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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크리스티나 달처 지음, 고유경 옮김 / 다산책방 / 2020년 2월
평점 :
소설은 허구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해져 세상에서 일어날 일을 가정해서 다룬다.
허구지만 현실적이어야 독자의 눈을 붙잡는다. 리얼리티가 살아 있어야 독자는 관심을 갖기 때문이다.
상상력이 커지면 판타지나 공상소설로 분류되지만 과학적 리얼리티를 제시해야 한다.
이 소설은 미래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 모티브지만 얼마든지 일어날 수도 있는 일을 다룬다.
이 점은 조지 오웰의 『1984』를 닮았다. 여기에 좀 더 극적으로 과학적 리얼리티도 담았다.
권력의 속성을 은유로 엮어내기에 충분하다. 지배와 피지배의 차이를 가르는 데는 부족함이 없다.
작가 크리스티나 달처는 이 점이 돋보인다. 문장의 좋고 나쁨에 대해서 말하기에는 번역본을 읽는 독자로서는 한계가 있다.
소설의 속성인 스토리 전개와 극적 구성력, 반전의 묘미 등으로 소설을 흥미를 판가름하면 된다.
그래서 디스토피아 세계는 독자의 구미를 자극할 충분한 주제이고 소재이다.
다 읽고 난 다음 스토리와 재미가 머리에 남는다면 그런 세상의 존재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어쩌면 독자들은 교훈적인 면에서 디스토피아 소설의 중요성을 찾을 것이다.
국민을 고분고분한 양처럼 길들이고 싶어 하는 대통령과 모든 사람이 성경 교리를 지키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 목사가 권력을 장악했다.
한때 흑인 대통령이 평등과 평화를 외치던 이 나라는 이제 ‘순수운동’이라는 이름 아래 여성의 권리를 하나씩 빼앗고
급기야 하루에 100단어 이상을 말할 수 없게 만들었다. 텔레비전과 신문은 오직 정부 정책을 찬양하는 방송만 내보낼 뿐이다.
네 아이의 엄마이자 신경학과 언어학의 권위자인 진 매클렐런 박사는 어느 날 정부로부터 실어증 치료제를 만들어달라는 반강제적인 제안을 받는다.
한때 믿고 의지했던 남편마저 정부 정책에 동조하기 시작하자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정부 주요 인물을 암살하고 정권을 뒤엎을 위험한 계획을 세우기 시작한다. 과연 그들은 잃어버린 목소리를 찾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
결혼 17년 차, 네 명의 자녀를 둔 진 매클렐런. 그녀는 남편 패트릭과 네 명이 아이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 있다.
서로의 학교생활을 궁금해하고, 적응은 잘하고 있는지 질문을 주고받는 평범한 가족의 평범한 저녁 식사 자리다.
단 한 가지, 남편과 아들들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걸 빼면.
진과 그녀의 막내딸 소니아는 남자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가로저을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그들에게는 목소리가 없었다. 한창 말 연습을 해야 할 어린아이부터 뇌의 손상으로 인해 언어를 잃어버린 노인까지,
여자라면 누구나 손목에 ‘카운터’를 차고 하루 100단어까지만 말할 수 있는 세상이다.
그들이 101번째 단어를 말하는 순간, 손목에는 전기 충격이 가해지고 카운터의 숫자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충격의 강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카운터는 말 많은 여성들의 손목에 화상을 입히거나, 심한 경우 기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여성들이 빼앗긴 것은 목소리뿐이 아니었다. 언어학 박사였던 진 매클렐런은 손목에 카운터를 차는 순간부터 ‘박사’라는 호칭을 박탈당한 채 그저 엄마, 아내, 주부로만 살고 있다. 투표권은 물론 부당한 것에 반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최소한의 권리마저 사라졌다.
모든 결정과 선택은 신과, 신이 만든 남자들의 뜻대로 이루어질 뿐이다.
하루 100단어 이하로 말한 지 1년이 넘은 어느 날, 대통령이 보낸 ‘그들’이 진을 찾아온다.
사고로 인해 언어능력을 상실한 대통령의 형을 위해 베르니케 실어증 연구를 계속하라는 압박과 함께.
진 매클렐런은 반강제로 연구를 재개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대통령과 정부의 계획을 알게 된다.
대통령은 형의 언어능력을 회복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사실 그의 사고가 진실인지 아닌지도 알 수 없다.
그저 진의 연구 결과인 ‘베르니케 혈청’을 이용해 자신들이 생각하는 올바른 세상, 더 근본적인 의미에서 여성들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계획만 있을 뿐이다.
동시에 진은, ‘베르니케 혈청’을 이용하여 정부의 계획을 저지하고, 망가진 세상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을 깨닫는다.
그동안 여성들을 억압하는 세상에 소심한 반항만을 하던 그녀는 ‘작은 것부터 행동하라’고 외치던 옛 친구 재키의 말대로 자신의 움직임이 세상에 큰 변화를 가져올 거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그녀는 연구를 진행해나가며 빼앗긴 목소리, 망가진 결혼생활, 세뇌당한 큰아들 스티븐…, 이 모든 것을 바로잡기 위해, 무엇보다 이런 세상에서 여성으로 살아가야 할 막내딸 소니아를 위해 끊임없이 커져가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대통령이 연구팀을 압박할수록 그녀 내면의 목소리는 점점 커져가고, 원하는 결과를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정부에 대한 저항심도 커져만 간다.
그로 인해 정부를 위해 일하는 남편 패트릭과 진의 관계는 끝을 알 수 없는 수렁에 빠지고, 여성들과 정부와의 관계 역시 지뢰밭을 향해 폭주하듯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쥐나 토끼뿐만 아니라 유인원까지 실험 대상으로 삼던 정부는 급기야 베르니케 혈청을 손아귀에 넣게 되고, 인간까지 실험 대상으로 생각하는데…. 대체 그들은 무엇을 실험하고 싶은 것이며, 그들이 만들고자 하는 더 올바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꼭꼭 눌러왔던 목소리와 대면한 진, 그리고 억압받아온 여성들은 과연 목소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여자들은 침묵하지 않았다』에서 목소리를 빼앗기고 가부장제의 철창 안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모습이 빅 브라더의 감시보다, 여성을 걸어 다니는 자궁 취급하는 것보다 수월하게 상상 가능하지만, 훨씬 더 소름끼치는 이유는 미래가 아닌 과거를 역행하는 듯한 세상을 그렸기 때문이다.
수십 년 전, 여성이 남자의 말에 복종하고 남자의 뜻에 순종하며 살던 시대로 돌아간다니. 얼마나 끔찍한 퇴보인가.
진의 딸 소니아와 이 땅의 모든 여성들은 ‘본의 아니게 입을 닫아버리게 되는 세상’에서 어떻게 목소리를 내며 살아가야 할까?
싸우고 싶지만 어떻게 싸워야 할지 모르겠다.
재키가 여기 있었다면 내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줬을 텐데.
재키의 마지막 강의가 생각났다. 어느 4월 말 오후, 조지타운 아파트에서 바자회를 하며 이케아 양탄자와 주방용품,
주전자와 프라이팬 따위를 팔던 날이었을 것이다.
“작게 시작하면 돼, 지니.”
재키가 말했다.
“일부 집회에 참석해서 전단을 나눠주고, 몇몇 사람들에게 이슈에 관해 이야기하는 거야. 너 혼자 세상을 바꿀 필요는 없어.”
그리고 일반적인 선전 구호가 이어졌다. 민중들이여, 한 번에 한 걸음씩, 작은 것부터, 당신이 바꿀 수 있길.
패트릭이 비웃던 말들, 나 역시 그를 따라 비웃던 말들이었다.
- p.245
“이게 바로 옛날 방식이 통하지 않았던 이유에요. 항상 무슨 핑계가 있지요.
애가 아프거나 자녀의 학교 행사가 있다거나 생리통 같은 거 말이에요. 아니면 출산휴가라든지. 언제나 문제예요.”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가 차서 입이 딱 벌어졌다. 모건은 아직 할 말이 남은 것 같았다.
펜을 집어 들고는 허공을 쿡쿡 지르며 말을 이었다.
“진, 머릿속에 새겨야 해요. 당신 여자들은 믿을 수 없으니까요. 이제 세상은 원래대로 돌아가지 않아요. 50년대를 떠올려봐요.
모든 게 괜찮았잖아요. 좋은 집에, 멋진 차가 있는 차고에, 식탁 위에는 늘 음식이 있었죠.
모든 일이 얼마나 순조로웠다고요! 우리는 여성 노동자가 필요 없었어요. 당신이 이 모든 분노를 극복하면 알게 될 겁니다.
더 나아질 거라고 깨닫게 될 거예요. 당신 애들한테도 더 좋은 일이죠.”
- p.277
저자 : 크리스티나 달처
CHRISTINA DALCHER
조지타운 대학에서 이론 언어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탈리아와 영국 방언의 소리 변화에 따른 음성학을 전공하고 있으며,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녀의 단편소설과 1,000단어 이내의 짧은 단편 소설인 ‘플래시 픽션’은 전 세계 100여 개 저널에 소개되고 있으며, 바스 플래시 픽션 어워드(BATH FLASH FICTION AWARD) 1위, 푸시카트 상(PUSHCART PRIZE) 후보에 오르는 등 작가로서의 역량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미국 버지니아주의 노퍽에서 남편과 함께 살고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