닳아지는 것들
가재산 지음 / 작가와비평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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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앞만 보며 숨 가쁘게 달리는 삶에 익숙하다. 특히 한국전쟁 이후 혼란과 폐허를 딛고 일어선 대한민국은 먹고 살기 위해 치열하게 일하지 않으면 굶어 죽을 처지였다. 국가 주도의 산업화 시대로 접어들면서부터는 일만 하면 굶지 않을 만큼의 급여도 주어짐으로써 그 시절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들은 정말 치열하게 일에 매달렸다. 통행금지 시간(밤 12시~새벽 4시) 이외에는 온통 일하는 시간이었다. 물론 직장까지 출퇴근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나마 형편이 조금씩이나마 나아지는 데 재미를 붙일 수 있었고, 격무와 힘든 노동자들의 삶은 새벽 별 보고 출근해서 야근까지 마쳐야 직장에서 풀려날 정도였지만 불평할 시간도 없었다. 일부러 야근을 자청하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 몇 푼의 돈이라도 더 벌어야 가족이 굶지 않고, 또 자녀 교육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전후 태어난 '베이비 부머' 세대는 일생 일만 죽어라 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제가 나아지고 나라가 부자가 되었어도 당시 자식들을 죽어라 가르친 사람들의 가정은 여전히 힘들게 공부한다. 학생 때는 대학 입시를 위해 공부에 전념하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취업 준비에 매달리며, 사회인이 되어서는 먹고 사는 일에 집중해야 한다. 분명 생활이나 경제적 면에서는 훨씬 나아졌는데 보통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여전하다. 나 자신을 돌보지 못하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삶이란 원래 그런 것인가?" 하며 회의감이 들 때도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보는 시간은 주어지지 않는다. 가끔씩 정신을 가다듬을 땐 무언가 잊고 살았다는 자각을 하지만 삶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 책 『닳아지는 것들』의 저자 가재산은 앞서 언급한 전후 산업화 시대의 주역이 될 듯하다. 이젠 일선에서 물러나 자신을 되돌아보며 노년의 삶을 살아가면서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찾아 나선다.

 


 

그 무언가로서 저자는 ‘부지깽이’를 찾았다. 부지깽이란 아궁이 따위에 불을 땔 때, 불을 헤치거나 끌어내거나 거두어 넣거나 하는 데 쓰는 가느스름한 막대기라고 사전은 풀이하고 있다. 하찮은 물건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비슷한 모양의 물건은 부지깽이로 쓰일 수 있다. 나무토막이든 쇠막대기든... 저자는 이처럼 주변의 닳아지는 것들을 돌아본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이에 닳아 없어지는 것들은 그 존재를 알아채기 어렵지만, 그 희생 덕분에 우리 삶이 풍요로워지고 새로워진다. 중요한 발견이다. 어쩌면 자신의 삶이 그랬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그렇게 닳아지며 삶을 완성한 것들에 대한 저자의 문학적 답례이자 한 템포 쉬어가도 된다는 독자들에 대한 따스한 권유이이고 하다.

저자의 사유는 닳아지는 것들로 맷돌, 빨래판, 부지깽이 같은 일상의 물건들만 포함하지 않는다. 부모님의 헌신적인 사랑, 학창 시절의 친구, 바른 길로 인도해 주셨던 선생님, 스치며 만났던 특별한 인연 등 나와 함께 했고 스쳤던 모든 인연이 자아의 형성과 변화에 영향을 끼친다고 사유의 확대를 거쳐 다양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이 에세이를 펴냈다. 책에 담긴 다양한 만남과 그에 얽힌 여러 에피소드는 인생이라는 도화지에 색을 입히며 저자의 인생을 하나의 작품으로 완성한다.

저자는 ‘녹스는 것’과 ‘닳는 것’은 다르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쓰지 않아 낡고 녹슬어가는 인생과 열심히 사용해서 닳는 삶에는 차이가 있다. 이 책은 ‘하루하루 서서히 녹슬어 가기보다 닳아 없어지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저자의 인간적인 다짐과 바람을 담고 있다. 지나온 생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앞으로 살아갈 날에 대한 희망찬 포부가 돋보인다. 자신을 돌보는 것을 넘어 주변의 어려움을 살피고, 가진 것을 베푸는 일의 보람에 대해 이야기함으로써 책이 가진 단단함은 어느새 독자에게 닿게 된다.

 


 

책에 따르면 고희의 나이를 넘긴 저자는 이제 흥미, 재미, 의미 즉 삼미(三味)를 찾아 낯선 여행을 시작하였다. 나이를 잊고 새로운 일이나 세상 변화에 호기심을 잃지 않는 흥미, 기왕 하는 일 즐겁고 신나게 하자는 재미, 마지막으로 나를 위한 일보다 남을 도우며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의미까지.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기 위한 자신과의 약속으로 탄생한 『닳아지는 것들』이 삶의 전환점에 선 이들에게 미지의 여행을 시작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줄 것이라 기대한다. 저자는 나를 위한 일보다는 남을 도와주고 봉사를 통해 사회적으로 의미 있고 보람 있는 일을 시작해 이른바 '노년의 사치'라고 말하지만 봉사가 사치일 리 없다. 자신의 일을 겸허하게 표현하는 일일 게다.

"인간은 변화를 싫어한다. 실제로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장수 시대를 멋지게 살아가려면 인생의 리모델링이 필요하다. 그러려면 그간 살아온 습관부터 먼저 바꾸어야 한다. 나이 들면서 누군가의 강요에 따르지 않고, 남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으며, 이기심을 넘어 이타심을 발휘해 자유롭게 항해하는 삶이 진짜 행복이 아닐까."(p.220)

고희(古稀)란 공자가 자신의 나이 70을 이르는 말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칠순'이란 뜻이다. 원래 공자의 뜻은 잘 모르지만 사전적 풀이에 따르면 "고래(古來)로 드문 나이"란 뜻이다. 2,500년 전 일이니 그때 나이 70까지 산 사람은 드물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단어는 두보의 「곡강시(曲江詩)」에도 나오는 말이다. 두보는 당나라 최고 시인으로 번영했던 조국이 안사지란(安史之亂)을 겪은 뒤 옛 모습을 회복하지 못한 채 쇠퇴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정의 기강은 흐트러져 있고 자신은 그저 술에 취해 곡강 연못가를 해맬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심정을 그리고 있다.

 


 

고희의 나이에 저자는 에쓴 보람이 있었던 듯하다. 새롭고 흥미로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에피소드를 소개한다. 2년 전 꿈꾸지도 못했던 수필가로 등단해 문인들과 교류하며 새로운 세상을 즐겁게 살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들과 출판사와 함께 '디지털책쓰기코칭협회'를 만들어 그 산하에 시니어들의 책 쓰기를 지원하는 10개 대학을 만드는 중이라고 한다. 책에 따르면 이 일을 재미로 하다 보니 보람도 있고 하는 일마다 흥과 신바람이 난다. 미얀마에 200명 장학생을 지원하고 교육시키는 일, 소주 가씨 문중의 일을 도맡아 시작한 일 그리고 '한국디지털문인협회'를 만들어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것도 봉사이자 의미 있는 일이다. 이 모든 일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일을 골라서 하는 일이니 어쩌면 내게는 '노년의 사치'일 수도 있다.

노년(?)의 트로피의 소개엔 저자도 흥이 저절로 나나 보다. 우리 나이로 올 76세인 배우 윤여정의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은 사실도 무척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2021년 4월의 일이다. 윤여정의 솔직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수상 소감은 갖가지 화제를 낳았다. 윤여정은 "전에는 생계형 배우여서 작품을 고를 수 없었는데, 이젠 마음에 드는 영화에는 돈을 안 줘도 출연한다."며 마음대로 작품을 고르는 게 '나이가 들면서 내가 누릴 수 있게 된 사치'라고 말했다고 소개한다. '노년의 사치'란 말이 저자의 말이 아니라 윤여정의 말이었음을 귀띔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윤여정에게 아카데미 수상이라는 영광을 안겨준 〈미나리〉 출연도 이런 소신에서 내린 결정이었다는 말도 덧붙인다. 좋아하는 사람과 좋아하는 일을 마음껏 할 수 있는 노년의 사치를 부리고 싶다면 윤여정의소망은 아카데미 트로피라는 커다란 선물로 돌아왔기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여행은 무한한 즐거움과 꿈을 주지만 때로는 소중한 깨달음을 준다. 지금과는 다른 더 멋진 세상을 향한 저자의 인생 여행은 막 출발했다.

 


 

이 책은 모두 6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마음의 문」, 2장 「삶의 터닝 포인트」, 3장 「닳아지는 것들」, 4장 「마음의 날개」, 5장 「낯선 삼미(三味) 여행」, 6장 「추억의 두레박」 등이다. 1장 첫 글은 앞서 말한 '추억의 부지깽이'이고, 두 번째 글은 '마음의 문' 이야기다. 이에 따르면 세상에는 열 문이 있다. 쪽문, 창문, 대문, 성문, 자동차문···. 문은 살아가는 데 아주 유용하다. 밖이 시끄러운 때 창문을 닫으면 되고, 날씨가 더울 때는 베란다 문을 활짝 열면 시원한 바람이 실내로 들어온다. 반가운 손님이 올 때는 미리 문을 열어 제쳐 두지만 도둑 침입을 막으려면 대문을 굳게 걸어 잠그면 된다. 이런 문들은 손잡이나 문고리가 없어서 쉽게 여닫을 수 있고 밖에서도 남이 열 수 있어 편리하다.

19세기 영국의 윌리암 홀먼 헌트라는 화가가 그린 작품 중에 〈등불을 든 예수〉라는 그림이 있다. 한밤중에 정원에서 그리스도가 한 손에 등불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문을 두드리는 그림이다. 예수님이 두드리는 문에는 보통 문과는 달리 문고리가 없다. 혹자는 문을 잘못 그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사실은 이 그림은 '마음의 문'을 그려 유명해진 그림이다. 사람의 마음에도 문이 있다. '마음의 문'은 손잡이나 문고리가 없다. 꽉 닫힌 마음의 문은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밖에서 절대로 열 수 없다. 마음의 문이 열린 정도는 사람마다 각기 다르다. 어떤 사람은 처음부터 아예 열어젖혀 놓기도 하지만 아무리 노크해도 소용없고 힘으로는 열 수 없다. 인간이 동물과 다른 특권 중에는 의사표현과 그 전달방법이 다양하다는 데 있다. 이러한 의사전달에는 7:3이라는 법칙이 있다. 언어가 차지하는 것은 단지 30%에 불과하고 말 이외의 것들, 즉 표정, 제스처, 분위기, 느낌 등으로 전달되는 것이 70%다. 이 30%의 언어적 표현 중에서도 말에 의한 것은 단지 7%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목소리의 억양, 톤, 크기 등으로 전달된다. 젖먹이를 키우는 엄마가 아이들의 불만이나 욕구를 울음소리 하나만으로도 금방 알아차리는 이유이다.(p.23~24)

 

 

두 번째 장 「삶의 터닝 포인트」의 첫 글은 '내 삶을 바꾼 한 권의 책'은 독자의 관심을 한껏 끌어올렸다. 미국 대통령이나 국내 유명인들도 인생의 전환 포인트로 한 권의 책을 소개할 때가 많다. 그 책을 읽고 인생이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책을 읽고 인생의 목표가 바뀔 수도 있고, 더 다지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그만큼 책의 영향은 강력하다고 할 수 있다. 또 책은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이기에 관심 또한 높다. 저자는 '얼마 전 인천 계양산 밑에 꿈에 그리던 개인 도서관을 만들어 서재 겸 사무실로 꾸몄다고 한다. 40여 년간 모은 5천여 권의 책들을 서가에 가지런히 정리했다. 시력이 나빠져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서가에 꽂힌 책만 봐도 기분이 좋아진다.

저자가 터닝 포인트가 됐다고 제시한 책은 『오사카에서 부산에』라는 제목의 오기노 요시가즈의 작품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 책은 내게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다. 그 책이 계기가 되어 지금까지 30여 권의 책을 쓰게 도었고, 2021년 8월에는 〈한국산문〉을 통해 생각지도 못한 수필가로 등단까지 했다. 저자 오기노 요시가즈는 NHK 일본 국영방송 편집국장을 지냈고, 지한파로 한국을 꽤나 좋아했다. 그는 50여 년 전 〈안녕하세요?〉라는 한국어 방송을 일본 최초로 기획했으며, 〈일본 속의 한국〉 등 한국 관련 소식을 일본에 확산하려고 부단히 노력한 분이다. 저자가 그를 알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1980년 초 상사 주재원으로 오사카에 근무할 당시 경관이 좋아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녹지공원'이라는 조그만 아파트 단지에 살았다. 그때 그가 바로 앞집에 단신 부임해 살고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스무 살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친구로 지내자고 제안했을 정도로 친근하게 지냈다. 그는 한국 음식을 유독 좋아했고 한식당에 가면 한국에서 갓 들여온 김치와 소주도 함께 마시며 금방 친해졌다. 특히 그는 일본 사람들은 먹지 않던 곱창전골을 유독 즐겼다. 식사 자리에서 어느새 취기가 돌면 2차로 가라오케가 있는 술집에 들렀다. 서투르지만 저자가 일본 노래를 한 곡 부르면 그는 보란 듯이 유창한 한국어로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부르며 응수했다.

 


 

이후 많은 만남을 이어가며 그와 친하게 지내다 88올림픽 때 업무 차 서울에 와 그가 내민 책이 『오사카에서 부산에』였다. 정년 퇴임식을 출판 기념회로 대신했다고 한다. 그가 이 책의 서문에서 "한일관계가 어렵게 한일협정을 통해 국교정상화를 이루었다. 하지만 서로 마음과 마음이 열려야만 진정한 정상화라는 것을 염원하는 마음"에서 이 책을 썼다고 했다. 그 책에 등장한 한국인 서른 세 명의 이야기는 공교롭게도 독립선언문 발기인과도 같은 의미 있는 숫자로 그와 친분이 두터운 한국 사람이었다고 한다. 저자의 개인적인 이유와 저자의 터닝 포인트가 된 책 한 권은 그렇게 사연을 갖고 있다고 저자는 밝힌다. 저자는 책의 〈에필로그〉를 통해 제시한 말은 많은 생각거리를 준다.

"뒷모습은 삶의 이력서다. 우리가 남에게 보여주려고 허둥대며 살아가는 것은 보기 좋은 앞모습일 수 있지만 뒷모습이 진정한 자신이 남긴 궤적이요, 꾸밀 수 없는 참모습이다."(p.319)

 

저자 : 가재산

 

삼성물산과 회장 비서실 등 계열사에서 25년간 근무 후 인사제도, 인재육성 관련한 강의와 컨설팅으로 제2의 삶을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며 살아왔다. 앞으로는 흥미로운 일을 재미있게 하되, 그 일이 의미(意味)가 있어야 하는, 즉 제3막 인생은 삼미(三味) 인생으로 살아가기 위해 이 책을 썼다. 현재 ‘한류경영연구원’ 원장으로 활동하면서, ‘청소년 빛과 나눔 장학협회’를 통해 나눔을 실천하고 있다. 특히 시니어들에게 기획부터 출간까지 원스톱으로 도와주는 ‘디지털책쓰기코칭협회’ 회장을 맡아 스마트폰과 챗GPT를 활용하는 디지털 방식의 책과 글쓰기 확산에 노력하고 있다. 《한국산문》으로 등단하여 수필가로 활약하며 ‘한국디지털문인협회’ 부회장을 맡고 있으면서 책쓰기에도 열중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한국형 팀제』, 『10년 후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 『삼성이 강한 진짜 이유』, 『아름다운 뒤태』, 공저로는 『경영 한류』, 『직원이 행복한 회사』, 『세상에 핸드폰으로 책을 쓰다니!』, 『왜 지금 한국인가』 등 35권이 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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