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흡과 폭발
이유소 지음 / 한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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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소설 작품 『호흡과 폭발』은 주인공인 '유소'가 중학교 동창 친구의 집에서 '구멍'을 발견하면서 사건이 시작된다. 

"문턱을 넘어 안으로 들어서니 방에 하나 터놓은 창문에서 햇빛을 가득 머금은 바람이 조수처럼 밀려들었다 사그라졌다. 내가 그걸 발견한 건 그때였다.

구멍.

아주, 아주, 아주 시커먼 구멍이었다. 무슨 발판 같기도 했다. 그게 한구석 방바닥에 붙어 있었다. 지름은 50센티가량, 높이는 0에 가까웠다. 아니, 바닥보다 더 낮아 보였다."(p.26) 

이 소설 『호흡과 폭발』은 한 '구멍'의 이야기다. 이 구멍은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의 경계로 설정된다. 표제어 '호흡'이나 '폭발'이 내포하는 의미와는 다소 다른 듯한 소재가 등장해 환상 소설을 많이 읽지 못한 독자로서는 당혹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소설을 차분하게 읽어본다면 충분히 이해하고 저자 이유소의 작품 집필 의도까지도 읽어낼 수 있다. 

어느 날, 학창 시절 이후로 소식이 끊겼던 중학교 동창 고유상이 주인공 유소에게 전화를 걸어온다. 그는 유소에게 다짜고짜 보여줄 게 있다면서 집으로 와줄 수 있느냐고 묻는다. 유상은 집 안에 물건이 하나도 없는 이유가 이 정체 모를 구멍 때문이라며, “이제 더 이상 넣을 것도 없어, 난 그저 저 구멍 안이 궁금할 따름이야”라고 말한다. 그러고는 구멍으로 뛰어든다. 눈앞에서 펼쳐진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놀란 유소는 멍하니 구멍만 바라본다. 겨우 정신을 차린 유소는 일단 집으로 구멍을 가져온다. 그리고 자신 역시, 구멍으로 들어가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호흡과 폭발』은 ‘구멍’을 통해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오가는 주인공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호흡처럼 반복되는 일상, 그 끝에 환상이 폭발한다.

이 소설은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출판사 〈한끼〉의 '경장편 시리즈'에서 「미스 마플 클럽」의 서미애, 홍선주, 이유소, 한새마 등 네 명의 작가가 각양각색의 매력을 가진 미스터리 시리즈를 준비해 차례로 선보이는 기획 시리즈의 한 작품이다. 첫 작품 홍선주의 『꽃거지를 찾습니다』를 시작으로, 이유소의 『호흡과 폭발』이 두 번째 작품으로 출간되었다.



저자의 이름과 같은 주인공 유소는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기력하게 지내던 어느 날, 학창 시절 거의 교류가 없었던 고유상의 연락을 받는다. 유상은 보여 줄 것이 있다며 유소를 자기 집으로 초대하고, 유소는 그를 만나러 간다. 그 집엔 이상하게도 가구나 살림살이가 하나도 없어 의아해하던 찰나, 방바닥에 붙어 있는 이상한 구멍을 보게 된다. 깊이가 없어 저게 구멍인지 단순한 깔개인지, 아니면 블랙홀인지 도무지 정체를 알 수 없다. 아주, 아주, 아주 시커먼 구멍이었다. “넌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저 속이 궁금해서 미쳐버릴 뻔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지금까지 참고 참다가 도저히 안 돼서 널 불렀어. 너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았거든.” “저 세계에서 진짜 내 존재가 뭔지 확인해 보고 싶어. 너도 꼭 자신을 되찾길 바라.”라고 말하며 구멍 속으로 뛰어든다. 친구가 사라진 이후, 두려워진 유소는 구멍을 챙겨 자기 집으로 가져온다. 망설임과 두려움 속에서 결국 유소 역시 그 구멍으로 들어간다. “구멍을 본 사람은 그게 누가 되었든 구멍으로 들어가지 않고서는 버틸 수 없는 것이다.”(p.46) 그렇게 일상이라는 평면에, ‘구멍’을 만나며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입체화된다.

이 소설 『호흡과 폭발』은 모두 3부로 나뉜다. 1부는 현실, 2부는 구멍 속 세상, 3부는 다시 현실로 돌아온 유소의 이야기다. 유소는 구멍의 반복된 통과를 통해 여러 사람들을 만난다. 산책, 친구와의 만남 등에서 이전과 다른 불연속성과 이질감을 겪으며, 결국 다시 ‘현실’로 돌아오지만, 이 세계가 과연 본래의 현실인지 불확실하다. 그러던 어느 날, 잠을 자던 중 천장에서 손을 내민 ‘릴’이라는 인물을 만나 사막의 세계로 이동한다. 릴은 오랜 시간 자신의 무덤을 찾아 헤매고 있는 존재다. 유소는 릴과 함께 ‘자각몽의 천장’ 개념에 대해 듣게 되고, 천장이 곧 현실 세계로의 출구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릴은 수백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자신의 무덤을 찾아내고, 유소에게 마지막 인사를 남기며 사라진다. 유소 역시 구멍 속 세계에서 긴 시간 동안 자신의 방을 찾는 여정을 계속한다. 유소는 결국 자신이 떠나왔던 원래의 방을 찾아 돌아오지만, 그것 역시 구멍 속의 한 세계일 뿐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유소가 구멍 속으로 들어가 만난 사람들-가장 친한 친구 수혜, 선으로 된 소녀, 사막의 여자, 뒤로 걷는 소년-은 모두 주인공이 마주해야 하는 ‘또 다른 나’이자, 누구나 마음속에 품고 사는 트라우마와 결핍의 은유다. “이 소설이 그리는 구멍 속의 세계는 평행세계라기보다는 인간 정신과 무의식이 반영된 내면세계에 더 가깝다.”(p.223)고 문학평론 박인성은 풀이했다. 구멍은 어디에나 있다. 당신의 마음에도. 이 작품 “『호흡과 폭발』 역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뿌리를 둔 현대적 변형이다. 이 소설에서도 주인공 유소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구멍을 통해서 지금껏 가 본 적 없는 세계로 진입한다. 하지만 앨리스와 유소의 가장 큰 차이점은 스스로 구멍 속에 떨어지길 원하는 자발성이다.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 가는 유소는 근대의 막다른 길에 처한 현대인의 자화상이기도 하다. 유소가 구멍으로 들어가는 자발성은 미래를 직면하기도 죽음을 수용하기도 어려운 현대인이 택할 수 있는 퇴행적인 도피다. 

오늘날 장르 문학의 관점에서 평행세계와 이 세계에 대한 상상력이 유행하는 것은 사회·문학적인 흐름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와 전망을 잃은 이 시대 청년세대의 현실 인식을 압축적으로 보여 주기 때문이다.”고 해석한다. 중간 세계는 탈출구를 찾는 현대인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숙고의 시공간이다. 주인공 유소가 그러하듯 이 세계는 현실 세계에서 삶의 의미를 잃은 사람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다시 사유할 수 있도록 하는 정신의 무대이며, 잃어버린 자기 자신에 대한 탐색을 수행하는 공간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표현처럼, 세계가 알이라면 우리는 이 알을 부수고 나옴으로써만 비로소 자신을 태어나게 할 것이다.”며 박인성 평론가는 〈작품 해설〉을 통해 평가하고 있다.


구멍의 정체는 대체 무엇이며 나를 이곳으로 끌어들인 이유는 뭘까. 나는 왜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뛰어든 걸까. 고유상은 왜 내가 구멍을 가져가길 바랐던 걸까. 내가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왜 이렇게 무서울까. 현실의 죽음이란 이런 걸까.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고 직시할 수도 없다.(p.64)


저자는 책 뒷 부분의 〈작가의 말〉을 통해 자신이 병원에서 비슷한 진단*을 받은 경험이 있다고 털어놓는다. 이 소설은 자신의 삶과 무의식을 통과하며 쓴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이 말은 '구멍'을 통해 저자가 뭘 형상화했는지 비로소 공감하게 된다. 이 구멍은 환상의 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이자 현실 세계로 나오는 출구이기도 하다. “어떤 장소나 사물을 보면 뜬금없는 상상이 밀려왔고, 그걸 글로 써야만 견딜 수 있었다.”라고 말하며 이 소설의 소재도 수년 전 메모에서 출발했다고 고백한다. 

저자는 『호흡과 폭발』을 통해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은 충동과 동시에 그곳으로 되돌아오려는 내면의 분열을 정직하게 마주하고자 한 것이다. 저자는 심리적인 시공간을 환상적으로 연출하는 이야기 마술사답게 구멍 밖의 세계와 구멍 안의 세계를 넘나들며 독자를 환상 문학의 절정으로 끌고 간다. “나는 계속해서 나의 세계에서 안정적으로 호흡했고, 그사이 내 속에서 창조되는 희망과 염원이 크고 작은 별처럼 수축하고 폭발했다.”(p.216). 이로써 '호흡'과 '폭발'의 의미도 제 모습을 찾는다. ‘구멍’이라는 상징은 존재와 실존, 그리고 인간적 구원의 불가능성과 희망을 동시에 암시한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이 소설의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환상이 끝나는 곳이다. 유소는 반복된 구멍 속 세계를 경험한 후, 결국 구멍을 떠나 현실로 돌아온다. 구멍은 숨고 싶은 공간이었지만, 동시에 삶을 다시 껴안을 수 있는 입구였던 셈이다. 저자는 구멍은 누구나 갖고 있다고 확신한다. 그것은 현실로부터의 도피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우리 내면이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위한 숨구멍이기도 하다. 


* 경동맥 협착증(carotid artery stenosis): 경동맥은 외경동맥과 내경동맥으로 나눠지며, 외경동맥은 주로 두개골 밖에 있는 피부나 근육에 혈액을 공급하고 내경동맥은 두개골 내의 뇌나 신경조직에 혈액을 공급한다. 외경동맥은 좁아지거나 막히더라도 다른 혈관을 통해서 비교적 풍부하게 혈액이 공급되므로 특별히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하지만 내경동맥은 좁아지거나 막히면 뇌에 혈액공급이 감소할 수 있으며, 내경동맥 벽에 침착되어 있는(쌓여서 들러붙어 있는) 지방 조직들이 떨어져 나와 뇌혈관의 말단 부위로 흘러가 혈관을 막을 수도 있다. 이처럼 내경동맥을 포함한 경동맥이 좁아지는 경우를 경동맥 협착증이라고 지칭하며, 이는 혈류를 감소시키거나 혈관을 막게 되어 허혈성 뇌졸중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경동맥 협착증이 있는 경우 뇌졸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치료 대상이 된다.(서울대학교병원 의학정보)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의 의미를 상실한 소설 속 주인공 유소의 마음은 이미 죽음과 무관심 쪽으로 기울어 있다. 그러나 구멍 속 세상을 경험하고 그곳에서 만난 인물들을 통해 ‘살고 싶다’는 마음을 되찾는다. 역설적이지만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키워드다. 현실 도피가 나쁜 것이 아니라, 도피 이후에 무엇을 붙잡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품은 것이다. 

저자는 지금껏 써내온 소설 작품에서 환상 세계와 심리를 결합한 독창적인 문체로 평가돼 왔다. 미묘한 심리 묘사와 상징적 소재를 통해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며, 인간 내면의 불안과 삶에의 갈망을 그려냈다. 이 작품 『호흡과 폭발』도 중편 소설의 응축된 형식으로 독자의 몰입을 끌어올린다. 주인공 유소가 뇌혈관 질환 진단을 받고 삶의 의미를 잃은 상태에서 ‘구멍’을 발견하고 뛰어드는 설정은, 일차적으로 오늘을 사는 현대인이 현실의 압박과 무력감 속에서 선택하는 ‘내적 도피’를 은유한다. 그러나 저자는 구멍은 숨고 싶은 곳이자, 동시에 다시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입구로 만들어낸다. 즉, 도망친 자리에서 끝나지 않고, 돌아오려는 의지까지 포함한 두 가지 역할을 동시에 한다. 


"구멍이었다.

아주, 아주, 아주 까만 구멍.

5년간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그것이 내가 한때 소중히 여겼던 통기타가 있던 자리에 있었다. 초반에 연습하다 싫증이 나서 그 후로 몇 년을 방치한 기타였다. 조금 전에 기타를 옮긴 건 아저씨여서 나는 그 공간을 미처 확인하지 못한 것이다.

그저···

그저··· 쳐다보고 있었다. 한참을."(p.212)


저자 : 이유소


환상문학 작가. 2021년 계간 미스터리 〈졸린 여자의 쇼크〉로 등단. 소설집 《우울의 중점》, 앤솔로지 중편 《사일런트 디스코》 《히즈 마이 블러드》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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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 않는 뇌의 비밀 - 마음 챙김 명상법
김말환 지음 / 민족사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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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명상'에 대해 생각하면 독자는 90세 국민 정신과 의사로 불리우는 이시형 박사의 인터뷰 기사가 생각난다. 지난 2018년 9월 모 일간지에 실린 기사에서 건강의 비결을 묻는 기자에게 이시형 박사는 "대체로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며 "기계적으로 시간을 맞추는 규칙은 아니고 대충 규칙적"이라고 답했다. 중요한 것은 스트레칭과 명상을 꼽았다고 기사 첫머리에 쓰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30분 정도 스트레칭과 명상을 하는 게 건강 비결이라는 것이다. 규칙적인 생활과 식사, 적당한 운동이 건강의 3대 요소임을 누구나 알고 있다. 여기에 '명상'이 들어가 눈길을 끌었고 독자는 그때부터 명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 때는 건강과 행복한 삶을 위해서는 명상이 중요한 것으로 독자의 인식에 자리잡았다. 다만 게으름 탓인지 미루고 미루다가 아침 명상을 습관처럼 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시간은 5분에서 10분 정도. 될 수 있는 대로 좋은 생각만 한다고 생각하고 시작했던 게 이제는 몇 달 됐다. 얼마 되지 않아 건강이나 삶에 크게 도움이 됐다고 느끼지는 못하지만.

어느 종교든 '위대한 종교'는 명상을 권한다. 발상지 인도는 물론 천주교의 묵상, 불교의 참선, 기독교의 명상 등 모두 같은 '명상'을 하고 있다. 다만 한국의 기독교만은 명상을 채택하지 않는다고 한다. 명상과 참선을 종교로 보고 타종교를 배척하는(다른 우상을 섬기지 말라) 교리에 따른 것이라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도 예전의 말이지만 지금은 종교를 갖지 않은 독자로서는 명쾌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럼 왜 명상을 할까? 국내 한 명상 전문가는 명상 즉, 내면의 ‘참된 나’를 찾음으로 에고로 둘려 쌓인 ‘거짓 나’를 버리고 지금 바로,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명상을 통해 찾고 있다고 밝혔다. 『명상과 함께 하는 삶』이라는 책을 통해 그는 우리를 불안과 우울의 상태로 빠뜨리며 괴롭히는 ‘생각’이라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 자신을 고통으로 몰아넣는다는 것이 ‘집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에서 그는 살고 있는 인간 누구나 중독돼 있지만 중독된 것조차 모르는 ‘생각이라는 병’에서 벗어나는 길’, ‘모든 일어나는 일에 대해 그저 ’예‘라고 대답하는 내려놓음을 통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담고 있다.



'명상'은 고대 동양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세계적으로 '마음챙김'의 대명사로 떠올랐다. 불교 수행 전통에서 시작한 명상은 오늘날 심리학적 구성 개념으로 "현재 순간을 있는 그대로 수용적인 태도로 자각하는 것"을 의미하는 '마음챙김'으로 발전했다. 용어 역시 순우리말을 사용할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는 명상이 오랜 역사를 갖고 있고, 또 치료나 단련의 일환으로 실천해 온 것이다. 영어로는 두 단어가 조금 다른 의미를 포함한다. 명상은 'meditation'으로, 마음챙김은 'mindfulness'로 표기한다. 전자는 치유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고, 후자는 훈련이나 수행의 의미가 배어 있다.

불교 명상의 핵심적인 가르침인 마음챙김은 빨리(Pali)어 ‘sati’의 번역어라고 한다. 이는 자각(awareness), 주의(attention), 기억하기(remembering)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알려져 있다. Sati는 영어권에서 mindfulness로 번역되며, 우리말로는 마음챙김이 가장 적당한 번역어로 사용되고 있다. 마음챙김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마음챙김의 네 가지 기반으로 해석되는 'satipatthana'의 어원을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고 〈심리학용어사전〉은 설명하고 있다. Satipatthana의 sati는 위에 언급된 바와 같이 ‘기억하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어근에서 파생된 명사이다. 그러나 sati는 과거를 기억하는 기능이라기보다는 현재에 대한 주의 집중과 알아차림, 깨어 있음 등의 의미를 내포한다고 한다. 반면 patthana는 긴밀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확립을 의미한다. 즉 satipatthana는 ‘관찰 대상에 대한 긴밀하고 확고하며 흔들리지 않는 알아차림의 확립’을 의미한다.

위파사나 수행을 지도하고 있는 미얀마의 승려 유 판디타(U Pandita)는 마음챙김에서 가장 중요한 본질을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마음을 챙기고 관찰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마음 챙김의 특성을 흔들리지 않는 것(들뜨지 않음)으로 보았고, 그 기능은 대상을 항상 관찰하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야구 선수가 항상 공을 시야에 넣어 두고 있는 것처럼 마음챙김의 대상을 놓쳐 버리지 않고 관찰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또한 마음챙김은 대상과 일대일로 직면하거나 번뇌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 때의 마음챙김은 여섯 가지 감각 기관의 문을 지키는 문지기에 비유된다. 마음챙김을 발생시키는 직접적인 원인은 관찰 대상에 대한 강하고 분명한 알아차림 및 몸, 마음, 느낌, 법에 대한 마음챙김을 확고히 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마음 챙김 명상법」이란 부제를 가진 이 책 『늙지 않는 뇌의 비밀』에 담긴 내용과 백과사전의 풀이를 포함해 독자가 가진 명상의 의미다.



현대인의 일상은 과도한 정보와 자극으로 인해 늘 과부하 상태다. 머릿속 생각은 좀처럼 멈추지 않고, 뇌는 쉴 틈 없이 작동한다. 그 결과는 명확하다. 기억력 저하, 감정 기복, 집중력 저하, 그리고 치매. 이러한 퇴행성 뇌 피로를 어떻게 멈출 수 있을까? 20년 넘게 명상 지도자이자 심리상담가, 군법사로 활동해 온 이 책의 저자 김말환 박사는 이 물음에 대한 해법을 ‘마음챙김’에서 찾는다.

"마음 챙김 명상은 단순한 휴식이나 이완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치매와 같은 퇴행성 뇌 질환의 위험을 줄이는 효과적인 뇌 건강법입니다."

저자에 따르면 뇌의 과부하는 알게 모르게 뇌세포를 파괴하고, 제대로 깨어있는 삶을 살지 못하는 원인이 된다. 깨어있지 못한 뇌는 일에서도, 개인 생활에서도 제대로 역량을 발휘할 수 없다. 지금, 이 순간의 마음을 지켜보고 알아차려 마음을 챙기는 일, 그 어느 때보다 뇌 관리가 필요한 시대이다. 마음 챙김 명상은 우리의 일상에서 습관적으로 생각하거나 느끼면서 자동 반응하던 행동을 멈추고, 깨어있는 뇌의 흐름을 더 자각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을 키워준다. 그리고 그 힘은 단지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 안정에 그치지 않는다. 마음 챙김 명상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뇌 구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는 실천 수행이다.

이 책은 마음 챙김 명상이 단지 스트레스 해소나 심리 안정에 머무르지 않고, 뇌의 노화 자체를 늦추고, 뇌세포와 시냅스, 인지 기능을 회복하는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한 방법임을 과학적·수행적 언어로 해설한다.

우리 몸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일컬어지는 '뇌'는 어떻게 생겼으며, 어떤 일을 할까.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 몸의 '사령부' 역할을 하는 곳이라고 들어왔다. 모든 인간의 행동을 실행하고 제어하는 명령을 하는 곳이라고 배웠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을 2배 이상 늘린 현대의학에서도 아직까지는 뇌의 병에 대해서는 정확한 치료법이나 약도 개발하지 못하고 있다. 이래서 뇌는 아직까지 '신의 영역'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 책 『늙지 않는 뇌의 비밀』은 우리 신체 일부인 '뇌'에 대한 설명서이자 뇌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방법이다. 뇌의 기능을 설명하기 위해 뇌가 우리 몸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의학적·과학적 증거를 가지고 이야기를 풀어간다. 물론 이 책이 뇌의학과 뇌과학에 대한 전체를 말하지는 못한다. 풀리지 않은 의학적이고 과학적인 문제가 남아 있고, 지금도 많은 과학자들이 뇌의 신비에 대해 연구하면서 매듭을 하나씩 풀어가고 있는 중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느끼고 있는 몸의 신호는 이미 뇌에서 우리에게 인식시키고 전달하고자 한 결과이다. 몸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뇌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뇌 따로 몸 따로 다르게 인식하고 각자도생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뇌에 어떤 이상 징후가 생기게 되면, 그로 인해 몸에 이상이 오면 독자들은 어떤 일을 먼저 하는가. 의학적 해결책은 많지 않다.

특히 심각한 증상이 생기면 의사를 찾는 것을 제외하곤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하지만 조금만 뇌와 몸의 흐름을 알게 된면 답을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은 뇌에서 시작하고 몸에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추천사〉를 쓴 신한대학교 이태정 명예교수 이런 점에 착안해 명상과 치매환자를 연결해 생각한다. "어르신들에게 명상 지도를 한 것은 나에게도 아주 좋은 경험이었다. 현장에서 마음 챙김 명상의 놀라운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어르신들 대부부 명상을 처음 접한 탓에 조금 망설이기도 하고 어색해했다. 그런 분들이 이제는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몇 년 동안 힘이 들었지만, 어르신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서 보람이 컸다."(p.6)

〈추천사〉에 따르면 명상은 지나온 날들에 대한 후회와 아쉬움,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에서 벗어나, 지금 바로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도록 삶의 근본적인 지혜를 길러준다. 명상을 통해 우울증과 불면증, 기억력 저하와 불안감을 크게 완화하여 가는 것을 체험한 분들이 정말 많았다. 고요하게 호흡에 집중하는 명상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스트레스를 녹여내 숙면에도 도움을 준다. 명상을 통해 기억이 희미해져 가는 어르신들의 인지 기능이 깨어나고, 지혜가 생기고, 알아차림으로 인해마음이 차분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구성돼 있다. 1장 〈마음 챙김 명상이 몸과 마음의 치유에 왜 필요한가?〉, 2장 〈뇌의 자생 능력과 마음 챙김 명상〉, 3장 〈누구나 할 수 있는 마음 챙김 명상〉, 4장 〈건강한 뇌 관리와 치매 예방〉 등이다. 부록으로 「치매 예방, 몸과 마음을 깨우는 수행」「치매 자가 진단법」「자애경 사경하기」를 따로 두었다. 저자 김말환은 마음 챙김 명상은 단지 수행 기법이 아니라, 삶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이자 실천의 길이며, 역사와 전통 속에서도 검증된 지속 가능한 수행법이라고 설명한다. 특히 오늘날 정보화 사회를 넘어 인공지능 AI시대를 살아가는 오늘의 현실에서도, 최첨단 컴퓨터 기기들에 의한 작동의 융합으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기능과 그 편리성에 대해서도, 우리 인간의 능력에 대한 나약함에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강조한다.

책에 따르면 뇌에는 약 800억 개의 뉴런이 존재하고, 이들은 수천 개의 시냅스로 서로 연결된다. 하지만 감정, 스트레스, 자극에 끊임없이 노출되면 전두엽과 전전두엽 피질(prefrontal cortex)이 과부하되며 손상된다. 저자는 그동안의 체험을 통해 마음 챙김 명상으로 호흡의 리듬, 감각의 흐름, 뇌의 안정성을 회복하여 손상된 뇌를 치유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특히 명상 수행자의 뇌를 측정한 결과 전전두엽 피질에 혈류 공급이 풍부해지고, 감정 조절과 인지 기능이 향상된다는 연구 결과들을 이 책에서 밝혀줌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또한 세포 노화의 핵심 지표인 텔로미어와 이를 복구하는 텔로머레이스의 활성 역시 명상과 정서적 안정과 관련되어 있다는 과학적 논거도 제시하고 있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치매 예방과 명상의 연결고리다. 명상은 즉각적으로 일어나는 감정 반응―불안, 분노, 스트레스―에 휘둘리지 않고, 그 감정을 ‘잠시 지켜보는 힘’을 길러 줌으로써 뇌의 회복력과 감정의 회복탄력성을 강화하여 일상으로 다시 복귀할 수 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다.

이 책은 단순한 뇌과학 서적이 아니다. 저자는 『대념처경』, 『자애경』 등 불교 초기 경전을 바탕으로, 마음 챙김 명상이 뇌세포 연결망의 회로를 바꾸는 수행 원리임을 입증한다.

『대념처경』에서는 “수행자는 걸어가면서 ‘나는 걷고 있다’라고 꿰뚫어 안다”라고 한다. 걷는 순간조차 ‘알아차림’의 수행이 되며, 이러한 주의 집중은 뇌의 감각기관, 시상, 후두엽의 회복에 실제로 작용한다. 저자는 경전의 문장과 뇌 생리학적 기전을 결합하여, 마음의 통찰과 뇌의 기능이 긴밀히 연결되어 있음을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이 책의 강점은 명상을 추상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데 있다.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직접 실천할 수 있는 명상법을 통해, 뇌의 흐름을 스스로 조절하고 회복시키는 방법을 안내한다. 책에 있는 5가지를 여기에 소개한다.

① 먹기 명상 : “태어나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음식처럼 대하라.” 오감에 집중하여 음식에 몰입하며 ‘지각의 훈련’을 실천한다.

② 수영 명상 : 물속의 저항과 온도, 움직임을 통해 몸과 뇌의 균형 감각을 회복한다.

③ 몸 스캔 명상 : 손의 열기로 눈, 귀, 얼굴, 장기를 천천히 어루만지며 자신을 돌본다.

④ 호흡 명상 : 들숨과 날숨의 흐름을 지켜보며 현재의 감정과 긴장을 알아차린다.

⑤ 자애 명상 : 나 자신을 향한 연민과 타인을 향한 자비를 키워 정서적 면역력을 높인다.

명상은 단순한 정서적 위로가 아니다. 뇌과학은 이미 여러 실험을 통해 명상이 뇌의 구조와 기능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특히 뇌의 전두엽, 대뇌피질, 해마 등 고차원의 인지 능력과 관련된 영역의 활성도가 명상 후 뚜렷하게 증가한다는 것을 실험을 통해 보여주었다. 이는 곧 명상이 기억력 향상, 감정 조절력의 상승, 스트레스 저항력을 증가시킨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한편 이 모든 과정에서 핵심적으로 작용하는 것이 신경전달물질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세로토닌(serotonin)이다.(p.127) - 「명상은 뇌의 구조 자체를 바꾼다」 중에서

저자 : 혜명 김말환(慧命)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큰스님을 은사로 불교입문, 무심보광 전 동국대 총장 스님을 지도교수로 동국대학교 선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박사학위 논문은 「선수행에 의한 심리상담법 연구」이다. 군 법사로 활동하면서 “군 생활 부적응 장병들을 위한 선도 및 치유 활동으로 ‘보국훈장 삼일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전역 후 동국대 경주 캠퍼스 불교상담전공 객원교수, 서울 동국대 불교대학 강사, 동국대 미래융합 교육원 자격과정 ‘명상전문 지도강사 과정’ 주임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선수행과 심리치료』, 명상지도전문강사 교재 『명상 수행자를 위한 내면의 통찰과 자기성장 』 논문으로는 「선문답을 통한 심리 고찰」〈한국불교학〉 제29집 한국불교학회, 2001. 「十牛圖의 수행과 自己實現」〈대각사상연구〉, 2002. 등이 있다. 서울 관악산 화승사 선심리상담 및 명상센터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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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성
김요한 지음 / RISE(떠오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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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카페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아무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삶에 대하여」, 「이제, 살아야 한다.」가 이 책 『각성』의 첫 장과 마지막 장에 적힌 글귀다. 이 문구들은 표제어 '각성'과 잘 조화를 이룬다. 의도적으로 써넣은 문구이다. 쉽게 표현하자면 삶에 대해 되돌아보고, 그 끝에서 '살아야 한다'고 깨닫는다는 말과도 뜻이 통한다. 살아보고, 사유하고, 그리고 깨달음의 삶을 지속하겠다는 의미로 읽힌다. 이 책을 출간한 출판사 운영자이자 저자인 김요한은 이 에세이집의 소개글에서 비슷한 말을 내놓는다. "사람은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 단순한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우리는 얼마나 돌아야 하는가.

이 책 『각성』은 단순한 위로를 거부한다. 따라서 이 책에는 긍정도, 희망도, 달콤한 말도 없다. 대신 단 한 줄의 진심만 남는다. "지금 이대로는 무너진다." 무뎌진 감정, 흐릿한 중심, 피로한 관계, 반복된 실패는 각성의 주 대상이다. 이 책은 그 모든 균열을 해부하고, 어디서부터 다시 살아야 하는지 정확히 짚어준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말을 줄이고, 기준을 세우고, 감정을 정리하라."고 제언한다. 이 책은 저자의 각성 훈련의 기록이자, 생존의 기술이다. 끝까지 살아남고 싶은 사람을 위한 단 한 권의 에세이집에 담긴 적지 않은 문장들. 저자가 사유하고 실천하고 다시 각성하고 난 남은 한 줄의 진실한 문장들이다. 저자는 모든 것을 잃은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고 싶은 당신에게 "지금, 각성하라."고 강조한다.

이 책 『각성』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다. 흔들리는 인간의 구조를 해부한, 단단한 생존의 문장들이 줄을 잇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감정을 위로하거나 관계를 포장하는 방식 대신, 감정의 정리, 관계의 정돈, 자기 기준의 회복을 통해 삶을 근본부터 다시 세우려는 사람들을 위한 ‘훈련서’이다. 저자는 100개의 짧고 단호한 2음절의 단어들을 실천과 사유로부터 추출한 것들이다. 따라서 이 단어들은 하나하나 그 자체로 독립된 통찰이며, 동시에 하나의 흐름 속에서 점점 더 깊은 자기 해체와 재구성으로 나아간다.

책의 초반부는 감정과 관계로부터 흐트러진 개인의 상태를 직시하게 만든다. 말이 많고 소음에 반응하며 중심 없이 살아가는 일상의 파편을 정확히 짚어내고, 말보다 감정의 리듬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첫 단어 「진동」(1절)에 대해 깊은 사유의 변을 보인다. "사람은 우연히 어울리지 않는다. 모든 관계엔 파동이 있다. 진동수가 다르면 아무리 애서도 끝까지 어긋난다." 저자의 해설(실천)이 잇따른다. "억지로 웃는 자리, 괜히 말 많은 순간, 목소리가 자꾸 작아지는 관계. 이미 답은 거기 있었다. 맞지 않는 곳에 계속 남아 있는 건, 어리석음이고, 욕심이고, 비겁함이다. 지나고 나서야 보였다. 혼자인 게 아니었다. 혼자인 척, 살아 있는 척, 연결된 척. 오래도록 그런 척만 하고 살았다."라고 쓰고 있다. 자신이 주도한, 자신의 삶을 살지 못했다고 성찰한다. 그러나 깊은 깨달음에는 이르지 못한 상태에 대해 성찰의 깊이를 한층 깊게 들어간다. "깨달음은 크지 않았다. 사람을 줄이고, 말을 줄이고, 핑계를 줄였다. 줄이는 건 버리는 게 아니었다. 밀도를 높이는 거였다." 어설프게 깨닫고 대충 꿰맞춤으로는 올바른 대인 관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저자는 결국 크게 깨닫게 된다. 관계는 상태다. 흐트러진 사람들 틈에 있다면, 흐트러진 건 내 안이란 깨달음에 이른다. 거기서 비로소 소음이 사라지자 고요가 들렸다고 토로한다. "그 고요 속에서야 비로소 본래의 나를 봤다."고 한다. 누구의 리듬에도 맞추지 않고, 흉내를 내지 않고, 억지로 웃지 않고,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곳에서만 존재했다고 고백한다. 

중반으로 갈수록 이 책은 더 냉정해진다. 무너짐의 반복에는 반드시 습관이 있으며, 결국 자신을 무너뜨리는 건 대부분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방식이라는 것. 그 통찰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실제 삶을 바꾸기 위해 감정을 조율하고 태도를 정비해야 한다는 생존 전략으로 이어진다.

「사랑」(41절)에 대한 저자의 말에 귀기울여 본다.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건, 그 말의 무게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당신 앞에서 어떤 삶을 살 것인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 모든 걸 포함해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다."(p.93) 여기서 당신과 함께하겠다는 말은, 내가 살아온 모든 과거를 내려놓고 당신과 함께할 시간을 위해 새로 태어나겠다는 뜻임을 저자는 단언한다. 즉 내가 당신의 남편으로 살아간다는 건, 좋은 사람이라는 말보다 먼저, 당신에게 해롭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는 약속이라는 것이다. 당신 앞에서 더 이상 내 인생이 아니라, 우리의 인생을 선택하겠다는 다짐이 '사랑'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역시 사랑은 우리 삶의 가장 크고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저자는 「사랑」에 이어 「소각」(42절)에서도 사랑을 이야기한다. "사랑은 부드럽게 시작하지만, 끝은 항상 날카롭다. 처음엔 가볍게 스며들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사람의 모양을 지워가기 시작한다. 성격이 변하고, 말투가 달라지고, 자기 기준이 무뎌진다. 사랑이 깊어졌다는 증거는 감정이 아니라 손상이다."(p.95) 사랑은 사람을 무너뜨리며 다가온다고 저자는 생각한다. 저자가 사유한 사랑이 단계적으로 깊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이에 따르면 처음엔 껍질을 벗긴다. 겉으로 붙이고 있던 단단한 말투, 체면, 이성 같은 것들을 하나씩 걷어낸다. 그다음엔 분류한다. 필요 없는 생각은 밀어내고, 필요한 가정만 남긴다. 거기까지 오면 이미 어느 쪽으로든 선택이 불가능해진다. 이후엔 갈아버린다. 사랑을 갈아 일관성과 자존감을 부순다. 자기 확신이 있던 영역이 모조리 백지화된다. 말은 줄어들고, 호흡은 거칠어지고, 무의식적으로 상대의 표정을 분석한다. 그때쯤이면 자신이 사랑받고 있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이에 따라 저자는 '사랑은 재구성'이란 결론에 이른다. "완성된 인간을 부숴서 다른 구조로 다시 짓는 작업이다. 거기에는 반드시 파괴와 소각의 단계가 포함된다. 사람을 빵처럼 구워내는 게 아니라, 가루로 만들어 태우는 과정이다. 태워진 사람만이 이후의 삶에서 쓸 수 있는 감각을 얻는다. 실천-파괴-소각-재구성의 구조를 사유해 낸다.

43절에서 저자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접근하고 사유한다. "사람들은 사랑이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래서 점점 더 안전한 사랑만 찾는다. 확신 없는 시작은 피하고, 상처받을 가능성이 보이면 거리를 둔다. 말은 주고받지만 감정은 비껴가고, 함께 있어도 고요할 뿐, 깊어지지 않는다."

요즘 '사랑의 얕음(淺)'을 지적하는 말이다. 즉 이해 관계에 치중하는 듯한 사랑의 가벼움을 꾸짖는 것이다. 저자는 요즘 사랑을 이렇게 표현한다. 요즘은 사랑도 컨트롤하려 든다. 강도 조절, 속도 조절, 감정 조절, 불확실한 건 감정 낭비라고 치부하고, 의심이 들면 먼저 물러나고, 기대하기 전에 출구를 찾는다는 것. 그래서 다들 관계는 잊는데, 기억은 없다는 말이다.


후반부로 가면 『각성』은 본격적인 절단과 복원의 구조를 보여준다. 무엇을 지워야 하는가, 누구를 정리해야 하는가, 어떤 기준으로 남은 감정을 다스려야 하는가. 그 질문 앞에서 저자는 ‘미뤄둔 삶은 다시 오지 않는다’는 단 하나의 문장으로 독자의 판단을 흐트러뜨리지 않는다. 마지막 10여 개의 절들은 인간관계, 감정, 중심, 집중, 구조, 단가, 태도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삶을 재정렬하는 ‘감정 없는 정리의 미학’을 제시한다.

70절 「징후」에 이르면 "누군가 이유 없이 싫다면, 반드시 이유가 있다."고 단언한다. 설명은 안 되지만 몸이 먼저 반응한다면, 이미 감지된 것이다. 머리는 속아도 감정은 속지 않는다. 이성은 타협을 하고, 예의는 무시를 덮지만, 기분은 본질을 먼저 알아차린다고 주장한다. 이유 없는 거부감은 대개 오래 참은 감정의 요약이라고 설명한다. 저자는 아무 일 없었지만 불편하고, 말 한마디 없었는데 피로하다면, 그건 반드시 언젠가 증명된다고 강조한다. 

"사람을 싫어한다는 감정은 절대 가볍지 않다. 대부분은 무시하고 지나가지만, 지나고 나면 알게 된다. 처음의 그 불쾌감이 맞았다는 걸. 사람은 말보다 공기를 통해 상대를 인식한다.(p.162)

저자는 사람들이 그냥 지나치거나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들 중 작은 이유를 놓치기 때문으로 규정하는 것 같다. 억지로 웃으며 대화하더라도 마음 한구석은 긴장을 놓지 않는다. 그 긴강감은 이유 없이 생기지 않는다. 그것은 판단이 아니라 감각이고, 감각은 생존에 가깝다. 그걸 무시하는 이유는 대체로 관계를 맺는 법만 배우고, 관계를 끊는 감각은 무시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가장 날카로운 자기 보호는 싫다는 감정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잊거나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는 말이다. "좋은 사람을 알아보는 능력보다, 위험한 사람을 먼저 피하는 능력이 더 절박하다. 설명 없이 불편한 관계는,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소모시킨다. 감정이 먼저 꺼지려는 사람과는, 나중에 이성도 어긋나게 되어 있다."(p.163) 그래서 이유 없는 기피는 무시하지 않고 반드시 존중해야 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 『각성』은 읽는 사람을 설득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삶을 끝까지 살아내기 위한, 단 하나의 기준을 찾는 사람에게만 열리는 문장이다. 그 문장을 끝까지 읽고 나면, 더는 ‘예전처럼 살 수 없다’는 감각이 남는다. 저자는 이 책은 기억에 남는 책이 아니라, 결국 삶의 방식에 남는 책이길 원한다. 이런 저자의 바람은 우선 실천 없는 각성은 무의미하다는 말로 이해된다. 실천, 반복함으로써 「내성」(91절)이 생기고, 깨달음으로써 「절연」(92절)할 수 있다. 감정을 「단속」(94절)함으로써 실패의 반복 이유를 「복기」(95절)를 통해 구조적 오류를 바로잡음으로써 「복원」(98절)해야 한다. 「복원」의 일부를 여기에 기술한다. "사람은 망가졌을 때 누군가를 찾는다. 이해해줄 사람, 들어줄 사람, 위로해줄 사람. 하지만 진짜 복원은 외부로부터 오지 않는다. 삶이 흐트러졌을 때 필요한 건 설명이 아니라 조용한 수리다. 어디서부터 망가졌는지, 어떤 말에서 무너졌는지, 어떤 감정을 방치했는지 스스로 되짚어야 한다. 감정을 정리하지 않고 위로를 먼저 찾으면, 회복은 미뤄지고 무너짐만 늦춰진다. 타인은 감정을 이해할 수 있어도 구조까지는 만져주지 못한다. 조각난 자존감, 휘어진 표정, 뒤틀린 말버릇은 결국 내가 고쳐야 한다. 무너진 걸 고치는 건 기술이다. 그리고 그 기술은 외로움 안에서만 습득된다. 

마지막 장(100장)은 「시작」이다. 아이러니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이 책의 내용은 아이러니가 아니라 '필연성'이 가득 채우고 있다. 필연성을 추출해낸 것은 책의 표제어로 쓰인 '각성'이다. 우리말로 '깨달음'이라고 해도 크게 다른 뜻이 아닐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절에 가서 시작한다는 말은 "이제, 살아야겠다."는 책의 마지막 문장과 잘 어울린다. 

누구나 잘나갈 때는 그럴듯하다. 말이 많고 관계가 빽빽할수록 중심이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주변의 반응이 빠르고, 하루가 시끌벅적하게 돌아가면, 마치 삶의 궤도가 정확한 것처럼 착각하게 된다. 하지만 진짜는 그 모든 것이 빠져나간 후에 드러난다고 저자는 말한다. 연락이 끊기고, 계획이 흩어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그 정적 속에서 드러나는 말투, 표정, 생각이 당신의 실체라고 지적한다. 저자는 외부 자극이 사라진 자리에 남겨진 태도, 그게 중심이라고 강조한다.

"지금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면, 그곳이 바로 시작점이다. 남겨진 그 순간이 당신의 전부고,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침묵은 당신이 누구인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게 한다. 누구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삶의 방향을 정해주는 건 글이 아니라 당신 자신이어야 한다."(p.220~221)


저자 : 김요한


떠오름출판사를 운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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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트 컬렉터스 - 한국의 수집가 17인
이은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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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독자는 직장 생활을 하지만 비즈니스를 위한 저녁 식사나 만찬 등 사교모임 자리는 많지 않은 편이다. 수년에 한 번 정도 어쩔 수 없이 참석하는 경우를 제외하곤 비즈니스를 위한 식사 자리를 가야 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 직장이다. 그런 자리에선 으레 어쩌다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 대화가 길어져 조금 늦어지는 경우는 있지만 대부분 업무 외적인 얘기로 대화를 한다. 그러나 얼마 전 독자가 다니는 회사 대표가 가야 할 곳인데 대표의 개인 사정으로 대신 참석한 적이 있다.(회비 정산된 돈을 직접 가져가야 한다는데 자신이 급한 일로 독자에게 대신 부탁했다.) 대외 비즈니스는 독자의 일도 아닌 데다 관계 회사 대표들끼리의 모임이니 대부분 각 회사의 대표들이 참석하는 자리에 독자는 마땅히 갈 자리가 아니다. 그러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사정을 대표가 얘기하며 간 그 만찬 자리에서 옆 자리에 앉은 어떤 분이 말을 걸어와 대화가 시작됐다. 

그 분은 비즈니스 얘기가 아니라 그림에 대한 얘기여서 처음엔 적잖게 당황했다. 그 분도 조금 어색했는지 이내 그치고 말았다. 뒷날 대표를 통해 들은 얘기는 '잘난 척 좀 하는 사람'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림에 대해 좀 아는 분인데 만찬 자리에 참석하면 꼭 그림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때 아니게 그림 공부도 한 적이 있다는 게 대표의 설명이었다. 그런데 더 웃었던 것은 그런 이야기를 꺼내면 다들 싫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영화에서 본 외국의 고급 사교 모임에서 클래식 음악이나 유명한 화가의 그림에 얘기하는 모습이 떠올라서 우리나라도 그런가? 하며 웃어 넘기고 말았지만 마음속은 편치 않았다.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확인한 느낌이어서다. 그러나 한편으론 그림의 가격만을 관심 갖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작품성이라든지 화가의 삶에 대한 고급스런 대화, 격조 있는 만남의 자리는 좋은 만남이고 삶의 윤활제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 『아트 컬렉터스』는 그림, 조각 등 예술 작품을 모으는 일을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다. 표제어 '아트 컬렉터'에 대해 저자 이은주는 "예술 작품을 단순히 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삶 속에 들여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흔히 '미술품 수집가'란 말로도 쓰인다. 이 책 『아트 컬렉터스』는 그런 이들, 예술을 진심으로 사랑하며 자신의 공간 속에 작품을 들여온 '아트 컬렉터'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이 책은 예술 전문 기자로 활동해온 저자 이은주가 저마다 다른 개성과 취향을 지닌 한국의 아트 컬렉터 17인을 직접 만나 그들의 수집 철학과 예술 세계를 밀도 있게 담아낸 기록이다. 

저자는 단순한 수집품 나열을 넘어, 예술을 통해 자기만의 감성과 시선을 작품에 투영하며 삶을 채워가는 이들의 내밀한 이야기를 생생하게 전한다. 저자는 각 컬렉터의 자택과 수장고, 갤러리 등을 직접 찾아가 일상 속에서 예술이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기록하며, 작품이 공간과 인생 속에서 어떻게 의미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 한때는 사적인 공간에 머물렀던 이들의 컬렉션이 이제 한국 예술계를 움직이는 소중한 자산으로 자리매김한 지금, 그들의 진짜 이야기를 이 책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아트 컬렉팅은 문화입니다」란 제목의 〈서문〉에서 '아트 컬렉터'는 한국 사회에서 아직은 낯선 존재라고 말한다. 저자처럼 미술 기자에게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돈을 주고 미술품을 사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지만, 그들은 가끔 미술 시장의 매출 규모를 통해 드러나는 존재일 뿐이라는 말로 수가 많지 않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사실 독자처럼 일반인들은 가끔 해외뉴스나 혹은 일년에 한 번쯤 신문이나 방송에서 언급되는 소더비 등 유명 경매 회사에서 서양 미술 거장의 작품이 수백 억원, 수천 억원에 팔렸다는 토픽감 뉴스를 통해서 들을 뿐이다. 또 취미나 감상을 위해 비싼 값을 치를 수 있는 사람들쯤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게 되면 미술품 수집은 '부자들만의 취미'라는 편견은 사라진다. 일제 강점기 부자였던 간송 전형필의 우리 미술품 사랑은 문화재를 일본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사재를 털어 문화재를 구입해 지켜냈기에 그는 미술품 수집가나 애호가라기보다 애국자 반열에 오른 분이니 일반 미술품 수집가들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것 아닌가? 하는 게 독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다만 우리나라 최대 재벌이었던 고(故) 이건희 삼성 회장이 유산으로 미술관에 남겼다는 2만 여점의 미술품을 생각해보면 돈을 벌 목적으로 미술품을 사 모으거나 구입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반증이기도 하다. 간송이나 이건희 회장 역시 단순히 재산 증식을 목적으로 그 많은 미술품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책에는 이들처럼 거대한 컬렉터는 아니더라도 바로 우리 곁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술과 함께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현실적이고 따뜻한 이야기들이 가득 담겼다. 이들 역시 미술품에 대한 관점은 '재테크가 아닌 취향'이라는 점을 이 책에서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돈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때문에 어느 정도의 돈을 벌거나 마련이 가능한 사람들이지만, 역시 제1 조건은 '취미, 취향'이 대부분이다. 

이 책에는 모두 17명의 컬렉터가 나온다. 이들은 한결같이 '좋아서', '끌려서' 미술품 모으기를 시작했다. 또 이들의 수집 과정을 살펴보면 열정을 넘어 '수집벽(癖)'에 가깝다. 또 이들이 미술품 수집은 단순히 예술품을 모은 수준이 아니다. 전문가 같다. 이래서 이들의 수집은 단순한 취미나 재테크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고 독자는 이해한다. 어떤 수집가는 미술품 수집이 자신의 삶을 구성하는 태도이며,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올린 자신만의 세계이기도 하다. 저자에 따르면 컬렉터에게 예술품은 단순한 소유물이 아닌, 삶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동반자이기도 하다. 미술 기자인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한 건 예술 시장에서 늘 언급되지만 막연하게만 여겨졌던 아트 컬렉터들이 어떤 작품에 매료되어 그것을 소유하게 됐는지, 예술과 함께하는 삶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한국의 아트 컬렉터 17명의 집(수집품 전시하는 곳)을 직접 찾아가 만난 특별한 대화들이다. 이들 컬렉터는 저자와의 대화 속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이야기한다. 또 미술품은 단순한 재테크 수단이 아니라,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따라가는 여정이며, 그것이야말로 오래도록 지속 가능한 컬렉팅의 비결이라고 털어놓는다.


이 책은 1, 2부로 구성돼 있다. 1부 〈예술계의 ‘보이지 않는 손’, 아트 컬렉터〉, 2부 〈예술과 함께면 일상이 새롭고 설렌다〉이다. 모두 15개의 장(章)으로 나뉜다. 17명인데 왜 15개 장으로 구분돼 있을까? 두 개의 장은 아예 부부가 함께 등장한다. 일심동체 아트 컬렉터이다. 장(章)의 제목만 봐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챈다면 이미 전문가 급이다. 1부엔 1장 「문 열면 백남준이 맞는 그 집-서정기 패션 디자이너」, 2장 「신촌에 예술 아지트 구축한 MZ세대 부부-노재명 아트 오앤오 대표·박소현」, 3장 「병원서 만난 특별한 컬렉션-홍원표 탑여성앤탑성형외과 원장」, 4장 「터미널, 예술을 품다-이영민 대전복합터미널 부회장」, 5장 「건축가의 작업실 옆 라운지-유현준 홍익대 건축도시대학 교수」, 6장 「천년의 빛을 좇다-주재윤 소나무한약국, (주)셀라돈 대표」, 7장 「컬렉터에서 갤러리스트로-안혜령 리안갤러리 회장」, 8장 「자연 속에 펼친 미래 비전-김정완 매일홀딩스 회장」 등이 소개된다. 또 2부는 9장 「기업과 삶에 스며든 예술-김희근 벽산엔지니어링 회장」, 10장 「100년 건축에 심은 예술의 힘-황인규 CNCITY에너지 회장」, 11장 「한국 민화의 가치를 세계에 알리다-김세종 평창아트 대표」 12장 「프로페셔널 리서치 노하우 공개합니다-윤영준 이젤 대표·이가현 이젤 이사」, 13장 「이중섭이 이끈 수집 인생 40년-안병광 유니온그룹 회장」, 14장 「‘패션 덕후’의 수집 철학-심준섭 오프닝 대표」, 15장 「달항아리에 홀려, 경영이 예술이 되다-이상준 (주)더프리마 회장」 등이 저자와 속깊은 이야기를 나눈다. 이들 컬렉터 중에서 그림이 가장 많고, 민화, 한국화, 조각, 설치미술, 공예품 등 마치 일부러 각 부문별로 선택했는지 모르겠지만 미술 전반에 걸쳐 컬렉터들이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들 컬렉터는 미술품 수집에 뜻이 있는 사람들은 대세나 블루칩을 좇는 순간 오히려 방향을 잃기 쉽다고 말하며, 진짜 즐거움은 자신이 사랑하는 작품과 함께 살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경험으로 말해준다. 이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예술품 수집이 소수의 취미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는 문화라는 것을 느끼게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책장을 덮을 때쯤, 독자들은 역시 예술품을 수집하는 즐거움과 컬렉션의 참된 가치에 한 발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거실 중앙에 백남준의 설치 작품을 두고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패션 디자이너, 병원의 진료실과 복도 곳곳을 미술품으로 꾸민 성형외과 원장, 터미널 공간을 문화예술로 채운 기업 경영자, 컬렉션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자 하는 재단 이사장, 미술계의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가고 있는 젊은 MZ세대 부부 컬렉터까지··· 이처럼 예술을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컬렉터들의 다채로운 일상과 철학이 이 책 속에서 펼쳐진다.

시장의 트렌드나 경제적 가치로 작품을 좇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안목을 키우는 과정은 대화가의 작품 제작과 삶의 과정을 여행하는 듯한 느낌을 받느다. 이렇게 감성을 풍부하게 가꾸는 과정은 결국 안목을 믿고 작품을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랍기만 하다. 이 때문에 이들은 스스로 좋아하는 가치를 삶 속에 녹이는 또 한 사람의 예술인을 대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그들이 수집한 미술품에 대한 각각의 치열한 고민과 선택의 과정을 읽다보면 정말 예술인 못지 않은 열정과 삶에 대한 애정도 함께 느껴진다. 이들은 자신의 미술 작품을 단순히 보는것을 넘어 이해하고 사랑하고 있으며, 예술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도 저자의 글 속에서 툭툭 튀어나오는 듯하다. 이 책은 이 밖에도 예술 시장의 흐름과 컬렉터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이해할 수 있도록 많은 도움을 준다. 예술 작품의 가치가 어떻게 형성되는지, 그리고 동시대 예술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게 해준다. 또한 컬렉터들이 수십 년 수집한 작품은 간혹 비싼 것도 있지만, 대다수 작품들은 컬렉터들의 안목과 관점에 의해 선택된다는 사실은 예술에 대한 또 하나의 관점을 독자들에게 전하기도 한다. 


"제 미감을 충족시키고 자극하는 것들은 다 모은 거죠. 그게 그림이기도 하고, 골동품이기도 하죠. 작품 반열에 오른 가구이기도 하고요. 아주 비싼 것은 별로 없어요. 오래전 벼룩시장에서 적은 금액으로 산 것부터 이것저것 두서 없이 다 모은 거예요."(p.14)


"처음에는 그림과 친해지는 시간이 필요했어요. 틈만 나면 점심 시간에 병원 주변의 갤러리에서 작품 구경을 했죠. 갤러리 대표님과 친해지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사게 됐어요. 먼저 작은 그림 여러 개를 샀지만 큰 사이즈로는 자작나무 숲을 그리는 이수동 작가의 〈겨울사랑〉 100호(162.2*130.3cm)가 처음이었어요. 따뜻한 색채에 연인이 벤치에 앉아 있는 단란한 모습이 좋아서 지금도 병원에 걸어두고 있어요. 현대미술이 대부분이고 특정 장르나 테마는 가리지 않아요. 어떤 작품이든 일단 내 마음에 드는 게 우선이에요. 컬렉션이 늘어나면서 작품이 지역, 작품의 형식, 그리고 시기도 다채로워졌죠."(p.79)


"여기가 젊은 사람들의 놀이터가 됐으면 좋겠다는 것이었죠. 우리 때는 이런 미술관이 없었거든요. 저는 미술관이야말로 감정을 감성으로 바꿔주는 곳이라고 믿거든요. 사람들이 여기서 만나고, 보고, 느끼고, 소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무엇보다 여기가 돈 많은 사람을 위한 미술관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편하게 찾아오는 곳, 문턱 낮은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죠."(p.353)


저자 : 이은주


중앙일보 문화선임기자. 서강대에서 영문학(전공)과 신문방송학(부전공)을 공부하고, 중앙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국제부, J 스타일 등의 부서에서 일했다. 이후 문화부에서 영화와 음악, 책과 건축, 디자인 기사를 썼다. 중앙일보 재직 중 서강대 언론대학원에서 ‘영상’을 전공(수료)했으며, 영국 외무성 장학생(Chevening Scholarship)으로 선발돼 런던대 버크벡 칼리지(Birkbeck, University of London)에서 영화 이론(History of Film and Visual Media)을 공부하고 석사학위를 받았다. 중앙일보에 칼럼 「이은주의 아트&디자인」을 연재하고 있다. 일찍이 영화에서 출발한 시각 매체에 대한 관심이 런던 생활을 통해 미술 분야로 확장됐고, 북 섹션을 담당하며 다양한 시각 예술을 인문학의 맥락에서 바라보는 시각을 키웠다. 이 여정을 지속해서 이끈 힘이 ‘아름다움(Beauty)’과 ‘지혜(Wisdom)’라는 화두였음을 지금에야 깨닫는 중이다. 이 길 위에서 경험하며 발견해온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과 나누는 데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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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겨진 얼굴
이현종 지음 / 모모북스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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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평범한 회사원 준혁은 어느 날 갑작스러운 부모님의 죽음에 맞닥뜨린다. 희망재단이라는 사회봉사단제를 운영하던 부모님은 그야말로 외아들 준혁에게뿐만 아니라 같은 공동체 사회에서도 존경받으며 열심히 이웃을 돕는 아주 넉넉한 마음의 소유자로 잘 알려져 있다. 청천하늘의 날벼락 같은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들은 준혁은 슬픔과 충격을 추스릴 겨를도 없이 부모님의 유품 등을 정리하면서 예금통장 등 적잖은 액수의 유산에 충격을 받는다. 예금통장 안의 액수가 62억 3,000만··· 사업에 성공해 모은 돈을 여생 사회봉사 비영리재단에 모두 쏟아부어 조용히 재단을 운영하며 부부가 욕심 없이 평범한 여생을 보내시는 줄 알았던 준혁에게는 상상을 초월한 액수의 통장 잔고를 보고 온갖 생각에 휩싸인다. 뿐만 아니라 희망재단의 운영을 돕고 있던 사람들과 접촉하면서 재단의 자금이 800억 원이 넘는다는 이사의 답변과 비영리재단인 만큼 이사장 상속은 법적으로 불가능햐다는 말을 듣는다. 부모님의 뜻을 이어받아 자신이 재단을 상속받아 운영하려는 준혁의 생각은 처음부터 암초에 부딪친다. 평생을 희생과 봉사로 살아온 줄 알았던 부모님이 남긴 엄청난 규모의 상속재산, 선행의 상징처럼 여겨졌던 ‘희망재단’이 어두운 비리와 뒤엉킨 범죄 조직이라는 의혹이 준혁을 혼란 속으로 몰아넣는다. 과연, 그들은 어떤 얼굴을 숨기고 살아왔던 것인가?

이 책 『숨겨진 얼굴』은 부모님의 갑작스러운 테러에 의한 죽음이라는 개인적 비극에서 출발해, 재단의 비리와 범죄 조직, 그리고 시간여행을 하는 '타임머신'의 완전한 발명체를 눈앞에 둔 듯한 과학자까지 등장하며 사건이 전개된다. 문학적 장르로 굳이 분류하자면 SF 스릴러이다. 저자 이현종은 평범한 직장인이지만 작가의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고 '주경야독'의 작가 지망생이라는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만 이번 책을 냈으니 데뷔 작가이고, 또 이미 극본을 써 무대에 올린 적도 있으니 기성 작가로 대우해도 괜찮을 듯하다.


특히 저자 이원종은 단순한 사건 확대보다는 등장 인물의 심리 변화를 세밀하게 그려냄으로써 심리 스릴러 소설로 독자에게는 읽힌다. 소설의 발단은 매우 평온한 오전의 카페이다. 오전에 카페에 있는 손님들은 대부분 한가로운 시간을 즐기는 조용하고도 편안한 분위기가 연상된다. 그러나 평온한 이곳에 한 남자가 급한 걸음으로 들어서면서 분위기는 급반전된다. 그의 눈에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엿보이고, 뛰어왔는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얼굴에는 땀이 맺혀 있다. 저자는 "마치 오랜 시간 동안 무언가를 피하거나, 쫒기고 있는 듯한 느낌"이라고 묘사한다. 그는 카페를 둘러보며 누군가를 찾는다. 한쪽 손에는 무언가를 손에 쥔 채 가슴팍 안에 넣어놓고 있다. 카페 안에는 몇몇 손님이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주목하지 않았고, 관심을 줄 이유도 없었다고 카페 안 분위기와는 이질적인 남자가 들어선 것이다.

남자는 이윽고 야외 테라스에 앉아 있는 노부부를 발견한다. 잠깐 노부부를 바라보더니 크게 호흡하고 손안에 무언가를 다시 체크한다. 급하게 들어왔던 발걸음과는 달리 천천히 테라스로 다가간다. 불안했던 눈빛은 이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남자는 노부부 앞에 다가가 그들이 바라보던 전경을 가로막아 선다. 그제야 남자를 의식한 노부부에게 묻는다.

"나를 기억하십니까?"

노부부의 얼굴에 당혹감과 두려움이 스친다. 남자는 짧은 문장으로 무언가를 덧붙였고, 노부부는 점점 사색이 되어간다.

"여길 어떻게···"

남편이 말을 마치기도 전에, 남자는 가슴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날카로운 금속이 햇빛을 받아 반짝인다. 그리고 이내 높이 치켜들린 칼날이 순식간에 남편을 향해 내리꽂힌다. 떨어진 커피잔이 깨지며 바닥에 흩어졌고, 남편은 짧은 신음과 함께 한순간에 힘없이 쓰러진다. 남자는 남편이 쓰러진 이후에도 계속해서 칼을 휘둘러 남편을 찌른다. 아내는 공포에 꼼짝하지 못하다가 맹렬한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남자는 잔혹하게 칼을 꽂는다.


카페 안은 이미 아수라장이 되고, 손님들은 비명을 지르며 몸을 숨기거나 테라스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달아난다. 몇몇은 공포에 떨며 혹시라도 남자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문을 막고 서 있다. "남자는 홀로 테라스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노부부의 남편이 앉았던 자리다. 그는 그 자리에 앉으면서 순간적으로 자신이 그 노인의 자리에 앉았다는 사실에 묘한 감정을 느꼈다. 이 자리에서 그가 느꼈을 따뜻함과 평온함이 이제는 사라지고, 대신 차가운 현실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가슴 안쪽에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아내와 딸이 함께 웃고 있는 가족사진이었다. 하지만 피로 물든 그의 손 때문에 사진도 곧 핏자국으로 얼룩졌다."(p.13) 그 사이 곧 형사들이 도착했다. 앞으로 이 사건을 맡을 담당 형사들이다. 병찬*희성**이다. 이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형사이지만, 이번 사건이 주는 불길한 예감에 얼굴이 굳어진다.

이상의 내용이 평온한 카페 안에서 순식간에 벌어진 노부부 살해 사건 모습이다. 이 사건 기술에서 저자는 여느 소설처럼 과거형으로 사건을 묘사하고 있지만, 독자가 임의대로 현재형으로 바꿨다. 사건이 순식간에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가해자와 피해자가 이미 아는 사이인 데다 신고를 받고 달려온 형사들마저 아는 인물들인 듯한 저자의 묘사에 긴장감과 짧은 시간에 이루어진 사건이라 현재형으로 독자가 재기술하는 과정에서 시제를 바꿨을 뿐이다. 독자들의 양해 바란다. 

* 병찬: 이병찬. 사건을 추적하는 강력계 베테랑 형사, 가족을 위해 내렸던 과거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한 깊은 죄채감을 안고 있으며, 어둠을 파헤칠수록 자신의 과거가 다시 발목을 잡는 갈등을 겪는다.

** 희성: 박희성. 강한 정의감과 열정을 지닌 젊은 형사. 이병찬 형사가 많이 의지하지만, 희망재단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갈등으로 겪는다.(이상 저자 주)

저자는 책의 맨 앞에 등장인물에 대해 간단한 소개를 먼저 해두었다. 두 형사 이외에 주인공이자 살해된 노부부의 외아들 이준혁과 희망재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인물, 진승일도 소개된다. 진승일은 오직 자신의 권력과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는 인물이다.


주인공 이준혁은 "부모의 갑작스러운 죽음에 큰 충격을 받지만, 엄청난 규모의 재산과 부모가 설립하고 운영하던 희망재단에 얽힌 의혹으로 극도의 혼란 속에 빠져들게 된다."고 저자는 소개한다. 주인공 이준혁은 살해당한 노부부의 아들이자 부모의 따뜻하고 온정어린 보살핌 속에 잘 자라 직장을 다니며 선량하게 사는 평범한 사람으로 묘사된다. 당연히 그의 부모처럼 욕심 없이 주어진 일을 충실하게 하며 사는 극도로 평범한 대한민국 시민의 한 사람이다. 그러나 선량하고 이웃들에게 희망을 나눠줬던 부모님이 온화한 표정 뒤에 '숨겨진 얼굴'이 나타남으로써 주인공의 가치관도 흔들리게 되고, 그에게도 '숨겨진 얼굴'이 있으며, 그것은 온화하고 다정한 모습 뒤에 가려진 욕망과 탐욕이다. 저자가 이들의 가면을 벗겨내며 그 이면의 탐욕과 욕망을 드러냄으로써 우리 모두에게는 욕망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표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특히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가 사는 이상 모든 사건이 '돈'에 얽혀 있는 사실을 드러내는 저자의 집필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복잡하고 어두운 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문학 작품에서 처음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고, 이미 많은 문학 작품에서 다루는 내용이다. 단골 소재이다. 다만 삶의 오점을 시간을 다룰 수 있다는 과학적 상상력을 동원해 삭제하거나 되돌려 제거하려는 모습은 신선함이 있다. 사건의 구성 면에서는 완숙한 모습을 보이지 못한 점이 눈에 띄지만 이 작품 『숨겨진 얼굴』이 데뷔작이란 점에서 앞으로의 작품에 대한 기대를 높여도 좋을 것 같다. 

소설을 구성에는 발단 부분의 사건이 전개되어 가는 과정이 유기적이어야 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이 소설 작품에서 한 가지 불만스러웠던 점은 부모님의 숨겨진 재산을 확인하고, 이 막대한 자산을 어떻게 모은 것인지 가늠되지 않아 머리가 혼란스러울 때 사건 후 자신이 만난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면서 그들이 무슨 음모를 꾸밀지 모른다는 결론에 이른다. 잠들지 못하면서 그동안 부모님을 너무 모르고 본인만을 위해 살아왔다는 것, 그리고 부모님이 돌아가시게 된 이유를 알지 못하는 것, 진실을 알아도 부모님을 다시 살려낼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희망재단에 대한 궁금증과 수많은 후회와 의혹이 밤새 준혁을 괴롭힌다.


이때 "준혁은 답답한 마음을 SNS에 표현했다." 이 문장이 느닷없이 튀어나온다. 책에서는 SNS에 올린 내용을 서체를 바꿔 두드러지게 독자들에게 보이도록 썼다. 명조체로 독자에게는 보인다. 내용도 다소 허술하다. 처음과 끝부분만 여기에 적어본다. "저는 불효자였습니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하루하루가 고통 그 자체입니다. 나름 부모님께 효도하고 살아왔다고 자부했지만... (중략) 하늘은 너무 불공평한 것 같습니다. 저에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부모님을 꼭 제 손으로 살리고 싶습니다. 제 전 재산을 걸더라도!" 

글을 올리자 수많은 응원 메시지가 이어졌다. 다음날, 익명의 한 사람이 준혁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제가 그 소원 이뤄들릴 수 있습니다. 만약 부모님을 살릴 수 있다면, 어디까지 할 수 있겠습니까?"(p.46)

밤에 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로 혼란스럽고 괴로운데 왜 갑자기 SNS에 글을 올리는지가 무척 부자연스럽다. 그것도 시간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부모님을 꼭 자기 손으로 살리고 싶다는 글을 올리는 것이 상식적인 일인가. 저자 자신으로서는 나중에 SNS를 읽은 과학자와 그의 부하들이 개발중이라는 '타임머신'을 사용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 시간을 되돌아가 살해 사건을 미리 막겠다고 하는 내용이 저자의 머릿속 구상에는 들어 있겠지만 이를 읽는 독자는 "웬 SNS?" 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에서 가장 피해야 할 점이 사건이 '우연'에 의해 전개되거나 반전되는 경우다. 특히 해결을 위해 우연이 사용된다면 독자들 느낌에는 도저히 수긍하지 못하지 않겠는가? 사실 소설이라는 창작물에서 저자가 '우연'을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도 모순적이긴 하다. 세상에는 '우연'에 의해 사건이 해결되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소설 자체가 허구다. 그냥 말도 안 되는 것을 써놓는 것이 아니라 상식과 순리에 맞게 전개되게 저자가 지어내야 한다. 세상에서 일어날 만한 일은 '우연'이 거의 없다. 우연이 해결될 일이라면 소설 자체가 성립이 안 된다. 어쩔 수 없이 우연이 개입될 때는 저자가 사건의 발단이나 전개 과정에서 '복선'을 깔아둬야 한다. '우연'이 개연성을 가진 것으로 둔갑시키는 일이다. 우리가 잘 아는 황순원의 단편 「소나기」가 그렇고, 루 월리스의 장편 『벤허』의 '기왓장'이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 여름철 폭염을 서늘하게 느낄 만한 매력을 갖춘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저자 : 이현종


낮에는 금융회사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주짓수로 몸을 단련하며, 밤에는 책상 앞에 앉아 글을 쓴다. 극단에서 시나리오를 쓰고 무대에 올리던 경험으로, 글 속에 호흡과 온기를 옮겨 놓는 일에 매달리고 있다. 독자에게 의미 있는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신념으로, 서울 동쪽 작은 방 한쪽에서 문장에 숨을 불어넣고 있다. 장편소설 『숨겨진 얼굴』은 그가 빚어낸 첫 결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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