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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와 고흐 - 신을 죽이고 초인을 부른 니체, 귀를 자르고 광기를 부른 고흐, 증보판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공공인문학포럼 엮음, 빈센트 반 고흐 그림 / 스타북스 / 2024년 5월
평점 :
여름이 시작된 7월이다. 이젠 장마철이어서 비도 자주 내린다. 날씨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고흐 때문이다. 그가 프랑스 프로방스의 날씨를 좋아한다고 해서다. 그는 프랑스 아를에서도 적잖은 시간을 지냈다. 아를은 알프스에서 지중해까지 이어지는 론강을 끼고 발전한 도시다. 1981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될 정도로 우수한 문화유적을 갖고 있지만 옛날 로마시대 유적이 많다고 한다. 특히 프로방스는 기후가 좋아 고흐가 지냈던 19세기 후반은 풍요로운 농촌 지역이었을 것 같다. 이곳은 오늘날 반 고흐의 흔적을 찾아오는 이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고흐가 아를에서 많은 그림을 그렸고 배경장소가 된 곳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그가 그렸던 곳은 대부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독자가 프랑스를 갔을 때 아를을 못 가본 것이 여한으로 남았다. 독자는 버킷리스트에 '아를(프로방스) 여행'을 채워 넣었다. 론강은 물론 '반 고흐 카페'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다고 하니 멋진 여행이 될 것 같다.
이 책 『니체와 고흐』는 공공인문학포럼이 편저자다. 공공인문학포럼은 공감하고 공유하는 인문학 지식의 발전소 역할을 하기 위해 지적 호기심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인문학 네트워크라고 한다. 독서포럼과 함께 사람이 교양으로 알아야 할 상식과 지식을 주제별로 선정해, 현대인의 바쁜 일상을 감안해 핵심을 정리하고 빨리 읽고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단순하고 가볍게 엮어 나가고자 결성된 모임이라고 한다. 책 읽기를 놀이처럼 즐길 수 있는 장치를 만들고 책을 통한 놀이공원과 인생학교를 위한 꿈꾸는 발전소가 되는 것이 목표다. 독자로서는 처음 접하는 포럼이지만 이 책을 보니 내공이 대단하다. 이런 책을 펴낼 정도의 모임인데 독자가 모른 것은 '책 읽지 않는 사람' 중의 한 명으로 독자가 들어간대도 할 말이 없다.
이 책은 명작과 명작의 만남이라는 콜라보 형식으로 기획해 탄생했다. 이번 판은 개정증보판으로서 읽기 쉽고 보기도 좋게 꾸몄다. 이 책에 담겨있는 니체의 잠언들을 〈삶〉, 〈아름다움〉, 〈지혜〉, 〈인간〉, 〈존재〉, 〈세상〉, 〈사색〉, 〈신앙〉, 〈예술가〉 등 10개의 주제로 나누어 정리했다. 고흐의 그림과 함께 배치해 서로의 기억에 도움을 준다. 따라서 읽는 즐거움을 모두 잡는 데 성공한 셈이다.
책 〈서문〉의 첫 문장은 철학의 명제를 보는 읽는 느낌이다. "니체는 절대 진리는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파하면서 기존 질서와 고정관념을 사정없이 깨버린 현대인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자 철학가로 꼽힌다." 누가 뭐래도 니체는 최소한 현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이 입에 오르내린다. 독자가 과문한 탓이겠지만 코로나 팬데믹 상황이 심각해지고 사회적으로 거리두기를 실시하고 있을 때 철학자 니체에 관련된 책이 쏟아지기 시작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전에도 니체의 책이 자주 나왔는지는 솔직하게 잘 모르겠다. 독자가 책을 거의 읽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니체의 책이 쏟아지면서 철학자 니체가 왜 한국인들에게 인기를 얻는지 설명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은 기억한다. 신문에도 각종 매체에도 '니체 열풍'이라고 표현할 정도였으니까. 철학자나 철학도들은 꾸준히 니체를 공부했으니 당연한 일이지만 갑자기 서양 철학자가 인기를 끈다는 것은 분명 특기할 만한 사안이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니체가 적잖은 인기를 끌었던 것 같다. 이 책을 펴낸 공공인문학포럼이 "일본에서는 문장을 정리하여 『니체의 말』이라는 제목으로 200만부의 베스트셀러가 되기도 했다"고 귀띔한다. 니체가 위험하고도 매혹적인 사상가, 철학자로 우리 곁에 여전히 살아 있는 까닭은 그가 자신의 철학을 온몸으로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공공인문학포럼은 말한다. 니체는 삶을 사랑했으며 스스로 질문하고, 대답에 대한 가치 역시도 스스로 결정했다. 니체의 삶이 곧 하나의 사상이었고, 니체의 사상이 곧 그의 삶이었다는 것이다. 그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함으로써 놀란 사람은 일반 민중이 아니라 종교계 종교인들 아니었을까? 일반 민중은 오히려 카타르시스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물론 중세 시대에 이런 말을 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인간 본위의 인문주의 사상의 시대, 근현대에서야 나온 말이기에 오히려 아쉬울 수 있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외친 갈릴레오 갈릴레이 이후 가장 통괘한 외침임은 분명하다. 니체의 외침은 기독교 문명이라 일컫는 서양 문명에 경종을 울린 것만은 분명할 테니까 말이다.
독자는 철학적 명제나 철학적 이론을 놓고 왈가왈부할 입장이 되지 못한다. 철학의 문외한이기 때문이다. 철학잭은 수십 년 전에 더 이상 철학을 공부하지 않게 한 데 결정적 공헌을 한 〈철학개론〉 외에 어떤 책도 한 권을 모두 읽은 적이 없을 정도다. 자학의 개념이 아니라 '무지'를 말하는 독자의 충심을 양해해 주시기 바란다. 공공인문학포럼은 〈서론〉에서 "'신이 죽었다'라는 명제가 익숙해져 니체의 말에 놀라는 사람도 많지 않고, 그래서 니체가 주장한 진정한 뜻을 알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더 나아가 니체의 말속에 숨겨져 있는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드러난 그대로 곡해해 버리는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 니체가 자신의 온 생애로서 증명하고자 했던 사상을 제대로 알게 된다면, 자기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바라보고 자신만의 진정한 길을 살아나갈 용기와 지헤를 배우게 될 것"이라고 강조한다. 독자도 그 중의 한 명이 되길 기대하고 있다.
〈서론〉에서 공공인문학포럼은 니체의 말은 현실은 현실로서 인식하도록 했던 기존의 형이상학적 근거가 더 이상 타당하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단언한다. 기존의 절대적 가치가 더는 절대 가치를 갖지 못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이제 기존의 세속적 가치를 때려 부수고, 스스로 극복하여 새로운 가치를 정립해 내야 한다고 니체는 말했다고 전한다. 니체는 지적 우월주의에 빠진 자들에 대한 비판과 함께 세속화된 시대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자들의 술수를 신랄하게 파헤쳐 부수었다. 뿐만 아니라 니체는 어리석게 끌려 다니는 대중이 깨어나도록 외쳤다고 역설한다.
공공인문학포럼에 따르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기득 권력은 막강하다. 그래서 니체는 스스로 '망치'를 들고 철학을 하겠다고 천명했으며, 스스로를 인간이 아닌 '다이너마이트'라고 천명할 정도였다. 니체의 삶은 그 말이 은유가 아니라 사실의 강도 그대로를 드러낸 표현이었음을 삶을 통해 보여준다. 그 과정에서 '권력에의 의지', '초인 사상', '영원회귀 사상' 등이 탄생하고, 인간의 속성에 대해 고찰한 니체의 잠언들이 나왔다고 말한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인공은 화가 고흐다. 고흐는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까지 한 점의 그림도 팔지 못한 것으로 알려진 삶은 가난과 정신적 고통으로 얼룩졌다. 사후에 얻은 명성과는 달라도 너무나 다른 삶이었다. 고흐는 프랑스의 지중해성 기후에서 정신적 요양을 겸하면서 원색의 강렬한 느낌을 독창적인 붓터치로 살려낸 불멸의 화가였다. 정신적 장애로 인해 동생 테오에게 의지해 연명하다시피 살았다. 정신병원 입퇴원을 반복한 삶이 행복할 리 없었다. 가난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화상, 교사, 목회자, 책 판매원 등의 다양한 직업을 거친 후, 1880년 스물일곱 살의 나이로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이미 그 시기에 고흐의 정신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림은 고흐에게 단순한 생계 수단이 아닌 스스로를 구원한 치유의 일이었다고 전해진다. 전업 작가로 화가생활을 결심한 고흐는 남보다 늦게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했다는데 그가 화가 생활 10년 동안 1,000여점의 그림을 남겼다고 한다. 사나흘에 한 점씩 그렸다는 단순 계산에 독자는 오히려 놀랐다. 열정과 재능이 폭발적이었다는 반증이다. 1880년대부터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까지 약 40년의 기간을 프랑스에서는 '벨 에포크'(Belle Epoque)라고 불리운다. 프랑스가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 발전으로 번성했던 시대를 일컫는 말로 회고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이다. 이 시기 프랑스는 예술의 중심, 경제 번영과 전쟁이 없던 시절로 '아름다운·좋은 시절'이라고 번역되기도 한다. 모든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기도 했다.
정신병을 앓았다는 점에서 동정심을 자극했는지 모르지만 고흐는 화가로서 대단한 열정과 천재성을 보였다. 당시 벨 에포크 시기에 그의 그림을 제대로 인정하는 사람들이 없었을 것이다. 사치와 향락이 넘쳐나던 파리에서 무명의 고흐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태양의 화가', '영혼의 화가'로 불리며 별을 그린 화가로 유명한 고흐는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는 유일한 시간은 내가 미친 듯이 그림을 그릴 때다",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은 나를 꿈꾸게 한다" 등 원색과 강렬한 붓터치만큼이나 간명하고 강렬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고통과 우울증에 시달리면서도 폭발적인 열정을 보여준 것은 '광기'였을까. 이 책의 두 주인공은 모두 '광기'를 보인다는 점에서 공통점이다. 독자의 두 위인에 대한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 두 사람을 '위인'으로 이끈 데는 광기가 한몫 하지 않았을까도 생각해본다. 다만 '광기'가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독자의 공부 부족으로 단언할 수 없을 뿐이다. 귀를 자를 정도로 광기에 휩싸이면서도 그보다 더 열정적인 그림, 위대한 명작을 남긴 고흐. 신은 죽었다는 말로 시작되는 말과 신도 용서하지 못할 폭력적 독설의 니체.
앞서 언급한 대로 이 책은 모두 10장(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 「아름다움에 대하여」, 2장 「삶에 대하여」, 3장 「신은 죽었다」, 4장 「지혜에 대하여」, 5장 「인간에 대하여」, 6장 「존재에 대하여」, 7장 「세상에 대하여」, 8장 「사색에 대하여」, 9장 「예술가에 대하여」, 10장 「니체를 만난다」 등이다. 이 가운데 1~9장은 모두 우리 삶에 관계되는 것이지만 10장만 철학자 니체의 이름이 들어 있다. 10장으로 먼저 발걸음을 옮긴다. 공공인문학포럼은 왜 10장을 '니체의 장'으로 꾸몄을까. 10장에 들어가는 페이지에 니체의 말이 씌여 있다. "나의 발걸음은 훨씬 단단해졌고 또한 확실해졌다. 용기가 나를 성장시켰다. 앞으로 나는 더욱 고독해질 것이며 이전보다 험난해질 길을 걷게 될 것이다." 10장 시작 페이지에는 〈몽마르트르 언덕의 전망대〉라는 고흐의 그림이 있다. 독자로서는 처음 보는 그림이지만 마치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휴식 겸 전망 좋은 곳이다. 이 장에는 니체의 저서에서 인용한 잠언과 단편적인 글들로 채워져 있다. '나의 때는 아직 오지 않았다' '철학자의 긍지를 그렇게 살 수는 없다' '고뇌의 몸부림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철학자는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가' '터무니없는 일을 당해도 축제처럼 즐길 것' '한 자루 칼과 백 가지 욕망' '인간을 병들게 하는 비굴한 감성' '나의 발걸음은 훨씬 단단해졌다' 등이 있다.
'한 자루 칼과 백 가지 욕망' 일부를 인용한다. 나는 민중의 죽음에 대해 말하고자 한다. 나의 형제들이여! 이곳엔 민중이 없다. 다만 국가가 있을 뿐이다. 국가란 식어 버린 시체이며 가장 냉혹한 괴물이다. 그들은 아침마다 거짓말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우리를 기만하고, 지배하며, 잔인하게 물어뜯는다. 그들은 우리를 볼 때마다 이렇게 외친다. "국가는 민중이다!" 이 말에 속지 말라. 그것은 거짓말이다. 민중을 창조하고 그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베푼 것은 창조자였다. 우리의 삶에 희생된 자는 오직 우리들 자신뿐이었다. 우리는 함정에 빠진 것이다. 국가라고 불리는 저 파괴자들이 파 놓은 함정에 발을 들이민 것이다. 그들은 함정에 빠진 우리에게 한 자루 칼과 백 가지 욕망을 쥐어 주었다. 우리는 이 칼과 욕망에 지나칠 정도로 익숙해졌다. 너무나 많은 인간들이 태어났다. 우리가 키우고 양육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많이 태어났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 것이다. 국가는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는 대신 우리에게 생산을 요구한다.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산을 요구하낟. 자신의 지위가 유지되도록 우리를 물어뜯고, 씹고, 삼키고, 다시 물어뜯는 것이다.(p.302)
저자 :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Nietzsche, Friedrich Wilhelm Nietzsche)
19세기 독일의 철학자이자 음악가, 문학가이다. 1844년 독일 작센주 뢰켄의 목사 집안에서 출생했고 어릴 적부터 음악과 언어에서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 집안 영향으로 신학을 공부하다가 포이어바흐와 스피노자의 무신론적 사상에 감화되어 신학을 포기했다. 이후 본대학교와 라이프치히대학교에서 언어학과 문예학을 전공했는데 박사 논문을 제출하기 전에 이미 명문대인 스위스 바젤대학교에 초빙될 만큼 뛰어난 학생이었다. 1869년부터 스위스 바젤대학교에서 고전문헌학 교수로 일하던 그는 1879년 건강이 악화되면서 교수직을 그만두었다. 편두통과 위통에 시달리는 데다가 우울증까지 앓았지만 10년간 호텔을 전전하며 저술 활동에 매진했다. 겨울에는 따뜻한 이탈리아에서 여름에는 독일이나 스위스에서 지내며 종교, 도덕 및 당대의 문화, 철학 그리고 과학에 대한 비평을 썼다. 그러던 중 1889년 초부터 정신이상 증세에 시달리다가 1900년 바이마르에서 생을 마감했다. 니체는 인간에게 참회, 속죄 등을 요구하는 기독교적 윤리를 거부했다. 본인을 ‘망치를 든 철학자’라고 부르며 규범과 사상을 깨려고 했다. “신은 죽었다. 우리가 신을 죽였다”라고 한 그는 인간을 끊임없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창조하는 주체와 세계의 지배자인 초인(超人)에 이를 존재로 보았다. 초인은 전통적인 규범과 신앙을 뛰어넘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인간을 의미한다. 니체의 이런 철학은 바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로 집대성됐고 철학은 철학 분야를 넘어 실존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에까지 영향을 크게 미쳤다.
『비극의 탄생』(1872)에서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 등을 예술적 형이상학으로 고찰했으며, 『반시대적 고찰』(1873~1876)에서는 유럽 문화에 대한 회의를 표명하고, 위대한 창조자인 천재를 문화의 이상으로 하였다. 이 사상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1878~1880)에서 더 한층 명백해져, 새로운 이상에의 가치전환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여명』(1881) 『즐거운 지혜』(1882)에 이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1883~1885)를 펴냈는데 ‘신은 죽었다’라고 함으로써 신의 사망에서 지상의 의의를 말하고, 영원회귀에 의하여 긍정적인 생의 최고 형식을 보임은 물론 초인의 이상을 설파했다. 이 외에 『선악의 피안』(1886) 『도덕의 계보학』(1887)에 이어 『권력에의 의지』를 장기간 준비했으나 정신이상이 일어나 미완으로 끝났다.
그림 :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네덜란드 후기 인상주의 화가. 서양 미술사상 가장 위대한 화가 중 한 사람으로 손꼽힌다. 화풍의 스승을 두지 않고 독자적인 회화 세계를 그려냈다. 10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강렬한 색채, 거친 붓놀림, 뚜렷한 윤곽을 지닌 형태를 통하여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생의 고통을 인상 깊게 전달하고 있다. 네덜란드 뇌넌에서 서른일곱 해의 짧은 생을 살면서 지독한 가난에 시달리며 고독했던 그는 주로 파리, 아를, 생레미 등지에서 노동자와 농민 등 하층민의 모습과 자연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네덜란드 뇌넌, 헤이그 시절에는 어두운 색채의 비참한 주제가 특징이었으나 1886~1888년 파리에서 인상파, 신인상파의 영향을 받은 뒤로 꼼꼼한 필촉과 강렬한 색채로 특유의 화풍을 전개했다. 1888년 아를에서 병의 발작에 의해서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는 사건을 일으켜 정신병원에 입원했으며 이후로도 입퇴원 생활을 거듭하다가 1890년 오베르쉬르우아즈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종교적인 신념, 인간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했던 고흐의 삶은 현실과 타협하지 않은 채, 고독과 가난 속에서 온전히 예술을 위해 바쳐졌다. 그러나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인정받지 못하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후에야 그의 작품들은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단 한점의 작품만이 판매되었지만, 현대의 미술계는 최고가를 자랑하는 비운의 화가가 되었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