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에서 '반일'로, 반일에서 '극일'과 '지일'로 우리 국민의 일본에 대한 정서는 변해왔다.
위정자들의 일본에 대한 의식과 정책에 대해 차이가 있긴 하지만 국민들의 정서는 지난 20세기 내내 변화를 지속했다.
21세기 들어 우리의 경제도 어느 정도 안정되고 대외 수출 의존도가 일본에서 중국으로 바뀌었다.
국민의 기저에 깔려 있는 감정과 상관없이 당장의 경제적 이익을 가져다줄 상대가 중국으로 변한 것이다.
거기에 우리 국민과 중국 국민의 대일 감정은 비슷하다. 일본에 의해 침략 당했고, 민간인 대량 학살의 뼈아픈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
동병상련의 심정이 신뢰감의 바탕에 깔려 있다. 1990년대 초 수교를 기점으로 G2로 올라선 중국과의 교류는 점차 확대되는 상황이다.
우리 국민의 중국에 대한 감정은 이념적인, 즉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체제 때문에 대립했지만 비교적 선린 관계를 맺어왔다.
중국 본토라 일컬어지는 한족이 다스리던 나라가 우리 조선에 직접 침략한 일이 한 번도 없다.
물론 황제국과 신하 관계로 유지된 양국은 서로의 관계를 깨기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전쟁 때 북한을 돕기는 했지만... 침략은 아니었다.
그러나 2차 아베 정권이 들어선 2012년 이후, 일본 정계에서는 일본군 ‘위안부’와 독도 및 강제징용 문제 등과 관련된 망언이 끊임없이 되풀이되었다.
2019년 8월에는 한국을 백색국가에서 제외하면서 무역 갈등을 일으켜 ‘NO 재팬’으로 대변되는 반일 정서가 다시 대한민국 전체를 휩쓸게 했다.
그 결과 일본 국민들에게 ‘아베 정권이 반한 감정을 건드려 자신들의 정치적 위기를 넘기려 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거듭된 정책 실패와 스캔들로 인한 불만의 목소리를 외부로 돌리기 위해 한일 관계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는 아베 정권은 자민당 내 강성 우파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 강성 우파는 일본 내 반한·혐한 분위기 조성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일본의 극우세력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여기에서 말하는 극우세력이란 1997년 ‘새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에 이어 극우 단체 ‘일본회의(특별고문 - 아베 총리, 아소 다로 부총리)’를 결성해 일본 내에서 역사 왜곡을 심화시키는 데 주체적인 역할을 한 세력과 그 추종자들을 일컫는다.
그런데 일본 극우 세력에 동조하는 집단이 일본 내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랜 세월 일본과 갈등을 겪고 있는 한국에도 그와 같은 부류가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19년 7월 《반일 종족주의》를 출간한 저자들이다.
《신친일파》의 저자 호사카 유지(세종대학교 교수)는 그들을 ‘신친일파’라고 규정한다.
신친일파는 '친일파'라는 단어에서 파생된다. 대한제국 말기 일본 침략에 나라를 팔아넘긴 이완용 등 '매국 5적'부터 비롯된 말이다.
이후 일제 강점기 일제에 부역하거나 애국 독립지사 등을 억압한 사람들도 확대됐다.
이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 나라든 겨레든 아랑곳하지 않고 일본에 협조해 재산도 불리고, 직위도 따냈다.
새로 등장한 단어 '신친일파'는 지금 현재도 일본에 부역하거나 일본의 극우 주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이들은 국민 정서나 감정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래서 '친일'이라 딱지를 붙이지만 엄밀한 의미로 '매국'에 가깝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지적하는 '신친일파'는 일본 내에서 반한·혐한을 외치고 있는 일본 극우 세력의 주장 대부분을 고스란히 차용하고 있다.
특히 대표 저자인 낙성대경제연구소 이사장 이영훈은 과거에 일본 극우 성향의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자금을 지원받아
식민지 연구를 수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방 이후 대한민국이 기적에 가까운 경제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던 바탕은
일제 강점기의 기반에서 비롯되었다는 황당한 주장인 ‘식민지 근대화론’도 그때를 전후해서 구체화되었다.
따라서 왜곡과 오류가 섞인 그들의 주장이 오직 학문적 소신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제징용 문제, 독도 문제 등
구체적인 근거 제시와 함께 『반일 종족주의』의 왜곡과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1. 강제징용 관련
여기에서 이영훈은 ‘미불금이나 미수금의 문제가 재판의 본질’이라는 큰 거짓말을 했다.
원고가 받지 못했다고 하는 통장이나 미불금, 미수금이 이번 재판의 쟁점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영훈은 그것을 알면서 쟁점을 흐리게 만들었을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면 강제 징용자 판결에 관해 잘 모르는 상태에서 적당하게 자기주장을 쓴 셈이다.
이영훈의 말대로 한국에 거짓말 문화가 있다면, 이영훈 자신도 그 문화에 오염된 사람이라는 사실이 이 부분에서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선 이번 재판은 임금을 받지 못했다는 소위 미불금, 미수금의 문제가 아니다.
미불금, 미수금의 지급 문제는 1965년 청구권 협정에서 모두 끝난 문제이므로,
2018년 10월 이후 한국 대법원은 미수금이나 미불금을 문제 삼지 않았다. 원고들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이영훈의 판결에 대한 이해는 처음부터 잘못되어 있다. (_「판결이 거짓이라고 우기는 이영훈」 중에서)
2. 일본군 ‘위안부’ 관련
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가 일본군 ‘위안부’ 제도로 발전되었다는 논리는 하타 이쿠히코秦郁彦가 제공했고, 조선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아버지에 의해 기생집으로 팔려 ‘위안부’가 되었다는 것은 일본의 대표적인 우파 논객인 니시오카 스토무西岡力의 주장이다.
그리고 강제연행이나 취업 사기가 있었다 하더라도, 그 책임은 모집업자들에게 있다는 논리는 일본의 우파 논객들이 거의 다 사용한다.
결과적으로 일본의 우파 논객들이 즐겨 사용하는 논리가 새삼스럽게 한국에서 『반일 종족주의』라는 책 속에 다시
등장한 셈이다.(_「조선의 기생제와 공창제로부터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생겼는가」 중에서)
3. 독도 관련
이영훈은 칙령 제41호에 나온 석도는 독도가 아니라 오늘날의 관음도라고 우긴다. 일본의 주장과 똑같다.
이영훈은 그 이유로 울릉도에 속하는 “사람이 사는 섬”이 관음도와 죽도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그 주장은 큰 착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음도에는 사람이 살지 않았다.
최근에는 울릉도 본도와 관음도에 다리가 만들어져서 관리하는 사람이 사는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2010년까지 관음도에는 역사적으로 사람이 살지 않았다.
그리고 1900년 칙령 제41호가 반포되었을 때만 해도 관음도에는 ‘도항’이라는 제 이름이 있었다.
그런데 왜 칙령 제41호에 도항이라는 이름을 쓰지 않고 ‘석도’라는 명칭을 썼을까.
그 이유는 석도가 관음도 즉, 도항이 아니기 때문이다.
1882년에 이름을 상실하고 이후 울릉도 사람들이 돌섬이라고 부른 독도를 석도石島라는 한자로 부른 것이다. (_「석도가 독도다」 중에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역사 문제는 항상 정확하게 규명해야 하고 사실과 거짓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 나라 역사를 왜곡하고 일본의 역사 기록과 역사 의식이 올바르다고 주장하는 것은 일본이 아직 침략 전쟁의 반성을 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읽어볼 가치도 없다고 생각해서 금방 그 화제는 사그라들었다고 기억된다.
이 책 <신친일파>는 일본인 교수가 '반일 종족주의'의 내용이 거짓이라는 것을 조목모족 따진다.
일본인이지만 오랫동안 한국에서 한일관계를 연구한 전문가의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