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근선망과 내 안의 나쁜 감정들 - ‘명색이 페미니스트’ 마리 루티의 신랄하고 유쾌한 젠더 정신분석
마리 루티 지음, 정소망 옮김 / 앨피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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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없이 밑줄치는 나를 보고 아이가 물었다. 엄마 지금 줄 긋는 그 책 도서관 책 아니니. (들어 보이고) 아. 엄마 책 맞구나. 아~ 바나나책 그거. 표지를 보니 아이 눈에 익나 보다. 바나나 일러스트와 핑크색. 이 표지 역시 여덟살에게 강력하게 눈도장 찍었구나 ㅋㅋ


마리 루티는 주로 푸코, 라캉, 프로이트, 벌랜트를 가져와 풀어내면서 사회의 행복시나리오와 이데올로기에 조종 당하는 개인의 욕망과 불안을 설명한다.


“신자유주의 문화로 포장되는 소비문화는 만족감을 약속하는 다수의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함으로써 우리가 처한 곤경을 기회로 삼는다. 토드 맥고완이 주장하듯, 소비문화의 대상으로서 우리는 끊임없이 욕망의 실현 직전까지 가지만 절대로 완전히 실현하지는 못한다. 이런 식으로 소비문화는 끝없는 불만족의 고리를 형성하여 새로운 활력을 얻는다. 우리는 절대 그 제품이나 서비스로 완전히 만족할 수 없지만, 소비문화가 제시하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환상 혹은 만족의 가능성은 우리를 노예 상태에 결박하고 부질없는 희망으로 끝없이 회귀하게 한다. 이 회귀의 존재론적 결과는 끊엄없이 미래를 지향하는, 완전히 현재에 사는 것을 막는 기대의 상태(잔혹한 낙관주의 상태)에 살게 되는 것이다.” 64


“긍정의 교리는 나쁜 감정들을 미친 듯이 막아 내는 역할을 한다. (..) 그렇게 좋은 감정을 나타내는 외향적 기표들을 만듦으로써 나쁜 감정을 극복할 수 있다고, 웃으면 결국 행복해질 거라고.92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내면에 뿌리내리며 심은 “외향적 기표”는 내가 생각한 결과값인 것처럼 작동한다. 내면화된 가치가 경험을 구축하고 그를 바탕으로 토대가 만들어진다.  이렇게 개인은 이념의 신병으로 기능한다.  마리 루티는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기대값과 현실이 충돌함으로써 개인이 필연적으로 겪게 되는 갈등, 고민, (미세)트라우마가 결국 "나쁜 감정들"로 뭉뚱그려진다고 지적한다. 




정희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발전주의에 저항한 니어링의 삶도 표어로 둔갑시킨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라는 유명 구절(폴 부르제)에 대해 정희진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생각(계획)하는 대로 사는 삶은 원래의 생활에서 더하는, 더 나은 삶이기에 불가능하다. 그런 삶의 목표는 끝이 없다. 역사는 진보하거나 퇴보하는 것이 아니라 순간이다. 생각하는 대로 사는 삶은 미래를 상정하는 욕망이다. 근본적으로 달성할 수 없기에 현재는 언제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미래를 위한 삶? 투기든 구매든 부동산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게 아닐까. 모두 부동산이 미래를 보장한다고 생각한다. 있는 사람은 있는 사람대로, 없는 사람은 없는 사람대로 부동산에 매달려 현재를 살지 못한다.”33 <새로운 언어를 위해서 쓴다>



종영한 드라마의 복수 서사의 가해자 캐릭터 이름쯤 (광고)메일에서 엠디의 선택과 함께 발랄하게 호명되고, 소비자 호칭은 금쪽이 정도로 가볍게 밈화된다. 내 기억으론 밈은 경계인의 반항기있는 조소를 담은 변방의 느낌이 강했는데 요즘 같아선 트렌드 파악의 지표인 듯하다. 안본 사람들도 ‘눈치껏 캐치’해서 박자맞출 것을 종용하는. 

개인의 상처와 트라우마의 역사, 반성적 사유와 논의를 품어야 할 가치도 ‘콘텐츠’ 속에서 대대적으로 다루어지고 나면 제대로 된 끝맺음을 얻은 양 발전적 논의도 함께 종결되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것도 눙쳐져 상품으로 버무려지는 시대다. 생각한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라는대로 생각한다. 사회운동조차 루티가 “도용될 수 있다“ 말한 것처럼.  


“그렇다고 해서 페미니즘 같은 사회적 운동이 쓸모없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런 사회운동의 신조들마저도 자본 시스템에 도용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구심은 유지해야 한다.”65




그렇다면 마리 루티가 제시하는 저항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는 욕망의 본질을 알고 적절히 우회시켜 욕망의 “윤리적 가능성”을 찾아보자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결여와 트라우마, 나쁜 감정들의 필연성을 받아들이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어떻게? 망각의 힘과 현재를 지속시킬 수 있는, 결여를 대체할 새로운 열정을 이용해서. 불안과 트라우마가 인간을 약화시키기만 할까. 고난을 통해 사람은 영리하게 변모하기도 한다며.

루티의 확신에 찬 어조와 함께 해법도 명쾌하게 들리고 그래, 해볼만한 것 같은 의욕도 솟아오르지만 현실적인 물음표도 남는다. 트라우마에 매몰되지 않는 세계관이 가능할까. 나로선 아직 모르겠다. 다만 루티가 행언(행업)일치의 성실한 저자라는 점은 분명하다.  때로는 유년의 기억이나 악몽과 우울, 트라우마를 내보이고 그런 본인의 이야기가 “분투”하는 힘에 대한 힌트가 되어준다.


“내가 이 장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은, 때로 우리의 불안은 깊고 우리가 기억할 수 없는 형성적 경험으로까지 이어진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회적 불평등과 성과 지향적인 사회에서 마주치는 일상적인 어려움을 더하면, 불안에 관한 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분투하고, 실패하고, 되는 대로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여성의 무한한 쾌락 능력을 상상하는 이성애 남성 같은 잔혹한 낙관주의 속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의 할 일을 하고, 또 하고, 또 한다. 그리고 녹초가 된 채 눕는다. 그리고 다시 어물어물, 그럭저럭 해 나간다.”261


루티가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 어린 시절에 형성된 불안과 그 기억을 좇으며 책을 마무리하는 건 저마다의 결여와 그에 대한 분투가 충분히 의미있으리라는, 읽는 이에게 보내는 조용한 응원일 테다. 좀 다른 얘기지만 읽으면서 번역과 원저자와의 거리가 가깝게 느껴져 묘했는데 적응하고 나니 나쁘지 않았다. 책 말미에서 루티에게서 직접 배웠고 학교 생활에서 그가 본인의 “탈출구”가 되어주었다는 옮긴이의 말에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한 사람의 “나쁜 감정들”을 풀어헤치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따뜻하고 인간적인 차원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집단적 가치관이나 신념과 이상들이 우리 머릿속에 어떻게 들어오는지 직관적으로 이해한다. 삶의 많은 요인들이 생래적이라기보다는 양육을 통해 구성된다는 것을 잘 안다. 그렇다면 이념은 어떻게 우리 몸에 들어오는 걸까? - P106

사회의 집단적 신화가 무서운 건, 그것을 장식하고 있는 여러 ‘사은품들’이 우리가 생각하는 의미 있는 삶과 직결돼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알면서도, 혹시나 하면서도 그 이념의 상자 안에 자발적으로 발을 들이게 된다. - P113

우리가 어떤 곤경에 빠져 있는지 보라. 사회가 집필한 행복 시나리오는 약속한 행복을 우리에게 주지 않지만, 그 행복을 향해 달려온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결혼과 행복이 한 묶음이라는 추정에는 한 치의 의문도 없다. 문제는 결혼이라는 장르를 제대로 소화하지 못한 나의 능력에 있었다. 잔혹한 낙관주의의 가장 순수한 형태가 아닐 수 없다. - P97

욕망의 특정성은 사람만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상업적으로 판매되는 물건들도 이 대상이 될 수 있다. … 이 욕망의 특정성으로 인해 우리는 모든 것을 사용하고 버리라고 권하는 자본주의식 사고방식에 반기를 들 수 있다. … 우리는 과도한 자본주의에 대한 열광을 우회하는 것이다. … 엄마는아직도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쓰던 냄비에다 커피를 끓인다. 비록 결핍에서 생겨난 습관일지라도 정서적으로는 더 풍성하게 느껴진다.

온전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구가 여러 대상과 방식으로 채워진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 P225

나는 나의 긴급성, 지금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지금 마무리가 필요하다는 감각은 내가 체질적으로 과도한 동요 상태를 갖게 만든 내 과거의 잔여물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 P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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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수 2023-04-03 15: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철학쪽.. 쏙 빼고 썼다. 언제 두번째 읽을 때 써봐야지. 오늘 이해가 어려웠던 부분은, 자기반영성 설명에서.
“사색이 자동적으로 착취로 이어지진 않는다. 자기 반영성이 완벽한 행위성이나 자제와 동일한 것도 아니다. 그것은 사회적 결정론에 대항하는 우리가 가진 몇 안 되는 방어수단일 뿐이다. 이것이 푸코조차도 후기에 자기심문의 힘을 연구하기 시작한 이유일 수 있다. 섹슈얼리티를 포함해 우리의 주체성이 ’훈육권력‘이라는 생명관리정치적 조건화로 형성된다고 설명한 푸코도 결국 능동적인 자기 형성의 이상에 의존한 고대 그리스의 자기배려 관념을 들여다보았던 것이다.”198

난티나무 2023-04-03 23: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 벌랜트 “잔혹한 낙관주의” 읽었어요!! (<정동 이론>에 수록됨) 루티 책에도 나오는군요. <행복의 약속>도 비슷한 내용 이야기하는 듯해요.
저 바나나책 저도 살 건데 전자책이냐 종이책이냐 심히 갈등 유발…@@

유수 2023-04-05 00:25   좋아요 0 | URL
종이바나나 한표🖐️

공쟝쟝 2023-04-04 22: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고 싶은 말이 참 많아지는 페이퍼. 삶이 고여야. 삶에서 저지른 실수와 착오들이 어떤 반복강박의 선상인지를 충분히 이해하고 재경험하고 과거의 나와 끊임없이 비교해야한다는 제언은 너무도 난망한 일이라 엄두도 나지않지만. 우리 천천히 그렇게 해보자구요. 내 안의 나쁜감정들은 다 이유가 있다고 해주어 어찌나 힘이 나던지. 저는 또박또박 헤쳐나갈 유수님의 과정을 읽도록 하겠습니다!! 🤗

유수 2023-04-05 01:21   좋아요 1 | URL
지쳤는데 또 하고 또 한다. 녹초가 되어 눕는다. 이 부분 저는 너무 좋은 거예요 ㅋㅋㅋ원초적인(?) 공감을 원하는 건가ㅋㅋ 스스로가 답정너다 싶은데 저도 거기서 힘을 얻었어요. 쟝님이 추천해줘서 너무너무 감사한 마음입니다.

공쟝쟝 2023-04-05 09:05   좋아요 1 | URL
저는 순간이나 찰나의 공감은 가능하다고 믿는 편예요! 원초적으로다가 ㅡ 지속적이지는 않죠 ㅠㅠ 그렇지만 그 순간의 대화의 희열이 나를 대화하게 한다!!! ㅋㅋ 훌륭한 독후감 읽게되어 저도 기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