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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믿을 것인가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2월
평점 :
품절
<장미의 이름>과 <세상의 바보들에게 웃으며 화내는 방법>, <바우돌리노> 이후 기력이 쇠잔해서 한동안 에코를 손에서 놓고 있었다. 백과사전식 저술의 대가이자 읽는 사람에게도 백과사전식을 요구하는 움베르토 에코씨의 마수에 걸리면, 기력이 보통책을 읽을 때보다 훨씬 많이 소모되기 때문이다. 최근 그럭저럭 다시 에코를 읽을만큼 원기회복이 되었는지 그의 책들이 무척 읽고 싶어졌다. 그래도 <푸코의 진자>같이 무시무시하게 얽히고 설킨 장편을 읽을 용기는 부족했기에, 비교적 얄팍한 소책자를 집어들었다.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 추기경과 에코가 주고받은 편지를 묶은 책, 바로 <무엇을 믿을 것인가>였다.
잡지사가 기획한 비신앙인과 신앙인 간의 대화에 당첨된 움베르토 에코와 마르티니 추기경. 두 사람은 자의로서가 아닌, 잡지사에 의해 별안간 하늘에서 떨어진 대화상대를 덜컥 떠맡게 된 게다. 이런 두 사람이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진행해 나가기를 기대하기란, 확실히 무리다. 4번의 대화(서신 교환)를 찬찬히 살펴보고 내가 결린 결론은, '이 두 사람 어지간히 안 맞는군' 이었다. 예리하고 날카롭고 핵심을 파고드는 에코의 방식과 성직자 특유의 느릿함과 여유로 요리조리 에두르며 두리뭉실한 답을 내놓는 마르티니의 방식. 서로가 그런 차이에 흥미를 느낀다면 외려 좋을 수도 있었겠지만, 내가 느끼기로는 둘 다 서로의 방식을 싫어하고 있었다. 점잖고 현학적인 말투 속에 감춰져 있긴 하지만 은근하게 배어나오는 그 행간 사이의 짜증이라니, 정말이지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4번의 서신교환중 3번을 에코가 포문을 연다. 대화주제를 선정하고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마르티니 추기경이 이에 대꾸한다. 그런데 말이다, 첫 번째 서신교환에서부터 이 사람들 삐그덕거리기 시작한다. 에코는 '친애하는 카를로 마리아 마르티니'라는 말로 서두를 열고 있다. '추기경'이라는 존칭을 붙이지 않은 것은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이 시대의 지식인으로서의 당신과 대화하기 위해서라고 하면서 말이다. 답장에서 마르티니는 그 말에 흔쾌히 동의를 표하고 있지만, 기실은 자신의 신분적 입장 '추기경'의 위치를 어찌나 표내고 있던지! 게다가 에코의 물음-종말론의 비판적 가치에 대한-에 대해서도 말은 많지만 확연한 답은 하지 앟는다.
아아, 이에 대해 짜증이 난 우리의 에코씨, 두 번째 편지에서 통렬히 이 점을 꼬집고 싶었음인지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 대해 초반부터 아주 강조를 한다. 답장하는 마르티니 추기경, 자신이 멍청해서 못 알아들은 게 아님을 주장하고 싶은지 역시나 초반에 에코가 묻고자 하는 핵심이 무언지 일일이 재확인한다. 그러나 재밌는 건 에코의 물음의 의도를 그렇게나 잘 알면서 역시 첫 번째 편지에서처럼 답을 두리뭉실 흐리는 것이다. 세 번째 편지를 볼작시면 에코씨는 이제 아주 많이 짜증이 난 상태다. 왜 자신이 먼저 편지를 시작해야 되냐며 '먼저 화두를 여는 곤혹스러움'에 대해 토로하고 있지만, 그 속내는 실상 이런 게 아닐까. '대답은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는 본때를 보여주고 싶은데, 질문만 하는 입장이라 그게 안 돼 답답하다!라는. 마르티니 추기경도 이 짜증을 감지했음인가, 정말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자기가 미리 질문을 준비하고 있었노라며 다음 번 편지에서 그 질문으로 먼저 편지하겠다고 말한다.
사실 이 책, <무엇을 믿을 것인가>에서 알맹이는 두 사람이 나눈 대화주제인 '종말론의 비판적 가치/낙태찬반론/남녀평등' 인지 모른다. 물론 두 사람 각각의 그에 대한 견해를 접하는 것도 흥미로웠다. 그러나 내 취향이 오묘함인가, 표면적으로 명백히 드러나는 그것들보다 물 밑의 신경전이 훨씬 더 흥미로운 것을 어쩌랴. 지극히 점잖은 두 분이 지극히 점잖게 신경전을 벌인다, 그리고 약간 비틀린 시각을 가진 독자가 알아채고 재밌어한다. 독자는 이리저리 말을 돌리는 마르티니 추기경보다 직선적으로 말해버리는 에코씨의 편에 서 있다. 책을 덮고나선 두 사람의 대화주제보다 신경전 쪽을 뇌리에 푹 새겨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