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아닌 것으로도 읽은 기분 읽어본다
요조 (Yozoh) 지음 / 난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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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가 얇고, 책에 대한 단상들이 너무 짧고 단순하여, 진지한 책이라기 보다는 두꺼운 팜플렛 같은 느낌이다. 이건 책의 만듦새가 주는 영향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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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를 비추는, 발목을 물들이는
전경린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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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경린 작가는 은근히 작품간의 편차가 있는 편인데, 외롭고 기괴한 유년 시절, 엄마와의 불화와 애정 결핍과 그 결과로 자라난 자폐적 자아에 대한 서사는 늘 발군이다. 연애담 보다 이쪽에 재능이 더 뛰어나다. 이 소설도 그러한 결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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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최민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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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마다 독감 예방주사를 맞추지만 아이는 해마다 독감에 걸린다. 독감 바이러스는 워낙 변종이 많아 예방주사만으로 100% 막을 수 없으며, 대신 독감에 걸려도 비교적 순하게 지나가게 해준다고 언론과 제약사에서는 말하지만, 과연 사실일까? 이 독감 백신이 과연 효과가 있는 백신이 맞을까? 혹시 아무 효용도 없는 ‘물백신’을 비싼 돈 주고 사서 맞추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수준 낮은 음모론인 것은 알지만 해마다 독감에 걸려 괴로워하는 아이를 보며 3,4만원씩 주고 맞춘 예방주사의 효과에 대해 의구심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예방주사만큼 비싼 타미플루를 또 사서 먹이고 있노라면 이게 다 약을 팔아먹으려는 제약사들의 수작은 아닌가 하는 의심이 점점 커져 간다. 

  그래도 독감은 언젠가 낫고, 힘들었던 며칠이 지나가면 보건당국과 언론과 제약사에 품었던 의심은 봄눈처럼 녹아 사라진다. 어쨌거나 나으니까. 독감으로 죽지는 않았으니까. 며칠 학교에 못 나간 것 빼면 독감 환자라고 차별받았거나 생계를 잃었거나 인생을 송두리째 잃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독감이 낫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독감에 한 번 걸리면 낫지 않는다면? 죽게 된다면? 설령 낫는다 해도, 증상만 가라앉을 뿐 바이러스는 몸에 잠복해 언제든 다시 활성화될 수 있다면? 그 인생은 살아도 산 것이 아니다. 직장을 가질 수 없다. 학교도 다닐 수 없다. 이웃과 교류할 수도 없다. 목숨은 붙어 있지만 사회적으로는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것이다. 이미 hiv 바이러스를 보유한 사람들은 에이즈로 진행되지 않아도 이와 비슷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는 그들의 이야기를 수면 위로 올리는 것을 꺼린다. 하지만 독감은 다르다. 전파 속도가 빠르고 감염자의 수도 많다. 덮을래야 덮을 수가 없다.

  최민호의 소설 '창백한 말'은 hiv 바이러스처럼 발현되기 전의 좀비 바이러스를 '보유'한 사람들과 바이러스에 '면역'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는, 그래서 '면역자'들이 '보유자'들을 '관리'하는 사회를 그린다.
  구인제약에서 ‘(바이러스 발현을 알리는 보유자용) 알림밴드’를 만드는 노동자 김수진은 ‘보유자’다. ‘보유자’는 아이에게 바이러스를 유전시켜 ‘보유자’를 낳게 된다. 그래서 김수진의 아이 미나도 ‘보유자’다. 보유자가 아이를 낳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남편은 진작에 수진을 떠났다. 수진은 일을 해서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아이와 자신의 바이러스 발현을 막아줄 약 ‘휴머넥스’를 사야 한다. 시간 맞춰 매일 휴머넥스를 먹지 못하면 좀비가 된다. 소설의 시작, 김수진의 바쁜 퇴근길, 사장 진석호는 김수진 외 몇 명을 호출하여 참으로 애석하게도 그들이 해고 대상이 되었음을 통보한다. 하지만 회사는 가족의 일원이었던 그대들을 잊지 않을 것이며 더 나은 직장으로 갈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고 나는 진정으로 가슴이 아프다는 것을 그대들이 꼭 알아주길 바라고... 한없이 늘어지는 진석호의 말들을 무시하고 김수진은 집에서 기다리는 아이를 위해 서둘러 일어난다. 노력해도 바뀌는 건 없으니까. 

  소설에서 좀비는 ‘시체’로 호명된다. 즉 그들은 죽은 존재다. 좀비는 사람도 시체도 아닌 어딘가에 있는 제3의 존재이지만, ‘시체’는 그냥 죽은 사람일 뿐이다. 죽은 사람이므로 그 사람을 또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다. 시체의 머리를 부숴도 되고 파묻어도 되고 불태워도 되고 게임장에 풀어놓고 게임용 과녁으로 써도 된다. ‘그래도 된다’는 점점 확대된다. 보유자는 어차피 곧 시체가 될 존재이기 때문에, ‘시체 전단계’ 정도이기 때문에 좀 쉽게 죽여도 된다. 시체가 될 가능성이 없는 ‘면역자’의 안전을 위해서, 어차피 언젠가 시체가 될 보유자가 희생되는 것은 어쩔 수 없이 치뤄야 할 비용이다. 보유자가 아무리 노력해도 보유자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그들을 면역자로 바꾸기 위한 신약을 개발하겠다는 박세영 연구원의 계획은 비웃음을 산다. 

  소설은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다' 는 네거티브의 세계관을 끝까지 유지, 발전시킨다. 보유자와 면역자가 동등한 대우를 받는 사회, 바이러스의 근본적인 치료제 개발, 이런 말들은 공허하다. 소수가 노력한다고 해서 세상은 바뀌지 않고 그 노력은 오히려 사람을 더욱 비참한 처지로 몰아갈 뿐이다. 그렇다면, 그 '비참한 처지'에 몰린 사람의 선택은 어떻게 될까? 진석호가 김수진에게 요구한 것처럼 비굴하게 굴종하며 매달리게 될까? 아니면, 어차피 노력해도 달라지는 것이 없는 이 사회의 체제와 질서를 완전히 거부하고 그것을 붕괴시키기 위해 뛰어들게 될까?

  좋은 소설은 언제나 독자를 도덕의 시험대 위에 올리고 그 자신의 한계와 맹점을 돌아보게 한다. 구인제약은 돈 받고 파는 사제 약의 성분과 보건소에 무료 공급하는 약의 성분을 다르게 만들고 일부러 그 사실을 대중에게 흘린다. 살고 싶은 대중은 무료 지급약을 거부하고 비싼 돈을 들여 사제 약을 사먹는다. 제약회사는 점점 더 부자가 되고 그 돈으로 정계와 사법부에 단단한 연줄을 맨다. 무료 지급약을 먹고 바이러스가 발현된 미나를, 수진은 끝까지 보호하려 든다. 나는 수진을 이해할 수 없었다. 집단 면역이라는게 뭔데, 다수의 안전을 위해 치뤄야 하는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는 건데, 내 아이를 지키기 위해라는 지나친 모성애로 다수를 위기에 빠뜨리다니. 대피소 안에서 미나를 지키며 무기를 휘두르는 수진을 보며 나는 그들을 쫓아내려고 하는 보유자들의 편을 들었고, 시체를 살처분하는 보건군의 편을 들었고,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자들을 위해 가치가 덜한 자들은 어쩔 수 없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면역자들의 편을 들었다. 나는 혐오자였다. 포비아임을 인정하지 않는 포비아였다. 끝까지 석호에게 사과하지 않는 수진, 무릎 꿇고 진심으로 빌지 않는 수진, 자신의 등급을 받아들이고 굴종하지 않는 수진을 어리석고 답답하다고 생각했다. 좋은게 좋은 것이며 받아들이고 타협하지 않으면 결국엔 너에게도 불이익인데. 나는 그렇게 쉽게 주류의 편을 들었다.

  무료로 공급하는 약의 성분을 일부러 약하게 만들어 사회적 경제적 약자인 자들이 시체가 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주류 강자들의 악랄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라 더 열심히 고개를 조아려 사제 약을 손에 넣으려 하지 않은 노동자를 비난한다. 다수를 위해 너는 죽어주어야 한다고 위협하는 자들에게 분노하지 않고 순순히 장벽을 받아들이고 살처분을 감수해 다수의 안전을 지켜주지 않는 감염자를 비난한다. 바이러스를 부와 권력의 도구로 사용하려는 자들에게 분노하지 않고 그나마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면역자들까지 시체들로 만들어 버리려는 테러리스트 보유자들에게 분노한다. 주류도 아니고 자본가도 아니며, 강자도 아니고 면역자가 될 보장도 없는 주제에 나는 천연덕스럽게 강자와 면역자로 나 자신을 규정하고 그들의 논리를 내면화시킨다. 타인을 밟고 서서라도 나는 일단 살아남으면 된다는 믿음을 갖는다. 혐오자의 완성이다. 바이러스 없이도 인간을 물어 죽이려는 인간. 시체의 탄생이다.

  한 명을 살리기 위해 다수를 위험에 빠뜨린 수진과 세영의 결정은 일견 비이성적인 것 같지만, 진정으로 비이성적인 것은 다수자 중심으로 짜여져 소수자를 내몰고 있으면서 그것을 ‘이성적 질서’라고 포장하고 있는 이 세계이다. 그 비이성성에 맞서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그 세계의 질서를 따르는 척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그 세계에 ‘더욱 더’ 비이성적으로 맞서는 일이다. 살아 있는 자가 죽어 있는 시체만도 못한 세계, 이빨이 아닌 행정과 사법의 힘으로 남을 물어 죽이는 자들의 세계, 이 세계는 어차피 이미 좀비들의 세계가 된 것이다. 살아 있다고 살아 있는 것인가? 영화 ‘부산행’의 할머니는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소수자들을 희생시키려 하는 이들을 비웃고, 그들이 타고 있는 칸의 문을 열어버렸다. ‘창백한 말’의 세영은 자신의 불쾌감을 해소하기 위해 살아있는 인간들을 좀비에게 던져주려는 이들에게 바이러스가 담긴 구슬을 던져 주었다. 이런 세상이면 그냥 다 망하는 것이 나아. 어차피 살아있는 ‘인간’은 없는 세계니까. 살아 있는 시체들의 세상.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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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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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미문주의, 문창과 식의 학습된 문장쓰기가 어디에 도달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한 권이었다. 지나치게 예쁘고 단정한 문장, 지나치게 공들여 쓴 문장, 지나치게 꾸며진 문장들로 한 권이 빼곡하다. 상투적이고 신파적인 이야기를 예쁘게 감싸안아 그 가치를 부풀리며, 윤리적 고민과 자기반성적 성찰에 도달하기 전에 먼저 독자의 눈매와 코끝을 자극한다. 독자에게 잘 보이려 하지 않고 독자의 공감을 사려고 애쓰지 말며 독자의 감정을 자극하여 점수를 얻으려 하지 않는 것이 좋은 문학의 미덕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예쁘고 예쁜 말들은 보기 흉했다. 죄없고 약한 자들을 희생시켜 기어코 눈물 콧물 묻은 감동을 뽑아내고야 말려는 행태가 아닌가. 최루액 묻은 감동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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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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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 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오는 비행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사, 2003




  소설 '배반'은 미 연방 대법원 법정에서 시작한다. 미(Me) 대 미합중국(U.S.A.)의 재판. '흑인 남자답지 않게 법을 잘 지키고 살았던' 이 사나이가 피고석에 앉아 마리화나 한 대를 시원하게 말아피우며 신성한 미국의 대법원 법정을 모독하기까지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배꼽 잡는 블랙 유머와 지독한 패러디 및 아이러니로 무장하고 있으나, 그 유쾌함과 발칙함 속에서도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뜨끈해지고 마는 이 소설은, 이성복 시인의 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을 생각나게 한다. 밥알을 건져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개에게 던져준 흙 묻은 빵을 허겁지겁 씹는, 나를 때리는 자에게 매달려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리는 미친놈 같은, 이것은 노예 시대와 인종 분리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니거의 이야기다. 

  인종 차별은 철폐되었는가? 미국의 수정 헌법 13조는 인종 차별을 철폐시켰는가? 폴 비티의 이 소설은 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한다. 미국의 수정 헌법 13조는 다음과 같다.
 
제1항 : 어떠한 노예 제도나 강제 노역도, 해당자가 정식으로 기소되어 판결로서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미합중국과 그 사법권이 관할하는 영역 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
제2항 : 의회는 적절한 입법을 통하여 본조(本條)를 강제할 권한을 가진다.

  수정 헌법 13조가 노예 제도를 철폐한 법안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어디에도 백인과 흑인이 동등하다는 말은 없으며, 인종 차별을 미국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말 또한 없다. 수정 헌법 13조 1항은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 조항은 뒤집었을 때 '확정된 형벌에 의해서는'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있음을 명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미합중국이 정한 다른 법률에 의거해 (백인) 경찰의 명령을 거스르는 (유색인) 잠재적 범죄자는 언제든 징역살이와 현장사살이라는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함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 흑인, 멕시칸, 아시안, 그리고 온갖 혼혈과 혼혈이 뒤섞인 이 다인종 국가에서, 백인은 흑인을 멸시하고 흑인은 멕시칸을 혐오하며 이들 모두는 아시안을 우습게 본다. 인종 통합과 차별 철폐라는 기만의 덮개 아래 인종 간의 갈등과 분노는 언제나 들끓고 있고 증오와 차별은 엄존한다. 소설은, 엄연히 그게 거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기 없다고 말하는 것, 엄연히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데 우리는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 선에서 출발하여 동등하게 경쟁해 과실을 따먹어야 하는 거라고 말하는 미국식 인종 통합의 기만성을 통렬하게  비웃는다. 
   

  이러니 인종의 통합이라는 것은, 니거가 세상에서 훔쳐낸 행복 같은 것. 백인에 의해 끌려와 백인에 의해 지배받다가 백인의 손에 해방되어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고 산다고 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백인의 밑깔개로, 미국의 하층민으로, 저임금과 저학력의 굴레 속에 그것들을 대물림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백인과 동등한 미국 시민이라고 착각하며 멕시칸과 아시안을 멸시하며 자위하는 것. 그것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그래서 오랜 세월 야유받는 흑인 꼬마 역을 연기해온 원로 배우 호미니는 미(Me)에게 노예 생활을 자처하는 것이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비참한 흑인 역할을 재연하는 것이다. 그에게 짓밟히고 조롱당하는 흑인의 역할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그는 오랜 세월 그것을 연기해왔고 그것은 사실 논픽션이었기에. 독자는 호미니와, 경찰에게 사살당한 미(Me)의 아버지 니거 위스퍼러를 통해, 현실을 부정하려고 발악했지만 결국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야 마는 포이 체셔를 통해, 니거로 태어난 이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페인트를 뒤집어 쓰는 삶을 산다고 해도 니거는 니거일 수밖에 없으며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적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고 해봤자 비참해지기만 할 뿐(포이 체셔) 차라리 그 앞에 정면으로 옷을 벗고 패 죽여보라고 덤비는 것(호미니)만도 못함을 인정하게 된다.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

  그러나 이 소설이 마냥 무겁고 독설적이지만은 않은 건, 주인공 미(Me)의 건강하고 명랑한 언행들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의 매력적인 여자친구 마페사의 능동성도 소설에 탄력을 더해준다. 미와 마페사와 러브라인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미의 모든 행동의 핵심 동인이며, 소설의 담론을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특히 마페사의 버스에서 이루어지는 호미니의 생일파티는 소설에서 묘사된 흑인 사회의 명랑발칙한 카니발성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로자 파크스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는 마페사는 핍박받는 흑인 여성 캐릭터의 상투성을 벗어나, 진취적이고 활력 넘치는 여걸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여 독자를 기분 좋게 한다. 마페사 외에도 미(Me)를 조력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쾌활하고 적극적인 모습은 이 소설을 결코 냉소와 분노 안에 축 처져 있지 않게 한다. 농부라는 미의 직업 또한 흑인들과의 건강한 유대성을 강화해주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일본산 귤과 같은 외래종을 재배하고, 그것을 아낌 없이 지역 사회인들과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어나가는 미의 모습은 흡사 '호밀밭의 파수꾼' 같다. 아버지 니거 위스퍼러는 한 명의 똑똑한 이론가를 양성하여 흑인 사회를 발전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아들 미는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어린 아이들의 수호자가 되었고, 갱스터들의 화합을 이끌었으며, 유색인의 카니발을 성사시켰고, 미 연방 대법원에서 '편견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미국인들이 평등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1)하게끔 만들었다. 비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기어코 복수하는 그 방법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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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3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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