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물리학 필독서 30 - 뉴턴부터 오펜하이머까지, 세계를 뒤흔든 물리학자들의 명저 30권을 한 권에 필독서 시리즈 22
이종필 지음 / 센시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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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어려운 학문 중의 하나로 알려진 물리학은 어떤 과정을 거쳐 현대 물리학에 이르렀을까? 물리학을 처음 배웠을 때를 돌이켜보면, 그리스 시대의 자연과학에서 연유한 것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그러나 물리학은 처음 배웠을 때의 '어려울 것 같다'는 느낌을 벗어나지 못한 채 고등학교 때 배운 기초 물리학의 기억으로만 독자와의 인연을 끝냈다. 독자가 학교 다닐 때는 문과와 이과로 나뉘어 대입을 준비했는데 문과 대학의 일부에서는 수학과 물리학을 본 고사에서 치르지 않는 대학도 있었다. 대신 문과 계통의 공부는 더 해야 했다. 물리학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독자로서는 결국 문과로 진학했고, 대신 물리학과 수학으로부터는 아주 멀어지게 됐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별도로 물리학이나 수학을 배우지 않았고, 취업 시험에서도 수학과 물리학은 별 필요없었다. 당시 고등학교 교과목(커리큘럼)도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 아래 구성되었다. 그러나 정작 직장 생활하면서 왜 고등학교 교과목에 물리나 수학이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여러 번 필요성을 느꼈다. 실제 기업체에서는 물리학과 수학이 훨씬 사용도가 높았다. 경제학 책을 읽어야 할 때도 수학과 물리학 이론이 밑받침된 것들이 많았다. 직장 생활 중 동료들과의 잡담에서도 물리학과 수학에 관한 이야기가 훨씬 많았다. 실물 경제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던 것 같다. 우리가 말하는 물리는 우주나 천문학에만 소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수학 역시 복잡한 공식이나 고등 수학이 아닌 한, 기초 기초는 수시로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문과에서 열심히 배웠던 철학적 사고나 글쓰기 등은 별로 화제가 된 적도 없고, 누구 하나 문제를 제기한 적도 없었다. 굳이 비유해 표현하자면 우리의 일상에서는 '이과적 머리'가 '문과적 머리'보다 훨씬 효용성이 높았다.

이 책 『세계 물리학 필독서 30』은 세상의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원자부터 광대한 우주와 시간의 비밀까지, 생명과 우주의 이치를 담은 물리학 책 가운데 독자들이 꼭 알아야 할 텍스트 30권을 저자 이종필이 선정, 소개한다. 저자는 「우리 시대에 반드시 읽어야 할 물리학 고전들을 추천하며」이란 제목의 〈서문〉을 통해 "물리학은 상당히 매력적인 학문이지만 누구나 선뜻 다가가기는 힘들다. 설령 관심이 생겨 책을 읽어보려 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넓은 학문"이라고 전제한다. 저자는 이 책 『세계 물리학 필독서 30』이 물리학에 대한 이런 막연한 갈증과 낯섦을 해결하기 위한 책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물리학의 저변을 넓히기 위해 여러 권의 대중 과학서를 집필하고 과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발히 활동해온 물리학자 이종필 교수가 이 책을 집필한 이유다. ‘교양으로서 과학을 어떻게 알려줄 것인가’라는 저자의 오랜 고민에 대한 해답이기도 하다고 설명을 덧붙인다.



저자는 〈서문〉에서 시대가 변하고 상황이 바뀌어도 ‘과학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언제나 ‘고전 명작’일 수밖에 없다고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그 ‘고전 명작’을 선정하는 데 가장 중요한 기준은 ‘과학의 원초성(originality)을 담은 책’이라고 강조한다. 저자는 이 기준에 따라 물리학의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거나 그런 역할을 했던 과학자가 쓴 책을 위주로 서른 권의 책을 선별했다고 한다. 과학적 사고의 기원이 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서구의 2,000여 년 정신세계를 지배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 인류가 어떻게 수학의 언어로 자연을 이해하게 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뉴턴의 『프린키피아』를 책의 서두에 배치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이처럼 초기 과학적 사고와 이론의 본질을 보여주는 학문적 여정을 지나면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파인만, 스티븐 호킹처럼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만한, 역사적으로 위대한 과학자들의 저서를 친절한 설명과 함께 '쉽게' 풀어낸다. '쉽게'란 표현은 독자가 붙인 수식어지만, 특별한 물리학 지식이 없어도 이 책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대중적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다는 의미에서다. 물론 대중적 문장이란 일반 독자들이 읽어도 이해할 정도의 수준이란 뜻이다. 소개된 원전이 쉽게 쓰여진 것일 수도 있지만, 대다수는 저자의 손을 거쳐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재기술되었다는 독자의 판단 때문이다. 또 기존 고전적 과학자뿐만 아니라 킵 손이나 안톤 차일링거처럼 최근에 노벨상을 수상한 과학자들, 현 시대 가장 촉망받는 과학자와 이미 세계적인 일가를 이룬 인물들의 책까지 균형 있게 다루고 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나 『코스모스』 『시간의 역사』처럼 구매한 사람은 많지만 끝까지 읽은 사람은 별로 없는 명작들에 대한 소개와 해설도 이 책의 빼놓을 수 없는 묘미이다. 왜 끝까지 읽지 못했을까?란 이유를 생각해보면 흥미 있고, 이유 있는 책의 내용을 발견할 수 있는 점도 매력적이다. 독자처럼 고등학교 기초 물리학 수준에서 이론과 개념을 넘어 교양으로서의 물리학, 거대한 지식의 맥락 가운데 하나로서의 물리학을 알고 싶다면 이 책 『세계 물리학 필독서 30』을 추천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란 게 독자의 기대이다. 독자들은 책장을 넘기는 것만으로도 짜릿하고 놀라운 지적 경험을 하게 될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뉴턴의 『프린키피아』에 대한 책 선정 이유는 당연하다. 뉴턴이 과학사 특히 물리학의 역사에 끼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다. 그의 저서가 소개되지 않는다면 어쩌면 '필독서'로서 가치를 잃을지도 모른다. 뉴턴의 '만유인력 발견'은 과학사를 뒤집을 대단한 사건이다. 물리학을 몰라도 뉴턴은 아는 사람도 많을 정도로 그의 물리학에 끼친 영향은 실로 대단하다. 그러나 그가 『프린키피아』란 책을 썼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물론 독자도 이 책을 통해 처음 들었다. 이유는 복잡한 기하학으로 쓴 책이라 물리학 전공자들도 일일이 모든 것을 따라가면서 읽기 쉽지 않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가 이 책을 선정한 이유는, 수학을 모르는 인문계열 출신이 책을 따라가면서 그 모든 증명을 다 이해하고 어떤 지식을 얻기를 바라서가 아니라고 한다.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다.

저자에 따르면 뉴턴 이래도 인류는 수많은 훌륭한 물리학 교과서를 엄청나게 많이 출간해 왔다. 지식을 얻기 위해서라면 현대의 잘 정리된 교과서가 훨씬 더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프린키피아』는 말 그대로 물리학의 '고전 명작'이다. 그래서 문장 하나하나를 일일이 다 따라가면서 탐독하는 것도 좋지만, 무엇보다 17세기의 과학혁명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졌는지, 수학의 언어로 어떻게 자연을 이해하게 되었는지 일단 '구경'이라도 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는 대학에 가지 않았거나 이미 졸업한 독자들이라도 대학 신입생의 마음으로 이 책의 목록을 들여다본다면 새로운 독서의 욕구가 생기지 않을까, 저자는 기대한다고 밝힌다. 또한 『세계 물리학 필독서 30』에 적힌 책의 목록만으로도 대략적으로 물리학 발전의 역사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란 믿음 때문이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다만 저자는 자신의 기준 때문에 최근 급증하고 있는 국내 저자들의 저서를 아직은 포함하지 못한 것을 아쉽게 생각한다고 말한다. 세월이 좀 더 흐르면 국내 저작들도 원초성을 갖는 고전의 반열에 충분히 오를 것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고 밝힌다. 저자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추가로 읽을 만한 추천도서에 국내 저작들을 많이 반영했다고 덧붙인다. 비전문적 독자로서 훨씬 더 많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한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별도의 구분 없이 30권의 책에 각 한 장(章) 할애해 모두 30장으로 구성돼 있다. 각 장의 맨 마지막엔 앞서 언급한 국내 저작물을 포함한 '함께 읽으면 좋은 책' 〈참고도서〉를 소개한다. 이 책은 대체적으로 연대기 순으로 정리돼 있다. 1장에는 「신은 언제나 기하학을 하고 있다.」는 제목으로 플라톤의 『티마이오스』를 소개한다. 같은 순서로 30장에는 「SF와 과학의 경계 사이, 다중우주를 향한 담대하고도 놀라운 가설」이란 제목의 맥스 테그마크의 『맥스 테그마크의 유니버스』가 올라 있다. 책 앞 부분에 〈목차〉는 독자들이 필요한 책을 찾아 읽을 수 있도록 잘 정리돼 있다. 자신이 원하는 것만 찾아 읽을 때도 〈목차〉에 정리된 '과학자', '책 이름' 그리고 '제목'을 한 번 쭈욱 훑어볼 것을 먼저 읽은 독자로서 권유한다. 과학의 흐름도 짐작할 수 있고, 현대 과학에 이르기까지 누구의 어떤 이론이 성과를 이뤘는가에 대해 추정케 하기 때문이다. 

독자는 우리가 사는 현대로 구분되는 시점, 즉 제2차 세계대전 종전에 기여한 가장 큰 무기인 '원자폭탄'에 관한 이야기를 가장 알고 싶었다. '맨해튼 프로젝트'로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루스벨트 때 시작해 갑작스런 그의 죽음으로 부통령이었던 트루만 대통령 때 완성했던 원자폭탄 이야기다. 저자는 「우주의 근본적인 에너지로 인류의 역사를 바꾼 드라마」란 제목으로 리처드 로즈의 『원자폭탄 만들기』를 15장에 배치했다. 리처드 로즈는 이 책으로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1988)을 수상했으며 세계적 저술가 반열에 올랐다. 리처드 로즈는 1986년 과학자, 정치가, 군인, 심지어 피폭자까지 600건의 문헌과 수백 명의 증언을 바탕으로 원자폭탄의 개발의 역사를 재구성했다. 

20세기를 특정짓는 단 하나의 장면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에 피어오른 버섯구름을 선택한다고 저자 이종필은 말한다. 그 이전과 이후 세상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수많은 요소들이 거기에 함축돼 있기 때문이란다. 무엇보다 우리 인류는 완전히 새로운 종류의 에너지를 손에 넣게 되었다. 원자핵 속에 감춰졌던 그 에너지는 이전에 인류가 사용하던 에너지보다 최소 수백만 배나 더 큰 에너지를 쏟아낼 수 있다. 그렇게 큰 에너지가 일시에 분출하도록 만든 핵무기는 도시 하나를 완전히 절멸시킬 위력을 가졌으며, 그 때문에 오랜 세월 인류의 역사와 함께했던 전쟁의 개념조차도 바뀌어버렸다는 게 원자폭탄의 의의를 규정한다.



또한 핵무기의 등장과 일본의 패망으로 형성된 전후 질서는 21세기인 지금까지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물리학자들이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원자폭탄 역사를 재구성한 이후 저자 이종필은 책의 내용에 집중한다. 이에 따르면 '원자폭탄(atomic bomb)'은 말 그대로 원자 속의 에너지를 이용한 폭탄이다. 따라서 그 원리를 이해하려면 우선 원자가 무엇인지부터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 책(『원자폭탄 만들기』)은 바로 그 지점, 즉 우리가 원자를 제대로 이해하기 시작한 무렵까지 거슬러 올라가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으로 1945년 핵무기 실전 투하와 종전, 그리고 그 이후 후기까지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정도 방대한 양을 다루려면 이 정도 분량(번역서 2권)으로는 도저히 불충분할 것 같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그럼에도 로즈는 그리 많지 않은 분량 속에 정말로 방대한 이야기를 깔끔하면서도 균형감 있게 녹여냈다고 평가한다. 또 『원자폭탄 만들기』의 놀라운 점은 단지 과학이나 과학자들 이야기만 다루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중요한 정치사회적인 사건들, 심지어 군사적인 상황과 전선의 전황까지도 생생하게 전달해 준다. 여기에는 연합국뿐 아니라 독일과 일본도 포함된다. 그래서 책 한 권이 여러 권의 책을 대신하는 듯한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 이종필은 강조한다.

이후 온전히 과학적인 진전에 따라 원자폭탄의 원리와 제조 과정, 관여한 인물들의 과학적 공적들을 일일이 열거한다. 원자폭탄이라는 어마어마한 에너지 방출은 어느 날 갑자기 한 사람의 천재성에 의해 제시됐지만 그 과학적 입증 과정은 수많은 과학자와 사람들의 엄청난 노력이 뒷받침됐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여기서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과학자는 놀랍게도 독일인이다. 독일의 화학자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은 1938년 우라늄에 중성자를 때리는 실험 와중에 이상한 결과를 발견했다. 반응 후에 생긴 물질이 우라늄보다 더 무거운 초우라늄이 아니라 널리 알려진 바륨과 비슷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아주 큰 에너지가 방출되었다고 한다. 오토 한의 동료였던 리제 마이트너와 그의 조카 오토 프리슈는 중성자가 우라늄을 보다 가벼운 바륨으로 쪼갰으며, 그 과정에서 반응 전후의 질량 차이만큼 아인슈타인의 E=mC2 공식에 따라 엄청난 에너지를 방출한다고 올바르게 해석했다는 것이다. 당시 이들은 나치를 피해 독일을 떠나 스웨덴으로 피신해 있었다. 프리슈는 생물학의 세포 분열에서 이름을 따 이 현상을 '핵분열'이라 불렀다는 점을 책에서 인용해 확인해 준다.



이로부터 얼마 뒤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쟁은 끝났다. 핵무기는 지금까지도 국제정세를 규정하는 중요한 요소다. 우리 또한 북한 핵무기가 현안이며,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에서도 전술핵 사용 여부가 큰 변곡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따라서 21세기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핵무기가 어떤 국제정세 속에서 개발되었는지, 그와 관련된 과학기술적인 원리가 무엇인지, 이후 세계는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저자 이종필은 리처드 로즈의 『원자폭탄 만들기』의 이야기를 인용해 역설하고 있다. 물론 책에 과학자들의 천재성과 엄청난 노력 등이 녹아 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위해서다. 따라서 이젠 핵무기를 문명 발전에 어떻게 이용해야 할까에 대해 인류에게 새로운 숙제를 남긴 셈이다. 이로써 과학, 특히 물리학 발전의 새로운 방향과 과제로 부상한다.


오펜하이머의 기구한 일생은 과학과 사회의 관계, 과학자의 윤리의식과 사회적 책임 등 결코 가볍지 않은 문제에 관한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특히 맨해튼 프로젝트는 20세기 과학의 대표적인 특성인 이른바 빅사이언스의 본격적인 시작이어서, 과학과 사회가 만나는 방식이 극적으로 전환되고 있었고, 그 속에서 과학자들의 역할과 책임 또한 예전처럼 간단하지 않게 되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는 프로메테우스적인 삶을 살았던 한 영웅의 복잡 다면한 모습을 층층이 파헤쳐 과학이란 무엇이며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지 다시 묻고 있다.(p.175)


저자 : 이종필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물리학자. 과학 커뮤니케이터. 서울대학교 물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입자 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부설 고등과학원KIAS, 연세대학교, 서울과학기술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현재 건국대학교 상허교양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샐러리맨, 아인슈타인 되기 프로젝트』 『우리의 태도가 과학적일 때』 『신의 입자를 찾아서』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물리학 클래식』 등이 있고, 번역서로 『물리의 정석』 시리즈, 『그림으로 보는 모든 순간의 과학』 『블랙홀 전쟁』 『최종 이론의 꿈』 등이 있다.

최근 출간한 『물리학, 쿼크에서 우주까지』 책에는 가장 작은 입자에서 가장 큰 우주까지, 세상이 작동하는 근본 원리를 추구하는 물리학의 결정적 장면들이 담겨 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힘과 운동의 법칙부터 인간의 직관을 뛰어넘어 미시세계를 지배하는 양자역학까지, 만물의 근원이 되는 입자의 발견에서 우주의 탄생과 미래에 대한 비밀까지. 비밀이 풀리는 물리학 여행이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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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 아일랜드
김유진 지음 / 한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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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향기 산업단지 센트 아일랜드에서 꿈을 좇아 분투하는 젊은이들의 도전기를 담은 이 책은 "꿈이 있는 한 내 몸에 밴 꿈 냄새는 절대 지워지지 않아."란 명문을 남기기 위해 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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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트 아일랜드
김유진 지음 / 한끼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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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이 책 『센트 아일랜드』는 청소년 소설이다. 독자가 이 책을 선택할 땐 우리 청소년을 위한 소설의 발전을 직접 체험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책은 자연스럽게 독자의 청소년 시절을 되새기게 한다. 독자의 청소년기는 우리 사회가 산업화해 가는 과정이었다. 책은 모두 대학입시에 맞춰져 있었다. 선생님들도 입시 대비해 가르쳤다. 즉, 시험에 나올 것과 나오지 않는 부분을 잘 가름했다. 그래서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내야 교사로서도 능력이 인정된다. 그때 국어 교과서 외의 책은 별도로 읽기를 권장하지 않았다. 서양 고전이나 동양의 고전에 해당되는 몇몇 권만 독서를 권장할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청소년 문학이 발전할 토양이 제대로 갖추어질 수 없었다. 작가도 학교도 소설은 시간 보내기였을 뿐 오히려 소설 읽을 시간에 입시 공부해라고 다그칠 정도였다. 

청소년기는 정서적으로 방황할 때다. 뿐만 아니라 이성에 관한 관심이 높아질 때다. 연애 소설이나 멜로 소설을 읽고 싶은 호기심은 충만하다. 그러나 선생이나 가정에서도 연애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대학을 포기한 사람이나 하는 일이었다. 대학 입시를 위한 귀중한 시간의 낭비였다. 그래도 문학에 관심이 있는 이들은 대부분 외국 고전으로 소개된 비교적 순수한 사랑이야기를 읽어야 했다.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는 중요치 않았다. 그런 것은 대학에 가서 정해도 될 일이었다. 소설가들도 청소년을 위한 책은 별로 쓰지 않았던 것 같다. 독자의 청소년 시절에는 시대 상황이 그랬다. 그리고 독자는 연애 소설 한 권 못 읽고, 장래 희망을 결정할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한 채 지금껏 훨씬 어려운 책을 읽고 있다. 심리학, 정신의학 등 꼭 읽어야 할 많은 책들은 나중에 관심이 생겨야 읽게 됐다. 이것은 결국 자신의 직엄과 관련되지 않은 책은 거의 읽지 못한다는 의미와도 동일하다. 

이 책을 보면서 독자의 느낌은 무척 행복했다. 청소년들의 꿈과 희망을 펼칠 많은 것을 소설에서 녹여내고 있다. 그리고 이 꿈과 희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도 내포하고 있다. 청소년기에 무엇을 읽느냐에 따라 꿈도 바뀌고, 세상살이에도 많은 영감을 받을 수 있을 텐데···. 독자 세대는 그것이 생략돼 있다.



이 책은 열아홉 살 다린이 열 살 때부터 꿈꾸었던 '센트 아일랜드'에 입사해 향기 전문가가 되려는 과정과 노력이 잘 표현돼 있다. '센트 아일랜드'는 전 세계 향기 산업의 핵심 집합체이자 복합 연구 단지이다. 이곳은 매년 한 차례, 후각이 뛰어난 19세의 ‘인턴 연구원’을 선발한다. 뛰어난 후각은 필수다. 다린은 센트 아일랜드 인턴이 되기 위해 하루하루 향기 공부에 매진했다. 드디어 시험을 볼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치른 1차 필기시험에서 합격하면서 2차 시험을 치르기 위해 산업단지로 들어간다. 네 차례에 걸친 테스트를 통과해야 한다. 그토록 기대하던 센트 아일랜드에선 어떤 일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곳에서 응시자로서 함께 숙식을 하며 테스트를 받는 친구이자 경쟁자들과 만나 벌어지는 예상치 못한 사건과 사고가 묘사된다. 저자 김유진은 소설의 묘미를 돋우기 위해 이 연구단지와 엄마의 과거를 엮어 이야기를 끌어간다. 다린은 이 시간을 무사히 견뎌 내고 기다리던 ‘합격’하고 꿈을 이룰 수 있을까.

최근 우리에게 닥친 코로나 감염병처럼 이 소설 속에서도 감염병 바이러스 시대가 묘사된다. '향기'는 이 바이러스 시대를 이겨내는 치료제를 개발한 센트 아일랜드의 트레이드 마크이다. 이때 감염병으로 후각을 잃은 사람들이 많아지며 센트 그룹은 향보리 추출물을 통한 치료제 개발에 박차를 가한다. 사람들의 후각은 전보다 더 예민해졌다. 초기에 치료제만 만들던 센트 그룹은 향과 관련된 다양한 것을 연구·제조하는 대단위 산업단지화 할 정도로 커졌다. '센트 월드'를 만들어 단순히 향을 맡는 게 아니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향을 체험하게 하자, 사람들은 센트 그룹을 더 열광하게 된다. 이 가운데 최고의 인기인 센트 아일랜드는 화산 폭발로 만들어진 섬이다, 섬 가운데 보라색 퍼플산이 자리하고 있다. 센트 아일랜드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센트 그룹이 만든 첨단 시설이 어우러져 더욱 독특한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연보랏빛 모래사장, 절경에 조성된 용암 온천, 분화구 옆에 설치된 거대한 케이블카, 센트 아일랜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 출입은 불가하지만 멀리서 보이는 대규모 향 연구 단지까지···. 그야말로 향기 치료제를 위한 대단위 산업단지다. 사람들은 센트 아일랜드는 죽기 전 꼭 한번 방문해야 할 관광지로 손꼽기도 한다. 다린은 가장 먼저 엄마에게 1차 합격 소식을 전하지만, 뜻밖에도 엄마의 강한 반대를 마주한다. 엄마와 한바탕 설전을 벌이고, 결국 응원조차 받지 못한 채 찝찝한 마음으로 2차 시험을 위해 시험장으로 떠난다. 7,00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선발된 지원자들은 센트 아일랜드로 가는 크루즈선에서 네 차례의 테스트를 치른다. 모두가 상위 1% 뛰어난 후각을 가진 친구들이다. 

이 테스트에서도 경쟁자들의 등수는 나눠진다. 테스트마다 1등과 꼴등이 발표되고, 꼴찌는 그 즉시 짐을 싸서 돌아가야 한다. 가혹하다시피 엄격한 경쟁이다. 예상치 못한 방식에 응시자들의 긴장감은 고조되고 급기야 부정을 저지르는 일까지 발생한다. 와중에 다린은 센트 연구소에서 우연히 엄마의 흔적을 발견한다. 엄마가 왜 이곳에? 엄마의 에 조금씩 다가가는 다린. 과연 다린은 엄마가 반대했던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 사실 다린은 이미 센트 월드를 방문한 적이 있다. 다린이 열 살 생일 기념이었다. 다린은 센트 월드에서 후각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게 된 후, 센트 그룹에 입사하는 꿈 하나만을 위해 달려왔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향을 분석하고 공부하며 전력을 다해 꿈을 좇았다. 

그렇게 센트 아일랜드 인턴 2차 시험장까지 왔다. 센트 아일랜드에 도착하기 전, 모두가 모인 연회장에서 갑자기 연기가 나오면서 향기를 맞추는 사전 테스트가 진행된다. 사전 테스트는 룸메이트 별 팀전. 연기의 향을 맞춰, 금고를 열고 그 안에 있는 옷과 배지를 착용해야만 센트 아일랜드에 입성할 수 있다. 팀원 중 단 한 명이라도 제한시간 내 도착하지 못하면 다시 육지로 돌아가야 한다. 크루즈선은 마치 향기를 위한 배처럼 향에 관한 배답게 호화롭기도 하고, 향기를 내는 거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 음료를 마실 때도 자신이 원하는 향을 추가해 마시도록 돼 있고, 시험을 위한 것이니만큼 응시자들은 향에 관한 기억을 담아야 한다.



이곳에 와 알게 된 로라와 다린은 같은 팀에 배치된다. 팀원들이 힘을 합쳐 미션에 응해, 통과해야 한다. 또 다른 팀 메이트 지나는 몸이 굼뜬 편이라 느렸지만, 팀을 도와 공동으로 미션에 통과한다. 그렇게 도착한 센트 아일랜드. 교육생들은 센트 아일랜드를 돌아보며 각각 자신이 원하는 연구소들을 방문한다. 뚜껑이 달린 하나의 큰 물병처럼 생긴 센트 오리지널, 공간의 향을 연구하는 센트 스페이스, 색조 화장을 한 듯 팔색조 매력을 선보이는 하나의 아이섀도우 팔레트처럼 생긴 센트 뷰티 등 연구소들은 각각의 특성에 맞추어 독특한 형태의 외관을 자랑하고 있다. 일랑은 센트 뷰티, 지나는 센트 푸드, 다린과 로라는 센트 스페이스로 향한다.

저자 김유진은 등장인물과 배경이 생동감 있도록 주의를 기울인다. 앞선 문장처럼 머릿속으로 그리고 따라가다 보면 마치 애니메이션을 보는 듯한 시각적인 즐거움을 독자들은 느낄 수 있다. 또 강한 성격의 캐릭터들에 대한 생생한 묘사가 향기가 느껴지는 듯한 후각적인 상상력을 채워준다. 숙소로 돌아온 이들은 각자 탐방한 연구소를 얘기하며 다사다난했던 센트 아일랜드에서의 첫날을 마무리한다. 센트 아일랜드에서의 둘째 날, 두 번의 테스트에 성공하며 우쭐해하던 다린은 시궁창 냄새를 없애야 하는 개별 테스트에서 냄새를 덮는 데만 급급해 결국 순위권에서 밀려난다. 다린은 인생 첫 실패와 좌절을 겪으며 그동안 자신이 우물 안 개구리였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렇게 몇 차례의 테스트를 거치며 다린을 포함한 로라, 지나, 일랑. 룸메이트 4인방은 때로는 경쟁자이자 때로는 조력자로 함께 웃고, 울며 힘든 시간을 함께 보낸다.

크루즈선에서 실시되는 테스트는 묘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다. "안녕하세요, 4박 5일간 여러분의 인솔자 고도명입니다." 무대에 오른 듯이 원형 버스의 중앙에 선 인솔자가 허리를 숙여 공손히 인사한다. 그의 목에 걸린 배지가 허공에서 대롱대롱 흔들린다. 다른 센트 그룹 직원들이 그렇듯이 그도 보라색 재킷을 입고 있다. 그는 세 가지 수칙을 일러 주고 간단한 인삿말을 대신한다. ① 촬영 금지 ② 외부 연락 금지 ③ 시험장 녹화 촬영 등 이미 안내문에 고지된 내용이다. 공정한 경쟁을 위해서라고는 하지만 어딘지 수상쩍은 점이 엿보인다.



2차 테스트에 임하는 응시생들이 치러야 하는 일은 경쟁적이라기보다 생존경쟁 같은 처절함이 묻어난다. 요즘 대기업 입사보다 훨씬 더 엄격하고 처절함마저 느껴진다. 얼마 전 유행했던 '오징어 게임' 같은 살아 남기 게임 같다. 

어릴 적부터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몇 명이나 될까? 꿈의 씨앗을 겨우 찾는다 해도 누군가는 그것을 심는 데에 그치지만, 다린은 씨앗의 소중함을 알아보고 끊임없이 물과 양분을 주며 가꾸고 돌본다. 상상도 못한 테스트를 마주하면서도 향에 관한 일이라면 진심으로 맞부딪히는 다린에게서는 소설 속 말처럼 ‘꿈 냄새’가 난다.

"꿈이 있는 자들에게는 꿈 냄새가 나. 꿈이 있는 한 네 몸에 밴 꿈 냄새는 절대 지워지지 않아." 아빠가 다린에게 해준 말이자 힘든 순간마다 다린이 자신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이다. 이 말은, 하고 싶은 일을 좇으며 하루하루를 진심으로 애쓰는 우리 모두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깊이 각인해야 할 말이기도 하다. 

『센트 아일랜드』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자신의 목표가 뚜렷하지만, 모두가 그렇지는 않다. 일랑은 선천적으로 뛰어난 후각을 타고나서 1차 시험에 통과했지만 아직 확고한 꿈은 없다. 하지만 센트 아일랜드에서 다린과 다른 친구들을 만나 자신의 꿈을 찾아 나간다. 로라는 아빠 때문에 목표를 갖게 되었지만, 친구들을 만나며 선의의 경쟁이라는 재미를 느낀다. 서로 열정과 꿈을 나눠 가지며 미래를 향해 달려가는 그들의 모습은 눈부시다. “꿈이 있는 자들에게는 꿈 냄새가 나.”라는 소설 속 대사처럼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다린과 아이들처럼 자신의 꿈을 돌아보고 주변 친구(혹은 동료)와 ‘꿈 냄새’를 함께 나누는 계기가 되어줄 것으로 독자는 믿는다.


마침내 합격자 발표 시간이 되었다. 어쩌면 이날을 위해 10여년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있는 자들에게는 꿈 냄새가 나. 꿈이 있는 한 내 몸에 밴 꿈 냄새는 절대 지워지지 않아."(p.288)


저자 : 김유진


““꿈 깨.” 처음 글을 쓴다고 했을 때 들었던 얘기입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주인공 ‘다린’에게 꿈을 주입했습니다. 무작정 저에게 꿈을 불어넣었으면 팡! 하고 터졌겠지만, 다린에게 꿈을 불어넣자 『센트 아일랜드』가 탄생했습니다. 그즈음 7년간의 회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글쓰기에 매진했습니다. 현재 한 평 남짓한 서재에서 글로, 온 세계를 그려 나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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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자들
고은지 지음, 장한라 옮김 / 엘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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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나라와 민족에게 20세기는 그야말로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할 만하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기고 36년의 일제 식민지 생활을 했고, 간신히 식민지를 벗어나자마자 남과 북으로 갈려져 동족상잔의 뼈아프고 참혹한 전쟁을 3년이 넘도록 치렀다. 6.25 한국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휴전한 채 다시 70여년이 흐르고 있다. 우리에게 20세기는 온전히 암흑의 시대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우리 남한 쪽만으로도 세계적 경제 대국과 민주화를 이뤘다는 것은 '기적'이라 불릴 만하다. 경제 대국과 민주화는 겉으로 드러난 성과이지만 이 같은 성과를 내기까지 또 수많은 노동자와 민주 투사의 희생이 있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21세기도 4반세기가 지나는 시점에서 디아스포라 현장을 되돌아보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지만, "잊지 않아야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는다"는 역사의 준엄한 경고 앞에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이 설 자리를 찾고 있다.

요즘 '디아스포라 문학'이 SF 붐을 타고 많이 활성화되고 있다. 여기서 디아스포라(Diaspora)라는 단어의 어원은 고대 그리스어에서 '~너머'를 뜻하는 '디아(dia)'와 '씨를 뿌리다'를 뜻하는 스페로(spero)가 합성된 단어로, 이산(離散) 또는 파종(播種)을 의미한다고 한다. 본래는 팔레스타인을 떠나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면서 유대교의 규범과 생활 관습을 유지하는 유대인을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후에 그 의미가 확장되어 본토를 떠나 타국에서 자신들의 규범과 관습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또는 그들의 거주지를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이 책 『해방자들』은 이런 관점에서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말에 걸쳐 100년 동안 한국인은 식민지배의 수탈과 압제, 남북간 이념 전쟁과 국토의 분단, 이후 들어선 군부독재에 철저히 짓밟히고 노예 같은 삶을 이어왔다. 이 과정에서 한반도에서 살지 못하고 외국으로의 이주를 택한 많은 사람들이 있다. 오늘날 교포, 동포로 지칭되는 사람들이다. 이들이 이주해 간 곳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았을까? 결코 아니다. 어디에 붙어 있지도 모르는 나라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곱게 시선을 줄 곳은 없었기 때문이다.



역으로 고국을 떠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은 어떤 모습으로 새겨져 있을까?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의 개막을 알렸던 이민진의 『파친코』는 4대에 걸친 재일조선인 가족의 이야기를 그려내 세계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파친코』는 재미교포 1.5세대인 이민진 작가가 30년에 달하는 세월에 걸쳐 집필한 대하소설로, 2017년 출간되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이후 전 세계 33개국에 번역 수출되었으며, 뉴욕타임스, BBC, 아마존 등 75개 이상의 주요 매체의 ‘올해의 책’, 전미도서상 최종 후보에 선정되며 평단과 대중을 모두 사로잡았다. 한국의 이야기에 세계를 눈물 짓게 만든 화제작이자 21세기의 새로운 클래식으로 자리매김한 『파친코』의 감동이 아직도 대한민국 독자들에게는 강렬하게 남아 있다. 

이 소설 『파친코』의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 일제강점기 부산 영도에서 시작해 버블경제 절정에 이르렀던 1989년 일본까지, 한국과 일본을 무대로 거의 100년에 걸쳐 펼쳐진다. 어머니 양진과 함께 허름한 하숙집을 꾸리며 살아가는 열여섯 선자는 일본을 오가며 일하는 생선 중개상인 한수를 만나 처음으로 조선 밖의 더 넓은 세상을 상상하기 시작하지만, 그의 아이를 가진 뒤에야 그가 오사카에 아내와 아이를 둔 남자임을 깨닫고 상심한다. 한편 선자네 하숙집 손님으로 온 목사 이삭은 선자를 자신의 운명으로 여겨 청혼을 하고, 선자는 이삭과 결혼해 오사카로 건너가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러나 조선인이자 여성으로서 차별과 멸시를 견디며 "더 이상 일할 수 없을 때까지 일해" 자신과 가족을 지켜내야만 하는 선자의 삶은 지난하고도 고되었다. 선자를 둘러싼 파란만장한 가족사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럽게 해방, 한국전쟁, 분단 등 한국 근현대사와 겹쳐지며,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자이니치(재일동포를 일컫는 말)’의 삶이 눈에 들어오면서 가슴이 먹먹해진다. 이 책을 쓴 이민진 작가는 일곱 살 때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간 한국계 미국인 작가다. 한국말이 서투르니 영어로 소설을 썼고, 그 소설을 우리말로 번역해 출간되었다. 

이민진의 『파친코』를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파친코〉도 제작됐다. 이 드라마의 주요 배우들과 작가를 비롯하여 작품의 감독인 코고나다와 저스틴 전과 각본 수 휴 모두 부모님이 한국 사람인 한국계 미국인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한국어·일본어·영어 3개 언어로 완성했다. 이 드라마는 2022년 3월 25일 〈애플 TV+〉를 통해 방영됨으로써 전 세계에 한국의 디아스포라를 보다 널리 알린 계기가 되기도 했다.



『파친코』를 통해 코리안 디아스포라 문학의 자장 안에서 눈에 띄는 작가인 고은지의 첫 소설인 『해방자들』에도 교포들의 시선이 담겨 있다. 더욱이 저자 고은지는 드라마 〈파친코〉의 작가진 중 한 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해방자들』의 이전에 저자 고은지는 이미 다양한 수상 이력으로 이름을 알린 작가다. 2017년 시집 『시시한 사랑』으로 플레이아데스 프레스 편집자상, 2020년 자전적 에세이 『마법 같은 언어』로 워싱턴주 도서상, 퍼시픽 노스웨스트 도서상, AAAS 도서상을 수상했으며 펜오픈북상 후보에 올랐다. 또한 이원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영어로 번역해 한국문학번역원 번역대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2023년에 출간된 『해방자들』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아픔과 희망을 섬세하게 묘사한 작품으로, 2024년 뉴욕 공공 도서관 주관 ‘젊은사자상’을 수상했다. 저자는 이 작품에서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주한 한 가족의 역사를 통해 수십 년간 계속된 점령, 전쟁, 분열의 상처를 여실히 그려냈다. 나아가 역사와 사회가 개인에게 남기는 상처를 사랑으로 치유하는 희망적인 미래를 그려낸다.

저자 고은지가 지금까지 출간한 책은 모두 네 권이다. 시집, 자서전, 번역서, 그리고 이번에 출간한 소설이다. 네 권이 모두 다른 분야인 것도 놀랍지만, 네 권 모두 다양한 수상 이력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더하면 더 놀랍다. 그가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한 것은 대학교 4학년 때라고 한다. 당시 그는 힙합 댄서의 꿈을 꾸고 있었다. 출판사 측의 소개글에 따르면 수학 성적을 채울 수 없어 듣게 된 시 입문 수업을 계기로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다. 수업을 듣게 된 첫 주에 고은지는 마흔 편의 시를 썼다. 시를 쓰면서 고은지는 자신의 언어를 발견했다. “그 당시 나는 무척 우울했지만 나에게는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슨 일을 겪었는지 표현할 수 있는 언어가 없었다. 시를 쓰기 전까지는 내가 지내는 방식에 불안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언어를 손에 넣으면서, 자기 안에 있는 결여와 고통을 마주 보게 된 것이다. “이게 나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구나-그렇게 생각했던 것을 기억합니다. 글쓰기는 제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일이었어요.”



저자 고은지의 이력에는 다른 교포들과는 또 다른 개인 가족의 상황도 가해져 더 힘든 나날을 보냈다. 저자가 열네 살이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에게 한국에서 일자리 제안이 왔다. 정서적 안정보다 금전적인 지원이 중요하다고 판단한 그의 어머니는 남편과 한국으로 이주해 9년 동안 아이들과 떨어져 지냈다. 애정과 소속감에 굶주렸던 저자는 오래도록 눌러 담은 원망과 분노를 시에 담기 시작했다. 시집 『시시한 사랑』은 바로 그런 고독과 공허의 결과물이다. 저자에게 교수는 번역을 시작해보라고 조언했다. 그의 시에 너그러움이 부족하다면서, ‘용서’를 시 안에 녹여 넣는 방법을 찾으라고 한 것이다. 저자가 선택한 용서의 시작점은 어머니가 남긴 편지들이었다. 한국에서 지내면서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지만, 고은지가 49통의 손 편지가 들어 있는 상자를 열어본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였다는 것.

저자에 따르면 편지 번역은 자전적 에세이 『마법 같은 언어』로 이어졌다. 편지를 번역하면서 고은지는 마침내 어머니를 용서했다. 그뿐만 아니라 어머니의 선택도 이해하게 되었다. 그 편지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함께, 한국 현대사에 얽힌 가족사가 담겨 있었다. 관동대지진 이후 이어진 한국인 학살, 제주도 4·3, 한국전쟁과 분단, 남한의 군부독재까지. 처음으로 한국의 역사가 어머니와 어머니의 가족에게 어떤 상처를 남겼고 가족이 어떻게 무너졌는지 알게 된 것이다. 어머니가 자신에게 남긴 외로움을 이해하기 위한 노력은 이윽고 어머니의 고국이자 자신의 뿌리인 한국으로 이어졌다. 저자는 한국의 역사와 역사가 남긴 고통을 되짚는 길을 걷기로 했다. 그 고민과 노력은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과거, 현재,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닿았고, 고은지는 이민진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드라마로 만든 〈파친코〉에 작가진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정 에피소드에서는 메인 작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책 『해방자들』은 저자 고은지의 작품 세계가 온전히 구현됐다는 평가다. 『해방자들』의 이야기는 1980년 대전에서 시작한다. 군부독재와 계엄령의 시대, 혼자 딸 인숙을 키우던 요한은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받고 교도소로 끌려가 죽음을 당한다. 인숙은 성호와 결혼한다. 성호는 임신한 인숙을 어머니와 함께 남겨두고 미국으로 떠나고, 인숙은 시어머니 후란의 시집살이를 견디며 생계를 이어간다. 아들 헨리가 태어난 후 인숙은 성호가 있는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한다. 조국과 멀어진 땅에서 후란은 아들과 며느리 사이를 질투하고, 성호는 고부갈등을 외면하고 일터로 도망친다. 외로운 인숙을 위로하고 헨리를 돌보는 사람은 인숙이 일터에서 만난 사업가 로버트다. 그런 집에서 자란 헨리는 한곳에 머물지 않는 사람이 된다.



가족의 삶 사이사이 떠오르는 과거는 아직 아물지 못한 상처다. 군부독재 정권은 요한의 목숨을 빼앗고 성호가 허무를 품게 만들었다. 로버트의 어머니 고일을 망가뜨린 건 일본의 지배와 제주도 4·3이다. 전쟁과 함께 반으로 갈린 한국은 로버트를 영원히 신념에 붙들어두었다. 북한에서 건너온 제니는 통일이라는 희망이 과거를 지우는 망상이라며 분노한다. 서울올림픽의 봉화는 어린 헨리에게 영원히 못 박힌 기억으로 남았고, 삼풍백화점 소식은 후란의 트라우마를 건드린다. 세월호 뉴스를 보던 어린 하루는 어째서 아무도 승객들을 구해주지 않는지 묻는다.

개인의 삶과 나라의 역사는 거미줄처럼 얽혀 있다. 『해방자들』의 이야기는 대부분 미국 캘리포니아를 배경으로 진행되지만, 소설 속 인물들을 얽매고 있는 가장 큰 고통은 자신의 조국이다. 이민자들의 역사에서 미국은 조국의 잔혹한 전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도피처로 표상되지 않는다. 국가가 겪은 수십 년간의 점령, 전쟁, 분열은 개인의 삶에도 흉터를 남긴다. 그러므로 『해방자들』은 그저 한 재외국민 가족의 이야기가 아닌, 조국의 역사에 얽매인 우리 자신의 서사 자체다.

『해방자들』에서 눈에 띄는 점은 많은 파괴와 상처가 한국인 사이에서 일어난다는 점이다. 이민자 문학에서 주로 보이는 ‘이방인 의식’은 주로 인종차별과 소수 집단의 무력감, 떠나온 모국과 거주하는 타국의 경계에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자의식에서 기인한다. 그러나 고은지의 작품에서 주축을 이루는 것은 다름 아닌 ‘재외동포의 한(恨)’이다. 그렇기에 『해방자들』은 경계를 극복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한국을 떠나서도 한국의 역사가 남긴 상처로 일그러졌고 서로를 향해 경계를 세웠다. 마치 한 나라를 반으로 가른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선’처럼. ‘자연스러운 경계가 아닌’ 국경은 ‘문화와 언어를 공유하는 사회’를 갈라놓았으며, 사람 사이에 세워진 경계는 서로를 끝없이 외부인으로 만든다. 그러나 신념이나 세대를 이유로 서로를 괴롭히고 죽이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럼에도 화해와 화합을 향해 나아간다. 세대 차이에 힘겨워했던 후란과 인숙은 서로를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성호와 인숙의 불화는 후란의 죽음과 함께 치유된다. 신념의 차이가 있긴 해도 헨리와 제니는 같은 음식을 먹으며 하나로 묶인다. 그렇게 역사적 사건들에 몰려 삶의 터전을 옮겨간 가족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다치고 상처받았다 해도 서로를 감싸고 위로하는 한 우리는 언제든 다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믿음, 이 묵직한 메시지와 함께 『해방자들』은 독자들에게 치유와 화해에 대한 소설로 기억될 것이다.



우리는 저마다 답을 찾아보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물속에서 아이들은 어디로 갈 수 있었을까? 성호가 말했다. “가라앉는 배에 타고 있을 때는 아무도 믿으면 안 돼. 다른 사람 말은 절대 듣지 마.” 

배의 한쪽부터 시작해 객실이 차례대로 가라앉는 모습은 나라가 가라앉는 모습 같았다. 구조를 하러 간 잠수부가 증언했다. “이제 어떤 재난이 닥쳐와도 국민의 도움을 구하지 말고 정부가 알아서 하십시오.” 헨리가 돌아왔고, 딱딱하게 굳은 채 위층 방으로 걸어 올라갔다. 나는 어느 자리에 있든, 설령 고통받고 죽는 상황에서도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많은 것들에 관해 제니에게 이야기했다. 제니는 한숨을 쉬었다. 고개를 젖히고 내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어떤 상황에서든 희망을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거나 실망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p.264)


저자 : 고은지(E. J. Koh)


1988년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너제이에서 태어났다. 컬럼비아대학교에서 문예창작과 번역학으로 석사 학위를 받고 워싱턴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17년 시집 『시시한 사랑』을 출간해 플레이아데스 프레스 편집자상 시 부문을 수상했고, 2020년 어머니와의 관계를 다룬 자전적 에세이 『마법 같은 언어』로 워싱턴주 도서상, 퍼시픽 노스웨스트 도서상, AAAS 도서상을 수상했으며 펜오픈북상 후보에 올랐다. 이원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가벼운 오토바이』를 영어로 번역했으며, 이 작업으로 한국문학번역원 번역대상을 수상했다. 드라마 [파친코]에 작가진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2024년 젊은사자상 소설 부문을 수상한 『해방자들』은 고은지가 쓴 첫 소설로, 코리안 디아스포라의 아픔과 희망을 섬세하고 아름답게 묘사한 작품이다. 한국에서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된 한 가족의 역사를 담은 이 작품은 한반도에서 수십 년간 계속된 점령, 전쟁, 분열의상처를 신중하고 고운 언어로 되짚는다. 나아가 작가는 과거가 남긴 고통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희망의 미래를 그려낸다.


역자 : 장한라


서울대학교 인류학과 불어불문학을 전공했으며, 같은 대학 인류학과 석사과정을 수료했다. 국제 행사 통역과 사회과학 분야 논문 번역을 맡으며, 다양한 장르의 책을 번역하고 글을 쓰고 있다. 역서로 『세계를 움직인 열 가지 프레임』 『세계의 교사』 『말의 무게』 등이 있으며, 저서로 『열두 달 초록의 말들』 『너와 나의 야자시간』(공저) 『게을러도 괜찮아』(공저)가 있다. 구입한 물건을 오래 쓰고, 되도록 음식은 남기지 않고 다 먹고, 일회용품을 사용하지 않으려 노력한다.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식으로 환경을 생각하며 살아가고 싶다. 글을 쓰거나 옮기며 여행 생활자로 지내고 있다. 곳곳을 돌아다니며 채집한 경험의 기록을 『열두 달 초록의 말들』로 한데 모았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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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녕가
이영희 지음 / 델피노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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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화녕가(歌)』는 일제 강점기에 가수를 꿈꾸던 한 여인의 기구한 일생과 시대의 아픔을 녹여낸 소설 작품이다. '인예'는 진주의 한 양반집 딸이다. 부모가 모두 죽었지만 할아버지 '순행'은 하인들을 거느린 진주에서 꽤 행세를 하는 양반이다.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은 인예가 10살이었다. 오빠 인서는 11살이고 당시 진주 최초의 소학교인 사립 봉양학교 학생이다. 봉양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인서는 저자(시장)에서 광대 패거리를 맞닥뜨렸다. 연지곤지 칠한 사내가 여인보다 고운 목소리로 가락을 뽑아냈다. 이때 광대 패거리들이 부르던 노래가, 이애리수가 불렀다고 알려진 〈황성의 적〉이다. 우리에게는 〈황성 옛터〉로 알려졌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당시 시대는 광대들도 전통 창가와 마당놀이가 아닌 신 유행가와 신파극을 선보이던 시절이라고 저자는 소설 지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양반집답게 이런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근처만 지나가도 치도곤을 내리겠다는 할아버비 순행의 엄포가 인서의 머리를 스쳤지만 선명히 울리는 가락에 밀려나고 만다. 같이 오던 아범(아마 집 하인인 행랑아범을 지칭한 듯)이 어쩌려고 이러시냐고 어서 가지자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인서의 발걸음은 흘려 버렸다. 집에 돌아오자 아범은 순행의 명령에 따라 멍석말이 태형을 당한다. 이 사달은 모두 인서의 탓이지만 아래 하인이 주인 도련님 대신 매를 맞는 것이다. 말리고 제대로 모셔와야지 그것을 듣고 있었다는 죄목 때문이다.



서씨 부인(할아버지 순행의 재취)은 순행보다 30살이나 어리지만, 인서의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새미골 남초시 집안의 모든 실권을 틀어쥐고 있다. 서씨 부인이 순행의 지시에 따라 멍석말이 당하는 장면을 똑바로 지켜보고 가슴에 새기라고 한 점을 다시 한 번 인서에게 재확인하듯 인서의 고개를 돌려놓았다. "멍석말이 태형을 20대에서 하나도 감하지 말고 손끝에는 절대 정을 두지 말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 손주께서는 눈에 박히고 귀에 새기듯 똑바로 지켜보시라 했지요. 허니, 순주님! 외면치 말고 똑바로 하세요."

서씨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서를 세워 둔 채 인예의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간다. 인예를 안듯이 데려 가며 서씨 부인은 태형을 치는 하인 병구에게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명령한다. "행여 아범이 똑바로 걸음걸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니 놈의 다리가 부러질 줄 알거라." 안 그래도 불에 타서 한쪽이 일그러진 아범의 얼굴이 매질 끝에 한층 더 일그러졌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범의 아낙 무명댁은 입술을 질근 씹었다. 역시나 한 쪽이 불에 탄 얼굴이었다. 손에 잡혀 끌려들어가던 인예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지만 인서는 황소처럼 콧김만 토해냈다. 절대 울지 않을 것이야! 난 절대 울지 않아! 민들레 풀씨처럼 어린 주먹을 꽉 틀어진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화녕이 등장한다. 독자들이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다. 소설의 설명을 들어가며 부연 설명을 독자가 덧대어 본다. "화녕의 꿈은 신파극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10년 전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하여 현해탄에 뛰어들었다는 윤심덕이 화녕의 롤 모델이었다. 목숨은 하늘에 속했는데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은 칭찬할 일이 못 된다. 하지만 일본 유학 후 대한제국 최초의 여가수로 불리며 〈사의 찬미〉 레코드판까지 남긴 것은 극진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죽음 이후에 몰고 다니는 온갖 낭설도 11살 소녀의 마음에는 그저 낭만이었다.

게다가 경성의 단성사에서 태양극장 창립공연으로 관람했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은 지금도 다 외우고 있다. 작년에 극단이 해체되고 말았다니 퍽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와 달리 채단은 곡조에는 무심히, 좁고 세로로 긴 창문을 단속하기에 바빴다. 사랑채로 사용하는 별채에서 건너오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p.12)



앞서 잠깐 언급된 〈황성 옛터〉는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의 달 밝은 밤,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만든 가락이라고 한다. 느린 3박자의 리듬에 요나누끼단음계(혹은 미야코부시 음계)로 만들어진 가요곡으로 이다. 이 애수적인 멜로디가 전수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의 서울 단성사(團成社) 공연 때 여배우 이애리수가 막간무대에 등장해 이 노래를 부르자, 객석에서는 '재창'을 외치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전하고 있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이애리수가 노래할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 불렀다. 신경과민이던 일본경찰은 중지하라는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앞서 적힌 가사 뒤를 이어,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로 1절을 이루고 있다. 

화녕이 등장함으로써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이 선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 있다. 화녕의 롤 모델이라고 설명된 윤심덕은 "10년 전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몸을 던진 윤심덕"이라는 표현으로 인서의 진주에서의 일은 1936년쯤으로 추정된다. 윤심덕의 사건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윤심덕에 대해서는 우리 가요계에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윤심덕은 평양 출생으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했으며, 강원도 원주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교) 성악과에서 수업받았다. 1921년 동우회(同友會) 등의 순회극단에 참여하면서 극작가 김우진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6월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성악가로 데뷔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되었다. 양악이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제대로 성악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 또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정통음악을 가지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사생활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했다. 한때 극단 토월회 주역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연기력이 없어서 실패했다.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꿈꾸었던 예술 조국을 만들기에는 이 땅이 너무 낙후했고 견고한 유교적인 인습은 그녀를 더욱 못 견디게 했다.



특히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은 진보적인 도덕관을 지닌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다. 1926년 여동생 윤성덕의 유학길 배웅을 위해 일본에 간 그녀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먼저 와 있던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했다.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이 책 『화녕가(歌)』는 실로 〈파친코〉의 시대 배경과 많이 겹치는 듯하다. 이 작품도 동일한 시기를 배경으로 윤심덕과 같은 실존 인물들이 모티프가 되어 소설화된 작품이다. 1920~40년대 한국 가요사는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아낸 중요한 문화적 유산으로 이 시기의 가요들은 단순한 음악을 넘어, 민족의 슬픔과 절망 또 동시에 희망과 저항의 상징이었다고 이 책을 출판한 〈델피노〉 측은 밝히고 있다.

저자 이영희는 이 소설에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적 투쟁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그 시대의 절절한 정서를 문학적으로 재현했다. 이 시기는 일제의 만주사변, 난징대학살, 중일전쟁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공하며 식민 지배국을 늘려나간 시대이자 수탈과 탄압이 더욱 가혹해진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람들은 스타에 열광하며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이 책 『화녕가(歌)』는 이 시기에, 불꽃같은 열망을 품고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화녕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며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당시 한국 대중음악이 가진 역사적, 민족적 의미를 섬세하게 탐구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또한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김서정 작사·작곡의 〈강남달〉 등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곡의 가사를 소설에 삽입하여, 화녕의 마음을 그 음악적 의미와 함께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유모인 채단 한 명만 앉혀 두고 부르는 초라한 음악회로는 제 핏줄 속의 가락이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버젓이 인예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도 올 수가 있었다. 그래도 혹여나 나중에 저도 제 노랫가락을 위해서 일본에 붙어먹지 못해 안달이 나지나 않을까? 자주 궁금하였다. 

첫 곡은 〈목포의 눈물〉이었다. 19살의 가수 이난영이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레코드판을 발매하자마자 경성에 다니러 갔던 재후(화녕의 아버지)가 사 들고 왔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콧소리가 섞여 꺾어지는 화녕의 음성이 안채 마당에 울려 퍼졌다. 계집애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가사 그대로 애달픈 사연에 예상외로 깊은 음색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럼 이 노래가 남녀상열지사가 아니라 일제가 호남의 곡창 지대 곡물을 수탈하는 목포항의 한을 그린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음 곡은 시에론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된 〈강남달〉이었다. 진주 출신 작곡가이자 무성영화 〈락화유수〉의 변사인 김영환이 지은 곡이라 일부러 골랐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놓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태형을 가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는 헌병대에서는 재후를 이렂저리 찢어놓았다. '갈가리'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았다. 재후가 까만 테라쟁이들과 하고 있었던 것은 마작이 아니고 공작이었단다. 1930년 진주학생만세운동, 1931년 진주농고 비밀결사, 1932년 진주고보 비밀결사, 그 모든 배후에 있었던 것이 바로 별채에서의 모임이었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호녕의 심장이 거북이 등껍질로 변하였다. 하지만 그래놓고 재후는 화녕을 채 1분도 보지 않았다. 총살형이 확정되었고 내일이 시행일이었는데도 긴말도 하지 않았다. 

"너와 나는 가는 길이 다르다. 나는 천황을 죽이고 싶고 너는 천황에게 신명을 바치는 삶을 살고 있다. 허니 애비와 딸로 이어진 인연은 저주이고 천형이로구나. 해서 오늘부로 깔끔히 갈라내니 난 더 이상 너의 아비가 아니다. 허니, 돌아가라, 소녀여!"(p.86) 재후는 그 짧은 말로 화녕을 뒤로 한 채 철문 안으로 사라져갔다. 충격이라는 말로는 부족하였다. 발밑이 무너진다는 표현으로도 어림없었다. 화녕은 눈물 한 방울 못 흘리고 아직까지는 제 집이었던 일본식 목조주택으로 돌아왔다. 축음기 앞에서 멍하니 한참을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너의 문제는 어찌 사느냐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너의 문제로구나. 살거라. 어찌해서든 살아남거라. 니가 아비의 뒤를 따른다면 아비의 수고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니가 살아남는다면 아비의 수고는 내 조국의 광명을 위한 마중물이 될 것임을 기억해라."(p.86~87)


저자 : 이영희


경남 진주시 하대동 거주

꽃을 사랑해서

꽃으로 글을 쓰는 글쟁이

<영남문학> 중편소설 등단

통일부 통일창작동화 수상

대한민국 e작가상 수상

제 7회 진주시 북 페스티벌 초청 강연

장편소설 『그 모퉁이 집』, 『감꽃 길 시골하우스』 출간




<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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