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애 - 35살 세일러문
황승원 지음 / 바른북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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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사애』는 단편소설집이자 한국소설이다. 그러나 표제어 '사애(事愛)'는 일본식 한자 표기인 듯하다. 무슨 뜻인지 대한민국에서는 쓰이지 않는 단어인데... 무슨 뜻일까 궁금했다. 다행히 표지에는 한글로 '사애'란 표제어 옆에 한자 '事愛'라고 표기돼 있어 일본에서 쓰는 말로 짐작했다. 당연히 국어사전에는 없는 표기이고 일본어를 모르는 독자로서는 일본어사전을 찾는 일도 한 번도 경험한 적 없어 어렵기만 했다. 할 수 없이 인터넷을 이용해 한자를 표기하고 일본어사전을 클릭했더니 '사(事)'와 ''애(愛)'의 뜻이 각각 표기돼 있었다. 다시 말해 일본에서도 흔히 쓰이지 않는 단어란 뜻으로 이해된다. 독자는 일본어를 모를 뿐 아니라 일본에 가본 적도 없어 알 수 없기 때문에 책의 내용이나 단편소설의 제목으로 쓰였나 살폈으나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 일본어사전에서 찾은 사(事)와 애(愛)의 표기를 합쳐 독자만의 뜻풀이를 하고 읽기로 한다. 한자어에서는 '事'는 '일 사'로 음과 훈을 읽는다. 즉 '일(work)'을 뜻하는 事, 사랑을 뜻하는 '愛'를 합쳐 '사랑하는 일'로 해석한다면 어딘지 어색하다. '일을 사랑한다(좋아한다)'는 표현은 맞지만 '사랑하는 일'이란 우리말로 풀이하면 어색하기 그지없다. 잘 안 쓰는 말이기 때문이다. 다행히 '일 사(事)'가 일뿐만 아니라 '섬기다'는 뜻이 있다고 배운 기억이 있다. 이를 테면 조선시대 때 '사대(事大)'를 국시로 내세웠다. '事'가 '섬기다'는 뜻을 갖고 있다는 점을 역사에서 배운 것 같다. '사대주의'란 말 말이다. '큰 것' 즉, 중국을 섬긴다는 의미라고 배운 기억이 독자의 머릿속에 남아 있다. 조선이 사대주의를 내세운 것은 고려말 고구려 옛 땅을 수복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여진족이 차지하고 있던 요동 정벌을 위해 군대를 일으켰지만, 이성계가 위화도에서 회군해 고려를 무력으로 제압하고 결국 조선을 세웠다는 우리 역사의 한 부분이다. 새로 나라를 세운 조선으로서는 당시 중국에서 새로 일어난 명(明)의 위세가 대단해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군사를 일으킨 고려를 조선이 제압한 것으로 조선을 인정해 줄 것을 바라는 전략으로 삼았다. 

아무튼 이 책 『사애』의 성격으로 보아 일을 좋아한다든지, 사랑한다든지, 아니면 하고 싶다든지로 읽으면 될 것 같다. 저자 황승원은 부제 「35살 세일러문」을 붙였다. 저자 자신의 나이를 뜻하는 것으로 봐도 무방할 제목이다. 다만 저자는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한국에서 일을 하기 위해 취업을 하려 했으나 일본에서 경제학을 전공했다는 이유로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아 많은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는 서술이 있는 것으로 보아 표제어 '사애'의 뜻을 추정하기엔 무리가 없을 것 같다.


특히 부제에 쓰인 '세일러문'은 일본에서 오랫동안 시리즈로 방영된 애니메이션인 것으로 기억된다. 독자는 만화영화나 애니메이션 영화에 별 관심이 없지만 '세일러문'이란 제목은 들어본 기억이 있다. 별 수 없이 인터넷 사전을 찾아보니 비교적 자세히 설명이 나온다. 이에 따르면 다케우치 나오코(武內直子)의 원작 만화를 1992년부터 1996년까지 도에이 동화와 아사히 TV에서 200편의 텔레비전 애니메이션영화 시리즈로 제작했다. 1992년에는 46회의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1993년에는 43회의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R〉, 1994년에는 38회의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S〉, 1995년에는 39회의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SS〉, 1996년에는 34회의 〈미소녀전사 세일러문 스타스(Stars)〉로 제작되는 등 1년 단위로 새로운 시리즈를 제작해 5년간 인기를 끌었던 작품이다. 한국에서는 〈달의 요정 세일러문〉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되었으며, 200편 중 33편이 심의 등의 이유로 방영되지 못했다고 덧붙이고 있다.

내용도 간단히 언급되고 있는데, 평범해 보이는 소녀들이 세일러 요정들이 되면서 정체 불명의 조직으로부터 지구를 지킨다는 이야기라고 한다. 이 작품은 다양한 연령층이 좋아할 수 있도록 이질적인 요소들을 하나로 조화시켜서 일본은 물론 한국 내에서도 큰 인기를 끌었다고 기술돼 있다.

이 책에는 『사애』라는 중편 길이의 소설과 어렸을 때의 기억, 성장 과정, 일본 유학, 귀국 후 취업 등의 생활을 적은 여행기와 취업 수기 등의 형식의 에세이가 여러 편 책 뒷 부분에 실려 있다. 대부분 일본 유학기의 단상(斷想)이어서 얼핏 일본 문화 여행기로 읽어도 될 정도로 일본에서의 생활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이 내용은 소설이 아니고 에세이 형식으로 자신의 경험과 느낌을 적은 것이다. 앞 부분의 소설 『사애』는 자신의 성장 과정을 포함한 자신의 경험 등을 섞어 쓴 듯한 중편 분량의 소설이지만 소제목을 많이 둠으로써 장면 장면을 쪼개고 있다. 결국은 중학교 짝이자 '별로 친하지 않은' 친구 사이인 현명과 아인의 사랑(?)을 줄거리로 갖고 있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성일중학교에는 2학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이 소설 작품의 첫 문장이다. 극히 평범하다. 「판치기와 마젤란」이란 연결이 안 되는 두 단어가 어깨를 나란히 하고 뭔가를 암시하고 있을 뿐이다. 첫 문장은 무대가 중학교이고 가을로 접어든 때라는 것을 알리고 있다. 어느 학교든지 중학생들이 모이면 장난이 심해지고, 또 교칙에 어긋난 행동을 하는 학생들의 움직임이 시작된다. 요즘 말로 하면 '일진'이나 '폭력 서클'이 되겠지만, 중학교이니만큼 그 정도의 조직적 불량아들은 아닌 듯하다. 흔히 그 나이에 교칙에 어긋난 것이라면 동전치기 등 일종의 가벼운 도박 같은 것을 하는 애들이 점심시간을 전후해 활동한다. 

"교실에는 5명의 남학생이 책상 하나를 둘러싸고 있다. 합의를 마친 학생들은 500원 동전을 꺼내 '몸잨'이라고 쓰여진 이미 꼬질꼬질하고 누더기가 된 교과서에 올려놓는다. 표지만 그렇지 속지는 아주 깨끗한 교과서다. 동전 5개를 일렬로 맞추고는 가위바위보를 통해 순서를 정한다. 남학생들은 판치기 판을 벌렸다.

이른바 판치기 500원빵!

교과서 위에 동전을 일렬로 맞추고서 교과서를 손바닥으로 내리쳐 모든 동전을 반대 면으로 일치시키면 승리하여 돈을 따내는 게임을 시작했다. 가위바위보를 하여 순서가 정해진 순번대로 게임을 시작한다. 첫 번째 학생은 한 번으로 동전을 넘겨 이겨볼 심산으로 교과서를 내리쳤다. 5개의 동전 중 4개는 앞면인 학의 반대면으로 넘어갔지만, 1개의 동전이 숫자 500이 쓰여진 뒷면 그대로 있었다. 한 번에 다 넘어갔으면 하는 아쉬움만 남았다. 2번째 학생은 1개의 동전을 넘기기 위해 손가락을 이용해 보기로 한다. 오른쪽 3번째 손가락을 왼손으로 이용해 뒤로 가능할 만큼 당기고 그 힘을 이용해서 넘겨보려고 했다. 하지만 손가락 하나는 500원의 무게를 넘길 수가 없었다. 100원은 가능했지만 500원은 안 된다는 사실에 절망하고 만다. (중략) 이 게임은 4번째 학생이 이겨 기뻐하며 돈을 회수할 찰나, 교과서를 건드리지도 못했던 5번째 학생은 억울했던지, 2,500원을 손에 쥐고 교실을 나와 복도를 질주하며 도망치기 시작한다."(p.9~10)


이 소설의 주인공인 이아인과 박현명이 뒤이어 등장한다. 여학생과 남학생이다. 같은 반이 두 학생은 가을학기가 시작한 3학년 5반 담임인 '은지'의 새로운 분위기로 시작하고픈 의지에 따라서다. 1학기에 남녀 합반 교실을 남자 짝, 여자 짝으로 만들었는데 2학기는 남녀 짝으로 바꾸려 하려는 것이다. 저자는 이아인이란 여학생에 대해 캐릭터 설명을 한다. 공부도 잘하고 다른 학생에게도 친절하며 모범이 되는 아이다. 이과 계열 성적이 월등했다. 꿈을 일찌감치 의사나 약사가 될 것이라고 정해놓은 아이였다. 그래서 고등학교의 진학도 특목고나 명문고 진학을 목표로 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도 아인이 같은 아이의 진학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다. 특목고, 명문고에 진학한 학생들의 숫자가 학교의 명예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은지는 이 남녀 합반의 교실에서 남녀 짝을 만들어 둔 것이 아인이에게 나쁜 영향이 있을까 생각해 본다. 어느 반이나 문제가 되는 남학생들이 있어 선생인 자신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지만, 이번 연도에 담당한 자신의 반의 남학생들은 대부분 온순한 남학생들이란 판단이다. 

여학생들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 상자에 넣고, 남학생들에게 자신이 될 짝을 선택하게 하는 방법의 '복불복' 제비뽑기로 결정했다. 아인이의 짝이 된 학생이 박현명이다. 그는 부모가 없이 할머니 손에서 자라고 있는 학생이었다. 6개월 전 신학기가 시작될 무렵 은지는 현명의 할머니를 만나게 되어 현명에 대해 들었다. 현명의 부친은 현명이가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 일하던 중 산업재해로 인해 사망했고, 남편의 사망에 충격을 받는 모친은 실성해서 정신병원에 있다고 듣게 되었다. 은지는 참 난감했다. 부모가 없는 학생을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윤정(은지의 동료 교사로서 문제아가 있는 학급의 담임) 선생이 시도 때도 없이 경찰서에 가고 있는 것은 그 남학생도 아빠가 없는 한부모가정 학생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평소 말도 없고, 시키는 것도 특별히 문제없이 해오기 때문에 문제아로 생각지는 않았다. 현명의 성적은 50명의 학생 중 20~30등. 한편으론 걱정 되지만 다른 한편으론 고등학교 진학이 가능한 정도의 아이라고 내심 배라고 있는 터라 믿고 결정했다. 현명에게 아인이 찾아왔다.

"현명아 안녕,"

아인은 현명에게 특유의 미소를 지어준다. 그리고 의자에 앉은 아인은 필통에서 매직을 꺼내 2인용 나무 책상의 절반 지점에 선을 긋는다.


둘은 짝이 되긴 했지만 실제로 현명과 아인은 그렇게 친하지 않았다. 친한 사이가 되기에는 아인은 이래저래 바쁜 아이였다. 고교 진학으로 바쁜 아인은 현명이에게 살갑게 대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현명이가 그린 아인이에게 친하게 지내자고 하거나, 곰살궂게 대하는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여 그냥 데면데면한 사이로 지내왔다. 그러다 둘이 우연히 길에서 만나 둘은 인근 낚시터로 간다. 현명이 낚시하러 가는 날 학원에 가기 싫어 길을 산책하듯 돌아다니다 아인을 만나 함께 낚시터로 가게 된다. 그러다 미끼를 물지 않아 낚시에 집중하기 힘들어진 현명은 양팔을 뒤로하여 상체를 지탱하는 자세로 쉬고 있었다. 잠깐 이러고 있을 생각이었는데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른 아인이 잠결에 현명의 팔을 잡아당겨서 베고 자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라 둘 사이는 헤프닝으로 끝난다. 다만 아인이 겸연쩍어 "잘 때 세일러문 인형을 껴안고 자는데 잠결에 팔을 끌고 잤나 봐" 하며 둘러댄다. 이날의 우연은 후일 두 사람의 관계에 결정적인 에피소드로 소설이 이어진다.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하고 헤어진 후 두 사람은 출판사에서 해후한다. 출판사 사장 영미의 지시로 두 사람은 독일 출장의 기회를 갖게 되고, 독일에서 두 사람은 육체 관계를 맺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이후 둘은 육체를 맞대고 모텔을 스스럼없이 다닐 정도로 친해진다. 

이후 두 사람은 갈등도 겪고 둘이 결혼식 없이 함께 살기로 약속하며 관계를 지속한다. 이후 스토리는 여기에 계속 쓸 수는 없지만 대신 제목을 열거해 어떤 스토리가 지속될지 독자들로부터 가늠케 함을 양해 바란다. 「송골매는 어쩌다 마주친 그대를 불렀다지만」「니가 왜 거기서 나와?」「선은 네가 그어놓고?」「발랄하고 기운 찬 대단한 할머니」「정말 가야 하나요?」「바쿠스 님 좀 쉬세요, 네?」「장광철」「슈바빙의 고독했던 영혼」「이두근, 담두근, 전완근」「Funky Tonight」「풋풋, 성숙, 우아, 관록」「35살 세일러문의 마술 지팡이」


저자 : 황승원


한국의 세르반테스이자 샤를 보들레르.

24살에 일본으로 가출했고 일본에서 대학생활을 시작했다. 그 시절에 시작된 일본유학생 30만 명 정책에 의해 장학생이 되어 지적노동을 강요당했다. 일본생활은 세르반테스가 해적에게 잡혀 5년간 알제리에서 한 노예생활과 다를 바 없었다. 대학 졸업 후 한국에 돌아왔으나 취업이라는 제도권으로 진입이 안 되어 홀로 수행했다. 방황학, 방랑학, 기행(奇行)학을 각각 4년씩 거쳐왔다. 하지만 지금도 방황이, 방랑이, 기행이 무엇인지 모른다…. 방황학에 12년 몰빵했으면 방황이 무언지 알게 되었을까? 호기심만 많아 시작만, 벌이는 것만 많지 무엇 하나 제대로 끝내는 것이 없다…. 다만, 인생은 주어진 기간 동안 살아가는 것인가, 인생과 투쟁하여 살아내는 것인가 증명해 내고 싶은 사람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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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집과 꿀
폴 윤 지음, 서제인 옮김 / 엘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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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는 이 책 『벌집과 꿀』을 통해 폴 윤이라는 작가를 처음 접한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라는 역사 속 아픈 기억을 되살려낸 작품이라고 해서 독서욕이 타올랐다.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그린 작품 중 이민진 작가의 『파친코』를 읽고 감동이 컸었다는 것도 기억해 냈다. 역사에 외면당한 재일조선인 가족의 대서사극을 그렸다는 『파친코』에 대한 강렬한 인상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또 김주혜 작가의 『작은 땅의 야수들』도 독자로서는 차라리 충격이었다. 독자의 독서의 폭은 지금까지 일제 강점기의 어두운 면과 핍박받는 현실을 그린 작품을 주로 봤는데 그 엄혹한 시절에도 한국인의 가슴에는 증오보다는 사랑이 더 많이 남아 있었고, 결국 그 힘이 우리의 해방을 맞이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감동적이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유로 한반도의 가장 어두운 시기인 20세기의 비극적인 현실을 묘사한 많은 작품 중에서도 최근 나온 이 소설들은 독자의 가슴을 더 찡하게 했다. 물론 일제 강점기 때 우리 조상들이 얼마나 핍박을 받았는지 생각하면 아직도 그 분이 풀어지지 않아 일본에 대한 증오심은 독자에게는 그대로 남아 있다. 

이 책을 읽기 전 출판사 측에서 소개한 글에서 김소연 시인이 추천했다는 점을 알았다. 그의 추천사는 독자의 가슴을 뛰게 했다. "소설이 누군가를 살릴 수 있다는, 내게서 잊힌 지 오래된 믿음을 폴 윤은 되살려놓았다. 장면을 살려내는 것으로써. 오직 그려냄으로써. 그것에만 몰두함으로써. 폴 윤이 그린 이미지 너머에는 너무 먼 곳과 너무 오래된 이야기가 낭떠러지 아래의 드넓은 해안처럼 펼쳐져 있다. 자그마한 구슬처럼 둥글게 마모된 영롱한 조각을 해안에서 주워 들고서 본래의 모습을 그려보듯, 폴 윤의 인물들 곁에 나는 서 있다. 무사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무사하다고밖에는 말할 방법이 없는, 아주 오래된 안부들. 포말 속에서 하얀 거품처럼 생겨났다 사라지는 안부들. 어떤 안부는 이런 방식으로만 가 닿을 수 있다. 안부가 닿자, 떠밀려온 해안에서 누군가 몸을 일으켜 다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설레는 마음으로 한 분의 추천사를 더 읽었다. 퓰리처상 수상자, 『트러스트』 작가인 에르난 디아스는 "폴 윤은 감정에서 깊이를 끌어내는 데 대가일 뿐만 아니라,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문제들에서 시간을 초월하는 보편적 핵심을 뛰어나게 포착한다."고 썼다.


저자 폴 윤은 에르난 디아스, 앤 패칫 등 동시대 세계적인 작가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은 한국계 미국인 소설가로 소개되어 있다. 책을 받아보니 영어로 쓴 소설이었다. 번역자 서제인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처음 생각에는 폴 윤이라는 이름을 보고 '윤'씨 성을 가진 미국 이민 2세쯤으로 생각했지만 번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분명 미국에서 나고 자란 분이라고 추정할 수 있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일제 강점기 우리의 디아스포라를 자세히 알고 소설 작품으로 빚어냈을까 싶다. 아름답게 형상화된 부분은 번역의 솜씨일 수도 있다고 생각되지만 소재나 주제(단편집이라 각 작품의 주제는 다소 다르지만)를 명확하게 짚어내고 작품으로 형상화했을까 싶은 마음은 소설을 다 읽고도 가슴속엔 의문으로 남아 있다.

이 소설집에는 모두 7편의 단편소설이 수록돼 있다. 막 출소해서 낯선 동네에 자리를 잡으려는 청년, 탈북한 뒤 스페인에서 청소 일을 하는 나이 든 여자,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 길을 호위하는 사무라이, 탈북한 한국인의 2세로 런던에서 살아가는 부부, 러시아 극동 지방의 척박한 고려인 이주지에 임관한 장교, 사할린섬의 교도소에서 일하는 고려인 아버지를 찾으러 나서는 십 대 소년, 한국전쟁이 남긴 상흔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온 남자 등을 통해 20세기 한국의 디아스포라를 형상화해냈다. 

저자 폴 윤은 이 소설집을 통해 실로 광막한 시간과 공간 속에 흩뿌려진 한국인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들을 생생한 역사적 사실과 상상력으로 빚어 시적인 글로 담아냈다. 집을 떠나고 집을 갈망하고 때로는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는 이 인물들은 하나같이 쓸쓸한 비애를 담고 있지만 그 비애는 문득 부드럽고 환한 빛이 되기도 한다. 역사의 상흔, 어딘가에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좌절의 쓰라림을 섬세하고 절제된 문장으로 그려낸 이 소설집은 “디아스포라 문학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는 평을 받고 미국 문단에서 뜨거운 주목을 받는 작가로 떠올랐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소설집 『벌집과 꿀』은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상황에 놓인 한국계 디아스포라들을 비춘다.


일제 강점기 전후로 우리 조상들이 겪었던 전쟁, 탈북, 강제 이주 등 역사의 아픔을 개인의 삶으로 떠안은 인물들을 그렸다. 상실감과 비애를 그림자처럼 품고 낯선 곳으로 떠난 그들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러저리 흘러 다닌다. 아니 떠밀려 다닌다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냉전 시대에 탈북해 남한으로, 독일로, 스페인으로 혈혈단신 떠돌아온 장년 여성(「코마로프」)이나 미국으로 이민 와 교도소로, 낯선 도시로 옮겨 다니는 젊은 남자(「보선」)가 직접적인 경우라면, 종전 후 외진 산골 고향에 돌아와 은둔하듯 살아가는 남자(「달의 골짜기」)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지만 그의 고립은 여전히 세상 속에 그의 자리가 없다는 느낌이 들게 한다.

목격자의 시선으로 이들의 떠돎을 지켜보는 이야기도 있다. 조선 침략의 와중에 아기 때 붙잡혀 온 조선인 고아 소년의 고국 송환 길을 함께하는 사무라이(「역참에서」)는 뿌리가 뽑힌 채 떠도는 아이의 처지를 자신의 삶과 함께 헤아리고, 19세기 말 연해주에 임관한 러시아인 장교(「벌집과 꿀」)는 낯선 땅에 낯선 이들과 함께하게 된 자신의 신세를 곱씹으며 이국에 집을 지으려는 이들의 몸부림을 기묘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문자 그대로의 디아스포라는 아니더라도 여전히 이주의 여파 속에 살아가는 이들도 있다. 탈북해 영국 땅에 자리 잡은 부모를 둔 한인 2세 부부(「크로머」)나, 강제징용으로 사할린섬에 끌려온 할아버지를 둔 조선인 3세인 10대 소년(「고려인」)은 그곳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여전히 이방인으로 혹은 집 없는 이가 되어 지리적으로, 심리적으로 막연히 어딘가를 떠돈다.

집이 되어주어야 할, 가족이 되어주어야 할 무언가와 연결이 끊긴 이들을 담아내는 저자의 글은 한없이 세심하면서도 시처럼 간결하고 응축적이기도 하다. 저자는 어떤 사건보다는 막연한 예감, 격렬한 감정보다는 희미한 느낌을 정밀하게 포착하는 재주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에서 “평범함과 평범함에서 벗어난 것들을 주의 깊게 뒤섞는 단순하지만 인상적인 언어. 삶의 잔혹하면서도 아름다운 순간들을 우아하게 탐구하는 소설.”라는 한 줄 평을 낸 것도 이해된다. 저자의 글은 인물들의 슬픔과 비애가 지닌 깊이와, 삶에서 문득문득 드러나는 진실들을 정확히 가늠해 드러낸다. 이 시적인 문장들은 인물들의 내면과 감정의 결을 밀도 높게 묘사하는 동시에 다양한 역사적 배경 역시 얼버무리는 법 없이 그 세부를 능숙하게 다뤄 이야기에 깊이를 더한다.


이 소설집에서 등장 인물들은 짧은 여행이든 긴 이주든 어딘가로 계속 떠난다. 자리를 잃었기에,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기에, 그들은 자꾸만 떠나고 어딘가에서 또 다른 삶을 지을 수 있기를 갈망한다. 집이었던 것에 대한 그리움, 새로운 집을 찾길 바라는 갈망, 이 동전의 양면 같은 허기는 이들에게 떠남이 곧 돌아옴이기도 하다는 걸 말해준다. 집을 떠나고, 그리하여 집이 될 어딘가로 끊임없이 돌아가는 것. 떠나는 자들에게 깊숙이 새겨진 이 갈망은 진정한 집이 생길 때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와 같은 오랜 지속과 기다림에는 슬픔과 외로움이 깃든다.

그러나 이 책의 인물들이 홀로 외롭게 버티고 있는 것만은 아니다. 일곱 편의 이야기에는 짧은 순간이라도 집이 되어주는 이들과 서로 연결되는 관계들이 나온다. 이방인이거나 자기 땅에서도 이방인처럼 살아가는 인물들에게도 신기하도록 아무렇지 않게 곁을 내주고 마음을 써주는 이들이 어디에나 있다. 생면부지의 타인을 돌보는 일을 소설의 인물들은 그저 자연스럽게, 그게 당연하지 않으냐는 듯이 해낸다. 그걸로 타인의 삶을 구원할 수는 없지만 한 번의 친절, 순간의 유대감이 누군가에게는 집이 되어주기도 한다. 한국인의 정과 사랑이 오롯이 전해져 온다. 또 슬픔은 은근하고 끝내 참아내고 즐거움은 함께 나누고픈 한국인의 정서가 짙게 배어나온 덕에 이 소설집에 더 큰 정감이 간다. 

등장 인물들은 그렇게 또 어떤 시간들을 견뎌낼 수도 있다. 그들은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그럼에도 내일이 있다. 그보다 더한 일들에서도 그들은 살아남았다. 달처럼 “뜨고, 기울고, 부서지고는” “스스로를 다시 만들어내”면서 살아왔다. 내일이라는 어떤 희망을 가져봐도 좋은 것이다. 물론 장소로부터, 사람으로부터 단절되었다는 쓰라림은 영영 떠나지 않는다. 그래도 “또 다른 삶을 짓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들”을 찾아내며 삶을 지속하는 이 인물들은 황량한 삶에도 빛과 온기가 깃들 자리가 있음을, 그 자리가 때로는 희망보다 크기도 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이 책을 옮긴 역자 서제인은 "이 책의 원고를 받아 처음으로 읽었던 날이 기억난다. 그다지 길지 않은 소설집이었는데 읽는 동안 여러 번 한숨을 쉬어야 했다. 이 작가는 문장으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 같았고, 이 책을 번역하는 건 문학보다는 미술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 될 것 같았다. 작품에서 느껴지는 아름다움만큼 걱정이 됐다."고 〈옮긴이의 말〉에 썼다. 또 역자는 "속할 수 있는 장소를 갖지 못한 채 부유하는 사람에게는 세계 어느 곳에서의 경험이든 근본적으로 비슷한 것이 된다. 그것은 어느 방향을 봐도 같은 풍경만 보이는 들판 한가운데를 걷는 듯한 삶이다."고 감정이입의 소감을 밝히고 있다. 역자는 이 소설집에서 저자가 이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것-자신이 있을 수 있었던 곳으로부터 떨어져 나왔다는 단절의 느낌과 자신이 앞으로 있게 될지도 모르는 곳에서 마음 깊이 퍼져오는 부드러운 연결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폴 윤의 소설을 읽다가 문득 견딜 수 없는 기분이 된다면, 누구에게라도 말을 걸어 이 느낌을 전하고 싶어진다면, 아마도 당신 역시 조금은 길 잃은 사람일 것이다. 바닥에 발이 닿지 않는 물속을 한없이 떠가는 것 같은 불확실함 속에서도 우리가 가끔씩은 서로에게 집이 되어주고, 타인을 위해 이토록 성실하게 길을 만들어줌으로써 허무에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그건 어떤 의지나 결단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짐승이 새끼를 돌보듯 그저 자연스럽고 보편적인 우리의 본능이라는 것을, 작가는 다채롭고도 능숙한 솜씨로 보여준다. 『벌집과 꿀』은 한 사람의 마음속 빈 곳이 어떻게 위안을 주는 풍경을 빚어내는 거푸집이 될 수 있는지, 그 굴곡마다 들어찬 갈망이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얼마나 놀라운 건축을 해낼 수 있는지 증명해주는 텍스트다.”(p.297~298) 


저자 : 폴 윤


소설가. 이주민 가정에서 성장한 체험을 바탕으로 정체성과 갈망, 시간과 역사 속에 놓인 인간이라는 문제를 독특하고 고요한 서정으로 그려낸다. 2009년에 첫 책인 소설집 『Once the Shore』로 전미도서재단에서 선정하는 ‘35세 이하 작가 5인’에 선정되었으며 [뉴욕 타임스] ‘주목할 만한 책’으로 꼽혔다. 첫 장편소설 『스노우 헌터스』(2013)로 뉴욕 공공도서관 영 라이언스 픽션 어워드를 수상했다. 소설집 『The Mountain』(2017)은 NPR을 비롯한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으며, 장편소설 『Run Me to Earth』(2020)는 앤드루 카네기 메달 소설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 2023년에 출간된 소설집 『벌집과 꿀』은 스토리상을 수상하고 조이스 캐럴 오츠 문학상 후보에 올랐으며, 그해 [타임] ‘올해 최고의 책 10’에 선정된 것을 비롯해 [뉴요커] 등 유수의 매체들에서 ‘올해의 책’으로 꼽혔다.

『벌집과 꿀』은 러시아 극동 지방, 스페인, 에도시대 일본, 영국 런던, 미국 뉴욕 등 광막한 시공간으로 흩어진 한국계 디아스포라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뿌리와 정체성, 개인에게 날카롭게 새겨진 역사의 상흔, 외로움과 갈망, 연결되고 싶은 마음과 좌절의 아픔을 섬세하고 부드러운 문장으로 묘사해낸다. 이 책은 많은 독자들과 비평가들로부터 호평받았을 뿐 아니라 에르난 디아스, 앤 패칫 등 세계적인 작가들로부터도 극찬받았다.


역자 : 서제인


기자, 편집자, 작가 등 글을 다루는 다양한 일을 하다가 번역을 시작했다. 거대하고 유기체적인 악기를 조율하는 일을 닮은 번역 작업에 매력을 느낀다. 옮긴 책으로 『목구멍 속의 유령』, 『사람들은 죽은 유대인을 사랑한다』, 『300개의 단상』, 토베 디틀레우센 〈코펜하겐 3부작〉, 『아무도 지켜보지 않지만 모두가 공연을 한다』, 『아파트먼트』, 『노마드랜드』, 『잃어버린 단어들의 사전』 등이 있고, 함께 옮긴 책으로 〈로버트 A. 하인라인 중단편 전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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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본색 - 가려진 진실, 드러난 욕망
양상우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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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2025년 6월 대한민국의 새 대통령이 선출되고 새 정부가 탄생했다. 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넉넉한 차이로 새 대통령으로 당선돼 대한민국을 책임 지고 번영으로 이끌겠다고 장담하며 새롭게 출범했다. 위헌·불법 비상계엄령으로 탄핵된 윤석열 정부는 내란 혐의로 재판정에 서 있다. 새 정부는 비상계엄으로 인한 떨어진 국격과 어려운 민생 회복을 위해 혼신의 힘을 쏟는 모양새다. 인수위원회도 없이 바로 출범한 새 정부는 아직 정상적으로 모양을 갖추지 못했지만 국민의 지지도는 여전하다. 전 정부에서 넘겨준 것이라고는 무덤처럼 텅 빈 대통령실과 파탄 일보 직전의 민생뿐이다. 더욱이 내란 세력 척결이라는 국민들이 바라는 또 하나의 축은 특검에 맡기고 새 대통령은 조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오늘까지 실시되고 있는 국무총리 인준 청문회도 난항을 거듭하고 있다. 오늘의 비상 시국은 '검찰 공화국'으로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른 윤석열 대통령이 자초한 것이지만 거기에다 권력자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는 검찰 문화도 한몫을 했다고 많은 시사평론가들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 

갑자기 선포된 비상계엄, 대통령 탄핵, 대선 선거... 지난 6개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초긴장 상태로 이어져 왔다. 한 집 건너 자영업이 폐업하는 현실에서 민생이 너무 어렵다는 한탄의 목소리가 아우성이다. 혼란한 시국에서 언론도 개혁 대상이라는 말은 오히려 쏙 들어간 형국이다. 내란 척결도, 검찰 개혁도 이뤄야 할 과업이지만 언론은 훨씬 전부터 개혁의 대상으로 떠올랐었다. 그동안 언론 개혁을 시도하는 권력자는 더러 있었지만 어떤 정부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만큼 언론의 성벽이 견고하다는 뜻일 것이다. 이 책 『언론본색』은 언론에 대한 신뢰가 크게 추락한 지금, 언론의 본질을 처음부터 다시 묻기 위해 출간됐다. 일선 기자와 언론사 CEO, 미디어 경제학자를 두루 경험한 저자 양상우가 경험과 학문적 통찰을 바탕으로, 언론의 민낯을 살피며 언론은 왜 나아지지 않는지 진지하게 성찰한다. 언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해서다. 선거를 앞두고 펴낸 것으로 보아 새 정부에게 언론 개혁의 방향을 제시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생각도 든다.


저자는 “언론인들은 ‘언론이 전하는 진실’에 관해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잘 모른다’는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다”고 선언한다. 또한 “사람들이 말로는 언론을 향해 ‘진실’을 요구하지만, 실제로는 ‘내 생각과 같은 뉴스’를 기대하는 것이고 언론은 이를 의식하며 뉴스를 내놓는다”고 언론 소비자들에게도 일침을 가한다. 언론은 ‘진실의 등대’보다는 ‘인간 욕망의 거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고 저자는 언론 개혁의 이유와 함께할 대상으로 '양비론'을 꺼내든다.

저자는 한국의 언론이 뒷걸음만 쳐온 이유에 대해 “이상만을 앞세울 뿐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진실과 거짓, 언론의 빛과 그림자」란 제목의 〈서문〉을 통해 지적한다. 저자는 지금 필요한 것은 ‘언론의 이념’이 아니라 ‘언론의 본성과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란 말이다. 〈서문〉에 따르면 언론에 대한 비판을 쏟아내고 불만을 토로하는 사람들이 갈수록 많아진다. 언론의 부조리를 개선하려는 노력이 수십 년 넘게 반복되고 있지만, 모두 부질없는 일이었다. 나아지기는커녕 되레 더 나빠지고 있다고 느끼는 이들이 적지 않다. 쉽게 꼽을 수 있는 이유는 언론 자신에 있다. 부조리한 행태에 대한 수많은 비판에도, 당사자인 언론이나 언론인들이 반성하고 있다는 낌새조차 느끼기 어렵다는 게 우선적 이유다. 다른 이유도 있다. 일반인이나 언론인 모두, 한국 언론의 '환부(患部)'를 열어 언론의 병증을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대신 덮어놓고 비판만 해왔다. 그러다 지쳐 체념해 왔다. 어제나 오늘이나 이같은 현상이 되풀이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책에 따르면 언론의 본질은 고정돼 있지만, 기술-경제 환경은 끊임없이 변했고, 이로 인해 저널리즘은 형태와 내용이 변해왔다. 정파성과 관련해선, “언론의 정파성은 인간과 사회, 그리고 그 속에서 태어난 언론의 본성”이나, “언론의 품질은 언론이 지닌 정파성과는 별개”이며, “정파적이라도 고품질 언론이 있을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뉴욕 타임스』와 『워싱턴 포스트』처럼, 분명한 정파성을 지니면서도 품질 높은 저널리즘으로 신뢰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가 참고해야 할 길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의 중요한 통찰 중 하나는 언론의 문제를 언론의 문제로만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언론의 시작과 끝에는 언론을 소비하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렇게 주문한다. “스스로를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언론의 본성을 깊이 이해하며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시민들이 늘어나는 일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한다.” “언론의 품질은 궁극적으로 언론 소비자가 얼마나 현명한지에 달려 있다.” 진실에 다가가려는 노력, 편향을 감수하더라도 품질을 중시하는 태도, 이견에 귀 기울이는 자세만이 언론 환경을 바꿀 수 있다는 주장이다.

언론의 자유가 미국에서 시작됐다는 의미에서 저자는 미국의 언론에서 지도자들의 언론에 대한 발언을 인용한다. 대표적 인물로 근대 언론의 싹을 띄운 제퍼슨과 알렉시 드 토크빌이다. 제퍼슨은 "우리의 자유는 언론의 자유 없이 지켜질 수 없다"는 금언을 남겼고, 토크빌은 "폭정을 막는 길은 (언론의) 무한한 자유"라고 외쳤다. 특히 제퍼슨의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고 한 말은 언론이 민주주의의 수호자임을 웅변한 명언으로 숱하게 인용되었다. 

그러나 언론 자유에 관한 주옥 같은 어록을 남긴 그들조차 언론의 부조리하고 잔인한 모습에 극도로 실망했다는 사실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고 저자는 언급한다. 제퍼슨은 언론에 대한 환멸과 개탄을 쏟아내면서 "늑대가 어린 양의 피 앞에서 그러듯, 신문들은 (보도로 인한) 희생자들의 고통에 굶주려 있다"고 비난했다. 또 토크빌은 언론의 자유를 털끝만큼도 제한하지 말라고 주장한 인물인데, 그조차도 '악한 언론'에 대한 비판은 듣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지적했다. "(언론은) 대부분 증오와 시기심에 사로잡혀 있고, 이성적이기보다는 격정적으로 말하며, 거짓과 진실을 함께 퍼뜨린다"고 안타까워하기도 했다. 토크빌은 결국 언론은 선과 악의 본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결론지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후에도 언론의 역기능과 한계에 대해 비판은 무수히 이어졌다고 밝히며, 저자는 20세기 최고의 미국 언론인으로 지목되는 월터 리프먼의 경우도 소개한다. "신문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대중을 설득한다는 것은 다른 의미로는 사악한 것이며 악의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특히 리프먼은 "언론에 의한 민주주의는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으며, 미래에도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저자는 밝힌다.



이같은 언론관의 변화를 지금 우리 시점으로 돌아오면 어떤가? 저자는 의문을 품고 "우리가 날마다 경험하는 언론은 어떤가?"라는 질문을 한다. 저자의 답변은 "본질적인 면에서 언론은 변함이 없다. 언론 자유의 주창자와 열렬한 옹호자들도 절감했던 언론의 부조리와 역기능, 그리고 한계는 시대가 달라져도 겉모습만 바뀌길 거듭했을 뿐 여전하다고 저자는 거침없이 말한다. 저자는 이같은 언론의 본질에 대해 한마디 덧붙인다. 언론이 지닌 부조리하고 잔인한 면모는 결코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 인간과 언론이 지닌 뿌리 깊은 본성의 발로이기 때문이다."(P.12)

이 책은 모두 8장(章)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너 자신을 알라’, 언론에 관한 환상〉, 2장 〈언론이 전하는 ‘진실’의 특징〉, 3장 〈변함없는 뉴스, 진화하는 뉴스 시장〉, 4장 〈뉴스의 이상과 현실〉, 5장 〈언론 자유 사상의 ‘숨은 그림’〉, 6장 〈부끄러움을 모르는 언론, 묻히는 진실〉, 7장 〈자유를 만끽하는 언론의 배신〉, 8장 〈한국 언론의 현주소〉 등이다. 저자는 이미 〈서론〉을 통해 언론이 아무리 부조리해도, 우리는 언론을 외면할 수 없다고 전제한 뒤, 이는 언론이 제공하는 뉴스와 정보는, 좋든 싫든 우리 삶과 사회를 영위하는 데 불가결한 까닭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세상에 뉴스 미디어가 전혀 없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라고 되묻는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필요한 모든 정보를 스스로 수집하고 판단해야만 한다. 그러나 '지구촌'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은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다. 이른바 '정보 마찰'로 많은 문제를 야기시킬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삶 자체를 이어갈 수 없을 정도로 혼란이 온다고 저자는 판단한다. '정보 마찰'이란 뉴스 미디어가 없다면 인파가 발 디딜 틈 없이 꽉 들어찬 초대형 쇼핑몰에서 이리저리 치이고 부대끼며 잃어버린 아이를 찾아 헤매는 것과 같다는 의미에서 경제학자들이 만든 말이라고 한다. 뉴스 미디어가 개개인을 대신해 정보를 수집하고 전달함으로써 사람들의 이런 정보 마찰을 극적으로 줄여준다는 점을 강조하는 말이다. 정보통신기술의 발전도 정보 마찰을 줄여주는 역할을 하고 있지만 뉴스 미디어가 없을 경우 사람들이 겪어야 할 정보 마찰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언론을 향한 사람들의 요구와 기대는 변함이 없다고 저자는 말한다. 책에 따르면 이같은 현상은 언론의 본질도 마찬가지다. 언론의 전달 수단과 방식은 변신에 변신을 거듭했다. 정보통신기술과 그에 따른 사람들의 의사소통 방식이 발전과 진화를 거듭했기 때문이다. 즉 언론의 '본질'의 본질은 그대로지만, '형식과 내용'은 끊임없이 변화했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변함없는 언론의 본질과 변화하는 언론의 형식과 내용은 '변함없는 변화'란 표현이 잘 어울린다고 저자는 꼬집는다. 

역사적으로도 형식과 변화의 일단을 설명한다. 형식의 경우 16세기 팸플릿 신문에서 17세기의 근대 신문, 20세기의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그리고 디지털 미디어로 변모했다. 내용면에서 가장 대표적인 변화는 언론의 보도 규범과 이념을 뜻하는 '저널리즘'의 변모라고 저자는 주장하며 내용의 변화를 열거한다. 

객관주의 저널리즘은 탐사 저널리즘과 함께 지난 세기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탐사 저널리즘은 사회적 비리와 부조리를 장기간에 걸친 깊이 있는 조사와 분석을 통해 폭로하며 각광을 받았다. 그러다가 지난 세기말부터는 객관주의 저널리즘도, 탐사 저널리즘도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실시간 온라인 뉴스 시대가 열린 까닭이다. 디지털 시대에는 뉴스 공급자들의 경쟁이 유례없이 치열해지며, '받아쓰기 보도'나 '베끼기 보도'가 일상화되고, 정파성이나 선정성이 강한 자극적인 보도가 크게 늘었다. 반면, 탐사 보도나 심층 보도 같은 고비용 오리지널 콘텐츠는 갈수록 줄고 있다. 100년 전처럼 선정적 저널리즘과 정파적 저널리즘이 오히려 확산하고 있다. 이런 현상은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사회의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할수록 또 디지털 플랫폼에서의 뉴스 소비가 증가할수록 더욱 두드러진다. 

저널리즘은 미디어 기술과 언론을 둘러싼 경제적 환경에 따라 변화한다. 언론은 언제나 사회적 소명에 충실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지만, 언론의 우선 과제는 경제적 생존이 까닭이라고 저자는 풀이한다. 따라서 물질적 토대의 변화로 인한 언론의 변모는 피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저자는 앞서 언급한 대로 우리의 언론이 뒷걸음만 쳐온 이유는 “‘이상’만을 앞세울 뿐 현실을 직시하지 않은 탓이 크다”고 지적한다. ‘이상’은 우리가 향해야 할 곳을 알려줄 뿐, 무엇이, 어디에 문제가 있는지는 알려 주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지금 필요한 것은 ‘언론의 이념’이 아니라 ‘언론의 본성과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라고 저자는 주장다. 언론의 본질은 고정돼 있지만, 기술-경제 환경은 끊임없이 변했고, 이로 인해 저널리즘은 형태와 내용이 변해왔다는 점은 앞서 지적한 대로다. 저자는 디지털 시대에 등장한 신흥 언론의 급부상과 전통 언론의 몰락을 분석하면서, 두 언론이 ‘적대적 공존’의 상태에 있다고 본다. 전통 언론은 수익성 악화로 품질이 저하되고, 신흥 언론은 정파성과 해석 중심의 콘텐츠로 급속히 영향력을 확장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경고한다. “전통 언론인들은 자신의 보도가 얼마나 공정하고 정확한지, 대중에게 얼마나 신뢰를 줄 수 있는지를 끊임없이 되돌아보고, 실수를 인정하고 바로잡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신흥 언론인들도, 당장은 겸손과 성찰의 필요성을 느낄 수 없겠지만, 질적 도약을 원한다면 스스로를 성찰하며 겸손해져야 한다.” 언론과 언론 환경, 뉴스 전달자와 뉴스 소비자들은 실패를 최소화하며 '이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가고, 부조리한 '현실'에서 벗어나려면, 언론에 관한 제도와 정책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사회적 공감대를 충분히 이뤄내야 한다고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 있다.

"'어느 누구도 반대자를 침묵시킬 권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생각과 태도는 더 나은 언론을 위한 첫걸음이다. '옳다'고 여기는 나의 생각만이 아니라,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다른 이들의 견해와 주장에도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고 믿는, 시민과 언론인, 그리고 지식인들이 공론의 주체로 나서야 한다."(p.257)


저자 : 양상우


6만여 국민주주들이 뜻을 모아 창간한 한겨레신문의 사원 직선 대표이사를 두 차례(15·17대) 지냈다. 언론인의 길을 걸을 때도, 줄곧 학업과 연구의 끈을 놓지 않은 경제학자다. 연세대학교 경제대학원 겸임교수로 미디어 정치경제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널리스트와 언론사 경영인으로서 직접 몸으로 부딪혀온 언론의 현실을 경제학에 접목하는 데 천착해 왔다. 디지털 시대에 언론이 권력과 자본 앞에 취약해지는 현상, 포털 뉴스가 언론의 정파적 보도에 미치는 영향 등을 경제학 모델로 분석했다. Information Economics and Policy 등 저명한 국내외 학술지에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한국 언론의 문제를 푸는 데도 언론에 관한 경제학적 통찰이 중요하다는 것이 지론이다.

한겨레신문 사장 시절에는 한겨레신문이 권력과 자본 앞에 당당하도록 물적 토대를 마련하는 데 애썼다. 첫 임기 중 한겨레신문사는 창사 이래 20여 년 만에 자본결손에서 벗어났고, 두 번째 임기 때는 재임 기간의 누적 흑자를 바탕으로 32년 만에 첫 주주배당을 시행했다. 기자 시절에는 쌍용양회 사과상자 비자금 사건(1996년), ‘북파공작원 실종·사망 7726명’(1999년), 부산 성인 오락실 비리 사건(2006년)을 비롯해 북한 시베리아 벌목공 르포(1994년) 등을 썼다. 민주언론상 특별상(2007년) 한국가톨릭(주교회의)매스컴상(2006년) 삼성언론상(2004년)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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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파도를 넘는 법 - 도전과 모험을 앞둔 당신에게
김재철 지음 / 콜라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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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원그룹 김재철 회장은 스스로를 지탱한 세 가지로 ‘도전’과 ‘열정’, 그리고 ‘호기심’을 꼽는다. 바다를 향한 그의 시선에서 도전과 야망이 엿보였고, ‘나는 제대로 살아왔는가.‘가 늘 자신을 바로잡아 주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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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파도를 넘는 법 - 도전과 모험을 앞둔 당신에게
김재철 지음 / 콜라주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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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어스 서평 카페의 소개로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돌아보면 내 삶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호기심에서 시작해 실행하고 탐구하고 실행하다보니, 도전이 도전을 낳고 습관이 됐을 뿐이다. 그 습관을 남들은 열정이라고 불렀다.”(p.23)

이 책 『인생의 파도를 넘는 법』은 동원그룹 김재철 명예회장의 자서전이다. 동시에 에세이로도, 자기계발서로도, 또 경영 서적으로 활용되어도 좋다. 이 책엔 그가 살아온 이력이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특히 가난했기에 돈을 벌기 위해 주저없이 돈을 버는 산업 현장으로 직접 뛰어들어간 적극적인 모습에서는 목적이 있으면 적극적인 추진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청소년들에게는 본받아야 할 위인전으로 참고할 만하다. 집안이 어려워 선택한 대학도 진리 탐구보다는 하루빨리 집안을 일으켜야 한다는 자신의 사명감으로 수산대를 택했고, 계획대로 원양어선을 탔다. 큰 배를 타고 바다 위를 가른다는 것은 낭만적으로도 보이기도 하다. 실제 마도로스는 많은 남자들의 선망의 대상일 때가 있었다. 독자는 한 번도 원양어선을 타본 적이 없지만 몇달 간 바다 위를 떠다닌다는 것은 낭만의 수준을 벗어난 일이다. 거칠고 변화무쌍한 바다를 수개월씩 타고 이동한다는 것은 강인한 체력과 자신을 이겨내는 정신력, 일에 대한 열정 등 많은 것이 필요할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이자 주인공은 동원그룹·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주 김재철 명예회장이다. 원양어선 무급 실습 항해사로 시작해 그룹 총수에 이르기까지, 그의 삶은 그야말로 도전과 응전 그 자체였다. 무엇보다 그의 도전이 특별한 이유는 ‘지속가능성’에 있다고 말한다. 그는 날로 급변하는 환경을 내다보며 도전의 방식과 태도를 변화에 발빠르게 맞춰갔다. 경영인으로서도 남다른 자질을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파도를 피하는 유일한 방법은, 파도에 맞서는 것뿐이다.” 저자는 파도에 맞서 이겨냈기 때문에 오늘날 그룹 회장이 되었고, 90이 넘은 나이임에도 일에 대한 열정이 식지 않은 '천상 일꾼'의 모습이 엿보인다.


“동원은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온 결과, 현재 원양어업과 수산물 가공 외에 물류 컨테이너 터미널, 축산, 가정 간편식 등의 사업, 나아가 2차전지 소재 부품 등의 사업도 하고 있다. 특히 포장재는 동원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다. 전혀 다른 업종인 증권업도 한국투자증권이 굳건히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는 ‘기업은 환경적응업’이라는 나름의 정의를 바탕으로, 새로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뭐든 시도하고 도전하고 있다. 어떤 상황에서든 성장할 수 있는 다이내믹한 포트폴리오를 갖추는 게 우리의 목표다.”(p.75)

그는 끊임없이 도전했지만, 한 번도 ‘같은 도전’을 한 적이 없다. 그리하여 그의 도전은 21세기 경영뿐 아니라 사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덕목인 ‘지속가능성’을 확보하며, 나이 아흔이 넘은 지금도 그 자신을 통해, 직접 설립한 기업들을 통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는 개인으로서나 경영자로서나, 늘 도전을 꿈꾸고 행하고 마침내 이루어내는 ‘드리머(Dreamer)’의 길을 걸어왔다.

김 회장은 ‘왜 편한 길을 놔두고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험한 길을 걸어갔는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말한다. 충분히 의문이 들 만했을 것 같다. 그의 삶에서 선택은 진학도, 취업도 무엇 하나 일반적 선택이 아니었던 것이 분명하다.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김 회장의 답은 늘 한결같았다고 밝힌다. "어려운 길만 선택한 것이 아니라 편한 길로 갈 힘이 없었다. 편한 길에는 이미 머리 좋고, 집안 좋은 사람이 많았다. 그 길에는 들어서기도 어렵고, 설사 어렵사리 들어간들 새로운 것을 시도하기도 쉽지 않고, 두각을 나타내기란 더더욱 힘들다고 판단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그래서 남들이 안 가는 곳에 가면 새로운 성취를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나만의 길을 찾았다고도 할 수 있다.”(p.105) 대단한 배짱이다.


저자인 김재철 회장은 경험과 생각을 토대로 ‘가슴 뛰는 도전’의 메시지를 이 땅의 청년들과 직장인들에게 전하기 위해 집필했다고 털어놓는다. 그는 세상에 무엇이 필요한지,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고, 질문했고, 시도했고, 도전했다. 이 책은 그가 품어온 호기심과 도전의 질문들이자 열정과 성장의 답변들이다. 꿈을 품고 있거나 그 꿈을 이루고픈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적게 일하고 많이 벌기를’ 원하는 요즘의 청년들에게, ‘열심히 일하는 것을 바보 같다’고 여기는 지금의 직장인들에게, 김재철 회장이 몸으로, 또 삶으로 증명해낸 도전의 가치는 그 무엇보다 귀하고 값진 이정표이자 가르침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김 회장의 인생은 늘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후 사업을 시작하고,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철판 한 장 밑에 지옥을 깐 생활’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패의 순간마다, 포기의 순간마다, 위기의 순간마다, 그는 바다 위에서의 결심을 떠올렸다. 지금까지 그를 지탱한 키워드는 세 가지, ‘도전’과 ‘열정’, 그리고 ‘호기심’이었다고 스스로 다짐한 좌우명을 독자들에게 전한다.

역사적으로 살펴볼 때 오늘날 서양 문명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 것은 신대륙을 발견해서가 아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이후 배를 직접 만들고 목숨을 담보로 바다로 뛰어들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의 모험은 신대륙이나 다른 피지배자들에게는 '재앙'이지만 그들에게는 잘살기 위해 돈 버는 일이었다. 신대륙의 엄청난 자원, 아프리카의 노예사업 등을 노리고 그것으로 부를 창출해 낸 것은 문명인으로 할 짓은 아니지만 신대륙의 자원과 물자에 대한 욕망은 그들의 야만을 눈가리게 했다. 거친 바다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는 뱃사람들의 모험심과 약탈한 자원은 결과적으로 그들의 부를 더욱 강화시켜 주었고, 세계를 아우르는 강대국의 면모를 갖추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뱃사람들의 모험심은 비판받지 않는다. 남들이 두려워하는 망망대해로 나아가 거친 파도를 극복하고 시선을 바다 너머로 갖게 하는 인간의 본능적 호기심과 탐험심은 인류 문명을 발달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저자가 스스로를 지탱한 세 가지 ‘도전’과 ‘열정’, 그리고 ‘호기심’으로 꼽는 것도 바다를 향한 그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독자는 이해한다. 대업을 완성한 그룹 총수로서 회고록이나 자서전이 짧을 수 없지만, 이 책은 무척 짧다. 자신의 행적을 전부 풀어놓지 않고 청년들을 위한 책을 썼기 때문이다. 저자는 「작은 불씨를 꿈꾸며」란 제목의 〈서문〉을 통해 늦은 나이에 정중하게 거절해 왔던 책(청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 등)을 끝까지 고집하지 못하고 책을 낸 것은 분명 '청년들에게 남길 말'에 설득당해서였다. 저자 스스로는 자신을 내세우는 것도, 누가 자신을 추켜세우는 것도 생리적으로 싫어했다는 말도 분명히 한다. 심지어는 저명한 작가들도 저자에 관한 책을 쓰겠다고 여러 번 제의해 왔으나 한사코 거절했던 그였다. 다만 회사나 대학교, 대학원 특강 등에서 수많은 젊은이들을 만나 이야기하는 일은 보람 있고 필요하다는 생각에 여전히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는 상황도 이야기한다. 김 회장은 이번 책을 내면서 〈서문〉의 마지막 부분에 한마디 덧붙인다.

"돌아보면 내 삶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호기심에서 시작해 실행하고 탐구하고 실행하다보니, 도전이 도전을 낳고 습관이 됐을 뿐이다. 그 습관을 남들은 열정이라고 불렀다."(p.23)

이 책은 길지 않은 분량으로 3부(stage)로 이뤄져 있다. 1부 〈도전의 태도 : 지금, 나의 가슴은 정말 뛰고 있는가〉, 2부 〈호기심의 바다 : 창조는 ‘머리’가 아니라 ‘몸’에서 시작된다〉, 3부 〈열정의 온도 : 풍랑이 일 때, 진짜 항해가 시작된다〉 등이다. 각 부는 각각 3~4개의 장(章)으로 구성되어 있고, 마지막엔 「플러스 스토리」를 추가해 미처 못다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눈치 빠른 독자들은 이미 알아차렸겠지만 각 부는 저자가 스스로를 지탱해오던 힘이라고 말한 ‘도전’ ‘열정’ ‘호기심’이다. 1부에는 「선택」「목표」「변화」「실패」란 키워드로 4개의 장으로 나뉘어져 있고, 「도전의 증인, 희망의 증거」란 플러스 스토리가 실려 있다. 2부엔 「호기심」「현장」「융합」「독서」가 핵심어로 자리 잡고 김 회장의 삶에 등장한다. 마지막 3부에서는 「열정」「각오」「정의」에 대해 저자의 생각을 담담하게 쓰고 있다. 책의 마지막에 「미완의 꿈」이란 제목의 〈에필로그〉와 「열정이 묻고, 경험이 답하다」란 제목의 문답식 〈부록〉이 책을 보충한다. 이 책을 정리한 「삶과 꿈, 호기심과 도전」이란 제목의 〈정리자의 글〉도 눈길을 끈다.


책의 시작 부분에서는 책 속 글의 내용을 강조해서 쓴 부분 가운데 중요한 문장을 발췌해 따로 지면을 12면을 할애해 독자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여기에 적힌 문장 몇 개를 옮겨 적는다.


지난 삶을 돌아보며 생각했다. '나는 제대로 살아왔는가.', '내 선택들은 옳았는가.', '다른 삶을 살 수는 없었나.'

바다 위의 생할은 언제 죽음과 마주할지 모르는 위기의 연속이었다. 그때마다 나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가?"

비단 바다에서뿐만이 아니었다. 내 인생은 늘 위기의 연속이었다. 이후 사업을 시작하고, 회사를 경영하면서도 '철판 한 장 밑에 지옥을 깐 생활'을 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패의 순간마다, 포기의 순간마다, 위기의 순간마다, 바다 위에서의 결심을 떠올렸다. '덤으로 한번 더 사는 인생 당당하고 떳떳하게 살다 가자. 구질구질하지 않게 사는 거야.'

지금까지 나를 지탱한 키워드는 세 가지. '도전'과 '열정', 그리고 '호기심'이다.

나는 세상에 무엇이 필요한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고 질문했고 시도했고 도전했다. 이 책은 내가 품어온 호기심과 도전의 질문들이자 열정과 성장의 답변들이다. 꿈을 품고 있거나 그 꿈을 이루고픈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픈 이야기이기도 하다.


저자 : 김재철


동원그룹 · 한국투자금융지주 창업주. 주변의 만류와 우려에도 불구하고 따놓은 당상이었던 서울대를 포기하고 수산대로 진학을 결정하며 ‘바다 인생’이 시작되었다. 실습차 동해, 서해, 남해를 다니며 어족 자원이 거의 절멸상태임을 확인하고 좌절했으나, 국내에서 첫 원양어선이 출항한다는 기사를 보고 새로운 꿈을 품게 되었다. 수산대를 졸업하면 ‘갑종 2등 항해사’ 자격이 주어지지만, ‘이론’보다 ‘실습’, ‘학위’보다 ‘경험’이 중요하다고 판단, ‘무급 실습 항해사’로 참치잡이 국내 원양어선 1호인 ‘지남호’에 올랐다. 고기를 잡으면 배를 갈라보고, 어디서 어떤 크기의 참치가 잡히는지 연구하며 훗날 ‘참치를 잘 잡는 선장, 캡틴 킴’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후 1969년 동원산업을 설립했고, 1982년 한신증권을 인수하며 오늘날 한국투자금융지주의 초석을 다졌다. 특히 김재철 비즈니스의 하이라이트는 2008년 미국 최대, 세계 최대의 참치캔 회사 스타키스트 인수였다. 스타키스트는 동원산업 창업 초기 원양에서 물고기를 잡아 납품하던 회사 중 하나였는데, 그 회사를 인수하며 동원은 세계 참치캔 1위 업체가 됐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안주하지 않았다. ‘기업은 환경적응업’이라는 생각을 바탕으로 포트폴리오를 다각화해온 결과, 현재 동원은 원양어업과 수산물 가공 외에 물류 컨테이너 터미널, 축산, 가정 간편식 등의 사업, 나아가 2차전지 소재 부품 등의 사업도 하고 있다. 특히 포장재는 동원이 점유율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분야다.

그는 공적 영역에서도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다. 2006년에는 여수세계박람회 유치위원장을 맡았는데 유치전을 승리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2008년 민간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훈장인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받았다. 앞서 1986년 수산업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금탑산업 훈장을 받았던 그는 무궁화장과 금탑산업 훈장을 받은 거의 유일한 기업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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