다 절판됐는데, 이번 책은 2022년 나온 일본 문고판의 서문 등을 포함했다.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국의 면모를 갖춰 가던 일본은 중국과 러시아 등 인근 강대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두 차례 모두 승리를 거둠으로써 세계의 강대국으로 부상했고, 급기야 태평양을 제패하기 위해 미국 태평양 함대의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함으로써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이미 수십 년 전 중국과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본격적으로 세계 제패를 위한 야욕을 드러낸 것이다. 더욱이 일본은 제2치 세계대전 직전 1937년 '중일 전쟁'에서도 승리를 거둠으로써 전선을 아시아 제패는 '따논 당상'이었고 일본의 지식인과 군부는 자신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식량과 물자 보급이 원활하지 못해 시간이 지연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일본은 불가피하게 약탈을 전제로, 자국보다 훨씬 더 거대한 영토와 인구를 지닌 중국을 상대로 한 ‘15년 전쟁’에서, 동남아시아 각국과 태평양의 섬들에서 벌인 태평양전쟁에서, 전쟁이란 더 이상 ‘총을 든 군인들끼리 싸우는 것’이 아니었다.

 


 

이에 따라 일본의 아시아에서의 전쟁은 정규전보다는 비무장 주민들을 학살하고 고문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731부대가 아닌 일반 부대에서도 군의관들이 일상적으로 농민들을 생체 해부하고, 초보 병사들은 살아 있는 포로들을 상대로 총검술 연습을 했다. 그런데도 일본군의 ‘전쟁신경증’ 발생률은 베트남전 참전 미군이나 아프가니스탄전쟁 참전 소련군에 비해 극도로 낮았다(17장)고 저자는 분석하고 있다. 다만 일종의 거식증인 ‘전쟁 영양실조증(p.104)’으로 미라처럼 말라 죽어가는 군인들이 있었다. 모든 악조건을 이겨내는 ‘정신주의’를 강조하며 정신적 상처를 인정하지 않는 일본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환자들의 고통은 신체 증상으로 나타났다고 저자는 분석한 것이다.

독일의 나치 전범들은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단죄되고, 오랜 추적 끝에 검거되어 처벌받기도 했지만 일본은 의외로 미국의 관용을 이끌어냈다. 독일 분할 점령에 의한 미국측 점령국인 서독은 처음에는 자신의 죄를 외면했지만, 빌리 브란트 총리가 폴란드에 사죄한 이후 1980년대부터는 적극적으로 나치의 역사를 가르쳤다. 정신과 의사인 저자 노다 마사아키는 독일 사회가 과거를 뉘우치지 않았다면 유럽 각국이 독일의 통일을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지적하며, 이와는 달리 일본에서는 전쟁터에 남겨졌던 군인들만 처형당하고 수용소 생활을 했을 뿐, 주요 전범들은 제대로 처벌받지 않고 사회 전체가 과거를 외면한 채, 군국주의를 추구하던 군인들이 물질주의를 추구하는 ‘회사인간’으로 변모했을 뿐이라고 분석한다. ‘권위적인 남성으로서 자만에 찬 일생을 산’ 아버지는 군의관으로 참전했지만, 전쟁에 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저자는 아버지의 전쟁을 조사하고 아버지뻘의 노병들을 인터뷰하며 인간성 회복의 길을 찾아 나섰다.

유대인을 학살한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한나 아렌트는 성실하고 평범해 보이는 그의 잔학행위를 ‘악의 평범성’이란 개념으로 설명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심리학자 밀그램은 평범한 사람들이 권위에 복종해서 타인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강한 전기충격을 가하는 실험을 통해 악의 평범성을 입증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에서도 8장에서 밀그램 실험의 의의를 분석하고 일본군에게 적용한다. 그러나 이 책 전반에서 저자의 분석은 권위에 복종하는 개개인의 심리가 아니라, 수직적인 위계질서 속에서 인간을 도구화하며 감정을 마비시키는 일본 사회와 문화를 향한다. ‘어릴 때부터 경쟁에 몰아넣고, 선망과 굴욕의 경계에서 공격성을 고조시켜 그것을 조직의 힘으로 바꾸는 메커니즘’은 현대 한국과 같다.

 


 

저자가 인터뷰한 전범들은 용기를 내어 전쟁범죄를 고백하고 반전 평화운동을 하는 양심적인 사람들이었지만, 전쟁 당시 직접 자기 손으로 생체 해부하고 여성들을 고문하고 아이들을 학살하면서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전혀 겪지 않았고 악몽을 꾸는 일도 없었다. 난징대학살을 폭로한 군인들의 일기에서는 2만 명의 포로를 학살하면서 감정의 동요 없이 아름다운 자연 풍경에 도취하거나 쇠고기 튀김 등 식욕을 나타낸 기록들도 보인다(p.451~452). 감정이 왜곡된 사람들은 깊은 감정을 느끼는 대신 감상에 쉽게 빠지거나 갑자기 감정이 폭발하곤 했다. 저자는 전범들에게 당시에 어떻게 느꼈는지, 살해한 대상의 얼굴을 기억하는지 등에 대해 잔인하리만큼 집요한 질문을 던지며 그들이 ‘상처 입을 수 있는 인간’ ‘슬픔을 느끼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건조하고 절제된 문체로 담담하게 전달한다.

원서 『??と罪責』은 1998년 출간되었고, 2000년 『전쟁과 인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 『전쟁과 죄책』은 초판을 번역한 서혜영 번역자가 2022년 출간된 문고판을 기준으로 표현을 다듬고 설명을 추가하는 한편, 저자가 한국과 관련해서 펼친 활동을 중심으로 새로 집필한 한국어판 서문과 그동안 독자와 소통하며 느낀 점을 담은 2022년 문고판 후기를 수록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는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중국의 조선족, 탈북민, 사할린의 조선인, 재일한국인과 재일조선인, 북미 한인 등 수많은 한인과의 만남을 되돌아보며,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서 비롯된 한민족 디아스포라로 세계 각지에 흩어진 한인들이 서로 깊이 교류하고 디아스포라를 뛰어넘는 문화를 창조하기를 염원한다. 그 시작점은 과거를 제대로 이해하고 그 바탕 위에서 서로 대화하는 것이다. “이 책은 서구 제국주의를 본떠, 한반도, 중국, 남아시아 사람들을 침략하고 지배했던 일본 천황제 군국주의가 얼마나 사람들의 정신을 황폐하게 했는지, 다시 타자와 교류하는 정신을 되찾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그 내면을 분석한 것이다.” 나치에 대한 자료와 분석은 넘치는데 일본 군국주의에 대한 논의는 극히 드물다. 한국 근현대사는 일본 군국주의와 떼려야 뗄 수 없다. 한국 독자들은 가해 군인들의 심리를 들여다보다가 우리 자신의 모습과 마주치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밀그램 실험은 집단에 동화되고 강력한 권위 뒤에 숨어 스스로의 판단과 양심을 유보하는 인간의 약점을 드러낸다. 『전쟁과 죄책』은 그러한 보편적인 인간적 약점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일본군 전범들의 정신세계를 한 명 한 명 깊숙이 들여다본다. 그들은 왜 죄의식을 전혀 느끼지 않았을까? 왜 피해자에게 전혀 공감하지 못했을까? 어떻게 군대에서도 그렇게 잘 적응하고, 패전 후에도 성실한 직장인으로 잘 적응하고 살았을까?

전범들은 어려서부터 가족 속에서, 마을에서, 학교에서 천황제 이데올로기로 세뇌당하며 군국소년으로 길들여졌다. 정체성이 형성될 때부터 천황과 국가를 위해 나머지를 희생시키는 강자의 논리를 내면화해, 효율과 타산의 관점으로만 인간을 대하게 되었다(p.358). 그런 성장 과정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고, 타인의 감정은 더더욱 공감하지 못하는 ‘상처 입지 않는 인간’ ‘슬픔을 느끼지 못하는 인간’이 되어갔다. 가령 저자는 어려서 부모와 조부모를 포함, 다섯 명의 가족과 사별했던 도미나가를 인터뷰하며 어린 소년의 무력감, 그 무력감을 돌보려 하지 않는 권위적이고 폭력적인 문화가, 반성이나 회의 없이 ‘그대로 전쟁에 빨려 들어가는 청년’을 키웠다고 진단한다. 그래서 타자의 슬픔을 감싸 안는 문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평화는 없다고 생각한다(p.249).

어려서 자신의 고통을 고통으로 느끼지 못했던 도미나가는 중국인 포로를 참수하라는 명령을 받고 난생처음 살인을 저지르면서도 동료와 부하들 앞에서 볼썽사납지 않게 보이는 데만 급급해한다. 그리고 단번에 목을 치는 데 성공하자, ‘이제 제대로 된 군인이 됐다는 실감이 났다’고 한다(p.220). 군의관으로서 생체 해부를 하게 된 유아사 역시 그런 행위에 대한 거부감이나 ‘실습 재료’가 된 농부에 대한 동정심보다는 동료들 앞에서 체면이 깎이지 않는 데만 집착한다(p.38). 자신과 같은 계급, 이해관계가 걸린 사람들과의 관계만이 중요하다.

 


 

특히 사랑이 넘치는 가정에서 자란 선량한 청년 쓰치야(12~13장)의 변신은 섬뜩하다. 가난하고 못 배운 청년도 기회를 잡을 수 있는 헌병대에서 물고문을 처음 접하고 그만두려고 하다가 승진 후 그만두자고 생각이 바뀌고, 나중에는 ‘특고(정치·사상 분야를 담당한 경찰)의 신’이 되어 온갖 사건을 조작하고, 딱 죽지 않을 만큼만 최대치의 고통을 가하는 ‘고문의 달인’이 되어 버린다.

이 책에 등장하는 전범들이 대체로 업무를 수행하며 잔학행위를 저질렀던 데 반해, 자발적으로 온갖 악행을 저지른 나가토미는 가학적인 남성성이 어떻게 형성되는지 교과서적으로 보여준다. 몸이 약하고 민감한 소년을 억지로 ‘강한 남자’로 키워낸 폭력적인 가정환경과 학교 교육이 주입한 천황제 이데올로기는 쉽게 사디즘으로 전화되었다. ‘그의 감정은 이데올로기적인 질서를 갖게 된다. 명예나 수치와 관련된 감정은 비대해지는 반면, 자신이나 타인의 슬픔과 기쁨에는 냉담해진다. 타자와 대등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인간관계는 늘 상하관계가 된다(p.279).’

이들의 모습은 왜 이렇게 익숙할까? 식민지 경험과 한국전쟁, 군부 독재를 거치며 군사문화가 자리 잡은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도 일본과 다르지 않다. 현대 한국의 민간인 학살은 만주국의 항일세력 토벌과 방식이 흡사하다. 만주국 판사로 자유를 탄압하다가 푸순전범관리소에 수용되었을 때는 마르크스주의를 선전하는 데 앞장서고 귀국 후에는 극우 논객으로 변신한 이모리 역시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다. 저자는 그렇게 자기 자신을 조작하고, 타인도 조작 대상으로 보는 이모리 같은 사람들이 일본의 엘리트층을 형성하고 있다고 질타한다(p.296). 그들은 상황에 따라 편리하게 사상을 바꾸며 스스로를 세뇌한다.

 


 

감정이 마비된 전범들은 패전 후 중국의 전범관리소에서 비로소 자기를 돌아볼 기회를 갖게 된다. 일제에 협력한 중국인들은 가차없이 처형당했지만, 저우언라이 총리의 관용 정책에 따라 일본 전범들은 인간적인 대우를 받았다(p.142). 영화 『마지막 황제』에 나온, 꼭두각시 만주국 황제 푸이를 수용했던 푸순전범관리소가 중심이 되어 전범들의 사상 개조에 주력했다. 중국 당국은 전범들의 자백과 피해자들의 고발장을 대조하고, 전범들이 죄를 인정하고 진정으로 뉘우치는지 살펴 1956년 전범 대부분을 기소 면제로 석방하고, 유기형을 선고한 사람들도 1964년까지는 모두 귀국시켰다(p.148). 중국 귀환자들 상당수는 공산 국가에서 세뇌당한 사람들이라는 비난 속에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면서도 전쟁범죄에 대한 증언을 지속하고 중국을 방문해 피해자들에게 사죄하는 등 죽는 순간까지 속죄하고자 했다. 물론 이모리처럼 사회의 기대에 과잉 적응하는 엘리트는 끝내 다른 길을 걸었다.

이 책에는 부도덕한 전쟁에 휘말렸으나 끝까지 양심을 지킨 사람들의 이야기도 나온다. 인간성에 대한 희망을 보여주는 군의관 오가와(2~3장)와 병사 오노시타(14장)가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비교적 선량한 사람들도 죄의식 없이 전쟁범죄를 저지르던 상황에서 그들은 어떻게 타협하지 않고 건강한 정신을 지킬 수 있었을까?

총검술 연습을 위해 포로를 참수하라는 명령을 거부한 몇몇 승려 출신 군인이 있었다. 속세의 질서보다 더 높은 차원의 종교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부도덕한 명령을 거부한 사례는 밀그램 실험에서도 나타난다. 오가와 역시 기독교적 가치를 추구하며 전쟁의 광기 속에서도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이것은 종교인이 비종교인보다 더 도덕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 기독교 주류는 군국주의와 타협하고 전쟁을 정당화했다. 종교적 가치와 현실의 괴리를 인식하고 그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고뇌하고 실천하는 사람만이 종교의 힘으로 양심을 지킨다.

 


 

무엇보다도 오가와와 오노시타가 타락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을 수단으로 보지 않고 진심으로 대했기 때문이었다. 식민지 만주에서 태어난 오가와는 만주를 사랑하고 그 땅의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는 일본이 저지른 죄를 대속하고자 더 많은 고통을 맛보려고 군의관으로서 장교가 될 수 있었으나 일부러 일반 병사로 입대했고, 패전 후에도 자신을 필요로 하는 병든 일본군과 중국인 곁에 머물렀다. 중국국민당 치하에서 전범으로 처형당한 일본군들의 주검을 수습하며 무의미한 전쟁으로 자신들을 내몬 국가와 상관을 질타하는 그들의 유서를 읽었다. 그는 귀국 후 의료봉사를 펼치며 살았지만, 전쟁을 일으켰던 지배층이 청년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도 모자라 전몰자들의 유해를 야스쿠니신사에 합사하며 신격화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자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거리로 나선다.

오노시타는 일본 군대가 약탈과 방화, 강간을 일삼는 강도 무리에 지나지 않음을 알게 된 후 동료들에게 휩쓸리지 않고 거리를 두었다. 그는 우월감이나 열등감 없이 모든 인간을 평등하게 대했다. 중국에서는 중국어를, 필리핀 네그로스섬에서는 비사야어를, 베트남에서는 베트남어를 익히며 그들과 더불어 살기를 바랐다. 귀국 후에는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 우익의 압박과 비난 속에서도 군인연금을 받지 않고 강도 무리에 속했던 과거를 금전으로 보상받기를 거부했다.

저자는 부도덕한 권위에 복종하지 않기 위한 선택지를 몇 가지 제시한다. 우선 막강한 권위인 국가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지 않도록 비판하고 감시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 한편 양심적 병역 거부를 허용한다. 그러나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병역 거부를 허용하기 어려우므로 이 방법은 한계가 있다. 제3의 선택지는 비인도적인 명령을 거부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국가의 세속적 권위를 넘어서는 권위(종교적 권위)를 따르거나 자신의 상황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교단이나 교회는 대개 권력과 타협해 왔으므로 종교가 있든 없든, 자신의 책임을 자각하는 자세가 중요하다(p.236~239).

 


 

* 밀그램 실험(Milgram experiment)이란 권위에 대한 복종과 관련된 실험으로, 평범한 인간이 권위에 복종해 얼마나 잔혹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실험이다. 1961년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 스탠리 밀그램(Stanley Milgram) 교수가 '권위적인 불법적 지시'에 다수가 항거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시행한 실험을 말한다. 밀그램은 ‘징벌에 의한 학습효과를 측정하는 실험’이라고 포장해 실험에 참여할 사람들을 모집하고 피실험자들을 교사와 학생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학생 역할을 담당하는 피실험자에게 가짜 전기 충격장치를 달고, 교사에겐 가짜란 걸 모르게 하고 학생이 문제를 틀릴 때마다 전기 충격을 가하게 했다. 여기서 실험에 참여한 사람들은 15볼트에서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수 있도록 허용됐다. 밀그램은 실험 전에는 단 0.1%만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릴 것이라 예상했으나, 실제 실험결과는 무려 65%의 참가자들이 450볼트까지 전압을 올렸다. 이들은 상대가 죽을 수 있다는 걸 알고 있었고, 비명도 들었으나 모든 책임은 연구원이 지겠다는 말에 복종했다.[시사상식사전]

 

저자 :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

 

태평양전쟁이 한창이었던 1944년 태어났다. 홋카이도대학 의학부 졸업 후 나가하마적십자병원 정신과 부장, 고베시외국어대학 교수, 간사이가쿠인대학 교수 등을 역임했다. 급격한 사회변동, 전쟁, 재해와 같은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을 조사하고, 소련-러시아의 사회변동 과정에서의 정신 건강 연구, 중국·베트남·동유럽의 전쟁 가해자·피해자의 정신병리학 연구 등을 수행했다. 정신의학의 기반 위에서 비교문화, 문화인류학, 사회학을 접목하고, 의사, 평론가, 논픽션 작가, 사회운동가로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며, 『컴퓨터 신인류 연구 コンピュ-タ新人類の硏究』로 오야 소이치 논픽션상, 『떠나보내는 길 위에서 喪の途上にて』로 고단샤 논픽션상을 수상했다.

아버지는 군의관으로 참전했지만, 전쟁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의대에 입학했을 때 전쟁을 경험한 선배 의사들 역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다. 그는 병든 사회의 병든 사람들을 연구하며 아버지의 전쟁을 조사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비로소 진실을 말하기 시작한 아버지뻘의 노병들을 인터뷰해 이 책을 완성했다. 그는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는 조건을 감정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표현하는 능력, 슬픔을 느끼는 능력에 있다고 보았다. 인간을 국가의 목적을 위한 소모품으로 만드는 군국주의 체제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억압하고 마비시켰다. 이 책에서 그는 전범들에게 잔인하리만큼 집요한 질문을 던지며 그들이 ‘상처 입을 수 있는 인간’ ‘슬픔을 느끼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을 건조하고 절제된 문체로 담담하게 전달한다.

 

역자 : 서혜영

 

서강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일어일문학과 박사과정을 마쳤다. 현재 전문 일한 번역가 및 통역가로 활동 중이다.

역서로는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굿바이, 헤이세이』, 『반상의 해바라기』, 『펭귄 하이웨이』, 『거울 속 외딴 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레몬일 때』, 『쉬 러브스 유―도쿄밴드왜건』, 『하드보일드 에그』, 『오로로콩밭에서 붙잡아서』, 『도쿄밴드왜건』, 『말해도 말해도』, 『작은 인연』, 『보리밟기 쿠체』, 『반딧불이의 무덤』, 『시노다 고코의 요리와 인생 이야기』, 『번역어 성립 사정』, 『그네타기』, 『사라진 이틀』, 『매리지 블루』, 『사이좋은 비둘기파』, 『명탐정 홈즈걸의 책장』, 『명탐정 홈즈걸의 사라진 원고지』, 『지상에서 런치를』, 『수화로 말해요』, 『소리나는 모래 위를 걷는 개』, 『하노이의 탑』, 『가출 기차』, 『빌라 매그놀리아의 살인』,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춘정 문어발』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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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 사냥 - 죽여야 사는 집
해리슨 쿼리.매트 쿼리 지음, 심연희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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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전했던 해리의 전투 장면 회상으로 시작한다. "제가 처음으로 죽인 사람은 한 명이 아니었습니다. 둘이었죠. 한 번에 연달아서, 2초 안에 차례로 죽였습니다." 2010년 아프가니스탄 모슈타라크 작전이 시작될 때 마르자에서 일어난 전투에 해리는 참여했다. 이 소설의 첫 장(章)은 대부분 해리의 전투 장면 회상으로 이루어져 있다. 탈레반과의 전투. 해리는 첫 전투에서 탈레반 두 명을 사살한 것을 회상하며 그 기억에 대해 트라우마가 있는 듯하다. 병원에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 회상하고 있다. 전쟁 후유증으로 트라우마 치료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하면서 해리는 말과 기억으로 전투 장면을 세세하게 의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전쟁 중의 아프가니스탄은 해리의 표현대로라면 똥 냄새의 기억이 강하게 남아 있다. 불에 탄 쓰레기와 염소 똥, 땀과 똥구명 냄새의 기억이 생생하다. 해리의 6년간의 군인 생활을 마치고 사샤와 결혼해 보금자리를 꾸렸다. 두 사람은 여생을 자연에서 보내기로 합의했다.

미국의 ‘진짜 서부’라고 할 만한 자연으로 이사 가서 필요한 것을 자급자족하고 가끔씩만 도시로 나오는 그들만의 월든을 꿈꾼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꿈은 착착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사샤는 재택근무를 직장과 협의했고, 해리는 낚시와 사냥에 통달해 있었다. 무엇보다 그들의 예산으로는 꿈도 못 꿀 아름다운 집을 운 좋게 매입했다. 울타리를 두른 7만 평짜리 대지 위로 300평짜리 집이 있는 매물이었다. 10년 전 어느 부동산투자회사가 정부와 거래할 목적으로 샀으나 거래가 불발되면서 남은 집이라고 했다. 웅장한 산봉우리들이 집을 두르고 있고, 목초지 아래를 내려다보면 저 멀리 국유림이 보였다. 전쟁을 치르며 사람에 지쳤던 해리는 그 집이 천국처럼 느껴졌다. 부부가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반경 2킬로미터 안에 이웃이 딱 하나뿐이라는 점이었다. 마을은 조용했고 아름다웠다.

 


 

이 책 『이웃 사냥』은 꿈에 그리던 신혼집을 마련한 해리와 사샤 부부의 보금자리 이야기로 시작한다. 미국 서부 티턴산맥 국립공원 근처의 산기슭에 위치해 웅장한 산맥과 광활한 초원이 펼쳐진 그림 같은 집이다. 자연을 벗 삼아 평화롭고 목가적인 삶을 꾸려갈 작정으로 마련한 집이다. 이 소설은 주인공 해리와 그의 아내 사샤가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해리 시점에서 한 장(章)이 지나가면 다음 장에선 사샤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국 서부 티턴 산맥은 지각이 융기하여 생긴 거대한 산맥이자 로키산맥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다고 한다. 천혜의 자연 풍광이 그대로 보존되어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관리받고 있는 지역이 인근에 많다. 티턴 국립공원도 그 중의 하나다. 40킬로미터 인근에는 유명한 옐로스톤국립공원도 있다. 높이 4,196m의 그랜드티턴산 외에 많은 빙하가 있는 험준한 12개의 산들이 연이어 있다. 동쪽 기슭은 급경사를 이루나 서쪽 사면은 완만하고, 티턴산맥에서는 티턴강(江)이 발원한다. 경관이 웅장하여 서부영화의 촬영장소로도 자주 이용된다고 알려져 있다.

 

긴 진입로로 들어섰을 땐 경외감마저 느꼈다. 진입로는 남쪽으로 돌아가면 국유림으로 이어지는 L자형 도로에서 북쪽으로 갈라져 나와 길게 뻗어 있었다. 쭉 따라가자 살짝 솟은 지대에 집과 차고가 있었고, 그 주위를 목초지와 포플러나무가 둘러쌌다. 집 너머로 보이는 뒷마당에는 커다란 목화나무 몇 그루가 자리 잡았고, 진입로 옆에는 포플러나무가 드문드문 자랐다. 3월의 산에는 아직도 눈이 꽤 쌓여 있었지만, 봄기운이 지금부터 왕성하게 피어날 기미 역시 분명했다. 이르게 자라난 잎새들은 파릇파릇한 초록빛이었고, 일찍 핀 야생화도 고개를 내밀었으며, 여기저기 새들 천지였다. 그 땅은 활기에 가득 차 콧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p.30)

 

 

그러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집을 차지한 흉포한 악령의 저주가 그들의 삶을 점점 옥죄어오고, 부부는 그 저주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다 애써 외면하던 과거와 마주하게 된다. 인간이 자연을 통제하거나 파괴하려 했을 때 어떻게 되는지, 섬뜩한 경종을 울리며 끝까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독특한 호러소설이 시작된다.

경이로운 풍경을 즐길 사이도 없이 어느 날 이번 봄을 무사히 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들에 대해 조언해 주겠다며 하나뿐인 이웃이라는 노부부가 두 사람의 집을 방문한다. 그들이 말하는 주의 사항은 도무지 믿어지지 않는, 괴이하다. 연못에 정체불명의 빛이 떠오를 텐데, 그걸 보고도 불을 붙이지 않으면 산에서 북소리가 들려온다는 둥, 벌거벗은 남자가 곰에게 쫓겨 집 근처로 도망쳐 올 텐데, 곰이 아닌 남자를 죽여야 한다는 둥……. 미친 사람이라고 생각한 해리는 노부부를 사납게 쫓아버린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그 노부부가 경고한 일들이 차례차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그들은 꿈꾸었던 평화로운 삶을 끝까지 지켜낼 수 있을까.

이 책 『이웃 사냥』에는 호러 독자라면 구미가 당길 흥미로운 설정이 다수 등장한다. 이유를 알 수 없이 싼 집, 왜인지 그 집에 최근 10년간 아무도 살지 않았다는 사실, 영문을 모르고 그 집에 이사 온 화목한 가정, 친절하지만 어딘가 섬뜩하고 꺼림칙한 이웃……. 초반에 호러 장르의 공식들을 충실히 지켜나가면서 독자는 점차 소설의 세계관에 빠져들게 된다. 거기다 공간적 배경인 미국 서부 와이오밍주의 광대하고 경이로운 자연이 공포심을 더한다. 반경 2킬로미터 내에 이웃이 한 가구밖에 없을 정도로 드넓은 목장들만 있는 이곳에서, 누군가가 내 집을 지켜보며 소름끼치는 미소를 짓고 있다면? 그가 집 안에 들어오려고 자꾸 소리를 내고 문을 두드린다면? 현실이라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을 공포가 밀려든다.

 


 

이 책의 저자 쿼리 형제(매트 쿼리와 해리슨 쿼리)는 단순히 호러의 공식을 따르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소유권 개념과 자연에 대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향해 한걸음 더 나아간다. 『이웃 사냥』이 미국 최대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Reddit)에 연재되던 시절부터, 책이 정식으로 출간되고 나서까지 독자평에서 한결같이 언급되는 내용은 “완벽한 결말이다”, “결말을 보고 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저자 쿼리 형제는 자연은 기본적으로 인간을 품어주지만 마음만 먹으면 인간의 생명은 그 앞에 한순간에 스러질 정도로 강하고 광대한 존재라는 사실을 말하고자 한다.

『이웃 사냥』에서 티턴산맥 근처의 인디언 출신들은 땅을 개인의 것으로 생각하지 않고 부족이나 인간 전체에 속한 것으로 생각한다. 땅이 내린 저주가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백인들의 토지 소유권 개념을 편의상 받아들였을 뿐이다. 자연이 보기에 인간이 행하는 일들, 무분별하게 자연을 개발하고 인위적으로 늑대의 개체 수를 줄이는 것은 모두 섭리를 거스르는 행위이고, 동족인 인간을 학살하는 전쟁은 그중 가장 잔인한 행위다. 집의 저주를 인간의 힘으로 통제해 보려던 해리는 집에 몰아닥치는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잊고 싶던 과거를 발견하고 가슴에 묻어왔던 죄책감을 인정한다. 『이웃 사냥』은 장르소설의 재미와 더불어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불이 붙으면, 빛은 사라진다. 남향 창문으로 가서 빛이 아직도 있는지 보라. 만약 여전히 빛이 보이면, 불에 장작을 더 넣어라. 빛이 사라졌다면 악령은 떠난 것이다. 악령이 떠나면 곧바로 느낄 수 있다. 그러면 불이 알아서 꺼지게 놔두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하던 일을 계속 하면 된다.(p.107)

 


 

하지만 카메라에 잡힌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공포에 떨게 만드는 연못의 빛 악령은 또 찾아온다. 해리와 사샤는 불을 피워 위기를 넘기고 이사올 때 찾아와 주의사항을 일러준 노인인 댄에게 전화를 건다. 댄 부부가 찾아와 추가로 들려준 여름 악령, 가을 악령의 이야기들은 너무도 무섭고 믿기 힘든 현상들이었다. 부부는 여름이 왔을 땐 곰에게 쫓기는 벌거벗은 남자의 악령을 겪어내며 베리크리크 목장에 사는 쇼쇼니족인 조가 악령을 물리칠 이 모든 의식들을 알려준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 골짜기 마을의 터줏대감인 조는 악령에 대해서 어떤 비밀들을 알고 있을까?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사샤는 루시에게 조에 대해 묻고 1996년에 시모어 가족이 겪은 일들과 절망에 빠질만큼 큰 새로운 사실들을 알게 된다.

해리와 사샤는 모든 비밀을 알고나서 노부부에게 화를 내지만 그들의 설명에 한편으론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아무 것도 믿지 않았을 것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았기에 체념하는 동시에 좌절한다. 행복만을 꿈꾸던 이 신혼부부는 이 골짜기에서 벌어지는 악령의 저주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있는 걸까? 시모어 가족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사샤는 직접 시모어 가족을 찾아나서고 그들에게 벌어진 저주같은 일들에 두려움을 느낀다. 시모어 가족은 어떻게 된 것일까? 긴박하게 이어지는 이야기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가을엔 허수아비의 모습으로 찾아오는 악령을 겪어내며 해리와 사샤는 마음을 굳게 먹지만 안타깝게도 사고가 일어난다.

계절마다 찾아오는 공포스러운 악령은 겨울엔 어떤 모습으로 찾아올까? 겨울의 악령이 모습을 나타내기 전 사샤는 해리에게 기쁜 소식을 하나 전하고 부부는 절망과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마주한다. 인간은 어떠한 계기로 자신의 잘못을 참회하는 순간이 오게 되는 때가 있다. 설명 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를 힘과 머리로는 이길 수도 거부 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미스터리한 일들은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저자 : 매트 쿼리

 

매트 쿼리와 해리슨 쿼리는 콜로라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형제다. 두 형제가 미국 최대의 커뮤니티 레딧(Reddit)에 쓴 이 놀라운 이야기는 매 게시물마다 수천 개의 추천 수와 댓글 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빚었다. 또한 정식으로 도서가 출간되기도 전에 스토리 원고만으로 10개국에 번역 판권이 수출되었다. 『이웃 사냥』은 넷플릭스와 한화 10억대에 시나리오 판권 계약을 맺고 영상화 진행 중이다.

 

저자 : 해리슨 쿼리

 

매트 쿼리와 해리슨 쿼리는 콜로라도에서 태어나고 자란 형제다. 두 형제가 미국 최대의 커뮤니티 레딧(Reddit)에 쓴 이 놀라운 이야기는 매 게시물마다 수천 개의 추천 수와 댓글 수를 기록하며 화제를 빚었다. 또한 정식으로 도서가 출간되기도 전에 스토리 원고만으로 10개국에 번역 판권이 수출되었다. 『이웃 사냥』은 넷플릭스와 한화 10억대에 시나리오 판권 계약을 맺고 영상화 진행 중이다.

 

역자 : 심연희

 

연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독일 뮌헨 대학교(LMU)에서 언어학과 미국학을 공부했다. 영어와 독일어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옮긴 책으로 소설 『덤플링』 『어둠의 눈』 『고양이는 내게 행복하라고 말했다』 『마쉬왕의 딸』 『미드나잇 선』, 그래픽 노블 『인어 소녀』 『스냅드래곤』, 시리즈물로 『이사도라 문』 『인더게임』 『캡틴 언더팬츠』 등이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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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의 페달은 멈추지 않는다 - 너의 불안보다 빠르게 나아가면 돼
이광수 지음 / 느낌이있는책 / 2023년 7월
평점 :
절판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말은 지금 중년들에게는 매우 오랫동안 들어왔던 어른들의 단골 멘트 중의 하나였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를 실천하는 사람들은 아직 우리 주위에 많다. 이 책 『광수의 페달은 멈추지 않는다』를 읽으며 가장 많이 떠오른 말이었다. 그 격언이 언제부터 시작된 말인지 정확히는 모른다. 하지만 독자 나이의 중년까지만 해도 하루에도 몇 번씩 이 격언을 들어야 했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던 시절이었다. 공부만 할 수 없던 시절이었다. 조선시대 이야기가 아니다. 불과 30~40년 전 우리나라 이야기다. 집에서는 집안 일(농사, 가사) 등 공부 이외에 할 일이 많았던 때였다. 노골적으로 싫다고 떼를 쓸 수도 없었다. 다른 집 아이들도 다 그렇게 공부하고 집안 일도 하는 이른바 '1인 다역'을 해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간혹 힘들다 꾀를 부리면 으레 부모로부터 듣는 핀잔 반 격려 반의 말이 바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였다. 이 책의 저자 '광수'는 한창 때인 서른 넷의 젊은이다. 지금은 결혼도 했다. 2억 원의 고액 연봉자이다.

그가 자전거로 전국 일주를 결심한 것은 정확하게 10년 전이다. 20년 넘게 병원에 있는 아버지, 남편을 부양하고 자식을 키우느라 노후 준비라곤 못했던 어머니. 실제 저자는 이제 정식 가장으로 생활 전선에 뛰어들 무렵이었다. 어머니가 진 무게를 이젠 자신이 감당해야 했다. 그러나 취업 자체가 어려운 시절이라 가난하고 병약한 부모님을 모시는 책임까지 안고 있는 저자에게는 취업에 앞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었다고 한다. "왜 나한테만 이런 일이?" 저자 스스로 이 말을 할 줄은 몰랐다고 털어놓는다. 대학 친구들은 취업을 하기 위한 스펙 쌓기에 바빴지만 저자에게는 그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생각을 정리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취업하기 이전에 자신에게 온전히 시간을 쏟고 생각을 정리할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한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실을 외면하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삶을 대하는 해법 같은 깨달음을 얻고도 싶었다. 그것은 책상에 앉아서는 불가능했다. 다양한 장소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들으며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이럴 때 흔히 '여행'을 떠올리지만 저자에게 여행은 여유 있는 사람만 누리는 '사치'였다. 그 시점에 자전거 전국일주를 생각한 이유는 '사치'라고 할 만큼의 비용이 발생하지 않아서였다. 그냥 학교에서 지내도 두 달간 기숙사비 77만원과 생활비 50만 원까지 총 127만 원의 지출이 발생한다. 그런데 전국일주에 드는 장비비, 식대 등의 비용을 계산해 보니 방학을 학교에서 지낼 때 생길 지출보다 낮았다. 한정된 금액으로 전국일주를 하는 챌린지 같았다.

주위의 만류도 많았다. "야, 그 중고자전거로는 안 돼.", "일주일 달리다 돌아올걸?" 주변에 자전거로 전국일주를 하겠다고 했을 때마다 저자에게 돌아온 말이었다고 한다. 그때마다 저자는 "할 수 있어. 할 거야. 할 수 있다니까!" 누구 하나 잘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전국일주라는 거사를 치르기에는 장비가 너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저자는 평소 자전거를 즐겨 타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생각은 달랐다고 저자는 힘주어 말한다. 자신에게는 자전거 종류가 중요하지 않았다. 잘 굴러가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다. 젊고 한 번 마음 먹으면 끝까지 해내는 열정이 엿보이는 부분이다. 저자는 〈프롤로그〉를 통해 이렇게 외치고 있다. "자전거가 앞으로 굴러가는 이유는 내가 힘을 주어 페달을 밟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하게 생각했던 것은 에너지가 될 충분한 잠과 부족하지 않은 식사였다. 그리고 내 의지. 장비를 핑계로, 전국일주가 어렵다고 말하는 건 빈약한 의지 뒤에 숨어 자신을 합리화하는 그럴 듯한 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계획은 그랬다."(p.6)

 


 

부모에게 물려받은 돈 한 푼 없이 맨땅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해야 하는 이 땅의 모든 청춘들이 그 시작을 응원받진 못할지언정 너무 쉽게 ‘흙수저’로 폄하되는 요즘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흙수저 아닌 사람을 찾기가 더 힘들 정도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한달벌이는 일상이다. 그럴 때 누군가는 현실에 안주하고 누군가는 남탓에 골몰하며 인생의 부족함을 논하는 데 시간을 허비한다. 하지만 『광수의 페달은 멈추지 않는다』의 저자 광수 씨는 사회에 발을 내딛기 직전,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내가 가진 가능성이 과연 어디까지인지 확인해보기로 결심한다. 이는 앞서 언급한 대로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에 가장 적절한 예가 아닐까 한다. 저자는 흙수저 인생으로 대학 졸업을 목전에 둔 스물넷, 여기가 막다른 골목인 것만 같은 불안한 미래 앞에서 저자는 한번쯤은 고되게 떠나봐야만 찾아질 것 같은 ‘자기만의’ 인생의 정답이었다. 그리고 그때 광수 씨가 가진 거라곤 7만 원짜리 중고자전거 한 대가 전부였다.

저자는 주저없이 자전거에 올라탔다. 방안에 뒹굴던 축구복을 입고 슬리퍼를 신고 일인용 텐트를 안장에 싣고 두 달 치 기숙사비와 생활비를 합친 120만 원을 손에 쥔 채 그날로 전국일주 여행길에 올랐다. 남들은 광수 씨의 자전거 상태를 걱정했지만, 정작 광수 씨는 전국일주에 자신은 있었지만 그 끝에 과연 올바른 정답이 찾아질지가 더 걱정이었다고 한다.

 

“잠깐 보니까 자전거도 접이식 생활자전거던데 버틸 수 있을까요? 앞으로 천킬로미터는 넘게 타야 할 텐데. 반사등도 없고 전방 라이트도 희미하더라고요.” 내 생각은 달랐다. 어떤 일이든 갖추고 시작하면 좋겠지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할 수 있다고 믿었다. 페달을 밟아서 앞으로 나아갈 수만 있다면 된다고 생각했다. 완벽하게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시작도 못해보고 포기했다면 나의 오늘은 없었을 것이다. 나는 전국일주를 더 성공시키고 싶어졌다.(p.21)

 

 

누구나 다 아는 "집 떠나면 개고생"이란 농담 반 진담 반의 말이 있다. 요즘 많이 쓰인다. 저자 광수 씨라고 다르겠는가? 더욱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국일주를 하는데 중고자전거 한 대와 식사비에도 못 미치는 돈, 그리고 야영을 위한 텐트 정도가 전부인데... 고생은 집 떠난 날부터 예약해 놓은 것이다. 저자도 솔직하게 처음에 완주를 기대하진 않았다고 고백한다. 의기양양하게 시작은 했지만 집 떠나 길에서 겪을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잘 헤쳐나갈 수 있을까가 걱정이긴 했다. 인터넷을 통해 사전 지식을 얻으려다 자전거 도난, 파손, 건강상의 문제로 중도 포기하는 사례가 훨씬 많았다고 한다. 어쨌든 저자 광수 씨는 전국일주를 떠났고, 49일째 되는 날 출발 지점인 서울로 되돌아왔다. 이 책은 그간의 여정을 기록으로 남겼다가 책으로 묶어 펴낸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름다운 여행의 풍경이 아닌 광수 씨의 작지만 쉽지 않은 용기들로 반짝반짝 빛이 난다. 15억 원의 자산가, 2억 원의 연봉이라는 저자 광수 씨의 지금의 모습은 우연도 운명도 아닌 자기만의 정답에 따라 맨땅에서부터 불안을 딛고 한단한단 쌓아올린 노력의 결과물이라는 것은 누구보다 지금의 광수 씨 스스로가 잘 알고 있다. 불안했던 그 시절의 광수 씨가 자전거로 달리고 또 달리다 하늘을 보며 한번씩 내뱉은 덤덤한 말들 속에서 독자들이, 현재의 또 다른 광수 씨들이 어떤 위로를 마주할지 궁금할 뿐이다.

 


 

이 책은 저자 광수 씨의 여정에 따라 5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서해」, 2장 「제주도」, 3장 「남해」, 4장 「동해」, 5장 「다시 서울로」 등이다. 각 장마다 서로 다른 이야기, 색다른 만남, 우연한 인연, 비슷하지만 각기 다른 모습, 같은 것 같지만 조금씩의 다른 삶의 모습이 저자에게 새롭게 다가와 인연이 되고, 감동을 주고, 추억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 감동과 추억은 저자 광수 씨의 세상살이에 큰 자산이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역경을 딛고 일어서며, 다시 험난한 코스지만 도전해 이겨내는 과정은 이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커다란 도전 정신을 갖게 해준다. 서서히 그러나 날이 갈수록 자신감도 붙는다. 저자가 찾고자 하는 인생의 정답, 어떤 삶을 살아야 하나? 등에 대한 답은 여정의 길목마다 놓여 있었다. 누군가와 만나고, 어쩔 수 없이 비바람을 맞고 자전거를 타고 헤쳐나온 것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떤 식으로든 도움도 생긴다는 자각 등 많은 것들이 버무러져 우리 삶은 아름답다는 느낌마저 든다.

많은 사람이 만류하는데도 저자가 전국일주를 결심하고 실행에 옮기기 위해 가진 마음가짐은 독자들을 감동케 함이 분명하다. 어릴 때부터 뭐라도 해보겠다고 하면 "너는 안 돼, 네가 무슨?, 돈이 어디 있어..." 등의 말이 꼬리표처럼 달라붙었다고 저자는 술회한다. 이는 도전도 못해보고 체념하고 포기했던 건 늘 후회로 남았기에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 인생을 살겠다는 발버둥이었다고 말한다. 이번 전국일주는 자신의 닮았다고 일종의 자기 최면을 걸었나 보다. 초라하고 보잘것없지만 의지 하나만 믿고 달리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이, 저자에겐 있었다고 말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어머니와 같이 교회에 가서 기도를 드렸고 어머니가 하는 기도를 들었던 저자는 어머니의 기도는 늘 아버지에 대한 내용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아버지의 장애는 물리적으로 회복되거나 상태가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본인의 노력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적인' 장애였다. 그것을 낫게 해달라고 어머니와 저자는 빌고 또 빌었다.

 


 

이제 저자는 홀로서기가 답이라는 응답을 얻었다고 말한다. 신께 드린 기도는 응답이 없었기에 더욱더 시련을 스스로 딛고 일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신께서 말하고 있다고 혼자 해석했단다. 정작 바뀌는 건 없었지만 계속 교회에 갔던 이유는, 그것을 신께 고하면 해결해줄 것이라는 얄팍한 믿음으로 속에 담아 두었던 이야기를 진실로 말하는 가운데 얻는 마음의 평안 때문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가난 때문에 하고 싶은, 많은 것을 포기했던 저자는 계속 가난하고 싶지 않았다고 속마음을 책에 쓰고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삶, 어머니가 좀 더 행복한 삶, 좀 더 잘 먹고 잘 사는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는 것. 그래서 종종 도전을 했다. 어머니의 희망은 우리 가족이었다. 저자는 어렸고, 내 삶을, 우리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의 시간들이 있었다. 도전은 돈 주고 사는 것은 아니었다. 물질적으로 부족한 것은 친구에게 빌렸고, 새것을 사지 못해 중고를 샀고, 몸으로 부딪치며 도전해 볼 수 있을 만한 환경을 꾸준히 만들었다. 지금 이 일주도 마찬가지였다.

출발 예정일날 태풍이 온다고 들었는데 깜빡 잊었다고 한다. 어쩌면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미처 날씨를 따로 챙기지 못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태풍이라고 전국일주를 포기한다면 앞으로 닥쳐올 삶의 역경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라는 속마음이 더 강했는지도 모르겠다고 독자는 생각해본다. 그러나 작은 텐트 하나와 중고 자전거 한 대로 전국을 돌아보겠다는 결심은 첫날 맞이한 태풍에 혹독한 곤욕을 치른다. 야영지에 텐트를 쳤으나 한 시간, 두 시간... 태풍의 위력은 점점 더해 갔고, 새벽 4시께 급기야 텐트 자체가 더 버티지 못하고 지지대부터 무너져 내린 것. 새벽의 깜깐한 세찬 폭풍우를 맞고 저자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걷기는커녕 제대로 서 있을 수조차 없었다. 결국 낮에 식당하던 민박에 찾아가 씻고 말리고 나니 오전 8시. 민박 주인의 배려로 12시까지인 퇴실 시간을 조금 더 연장할 수 있어 그나마 태풍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첫날 이었다.

 


 

전국일주 여행기라면 으레 담기는 멋진 사진이나 좋은 풍경을 보고 읊조리는 감탄의 문장 따윈 이 책에 없다. “목이 너무 말랐다.”, “쉬지 않고 달렸다.”, “오늘도 또 펑크가 났다.”라는 문장들처럼, 자전거에 한번 오르면 비가 와도 달리고 어두워도 달리고 그렇게 목이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달리고 또 달리는 저자 광수 씨의 멈추지 않는 자전거 페달 굴리는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이 책이 여행기치고는 너무 건조하다고 느껴질 때쯤 광수 씨의 묵직한 사연들이 하나둘 툭툭 튀어나온다. 흙수저 인생, 가슴 아픈 가족사, 시간만이 자기에게 공짜로 주어진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할 만큼 끝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나날들. 우리는 불안한 미래 앞에서 얼마나 용감할 수 있을까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책. 저자는, 남들에겐 부족하기 짝이 없어 보이더라도 ‘지금, 여기, 당장’ 내가 가진 것만으로도 무엇이든 결국 해낼 수 있음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젊을 때 고생은 돈 주고도 산다는 옛 어른들의 말씀이 뼛속 깊이 각인되는 책이다.

 

저자 : 이광수

 

충북 단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다섯 살에 혼자 네발 자전거를 타고 10킬로미터 되는 거리를 달려서 뽑기하고 올 정도로 모험심이 강했다. 아버지의 병환과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어떤 일을 해도 항상 할 수 없을 거라는 시선을 받으며 컸다. 그때부터 부족하더라도 가지고 있는 것을 최대한 활용하며 살았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옆에는 늘 자전거가 있었다. 힘들지만 자전거를 탔다. 다른 방법은 없었다.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환경을 개선하는 건설업에 뛰어들었다. 사람들에게 이로운 환경을 만들겠다는 책임의식이 강하게 작용했다. 그 외에도 인테리어, 건축 디자인 및 시각화, 부동산 경매도 병행 중이다. 현재는 자산 규모 15억에 연봉 2억의 수입이 있다. 현재 건설업 및 부동산 중개 사업을 준비 중이다. 원주가 고향인 아내와 결혼해 분당에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세상에 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기에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사는 일이 즐겁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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