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의 식탁 오늘의 젊은 작가 19
구병모 지음 / 민음사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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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구조의 모순과 불합리에 대한 고발은 그 밑바닥에, 그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에 대한 애정과 연민이 있어야 한다. 그 애정과 연민에 기반한 분노와 항거가 문학적 진술 내지는 고발로 이어지는 것인데, 이 책은 그러하지 못하다. 꿈미래실험공동주택이라는 저출산 대책이라는 소재는 신선했으나 그 제도의 폭력성을 '비판' '비난'도 아닌 '비아냥' 수준으로 건드리는 것에 그쳤으며, 무엇보다도 그 폭력적 제도에 억압당하고 마침내 항거하는 인간의 모습을 제대로 형상화하지도 못하였다. 오늘의 젊은 작가 시리즈의 한결같은 한계로, 사회 구조적 모순을 비판하는 듯 하다가 결국엔 그 사회에 맞서지 않고 도망쳐버리는 주인공을 그리는데 그쳐, 인식의 주체와 저항의 주체로서의 '시민'을 그려내지 못하고 사회의 폭력에 무릎꿇는 나약한 '개인', 혹은 그 폭력적 현실에서 도망쳐버리는 회피적 '개인' 만을 제시하고 끝나버리는 것이다. ('한국이 싫어서', '82년생 김지영', '네 이웃의 식탁'

더군다나 이 소설이 불쾌한 것은, 나약하고 회피하는 개인을 그나마 연민어린 시선 또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시선조차 보이지 않는다는 데 있다. 작가가 인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혐오'에 가까웠고 그것은 몇몇 캐릭터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아이를 키우며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 전체에 대한 싸늘한 비웃음에 가까워 보였다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과 인간 혐오가 같이 터져나오는 소설이라는 것은 사실 변혁의 주체로서의 인간을 신뢰하지도 않고 따라서 우리 사회의 잘못이 시정되지도 개선되지도 않을 것이라는 허무주의적 체념과 비아냥의 표현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신뢰와 애정이 없으면서 어떻게 인간을 위한 변화를 꿈꿀 수 있겠는가비판적인 시선과 메타적 우월감에 찬 비아냥의 시선을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은 흔하고, 결국 아무 것도 안될 거야 니들은 그거 밖에 안되니까 하는 오만한 경멸감은 결국 그가 얼핏 비판하는 것 같은 구조적 폭력의 일부이며, 폭력을 재생산하는 기득권의 도구일 뿐이다. 여성-특히 기혼 여성에게 가해지는 사회의 폭력을 비판하는 것처럼 쓰고 있지만 결혼해서 애를 낳은 여자란 결국 무심하고 무감각하고 뻔뻔해질 수밖에 없으며 자기 아이 일에 대해서만 히스테리컬해지는 '동물적' 존재일 수밖에 없다고 반복해 진술함으로써 이 소설은 그 어떤 소설보다 앞장서서 여성 혐오, '맘충' 혐오에 일조하며, 인간끼리의 연대와 상호 부조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죽거리면서 인간을 고립된 개인의 지옥으로 밀어넣고 사회의 확산되는 폭력과 모순을 방조한다. 쿨한 척 하는 허무주의, 비판을 가장한 혐오. 오늘도 민음사의 젊은 작가들은 내게 모욕감을 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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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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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탈리아 마을을 배경으로 한 아름다운, 그러나 처절하게 비극적인 귀향기. 고향이 그리워 돌아왔지만 예전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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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다비드 그로스만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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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탠드업 코미디언을 다룬 책이라면 프랑스 작가 미셸 우엘벡의 '어느 섬의 가능성'과 한국 작가 김중혁의 '나는 농담이다' 가 떠오른다. 이스라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의 2017년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 수상작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는 위의 리스트에 새로이 추가된 한 권이다. 하지만 이 소설은 우엘벡의 것처럼 인간의 유한성에 절망하며 신인류의 등장을 예언하지 않고, 김중혁의 것처럼 지상과 우주 공간을 오가는 사랑과 우애의 이야기도 아니다. 세 소설의 공통점이라면, 코미디언의 이야기지만, 전혀 웃기지 않다는 것 하나다.

 오히려 그로스만의 이 소설과 가장 유사하게 떠오르는 책은 사무엘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The unnamable)'이다. 이름도 없고, 팔다리도 없고, 머리와 몸통만 남은 채로 항아리 안에 들어가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항아리-인간의 독백으로만 이루어진 베케트의 이 소설은, 사실 소설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전위적 언어 실험이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글-언어로 쓰여졌음에도 말-언어에 가깝고, 활자화된 기호임에도 불구하고 어떤 명확한 의미도 담고 있지 않은, 폭발된-파편으로서의-산산조각난 언어들의 난장이며, 어떠한 장르적 구분도 거부하고 글자 그대로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로 머물러 있다. 바로 이 점에서 그로스만의 '말 한 마리가 술집에 들어왔다 (이하 '말 한 마리')'와 베케트의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는 유사하다.1) 이 두 소설은 끊임없이 독자-관객에게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독자-관객에게 '도착'하기를 끊임없이 늦추고 회피하며 쉴새없이 기표만을 쏟아낼 뿐 기의를 완성하지 못한다. 스탠딩 코미디언 도발레 G는 관객에게 개그를 주겠다고 하지만 주지 않고, 그의 발화는 결코 수행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그의 '발화'는 '소통'이 아니고 심지어 '언술'조차 아니며 그저 '투척'되는 언어의 실험물일 뿐이다. 결코 완성되지 않을 뿐 아니라 완성됨을 끊임없이 지연시킴으로써 완성됨을 스스로 거부하는 듯한, 언어의 파괴적 실험이자 인간성의 파괴된 형상이다.

  데리다는 언어는 언제나 지연, 의미의 연기, 애매성, 발화자와의 거리, 혼동 가능성, 기만과 믿을 수 없음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언어의 필수 요소라고 간주하였다. 언어는 언제나 '제자리'에서 벗어나 있다. 도발레 G의 '말'은 결핍되고, 지연되며, 혼란에 빠지고, 방해받으며 관객의 기대를 저버리고 끊임없이 안과 밖을 떠돈다. 그의 말은 힘없는 종이비행기처럼 관객에게 도달하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진다. 이 소설은 코미디-개그라는 완결된 이야기, 화자가 말하고 청자가 수용하며 작가가 쓰고 독자가 수용하는 소통의 완결성에 대한 회의로 점철되어 있다. 의미는 끊임없이 '달라지고' 의미의 도래는 '지연된다'. 이 직접적이고 작은 바(bar)의 공동체 안에서 관객들은 이해와 통합과 함께하는 웃음의 시간을 열망하지만 그 바람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 도발레 G의 실패한 코미디를 읽으며, 독자는 의사소통이란 언제나 오해와 실패의 가능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상기해야 하고, 나아가 이 오해와 실패야말로 의사 소통의 핵심일 수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내가 말하고 너는 알아 듣는다는 것. 우리가 함께 이해하고 함께 웃고 운다는 것. 이런 '상호 이해'란 애초부터 불가능한 환상이다. 완전한 소통, 완전한 관계, 완전한 합일이라는 환상은 이 소설 안에서 부서진다. 

  공동의 경험과 이해를 공유하고 있다면 (요컨대 홀로코스트 체험을 공유하고 있는 유대인들처럼), 그들 안에서는 이상적 관계와 이상적 의사 소통에 기반한 이상적 공동체가 자동적으로 성립될까? 순수하고 완전한 이야기에 대한 회의는 유대 민족의 선택받음에 대한, 우월성과 위대함에 대한, 신에게서 받은 약속에 대한 회의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발레 G의 말은 분명히 '말'이지만 그로스만은 그 말을 잡아채 '글' 로 만들어놓는다. 그리하여 독자는 관객에게서 분리되어, 무대 위에서 이루어지는 도발레 G의 증언, 그의 '말', 유대인의 약속에 대한 '말'에 대해 신뢰하지 못하게 된다. 작가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의 (일부러, 의도적으로) 실패된 말-코미디를 '글'로 적어 내놓음으로써, 눈앞에 현존하는 것 같았던 소통이 결국은 어긋나고 있을 뿐임을 입증하고, 유대인 공동체와 그들의 선택받음에 대한 부정(不定)성을 에둘러 전달한다. '파이드로스'에서 '말'이 더 생생하고 육체적인 현존이라고 했던 플라톤의 제언은 깨어진다. 끝없이 흔들리는 말들,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말들의 나열 속에, 개인의 기억이 갖는 정확성과 그 진술의 확고부동성은 의심되며, 디아스포라와 홀로코스트의 역사로 절대화되었던 유대인들의 순수성과 오리지널리티도 도미노처럼 무너진다. 

  종이비행기와 같은 말들-수신되지 못하는 메시지. 수신되기를 처음부터 거부하고 마구 접어 날리는 듯한 메시지들. 디아스포라가 환대로 완결되지 못하고, 홀로코스트가 평화로 완결되지 못하며, 죽음은 애도로써 완결되지 못하고 개그로 뒤덮이거나 토악질로 뱉어지거나 (장례식에서) 뛰쳐나가는 것으로 회피된다. 아퀴가 지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이 불완전함을 목도한 관객은 테이블을 떠난다. 남은 것은 오직  두 명의 불구들 뿐이다. 직장과 아내를 모두 잃은 관계불구자 '나'와 신체적 불구를 가진 '피츠'. 이들은  도발레 G의 잃어버린 아버지-어머니의 역할을 대리하고, 그들의 수직적 위계를 넘어서서 수평적 연대를 수행하기 위해 이 바에 남아 있다. 어머니의 돌연한 죽음으로 도발레의 부모는, 그의 내면에서 부서진 채 떠도는 망령들-'햄릿'의 선왕처럼 밤마다 찾아와 젊은 왕자를 괴롭혔던 망령들이 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제대로 애도하지 못했고 따라서 평화를 얻지도 못했다. 그러나 도발레는 물구나무 서기로 어머니를 지켰고 슬픔에서 자기를 구원하려 했던 사내였다. 그는 광대짓으로 스스로를 구원했다. 이 날의 공연-중언부언하기, 어리석음을 연기하기, 앞뒤 맞지 않는 헛소리들을 늘어놓는 작업들로 그는 마침내 부모-망령을 대신할 자를 얻는다. 잃었던 친구를 찾고, 어린 시절의 소녀와 키스하며, 부서진 언어의 조각들로, 거대한 실패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이상적 공동체의 자동적 성립과 완전성에 대한 회의가 이 소설의 토대라면, 그에 대한 대안은 결국 전직 법관인 '나'와 난쟁이 소녀 '피츠'의 불구성일 것이다. 회복 불가능의 불구성을 안고 있는 이 두 인물이 생물학적 부모를 뛰어넘어 도발레 G의 새로운 연대자가 된다면, 이들이 서로의 불구됨을 인정하며 오해로서의 소통으로 불완전성의 공동체를 이룬다면, 이상적 공동체의 완전무결함에 대한 환상을 걷고 이스라엘와 팔레스타인이 '불가능한 연대'를 이루는 일도 가능할지 모른다. 명백하게 개별적인 민족, 따로이 존재하며 저마다의 역사를 갖고 있는 확고부동한 공동체의 절대성을 지키려 할 때, 이 과업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다. 서로가 서로를 타자화 하며 '나의 원수를 죽여달라'는 복수의 망령만이 이 땅 위를 떠돌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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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말 한 마리'에서 '이름 붙일 수 없는 자'를 연상하게 되는 것은, 소설 속의 코미디언 도발레 G가 공연을 펼치는 무대 위의 '뒤쪽 벽 앞에 놓인 크도 둥그스름한 구리 단지...전에 여기서 상연한 무슨 연극에 쓰던 소품일 것' 같은 단지에서 더욱 구체화된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의 항아리-인간 독백은 연극으로도 상연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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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 블렌드 봄 - 100g, 핸드드립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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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맛이 많이 나는 상큼한 커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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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김승욱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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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맨부커상 수상작은 꼼꼼히 챙겨본다. 요새 맨부커상은 세계사와 세계지리를 독자에게 일깨워 (가르쳐 아님) 주는 것을 주목적 중 하나로 두고 있는 것 같다. 1860년대 뉴질랜드를 배경으로 한, 2013년 수상작 '루미너리스'가 그랬고, 1970년대 자메이카를 배경으로 한, 2015년 수상작 '일곱 건의 살인에 대한 간략한 역사' 가 그러했다. 1940년대 오스트레일리아와 타이를 배경으로 하는, 2014년 수상작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 또한 맨부커상의 요즘 의도에 충실한 선정작이다. 아주 많은 공부가 되었어요. 여러분, 오세아니아 대륙이 정확히 어딘지 알고 계셨나요? 오세아니아가 오스트랄라시아, 미크로네시아, 폴리네시아, 멜라네시아 를 통칭하는 이름인 거 아셨나요? 인도네시아는 지형학적으로 봤을 때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오세아니아에 속한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제가 이래서 맨부커상 좋아합니다. 작품의 수준과 상관없이 일단 독자를 공부시키는 거, 더 지적으로 만들어주는 거, 독자에게 더 넓은 세계, 더 깊은 시간을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좋아합니다. 작품의 내적 수준과 관계없이 의미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외과의사이자 전쟁영웅 도리고 에번스의 태평양전쟁 참전기(라기 보다는 포로수용기)를 중심으로 그 전후의 삶, 그의 주변인들의 삶을 밀도 높게 그리고 있는 소설이다. 이 소설의 주제를 한줄 요약하면 '정신승리 따윈 개나 줘버려' 인데, 더 숭고한 것, 더 고귀한 것, 더 정신적인 것, 더 아름다운 것만을 생각하면서 현실을 시궁창, 아니 시궁창도 아니고 그냥 헬지옥으로 만들어버리는 인물 군상들을 다채롭게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병사들이 식량과 약품이 없어 죽어가고 있는데도 '영국인의 품격'을 지켜 콰이강이 보이는 아름다운 위치에 묘지를 팔 것을 지시하는 렉스로스 대령 (그는 이질에 걸려 죽은 후 정글에 파묻혔다), 사람을 구타해 죽이면서 바쇼의 하이쿠- 고통 속에 벚꽃이 핀다는 고결한 하이쿠를 읊는 나카무라 소령 (그는 전범 재판을 피해 잘 살아남았다), 포로들의 목을 베면서 일본의 무사도 정신을 생각하는 고타 대령 (그 역시 전범 재판을 피해 오래 오래 살았다), 그리고 테니슨의 시를 외우며 인간 실존의 바닥을 어떻게든 지나가보려고 악쓰는 도리고 에번스 또한 그런 인물이다. 소설을 읽고 나면 이 책의 제언인 파울 첼란의 '어머니, 그들은 시를 써요' 가 결코 아름다운 시적 세계에 대한 예찬이 아니라는 것, 매우 역설적인 제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이들과 가장 반대편에 서 있는 빛나는 인물은, 역시 다키 가디너-조직꾼, 도둑놈, 진정한 전우, 하나뿐인 오리알을 짝패와 나눠먹을 수 있는 검은 왕자인데, 다키 역시 '그냥 누워서 똥 지릴 줄 모르는 놈', '고귀한 품격'을 유지하려고 애를 쓰는 놈이었기 때문에 죽었다. 품위 같은 건 개나 줘버려야 된다니까. 다키 가디너는 누워서 똥을 지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변소로 기어가 똥을 누려 하다가 똥구덩이에 빠져 죽었다. 

  다키 가디너는 소설의 말미에 도리고 에번스의 숨은 조카인 것으로 밝혀진다. 도리고의 형인 톰과 맥과이어 부인의 불륜은, 도리고와 그의 고모부의 후처 에이미와의 불륜으로 겹쳐지고, 톰-맥과이어 부인 사이의 자식인 다키는 도리고-에이미 커플의 자식으로 상이 겹쳐진다. 즉 다키는 이 소설에서 도리고의 아들 역할이다. 잭 레인보우를 수술로 살리기 위해 다키의 구타 현장에 너무 늦게 달려갔던 도리고는 결국 다키의 죽음을 무력하게 지켜보며 '세상이 진동'- 즉 인간성이 붕괴하는 것을 느껴야 했다. 이로 인해 도리고는 소설 내내 괴로워하지만, 소설의 마지막에 거대한 산불 속에서 사랑하지 않았던 아내와 아이들을 구해내며 자신의 '외과의사 손'을 희생하는 것으로 다키의 죽음에 값한다. 그러나, 한 사람의 죽음을 몇 사람의 목숨 구하기로 갚으면, 그게 수학 공식처럼 그렇게 인생의 값을 딱딱 올려주는가? 빼기 1에 더하기 4면 인생은 더하기 3의 것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도리고 에번스가 77세까지 살면서 느꼈던 허무는 더하기 300으로도 채워질 수 없었다.

  역시 재미있는 인물은 포로수용소의 부사관 고아나-조선인 최상민이다. 그는 고타와 나카무라 같은 행운을 얻지 못하고, B급 전범으로 체포되어 싱가포르의 창이감옥에서 처형되었다. 그는 50엔을 벌기 위해 포로수용소 감시원을 자원한 인물이었다. 포로수용소 조선인 감시원들의 이야기는 우리도 인터넷에서 어렵지 않게 검색할 수 있으며, 작가는 아마도 '전범이 된 조선청년' 이라는 책까지 낸 이학래의 증언을 많이 참조한 것이 아닐까 한다. 이학래의 책은 읽어보지 않았지만 이 소설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최상민은 친일파이며, 범죄자다. 그는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죽이도록 도왔고, 죽이게끔 방관했으며 이 모두를 끝까지 반성하지 않고 '그땐 어쩔 수 없었다'는 논리로 스스로를 변호하며 '다른 사람들은 잘만 빠져갔는데' 억울해 하다 뉘우침 없이 죽었다. '몰랐다'는 것은 변명의 근거가 되지 않는다, 타이의 아이히만이여. 육신이 행한 일을 부정하는 자기합리화, 진정한 정신승리, 비열한 자기변호의 인물. 이는 우리 주변에 가장 흔하게 존재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소설을 읽고 최상민이 조선인이라는 이유로 그를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드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의 윤리 의식을 다시 점검해보기 바란다. 제네바 규약을 몰랐다고 해도 남을 때려죽인 일이 합리화될 수는 없다. 일본인들이 시켜서 그랬다는 말이 친일 행위의 면죄부가 될 수도 없다. 최상민이 설령 살아서 만 명의 사람을 살리는 의사 선생이 되었다고 해도, 그가 타이의 밀림에서 포로들에게 가혹행위를 했다는 죄는 사라지지 않는다. 빼기 100에 더하기 10000을 한다고 총계 9900이 되는 게 아닌 것이다.

  시간의 순서를 뒤죽박죽 섞어놓고, 앞에서 무심한 듯 툭 던져놓았던 떡밥을 뒤에 가서 거대하게 회수하는 기술이, 세련되었고 읽는 재미를 주지만(왜 이 재미를 뒤로 갈수록 포기했을까), 이 계열에서 이 수법으로 거대한 산맥을 이룬 커트 보네거트의 '제5도살장'에 비하면 수준이 낮다. 인간의 끝없는 자기합리화와 자기변명, 어리석을 정도로 거짓된 논리를 만들어 그 안에 자신을 가두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는 기만성에 대한 고발은, 매우 흥미로운 주제이긴 하지만 이 주제로 거대한 산맥을 이룬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 있는 나날'에 비하면 역시 수준이 낮다. 커트 보네거트와 가즈오 이시구로의 냄새를 맡을 수 있지만 그만은 못하다는 점, 500여 페이지 동안 이야기의 수준이 일관되었다기 보다 들쭉날쭉하다는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작가 아버님의 전쟁 체험 때문인지 일본인을 너무 일방적으로 미워하며 오스트레일리아 만만세 외치는 국수주의의 냄새가 나서 점수 하락하였다. 어째 백인들은 이렇게 자기들 당한 거에는 부들부들하면서 자신들이 죽인 몇백만 명의 흑인&황인들의 이야기를 하는 데에는 무심할까. 홀로코스트에 분노하며 절규하지만 자신들이 죽인 제3세계(이 단어 설정부터 이미 자기들은 1,2세계)인들에 대해 이야기하지는 않는 것이 서구의 백인들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정일의 칼럼을 참고하시라. 장정일 '서구 문학의 홀로코스트 집착', 한국일보  http://www.hankookilbo.com/v/6916e732338f401a98870aea6b8cdccc자신들을 세상의 중심으로 설정하는 것, 이것이 바로 어쩔 수 없는 백인 남성 작가들의 한계다. 하지만 이런 저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역으로 바로 그 점에서 '다른 책도 이럴까?' 싶고, 향후 발전의 가능성이 있다 싶고, 그래서 몇 작품 더 읽어보고 싶어지는 작가다. '굴드의 물고기 책'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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