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친일파 - 반일 종족주의 거짓을 파헤친다
호사카 유지 지음 / 봄이아트북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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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에서 '반일'로, 반일에서 '극일'과 '지일'로 우리 국민의 일본에 대한 정서는 변해왔다.

위정자들의 일본에 대한 의식과 정책에 대해 차이가 있긴 하지만 국민들의 정서는 지난 20세기 내내 변화를 지속했다.

21세기 들어 우리의 경제도 어느 정도 안정되고 대외 수출 의존도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국민의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과 상관없이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상대가 중국으로 변한 것이다.

거기에 우리 국민과 중국 국민의 대일 감정은 비슷하다. 일본에 의해 침략 당했고, 민간인 대량 학살의 뼈아픈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의 심정이 신뢰감의 바탕에 깔려 있다. 1990년대 초 수교를 기점으로 G2로 올라선 중국과의 교류는 점차 확대되는 상황이다.

우리 국민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이념적인, 즉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때문에 대립했지만 비교적 선린 관계를 맺어왔다.

중국 본토라 일컬어지는 한족이 다스리던 나라가 우리 조선에 직접 침략한 일이 한 번도 없다.

물론 황제국과 신하 관계로 유지된 양국은 서로의 관계를 깨기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북한을 돕기는 했지만... 침략은 아니었다.





그러나 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선 2012년 이후, 일본 정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및 강제징용 문제 등과 관련된 망언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2019년 8월에는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면서 무역 갈등을 일으켜 ‘NO 재팬’으로 대변되는 반일 정서가 다시 대한민국 전체를 휩쓸게 했다.

그 결과 일본 국민들에게 ‘아베 정권이 반한 감정을 건드려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거듭된 정책 실패와 스캔들로 인한 불만의 목소리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한일 관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아베 정권은 자민당 내 강성 우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강성 우파는 일본 내 반한·혐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본의 극우세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극우세력이란 1997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이어 극우 단체 ‘일본회의(특별고문 - 아베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를 결성해 일본 내에서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는 데 주체적인 역할을 한 세력과 그 추종자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일본 극우 세력에 동조하는 집단이 일본 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일본과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에도 그와 같은 부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19년 7월 《반일 종족주의》를 출간한 저자들이다.

《신친일파》의 저자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수)는 그들을 ‘신친일파’라고 규정한다.

신친일파는 '친일파'라는 단어에서 파생된다. 대한제국 말기 일본 침략에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 등 '매국 5적'부터 비롯된 말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 일제에 부역하거나 애국 독립지사 등을 억압한 사람들도 확대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나라든 겨레든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에 협조해 재산도 불리고, 직위도 따냈다.

새로 등장한 단어 '신친일파'는 지금 현재도 일본에 부역하거나 일본의 극우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국민 정서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일'이라 딱지를 붙이지만 엄밀한 의미로 '매국'에 가깝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적하는 '신친일파'는 일본 내에서 반한·혐한을 외치고 있는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 대부분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

특히 대표 저자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이영훈은 과거에 일본 극우 성향의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식민지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기적에 가까운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바탕은

일제 강점기의 기반에서 비롯되었다는 황당한 주장인 ‘식민지 근대화론’도 그때를 전후해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왜곡과 오류가 섞인 그들의 주장이 오직 학문적 소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독도 문제 등

구체적인 근거 제시와 함께 『반일 종족주의』의 왜곡과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1. 강제징용 관련

여기에서 이영훈은 ‘미불금이나 미수금의 문제가 재판의 본질’이라는 큰 거짓말을 했다.

원고가 받지 못했다고 하는 통장이나 미불금, 미수금이 이번 재판의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그것을 알면서 쟁점을 흐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강제 징용자 판결에 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적당하게 자기주장을 쓴 셈이다.

이영훈의 말대로 한국에 거짓말 문화가 있다면, 이영훈 자신도 그 문화에 오염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선 이번 재판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소위 미불금, 미수금의 문제가 아니다.

미불금, 미수금의 지급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모두 끝난 문제이므로,

2018년 10월 이후 한국 대법원은 미수금이나 미불금을 문제 삼지 않았다. 원고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영훈의 판결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 (_「판결이 거짓이라고 우기는 이영훈」 중에서)





2. 일본군 ‘위안부’ 관련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로 발전되었다는 논리는 하타 이쿠히코秦郁彦가 제공했고, 조선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기생집으로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파 논객인 니시오카 스토무西岡力의 주장이다.

그리고 강제연행이나 취업 사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모집업자들에게 있다는 논리는 일본의 우파 논객들이 거의 다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우파 논객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리가 새삼스럽게 한국에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 속에 다시

등장한 셈이다.(_「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는가」 중에서)




3. 독도 관련

이영훈은 칙령 제41호에 나온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관음도라고 우긴다. 일본의 주장과 똑같다.

이영훈은 그 이유로 울릉도에 속하는 “사람이 사는 섬”이 관음도와 죽도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큰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음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최근에는 울릉도 본도와 관음도에 다리가 만들어져서 관리하는 사람이 사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2010년까지 관음도에는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리고 1900년 칙령 제41호가 반포되었을 때만 해도 관음도에는 ‘도항’이라는 제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왜 칙령 제41호에 도항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석도’라는 명칭을 썼을까.

그 이유는 석도가 관음도 즉, 도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이름을 상실하고 이후 울릉도 사람들이 돌섬이라고 부른 독도를 석도石島라는 한자로 부른 것이다. (_「석도가 독도다」 중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 문제는 항상 정확하게 규명해야 하고 사실과 거짓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 나라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의 역사 기록과 역사 의식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이 아직 침략 전쟁의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읽어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서 금방 그 화제는 사그라들었다고 기억된다.

이 책 <신친일파>는 일본인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을 조목모족 따진다.

일본인이지만 오랫동안 한국에서 한일관계를 연구한 전문가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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틸리 서양철학사 - 소크라테스와 플라톤부터 니체와 러셀까지
프랭크 틸리 지음, 김기찬 옮김 / 현대지성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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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공부라고는 대학 교양학부 때 한 과목 들은 '철학개론'이 전부다.

철학이라는 학문은 어렵고, 실생활에 직접 도움이 안 되는 일이라는 게 당시 분위기였다.

이후 철학과는 담을 쌓고 지냈는데 최근 철학이 다시 우리 사회 문제나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학문이라는 걸 알았다.

철학을 쉽게 이해하는 책부터 철학 자체에 대한 깊은 사유의 책 등 다양한 형태로 우리 앞에 다가와 있다.

또 다른 학문과 결합해 우리 눈에 쉽게 띄는 사회로 변화하기도 했다.

삶의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는 우리도 산업 사회를 응축시켜 놀랄 만큼 발전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됐다.

이제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민주 사회, 편리한 삶을 위한 정보화 사회로 넘어오면서 생존을 위한 삶이 아닌,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사는가로 발전적인 변화 과정을 겪고 있는 것으로 우리 사회를 이해한다.

이때 철학이 기초적이면서도 중요한 몫을 할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지식인들이 철학에 주목하는 것 같다.





독자도 철학을 다시 바라보기 시작했다.

철학이란 무엇인가도 배우지 못한 독자로서는 이 책 『틸리 서양철학사』를 읽어낼 수 있을까 조금 망설였다.

더욱이 철학사는 그리스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사상과 삶의 근원적인 문제를 제시하고 해결하기 위해 철학의 흐름을 짚어내는 어려운 연구의 결과물 아닌가.

학구열이 다시 불타오른 건 어려움이 닥쳤을 때 긍정적인 면만을 자꾸 되풀이하는 독자의 이상한 습관(?) 때문이다.

되돌아보면 닥쳐온 어려운 문제에 부닥쳤을 때 자신감이 가장 필요했다.

내 자신의 긍정적인 면을 자꾸 생각하다보면 힘든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곤 했다.

아마 긍정적인 생각을 반복하고, 깊이 생각하다보면 우리 삶의 문제에까지 들어가는 것이 철학이란 학문과 유사한 점이라는 생각도 했다...(견강부회식 해석이지만)

책을 처음 받아들었 때도 기가 죽었다. 예상(물론 페이지는 알았지만) 외로 두껍고 중량감도 상당했다.

바로 읽지 못하고 하루를 묵혔다. 더 깊이 생각해 자신감을 얻기 위해서다.

개인적인 이유를 들어서 이 책을 읽으려는 독자에게 별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러나 누구든 어렵다고 생각되더라도 일단 '읽기 시작하면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란 사족을 달아둔다.





이 책은 철학에 깊은 조예가 없더라도 읽어내려가기 부담 없이 쓰였다.

철학사여서 시대 구분을 명확히 하고, 유명한 철학자들이 연대순으로 쓰여 있으니 철학의 흐름도 자연스럽게 파악할 수 있도록 쓰였다.

일단 책을 들면 끝까지 읽게 하는 저자 특유의 저술 능력 때문일 거라고 감히 추측해본다.

『틸리 서양철학사』는 20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주요 대학에서 철학 교재로 사용됨과 동시에, 일반 독자들에게 교양서로 오랫동안 사랑받았다고 출판사 측은 강조한다. 그만큼 전문적이면서도 쉽게 씌었다는 것이다.

철학의 명문인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철학 교수로 평생 봉직한 프랭크 틸리 교수가 쓴 이 책의 가장 탁월한 특징은 객관성과 공정성이다.

틸리 교수는 철학사에서 나중에 등장하는 체계들이 앞선 학파에 대해 아주 훌륭한 비판을 제공한다는 확신을 갖고서 자신의 비판을 최소한으로 줄였다.

이 점도 독자의 가독력을 높이는 저자의 능력일 것이다.





이 책의 꾸준한 성공 비결을 설명하는 또 다른 특징은 사상가들이 철학 운동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제시하는 데서 드러난 균형 감각이다.

틸리는 역사적 발전에서 내적 논리를 분별해내면서도 개별 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는 사회·정치·문화적 요소들을 인정했다.

철학자를 철학 운동 안에 놓고 보는 틸리의 솜씨는 근대철학의 구조를 짜는 데서 특히 뛰어났다.

『틸리 서양철학사』가 보여주는 마지막 특징은 틸리 교수가 가진 문체의 명료함과 단순성이다.

틸리는 역사적 철학자들과 그들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명료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썼고, 이러한 명료함은 이 책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철학사에 대한 그의 관심은 단지 과거의 업적을 기록하려는 역사적 골동품 애호가의 것도 아니고, 이념과 개념의 지속성만을 추적하는 사상가의 것도 아니었다. 이 책을 읽는 독자의 것이다.

그것은 철학사를 철학적 이념의 진열장으로 생각하면서 자신의 통찰을 끌어온 철학자의 관심이었다.





다음은 어떤 전문가의 서평이다.

철학 체계는, 인격적·역사적·문화적 진공 상태에서 발생하는 순전히 지적 활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것들은 오히려 그 창시자들의 기질과 인격뿐만 아니라 그들이 살았던 문화적·역사적·철학적 상황을 반영하는 개별 철학적 천재의 업적이다.

모든 체계는 그 체계의 이론적 취지와 구조적 조직 모두를 결정하는 무수한 영향력의 수렴점이다.

“사유는 삶으로부터 분출되며, 삶을 반영하는 동시에 그 삶을 수정시킨다.

인간 사유의 수많은 파동은 문명과 역사의 파동이며, 거꾸로 문명과 역사는 사유의 파동을 야기하는 동시에 그 파동에 의해 영향을 받는다.”

- 이광래 교수

어떤 철학 교수는, “철학사는 특색과 장점이 저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그 종류도 또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라고 말했다.

우리나라에는 독일어권과 영미권의 철학사 책들이 있는데, 각각 장단점들이 있겠지만, 다양하게 번역되어 나오는 것이 교양의 수준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널리 읽히는 러셀의 『서양철학사』는 훌륭한 철학자가 쓴 좋은 책이긴 하지만, 너무 독창성에 치우친 나머지 철학사에 대한 공정성과 균형 잡힌 객관성이 다소 떨어진다.

그래서 교양과 철학 개론을 위해서는 철학 교수의 공정하고 균형 잡힌 철학사 책이 더 나을 수 있다.

틸리 교수의 『서양철학사』는 미국 각 대학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철학 교재로 많이 채택된 책이다.





철학사는 실존의 문제를 해결하거나 우리의 경험 세계를 우리에게 이해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시도된 상이한 노력들을 연관지어 설명하려 한다.

이는 가장 초창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숙고된 인간의 사유의 발전에 관한 이야기이다.

철학 이론의 단순한 연대기적 나열과 설명이 아니라 철학 이론 간의 관계, 그것들이 산출된 시대, 그리고 그 이론을 제공한 사상가들과 관련된 연구이다. 모든 사상 체계는 다소간 그것이 발생하는 문명과 그 창시자의 인격과 이전 체계들의 성격에 의존하면서, 당대와 그 이후 시대의 이념과 제도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다.

철학사는 각각의 세계관을 그 고유한 상황에 놓고, 그것을 현재와 과거와 미래의 지적·정치적·도덕적·사회적·종교적 요소와 연결지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또한 인간의 사색의 역사에 나타나는 발전의 궤적을 추적하고, 철학이라고 불리는 정신적 자세가 어떻게 등장하며, 제공된 상이한 문제와 해결책이 어떻게 새로운 물음과 대답을 자극하는지를 보여주며, 각 단계에서 어떤 진보가 이루어졌는지를 규정해야 한다.





철학사 연구의 가치는 모든 사람에게 명명백백하다.

총명한 사람은 실존의 근본적 문제에, 그리고 인간이 문명의 상이한 단계에서 그 문제에 대하여 발견하고자 하는 해답에 관심을 갖는다.

게다가 그런 연구는 자기 시대와 다른 시대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철학사 연구는 철학적 사색을 위한 유용한 준비 과정으로 이바지한다.

이는 사유의 좀 더 단순한 구성에서 좀 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구성으로 나아가면서, 인간의 철학적 경험을 회고하고, 지성의 추상적 사유를 훈련시킨다.

과거의 이론에 대한 연구는 자신의 세계관을 이해하는 데 필수불가결한 도움을 준다. 이는 철학이 다른 형태의 창의적 활동보다 철저한 역사적 정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과학자는 현재의 지식 상태에 대한 본질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면, 성공적으로 독창적인 연구를 수행할 수 있다.

예술가는 예술사에 대하여 제한적인 지식을 갖고 있어도, 위대한 예술을 성취할 수 있다.

그러나 선배의 작업에서 절대적으로 독립하여 철학 체계를 구성하려는 사람은 문명의 출발기에 나타나는 조잡한 이론을초월할 생각일랑 아예 포기해야 한다. 철학사는 건설적인 철학자에게 꼭 필요한 재료를 제공하는 과거의 철학적 통찰의 저장소이다.

철학자는 한편으로 동 시대의 다른 분과로부터, 다른 한편으로 철학사로부터 자료를 끌어낸다.그래서 철학사는 지난날 철학자들의 업적에 대한 요약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철학적 탐구를 위한 필수불가결한 재료도 제공한다.





이 책의 접근 방법은 역사적이면서 비판적이다.

[1] 저자는 각각의 철학 체계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고 한다.

즉 철학사가는 당분간 각 체계의 이론적 통찰을 동정적으로 살펴서 그 체계를 구조적 전체로서 파악한다.

[2] 철학 체계의 논리적으로 기본적인 가정을 진술한다.

해당 철학자가 명시적으로 천명하고 종종 상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만이 아니라, 철학 체계의 암시적 혹은 암묵적 전제를 진술한다.

그것은 철학적 분별력과 통찰력을 요구하는 엄밀한 작업이다.

[3] 각 체계는 엄격한 철학적 비판을 받아야 한다. 암시적이든 명시적이든 근본 모순을 드러내는 것을 목표로 삼는 내적 비판을 받아야 한다.

또한 해당 체계의 한계와 부적절성을 드러내는 외적 비판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내적 혹은 외적 비판을 가하기 전에 먼저 그 체계를 이해하여야 한다.

철학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는 과거의 체계에 대한 비판이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가르친 덕목을 행동으로 보여주었다. 그는 대단한 자제심을 갖고 있었고 관대하고 고상하고 큰 인내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결점이 별로 없었다. 그는 칠십 평생에 전쟁에서나 정치적 의무를 수행할 때 용기 있는 태도를 많이 보여주었다. 재판 때 그의 태도는 도덕적 위엄과 견고함과 일관성에 대한 인상 깊은 모습을 제공한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을 공평하게 행했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아무에게도 악의를 보이지 않으면서 생존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름답게 운명했다.

- p.92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은 합리적인 국가에 대한 갈망과 당대의 부패한 세속 및 교회 정치에 대한 혐오를 표현했다.

정치적 독재체제에 대한 그의 옹호는 인간 본성에 대한 그의 비관론적 관념에 뿌리를 둔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인간 본성은 굶어 봐야만 근면해지고 법에 의해서만 덕스러워진다.

그는 강제력에는 강제력으로, 책략에는 책략으로 맞서고, 자신의 무기로 마귀와 싸우는 것 외에 당대의 부패와 무질서에서 벗어나는 길을 달리 알지 못했다. 그리고 그는 목표를 추구할 때 드러나는 어중간한 기준을 비판했다.

그는 교회와 국가의 많은 정치가들이 실천하고 이 시대까지 계속 실천하는 바를 이론으로 정당화했지만, 국가를 구출하는 다른 방법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것을 정당화했을 뿐이다.

- p.352





그러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것은 내가 의심한다는 혹은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 점에 관해서는 아무런 의심이 있을 수 없다.

참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것이 생각하는 그 시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정하는 것은 모순이다.

데카르트는 경험적 심적 사실, 자신에 대한 정신의 의식에 호소하지 않는다.

그는 의심이 의심하는 자를 함축하고 사유가 사유하는 자, 사유하는 사물(res cogitans), 혹은 정신적 실체를 함축한다고 논리적으로 추론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에게 합리적이며 자명한 명제로 보이는 것에 도달한다.

의심하는 것은 생각하는 것을 의미하며,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는 것을 의미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 “이는 질서정연하게 철학하는 자에게 등장하는 첫째이자 가장 확실한 지식이다.”(「철학 원리」)

--- p.389





니체는 초인 개념과 관련하여, 영겁회귀의 이론을 발전시켰다.

처음에 그는 피타고라스주의자들에게서 이 관념을 발견했는데, 나중에 그것이 논리적으로 순수한 과학적 고찰에서 나온다고 결론지었다.

우주가 무한한 시대에 존재했지만 유한한 수의 원자 혹은 “권력(힘)량”과 유한한 양의 에너지로 구성된다는 가설에서 보면, 오직 유한한 수의 상이한 조합만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동일한 사건 배열의 영겁회귀가 있어야 할 것이다.

역사에서 모든 목적을 박탈하는 이 관념은 초인에게 공포를 일으키지 않는다.

자신의 창조적 실존과 자신의 삶의 모든 순간에 대한 그의 솔직하고 즐거운 긍정은 그로 하여금 실제로 영겁회귀를 환영하게 만든다.

오직 목표 없이 살며 본질적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자들만이 자신을 구속할 우주적 목적에 대한, 자신에게 만족을 가져다줄 천국에 대한, 그리고 그들이 은밀히 시기하고 미워하는 자들이 떨어질 지옥에 대한 신념을 요구한다.

- p.631





저자 : 프랭크 틸리

FRANK THILLY, 1865-1934. 19세기 후반, 미국 신시내티 대학교와 독일 베를린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하이델베르크 대학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평생 철학 교수로 가르쳤다.

저서로는 『라이프니츠와 로크의 논쟁』,『윤리학 서론』,『서양철학사』등이 있다. 틸리 교수의 『서양철학사』는 1914년 초판이 발행되었고 이후 몇 차례의 개정을 거쳤다. 이 책은 20세기 전반에 걸쳐 미국 각 대학의 철학과 역사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교과서로 사용되었고, 일반 독자들에게도 내용의 객관성과 공정성을 인정받으며 꾸준히 사랑받았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에서 진행하는

체험단,리뷰단에서 제공 받아 작성한 솔직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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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와 존재하기 - 육체적, 정신적 그리고 영적 경험으로서의 달리기
조지 쉬언 지음, 김연수 옮김 / 한문화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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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리기'가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많이 달려본 사람과 달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질문하면 어떤 답이 돌아올까.

많이 달려본 사람은 달림으로써 얻는 육체적, 정신적인 이익을 말할 것이다.

반면 달리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달리기가 얼마나 힘든 운동인지 체력이 안 되니까 못 달린다고 말하기 십상이다.

마라토너에게 달리는 이유를 물으면 등반가에게 왜 산에 오르는가 하고 묻는 것과 같을 것이다.

달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대부분 "건강한 삶을 위해 달린다"고 말한다.

선수들에게 묻는다면 "달리기 위해서는 육체적 바탕에 정신적 무장도 중요하다고 답변할 것이다.

달리기는 굉장히 단순한 운동이다. 인간은 놀기를 좋아하지만 같은 동작을 반복해서 하는 것은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달리기는 놀이로서는 높은 점수를 줄 수 없다.

선수가 재미 없는 일을 반복적으로 하는 이유는 정신력 때문이다.

그러나 달리기를 영혼과 접목시키는 일은 철학이나 의사들의 깊은 연구를 통해야 가능하다.

간단하면서도 효과적인 유산소운동으로 알려진 달리기, 하지만 달리기를 단순히 ‘산소를 더 들이마시기 위한’ 운동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그런 목적이라면 굳이 달리지 않고도 할 수 있는 운동은 많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달리기 중독’에 빠져 오늘도 거리로 나서고 있다.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릴 것이다.

이들에게 달리기는 단순히 운동 이상의 의미가 있는 듯하다.





서점에는 달리기 관련 서적들이 많이 나와 있다. 마음만 먹으면 달리기가 인체에 미치는 영향부터 수십 일 안에 마라톤을 완주하는 방법과 심지어는 달리는 동안 생길 수 있는 부상을 예방하는 법까지 달리기에 대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단조롭고 힘든 움직임을 일정 시간 이상 지속해야 하는 달리기는 무언가 다른 동기가 필요하다.

《달리기와 존재하기》는 달리기가 건강이나 수명과 갖는 관계나 일정 시간 안에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대신, 달리는 과정에서 ‘갖게 되는’ 여러 감정과 ‘가져야 할’ 감정에 대해 이야기한다.

저자 조지 쉬언은 이 책에서 달린다고 해서 수명이 늘어나거나 더 건강해진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다만 달리는 길에서 만나는 그 모든 생각들이 삶을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는 확신을 심어준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거리로 달려 나왔던 이들은 숨이 가빠오고 다리가 무거워지기 시작하면 왜 이렇게 힘들게 달리는가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시간의 차이가 있을 뿐 장거리 러너라면 누구나 느끼는 이러한 감정은 단순히 식이요법이나 연습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달리기와 존재하기》는 그런 순간을 위해 쓰인 책이다.

하지만 《달리기와 존재하기》는 굳이 달리지 않더라도 삶이라는 장거리 달리기가 갖는 의미를 돌아보는 데 도움을 준다.

이 책은 달리기에 대해 말하는 듯하지만 달리기에 대한 어떤 전문적인 용어도 사용하지 않는다.

그저 조지 쉬언 자신의 거친 숨소리와 발자국만이 찍혀 있을 따름이다. 이 책의 매력은 바로 여기에 있다.

쉬언은 책상에 앉아 러너에게 달리기와 관련한 수치를 나열하는 대신 곁에서 직접 달리며 함께 땀을 흘리고 함께 느낀다.

그런 자세가 인생에서도 땀을 흘리며 사는 삶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한다.





간단한 달리기 상식이나 오래 달리기 위해 주의해야 할 사항들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이 책은 그보다 달리기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사색의 시간에 주목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를 안고 달린다. 문제 안에서 직접 살아내기 위해서, 대답을 찾으려고 애쓰며, 삶에 대해 다른 해답은 없는지 살펴보며….”

그는 시장 가치라고는 하나도 없는 달리기를 통해 ‘역사를 만들지 않고 사는 법, 원수를 갚지 않고 즐기는 법, 영적 성장의 최종 목적지인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법’을 배웠다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달리기를 통해 체력의 극한 속에서 인생의 의미를 발견하려고 노력한다. 막연하게 ‘이렇게 하자’고 말하는 대신 ‘실제로 달려 보니 이래야 한다’고 말한다. 무엇을 먹거나 어떤 신발을 신어야 한다는 말보다 더욱 가슴에 와 닿는 것은 쉬언의 달리는 ‘자세’이다.

힘들 때면 쉬언은 이 순간을 견디는 과정이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려움을 견디는 과정과 같다고 생각하며 다음 발을 내딛는다.

이렇듯 쉬언은 삶을 더 깊이 살기 위한 방법으로서 달리기를 제안한다.

저자의 땀방울이 묻어 있는 《달리기와 존재하기》는 인생이라는 장거리 달리기를 더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을 보면 생각에도 논리가 없는 것 같고 육체의 움직임도 제멋대로인 듯하지만 이 마음에 귀를 기울일 때 다른 결과를 얻는다는 걸 알 수 있다. 신념은 그런 마음에 자리 잡는다. 그 마음을 통해 우리는 용기라는 최고의 실천을 얻는다.

살아가는 용기를 갖게 된다는 말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두 팔을 올리고 스스로 보호자가 된다.

- pp.34-35

진정한 러너란, 축구를 하기에는 몸집이 작다거나 농구 골대에 공을 잘 던지지 못한다거나 커브공을 맞추는 재간이 없기 때문에 달리기를 하는 사람이 아니다. 러너는 달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달린다.

러너가 되면서, 고통과 피로와 아픔을 견디면서, 스트레스에 스트레스로 맞서면서, 삶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남겨 놓으려고 하면서 러너는 자신에게 충실해지고 그대로 자신이 된다.

- p.56





내일이란 내 남은 삶의 첫날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까지의 혼란스러운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이 시작되지 않겠는가? 물론 그 물음에 대한 정답은 ‘그렇다’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 훌륭하신 분들이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일까? 나는 그게 자신의 걸음걸이를 알아가는 일에서 시작했다고 본다.

- p.82

나는 책상물림이다. 이 말은 곧 내가 똑똑하다는 뜻은 아니지만,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관념적인 생각들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은 될 수 있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내 세계는 내 작은 몸뚱아리 속에 존재한다.

그 세계가 완성되느냐 마느냐는 내 육체적 건강에 달렸다. 내 몸이 완전해야만 나 역시 완전해질 수 있다.

- p.94

나는 새로운 종교를 만들 작정인데, 이 종교의 첫 번째 교리는 “규칙적으로 뛰어 놀아라”다.

하루에 1시간씩 뛰어 놀게 되면 사람은 온전해지고 건강해지고 오래 살게 된다. 이처럼 연습은 놀이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연습에서 얻을 수 있는 건 하나도 없다. 간혹 언론 매체에 나오듯 연습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

- p.120





만약 내가 대학교 총장이라면 학자가 아니라 운동선수를 채용할 것이다. 학문적 성취 대신에 운동을 위해 지원금을 책정할 것이다. 교육의 잣대가 너무 지식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관심의 영역을 스포츠와 놀이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하는 쪽으로 옮겨갈 필요가 있다.

- pp.146-147

제대로 살지 못한 삶이 인생의 가장 큰 적이다. 자신에 대해, 그리고 여러 가지 선입견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그런 위험에 처한다. 손을 써서 하는 일은 저급하다는 우리 사회의 통념에 따라 움직일 때, 내가 무슨 수로 내면 깊은 곳에서 솟구치는 사명감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 pp.182-183

내가 달리는 모든 1마일은 늘 첫 번째 1마일이다. 길에서 보내는 매 시간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날마다 러닝복을 입을 때마다 나는 처음 본 것처럼 삼라만상을 보고, 익숙한 것을 낯설게, 평범한 것을 비범하게 보며 다시 태어난다.

- p.193

러너의 목표는 건강이 아니다. 러너의 목표는 최상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몸 가꾸기이다. 건강이란 그렇게 몸을 가꾸는 과정에 지나게 되는 어떤 것이다.

한 번도 발휘하지 못한 20퍼센트에서 30퍼센트의 능력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스치며 지나치는 정거장이다.

- p.230






건강은 몸이 온전하게 제대로 움직이며 최고의 능력치까지 이르렀는가에 달린 문제다. 내 건강은 내 삶의 태도와 많은 관련이 있다. 영혼과 육체가 알맞은 상태냐가 중요하다. 건강이란 온전한 인간으로 자신을 닦아 나갈 수 있느냐와 관련된 문제다. 내 몸에 병이 있더라도 내 건강은 최고조에 이를 수 있다.

- p.245

마지막 순간이라고 하더라도 머리는 굴려야 한다. 빨리 달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자신의 힘을 모두 소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상대가 더 이상 반응을 보일 수 없다는 게 확실해지는 바로 그 순간에 힘을 모두 소진시키면서 속력을 내야만 한다. 장기판으로 치자면 외통수가 되는 순간이어야만 한다.

- p.277

믿음에서 비롯하는 결심은 마음으로만 가능하다. “과연 할 수 있느냐, 할 수 없느냐”와 같은 엄청난 질문에 스스로 대답할 때, 우리는 그 모든 피로를 이겨낼 수 있는, 또 한편으로는 우리 자신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발견할 수 있다.

- p.305

우리가 진정 자기 자신의 참된 모습을 찾으려 든다면 그건 매 순간 실패할 위험을 안는다는 뜻이다. 자신의 능력이 어디까지인지 알게 됐다면 결승점까지 걸어서 들어가게 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도 부끄러울 게 없다.

- p.319





어떤 마라톤이든 결승점에 들어가는 때만큼은 가슴 벅차지 않을 수 없다. 달려오는 내내 러너는 갖은 어려움을 겪었다. 힘든 일도 아주 많았지만 결국 이겨냈다. 그런 해방의 순간이 있을 수 없다. 그 시련이 끝날 때쯤이면 달리는 사람이나 지켜보는 사람이나 뭔가 대단한 일을 해낸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 p.349

거리를 달릴 때, 나는 철학자가 된다. 그 순간, 나는 사람에 대해서는 깡그리 잊어버리고 나 자신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나는 나만의 정신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나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옳다는 것을 보여줄 방법을 찾는다.

- pp.365-366

주기적으로 우울할 때, 나는 삶이란 하나의 경기라는 것, 하지만 사람이 제아무리 잘 한다고 하더라도 오직 신만이 그 결과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경기의 내용이 아니라 달리는 사람이 중요하다. 늘 그렇듯 적은 내 안에 있다.

- p.396

나는 신과 싸운다. 나는 신이 내게 부여한 한계와 싸운다. 고통과 싸운다. 부당함과 싸운다. 나와 이 세계의 모든 나쁜 것과 싸운다. 나는 굴복하지 않는다. 나는 이 언덕에 올라설 것이다. 그것도 혼자서 올라설 것이다.

- p.409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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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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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허구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가정해서 다룬다.

허구지만 현실적이어야 독자의 눈을 붙잡는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어야 독자는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커지면 판타지나 공상소설로 분류되지만 과학적 리얼리티를 제시해야 한다.

이 소설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모티브지만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다룬다.

이 점은 조지 오웰의 『1984』를 닮았다. 여기에 좀 더 극적으로 과학적 리얼리티도 담았다.

권력의 속성을 은유로 엮어내기에 충분하다. 지배와 피지배의 차이를 가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작가 크리스티나 달처는 이 점이 돋보인다. 문장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번역본을 읽는 독자로서는 한계가 있다.

소설의 속성인 스토리 전개와 극적 구성력, 반전의 묘미 등으로 소설을 흥미를 판가름하면 된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세계는 독자의 구미를 자극할 충분한 주제이고 소재이다.

다 읽고 난 다음 스토리와 재미가 머리에 남는다면 그런 세상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독자들은 교훈적인 면에서 디스토피아 소설의 중요성을 찾을 것이다.





국민을 고분고분한 양처럼 길들이고 싶어 하는 대통령과 모든 사람이 성경 교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 목사가 권력을 장악했다.

한때 흑인 대통령이 평등과 평화를 외치던 이 나라는 이제 ‘순수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의 권리를 하나씩 빼앗고

급기야 하루에 100단어 이상을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오직 정부 정책을 찬양하는 방송만 내보낼 뿐이다.

네 아이의 엄마이자 신경학과 언어학의 권위자인 진 매클렐런 박사는 어느 날 정부로부터 실어증 치료제를 만들어달라는 반강제적인 제안을 받는다.

한때 믿고 의지했던 남편마저 정부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정부 주요 인물을 암살하고 정권을 뒤엎을 위험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과연 그들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결혼 17년 차, 네 명의 자녀를 둔 진 매클렐런. 그녀는 남편 패트릭과 네 명이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

서로의 학교생활을 궁금해하고,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질문을 주고받는 평범한 가족의 평범한 저녁 식사 자리다.

단 한 가지, 남편과 아들들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걸 빼면.

진과 그녀의 막내딸 소니아는 남자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다. 한창 말 연습을 해야 할 어린아이부터 뇌의 손상으로 인해 언어를 잃어버린 노인까지,

여자라면 누구나 손목에 ‘카운터’를 차고 하루 100단어까지만 말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들이 101번째 단어를 말하는 순간, 손목에는 전기 충격이 가해지고 카운터의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충격의 강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카운터는 말 많은 여성들의 손목에 화상을 입히거나, 심한 경우 기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성들이 빼앗긴 것은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언어학 박사였던 진 매클렐런은 손목에 카운터를 차는 순간부터 ‘박사’라는 호칭을 박탈당한 채 그저 엄마, 아내, 주부로만 살고 있다. 투표권은 물론 부당한 것에 반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사라졌다.

모든 결정과 선택은 신과, 신이 만든 남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하루 100단어 이하로 말한 지 1년이 넘은 어느 날, 대통령이 보낸 ‘그들’이 진을 찾아온다.

사고로 인해 언어능력을 상실한 대통령의 형을 위해 베르니케 실어증 연구를 계속하라는 압박과 함께.





진 매클렐런은 반강제로 연구를 재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계획을 알게 된다.

대통령은 형의 언어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 그의 사고가 진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진의 연구 결과인 ‘베르니케 혈청’을 이용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세상,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계획만 있을 뿐이다.

동시에 진은, ‘베르니케 혈청’을 이용하여 정부의 계획을 저지하고, 망가진 세상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다.

그동안 여성들을 억압하는 세상에 소심한 반항만을 하던 그녀는 ‘작은 것부터 행동하라’고 외치던 옛 친구 재키의 말대로 자신의 움직임이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녀는 연구를 진행해나가며 빼앗긴 목소리, 망가진 결혼생활, 세뇌당한 큰아들 스티븐…, 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보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가야 할 막내딸 소니아를 위해 끊임없이 커져가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대통령이 연구팀을 압박할수록 그녀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원하는 결과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정부에 대한 저항심도 커져만 간다.

그로 인해 정부를 위해 일하는 남편 패트릭과 진의 관계는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여성들과 정부와의 관계 역시 지뢰밭을 향해 폭주하듯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쥐나 토끼뿐만 아니라 유인원까지 실험 대상으로 삼던 정부는 급기야 베르니케 혈청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인간까지 실험 대상으로 생각하는데…. 대체 그들은 무엇을 실험하고 싶은 것이며,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더 올바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꼭꼭 눌러왔던 목소리와 대면한 진, 그리고 억압받아온 여성들은 과연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에서 목소리를 빼앗기고 가부장제의 철창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빅 브라더의 감시보다,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것보다 수월하게 상상 가능하지만, 훨씬 더 소름끼치는 이유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역행하는 듯한 세상을 그렸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여성이 남자의 말에 복종하고 남자의 뜻에 순종하며 살던 시대로 돌아간다니. 얼마나 끔찍한 퇴보인가.

진의 딸 소니아와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은 ‘본의 아니게 입을 닫아버리게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야 할까?





싸우고 싶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재키가 여기 있었다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줬을 텐데.

재키의 마지막 강의가 생각났다. 어느 4월 말 오후, 조지타운 아파트에서 바자회를 하며 이케아 양탄자와 주방용품,

주전자와 프라이팬 따위를 팔던 날이었을 것이다.

“작게 시작하면 돼, 지니.”

재키가 말했다.

“일부 집회에 참석해서 전단을 나눠주고, 몇몇 사람들에게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야. 너 혼자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어.”

그리고 일반적인 선전 구호가 이어졌다. 민중들이여, 한 번에 한 걸음씩, 작은 것부터, 당신이 바꿀 수 있길.

패트릭이 비웃던 말들, 나 역시 그를 따라 비웃던 말들이었다.

- p.245





“이게 바로 옛날 방식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에요. 항상 무슨 핑계가 있지요.

애가 아프거나 자녀의 학교 행사가 있다거나 생리통 같은 거 말이에요. 아니면 출산휴가라든지. 언제나 문제예요.”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가 차서 입이 딱 벌어졌다. 모건은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펜을 집어 들고는 허공을 쿡쿡 지르며 말을 이었다.

“진, 머릿속에 새겨야 해요. 당신 여자들은 믿을 수 없으니까요. 이제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50년대를 떠올려봐요.

모든 게 괜찮았잖아요. 좋은 집에, 멋진 차가 있는 차고에, 식탁 위에는 늘 음식이 있었죠.

모든 일이 얼마나 순조로웠다고요! 우리는 여성 노동자가 필요 없었어요. 당신이 이 모든 분노를 극복하면 알게 될 겁니다.

더 나아질 거라고 깨닫게 될 거예요. 당신 애들한테도 더 좋은 일이죠.”

- p.277





저자 : 크리스티나 달처

CHRISTINA DALCHER

조지타운 대학에서 이론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와 영국 방언의 소리 변화에 따른 음성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단편소설과 1,000단어 이내의 짧은 단편 소설인 ‘플래시 픽션’은 전 세계 100여 개 저널에 소개되고 있으며, 바스 플래시 픽션 어워드(BATH FLASH FICTION AWARD) 1위, 푸시카트 상(PUSHCART PRIZE) 후보에 오르는 등 작가로서의 역량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의 노퍽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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쓴다,,, 또 쓴다 - 문학은 문학이다
박상률 지음 / 특별한서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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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계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말 중 '3다(多)'가 가장 수명이 길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3다는 문학의 기본이자 필수다.

다사(多思), 다독(多讀), 다작(多作)이다. 많이 생각하고, 많이 읽고, 많이 써야 한다.

문학에 왕도는 없다는 말과 함께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위의 세 가지가 선행돼야 한다.

글 쓰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분들에겐 너무 진부한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도 3다는 글 쓰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아마 대부분 인정할 것이다.

잘 쓰는 사람도, 그렇지 못한 사람도 이 과정 없이 지금까지 글을 쓰는 분은 없을 터.

시인이고, 평생 글을 써온 이 책의 저자도 오랜 경험을 토대로 글쓰기를 강조하고 있다.

그의 글은 글쓰기의 모범이라고 평가돼 지금의 학생들의 교과서에도 실린 것으로 알고 있다.

물론 나는 그의 글을 교과서에서 본 적은 없지만...

이후 쓴 그의 글은 부드러운면서 날카롭다. 깊은 생각의 결과지만 경험이 바탕이다.

그래서 그의 글은 교과서적이라 할 수 있다. 글의 교과서는 물론 없지만 그의 글 솜씨보다 그의 글에 대한 열정과 사유를 높이 샀을지도 모른다.





수필과 글쓰기, 삶과 세상, 그리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박상률의 수필집 『쓴다,,, 또 쓴다』가 출간되었다.

수십 년간 독자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내용과 더불어 지난 몇 년간 신문, 잡지, 웹진, 페이스북 등에 쓴 글을 한데 묶었다.

한국 청소년문학의 시작점이라 불리는 소설 『봄바람』과 고등학교 국어와 문학 교과서에 수록된 소설 『세상에 단 한 권뿐인 시집』 등 한국 문학을 선두에서 이끄는 작가로 손꼽히는 박상률이 삶 속에서 얻은 문학의 자양분과 생각을 엿볼 수 있는 수필집이다.

때로는 무심하지만 다정하게, 때로는 우아하지만 날카롭게 펼쳐지는 문장 문장마다 저자의 자부심과 단호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하는 법이라지만,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일수록 작가 자신을 이야기하는 글은 언제나 환영을 받는다.

우리가 알고 있는 작품의 창작 과정과 숨은 뒷이야기, 그리고 그 작품을 만들어낸 작가의 삶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이 책의 어떤 글은 문학, 어떤 글은 그의 ‘페르소나’ 진돗개, 또 어떤 글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온 이야기 등 삶의 다양한 단상을 그려내고 있다.

그가 경험한 다양한 이야기들은 자칫 평범하게 보여도 그 경험에서 그가 이끌어낸 사유는 깊이가 있으며 단단하다.

다채로운 삶의 면면들을 ‘척’하지 않고 힘을 뺀 소탈한 어휘로, 하지만 그 속에 숨어 있는 날카로운 통찰력으로 그려낸 그의 글은 읽을수록, ‘수필도 이런 깊이를 지닐 수 있다니!’ 하고 놀라게 될 것이다.




하지만 역시 주축이 되는 것은 바로 ‘글쓰기’다. 첫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 글쓰기와 독서에 대한 박상률의 애정과 고민이 행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문학이 위기라고 한다. 문학이 위기 아닌 적이 있었나? (중략) 지금 시점에서 보자면 문학만이 아니라 문학이 놓인 생태계 전체가 위기이다. 출판 환경의 변화, 독자의 호응도, 각종 시각 매체의 등장에 따라 문학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신세가 되어 있다. (P. 44)

그는 ‘독자를 따라다니거나’, ‘글을 쓰기 위해 어딘가로 가야 하고’, ‘어떤 시간에만 글을 쓰는’ 작가는 볼썽사납다고 이야기하며, ‘언제고, 어디에서고, 어디에라도 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이른다.

아울러 참된 작가란 ‘오로지 어떤 경우에도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그냥 쓰는 사람일 뿐’이라고 당부한다.

끊임없이 전국을 누비며 학생, 학부모, 교사 등을 만나온 저자는 글이란 책상 앞에 쓰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몸소 보여줄 뿐만 아니라 글쓰기의 여러 고민과 어려움을 전해 듣고 따뜻하게 조언하며 열린 소통을 이어 왔다.

그의 이름 석 자가 주는 무게감을 얻기까지, 수많은 작품들을 펴내며 고민했을 시간들과 끝이 없는 사유의 과정까지 감내했을 그가 전하는 메시지를 함께하면 어떨까.




“‘쓴다,,, 또 쓴다’라니? 수필집 제목이 뭐 이래?”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수필이라면 붓 가는 대로 쉽게 써진다는 편견이 있다. 그런데 시든 소설이든 동화든 희곡이든 쉽게 써지는 것은 없다.

수필도 마찬가지! 어떤 장르의 글이든 쉽게 써지는 것은 없다. 쓰고, 또 쓰고, 계속 쓰는 과정이 있어야 한다.

날마다 써야 손에서 열기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에 나는 늘 '써져서' 쓰는 게 아니라 '쓰니까' 써진다고 말한다.

그래서 잠깐 쉬었다 또 쓰자는 의미로 마침표(.) 대신 쉼표(,)를 썼다. 나는 글둠벙이 있는 이야기밭 언저리에 산다, 고 말하길 좋아한다.

그곳에서 하루가 한평생이라 여기고, 텅 비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끼며, 마냥 아득하고 먼 하늘을 가끔 쳐다보며, 쓴다,,, 또 쓴다~.




언어를 골라 다듬다 보면 시인의 생각이 언어에 실린다. 시인은 생각만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게 아니라 언어로 세계를 구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언어를 사랑한다는 건 은유의 힘을 믿는 것이며, 언어로써 세계를 되찾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언어가 기존의 질서에 변화를 준다는 얘기. 이게 시가 지닌 은유의 힘이다.

- p. 31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고, 목수는 연장을 탓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 작가는? 작가는 독자를 탓하지도 않고 쓰는 도구를 탓하지도 말 일이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에 맞는 독자가 있으면 그만이다. 또 작가는 언제고 어디에서고 어디에라도 쓰는 사람일 테다.

그런데 독자를 따라다니고, 글을 쓰기 위 해 어딘가로 가야 하고, 어떤 시간에만 글을 쓰고, 도구는 어 째야 한다면?

그런 작가는 볼썽사납다. 평생 글을 쓸 준비만 하다가 생을 마칠 각오가 아니라면 피할 일이다.

- p. 46




단풍철에 단풍을 보노라면 꽃이 생각난다. 화려했던 꽃하고는 다른 아름다움! 꽃을 피우지 못한 나무도 단풍은 아름답다.

도저히 같은 나무라고 여겨지지 않을, 나무의 변신. 잎도 꽃도 없이 다 떨군 모습으로 겨울을 견디고, 봄이 되자 연초록 잎을 내밀고, 여름에 붉은 꽃을 피우더니, 가을이 되자 울긋불긋한 단풍잎을 가진, 나무의 변신.

이제 그마저 다 떨구고 겨울을 맞겠지. 단풍은 장엄한 저녁노을을 닮았다. 특히 바다 속에 집을 짓듯 바다 위로 저무는 석양.

아침이나 한낮의 태양이 흉내 낼 수 없는 저녁노을.

- p. 119




사는 일도 원고 마감과 같다고 생각한다. 마냥 천년만년, 아니, 영원히 산다면 우리 삶이 절실할까?

죽음이라는 생의 마감이 있기에 살아 있는 동안 다 아등바등하는 것 아닐까? 단지 죽음은 삶의 등에 얹혀서 숨어 있다. 아니, 그림자이다.

좀체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 딱 한 번 모습을 드러낸다. 누구나 그걸 알고 있다. 그러나 평소엔 죽음을 의식하지 않기에 남의 일이다.

죽음이 자신의 일이 되었을 땐 이미 그는 죽음을 어쩌지 못한다. 삶과 한통속인 죽음! 영원히 살 것처럼 굴지 말 일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에선 삶 이후의 삶인 죽음을 언급한다. 그렇다면 죽음은 삶만큼이나 중요하다.

오늘도 원고 몇 개를 ‘절박하게’ 써서 마감한다. 아니, 내 삶의 ‘절박한’ 하루를 마감한다.

- p. 122




가짜, 이른바 ‘짝퉁’이 설친다. 짝퉁은 자기 일에 절대 목숨을 걸지 않는다.

남 보기엔 하찮은 일일지라도 어디에든 한번이라도 목숨을 걸어본 이는 안다.

사는 게 얼마나 엄숙한 일인지……. 또 한 사람의 부음을 들었다.

- p. 127

나는 ‘사랑을 사랑이라 하면 이미 끝난 사랑’이라고 여긴다. 문학에서도 마찬가지.

사랑이라는 말을 한 마디도 쓰지 않으면서 사랑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는 게 좋은 문학이다.

사랑에 빠진 자는 결코 사랑을 들먹일 필요가 없을 터이므로!

- p. 187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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