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경성 - 식민지 경성은 얼마나 음악적이었나
조윤영 지음 / 소명출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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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한일 강제병합으로 주권을 빼앗기고 압도적 통감 정치를 펼친 일본 제국주의는 3·1운동 이후 이른바 '문화 정치'를 실시했다. 3·1운동은 중국에서 외세를 내쫒아야 한다는 5·4 운동의 밑거름이 되었다. 일본 총독부는 지나치게 조선을 압도하는 정치가 오히려 반발을 불러 일으키는 계기가 됐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하나씩 점령해가던 시절이어서 예전 정치로는 조선에 발목이 잡히는 꼴이 될 수도 있다는 결론에 이르렀던 것으로 보인다. 

병탄 초기 동화정책을 기본으로 삼았던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한국민의 반항을 막기 위해 헌병과 경찰을 통합하여 중앙의 경무총장에 헌병사령관, 각도의 경무부장에 헌병대장을 임명하여 이른바 헌병경찰정치를 통해서 철저한 무단탄압정책을 강행하였다. 1919년의 3·1운동을 계기로 극악함이 역사상 유례가 없었던 헌병경찰은 보통경찰체로 바뀌고 총독부의 정책도 이른바 문화정치로 전환하였으나, 경찰제도는 여전히 총독부의 한국통치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하여 비대하여만 갔다.

총독부의 중앙부서는 ‘문화정치’ 이후 내무·재무·식산·법무·학무·경무의 6국으로 개편하였고, 총독관방도 서무·토목·철도의 3부로 개편하였다. 지방제도에서도 도장관을 지사(知事)로 개칭하고, 민선으로 구성되는 도평의회 및 부·면협의회 등 자문기관을 두었다. 이들 자문기관은 도·부·읍회로 개편되어 지방자치제로서의 결의기관으로 발전시켰으며, 중앙의 중추원도 개편하여 고문·찬의·부찬의를 참의로 통합하고, 정원도 65명으로 정하였다. 한국인의 관리임용에서도 그 범위를 넓히고 대우를 개선하였으며, 언론·집회·출판에 대한 종래의 탄압정책을 완화하는 등 회유책을 썼으나, 이것은 모두 표면상의 정치적 제스처이었을 뿐, 음성적인 탄압은 더욱 강화되었다고 역사에는 기록되어 있다. 이 기간 1920년부터 1935년까지의 '문화 정치' 때 ‘음악회’는 식민지시기 경성의 근대화 과정에 있어 ‘최고의 유행물’이었다고 이 책 『음악적 경성』의 저자 조윤영은 밝히고 있다. 저자는 책의 〈서문〉을 통해 당시 경성인들의 일상을 면밀히 살펴보고, 음악문화 형성의 중심지였던 종로와 혼마치(지금의 충무로 일대)의 다양한 공간에서 펼쳐진 근대 음악회를 정치적, 사회문화적 맥락을 통하여 알아보기 위해 집필 이유를 적시하고 있다.


특히 이 시기는 일제의 문화정치와 일본 유학을 시도한 젊은 음악가들이 귀국하는 시점이 맞물려 음악적으로 중요한 시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1920년대에는 다양한 전공의 양악전문가들이 출현하고 양악을 향유하려는 조선인들이 증가하면서 음악회에 참석하는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했다는 것. 같은 시기 총독부의 문화정치와 함께 다수가 모일 수 있는 다양한 공간이 종로와 혼마치를 중심으로 생겨났다. 

저자는 이 책의 주제가 박사학위 논문에 사용될 목적으로 연구하고 수집했던 자료가 대부분이어서 책으로 내기 위해 이 기간에 출간된 다수의 출판물, 즉 신문, 잡지, 음악회 공고문 등의 자료를 통해 수정 보완됐다고 밝힌다. 이 기간에는 다행히 문화정치로 전환하고부터는 일제가 우리의 신문, 잡지, 기타 각종 출판물의 자격과 기준 제한을 크게 낮추었던 듯하다. 저자에 따르면 우리의 역사 서술이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소외되었던 영역에 대한 관심과 연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우리의 삶과 밀접한 음악사회에 대한 출판을 기획했다. 독자들 가까이에 식민지 일상의 음악을 소개하는 것으로 이 책의 출간 의미를 두고 누구나 편하게 열어볼 수 있게 쓰고자 노력했다. 

"연구하면 연구할수록 이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음악'이 식민지라는 환경에 의해 너무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을 절실히 느낀다. 특히,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세계를 휩쓴 아이돌 그룹이나 성악가 조수미, 피아니스트 임윤찬과 같은 국제적 음악 인재들이 나올 수 있는 기반에는 우리가 100여년 전 새롭게 익혔던 서양음악이 현대 한국인들의 이중 음악적 모국어로 형성될 수 있는 근간이었음을 독자들은 공감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이처럼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던 일상적인 것에도 우리의 과거를 이해할 수 있는 요소가 가득하다. 이 연구가 시사하는 바처럼 구멍 나 있는 역사의 퍼즐을 맞추어나가는 과정은 앞으로도 스스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p.7~8)

이 책은 경성시대 음악 사회를 분석한 저자의 박사논문이 바탕이 돼 출간되었으며, 조선인과 일본인의 생활공간을 가로지르며 음악이 문화정치적으로 담당한 역사를 들여다본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술하고 있다.


이 책에서 저자는 근대도시 경성의 음악문화와 일상을 이해하기 위해 다음의 네 가지 양상을 비판적으로 탐구한다. ① 식민지조선의 모던도시 경성이 근대적 문화도시로 재탄생하는 과정을 개괄하고 조선인 중심의 종로와 일본인 중심의 혼마치문화를 비교하여 분석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서구화된 일본의 문화를 탐닉하는 조선인들의 일상생활을 들여다본다. ② 조선인들에게 문화의 상징성을 내포한 공간이자 종로의 대표적 공간에서 열린 음악회를 구체적으로 조사하여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 유형과 특성을 밝힌다. 그리고 일제의 지배하에 놓인 이중도시 경성의 이면을 재조일본인(在朝日本人)들의 문화와 혼마치의 대표적 음악회장 위치와 역할, 그리고 성격 등을 파악하여 이분법적으로 나뉘어 있던 식민/피식민, 중심/주변, 고급/저급의 음악사회를 탐색한다. ③ 음악회를 구성하는 다양한─청중, 음악가, 주최자─입장을 다각도로 조망하여 식민지권력과 자본주의 아래에서 근대적 도시 경험인 음악회라는 문화를 수용하는 모습을 분석한다. ④ 조선인들에게 음악회가 어떻게 ‘최고의 유행물’이 되었으며 ‘음악광시대’로 확산되어 가는지, 그들의 담론을 통해 조선인의 문화를 이해하고 식민지경성에서 펼쳐진 음악회의 의미를 그려본다.

이에 따라 기술된 이 책 『음악적 경성』은 지금까지 들여다보지 않았던 음악사회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첫째, 조선인들에게 음악회에서 서양음악을 듣고 본다는 것이 어떠한 근대적 경험인가? 제도권 밖 음악문화의 저변층 확대를 둘러싼 의문을 풀어본다. 둘째, 식민지 상황에서 재조일본인들의 영향력과 그들만의 음악문화가 일상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지에 초점을 맞춘다. 식민지 사회에서 일본의 영향력은 지대할 수밖에 없었기에, 교육과 정책 연구에서 확인되지 않는 일반적 적용 사례를 찾아본다. 셋째, 그로 인해 조선인들이 받은 영향과 미친 영향은 무엇이었는가? 일본을 통해 굴절된 서구 근대화가 미국과 일본이라는 두 제국에 의해 한꺼번에 들어와 음악문화를 주재하는 현상을 보여준다. 이 모든 것이 혼재하는 경성이라는 도시의 음악 문화를 근대적 상징인 '음악회'에 집중해서 분석한다. 저자는 음악회를 중심으로 보는 이유는 일회성으로 사라지는 시간예술 장르인 음악이 음악회와 관견된 다양한 자료물을 기록으로 수치화할 수 있어 어느 정도 객관적인 분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책은 모두 4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모던도시, 그리고 이중도시 경성(京城)〉, 2장 〈경성의 서양식 음악회 1920년부터 1935년까지〉, 3장 〈이중도시 경성의 음악회 특징과 음악적 경성의 면모〉, 4장 〈도시와 음악 문화〉 등이다. 1장에서는 「모던도시로 재탄생한 경성」「이중도시 경성에서의 문화탐닉-종로(鐘路)와 혼마치(本町)」 등 2개의 테마로 분석한다. 2장은 「야외에서의 음악」과 「실내에서의 음악」으로 나누어 살펴본다. 3장은 「조선인의 문화-종로의 음악회」, 「재조일본인, 그들만의 문화-혼마치의 음악회」로 각각의 특징과 다른 점을 집중 분석한다. 마지막 4장에서는 「조선인의 음악 담론 “음악광시대”」와 「경성 안 두 민족의 음악회」 등 2개의 소제목에 따른 흥미로운 내용이 전개된다. 

이 책의 집필 목적은 사실 식민지경성이 근대도시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음악의 역할이 중요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음악 활동에 관한 중요성을 간과하여 근대의 일상에 대면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한다. 특히 재조일본인들의 음악활동을 살펴본 데에는 경성인으로 함께 살아갔던 그들의 활동을 살펴보며 심층적으로 접근하여 근대 초기 경성의 음악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데 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로써 근대 음악회의 수용과 그 중심지인 경성을 개괄하고 그동안 잊혀 있던 ‘음악과 일상’의 담론을 어떠한 형태로든 복구하여, 현재 우리의 음악문화와 일상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보기를 저자는 기대하고 있다.

이 책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낯익은 이름과 다소 낯선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 경성의 음악과 음악회, 음악인들 뿐만 아니라 타 분야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인사들도 책에 이름이 들어 있다. 그만큼 경성의 음악과 음악회는 음악인들과 음악향유층의 관심의 높았고, 대중적 인기도 높았기 때문으로 독자는 풀이한다. 또 서양음악과 서양음악인들의 이름도 자주 나온다. 경성의 음악은 이른바 '서양 클래식'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홍난파는 "우리 사회에는 음악회란 것이 일대 유행물"(1925. 1. 1)이었다고 하나 당시 경성은 주체적으로 음악회를 열어 음악을 연주하고 감상할 수 있는 전문적인 음악홀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실내 음악회는 근대식 건물의 다목적 공간인 공공 강당에서 개최되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다.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홍난파(1898~1941)는 또 뒷날 1940년 5월 19일자 신문 칼럼에 "그때 음악회란 음악전문가들의 예술적 연주회가 아니라 서양선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어릿광대들의 소기(素技, 꾸밈없는 기술)에 지나지 못했던 것···"이라고 썼다. 여기서 '그때'란 1915~1920년을 말한다. 그때는 근대음악이 우리 땅에 이식되던 시기라고 볼 때 적절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경성은 일본이 추종했던 서구 음악문화를 우월한 것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혼마치(지금의 명동·필동 일대)의 악기상과 레코드 가게, 음악다방 등을 통해 도시는 점차 음악에 젖었다고 한다. 그렇다고 문화충돌이 없던 건 아니다. 마당놀이 같은 야외 연회에 익숙했던 조선인들에게 실내 음악회는 생경했다. 음악회장 연주를 배경 삼아 춤추거나 소리 지르고 담배 피우는 일도 허다했다. 관람에티켓 지적이 늘자 양악은 점차 대중과 멀어졌다. 그럼에도 현진건의 단편 「피아노」가 그려내듯 '피아노만 들여놓으면 신식 가정이 될 것 같은 착각'이 1920~1930년대 경성인을 자극했다. 

책에 따르면 경성에서 열린 대부분의 음악회는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과 혼마치의 경성공회당에 집중되어 있었고, 지정학적으로 조선인 중심지와 재조일본인 중심지로 나뉘어 있었으므로, 이 두 공간의 음악회를 비교하면 종로와 혼마치 음악회의 특징과 차이를 감지할 수 있다.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 음악회는 초기에 매우 활발한 활동을 보이지만 1920년대 후반으로 갈수록 급격히 감소하는 모습을 보여, 종로에서 열린 음악회의 인기가 시들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반대로 혼마치의 경성공회당 음악회는 공회당이 설립된 1920년부터 차차 음악회가 열리기 시작하더니 1920년대 중반부터 10년간 큰 변화 없이 꾸준히 개최되는 모습을 보인다.(p.146)

식민지배자인 일본인과 피식민자인 조선인의 근대에 대한 사고 차이는 음악문화가 형성되는 음악회 현장을 크게 두 범주로 구분했으며, 이 이중성은 음악적 근대도시 경성의 면모에 고스란히 반영되었던 것은 확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저자에 따르면 경성의 음악회는 공연장이 있는 지역에 따라 조선인과 재조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종로의 공연장은 조선인들의 공간으로 서구식 공연의 시작 단계에 있었으며, 일본인들의 거주지인 혼마치에서는 전문음악인들이 참여하는 격 높은 공연들이 기획되었다.(p.149)



제3장 〈이중도시 경성의 음악회 특징과 음악적 경성의 면모〉 「조선인의 문화-종로의 음악회」에서는 식민지배자인 일본인과 피식민자인 조선인의 근대에 대한 사고 차이는 음악문화가 형성되는 음악회 현장에서 두 범주로 갈라진 상황을 자세하게 기술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경성의 음악회는 공연장이 있는 지역에 따라 조선인과 재조일본인 거주 지역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다. 1920년대가 될 때까지도 예배당이든 술집이나 기생집이든 찬송가가 유행하였기에 음악회 곡목은 찬송가나 유행가가 주요 레퍼터리였고, 악기 외에 톱도 등장했다고 한다. 톱을 그어 소리를 내는 톱 연주를 악기 연주라 할 수 없지만 안대선(W. J. Anderson)이나 호아재경의 톱 연주는 조선인 중심 음악회에서 종종 공연되었다. 초기의 음악가는 "음악을 전문공구(專門功究)하는 인(人)은 아니요, 흔이는 부업으로써 다소간 이 방면에 소양과 취미를 남보다 더 가졌"(ghdsksvk, 1925. 4)던 사람들이었고, 음악을 생업으로 하는 음악가들도 자신의 전공 분야가 아니어도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장기를 선보이며 청중들을 즐겁게 해주었다. 김형준은 작사·작곡, 성악, 나팔까지 섭렵했으며, 김영환은 피아노, 바이올린, 작곡을 겸했다. 박용구는 이를 분업화의 문제로 지적하였지만 당시 소수였던 음악가들이 현실적으로 음악계를 지탱해 나가기 위한 도전과 노력이기도 했다.

근대 유행물인 음악회는 사교의 공간으로 이용되었다는 사실도 당시 작가 현진건의 소설에 나타난 내용을 인용해 저자는 강조한다. "현진건의 소설 「까막잡기」를 보면, 전문학교에 다니는 상춘은 학수에게 여학교 주최로 열리는 청년회관 춘기 대음악회에 가기를 권한다. 음악을 모르니 가지 않겠다는 학수에게 상춘은 하이칼라 여학생은 다 올 것이니 여학생 구경이라도 가자며 일등표까지 사주고 데려간다. 이 소설 속 음악회는 남학생이 여학생을 만나기 위한 공간으로 그려진다. 현진건의 또 다른 소설 「B사감과 러브레터」에서도 여학생에게 기숙사로 남학생의 편지가 오면, 삭람은 '학교에서 주최한 음악회"에서 만났나며 문초하였다. 경성인들에 음악회란 남녀가 만날 수 있는 공개적인 연애 장소로 인식되었다."(p.153) 이에 반해 연극이나 영화처럼 수동적인 자세를 취하는 문화 생활에 반해, 음악회는 남녀가 같이 노래하고 춤추고 노는 쾌락이자 여흥이나 오락 격으로 인식되었다. 그래서 "일 원이나 이 원의 고가의 입장료를 선선히 내는 청중들"은 비싼 가격임에도 불구하고 "일석의 유흥기분으로 이것에 만족"(홍난파, 1940. 5. 19)하며 음악회를 다녔다.


저자 : 조윤영


호서대학교 강사. 이화여자대학교에서 음악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근대 음악사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에 「조선인 중심의 음악회장, 경성(京城) 기독교청년회관」 「왜 식민지조선 음악가들은 관현악단을 만들고자 했는가: 경성방송(JODK)관현악단의 출현과 그 의의」 「식민지조선 음악단체 중앙악우회(中央樂友會) 정체성 연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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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노동자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6
클레르 갈루아 지음, 오명숙 옮김 / 열림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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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육체노동자』는 표제어에서 드러나는 이른바 '블루컬러'로서의 노동자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프랑스 소설인 데다 저자 클레르 갈루아의 가 해온 일과 그가 쓴 작품들의 성향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더욱이 작품 전반에 걸쳐 나타나는 문장 속에서 건축노동자처럼 힘든 육체노동을 의미하지 않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특히 주인공 크리스틴이 사랑하는 남자인자 동성애자인 빅토르 때문에 표제어에서 나타나는 '육체'는 사랑의 육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크리스틴은 10년을 빅토르만 바라보고 살지만 27명의 애인을 만난다, 그럼에도 빅토르를 사랑했고, 지금도 돈만 많은 중년의 남자를 만나고 있다. 결과적으로 빅토르는 죽게 되고 그를 묘지에 안장하기 위해 크리스틴은 길을 떠난다. 그러다 밤이 오면 그가 추울까 관 옆에서 밤을 보낸다. 10년동안 그를 사랑했지만 죽고난 후 처음으로 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크리스틴은 손수레 위에 앉아, 빅토르 옆에서 아침이 올 때까지 추위를 꾹 참고 견디리라 마음먹는다.

"걱정하지 말아요. 당신을 혼자 내버려두지는 않을 테니까, 절대로."

그러고 나자, 어떤 한 영상이 머릿속을 맴돌았고 나는 갑자기 웃고 싶어였다.

- 우리가 함께 보내는 최초의 밤이군요.(p.243~244)

이 소설 작품의 마지막 장면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 프랑스에서의 남녀 혹은 동성간 사랑에 대한 사회적 눈길과 또 법률적 판단, 그리고 개인으로서의 '사랑'의 개념이 충돌함을 느낀다. 소설이 결코 길지는 않지만 전개되는 내용에서 쏟아내는 마음의 방황은 길고 길다. 복잡하다는 뜻과도 같은 맥락이다. 자칫 프랑스 영화에서 자주 보이는, 동성애에 거리낌없는, 또 이상한 연애로 생각지도 않는 사회 분위기 탓일까 하는 의심도 가져본다.


앞서 언급한 크리스틴의 독백처럼 지고지순한 사랑을 표현하는 내용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프랑스에서의 연애는 굉장히 개방적이고 한없이 자기 주관적이라는 독자의 개인적인 선입견 때문일까? 아니면 당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한 탓일까? 사랑이 노동이라고 해석하는 저자 클레르 갈루아의 사랑관(觀) 때문일까? 프랑스 소설을 많이 읽지 못한 독자가 프랑스 문화에 서툰 탓일까? 작품의 전개에도 어렵고 관념적인 내용의 단어, 우리와는 다른 사랑관(觀), 또 독자와 저자의 다른 성별 때문일까? 쉽게 이해되지 않는 일들이 수없이 일어나기 때문에 난해하다는 느낌이다. 책의 뒷 부분에 이 책의 역자 오명숙의 〈옮긴이의 말〉에 눈길이 간다. 

"몇십 년 만에 눈이 쏟아지기 시작한 파리의 이른 아침, 크리스틴은 빅토르와 여행을 떠나기 위해 부랴부랴 짐을 챙겨 집을 나선다. 하지만 그 여행은 멋진 차를 타고 아름다운 고장으로 향하는 여행이 아니다. 다시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영원한 이별을 향한 여정이다. 이 소설은 크리스틴이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서 코르뒤레에 도착하기까지 하루동안 펼쳐지는 이야기다. 그러나 그 하루 안에는 그녀가 빅토르를 사랑해 온 10년의 시간이 오롯이 녹아 있다. 이미 예술가의 손을 떠난 그림처럼, 더 이상 덧칠할 수 없는 남자 빅토르. 그녀는 그를 사랑했지만 한 번도 그의 시선을 온전히 독차지한 적이 없었다. 그동안 크리스틴은 사랑이든 아니든 간에 스물일곱 명의 애인을 만났고, 현재는 아쉴이라는 중년의 남자와 함께하고 있지만, 빅토르는 여전히 견디고 싶은 무게, 살갗을 벗겨 내야만 지울 수 있는 아름다운 문신처럼 그녀 안에 남아 있다."(p.245~246)

역자에 따르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빚어 내는 상처투성이 감정들의 파노라마는 감동적이다. 상처가 많아 위험하지만 그래서 더욱 감동적이다. 사랑과 배려와 안타까움과 믿음은 물론이고 시기와 원망과 비웃음과 분노까지도 그렇다. 심지어는 죽음으로 가는 길마저 아름답다.


역자의 시선은 이어진다. 그리고 작품을 보고 느낀 감정을 거침없이 쏟아낸다. "사랑하는 남자의 마지막 편지를 가슴 위에 반창고를 붙여 고정시킨 한 여자가 그를 땅에 묻기 위해 눈덮인 길을 달린다. 그리고 그를 만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함께 온밤을 꼬박 지낸다. 그의 주검과 함께." 역자는 주인공 크리스틴의 10년을 충분히 이해한 듯하다. 앞서 언급한 빅토르의 주검과 마지막 밤을 함께 지내는 크리스틴의 심정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며 충분히 공감한다. 슬프도록 아름답다는 크리스틴의 마음 상태에 동화된 듯하다. 역자는 책을 읽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상식적이지 않은 행동들이 책을 덮는 순간 모두 이해한 듯하다. 

"책을 읽는 동안 짧지만은 않은 삶의 순간순간들을 되짚어본다. 많은 것들이 기억난다. 좀 헐값에 샀다 싶은 것도 없고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렀다고 생각되는 것도 있다. 현재의 삶을 무차별 공격하며 인기척 한번 없이 다가와 슬며시 팔짱을 끼는 추억이라는 것도 따지고 보니 그에 상응하는 값을 치르고 나서야 얻어 낸 값비싼 녀석이었다. 살아가는 데 공짜란 없다. 크리스틴의 할머니 말처럼. '인생이란 일종의 대형 백화점과 같다. 일단 그 안에 들어서면 물건을 구입하고 값을 지불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 책 클레르 갈루아의 『육체노동자』는 열림원이 기획한 프랑스 여성작가 소설 시리즈의 여섯 번째 작품이다. 이 소설작품은 “사랑이라는 거대한 착시 안에서 겨우 간신히 버티는 자들”을 위한 소설이라고 출판사 측은 소개글에 적었다. “절망적인 특권”으로 주어진 관계 속에서 “파괴로 완성된 사랑”을 끝내 사랑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인물, 크리스틴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빅토르라는 단 한 사람을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조롱하며 다른 애인들의 목록을 계속해서 늘려나간다. 크리스틴의 빅토르를 향한 모든 몸짓들은 모순된 것 같지만 결국 하나의 진실한 감정이 된다고 기술하고 있다. 『육체노동자』가 실패한 방식으로만 사랑할 수 있는 어떤 여성의 절규라면, 자신의 몸을 기억과 고통의 형식으로 보존하는 그녀에게 육체는 사랑을 향한 노동이자 증언의 매체이라는 출판사 측의 서술은 독자들에게 이해를 줄까? 혼동을 가져올까?


이 소설 작품 소개글에 따르면 사랑과 증오, 예술과 노동, 숭배와 모욕의 은밀한 경계를 통과하여 “비로소 춥고 깊은 밤에 도달한 이야기”는 “아이러니로 가득한 인생의 기억과 헐벗은 듯 진실한 내면”을 파헤친다. 『육체노동자』는 아름다움과 파괴, 집착과 애도의 감정이 어떻게 한 사람의 몸과 언어를 변형시키는지에 대한 치열한 기록이자, 규범 바깥에서 말해지는 사랑, 그 해체의 시간 속에서도 여전히 놓을 수 없는 감정에 대한 비문법적인 고백이다." 사랑이라는 말로는 충분하지 않은 관계에 대해 “다만 깨닫게 될 뿐이다. 그녀를 지켜보는 불안과 초조함마저 사랑이라 부를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크리스틴이 빅토르에게 그랬듯 나 역시 기꺼이 그녀의 ‘명예스럽지 못한 증인’이 될 것임을.” 출판사 측의 소개글을 읽으면 서서히 작품 이해에 가까워진 듯하다. 

저자 갈루아는 1965년에 발표한 『나의 유일한 욕망』 이후 꾸준히 창작활동을 해온 1970년부터 20년간 〈마리 클레르〉, 〈엘르〉, 〈르 피가로〉 등 잡지에서 활발한 문학 비평을 했다. 1986년부터는 페미나 상의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 이 작품에서 갈루아는 병으로 고통받는 어느 동성애자 빅토르와 그를 사랑하는 여자 크리스틴, 그리고 이 두 사람을 둘러싼 복잡 미묘한 인물들의 관계를 간결하고도 감각적인 문체로 그려낸다. 『육체노동자』는 예민하고 독특한 방식으로 정상 범주 바깥에 자리한 욕망과 여성의 시선을 포착하며, 프랑스 문단에서 클레르 갈루아를 독보적인 작가로 자리매김하게 했다고 설명한다. 

사실 독자로서 느낀 감정은 "감정을 해체하고 재구성하는 이 고통스러운 실험"을 고백한다. 독자와 프랑스, 독자와 저자, 독자와 사랑관이 다른 탓인지 매우 난해했다. 그러나 독자 스스로의 선입견을 배제한다면 이 소설은 깊은 사랑의 감정에 대한 적절한 표현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크다. 한마디로 독자에게 사랑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빅토르는 신경이 서서히 마비되는 병에 걸렸을 뿐 아니라 고집스럽고 신경질적인 성격으로 크리스틴에게 헌신적이고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하지만, 크리스틴에게 그는 “감당하고 싶은 무게, 살갗을 벗겨내야만 지울 수 있는 아름다운 문신”(〈옮긴이의 말〉) 같은 존재다. 두 사람을 둘러싼 세베로, 라이오넬, 아쉴, 자크 등의 비규범적인 관계는 세간의 시선으로는 쉽게 인정하기 어렵지만, 그들만이 만들어 나가는 복잡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상징과 은유가 씨실과 날실로 직조된 프랑스 소설의 진수를 만날 수 있다.

빅토르의 죽음을 앞두고, 그가 머물던 장소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공간을 따라가는 크리스틴의 짧은 여정은 “다시는 만질 수도, 볼 수도 없는 영원한 이별을 향한” 움직임이 된다. 이 여정은 과거와 현재, 사랑과 상실, 욕망과 체념이 끊임없이 겹쳐지는 기억의 궤적이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은 크리스틴이 이른 아침 집을 나선 것으로 시작해, 늦은 밤 목적지인 코르뒤레에 도착할 때까지, 하루 동안의 시간을 따라가면서 두 사람 사이의 10년을 병치시킨다. 살아 있음과 죽음 사이, 관계의 유효성과 무력함 사이, 말해지는 것과 끝내 말해지지 못하는 것들 사이에서 이 이야기는 열린 문턱 위에 선다.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빚어 내는 상처투성이 감정들의 파노라마는 감동적이다.”(p.246) “사랑과 배려와 안타까움과 믿음은 물론이고 시기와 원망과 비웃음과 분노까지도 그렇다. 심지어는 죽음으로 가는 길마저 아름답다.”((p.246) 이 소설 『육체노동자』는 사랑을 말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사랑 소설과도 다르다. 이 작품은 감정의 심연에 침잠한 우리에게 질문을 던진다. 무엇이 사랑을 사랑이게 하는가? 누군가를 욕망하고 동시에 증오하며, 이해할 수 없으면서도 포기하지 못하는 감정은 무엇으로 설명될 수 있는가? 크리스틴은 그 질문에 답하지 않는다. 대신 질문 자체를 온몸으로 살아낸다. 그녀의 서사는 균질적인 언어로는 번역되지 않으며, 그녀의 고백은 잔혹하리만치 솔직하고, 절망적일 정도로 아름답다. 단지 육체로 겪어야만 했던 어떤 사랑의 방식, 그리고 그것이 남긴 흔적의 무게를 이야기하며, 이 소설은 조용하지만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는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여전히 무언가를 감당하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그곳엔 잿빛의 거리도, 도시도, 세간의 쑥덕거림도, 비굴한 타협도, 성가신 그 어떤 것도 없었다. 창백한 흐린 하늘 끝엔 언제나 고운 먼지가 깔린 꼬불꼬불한 작은 길과 푸른 언덕이 끝없이 펼쳐졌다. 타는 듯 대기가 뜨거워지면서 축축한 습기가 몸을 감싸면 우리는 그 길을 달렸다. 그 작은 길은 잿빛 그림자를 드리우는 포도밭과 올리브밭 사이로 구불구불 이어지며 노송나무 숲을 감아 돌았고, 노송나무 숲은 큼직한 돌들로 눌러 고정시킨 붉은 기와지붕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등나무가 자라는 작은 기와 벽을 가벼운 화장이라도 시킨 듯 뿌옇게 만들었다.(p.108~109)


어리석은 일이긴 하지만 내겐 타인들에게 내 삶에 관해 주절주절 떠드는 버릇이 있다. 그러고 나면 언제나 궁지에 몰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면서도 말이다. 날 잘못 판단하고 있는 그들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빅토르는 닮은 구석이 아주 많다. 우리는 어떻게 손써 볼 수 없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미지의 사람들에게 개인적인 얘기를 털어놓으며 그들을 난처하게 만들면서, 그들의 난처함에 대해선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는다. 그때 우리는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증인을 찾아 헤매는 일종의 유희이다. 우리의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가지고 훈련을 시키긴 하지만 결코 우리를 속박하지는 않을 그런 증인들을 찾는 유희. 사람들은 우리가 모든 것을 얘기하고 있다고 믿지만, 정작 우리는 아무것도 얘기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진정한 비밀은 슬픔이다. 우리 세 사람은 모두 잘 알고 있다. 전혀 그렇지 않은 척할 뿐이라는 것을.(p.128)


저자 : 클레르 갈루아


1937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1965년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1970년부터 1990년까지 20년간 『마리 클레르』 『엘르』 『마리 프랑스』 『르 피가로』 『파리 마치』 등 여러 잡지에서 문학 비평을 집필했다. 또한 페미니상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다. 주요 작품으로 『나의 유일한 욕망』 『양팔 가득 장미꽃을』 『흰 실로 수놓는 소녀』 『예레미야의 밤』 『인생은 소설이 아니다』 『네 개로 조각난 가슴』 『만약 사랑에 관해 이야기하라면』 『위험한 시간들』 등이 있다.


역자 : 오명숙


1966년 서울에서 태어나 성균관대학교 불어불문학과와 동대학원 석사 과정을 졸업했다. 옮긴 책으로 『시적 모험』 『폭력적인 삶』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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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세계사 - 인간이 깃발 아래 모이는 이유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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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기는 그 나라의 상징이자 정체성을 표현한다. 국기를 알면 나라의 역사가 보이고, 종교, 구성 인구의 정체성, 국가의 이념까지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다. 지역별, 종교별, 역사의 흐름을 짚어낼 많은 정보가 국기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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펄럭이는 세계사 - 인간이 깃발 아래 모이는 이유
드미트로 두빌레트 지음, 한지원 옮김 / 윌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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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우리의 국기인 태극기에 관한 상징성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는 초등학교 다닐 때 한국 역사 시간에 배운 정도로 알고 있다. 나라를 대표해 가는 곳에는 어김없이 태극기가 걸려 있고, 국가 수반의 해외 방문 때도 방문국의 국기와 함께 나란히 걸릴 때마다 애국심은 물론 국가에 의한 자긍심도 자극된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어려운 여건 하에서 짧은 시간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세계에서 '기적 같은 나라'라고 평가하고 있다. 우리가 해외에서 대접 받는 일이 1990년대 해외여행 자유화 이후 이른바 해외 여행 붐이 일어났을 때 독자로서 첫 해외 여행을 갔을 때 절실히 느꼈다. 물론 '어디서 오셨나?'라고 물을 때 'Korea'라는 답변 앞에 'South'를 붙여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조금만 설명을 더하면 적잖은 사람들이 아는 척해 주었다. 

태극기도 이제는 세계 어느 나라에 가도 알아볼 정도로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태극기가 상징하는 것에 대해 완전히 설명하기에는 지금도 무리가 있다. 또 초등학교 때 태극기 그리기 시간에 4귀에 있는 건·곤·감·리를 제대로 그리지 못해 쩔쩔맸던 기억을 제외한다면 그렇게 그리기 어려운 점은 없었다. 그러나 아직도 정확하게 상징하는 것을 완전하게 기억되지 않아 제대로 설명할지는 스스로도 부끄러운 점이 있지만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미국이란 나라도 자신들의 국기를 그리는 일이 쉽지 않아 어렸을 때 제대로 그려내는 일이 많지 않다고 한다. 사실 국기에 대해 정확하고 온전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나라든 못 그릴 국기는 없다. 상대적으로 굉장히 쉬운 일본 국기나 삼색기는 무척 쉬워 보이기는 하지만 문장이 들어가거나 특별한 의미가 추가돼 바뀐 국기를 그려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많은 국기를 한자리에서 함께 만날 수 있는 곳은 아무래도 올림픽 같은, 나라를 대표해 누구나 참가할 수 있는 체육대회일 것 같다. 거기서도 상위 입상자에게는 메달과 함께 국기가 게양되고 우승국은 국기와 함께 국가(國歌)까지 울려퍼진다. 선수나 참가한 관객들은 감격스러운 장면이다. 올림픽이 국가 대항전이기 때문에 개인의 영광은 물론 국가의 위상을 높이는 데 큰 힘을 보탠 '영웅'들에게는 걸맞는 상을 별도로 국가 이름으로 주기도 한다.



이 책 『펄럭이는 세계사』는 “상징의 기원을 찾아 떠나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여행”이라는 설명적 상징성을 덧붙이고 있다. 고대 이후 인류가 국가를 세우고 자신들의 공동체에 대한 특별한 애착을 갖게 된 데에는 아마도 국기의 역할이 컸을 것 같다. 나라의 번영과 멸망을 가르는 전쟁에서도 깃발은 굉장한 상징성이 있고, 그 상징성에 따라 병사들의 단결을 꾀한다. 전쟁터에는 대체로 국기보다는 국기를 변형한 상징성을 갖는 깃발을 내세우기도 하지만 아무튼 자신이 어느 나라 사람이고, 어디에서 무엇 때문에 싸우는지를 명확하게 각인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이 책의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도 “깃발에는 꿈과 의지, 역사와 미래가 깃들어 있다. 깃발은 역사의 미니어처다.”라고 말한다. 저자는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지만 사실은 국기와 깃발에는 인류 수천 년의 역사가 얽혀 있다고 말한다. 이 책은 그 변천사를 따라가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뒤바꿀 책으로 지목되는 이유다. 이 책에 200가지가 넘게 수록된 다양한 국기와 상징 속에는 과거의 이야기뿐만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변화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저자는 1994년 월드컵 경기를 중계하는 텔레비전 화면에서 우연히 보게 된 국기에 대한 특별한 인상 때문에 국기에 대한 탐구를 시작했다고 밝힌다. 당시 소년이었던 저자는 수십 년 후 우크라이나의 내각 장관이 된다. 정치인이자 기업가가 된 그가 무한한 지식과 사랑을 담아 이제는 깃발 아래에서 소란스럽고 치열하게 벌어졌던 인류의 여정을 책으로 엮어냈다. 깃발의 역사, 그리고 정치와 문화적 상징을 탐구하기 시작한 저자는 전 세계 국기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체계를 찾아 그 패턴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이 책에서 풀어낸다.

혁명가의 이성과 마음에 불을 지피며 세계지도를 재편한 삼색기,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지구 반대편에도 가닿은 영국의 유니언잭, 거대한 공산주의 블록을 견고하게 쌓은 오각별. 역사 속 수많은 장면을 완벽히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색과 무늬의 의미를 알아두면 처음 보는 국기에서도 그 나라의 역사를 엿볼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책의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는 우리나라와의 특별한 인연에 대해서도 책의 앞 부분에서 언급한다. "나와 한국을 깊이 연결해준 것은 다름 아닌 태극기였다. 태극기는 미학적으로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철학과 역사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볼수록 빠져들게 된다. 더구나 점령군에 맞서 저항했던 한국의 지난날은 우크라이나인인 나로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의 한복판에서 휘날렸던 태극기에 눈길이 갈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p.11) 

저자는 최근 한국의 상황에 대해서도 부연 설명한다. "최근 비상계엄 선포의 여파로 대통령 탄핵 촉구 집회가 열렸다는 뉴스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분노한 젊은이들이 태극기가 아니라 인터넷 밈과 가상 단체의 상징이 담긴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기 때문이다. '만두 노총', '화난 고양이 집사 연맹', '일정이 밀린 사람 연합'(집회 나오느라 약속을 다 취소했다는 뜻)처럼 이색적인 깃발들이 인파 속에서 저마다 유쾌하게 개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의 집회는 목숨을 걸고 일장기 위로 태극기를 덧칠한 스님부터 인터넷 밈이 그려진 깃발과 케이팝 댄스로 무장한 풍경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기 동안 한국 사회가 얼마나 크게 변화하고 발전해왔는지 선명히 보여준다."고 기술하고 있다.

저자가 깃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일은 앞서 언급한 대로 월드컵 중계를 시청하면서부터이다. 텔레비전 한구석에 자리한 스코어 옆의 알록달록한 사각형이 어째서 자신에게 그런 따뜻한 느낌을 불러일으켰는지 지금도 설명할 길이 없고, 당시에는 그 깃발 뒤에 숨은 또 다른 세계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다고 털어놓는다. 심오한 뜻을 갖고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지만 미국과 경기를 펼친 스위스의 국기가 직사각형이 아니라 정사각형의 모양이라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또 이탈리아와 아일랜드가 만난 그다음 경기에서는 이 두 나라가 국기가 몹시 유사하다는 점에 놀라기도 했다. 

물론 월드컵 경기를 시청하면서 불거졌던 놀라움과 의외적 발견을 가슴에 안은 채 자라면서 국가의 장관 자리도 맡고, 기자로 글도 썼으며 여러 사업을 벌이며 바쁘게 움직이는 바람에 잊고 있다가 최근 다시 그때의 충격에 대한 오랜 숙원 해소에 나서서 이 책을 집필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이 책은 세계의 국기를 크게 구별하는 방법으로 따로 분류하지 않고, 세계의 국기를 비슷한 상징과 정체성 별로 모두 17장(章)에 걸쳐 각 국의 국기에 대해 펼쳐보인다. 국기의 상징, 제작 원리, 그리고 나라의 정체성을 상징하고 색과 선, 면으로 구성한다. 경우에 따라서는 가문의 문장을 사용하기도 한다. 지금의 각 나라 국기는 대개 근대 이후 확정된 국기들이다. 나라의 상징이 될 요소들을 강렬한 이미지를 표현해야 한다는 기본 원칙에 기초하는 듯하다. 

우리는 많이 접하지 못했지만 저자는 특이한 예로 태평양의 아름답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비키니 환초를 먼저 끄집어낸다. 1954년 미국은 이곳에서 최초의 수소폭탄 실험을 실행했다. 이때 일어난 폭발로 섬들이 그대로 증발했고 인근 원주민은 방사능에 피폭되면서 미국은 국제사회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바로 이곳, 비키니 환초의 깃발은 미국 국기와 닮아 있지만 중요한 차이가 있다. 오른쪽 상단에 그려진 검은 별 3개는 폭탄이 터지며 날아간 섬들을 은유한다. 더욱 눈에 띄는 점은 하단에 마셜어로 “모든 것은 신의 손에 달렸다”라고 적힌 문구다. 이것은 미국이 폭탄 실험을 위해 원주민 167명이 이주하도록 어처구니없는 요구를 하자, 비키니 환초의 지도자가 내놓았던 대답이라고 한다. 수십 년 전 원주민이 겪어야 했던 아픈 역사와 미국이 저지른 과오가 깃발에 박제되어 있는 것이다.

비키니 환초의 국기를 둘러싼 이 인상적인 이야기만이 아니라, 세계의 국기에 담긴 기상천외한 역사는 무궁무진하다고 저자는 밝힌다. 캐나다는 국기에서 대영 제국의 흔적을 지우고 완전한 주권국으로 거듭나고자 단풍잎 국기로 교체하는 과정에서 여야 간 극심한 대립을 겪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 아프가니스탄은 오랜 내전으로 20세기 들어 열아홉 번이나 국기를 바꿔야 할 만큼 격변의 시기를 거쳐야 했다. 이와 함께 적도기니에서는 광기에 휩싸인 독재자가 나라를 쥐락펴락하며 기이한 국기를 만들어내는 사건도 있었다고 밝혀낸다. "깃발은 한 나라의 정치, 지리, 역사를 보여주는 미니어처"라고 저자가 강조한 까닭이다. 저자는 국기의 변화는 그 나라가 평화로웠는지 혹은 굴곡 많았는지 말해준다고 지적한다. 격동 속에서도 살아남은 깃발 한 장은 수백 년의 역사를 묵묵히 증언한다는 것이 저자가 국기를 살펴보며 탐구한 결론이다.


앞서 저자가 한국 독자들에게 쓰는 인삿말을 책 앞 부분에 썼던 것 중 2024년 12월 3일, 대한민국에 갑작스런 계엄령에 관련된 이야기였다. 이때의 상황을 저자와 함께 다른 시선으로 기술한 내용이 출판사 소개글에 나온다.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시민들은 국기 대신 직접 만든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 이유는 다양했다. 특정 정치 세력으로 오해받지 않기 위해, 우리 같은 사람도 여기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함께하는 이들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아니면 그저 재미있게 즐기고 싶어서. 시위가 확산되면서 그 의미는 더욱 깊어졌다. 각기 다른 깃발이 하나둘 모여 거대한 물결을 이루었고, 이는 시대를 역행하는 정부를 향한 민주적 분노이자 연대의 상징이 되었다. 집회가 열리는 날이면 이색적이고 웃음을 자아내는 깃발을 촬영해 공유하는 문화가 생겨났고, 날이 갈수록 정교하고 일사불란해지는 기수들의 움직임이 탄식과 함께 경탄을 불러일으켰다."

깃발이 지닌 힘을 증명하는 사례로 저자와 출판사는 수없이 보고 들었다. 역사적으로는 더 많은 사실을 알아냈을 터이다. 저자는 시리아 이야기도 꺼낸다. 13년간 이어진 시리아 내전이 반군의 승리로 끝났을 때, 이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국기를 교체하는 것이었다. 또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반대하는 러시아 국민은 국기의 붉은색 줄무늬를 흰색으로 바꾼 깃발을 들고 시위에 나섰는데,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은 나치 깃발을 연상시키는 Z 표식을 사용하여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은 불의와 핍박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때마다 깃발 아래 모여 저항하고 연대하며 새로운 시대를 선언해왔다. 바람 잘 날 없는 격동의 시기에 출간된 이 책은 전 세계 국기에 수놓인 인류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돋보기 같은 책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역임했으며 30년 넘게 국기와 깃발을 연구해온 저자 드미트로 두빌레트가 중요한 역사의 한 장면들을 세심히 골라 인류의 뜨거웠던 지난날을 펼쳐 보인다. 혁명과 함께 탄생한 삼색기부터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유니언잭,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 태극기를 비롯해 백합이나 독수리처럼 익숙한 상징에 깃든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역사를 해석하는 힘을 얻게 된다. 길거리 어디서든 마주치는 깃발의 화려한 색과 무늬 속에서 역사적 순간이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인간은 정보가 시각적일수록 더 쉽게 인지하고, 더 오래 기억한다고 한다. 이 책 『펄럭이는 세계사』는 역사서라면 으레 그렇듯 기념비적인 사건을 연대순으로 설명하지 않고, 각 장을 대표하는 디자인을 중심으로 전개한다. 전 세계 국기에 자주 등장하는 상징체계를 찾아 그 패턴의 기원과 전파 과정을 한 편의 드라마처럼 흥미롭게 풀어내는 것이다. 프랑스 삼색기는 혁명가의 이성과 마음에 불을 지피며 세계지도를 다시 그렸고, 영국 유니언잭은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지구 반대편에도 가닿았으며, 오각별은 거대한 공산주의 블록을 견고하게 쌓았다. 역사 속 수많은 장면을 완벽히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색과 무늬의 의미를 알아두면 처음 보는 국기에서도 그 나라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된다.

특히 이 책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국기는 물론이고 해학과 풍자를 섞어 만든 깃발까지 200개 이상의 이미지를 수록해 세계사의 흐름을 한눈에 펼쳐 보인다. “깃발에는 꿈과 의지, 역사와 미래가 깃들어 있다”고 이다혜 기자가 보탠 추천의 말처럼, 거리 곳곳에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는 깃발 하나에도 수천 년의 역사가 얽혀 있다. 그 속에 깃든 과거의 이야기를 발견하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지혜와 변화를 구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며, 세계를 보는 방식을 뒤바꿀 책이기에 독자들에게 추천한다.


저자 : 드미트로 두빌레트(Dmytro Dubilet)


우크라이나 드니프로에서 태어나 키예프 대학교와 런던 비즈니스 스쿨에서 공부했다. 기자와 은행가로도 일했고, 2017년 IT 회사인 핀테크 밴드를 공동 설립한 후 모노 뱅크를 출시하였으며, 2019년부터는 젤렌스키 정부의 내각 장관을 지냈다. 구글과 《파이낸셜 타임스》가 선정한 뉴 유럽 100인(The New Europe 100 list)에 이름을 올리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세계 곳곳의 국기와 깃발을 연구하며 알게 된 역사를 재치 있게 풀어낸 『펄럭이는 세계사』는 우크라이나 러시아 전쟁이 일어나기 6개월 전에 처음 출간되었다.


역자 : 한지원


고려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텍사스대학교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공부했다. 현재는 좋은 책을 읽고 발굴하고 번역하며 살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코카인 블루스』, 『테스토스테론 렉스』, 『말라바르 언덕의 과부들』, 『멘탈의 거장들』, 『편집 만세』, 『책을 먹는 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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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꿀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소모하지 마라 - 세네카 인생 학교
    알베르트 키츨러 지음, 최지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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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이 책 『바꿀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소모하지 마라』는 「세네카의 인생 학교」란 부제를 갖고 있다. 왜 세계가 전쟁에 휩싸여 있는 이 시점에서 세네카를 등장시키는지 궁금하기도 하다. 저자 알베르트 키츨러는 현재 세계의 모든 나라들이 경쟁의 대상이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이라는 극한 대립의 상태라고 인지하는 것 같다. 디지털 시대로 바뀌고 AI 등 제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접어들면서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정신없고 복잡하고 시끄럽다. 또 소비적인 일상 속에서 우리의 내면은 점점 마모된다. 예전과 달리 누구나 살면서 한 번은 요동치는 세상에 참을 수 없이 불안해지는 순간이 온다. 

    바로 그때, 현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세네카가 필요하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평정심의 철학자’ 혹은 ‘삶의 철학자’로 불리는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 스토아학파를 대표하는 사상가이자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정치가였던 그는 공포와 광기로 가득했던 고대 로마에서 역동 그 자체인 삶을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가장 높은 지위를 누리다 황제로부터 자결 명령을 받아 생을 마감하기까지, 끊임없는 시험과도 같았던 인생에서 세네카가 제1의 목표로 두었던 것은 다름 아닌 내면의 평온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에 따르면 세네카는 걱정이 없고 마음의 평온이 지속되는 상태가 행복이라고 보았다. 그에게 있어 평온은 단순히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지켜내는 행동에서 오는 선물이었다. 세네카는 내면의 평온을 이루는 데 있어 무엇보다 실천성을 강조했다는 말이다. 무언가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이를 삶 속에서 행동으로 옮겨야만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철학을 앎의 문제에 한정하지 않고, 실행 자체를 철학의 독립적인 부분으로 격상시킨 선구적인 철학자였다는 점을 저자는 강조한다. 

    이로 인해 그의 가르침은 2,000년을 뛰어넘어 오늘날 다시 부흥하고 있다. 세네카가 남긴 지혜가 격변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빛나는 지침이 될 뿐 아니라, 강인한 내면의 가치를 발견하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세네카를 인생의 스승으로 삼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책 『바꿀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소모하지 마라』는 종이와 잉크로 지어진 ‘인생 학교’다. 세네카의 철학과 삶을 깊이 파고들어 그 안에 담긴 지혜를 톺아 올린 이 책은 평정심을 찾는 길로 독자를 이끈다. 요동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나’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이 책이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지혜는 단지 쌓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라는 세네카의 가르침에 저자 독일의 철학자 알베르트 키츨러는 큰 깨달음을 얻고, 세네카의 철학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눔으로써 ‘행동’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이 책 『바꿀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소모하지 마라』를 집필한 것도 그러한 실천의 결정체다. 이 때문에 이 책은 종이와 잉크로 지어진 ‘인생 학교’라는 비유적 표현이 걸맞다. 이 책은 인생의 문제들에 관한 세네카의 이야기를 세 차례의 수업으로 나누어 담았다. 그의 말과 글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그 속뜻을 다듬어 독자에게 전한다. 세네카의 삶 또한 깊이 파고드는 이 책은 요동치는 세상에 휩쓸리지 않고 오롯이 ‘나’의 삶을 살아가길 원하는 모든 이들에게 좋은 안내서가 되어줄 것이다.

    세네카의 가르침을 총 네 개의 장을 통해 전한다. 첫 번째 장은 '예비 학교'로 철학이 무엇이며 우리 삶에 왜 철학이 필요한가를 살핀다. 세네카는 “산다는 것은 신의 선물이며, 잘 산다는 것은 철학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시간이 흐르는 대로 그저 살아가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철학이 필요하다. 철학은 영혼을 가르치고 삶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장은 '세상과 운명'을 다룬다. 세상, 운명, 상황은 우리에게 예고 없이 들이닥치며 우리를 좌절에 빠뜨린다. 세네카는 욕망의 광란을 가라앉히고 공포의 엄습을 막아낼 이성에 관해 알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자기만의 중심과 정체성을 지켜낸다면 외부 사건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의연한 태도를 견지할 수 있다. 세 번째 장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다룬다. 세네카는 “내가 어디에 있든 나는 나의 것”이라며 주체성을 강조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통제하고 삶을 주도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아무런 선택지 없이 그저 떠내려가는 삶을 살게 된다고 경고한다. 이 장에서는 세네카의 철학을 통해 자기 자신과 화해하고 합치되는 방법을 배운다. 마지막 장은 '타인과의 관계'를 다룬다. 우리는 관계없이 살아갈 수 없다. 타인과의 연결은 실존적 문제다. 세네카는 인간의 불완전함에 관대해질 것을 주문한다. 결함은 모두에게 존재하며, 타인에게서 마음에 들지 않는 모습은 곧 자기 모습이기 때문이다.

    세네카의 예리한 통찰과 견고한 지혜는 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묵직한 교훈을 준다. 거스를 수 없는 운명, 인생의 덧없음, 진정한 자유, 연결과 갈등, 균형과 조화…. 삶의 문제를 고민하는 독자들에게 세네카의 가르침은 명료한 길을 보여줄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도전 과제들을 맞닥뜨린다. 그중에는 어찌할 수 없는 외부 환경으로 인한 것도 있고,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과 관련한 것도 있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비롯한 것도 있다고 저자 키츨러는 설명한다. ‘잘 산다’라는 것은 결국 이 문제들을 얼마나 잘 다루느냐에 달려 있다. 『바꿀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소모하지 마라』는 2,000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가르침이자 세네카의 말과 글에 담긴 철학과 지혜를 독자들에게 키츨러는 제시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세네카는 철학이 삶의 실천으로 이어져야 한다고 보았다. 그렇기 때문에 개념에 천착하지 않고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행동과 변화를 이끄는 탁월한 말과 글을 남겼다. 격동의 시대 속에서 삶의 문제를 치열하게 고민한 세네카의 말과 글 속에는 삶에 관한 예리한 통찰이 빛난다.

    저자 키츨러는 이 책을 첫 번째 수업 〈나를 괴롭게 하는 세상과 운명〉, 두 번째 수업 〈나를 가장 흔들리게 하는 ‘나’〉, 세 번째 수업 〈나를 결핍되게 만드는 사람과의 관계〉 등이다. 책의 첫머리 '예비 학교'에서는 「철학, 지혜를 향한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철학 일반과 세네카 철학을 설명한다. 마지막 '나오며'는 「그대, 자기 자신을 행복하게 하라!」는 제목으로 에필로그를 대신하고 있다. 철저히 계산되고 잘 맞추어진 '인생 학교'란 느낌이다.

    세네카는 대(大)수사학자를 아버지로 하여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 로마로 옮겨 철학·수사학을 닦아, 법정에서는 뛰어난 변론의 재주를 보였다. 일시 황제의 노여움을 사서 추방당하는 신세가 되었으나 후에 다시 소환되어 젊은 네로의 교육을 맡았다. 네로는 황제가 된 처음 5년간은 선정을 베풀었는 바, 이는 순전히 세네카의 보좌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러나 네로가 어머니를 죽인 후로는 폭정이 쌓여 세네카는 반란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로 황제로부터 죽음을 받아 조용히 자기의 혈관을 잘랐다.(세계문학사 작은사전, 2002)

    세네카의 빛나는 말과 글에서 키츨러는 철학의 지혜를 건져 올린다. 어떤 상황에도 무너지지 않는 견고한 내면을 쌓아올리고, 타인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며, 자기 자신을 잘 알고 합치된 삶을 살아가고 싶은 오늘날 독자들에게 세네카의 말과 글은 2,000년을 뛰어넘어 빛나는 이정표를 보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저자는 왜 철학, 그것도 2'000년 전 세네카의 철학이 지금 우리들이 사는 세상에 필요한가에 대해 책의 〈서문(들어가며)〉에 적고 있다. "평온함이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대다. 전쟁, 팬데믹, 위태로운 세계정세, 다가오는 기후 재앙이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기술의 최신화, 디지털화, 세계화, 인공지능의 급속한 발전과 전 세계적 네트워킹은 삶의 리듬을 급격히 가속화한다. 모든 것이 너무 빠르고 정신없고 복잡하고 시끄럽고 소비적이다. 우리는 일상의 모든 것에서 스트레스를 받는다. 고요하고 안정적인 상태는 드물어졌다. 그래서인지 행복한 삶에 무엇보다 평온함이 필요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p.15)

    저자는 행복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게 아니라 자기 안의 문제가 해결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 타인, 세상과의 사이가 모두 좋을 때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자기 안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자기다운 자기가 되려면, 스스로의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의지를 발휘하려면, 먼저 내면을 정돈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나에게 맞지 않는 모든 것, 내 안의 낯선 것, 나를 힘들게 하고 다양한 고통을 생성해 내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극복하고, 방어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면서 평소에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고 행동할 때의 습관들을,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살 수 있을 때까지 부단히 점검하고 바꾸고 계발해야 하며, 필요하다면 버리기도 해야 한다. 이 과정을 잘해나갈 때 비로소 마음의 평온을 얻을 수 있다고 역설한다. 그런데 학교에서 배우는 과목에 '인생 처세술'이라든가 '실전 인생 철학' 같은 과목은 없다. 종종 종교나 '윤리' 수업 정도가 있을 뿐이다. 일상을 극복해 나가는 방법, 일상을 사랑하고 그 안에서 기쁨과 평안의 원천을 얻는 방법을 배울 곳은 찾아볼 수 없다.

    이 책 『바꿀 수 없는 것에 인생을 소모하지 마라』는 그 비어 있는 틈을 메우고자 쓰였다. 삶의 다양한 도전 과제를 잘 극복할 방법을 알려주고, 그럼으로써 계속해서 '밝은 평정심'을 인생의 기본적인 기조로 유지하고 운명적 시련에 맞닥뜨리더라도 적절한 시기에 다시 제자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돕는 안내서가 되고자 했다는 저자의 집필 이유이다. 따라서 이 목적을 위해 로마 제정시대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멋진 삶의 교훈을 남긴, 인류 역사상 위대한 현자 중 한 명인 세네카가 소환된 것이다.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해서 독자들에게 알려주는 일은 별 의미가 없을 듯하다. 왜냐하면 책이나 다른 사람의 말을 듣고 배운 지식으로는 현재 닥친 어떤 문제도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철학, 그중에서도 '세네카의 철학'이 빛나는 이유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세네카는 평온(삶의 행복)은 단순히 고요한 상태가 아니라 옳다고 여기는 것을 지켜내는 행동에서 오는 선물이라고 보았다. 또 세네카는 내면의 평온을 이루는 데 있어 무엇보다 실천성을 강조했다. 세네카는 무언가를 배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으며 이를 삶 속에서 행동으로 옮겨야만 의미가 있다는 점을 강조한 로마의 철학자이다. 저자 키츨러는 첫 번째 수업 〈나를 괴롭게 하는 세상과 운명〉에서 세네카의 가르침을 얻기 위해 세네카의 저서 『과학적 탐구』를 인용한다. 이 책 『과학적~』은 자연현상을 설명함으로써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느끼는 두려움을 없애주고자 한 목적으로 쓴 책이다. 이는 현대의 우리가 안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왜, 어떻게 그 일이 일어났는지 궁금해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 책에서 세네카는 삶의 극복이라는 과업을 수행해 나가는 데 이론과 실천이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보여준다. 세네카가 구체적으로 삶을 헤쳐나가는 방법에 대해 말한 명제와 설명으로 미루어볼 때, 그의 결론 중 하나는 우리가 인내하고 포기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최악의 불행이 주는 압박에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피할 수 없음을 인내하고 적응하는 것이다."

    "운명이 유일하게 싦어하는 것은 태연함이다."

    "무엇을 견디는지가 아니라, 어떻게 견디는지가 중요하다."

    저자는 이런 교휸이 진부하다고 반박할 수도 있고, 이런 교훈을 설명하기 위해 굳이 자연과 운명의 본질까지 거슬러 올라갈 필요가 있느냐고 반박할 수도 있다고 전제한다.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일을 견뎌내야 한다고만 생각하는 것과 삶의 본질과 사물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대한 보다 깊은 성찰 뒤에 이를 수용하는 것은 마음의 평안에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이러한 성찰이 더 일찍 수행되고 내면화되어 마음 상태로 자리 잡았다면, 불운이나 사고에 대한 감정적 반응은 달라질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마음이 자잘한 걱정에서 벗어나 불행이나 사고를 자연의 법칙에 따른 필연적인 것으로 이해하고 수용하는 수준이 되면, 우리는 항상 평점심을 유지하게 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수업에서 '운명' '죽음' '소유' '자유' 등에 관한 세네카의 철학의 깊은 뜻을 살펴본 저자는 두 번째 수업에서 '나를 가장 흔들리게 하는' 사람은 바로 '나'임을 직시하고 강조한다. 이에 따라 「내면을 정돈하라」「마음의 평온을 얻는 방법」「나의 삶과 내면 돌보기」「더 나은 삶을 위한 자기수양」「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의 힘」「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다」「진정성 있는 삶」 등의 제목으로 하나씩 풀어간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통제하는 법을 배우고 삶을 주도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마치 인생이라는 강물에 흘러가는 한 조각의 나무처럼 아무런 선택지 없이 그저 떠내려가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고대 철학자들의 인식과 세네카의 철학은 정확하게 일치한다. 그것에 맞서 싸워 이겨내야 한다는 명제는 이렇게 굳세게 바로 선다. 그러니 이 장이 가장 중요한 주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저자 키츨러는 말한다. 

    책에 따르면 세네카가 전하는 교훈 대부분이 인간과 인간의 정신적 삶에 관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세네카는 자기 관리에 대해 언급한 수많은 기본 진술에 체계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의 자아를 이햐하는 데 도움이 되는 특정한 반복 주제들을 선별했다. 그는 명제의 논리-개념적 또는 체계적 도출에 회의적이었다. 아마 그런 작업을 통해 인생의 다면성을 완벽히 설명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저자 : 알베르트 키츨러(Albert Kitzler)


    독일의 철학자·변호사·영화 제작자. 프라이부르크 대학교에서 법학과 철학을 공부했고, 동 대학원에서 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프라이부르크 법률사무소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서른한 살 되던 해인 1986년, 남미로 1년간의 도보 여행을 떠났다. 그곳에서 영화 제작에 대한 열망을 되찾고, 방향을 틀어 12년간 영화 제작자의 길을 걸었다. 그가 제작한 20여 편의 영화는 전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2000년, 코르시카섬으로 떠난 도보 여행에서 그는 삶의 행로를 한 번 더 바꿔 다시금 철학의 길을 걷기로 한다. 특히 고대 그리스, 중국, 인도의 실천 철학 연구에 천착하여 2010년에는 대중을 대상으로 고대의 지혜를 널리 전파하는 학교인 MASS UND MITTE(절도와 중용)를 세웠다. 그리고 이곳에서 주로 고대 실천 철학을 바탕으로 한 상담, 강연 등을 진행하고 있다.

    『나를 살리는 철학』 이후 국내에 두 번째로 소개되는 『철학자의 걷기 수업』은 걷기 및 도보 여행에서 얻은 경험과, ‘걷기’라는 행위를 통해 이르는 마음의 평온, 균형에 대한 수많은 철학자들의 지혜를 직조해낸 ‘걷기 철학’의 결정체다.


    역자 : 최지수


    전문 통번역사이자 박사학위 후 독어학과 통번역학을 연구하며 출판번역 에이전시 글로하나에서 독일어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불안사회』, 『나를 살리는 철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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