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폴 비티 지음, 이나경 옮김 / 열린책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진해에서 훈련병 시절 외곽초소 옆 개울물에 흰 밥알이 떠내려 왔다 나는 엠원 소총을 내려놓고 옹달샘 물을 마시는 노루처럼 밥알을 건져 먹었다 물론 배도 고팠겠지만 밥알을 건져 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서였다 나는 나를 비참하게 만들어 생에 복수하고 싶었다.
 
 매점 앞에서 보초 설 때는, 단팥빵 맛이 조금만 이상해도 바닥에 던지고 가는 녀석들이 있었다 달려드는 중대장의 셰퍼드를 개머리판으로 위협하고, 나는 흙 묻은 빵을 오래 씹었다 비참하고 싶었다 비참하고 싶은 나를 바라보고 싶었다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또 일병 달고 구축함 탈 때, 내게 친형처럼 잘해주던 서울 출신 중사가 자기 군화에 미역국을 쏟았다고, 비오는 비행갑판에 끌고 올라가 발길질을 했다 처음엔 왜 때리느냐고 대들다가 하늘색 작업복이 피로 물들 때까지 죽도록 얻어맞았다 나는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렸고 중사는 혀를 차며 뒤도 안 돌아보고 내려갔다 나는 행복했고 내 생에 복수하는 것이 그렇게 흐뭇할 수 없었다
 
 그리고 제대한 지 삼십 년, 정년퇴직 가까운 여선생님 집에서 그 집 발바리 얘기를 들었다 며칠 바깥을 싸돌아다니다 온 암캐가 갑자기 젖꼭지 부풀고 배가 불러와 동물병원에 갔더니 가상 임신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내 얘기가 아니었던가 지금까지 세상에서 내가 훔쳐낸 행복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을, 나는 동물병원 안 가보고도 알게 되었다
 
- 이성복,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  『아, 입이 없는 것들』 ,문학과 지성사, 2003




  소설 '배반'은 미 연방 대법원 법정에서 시작한다. 미(Me) 대 미합중국(U.S.A.)의 재판. '흑인 남자답지 않게 법을 잘 지키고 살았던' 이 사나이가 피고석에 앉아 마리화나 한 대를 시원하게 말아피우며 신성한 미국의 대법원 법정을 모독하기까지에는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배꼽 잡는 블랙 유머와 지독한 패러디 및 아이러니로 무장하고 있으나, 그 유쾌함과 발칙함 속에서도 참을 수 없이 가슴이 뜨끈해지고 마는 이 소설은, 이성복 시인의 시 중 내가 가장 좋아하는 '내 생에 복수하는 유일한 방법처럼'을 생각나게 한다. 밥알을 건져먹는 내 모습을 보고 싶어하는, 개에게 던져준 흙 묻은 빵을 허겁지겁 씹는, 나를 때리는 자에게 매달려 더 때려달라고, 아예 패 죽여달라고 매달리는 미친놈 같은, 이것은 노예 시대와 인종 분리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니거의 이야기다. 

  인종 차별은 철폐되었는가? 미국의 수정 헌법 13조는 인종 차별을 철폐시켰는가? 폴 비티의 이 소설은 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대해 단도직입적으로 아니라고 대답한다. 미국의 수정 헌법 13조는 다음과 같다.
 
제1항 : 어떠한 노예 제도나 강제 노역도, 해당자가 정식으로 기소되어 판결로서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미합중국과 그 사법권이 관할하는 영역 내에서 존재할 수 없다.
제2항 : 의회는 적절한 입법을 통하여 본조(本條)를 강제할 권한을 가진다.

  수정 헌법 13조가 노예 제도를 철폐한 법안이라는 것은 맞다. 그러나, 어디에도 백인과 흑인이 동등하다는 말은 없으며, 인종 차별을 미국에서 영원히 추방한다는 말 또한 없다. 수정 헌법 13조 1항은 '확정된 형벌이 아닌 이상'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없음을 명시하고 있으나, 이 조항은 뒤집었을 때 '확정된 형벌에 의해서는' 강제 노역을 시킬 수 있음을 명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미합중국이 정한 다른 법률에 의거해 (백인) 경찰의 명령을 거스르는 (유색인) 잠재적 범죄자는 언제든 징역살이와 현장사살이라는 대가를 치를 각오를 해야 함도, 우리는 알고 있다. 

  백인, 흑인, 멕시칸, 아시안, 그리고 온갖 혼혈과 혼혈이 뒤섞인 이 다인종 국가에서, 백인은 흑인을 멸시하고 흑인은 멕시칸을 혐오하며 이들 모두는 아시안을 우습게 본다. 인종 통합과 차별 철폐라는 기만의 덮개 아래 인종 간의 갈등과 분노는 언제나 들끓고 있고 증오와 차별은 엄존한다. 소설은, 엄연히 그게 거기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거기 없다고 말하는 것, 엄연히 다른 대우를 받고 있는데 우리는 다 똑같다고 말하는 것, 똑같기 때문에 똑같은 선에서 출발하여 동등하게 경쟁해 과실을 따먹어야 하는 거라고 말하는 미국식 인종 통합의 기만성을 통렬하게  비웃는다. 
   

  이러니 인종의 통합이라는 것은, 니거가 세상에서 훔쳐낸 행복 같은 것. 백인에 의해 끌려와 백인에 의해 지배받다가 백인의 손에 해방되어 백인과 같은 대우를 받고 산다고 하지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백인의 밑깔개로, 미국의 하층민으로, 저임금과 저학력의 굴레 속에 그것들을 대물림하면서 살아가면서도 우리는 백인과 동등한 미국 시민이라고 착각하며 멕시칸과 아시안을 멸시하며 자위하는 것. 그것은 비참의 가상 임신 아니었던가. 그래서 오랜 세월 야유받는 흑인 꼬마 역을 연기해온 원로 배우 호미니는 미(Me)에게 노예 생활을 자처하는 것이다. 백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비참한 흑인 역할을 재연하는 것이다. 그에게 짓밟히고 조롱당하는 흑인의 역할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 그는 오랜 세월 그것을 연기해왔고 그것은 사실 논픽션이었기에. 독자는 호미니와, 경찰에게 사살당한 미(Me)의 아버지 니거 위스퍼러를 통해, 현실을 부정하려고 발악했지만 결국 자기 머리에 총구를 겨누고야 마는 포이 체셔를 통해, 니거로 태어난 이상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 페인트를 뒤집어 쓰는 삶을 산다고 해도 니거는 니거일 수밖에 없으며 엄연히 존재하는 차별적 현실에서 눈을 돌리려고 해봤자 비참해지기만 할 뿐(포이 체셔) 차라리 그 앞에 정면으로 옷을 벗고 패 죽여보라고 덤비는 것(호미니)만도 못함을 인정하게 된다. 비참하고 싶은 비참보다 더 정교한 복수의 기술은 없다는 것.

  그러나 이 소설이 마냥 무겁고 독설적이지만은 않은 건, 주인공 미(Me)의 건강하고 명랑한 언행들 때문이리라. 그리고 그의 매력적인 여자친구 마페사의 능동성도 소설에 탄력을 더해준다. 미와 마페사와 러브라인은 단순한 로맨스가 아니라, 미의 모든 행동의 핵심 동인이며, 소설의 담론을 이끄는 견인차가 된다. 특히 마페사의 버스에서 이루어지는 호미니의 생일파티는 소설에서 묘사된 흑인 사회의 명랑발칙한 카니발성을 활짝 펼쳐 보여준다. 로자 파크스의 현대판이라 할 수 있는 마페사는 핍박받는 흑인 여성 캐릭터의 상투성을 벗어나, 진취적이고 활력 넘치는 여걸의 면모를 유감없이 선보여 독자를 기분 좋게 한다. 마페사 외에도 미(Me)를 조력해주는 많은 사람들의 쾌활하고 적극적인 모습은 이 소설을 결코 냉소와 분노 안에 축 처져 있지 않게 한다. 농부라는 미의 직업 또한 흑인들과의 건강한 유대성을 강화해주는 좋은 소재이기도 하다. 일본산 귤과 같은 외래종을 재배하고, 그것을 아낌 없이 지역 사회인들과 공유하며 자연스럽게 공동체적 연대를 이루어나가는 미의 모습은 흡사 '호밀밭의 파수꾼' 같다. 아버지 니거 위스퍼러는 한 명의 똑똑한 이론가를 양성하여 흑인 사회를 발전시키는데는 실패했다. 그러나 아들 미는 자신의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어린 아이들의 수호자가 되었고, 갱스터들의 화합을 이끌었으며, 유색인의 카니발을 성사시켰고, 미 연방 대법원에서 '편견 없는 태도를 가지고 있다는 미국인들이 평등을 바라보는 시각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지적'1)하게끔 만들었다. 비참을 허용하지 않는 사회에서 기어코 복수하는 그 방법이 그렇게 흐뭇할 수가 없었다.



_

1) p.3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