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부제로, 두 여성 작가가 나눈 7년의 우정이야기라 쓰여있다.


우정이라는 말로 충분한가. 특히 이 책을 소개하기에 말이다. 얕고 상투적인 표현 같은데 대체할 만한 단어가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사랑과 우정은 어떻게, 왜, 구분지어지기 시작했을까? 우정은 왜 우정하다,라고 쓸 수 없을까. 그런 걸 어렸을 때 궁금해했었다. 끔찍이 사랑하는 친구를 곁에 두고 속으로 따져보는 것이다.(음침쓰..) "너에 대한 나의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해?"에서 시작되는 질문들. 우리는 시스헤녀(그 땐 이 말도 몰랐지만)일 테고 그 사실만으로 이건 우정으로 ‘판명‘되나. 가장 친한 남자친구랑 연애를 시작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너와 나누던 우정은 사랑으로 승격한 건지, 이제부터 우리는 다른 관계니.(오늘부터 1일!)  우정을 나누다와 사랑을 나눈다는 말은 왜 다르게 들려. 친구로부터 애인까지, 그럼 애인 이후엔? 우스웠다. 동성친구도 그렇게 지독히 좋아하고 다시 볼 수 없을 지경으로 헤어지는데(나만 그렇다고 하더라), 어쨌든 사랑은 뭔가 다른 거라는, 특히 우정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암시들이 세상에 가득했다. 이성애적 섹슈얼리티 유무만으로 구분되는 걸까. 나만 혼란스러운 게 아닐 것 같은데 다들 그런 범주로 충분한지, 어린 나는 누굴 붙잡고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떤 라벨을 붙여야 옳은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우정은 지금도 내게 아주 중요하다. 우리 같이 살자,고 나를 위해 울어주는 친구가 없었다면, 미움과 두려움과 죽음을 얘기하는 소수의 친구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지금과 한참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다면>의 5장에서는 여자들의 우정이 폄하되어온 역사를 다루는데, 이 부분을 처음 읽었을 때 앞서 적은 어렸을 때의 내 혼란스러움이 걷히는 기분이었다. 책도 절판이겠다. 옛날에 옮겨둔 걸 통째로 갖다 붙여야지..



그런 재능 있는 여자아이들의 미래는 - 여기서 ‘재능 있는’이란 단어는 단순히 재주가 있다는 뜻만이 아니라 전혀 실현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커다란 욕망 내지 가능성에 대한 의식을 의미한다 - 같은 욕망을 지닌 여자친구가 부족하기 때문에 이중으로 불안하다.

… 우리는 이제야 나타나기 시작한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공적 영역에서 활동한 과거의 이 여성들이 다른 여성을 사랑한 일이 흔했고, 바로 그런 사랑을 통해서, 지금껏 남성들이 남성끼리의 우정에서가 아닌 여자와의 우정이나 지지로부터 얻었던 것과 똑같은 것을 얻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여성의 우정은 거의 기록된 적이 없다. 여성은 인생의 위기, 특히 결혼이나 출산, 죽음, 질병, 소외감같이 여성에게 가장 중심적인 문제인 가족관계의 위기 속에서 서로를 돕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바로 10년 전까지도, 문명의 기록자들은 여성들이 서로 사랑하면서 함께 일하고 살아왔음을 외면했다. …만약에 우정의 연대표(연대표로서는 좀 짧은 목록이 되겠지만)를 조사한다면, 거기에는 -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에피쿠로스, 플루타르코스, 에라스무스, 몽테뉴 존슨, 루소, 에머슨, 소로 등등 - 남성들의 우정으로 가득 찰 것이다. 정말 드물기는 하지만 혹시 여성의 우정이 언급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남성들 공동체에 한 여성을 상징적으로 마지못해 넣어주는 식으로 끼워주는 것이다.

누군가 ‘호메로스 시대로부터’ 환영받아 온 남성의 그 모든 우정관계를 특징짓는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그들의 우정은 공적인 영역으로의 반향을 지닌다는 것이다. 남성의 우정이 전적으로, 아니 근본적인 면에서조차 사적인 성격을 갖는 경우는 없다. 그들의 우정은 권력의 영역에서 공명한다. 아무리 강렬한 우정이라 해도 남성의 우정은 사건이 일어나는 세상에 영향을 미친다.

노인의 우정 속에 반드시 죽음의 가능성이 포함되어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으며, 진정한 우정 속에 육체적 사랑의 가능성이 포함되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런 표시들을 통해 우리는 자신이 인간임을 알아간다.

상황이 이랬으므로 남성들은 진정한 우정이란 어떤 면에서 이상적인 결혼과 닮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 어떤 우정이나 결혼도 이상적 단계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사실 우정은 남성에게는 전쟁터의 동지와 너무도 닮아 있고, 여성에게는 수동적인 위안과 같았다. 결혼 역시 지나치게 낭만 쪽이 강조되어 우정의 요소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출판되기까지의 고도니 과정이나 처음의 원고 거절 사태 및 뒤이은 연속적 혹평들을 거치면서 홀트비와 브리튼은 서로에게 지지가 되어 주었다. 오로지 구애 중인 남녀의 애정에만 동조하는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 두 사람이 주고받은 편지는 연애편지처럼 보일 것이다. …

그러나 이처럼 서로를 북돋워주는 우정을 누리면서도 두 사람은 다른 친구들과도 폭넓은 교제를 가졌다. 사랑은 사랑을 낳는 것이니까 말이다.

홀트비는 이렇게 쓰고 있다.

나는 우리 요구의 진정한 목적이 모든 남성과 여성을 똑같이 재미없는 패턴 속에 밀어넣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들이 지닌 다양성을 밖으로 표출해 내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 자신의 본성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우리는 흔히 ‘여성적 특징’이라 불리는 것이 사실은 얼마나 ‘남성적인’것인지를 모르고 있으며, ‘남성적인 것’이 얼마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인지를 알지 못한다. 우리의 모험은 과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기 일쑤다. 심지어 우리는 가당치 않은 자신감을 가지고 이론을 세우고 찬반논쟁을 하지만, ‘정상적인’ 성관계가 동성애인지 양성애인지 아니면 이성애인지조차 모른다. 우리는 광범위한 일반화에 만족하면서 그저 참을 만한 선에서 서로 다른 사실들을 하나로 뭉뚱그려 맞춘다. 결국 어떤 사람들은, 모든 남성(과 여성)을 선량하고 행복하게 만들기 위한 우리의 조야하고도 조심성 없는 시도에 순응하려다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다. ‘

여성의 우성을 알리는 표시는, 그 친구들이 이성애자인가 동성애자인가, 연인 사이인가에 있지 않다. 그것은 두 사람이 공적 영역 안에서 일에 대한 놀라운 에너지를 공유하는지의 여부에 있다. 일부 숨겨져 있는 이 친구들이야말로 여성 전기 작가들이 반드시 찾아내야 할 사람들이다.















 <먼길로 돌아갈까?>는 <명랑한 은둔자>, <욕구들>로 잘 알려진 작가 캐럴라인 냅과의 우정을 회고하는 역시 작가 게일 캘드웰의 회고록이다. 구판이 있어서 두번째로 읽었다. 같은 번역가의 손길을 입고 재작년에 개정판이 나왔는데 이 재출간을 직접적으로 견인했을 캐럴라인 냅의 책은 아직 읽은 게 없다. 궁금한 마음이 없지는 않지만, 게일 캘드웰의 편안하면서도 예리한 성찰이 담긴 에세이가 좋아 당분간은 여기에 몸 담가야지 싶어 이 분의 책을 몇 권 더 읽을 예정이다. 지금 읽는 다른 책도 그렇고, 젊은 날을 회고하면서 경험과 그 때의 감각을 적절한 분량으로 전달하고 나선, 시간이 흐른 뒤 글을 쓰는 시점의 통찰을 서술하는 에세이 스타일이다 보니 필체는 생생하기보다는 담담한 편이다. 괴로움을 통과해가며 얻은, 세월이 주는 깨우침을 고스란히 반영한 글을 쓴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책을 읽는 것만으로도 지난 과오와 상처를 나도 노련히 다룰 수 있지 않을까, 근자감이 생기는 것. 요즘 특히 내가 그런 안락을 필요로 하기도 하고.


혼자 살면서 글을 쓰는 여성 작가라는 공통점이 있는 게일과 캐럴라인은 여덟 살 차이가 난다. 그보다 더 큰 공통점이자 각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화두라면, 개에 대한 애정과 사랑. 이를 바탕으로 둘은 친구가 된다. 파티에서 술잔을 들고 인사만 나눈 첫만남의 기억을 뒤로 하고 개 산책을 시작하면서 교류하기 시작한 둘은 캐럴라인이 7년 후 암으로 죽을 때까지 매일같이 왕래하며 고락(과 개산책과 운동과 대화..와 통화..와 대화.. 그걸 안 끝낼려고 제목처럼 우리 먼길로 돌아갈래? 시전..)을 함께 하는 친구가 된다. 


첫번째 읽었을 때도 좋았지만 다시 읽으면서도 새삼 둘의 우정에 새로이 감화됐던 건 내 나이가 책에서의 이분들 나이와 전보다 가까워졌기 때문인 거 같다고 갖다 붙여본다. 우정과 교감에서 받은 감동이 컸던 게 지난번 읽기였다면 이번에는 다른 데에도 눈길이 갔다. 작가의 내면 묘사, 캐럴라인을 만나기 전과 후 스스로에 대해 서술한 부분을 꼼꼼히 읽었고 둘의 우정이 어디에선가 갑자기 솟아오른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된다. 상실을 견디느라 중독에 빠졌던 자기자신을 글쓰기를 통해 대면한 캐럴라인, 마찬가지로 중독에서 헤어나온다는 것이 어떤 건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게일이 관계의 토대를 단단하고 세심하게 다져가는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내면을 탐구하고 다른 무엇보다도 나를 구하는 것이 이 우정의 초석 아니었을까.


캐럴라인이 죽고 비탄에 빠진 게일이 헤쳐나가는 기록 역시 책에서 빛나는 부분 중에 하나다.. 라고는 쓰지만 여러번 읽어도 나까지 비통했다. 죽음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라 이야기를 바꿨다(정확히 기억 안남)는 게일의 초연함 때문에 더 그렇게 느껴지는 부분이 있다. 


'카를로가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뉴펀들랜드 애견을 잃고 에밀리 디킨슨은 친구이자 멘토에게 편지를 썼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헤어짐을 견딜 수 없었다는 말은 쓸데없는 사족이다.

왜나하면 실제로 내가 견뎠고 우리가 견디기 때문이다. 237


그 나이에도 체급에 맞춰 체전에 참가할 준비를 하고 그게 아니라도 꾸준히 육체를 단련하는 여성들이라 운동 얘기 부분도 재미가 쏠쏠한데. 고릿적부터 가지고 있던 동네 친구 로망에 더해 ‘내가 이 길에서 뛰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반대로 뛰어가는 친구랑 인사할 수 있으면 인생에 더 바랄 게 없겠지..’ 망상 속에 침흘리며 얼마 전엔 수변을 걷고 있었다. 그러다 책의 첫장(“노의 고요한 흔들림”)에서 언급된 장면이 떠올랐다. 게일은 평생 수영을 했고, 캐럴라인은 수준급으로 로잉을 하는 사람이다. 강에서 둘이 만나 서로를 가르쳐 주는 건 나중에 일상이 되는데, 그 첫날이 실려 있다. 게일이 캐럴라인의 보트 밴두센 호(나중에 알고 보니 초보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는)에 올라타 로잉을 처음 익히기 위해 균형을 잡아보는데 쉽지 않은 것이다. 몸이 굳기 시작하는데. 어차피 게일은 본인말마따나 수달이고, 여차하면 그냥 물에 뛰어들면 되니까 그냥 빠질래! 하는데 캐럴라인이 아니, 날 봐. 코치처럼 냉정하게 지시한다. 안전지대가 아니라 공동의 무대에서 나를 믿어, 했던 순간. 기억에 의지해 다시 적으려니까 뭔 쓰다만 스포츠드라마 한줄평같긴 하지만.. 그래서 이게 이 회고록과 절절한 사우곡의 시작이었다고, 나도 반짝이는 강물 옆에서 어물쩍 그걸 뒤늦게 이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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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18 23: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정엔 남녀노소, 동서고금의 구분이 없을 것 같아요.그냥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이니까.

유수 2023-10-18 23:5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호시우행님! 제가 구구절절한 걸 한 줄로 써주셨어요. 빛나는 것인 줄 알아야겠다, 다짐하는 밤입니다.

호시우행 2023-10-18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편안한 밤되세요^^

은오 2023-10-19 00: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너무 좋아하는 책! 저는 캐럴라인 냅 먼저 읽고 너무 좋아서 캐럴라인 냅이 궁금해져 이 책을 찾아 읽었어요. 근데 자체로 잘 씌어진 에세이라 우정의 상대가 캐럴라인 냅이 아니었어도 너무 좋게 읽었을 듯. 번역도 수려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유수님은 어릴 적부터 그런 생각을 하셨군요?! 역시.... 전 어릴땐 다른거지.. 하면서 그냥 받아들였고.. 의문조차 가져보지 않았지만 지금은 우정이나 사랑이나 다를 것 없다고 생각. ㅋㅋㅋㅋ 상대가 동성이면 그냥 친구고 이성이고 꼴리면 사랑이냐!
동네 친구 로망에 불지피는거 공감하고요.. ㅋㅋㅋㅋ 그때 읽으면서 사랑에서든 우정에서든 서로를 바라보는 것뿐만 아니라 어떤 걸 같이 바라보는 것도 관계에서 중요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둘한테는 개와 로잉이었구요. 아무튼 저 둘의 우정 눈물나게 아름답더라고요..ㅠㅠ

유수 2023-10-19 07:55   좋아요 1 | URL
은오님은 정말 댓글마저 정돈돼있다.. 배우고 싶다니까요 ㅜㅜ

사랑과 우정 구분이 무의미한 것은 은오님 행보로 몸소 보여주고 계십니다. 은오님은 구애도 아름다워요. 말씀대로 관계의 기본이 같아서 그런가 봄..


2023-10-19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10-19 1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