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 세계사를 바꾼 시리즈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김수경 옮김 / 사람과나무사이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 서평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독자는 커피가 아랍산이란 이야기는 들은 적이 있지만 세계사를 바꾸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구체적으로 듣지 못했다. 중동 '예맨'에 커피 주산지이고 거대 무역항이로 발전한 '모카'라는 도시가 있어서 쉽게 알 수 있는 일이고, 우리 커피 제조판매사인 '○○'의 '아라비카'란 명칭이 중동에서 시작됐다고 한다. 그래서 커피의 원산지는 아랍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커피 주산지가 세계 무역항으로 발달하고, 특히 유럽 쪽에서 커피를 처음 접하고 확산시킨 사람들은 유럽인이었다. 

키 150센티미터의 커피나무 한 그루가 프랑스에 들어온 것은 ‘루이 14세' 때였다고 한다. 당시 세계 무역의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던 1714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시장이 루이 14세에게 바친 선물이었다. 책에 따르면 ‘루이 14세의 커피나무’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이는 프랑스령 마르티니크섬 근무 경험이 있는 해군대위 출신 가브리엘 드 클리외였다. 어렵게 커피나무 한 그루를 구한 그는 온갖 고난을 겪으며 그 나무를 마르티니크로 가져가 심게 했고, 놀라운 생산량을 기록하며 몇십 년 후 전 세계 커피산업과 커피무역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또 나폴레옹은 커피를 군대에 맨 처음 보급한 인물이다. 그는 왜 자신의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려 애썼을까?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검은 음료’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알려지고 있다. 나폴레옹은 군대에 커피를 보급하기 위해 여러 분야의 발명에 상금을 걸고 산업혁명을 독려했다고 역사에는 서술되었다. 직물기계 개량, 인디고 대체용 색소 개발, 새로운 종류의 설탕 제조 등의 혁신은 그 열매인 셈이었다. ‘영양분이 거의 없는데도 왠지 힘이 나게 하는 음료’ 커피는 나폴레옹의 야망과 뒤얽히며 프랑스 산업 전반을 비약적으로 성장시켰으며, 18세기 이후 유럽과 전 세계 경제를 송두리째 뒤바꿔놓는 ‘산업혁명’의 근간이 되었다.



그렇다면 커피는 어떻게 세계사를 바꿨을까? 이 책 『세계사를 바꾼 커피 이야기』의 저자 우스이 류이치로는 "커피와 커피하우스가 없었다면 프랑스대혁명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인류의 역사를 바꾼 커피의 영향력을 강조한다. 저자는 「커피와 권력이 서로를 갈망하고 이용하며 세계사의 물줄기를 바꾸다」라는 제목의 〈서문〉에서 프랑스에서의 커피 선호와 영국으로 확산 등을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프랑스령 서인도제도에서 산출되는 막대한 양의 커피는 이슬람 세계에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전 세계 커피산업과 커피무역의 판도를 바꿔놓았다. 프랑스는 커피문화와 커피산업의 판도를 바꿔놓았다고 저자는 밝힌다. 프랑스에서 처음 시작했지만, 이에 앞서 아랍에선 커피가 상당히 유행하는 중이었다고 한다. 즉 대항해 시대에 확보한 프랑스령의 많은 지역에서 막대한 양의 커피가 들어올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운송하는 무역업에는 당시 무역 상권을 장악한 네덜란드라에도 엄청난 부를 가져다 준 셈이다. 물론 영국에도 커피 문화가 확산되었다. 영국은 특히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지 30여 년 만인 1683년에 3,000여곳, 1714년에는 8.000여곳으로 늘었다고 하니 확산 속도도 엄청났던 모양이다. 

영국에서 커피하우스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커피 산업이 급성장하던 17세기 후반이다. 이후 커피하우스의 열기는 홍차와 티하우스로 옮겨 붙었다. 영국의 커피하우스가 사회적 기능을 다했다는 말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애초에 영국 커피하우스가 여성을 철저히 배제하며 탄생하고 성장했기에 결국 '여성 청원' 등 거센 반발에 부닥치며 직격탄을 맞아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저자는 설명하고 있다. 홍차는 나중에 중국과의 아편전쟁으로까지 비화하며 세계사의 거대한 물줄기를 바꿔놓았다는 게 저자의 주장이다. 커피는 원래 이슬람 수피교도가 ‘욕망을 억제하고 수행에 정진하기 위해’ 즐겨 마시던 음료였다. 아마 각성 효과 때문인 것 같다. 그 독특한 ‘검은 음료’는 역설적이게도 17세기 유럽 상업자본가와 정치권력자의 들끓는 욕망을 자극하며 유럽과 전 세계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기 시작했다.



이 책은 모두 8장(章)으로 나뉘어져 있다. 1장 〈이슬람 세계를 지배한 ‘검은 음료’ 커피〉, 2장 〈커피의 상업적 가치를 간파하고 이익을 극대화한 이슬람과 유럽 상인〉, 3장 〈영광의 자리를 홍차에게 빼앗긴 영국 커피〉, 4장 〈프랑스혁명의 인큐베이터가 된 커피와 카페〉, 5장 〈커피를 원하는 권력, 권력을 원하는 커피〉, 6장 〈19세기 후반, 식민지정책을 통한 동아프리카 커피 플랜테이션에 광적으로 몰입한 독일〉, 7장 〈바이마르공화국의 숨통을 끊어놓은 브라질의 ‘커피 대량 폐기 사건’〉, 8장 〈자국의 식민지이자 커피 생산지인 나라에 ‘극단적 모노컬처’를 강요하는 유럽 강대국〉 등이다.

각 장의 제목만 보더라도 커피는 엄청난 힘으로 유럽 사회를 뒤흔들고, 판도를 바꾸는 데 기여했다. 당시 기울어가는 청나라의 운명에 일침을 가한 전쟁이 아편전쟁이었다면, 커피 때문이 아니라 '차(茶)'의 대금을 은(銀)으로만 받던 청나라에, 유럽의 은이 고갈될 상태에 이르자 영국은 대금을 청나라에 아편을 팔아 챙긴 자금으로 치렀다. 그러다 1840년 들어 청 조정에서 이를 억제하는 정책을 펴면서 영국이 몰래 판 아편을 바다에 모두 수장시킨 사건이 벌어진다. 아편 수출이 막히자 영국이 택한 방법은 이른바 '아편전쟁'이다. 

아랍 커피 주 수입국이던 영국에서 커피가 홍차에게 밀려난 원인이 여성을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앞선 설명에서 지적한 바 있다. 아라비아의 커피는 바다 건너 영국에 ‘커피하우스’를 통해 전파되었다. 영국 런던에 최초의 커피하우스가 문을 연 때는 1652년이었다. 그 역사적인 커피하우스의 문을 활짝 연 이는 영국인이 아닌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출신의 파스카 로제였다. 그는 레반트를 무대로 활약하던 상인 대니얼 에드워즈의 시종이었는데, 매일 아침 주인을 위해 커피를 끓이던 습관이 커피하우스 창업으로 이어진 셈이었다. 그렇게 출발한 런던의 커피하우스는 한동안 우여곡절을 겪었으나 어느 시점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했다. 커피하우스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커피산업이 급성장하던 17세기 후반의 상황이다.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커피하우스는 영국이 맞닥뜨린 당대의 시대 상황·니즈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졌고, 커피산업과 커피문화의 급성장으로 이어지며 시민의 일상 속으로 깊이 파고들었다.



이 책의 6장 〈19세기 후반, 식민지정책을 통한 동아프리카 커피 플랜테이션에 광적으로 몰입한 독일〉에서 저자는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독일혁명의 트리거를 당긴 것이 커피였다"고 전제한 뒤, 「프리드리히 대왕이 의사들에게 명령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는 거짓 소문을 내게 한 까닭」, 「프로이센 시대 독일인이 반나폴레옹 해방전쟁에 나선 이유는 ‘진짜 커피’에 대한 강렬한 욕망 때문」이었다고 지적한다.

책에 따르면 프리드리히 대왕은 어딘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모순된 면이 많으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지닌 묘한 남자였다. 우선 그는 계몽된 전제군주의 정체성과 위상을 몸소 구현하며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냈다. 또 그는 플루트 곡집을 후세에 남기기도 했고, 여자와의 ‘전쟁’에 질린 남자의 슬픔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포츠담에 지은 상수시 궁전에서 잘 때는 늘 애견하고만 동침했다. 이런 타입의 남자가 커피를 마시지 않았을 리 없다. 그러고 보면 그가 마시는 커피도 얼마나 모순으로 가득한가. 그는 커피에 샴페인을 넣어 같이 끓인 뒤 마지막에 후춧가루를 뿌려 마셨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계몽적 이성으로는 왜 위대한 프로이센의 국민이 이런 음료를 마시는지, 그리고 결국 매년 70만 탈러의 막대한 자금이 네덜란드로 빠져나가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이에 그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의사들에게 명해 커피에 독성분이 있다고 소문을 내게 한 것이다. 효과가 있었을까? 아니, 효과는 제로에 가까웠다. 이유가 뭘까? 일반 서민들이 ‘커피가 무서워서 감자를 먹으랴’ 하는 심정으로 그 조치에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대왕은 감자가 독성식물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감자가 지닌 몇 가지 탁월한 장점(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 재배하기 쉽고 소출량이 많은 데다 쌀·밀 등의 주식 대체용으로도 손색없다는 점 등)도 간파하고 있었기에 장차 독일의 고질적 식량난을 해결해줄 미래형 주식으로 만들기 위해 감자 재배를 장려했다. 그렇다고 해서 프리드리히 대왕이 감자를 무척 좋아해서 그런 정책을 추진한 것은 아니었다.



커피를 광적으로 좋아한 독일은 드디어 커피를 수입을 위해 본격적으로 식민지 개발에 나서서 성공했다. 아프리카와 브라질 유럽 나라들을 통해 수입하던 커피를 직접 식민지 등을 통해 재배하고 사들여 왔으니 엄청난 수익을 거두었을 것은 뻔한 일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거센 파도에 맞닥뜨려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성과는 산산이 흩어졌다. 특히 원자재를 다른 나라에 의존하는 현대산업국가는 장기화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 그런 면에서 독일이 일으킨 20세기 최초의 세계대전은 독일 입장에서 최악의 전쟁이 되었다. 영국·프랑스·러시아의 삼국협상 측은 미국을 비롯한 여러 동맹국의 도움으로 각종 원자재를 조달할 수 있었으나 독일·이탈리아·오스트리아의 삼국동맹 측은 원자재 공급이 거의 끊긴 상태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전쟁을 일으켰을 당시 전력적인 면에서 월등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전쟁이 오래 가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저자에 따르면 독일 정부는 전쟁 발발하던 해 크리스마스 이전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전쟁은 의외로 길게 연장되었으며 독일이 광적으로 쌓아올린 식민지 등의 커피 수입이 불가능해졌다. 커피의 경우 브라질 마저 미국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브라질에서 독일로 가던 커피 폐기가 전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엄청난 양의 커피가 소각되거나 배의 갑판 위에서 바다로 버려졌다. 커피대국 브라질의 파탄은 결코 한 국가의 파탄으로 끝나지 않았다. 식민지로 출발한 브라질은 노예무역과 이민 등을 통해 집요하게 커피 공급기지로의 변신을 강요당해왔다. 그리고 1929년 이후 대공황 시기에는 유럽 근대 시민사회에 ‘검은 혈액’을 흐르게 한 순환구조에 치명타를 입은 것이었다. 브라질의 커피 폐기 뉴스는 그 처참한 광경을 찍은 수많은 사진과 함께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독일의 각 신문도 브라질의 커피 폐기 뉴스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중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32년 3월에 발행된 한 잡지에 게재된 것으로, 브라질의 커피 폐기를 전하는 보도사진이다.

사진에는 연기를 내뿜으며 질주하는 증기기관차 위에 네 명의 남자가 서 있다. 두 명은 어이없다는 듯 엷은 웃음을 띠고 있고, 나머지 두 명은 얼굴이 거북이 등껍질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다. 한 사람이 석탄을 갑으로 퍼서 기관실로 보낸다.



아니, 자세히 보니 석탄으로 보였던 그 물질은 ‘커피콩’이었다. 커피콩을 에너지원으로, 구수한 아로마를 퍼뜨리며 브라질 전역을 누비고 다니는 증기기관차······. 이 한 장의 사진 앞에서 잠시 생각에 잠긴 이유는 옛날(‘옛날’이라고 말은 했지만, 불과 400여 년 전의 일이다)에 이슬람 세계에 홀연히 나타난 카와가 『꾸란』이 먹을 수 없다고 금지한 석탄인가 아닌가 하는 혐의를 받은 역사적 사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커피콩이 석탄인지 아닌지를 따지는 논쟁은 왜 필요했을까? 카와라는 새롭고 독특한 음료가 이슬람 세계에서 정당성을 확립하기 위해, 그리고 한발 더 나아가 커피가 세계교역의 대표 상품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불가피한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로부터 400년 지난 시점에 전 세계가 커피를 일상적으로 마시는 시대가 된 상황에서 커피의 ‘순환’을 책임지는 운전자이자 심장격인 브라질에서 ‘커피는 석탄이다’ 하고 선명한 사진과 함께 선언해버린 셈이었다.


저자 : 우스이 류이치로(うすい りゅういちろう, 臼井 隆一郞)


도쿄대학 명예교수. 194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1972년 도쿄교육대학 독일문학과를 졸업하고 1974년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수료했다. 니가타대학 교양부 조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도쿄대학 교양학부(종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 전공) 교수, 테이쿄대학 외국어학부 교수를 지낸 후 2014년에 퇴임했다. 지은 책에 『네티 라드바니에서 안나 제거스로』『바하오펜론집성』『빵과 와인이 돌고 신화가 돌고』『말라버린 나무의 언어』『기억과 기록』『고해정토론』『카를 슈미트와 현대』『아유슈비츠의 커피』등이 있다.


역자 : 김수경


중앙대학교 일어일문학과를 졸업하고, 전문 에이전트로 근무하다 지금은 번역가로 활동 중이다. 공저로『잘나가는 회사는 왜 나를 선택했나』가 있고, 옮긴 책에 『커피가 돌고 세계사가 돌고』『기획서는 한 줄』『청춘이란』『마두금 이야기』『조금 다를 뿐이야』『여자 나이 50』『듣기: 직원의 능력을 배가시키는 소통의 기술』『준비된 습관』 등이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자보다 잘 사는 사람
법상 지음 / 마음의숲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 서평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가 단편소설집을 낸 적이 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란 제목이다. 톨스토이는 본래 자기완성을 목표로 삼아 '교양 소설'의 주인공처럼 계속 성장하기를 꿈꾸었다고 한다. 하지만 사십 대 후반, 그는 자신의 육신이 성장이 아닌 '쇠락과 고통과 피할 길 없는 소멸'로 향하고 있음을 문득 자각한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전투에서의 수많은 죽음을 목도했던 그에게 '죽음'은 막연한 관찰 대상이 아니라, 자신을 삼키려 다가오는 실존적 공포가 되었다. 1875년, 마흔일곱의 톨스토이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죽음 외에는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라고 고백한다. 성공한 대문호이자 행복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그가 마주한 것은 인생이란 무의미하다는 ‘심연’ 그 자체였고 급기야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기에 이른다.

톨스토이는 이 무렵 원시 기독교 사상에 몰두하면서 사유 재산 제도에 비판을 가하고 술과 담배를 끊은 뒤 손수 밭일을 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지향했다고 한다. 토지 대금을 내지 못해 몰락하는 농민들을 돕고 대흉년에 무료 급식소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황제 암살범의 처형을 막기 위한 탄원 활동을 벌이는 등 귀족적인 삶을 버리고 적극적으로 사회 활동에 헌신한다. 민중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민담 22편을 썼는데 그중에서도 이 책에 수록된 「인간에게 많은 땅이 필요한가」는 소설가 제임스 조이스가 “문학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야기”로 꼽기도 했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 담긴 '작은 이야기'들은 톨스토이가 그 지독한 절망의 끝에서 스스로 찾아낸, 길 잃은 이들을 위한 '삶의 안내서'다.

톨스토이(1828~1910)가 살던 무렵 러시아 제국은 유럽에서 가장 낙후한 나라 중의 한 나라였다. 유럽의 수많은 국가들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바뀌고 이른바 '민주주의' 제도를 착실히 쌓아갈 때 러시아 제국은 봉건 시대의 악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농민보다 더 많은 숫자가 농노의 신분으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결국 러시아 제국은 공산사회주의에 의해 무너진다. 마르크스가 말한 프롤레타리아(무산계급)에 의한 공산주의 정권이 들어선 것이다.(1917)



오늘을 사는 우리는 무엇으로 사는가? 독자의 주변인들을 보면 무척 바쁘다. 일주일 내내 돈 버느라 거의 자유시간을 누리지 못한다. 더 많이 벌고, 더 높이 오르기 위해 끊임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삶의 행복일까? 하지만 현인들은 물질적 성공이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그런데도 자서전이나 회고록을 읽어보면 실제로 많은 재벌들은 실로 초인적인 힘으로 돈 버는 데 집중했다. 돈을 많이 버는 일은 행복한 삶과 직결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성공하기 위해서 앞뒤 주변은 돌아보지 않은 채 앞으로 내달리기에 숨쉴 틈조차 없을 정도다. 물론 가족을 위해 돈을 벌어 그들이 행복해 하는 모습을 보며 열심히 일한다는 것은 어쩌면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평생 살면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지도 않다. 독자도 마찬가지다. 

허무와 불안을 안고 바쁘게 달려오면서도 우리는 정작 ‘잘 사는 법’을 잊고 살아간다. 이 책 『부자보다 잘 사는 사람』은 법상 스님이 우리 삶을 돌아보고, 마음을 비우며 충만하게 사는 길을 다정하지만 단호하게 안내하고 있다. 하루를 온전히 살아내는 작은 실천, 삶 속에서 진정한 풍요를 발견하는 방법을 전하며, 독자에게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는 ‘잘 사는 길’을 제시한다. 여담이지만 '잘 사는'이라고 적혀 있는데 '잘사는'이라고 붙여써야 맞을 것 같다. 이유는 '잘살다'가 이미 사회에서 '잘생기다'처럼 관용어로 붙여써서 한 단어로 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그러나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다. 저자의 뜻을 100% 파악했다고 독자는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경제대국이라 할 만큼 상당히 소득이 높은 사회가 됐다. 불과 30~40년 전만 하더라도 개발도상국(구 후진국)이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선진국이라고 했다. OECD 가입했다는 소식을 들은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이를 위해 해외 관광 자유화도 실시됐다. 예전 1인 5,000달러 소지만 가능했지만 이를 1만 달러로 올린다 했다. 너도 나도 생전에 못 가볼 것 같았던 해외 여행 붐이 일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서 뭔가 달라지나보다 했다. 그러나 너무 많이 써버렸는지 외환보유고가 없어 외국에서 돈을 빌려다 국가부도 상태를 막아야 한다고 했다. 실제 많은 돈을 빌리고 다시 금세 갚아나갈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기업이 도산하면서 실업자도 엄청나게 늘었다. 신문에는 연인 비관해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풍조가 늘었다고 보도한다. 그러나 정부가 바뀌고 국민들이 힘을 모아 어찌어찌 빌린 돈을 갚고 드디어 다시 시작하는 듯했다. 몇 년 지나지 않아 우리 잘못이 아닌 외국 때문에 금융위기가 또 찾아왔다. 선진국이란 말은 들어간 지 오래다. 한 번 경험이 있어서인지 이젠 국민들의 의식이 조금씩 바뀐 것 같다. 더욱이 IMF 때보다 일자리마저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 또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많은 기업들이 도산한 것은 마찬가지다. 

일자리를 잃지 않은 사람은 더 돈을 벌려고 더 달렸다.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을까? 자식 교육에는 다시 열풍이 불었다. 예전처럼 많은 자녀가 없어서일까? 사교육은 더욱 극심해져 갔다. 실제로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학교 입학생을 보면 대부분이 넉넉히 잘사는 집안이었다. 사교육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밀레니엄 세대는 과거 어려웠던 시절 이야기를 하면 믿지 않았다. 설령 믿는다 해도 그들의 잘못은 아니다. '흙수저론'이 등장했다. '3포', '5포'가 나오더니 곧바로 출산율 세계 최저 수준이라는 말이 나왔다. 왜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지? 불만을 말하지만 정작 어디다 대고 말할 것인가. 부의 대물림이나 가난의 대물림 같은 말이 어제 오늘의 일은 아니다. 극심해졌다는 말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의 양극화가 점점 심해진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오늘을 사는 사람들은 직장에 다니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는다. '본캐' '부캐' 등에 이어 'N개의 일'을 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한 번 들어간 직장이 정년을 보장해주지 않으면 직업을 여러 개 가져서 대비한다는 의미에다 당장의 수입도 많아서다. 그러나 얼마나 힘들지를 생각하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월급만으로는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는커녕, 사대문 안의 소형 아파트조차 쉽지 않다. 대신 주식과 비트코인, 부동산 투자에 뛰어들며 고위험·고수익 전략으로 일확천금을 노린다. 하지만 ‘한탕의 꿈’은 점점 더 많은 청년들에게 빚이라는 그림자를 남기고 있다. 투자 실패로 빚을 갚지 못해 채무조정을 신청한 이들 중 2030 세대가 전체 신청자의 51%를 차지한다는 보도도 나온다. ‘일확천금’을 노린 선택의 결과가 오히려 끝없는 빚더미로 이어지고 있는 셈이다.

물질적 성공이 곧 행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부와 명예를 좇으며 앞만 보고 달려온 끝에 남는 것은 허무와 불안뿐이다. 불확실한 시대일수록 우리는 더 많이 벌기 위해,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자신을 몰아붙인다. 그러나 그렇게 바쁘게 달려온 끝에 문득 뒤돌아보면, 정작 ‘잘 사는 법’을 잊은 채 살아온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런 시대에 법상 스님은 정반대의 질문을 던진다.

“지금, 우리는 정말 잘 살고 있는가.” ‘잘사는’ 사람보다는 ‘잘 사는’ 사람이 되어라!

부자가 되기 위해 애쓰는 이들에게 법상 스님은 말한다. “부자가 되는 길보다, 잘 사는 길을 배우라.” 돈과 물건이 아무리 많아도 마음이 가난할 수 있다. 외적인 성공을 거두었는데도 불안과 허무가 따라온다면, 우리는 어쩌면 잘못된 방향으로 달려온 것인지 모른다. 이제는 ‘잘 버는 법’보다 ‘잘 비우는 법’을 배워야 할 때다. 욕망을 내려놓을수록 삶은 가벼워지고, 마음은 한층 더 부유해진다. 삶에는 누구에게나 가난한 때도 있고, 풍요로운 때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때마다 외부의 조건에 흔들리지 않고 자기 중심을 지켜내는 일이다. 부자가 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잘 사는’ 것이다. 언제나 ‘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있는 것’이다. ‘무엇이 되고 싶은가’보다, ‘무엇으로 살고 있는가’가 더 의미 있는 질문이 아닐까?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잘 사는 특정한 '상태'가 아니다. 부자로 사는 것과 가난하게 사는 것 중에 무엇이 잘 사는 것일까? 그것은 겉모습일 뿐이다. 진정 잘 사는 것은 부자와 가난 같은 모양에 있지 않다. 그 겉모습이나 상황, 조건과는 상관없이 언제나 늘 잘 살 수 있다.(p.27)



이 책 『부자보다 잘 사는 사람』은 모두 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가난한 부자〉, 2장 〈이 순간을 즐기는 부자〉, 3장 〈마음의 부자〉, 4장 〈자연을 가진 부자〉 등이다. 저자 법상은 말한다. "진정한 ‘대박’은 외적인 성공이 아니다. 진짜 부는, 바로 눈앞의 순간 속에서 깨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그 안에서 삶의 풍요를 느끼는 데 있다." 절에서 수행하는 스님이니까 '당연히 그런 말을 하겠지'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다음의 항목을 보고 해당하는 것이 있는지 체크해 볼 것을 권유한다.


① 아무리 최악의 상황이더라도 ‘우주가 나를 돕고 있다’라고 외치고 있는가?

② 3번 이상 해봐도 안 될 때 포기할 수 있는 용기가 있는가?

③ 월급 일부를 나눔을 위한 몫으로 정해두고 있는가?

④ 새로운 분야의 책을 읽거나 새로운 일을 시도하는 데 거리낌이 없는가?

⑤ 상대방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공감하고 있는가?

⑥ 하루 중 아무 생각 없이 홀로 보내는 시간을 가지고 있는가?


위 항목들은 저자가 제시하는 ‘잘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한 생활 수행 방법의 일부다. 이외에도 삶의 괴로움 속에서 실천할 수 있는 보편적 지혜가 담겨 있어, 마음이 흔들리거나 고민이 깊을 때 일상 속에서 충분히 적용할 수 있다. 법상 스님은 취업, 승진, 사랑과 이별, 시험 합격 등 현실에서 마주하는 문제들을 수행의 언어로 풀어낸다. 진정한 풍요는 성취의 크기에 있지 않다. 매 순간 현재를 얼마나 온전히 살아냈는가, 거기에 달려 있다. 가족과 함께 나누는 밥 한 끼, 차 한 잔 앞에서 서로의 눈을 마주하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삶의 깊이와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삶은 바로 눈앞의 현재 속에서 살아 있다. 이러한 순간들이야말로 비움과 수용, 깨어있음을 실천하는 길임을 보여준다.



이 책 『부자보다 잘 사는 사람』은 무소유 정신을 현대적 삶으로 확장한 안내서다. 물질적 부와 소유가 지배하는 시대에도, 매 순간 현재에 깨어있으면서 비움과 수용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따뜻하게 전한다. 저자는 이 책을 “첫 발심의 시절 심은 씨앗이 세월을 거쳐 서원의 꽃으로 피어난 결실”이라 표현한다. 20년 전의 글이 오늘, 우리 곁에 다시 돌아와 여전히 가장 절실한 메시지를 전한다. 누적 조회수 8,600만 회, 17만 명의 구독자가 선택한 유튜브 채널 〈법상스님의 목탁소리〉의 초석이 됐다. 이 책은 진정한 ‘부’가 무엇인지 성찰하게 한다. 독자들은 이 책을 통해 스스로 마음의 부를 돌아보고, 삶 속에서 진정한 풍요를 발견하게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누군가는 ‘아는 만큼 본다’라고 말했는데, 내 생각에는 아는 만큼 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만큼 그저 느끼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분별의 이 현실 세계에서는 아는 만큼 보는 것이 옳겠지만, ‘모르고 보는’ 지혜의 가능성도 있음을 때로는 깨닫는 것도 중요하다. 아는 만큼 본다는 것은 지식대로 본다는 뜻이며 지식에 의지해서 알음알이대로 본다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p.237)


문제는 얼마를 버느냐가 아니고 얼마나 만족하고 사느냐에 있다. 내 행복의 지수는 그대로 내 만족의 지수이지 소유의 지수가 아니다. 소유를 줄이고 스스로 만족할 줄 아는 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의 비결이다.(p.290)


저자 : 법상(法相)


동국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불교를 공부하였으며,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 큰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인연 닿는 도량에 여행하듯 머물며 수행과 전법에 매진하는 동시에, 군법사로서 이 땅 젊은 청년들의 상담자이자, 현재는 사단법인 대원회 상주 대원정사와 해운대 목탁소리 주지로 있으며, 유튜브 ‘법상스님의 목탁소리’를 통해 17만여 구독자들의 마음공부를 이끌고 있다. 그는 마음공부를 통해 행복해지고자 하는 이들에게 보다 쉽고 실천적인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하였으며, 그가 쓴 진지한 깨침의 글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2000년, 그의 글을 읽고 뜻을 모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목탁소리’를 만들었다. 이후 ‘목탁소리’는 종교와 계층을 초월하여 마음을 맑게 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고향과 같은 귀의처로서 불교와 명상 분야의 대표적인 웹사이트가 되었다. 특히 매주 실시간으로 열리는 해운대 목탁소리 토요법회와 상주 대원정사 일요법회는 매회 1,000명이 넘는 도반들이 온오프라인 법회에 동참하고 있다.

저서로는 《눈부신 오늘》 《육조단경과 마음공부》 《반야심경과 선공부》 《금강경과 마음공부》 《수심결과 마음공부》 《365일 눈부신 하루를 시작하는 한마디》 《히말라야, 내가 작아지는 즐거움》 《날마다 해피엔딩》 《부자수업》 《청춘을 위한 부자수업 필사노트─나는 그저 내 길을 가면 된다》 등이 있다. 2005년에는 ‘한국문인’에서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유튜브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네이버 밴드 : 법상스님의 목탁소리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 -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거장의 마지막 가르침
미구엘 세라노 지음, 박광자.이미선 옮김 / 생각지도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미구엘 세라노는 문학의 거장 헤세, 심리학의 거인 융 등 두 영혼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두 거장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와 깨달음을 전해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 -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거장의 마지막 가르침
미구엘 세라노 지음, 박광자.이미선 옮김 / 생각지도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리뷰어스 서평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헤르만 헤세는 문학의 거장으로, 칼 융은 심리학의 거인으로 우리에게 이미 각인된 분들이다. 그들의 삶은 모르더라도 그들의 책과 메시지만으로도 우리와 인류의 삶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이 책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는 「상처받은 영혼을 위한 두 거장의 마지막 가르침」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이로써 저자 미구엘 세라노가 두 거장의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했던 것으로 알 수 있다. 미구엘 세라노는 〈서문〉에서 "두 신비스러운 존재들과 만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엄청난 축복이었다"고 전제한 뒤 "가르침도 받고, 친교도 이어오면서 몬타뇰라의 헤세의 거처에서 10년 동안 지내는 행운도 누렸다."고 말한다.(p.5) 저자는 또 칼 융과의 첫 만남에 대해 "융과 나의 관계에서 인도가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졌는지는 말로 다 할 수 없다"며 "그곳에서 얻은 체험이 아니었다면 나는 결코 이 위대한 인물의 관심을 끌지 못했을 것"이라고 언급한다.(p.105)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20세기 인류 정신의 지형을 바꾼 두 사람, 헤르만 헤세와 칼 구스타프 융. 문학과 심리학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를 사용했지만, 두 사람의 시선이 향한 곳은 언제나 같았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내면, 그리고 영혼의 심연이었다.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는 이 두 거장이 삶의 말년에 나눈 마지막 대화이자 인간 존재의 근원과 삶의 의미를 향한 궁극의 사유를 담은 책이다.

칠레 출신 작가이자 외교관인 미구엘 세라노는 젊은 시절 헤세의 『데미안』과 융의 저서들에 깊은 감명을 받아 두 거장을 ‘내면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후 인도에서 외교관으로 근무하던 그는 오랜 사색 끝에 두 스승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마침내 스위스의 외딴 산자락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철저히 단절한 채 내면의 완성을 추구하던 노년의 헤세와 융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세 사람은 이런 만남을 ‘동시성의 작용’이라 부르며 깊은 대화를 나눴다. 특히 헤세와 융은 세라노를 통해 서로의 안부를 주고받으며 인간과 세계에 대한 자신들의 깨달음을 담담히 풀어냈다. 세라노가 이 모든 대화를 꼼꼼히 기록한 이 책은 그들의 정신적 교류의 정수를 담고 있다.



『데미안 프로젝트』의 저자 정여울은 이렇게 말한다."헤세와 융은 '영혼의 쌍둥이'처럼 닮은 운명을 가졌다. 수많은 사람들을 영적으로 이끄는 삶, 인류의 지혜를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는 삶, 글쓰기의 힘으로 인류를 더 나은 곳으로 데려다주는 지적 모험, 그들은 그렇게 닮은 운명으로써 서로의 친구가 되었다. 이 책(『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은 헤세와 융을 읽고 사랑하고 마침내 두 사람을 만남으로써 자신의 삶을 바꾼 작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책을 읽으면 두 사람과 나란히 아름다운 산책길을 걸으며 인간의 마음이 해낼 수 있는 그 모든 기적 같은 치유와 창조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뒷 표지 중에서) 

이 책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는 사실 1965년 처음 세상에 선였다. 이후 영어 개정판과 독일어판을 비롯해 프랑스, 이탈리아, 튀르키예, 포르투칼 등 다양한 국가에서 번역되며 오늘날까지 꾸준히 읽히는 인문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특히 헤세와 융은 BTS의 음악, 앤디 워홀의 그림, 파울로 코엘료의 문학,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 등 수많은 아티스트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두 거장의 작품과 이론에 대한 생각을 그들의 목소리로 직접 듣는 것 또한 이 책에서만 얻을 수 있는 귀중한 경험이다.

저자 세라노는 스페인에서 한 두 번째 강연(「미국에서의 헤세의 변형」) 중 헤세에 대한 세상의 온갖 비난에 대해 단호하게 반박하는 메시지를 내었고, 이는 헤세의 책과 삶을 사랑하고 존경했을 뿐만 아니라 깊은 친교-헤세는 1877년 출생이고 세라노는 1917년 생으로 무려 40살의 차이가 있지만-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깊은 만남을 이루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라고 독자는 추측한다. 그가 두 번째 강연에서 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헤세의 심오한 사상이 왜곡되어 그가 일종의 보헤미안, 히피로 알려지고 약물 문화, 원칙과 방법을 무시하는 평화주의 방랑자(헤세가 평화주의자라는 말은 맞는다), 더 나아가 양성애자로 왜곡되고 있음을 지적했다. 내가 강연에서 무엇보다도 강조한 것은 헤세가 독일 낭만주의 문학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과 노발리스, 휠덜린,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 그리고 헤세가 경탄애 마지않은 니체와의 연결 고리를 무시하고는 헤세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p.9)



헤세와 융, 두 사람은 1870년대에 태어나 1960년대에 세상을 떠났다. 둘은 1917년, 단 한 번 짧은 만남을 가졌는데 이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고 한다. 당시 30대였던 헤세는 심각한 정신적 방황을 겪고 있었고, 융의 제자이자 주치의였던 요제프 베른하르트 랑 박사의 주선으로 극비리에 융을 만나게 된다. 이 짧은 만남은 헤세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헤세는 융의 정신분석 이론에 깊이 공감하며 치료에 전념했고, 마침내 그의 정신적 방황은 끝이 난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작품이 바로 그의 대표작 『데미안』과 『싯다르타』였다. 헤세는 소설 속에서 분열된 자아와 고독을 응시하며 ‘나 자신으로 존재하는 길’을 탐구했고, 융은 인간의 무의식과 그림자를 분석하며 ‘내적 화해’의 가능성을 모색했다. 문학과 심리학이라는 서로 다른 언어로 인간과 세계를 해석했지만, 결국 그들이 도달한 결론은 같았다. 인간은 누구나 상처를 입는다는 것. 그러나 그 상처 속에서 다시 길을 찾아야 한다는 것.

두 거장의 통찰은 추상적 이론이 아니라, 삶의 고통을 통과하며 얻은 체험의 산물이었다. 헤세는 말한다. “각성한 인간에게는 단 하나의 의무만이 있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 속에서 확고해지는 것, 자신의 길을 앞으로 더듬어 나아가는 것이다.” 융 또한 말한다. “인간은 자신의 본성에 따라 살아야만 한다. 그리고 자기 인식을 얻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고, 그런 뒤에는 이미 얻은 자신에 대한 진리를 따르며 살아야 한다.” 이렇듯 두 사람은 자기다움으로 깊어지는 삶을 궁극의 목적지로 여겼다.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는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독자에게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법을 일깨워주는 책이다.

저자는 오늘날 서양의 기독교인이 직면한 문제는 어떻게 개성을 잃지 않고 빛과 그림자, 신과 악마의 공존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고 말한다. 저자는 '아브락사스'라는 이름을 『데미안』에서 처음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는다. 신(神)인 동시에 악마인 존재를 아브락사스라고 한다. 헤세가 어떤 표현을 했는지 저자는 인용하고 있다.



"불을 들여다보고 구름을 바라보게. 예감이 떠오르고 자네 영혼 속에서 목소리들이 말하기 시작하면 곧바로 자신을 그 목소리에 맡기고 물어보지는 말게. 그것이 선생님이나 아버지 혹은 그 어떤 하나님의 마음에 들까 하고 묻지 말게. 그런 질문이 자신을 망치는 거야. 그러다가 길 위에 올라서고 화석이 되는 거야. 이봐, 싱클레어, 우리의 신은 아브락사스야. 그는 신이면서 사탄이지."

저자는 데미안의 말에 기대어 오늘날 기독교인과 일반적인 서구 세계는 위기 상황에 처해 있는데, 주어진 선택지는 별로 희망적으로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우리는 과거의 역사에서 보았던 어떤 묵시록적 재앙도, 인간을 경시하여 우리 삶의 수준을 끝없이 하락시킨 동양의 비인간화의 길도 원치 않는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가능성은 아마도 아브락사스, 즉 우리가 외면과 내면, 우리 안의 빛과 깊은 그림자를 우리의 영혼에 투사하는 것, 두 세계의 결합이 순수한 원형(archetype)과 만나게 되리라는 희망에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1965년 처음 스페인어로 출간된 이 책은 이듬해 영어로 번역되어 전 세계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1997년 영어 개정판과 독일어판을 비롯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튀르키예어, 포르투갈어, 한국어 등 다양한 언어로 번역되며 꾸준히 사랑받았다. 단순히 한 시대의 사상적 산물에 머무르지 않고 오늘날까지 읽히는 인문 고전으로 자리매김한 이유는, 이 책이 다루는 주제가 시대와 국경, 문화를 초월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나는 누구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무엇이 나를 완성시키는가.” 이 질문은 어느 시대, 어느 세대의 인간에게나 변하지 않는 인생의 화두이자 영혼의 과제다. 그래서 BTS를 비롯해 앤디 워홀, 파울로 코엘료, 헨리 밀러, 잭슨 폴록, 데이비드 핀처 등 수많은 작가와 아티스트들이 헤세와 융의 사유에서 영감을 받아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확장해왔다.



세라노가 두 거장과 나눈 대화에는 세계와 사랑, 죽음, 집단무의식, 그리고 자기 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이 담겨 있다. 그들의 대화는 그 깊이만큼이나 쉽게 다가가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과 세계를 관조하는 두 사람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독자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되고, 마치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경험을 하게 된다. 특히 이 책에는 지금까지 공개된 적 없는 희귀 자료들이 풍성하게 수록되어 있다. 헤세와 융의 친필 편지는 물론, 헤세가 1922년 아내를 위해 쓴 동화 『픽토르의 변신』과 그가 직접 그린 수채화 삽화도 함께 실려 있다. 무엇보다 헤세와 융이 쓴 작품을 통해서만 그들을 만나왔던 우리에게, 두 거장이 직접 자신의 작품과 이론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는 점, 그리고 두 거장의 말년의 모습을 생생히 엿볼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이 책은 특별한 의미와 가치가 있다.

현대인은 눈부신 기술 발전과 물질문명의 풍요 속에서 살아가지만, 역설적으로 그 어느 때보다 불안과 신경증, 고독과 우울감에 시달리고 있다. 기계를 통해 끊임없이 서로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과는 단절된 채 살아가는 시대. 효율과 편의, 속도와 생산성이 인간의 가치를 대신하는 오늘, 우리는 점점 ‘영혼의 언어’를 잃어가고 있다. 그렇기에 헤세와 융, 세라노가 나눈 대화가 지금 이 시대에도 여전히 깊은 울림을 주는지도 모른다. 이나미 한국융연구원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이 책에는 신중하게 읽고 배울 수 있는 미덕들이 가득하다. 특히 기계와 물질지상주의, 효율성과 편의를 강조하고 보이지 않는 영혼의 가치를 외면하는 21세기의 성정을 치유해줄 수 있는 좋은 참고서다.” 마찰 없이 세상에 편입되고 물질적 풍요와 편리만을 좇는 것이 시대의 과제가 되어버린 지금, 『헤세와 융, 영혼의 편지』는 우리 내면의 가치를 일깨우는 값진 사유의 등불이 되어줄 것이다.

"사람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본성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고 기대하지 않은 것의 중요성도 인정하면서 혼자 가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 없이는, 심지어 연금술적 과정 없이는 그 어떤 것도 가능하지 않습니다."(p.126) - 칼 융과 「두 번째 만남」 중에서



극도의 이기주의에 빠진 누군가가 에베레스트산의 고독 속으로 물러난다면, 그런 사람은 자신의 고귀한 거주지의 안락함은 잘 알겠지만,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즉 이전에 알지 못했던 자신에 대해서는 어떤 새로운 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그런 상황입니다. 인간은 자아성찰을 할 수 있는 동물이지만, 마찬가지로 의식을 가진 다른 종의 동물들과 자신을 비교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은 은하계의 작은 행성에 추방된 최고의 동물입니다. 그가 자신을 모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p.171) - 「칼 융의 편지」 중에서


저자 : 미구엘 세라노(Miguel Serrano)


칠레 출신의 작가, 외교관, 정치가로 독일과 스위스를 여행했고, 스위스에서 말년의 헤세와 융을 만났다. 이 만남은 수차례 계속되었고 1965년에 두 인물과의 만남을 기록한 『헤세와 융의 비밀 클럽El Circulo Hermetico de Hermann Hesse a C. G. Jung』(본서)을 출간했다. 스페인어로 쓰인 이 책은 다음 해에 영어로 번역되어 독자들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1997년에는 영어 개정판과 독일어판이 출간되었다. 세라노는 1953년부터 1963년까지 인도에 외교관으로 체류하는 동안 힌두교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그 후에는 유고슬라비아와 오스트리아에서 대사로 재직했다. 1970년 칠레에 사회주의 정권이 들어서자 잠시 공직에서 물러났지만 1973년에 다시 정치에 복귀했다.

대표적인 저술로『빙원으로의 초대Quien ilama en los Hielos』(1957),『시바 여왕의 방문들Las visitas de la Reina de Saba』(1960),『낙원의 뱀La Serpiente del Paraiso』(1963),『노스, 부활의 책Nos, libo de la Resureccion』(1980) 등이 있다.


역자 : 박광자


충남대학교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이며, 한국헤세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괴테의 소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독일영화 20』, 『독일 여성작가 연구』,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 『벽』(마를렌 하우스호퍼), 『페터 슐레밀의 기이한 이야기』(아델베르트 폰 샤미소), 『산책』(로베르트 발저), 『얽힘 설킴』(테오도어 폰타네), 『프라하로 여행하는 모차르트』, 『그랜드 호텔』, 『싯다르타』, 『시와 진실』, 『마리 앙투아네트 베르사유의 장미』 등이 있다.


역자 : 이미선


홍익대학교와 동대학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대학교에서 독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는 『1세대 목사 가정 이야기』, 『루터: 신의 제국을 무너트린 종교개혁의 정치학』, 『소송』, 『수레바퀴 아래서』, 『세 편의 동화』, 『유대인의 너도밤나무』, 『존넨알레』, 『별을 향해 가는 개』, 『불의 비밀』, 『막스 플랑크 평전』, 『불순종의 아이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는 여행의 기술』, 『누구나 아는 루터, 아무도 모르는 루터』, 『유대인의 너도밤나무』, 『멜란히톤과 그의 시대』 외 다수가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라시아 횡단, 22000km
    윤영선 지음 / 스타북스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북유럽 서평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유라시아 대륙과 대자연의 역사가 녹아 있다. 추억 많은 사람이 부자라는 말에 공감!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경험이라 부럽다."(김영화 〈한국일보〉 뉴스룸 국장)

    "이 책은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지식이 담긴 역사서다. 혜초 스님의 왕오천축국전 등 우리민족의 얼이 파미르고원까지 어떻게 펼쳐졌는지 흥미진진한 스토리를 담았다. 중국에 외국 등록 차량 반입이 힘들다는 등 기본적인 여행 정보뿐 아니라 현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이 책 곳곳에 숨은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 있다. (중략) "또 세상은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다. 눈에 안 보이는 것들을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인생의 교훈들과 삶의 지혜와 지식의 보물 같은 역할도 한다."(최우석 〈조선일보〉 편집국 부국장)

    이 책 『유라시아 횡단, 22000km』의 〈추천사〉들의 일부다. 이 책은 저자 윤영선이 은퇴 후 도전으로 3개 팀을 짜서 ‘모하비’ 자동차 3대로 동해에서 출발해 시베리아 몽골 중국을 거쳐 중앙아시아, 이스탄불까지 22,000km를 두 달 동안 자동차로 달린 여정을 담아냈다. 특히 저자의 당초 결심으로 한민족의 발자취를 따라가 본 기록들이 곳곳에 적혀 있어, 우리 민족의 역사도 생생하게 살아있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대장정의 결심과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소회를 밝혔다. "그동안 직장에 얽매여 도전하지 못했던 꿈을 이번에 실천해 보자고 결심했다. 고대 한민족 역사의 자취와 얼이 숨 쉬는 아시아 대륙의 깊은 오지를 다녀오는 것이다." 공무원과 민간 기업에서 40여 년 근무한 저자의 나이는 공자의 나이로 고희(古稀)라는 70세다. 결혼 40주년, 나이 70살을 맞이해 의미 있는 이벤트로 「시베리아, 실크로드」 횡단 여행 소문을 듣고 부부가 함께 합류했다고 한다. 학창 시절부터 꿈꾸던 일을 70세가 되어서 드디어 실현했다는 점에서 단순한 여행기로만 읽을 수는 없을 듯하다.



    저자는 글을 써 가던 중에 '시계는 살 수 있지만 시간은 살 수 없다’는 격언을 독자들에게 상기시킨다. 삶의 과정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뜻이다. 학창 시절부터 오랫동안 꿈꿔 왔던 소망을 실현하는 과정에 가슴이 벅찰 정도의 기쁨을 맛보았을 것 같다. 그러나 사실 어렸을 때의 꿈을 제대로 실현하면서 삶을 완성한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저자는 나이 70에야 이루었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책을 자기계발서로 읽어도 될 듯하다. 저자가 은퇴 후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가 대체 어떻게 생겼는지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고 말하는 것도, 문득 학창 시절의 꿈이 생각난 것도 저자의 가슴 한켠에선 사라지지 않은 꿈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학창 시절부터 저자는 ‘역사, 지리’ 과목을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고대 동서 간에 교역, 문화, 종교 등 통행로인 ‘실크로드’를 가보고, 1,300년 전 젊은 신라 승려 혜초 스님이 통과했던 여정을 따라가 보고, 우리나라를 자주 침략했던 유목민의 활동무대인 몽골고원과 일제강점기 해외 독립운동 무대였던 연해주와 시베리아를 가보는 꿈을 꾸었던 것이다. 또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사막으로 알려진 타클라마칸 사막, 지구의 지붕으로 불리는 파미르고원, 천산산맥과 천산고원, 중앙아시아의 키질쿰 사막, 카스피해, 코카서스산맥 등 아시아 대륙의 깊은 속살을 들여다보는 꿈을 어찌 잊었겠는가. "2024년 7월, 8월 두 달 동안에 걸친 유라시아 횡단 자동차 여행에 참여한 것은 내 삶의 작은 행운이었다.’라고 저자는 말한다.

    이 책은 가장 튼튼하다는 ‘모하비’ 자동차 3대로 3팀이 함께 동해를 출발하여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몽골을 거처 중국 실크로드를 따라 파미르고원, 천산산맥과 천산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튀르키예의 이스탄불까지 22000km를 두 달 동안 횡단한 기록이자 역사·문화의 '산 교과서'다. 사실 자동차 여행은 디젤 기름과 요소수, 국가마다 보험 가입, 고속도로 통행료, 중국 입국허가 컨설팅업체 비용, 출발 전 자동차 부품 교체 등 많은 불편이 따랐다고 한다.



    특히 내몽골 고비사막에서는 서울에서 부품을 공수하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오지를 통과하는 장거리 자동차 여행에 대한 경험이 없다 보니 서울에서 반찬과 간식, 구급약을 적게 가져와서 고생도 많았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나라들은 정비소 등이 토요일 일요일, 그리고 늦은 시간에도 쉬지 않아서 불편을 덜었다. 그러나 사막이나 고원 등 변방에 근무하는 국경 근무 공무원의 불친절하고 비효율적인 행정절차는 자동차 여행을 더욱 힘들게 했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일은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상존하는 것이다.

    유라시아 횡단의 마지막 여정은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박물관이다. 동방 정교회 대성당, 이슬람 사원을 거처 1934년 이후 박물관으로 활용되고 있는 소피아박물관은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가 공존하고 있어서 기독교인들과 이슬람인 들이 함께 한 자리에서 역사를 즐기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소피아 박물관의 입장료는 튀르키예 리라 대신, 40유로(6만원)를 받는다. 소피아박물관은 세계 각국에서 온 관광객이 표를 사기 위해 길게 줄지어 있다.

    아야소피아박물관은 6세기에 지어져 여러 번 지진을 견뎌낸 건축물이다. 오스만 터키왕국은 15세기 소피아 성당을 이슬람 사원으로 변경하여 500년 이상을 사용했다. 근세 터키 공화국은 관광객용 박물관으로 변경하여 비싼 입장료를 받고 있어서 역사와 문화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 『유라시아 횡단, 22000km』는 도전기다. 이와 함께 우리 한민족의 발자취를 따라 시베리아, 바이칼호수, 실크로드와 유라시아에 존재하고 있는 역사와 문화를 확인하고 긍지를 가질 수 있는 유쾌한 여행서이자 문화예술을 망라하는 역사서라고도 할 수 있다. 유라시아 횡단을 자동차를 가지고 최초로 하다 보니 자동차를 가지고 중국에는 몽골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고 중국 운전면허증만 통용되는 등 행정적인 절차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지막 여행지 이스탄불에 토착해서는 날아갈 것 같은 기분으로 횡단 여행을 마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휴식과 이스탄불 여행과 즐기고 차는 배로 보내고 나서 귀국해서 일 년 동안 원고를 정리했다.



    이 책은 7부(Part)로 이루어져 있다. 1부 〈대륙을 향한 첫날〉, 2부 〈시베리아 대평원 횡단〉, 3부 〈내몽골로 향하는 여정〉, 4부 〈중국의 실크로드 구간〉, 5부 〈중앙아시아 실크로드 구간〉, 6부 〈남러시아와 조지아〉, 7부 〈목적지 튀르키예〉 등이다. 1부에서는 동해항을 출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한 국제여객선에 몸을 실었다. 일제강점기 독립지사들의 유적지를 방문하고 그곳의 풍광과 관광을 경험한다. 그곳 사람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음식이나 문화 등은 여행객에게는 필수 정보 사항일 터 간단하게 소개하는 항목도 마련해 썼다. 4장 「블라디보스토크 관광」에서다. 특별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임에도 블라디보스토크는 전쟁의 긴장감은 전혀 없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시내 곳곳에 군인 동상이 많고 박물관도 군사역사박물관, 육군박물관, 잠수함박물관, 태평양함대박물관 등 군사박물관이 많다는 말도 덧붙인다. 이 지역은 우리와 관련이 깊은 곳이다. 926년 멸망한 발해의 유적이 보관된 〈아르셰니예프 향토박물관〉도 소개한다. 이곳은 발해 유적을 가장 많이 보관한 곳이란다. 1층에 「발해관」이 있고, 한국어로 된 설명서가 비치되어 있는 것도 귀띔한다. 

    한글 설명서 첫 장에 "발해는 중국으로부터 파괴된 고구려 터를 기반으로 7세기(698)에 건국됐으며, 훗날 동해안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 중 하나가 되었다. 발해는 만주, 연해주, 북한 지역의 영토를 지배했으며, 말갈인들을 비롯해 새로운 나라를 구하던 고구려인들이 거주했다. 수도는 상경(중국 헤이룽성 동경성)이고, 동쪽 수도는 동경(두만강 건너 훈춘)이다. 채굴, 금속가공, 가죽 가공 등 기술이 상당히 발달하였다."라고 설명하고 있다고 저자는 전한다. 책에 따르면 발해사는 고려시대 '삼국사기'를 집필한 김부식이 우리 역사에서 제외함에 따라 오랫동안 잊혀져 왔으나 조선 후반기 실학자 유득공이 『발해고』에서 발해 역사를 재발견했다. 동해안을 따라서 원산 이남의 땅은 통일신라, 원산 북쪽은 발해 땅이었다. 유득공은 거란족에 의해 발해가 멸망(926)함으로써 만주 지역 고구려의 옛 영토가 영원히 우리 역사에서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는 점도 저자는 기록한다. 독자도 적지 않은 우리 역사의 한 부분에 대한 지식을 넓혔다.



    책을 읽어나가다가 5부 2장 「타슈켄트의 ‘고려인 마을’」에 눈길이 멈춘다. 얼핏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마을은 소련 스탈린 시대 연해주 우리 동포를 중앙아시아 쪽으로 강제 이주한 역사를 자주 접했는데 그때부터 생긴 마을인 듯싶다. 책에 따르면 페르가나 지역의 도로 양옆은 목화밭이 매우 많다.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목화가 재배되기 시작한 것은 1865년 미국의 남북전쟁 때문이다. 유럽 면직 산업의 원료인 목화는 당시 미국 남부지방에서 수입하였다. 미국 북군이 남부군 자금줄을 끊기 위해 남부지방 항구를 봉쇄하자 목화의 유럽 수출이 어려워졌다. 공급이 줄자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곡창지대인 페르가나 지역에 목화를 심었다. 당시 목화를 '하얀 황금'이라고 불렀다. 현재 석유를 '검은 황금'이라고 부르는 것처럼 당시 목화는 돈이 되는 작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목화 재배로 인한 부작용이 20세기 후반 들어 나타나고 있다.

    목화는 성장기에 물을 많이 흡수하는 작물이다. 도로 옆 목화밭에 물을 주는 것을 보니 마치 논처럼 발목이 잠길 지경이다. 햇볕이 뜨겁고 건조하기 때문에 물을 흠뻑 주어야 한다. 강 상류에 댐과 운하를 만들어 상류의 강물을 목화 재배에 전부 사용함에 따라 하류인 아랄해로 강물이 흘러가지 못한다. 현재 아랄해 해수면 면적은 1960년 대비 5%만 남았다.

    다음 날 고려인 집단농장이 있었던 고려인 마을을 방문한다.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약 50만 명이라고 한다. 1937년 17만 명이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한 후손들이다. 우즈벡 인구의 약 2%가 고려인이라고 한다. 우즈벡과 카자흐스탄은 아이가 태어나면 호적에 출신 종족을 표기하도록 하고 있어서 고려인 숫자를 알 수 있다. 종족 표기는 부계를 따른다. 아버지가 고려인이면 아들은 고려인이고, 어머니가 고려인이더라도 아버지가 비고려인이면 호적은 고려인이 아니다. 타슈겐트에서 한 시간 거리, '뿌띠딸리' 지역에 고려인 집단농장이 있다. 연해주에서 강제 이주 후 고려인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에 많이 살았고, 거주이전의 자유가 없었다. 90여 년이 흐른 현재는 카자흐스탄, 러시아, 우즈벡,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 과거 소련 연방 영토 곳곳에 흩어져 살고 있다. 현재 고려인 숫자는 '카자흐스탄, 러시아, 우즈벡' 순서로 많이 산다. 우즈벡 경제가 안 좋아서 우즈벡 출신 고려인의 상당수가 일자리를 찾아서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이주해 갔다고 한다.



    독자는 저자의 마지막 목적지인 튀르키예에 관심이 많다. 중앙아시아 국가와 달리 튀르키예는 유럽과 아시아 대륙을 잇는 중요 지점인 이스탄불이 있다. 이스탄불은 상업이 융성해 유럽과 동양의 문화와 문물이 섞여 매우 독특하다고 들은 바 있다. 또 이 나라는 민주주의 자유 국가로서 정체성을 확실히 하고 있어서 이슬람 국가로서는 가장 서구화되어 있기도 하다. 특히 로마 시대부터 이어온 건축 문화와 독특한 이슬람 문화가 혼재하면서 아름다운 건축물도 많다. 또 도시를 벗어나면 기이하도록 아름다운 풍광도 많아 많은 관광객들이 가장 가고 싶어하는 곳 중의 하나라고 들었다. 이 책에서는 비교적 짭게 소개하지만 널리 알려져 있어서 독자들의 관심이 오히려 적은 듯하다. 이 책은 여행을 즐기고 역사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더없이 좋은 인문학 여행서라 할 수 있다. 

    "카파도키아 평원의 석양은 아름답다. 나와 아내는 전망 좋은 카페에 앉아 진한 터키 커피를 마시며 카파도키아 석양을 즐겼다. 카파도키아는 화이트와인이 유명하다고 해서 근처 와이너리에 들렀다. 세 종류 화이트와인을 시음하는데 1인당 200리라(약 8,000원)으로 저렴하다. 카메이트 L실장과 윤 군에 한 병씩 기념으로 나눠줬다."(p.450)


    저자 : 윤영선


    - 학력: 서울고, 성균관대학 경제학과, 미국 위스콘신대학 석사, 가천대학 회계세무학과 박사

    - 공직 경력: 제23회 행정고시, 청와대 경제수석실 행정관, 기재부 세제실장, 관세청장

    - 민간경력: 삼정KPMG 부회장, 법무법인 광장 고문, 삼성자산운용 감사위원장, CJ대한통운 감사위원장, 휠라홀딩스 감사, LS네트웍스 감사위원장, 조세심판원 정책자문위원, 기재부 세제동우회 회장

    - 사회경력: 심산기념사업회 회장, 사회복지공동모금회 감사, 북한인권시민연합 고문, 서울국제음악제 조직 위원, UN글로벌컴팩트 이사, 조병화시인 기념사업회 감사, OECD BIAC 한국측 조세자문위원, 가천대학 초빙교수, 성균관대학 대학평의회 평의원, 한국세무사회 고문, 한국관세사회 고문, 한국공인회계사회 자문위원, 한국관세학회 고문, 파인낸셜 뉴스, 헤럴드 경제신문 객원 컬럼위원

    - 수상경력: 근정포장. 홍조근정훈장, 황조근정훈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