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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녕가
이영희 지음 / 델피노 / 2024년 8월
평점 :
이 책 『화녕가(歌)』는 일제 강점기에 가수를 꿈꾸던 한 여인의 기구한 일생과 시대의 아픔을 녹여낸 소설 작품이다. '인예'는 진주의 한 양반집 딸이다. 부모가 모두 죽었지만 할아버지 '순행'은 하인들을 거느린 진주에서 꽤 행세를 하는 양반이다. 소설이 시작하는 시점은 인예가 10살이었다. 오빠 인서는 11살이고 당시 진주 최초의 소학교인 사립 봉양학교 학생이다. 봉양학교를 마치고 돌아오던 길, 인서는 저자(시장)에서 광대 패거리를 맞닥뜨렸다. 연지곤지 칠한 사내가 여인보다 고운 목소리로 가락을 뽑아냈다. 이때 광대 패거리들이 부르던 노래가, 이애리수가 불렀다고 알려진 〈황성의 적〉이다. 우리에게는 〈황성 옛터〉로 알려졌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의 서른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당시 시대는 광대들도 전통 창가와 마당놀이가 아닌 신 유행가와 신파극을 선보이던 시절이라고 저자는 소설 지문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양반집답게 이런 노랫가락이 흘러나오는 근처만 지나가도 치도곤을 내리겠다는 할아버비 순행의 엄포가 인서의 머리를 스쳤지만 선명히 울리는 가락에 밀려나고 만다. 같이 오던 아범(아마 집 하인인 행랑아범을 지칭한 듯)이 어쩌려고 이러시냐고 어서 가지자 몇 번이나 재촉했지만 인서의 발걸음은 흘려 버렸다. 집에 돌아오자 아범은 순행의 명령에 따라 멍석말이 태형을 당한다. 이 사달은 모두 인서의 탓이지만 아래 하인이 주인 도련님 대신 매를 맞는 것이다. 말리고 제대로 모셔와야지 그것을 듣고 있었다는 죄목 때문이다.
서씨 부인(할아버지 순행의 재취)은 순행보다 30살이나 어리지만, 인서의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 새미골 남초시 집안의 모든 실권을 틀어쥐고 있다. 서씨 부인이 순행의 지시에 따라 멍석말이 당하는 장면을 똑바로 지켜보고 가슴에 새기라고 한 점을 다시 한 번 인서에게 재확인하듯 인서의 고개를 돌려놓았다. "멍석말이 태형을 20대에서 하나도 감하지 말고 손끝에는 절대 정을 두지 말 것이며 무엇보다 우리 손주께서는 눈에 박히고 귀에 새기듯 똑바로 지켜보시라 했지요. 허니, 순주님! 외면치 말고 똑바로 하세요."
서씨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는 인서를 세워 둔 채 인예의 손을 잡고 안채로 들어간다. 인예를 안듯이 데려 가며 서씨 부인은 태형을 치는 하인 병구에게 다시 한 번 다짐하듯 명령한다. "행여 아범이 똑바로 걸음걸이를 하는 것을 보게 되면 니 놈의 다리가 부러질 줄 알거라." 안 그래도 불에 타서 한쪽이 일그러진 아범의 얼굴이 매질 끝에 한층 더 일그러졌다. 지켜볼 수밖에 없는 아범의 아낙 무명댁은 입술을 질근 씹었다. 역시나 한 쪽이 불에 탄 얼굴이었다. 손에 잡혀 끌려들어가던 인예가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하지만 인서는 황소처럼 콧김만 토해냈다. 절대 울지 않을 것이야! 난 절대 울지 않아! 민들레 풀씨처럼 어린 주먹을 꽉 틀어진다.
이 시점에서 갑자기 화녕이 등장한다. 독자들이 약간 혼란스러울 수 있다. 소설의 설명을 들어가며 부연 설명을 독자가 덧대어 본다. "화녕의 꿈은 신파극 가수가 되는 것이었다. 10년 전 극작가 김우진과 동반하여 현해탄에 뛰어들었다는 윤심덕이 화녕의 롤 모델이었다. 목숨은 하늘에 속했는데 스스로 제 목숨을 끊은 것은 칭찬할 일이 못 된다. 하지만 일본 유학 후 대한제국 최초의 여가수로 불리며 〈사의 찬미〉 레코드판까지 남긴 것은 극진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죽음 이후에 몰고 다니는 온갖 낭설도 11살 소녀의 마음에는 그저 낭만이었다.
게다가 경성의 단성사에서 태양극장 창립공연으로 관람했던 무용가극 〈사랑과 죽음〉은 지금도 다 외우고 있다. 작년에 극단이 해체되고 말았다니 퍽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이와 달리 채단은 곡조에는 무심히, 좁고 세로로 긴 창문을 단속하기에 바빴다. 사랑채로 사용하는 별채에서 건너오는 소리를 차단하기 위함이었다.(p.12)
앞서 잠깐 언급된 〈황성 옛터〉는 고려의 옛 궁터 만월대의 달 밝은 밤,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만든 가락이라고 한다. 느린 3박자의 리듬에 요나누끼단음계(혹은 미야코부시 음계)로 만들어진 가요곡으로 이다. 이 애수적인 멜로디가 전수린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신파극단 취성좌(聚星座)의 서울 단성사(團成社) 공연 때 여배우 이애리수가 막간무대에 등장해 이 노래를 부르자, 객석에서는 '재창'을 외치며 박수가 터져 나왔다고 『한국민족문화대백과』는 전하고 있다. 이 노래는 삽시간에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이애리수가 노래할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 불렀다. 신경과민이던 일본경찰은 중지하라는 경고를 내리기도 했다고 한다. 앞서 적힌 가사 뒤를 이어, "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뤄 / 구슬픈 벌레 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로 1절을 이루고 있다.
화녕이 등장함으로써 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요 인물이 선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점은 남아 있다. 화녕의 롤 모델이라고 설명된 윤심덕은 "10년 전 김우진과 현해탄에서 몸을 던진 윤심덕"이라는 표현으로 인서의 진주에서의 일은 1936년쯤으로 추정된다. 윤심덕의 사건이 기준이 되기 때문이다. 윤심덕에 대해서는 우리 가요계에 이미 잘 알려진 인물이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따르면 윤심덕은 평양 출생으로 평양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졸업했으며, 강원도 원주에서 1년여 동안 소학교 교원을 한 뒤 관비유학생으로 일본 도쿄음악학교(현 도쿄예술대학교) 성악과에서 수업받았다. 1921년 동우회(同友會) 등의 순회극단에 참여하면서 극작가 김우진과 친교를 맺기도 하였다. 1922년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조교생활 1년을 마친 뒤, 1923년 6월 귀국하자마자 종로 중앙청년회관에서 독창회를 가짐으로써 성악가로 데뷔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열리는 모든 음악회 프로에는 항상 윤심덕을 넣을 만큼 일약 스타가 되었다. 양악이 수입된 지 얼마 되지 않은 데다가 제대로 성악을 공부한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에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녀의 풍부한 성량과 당당한 용모 또한 대중을 휘어잡았다. 그러나 정통음악을 가지고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강사생활과 함께 경성방송국에 출연해 세미클래식으로 방향을 선회하기도 했다. 한때 극단 토월회 주역배우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나 연기력이 없어서 실패했다. 대형 오페라가수를 꿈꾸었던 그녀는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대중가요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꿈꾸었던 예술 조국을 만들기에는 이 땅이 너무 낙후했고 견고한 유교적인 인습은 그녀를 더욱 못 견디게 했다.
특히 유부남 김우진과의 사랑은 진보적인 도덕관을 지닌 그녀를 궁지로 몰아갔다. 1926년 여동생 윤성덕의 유학길 배웅을 위해 일본에 간 그녀는 닛토(日東)레코드회사에서 24곡을 취입한 뒤 먼저 와 있던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서 정사했다. 그녀가 남긴 〈사의 찬미〉는 오늘까지 널리 불리고 있다. 이 책 『화녕가(歌)』는 실로 〈파친코〉의 시대 배경과 많이 겹치는 듯하다. 이 작품도 동일한 시기를 배경으로 윤심덕과 같은 실존 인물들이 모티프가 되어 소설화된 작품이다. 1920~40년대 한국 가요사는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 민족의 정체성과 저항의 메시지를 담아낸 중요한 문화적 유산으로 이 시기의 가요들은 단순한 음악을 넘어, 민족의 슬픔과 절망 또 동시에 희망과 저항의 상징이었다고 이 책을 출판한 〈델피노〉 측은 밝히고 있다.
저자 이영희는 이 소설에서 일제 강점기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적 투쟁을 생생하게 그려내며, 그 시대의 절절한 정서를 문학적으로 재현했다. 이 시기는 일제의 만주사변, 난징대학살, 중일전쟁 등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공하며 식민 지배국을 늘려나간 시대이자 수탈과 탄압이 더욱 가혹해진 시기와 겹친다. 이 시기는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대중음악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시기이기도 하다. 식민지 조선에서도 사람들은 스타에 열광하며 현실의 고통을 잊으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가능해지는 이유다.
이 책 『화녕가(歌)』는 이 시기에, 불꽃같은 열망을 품고 자신의 꿈을 추구하는 화녕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그려내며 단순히 개인의 이야기를 넘어, 당시 한국 대중음악이 가진 역사적, 민족적 의미를 섬세하게 탐구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또한 이애리수가 부른 〈황성의 적〉, 이난영이 부른 〈목포의 눈물〉, 김서정 작사·작곡의 〈강남달〉 등 당시 한국 대중음악의 중요한 곡의 가사를 소설에 삽입하여, 화녕의 마음을 그 음악적 의미와 함께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유모인 채단 한 명만 앉혀 두고 부르는 초라한 음악회로는 제 핏줄 속의 가락이 만족이 되지 않았다. 그러니 버젓이 인예가 앉아 있는 이 자리에도 올 수가 있었다. 그래도 혹여나 나중에 저도 제 노랫가락을 위해서 일본에 붙어먹지 못해 안달이 나지나 않을까? 자주 궁금하였다.
첫 곡은 〈목포의 눈물〉이었다. 19살의 가수 이난영이 오케레코드사를 통해 레코드판을 발매하자마자 경성에 다니러 갔던 재후(화녕의 아버지)가 사 들고 왔었다.
사공의 뱃노래 가물거리면
삼학도
파도 깊이 스며드는데
콧소리가 섞여 꺾어지는 화녕의 음성이 안채 마당에 울려 퍼졌다. 계집애의 눈이 동그랗게 뜨인다. 가사 그대로 애달픈 사연에 예상외로 깊은 음색이라 그랬을 것이다. 그럼 이 노래가 남녀상열지사가 아니라 일제가 호남의 곡창 지대 곡물을 수탈하는 목포항의 한을 그린 노래라는 것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다음 곡은 시에론 레코드사를 통해 발매된 〈강남달〉이었다. 진주 출신 작곡가이자 무성영화 〈락화유수〉의 변사인 김영환이 지은 곡이라 일부러 골랐다.
강남달이 밝아서 님이 놓던 곳
구름 속에 그의 얼굴 가리워졌네
태형을 가할 수 있는 권한까지 있는 헌병대에서는 재후를 이렂저리 찢어놓았다. '갈가리'라고 표현해도 될 것 같았다. 재후가 까만 테라쟁이들과 하고 있었던 것은 마작이 아니고 공작이었단다. 1930년 진주학생만세운동, 1931년 진주농고 비밀결사, 1932년 진주고보 비밀결사, 그 모든 배후에 있었던 것이 바로 별채에서의 모임이었단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호녕의 심장이 거북이 등껍질로 변하였다. 하지만 그래놓고 재후는 화녕을 채 1분도 보지 않았다. 총살형이 확정되었고 내일이 시행일이었는데도 긴말도 하지 않았다.
"너와 나는 가는 길이 다르다. 나는 천황을 죽이고 싶고 너는 천황에게 신명을 바치는 삶을 살고 있다. 허니 애비와 딸로 이어진 인연은 저주이고 천형이로구나. 해서 오늘부로 깔끔히 갈라내니 난 더 이상 너의 아비가 아니다. 허니, 돌아가라, 소녀여!"(p.86) 재후는 그 짧은 말로 화녕을 뒤로 한 채 철문 안으로 사라져갔다. 충격이라는 말로는 부족하였다. 발밑이 무너진다는 표현으로도 어림없었다. 화녕은 눈물 한 방울 못 흘리고 아직까지는 제 집이었던 일본식 목조주택으로 돌아왔다. 축음기 앞에서 멍하니 한참을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이제 너의 문제는 어찌 사느냐가 아니다.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너의 문제로구나. 살거라. 어찌해서든 살아남거라. 니가 아비의 뒤를 따른다면 아비의 수고는 물거품이 될 것이다. 하지만 니가 살아남는다면 아비의 수고는 내 조국의 광명을 위한 마중물이 될 것임을 기억해라."(p.86~87)
저자 : 이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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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컬처블룸을 통해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 받아, 직접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