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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 상·청춘편 - 한 줄기 빛처럼 강렬한 가부키의 세계
요시다 슈이치 지음, 김진환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11월
평점 :

<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이 책 『국보』는 일본의 전통 문화인 '가부키(歌舞伎)'를 다룬 장편 소설 작품이다. 상하 두 권 중 상편 「청춘편」이다. 이 소설은 지난 6월 일본에서 개봉한 영화 〈국보〉가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일본 영화계에 센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한다. 가부키(歌舞伎)란 한자가 뜻하는 바, 노래와 무용, 연기가 어우러진 서양의 연극·오페라와 가깝다. 이 책 『국보』는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소설가 요시다 슈이치의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국보』는 일본의 문학상을 대표하는 ‘예술선장문부과학대신상’, ‘중앙공론문예상’ 동시 수상했을 만큼 일본 문학계에서도 문학평론가들에게 중요한 작품으로 인식되어 있다.
사실 가부키는 음악(歌)·무용(舞)·연기(技)가 어우러진 일본의 전통 민중연극으로, 노(能, 14세기), 분라쿠(文樂, 16세기)와 함께 일본의 3대 주요 전통극 중 하나이다. 16~17세기에 교토를 중심으로 시작돼, 19세기 에도 시대에 서민오락으로 완성된 일본의 고전연극으로 전해지고 있다. 일본 서민들과 도시 상공인들의 대중적인 오락물로, 지배계급 취향의 '노(能)' 공연과 대비된다. 특히 가부키는 2001년 '노'에 이어 2005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다.
가부키는 근대 초기 교토 지역의 무녀 이즈모노 오쿠니(出雲阿國)라는 여성이 중심이 되어 집단으로 춤을 추는 유녀(遊女) 가부키로 시작되어 대중의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관능적이고 여류 공연단이 매춘 등으로 풍속을 해치자 1629년 도쿠가와 막부는 이를 금지시켰다고 한다. 이후 여성의 출연이 금지되면서 남자로만 구성되게 되었고, 여기에 연극적 요소가 많이 가미된 야로우(野郞) 가부키가 17세기 중반 등장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가부키는 실제사건을 바탕으로 극적 요소에 충실한 ‘와고토(和事: 오사카 인근 간사이지역에서 번성)’와 화려하고 변화무쌍한 활극을 주로 다룬 ‘아라고토(荒事: 도쿄 인근 에도지역에서 번성)’로 크게 나뉜다.
시사상식사전에 따르면 대표적인 가부키 레퍼토리에는 에도막부 시대에 억울하게 죽은 주군을 위해 복수를 벌이는 사무라이들의 이야기를 다룬 '추신구라(忠臣藏)'와 18세기 초 오사카에서 실제로 일어난 남녀 동반 자살 사건을 극화한 '소네자키신주'가 꼽힌다. 가부키 배우들은 얼굴에 붉은색이나 푸른색의 줄을 그려 배역의 성격을 표현하는 '구마도리'라고 하는 아주 독특한 분장을 하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배우들은 가면을 쓰지 않으며 역사적 인물은 화려한 의상을, 일반인들은 평복을 입는다.
『국보』 상권에서 저자는 일본 야쿠자 가문에서 태어난 키쿠오가 아버지와 집안을 잃고 가부키로 일가를 이룬 탄바야 가문에 들어가 가부키 배우로서 성장하는 이야기를 중심적으로 다룬다. 저자는 소설 속 키쿠오의 삶을 통해 저자는 전통을 지키기 위해 매달리는 예술가들의 피와 땀, 그들의 정신을 다시금 세상 밖으로 이끌고 나온다. 춤이 좋아서 배우가 되었지만 키쿠오가 맞이하는 현실은 그리 녹록하지 않다.
막이 단숨에 걷히자, 불길한 태고 소리와는 정반대로 무대 위에는 큰 눈 속에서 어째서인지 벚꽃이 만개해 있었습니다. 중앙에 선 큰 벚나무, 천장에선 만개한 벚꽃 가지가 가득 매달려 있습니다. 그런 호화로운 무대를 보며 객석에서 탄식이 새어 나오고, 태고 소리가 더욱 높이 울려 퍼진 바로 그때, 거목 줄기에 걸려 있던 까만 천이 스르르 풀리면서 나무 안에서 유녀(遊女) 스미조메가 나타났습니다.
강한 조명 아래 드러난 것은, 연회색 옷감에 늘어진 벚꽃 가지 장식을 수놓은 복장의 유녀 스미조메. 츠부시시마다(つぶし島田: 에도시대 후기에 유행한 머리 모양-옮긴이) 스타일의 머리를 수많은 기생용 비녀로 꾸민 모습입니다. 예상치 못한 변주에 객석에선 파도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오고, 2대손 하나이 한지로도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호오. 세키노토인가?”
이것이 바로 가부키 무용극의 명작 〈쌓이는 사랑 눈 세키노토〉의 명장면으로, 무대 아래쪽에는 이야기꾼 역할을 맡은 게이샤들과 샤미센이 쭉 늘어서고, 큰 벚나무 옆에는 관문지기인 세키베이가 가만히 대기하고 있습니다.(p.23-24)

가부키는 과거 일본을 대표하는 문화였으나 사회가 변화함에 따라 영상 매체에 밀려 점차 소외되어 가는 ‘잊혀 가는 전통’일 뿐이라고 한다. 이를 반영하듯 가부키 연극을 공연할 극장도 전국에서 손에 꼽을 만큼 현저히 줄었다. 그러한 현실 속에서도 키쿠오는 가부키 배우로서의 자각을 잃지 않고 춤에 대한 열정을 계속 이어나간다. 지금은 잊혀 가는 무대이지만 반드시 크게 날아오를 날을 기다리면서 때를 기다린다.
1964년 새해 첫날, 나가사키에서 일본의 보배로 불리게 될 배우가 태어난다. 그의 이름은 타치바나 키쿠오. 야쿠자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듯한 아름다운 미모를 타고났다. 키쿠오가 열네 살이 되던 해, 정월 신년회에서 반대파의 습격으로 타치바나파의 수장인 타치바나 곤고로가 숨을 거둔다. 아버지를 잃은 데다가 집안마저 풍비박산되자 키쿠오는 복수를 다짐하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결국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 키쿠오는 간사이 지역 가부키 명문가의 당주인 2대손 하나이 한지로에게 거두어지면서 본격적으로 가부키 세계에 뛰어든다.
한지로의 제자로 입문한 키쿠오는 가문의 후계자로 점쳐지는 슌스케와 함께 엄격한 지도를 받으며 가부키 배우로서 성장해간다. 자라온 환경도 타고난 재능도 다르지만 둘도 없는 라이벌이자 친형제 같은 사이로 지내는 키쿠오와 슌스케. 어느덧 가문의 후계를 결정해야 할 순간이 다가오고, 고심 끝에 내린 한지로의 결정은 키쿠오와 슌스케의 운명을 송두리째 뒤바뀌게 한다. 후계를 두고 벌어진 얄궂은 운명 앞에서 갈등하는 키쿠오와 슌스케. 과연 그들에 찬란한 빛의 무대가 펼쳐질 수 있을까.
키쿠오와 슌스케는 친구이자 동료, 그리고 경쟁 대상이기도 하다. 갈등 구조가 형성된다. 소설의 갈등 이유를 눈치 챈 독자라면 이미 이 소설의 절반은 읽은 셈이다. 두 인물이 이 소설을 극적으로 끌고 가는 중심축이기 때문이다. 기득권과 도전자, 명예와 이름없는 인재의 발돋움, 경쟁하고 서로 다른 궤적을 그려나가는 요소가 제대로 배친된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일본 전통예술이라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인간 군상의 욕망과 상처, 빛과 그림자를 담은 거대한 서사를 풀어낸다.

이 소설은 상하 두 권으로 구성되었고, 「청춘」 별도 제목의 상권에서는 젊음, 성장, 타고난 재능이 발현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주인공 키쿠오의 과거, 그리고 그가 감당해야 할 폭력과 생존의 현실이 소설 초반 야쿠자인 아버지의 사건을 통해 드러난다. 이에 비해 키쿠오가 보내져 자란 곳의 두목 아들인 슌스케는 경쟁 상대이지만 자신이 먼저 출발선에 서 있다는 점을 의식한다. 이로써 불안정과 동시에 선천적 재능이 열리는 순간의 충격도 저자는 자세하게 대비시켜 담아 낸다. 이 두 인물은 단지 경쟁 구도만이 아니라 재능 대 혈통, 선택된 존재 대 선택된 자가 되기 위한 고군분투라는 테마로까지 확장된다.
가부키는 일본 문화이지만, 우리에게도 생각해볼 거리를 던진다. 저자는 가부키 무대와 춤, 음악 등에 대해 상세하게 다루면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일본 사회의 변화와 가부키 문화의 쇠퇴 등을 함께 소개한다. 컬러텔레비전 보급 이후, 과거와 다른 영상 매체의 파급력이 높아지면서 대중의 관심이 가부키 무대에서 영화나 드라마로 옮겨갔고, 그에 따라 ‘배우’의 연기와 역할도 변화를 맞이한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는 가부키 무대의 전통과는 분명한 간극이 있었고, 대중의 관심에서 멀어져 감에 따라 가부키 공연을 열 수 있는 극장이나 장소도 급격히 줄어들었다. 이러한 여파로 문화를 지키고자 하는 사명뿐 아니라 여기에 종사하는 모든 이의 생계마저 위협받는 상황에 직면한다.
저자는 소설을 통해 현대사회의 변화 속에서 ‘전통’의 가치가 무엇인지, ‘변화’와 ‘전통’은 양립할 수 없는 것인지, 문화를 소비하는 주체로서 대중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묻는다. 물론 이러한 질문에 우리가 쉽게 답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답을 찾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전통’이 지니는 가치는 사라지지 않으며 그것을 현재에 맞게 변용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국보』를 통해 ‘키쿠오’로 대변되는 전통 예술가의 삶과 일생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통은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이끌어낼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사실 이번 가나자와 영업 건을 미츠토모에게 전달받은 것이 사흘 전이었는데, 아무리 무대에 오르는 시간이 저녁이라고 해도 준비가 필요하니 미리 와 있고 싶다는 요청을 호텔비 절약의 이유로 들어주지 않았던 겁니다.
백호의 빚을 상속받을 때, 키쿠오 본인이 ‘뭐든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스케줄이 빌 때마다 지방 행사를 뛰게 하는 미츠토모 때문에 키쿠오보다 토쿠지의 속이 더 부글부글 끓었습니다.(p.300~301)
저자 : 요시다 슈이치(よしだ しゅういち, 吉田 修一)
1968년 나가사키 현 나가사키 시에서 태어나 호세이(法政)대학교 경영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하다 24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했고, 1997년 『최후의 아들』로 제84회 문학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화려하게 데뷔했다. 이후 2002년에 출간한 『파크 라이프』로 제127회 아쿠타가와 상을, 같은 해에 『퍼레이드』로 대중성 있는 신인작가에게 주는 야마모토 슈고로 상을 수상하며 대중성과 작품성을 두루 갖춘 작가로 급부상했다. 쉽게 읽히면서도, 가장 동시대적인 감수성을 포착해내는 그의 재능은 그가 대중문학과 순수문학 양쪽에서 동시에 인정받게 하는 힘이며, 그를 일본의 ‘팝 문학’이 도달한 하나의 정점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요시다 슈이치의 글은 도시의 일상과 인간에 대한 탁월한 묘사, 눈 앞에 영상을 보여주는 듯한 섬세한 문체 등 그만의 독자적인 세계를 형성하고 있으며, 쉽게 읽히면서도 동시대적인 감수성을 잘 포착해내고 있어 무라카미 하루키와 무라카미 류 등에 의해 발전한 일본의 '팝 문학'의 정점이라는 평을 받고 있다. 또한 대중문학을 대표하는 야마모토슈고로상과 순수문학을 대표하는 아쿠타가와상을 연달아 수상한 그는 새로운 순수문학의 형태를 창조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일본문단을 이끌어 갈 차세대 작가로 주목받고 있다.
나가사키의 과거와 현재를 한 야쿠자 집안의 흥망사에 비춰 그려내고 있는 『나가사키』는 작가의 고향 이야기를 담았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을 받았다. 한 편의 흑백영화를 볼 때처럼 애잔한 그리움과 함께 흐르는 시간 앞에 무력한 인간사의 비애가 가슴을 뭉클하게 적신다.
그의 작품 중 『퍼레이드』, 『악인』, 『요노스케 이야기』, 『분노』, 등은 영화화되었으며, 『동경만경』,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그 외 작품으로 『다리를 건너다』, 『사랑에 난폭』, 『원숭이와 게의 전쟁』,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랜드마크』, 『캐러멜 팝콘』, 아쿠타가와상 후보작으로 선정된 『파편』, 『돌풍』, 『열대어』를 비롯해 『랜드마크』, 『일요일들』, 『7월 24일 거리』, 『거짓말의 거짓말』, 『나가사키』, 『사랑을 말해줘』, 『사요나라 사요나라』, 『요노스케 이야기』, 『도시여행자』 등이 있다.
역자 : 김진환
단국대학교 일본어학과를 졸업하였으며, 현재 번역 에이전시 엔터스코리아에서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역서로는 『이브의 대관람차』, 『모성』, 『가장 아름다운 기억을 너에게 보낼게』,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붙잡힌 살인귀』, 『쓰쿠모 서점 지하에는 비밀의 바가 있다』, 『살인귀 1 (각성편)』, 『살인귀 2 (역습편)』, 『우리 집 더부살이가 세계를 장악하고 있다!』 1~9권, 『더 뉴 게이트』 1~7권, 『라이징X라이딘』 1~9권, 『신성한 늑대와 보이지 않는 손 1』, 『신식의 엑스마키나 1』, 『명옥의 알메인 2』, 『조디악 위치스 1』, 『PC엔진&PC-FX 퍼펙트 카탈로그』 외 다수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