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 - 가네코 후미코 옥중 수기
가네코 후미코 지음, 조정민 옮김 / 산지니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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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번 주 일요일은 3.8 세계 여성의 날이다. 작년이 111주년이었으니 올해는 112주년일 것이다. 112.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쩐지 마주하기 민망해지는 숫자다. 문득 중학교 때 배웠던 공식이 떠오른다. 거리를 속력으로 나누면 시간이 된다. 우리가 여기까지 얼마나 느리게 왔기에 112년이라는 커다란 시간이 나온걸까? 그리 멀리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변화의 속도는 언제나 너무 더디다.

 

반면 요즘 내 하루는 쾌속으로 흘러간다. 산지니 인턴생활을 시작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다 되어가고 있으니. 출근 첫날, 책으로 빼곡히 들어찬 사무실 책장을 구경하다 대표님께 책 한 권을 받았다. 가네다 후미코의 옥중수기 나는 나. 여성의 날이 곧이니 이 책을 읽고 서평을 써보라는 말씀이셨다. 이것이 내가 처음 맡은 업무다. 책을 읽고, 서평을 쓰는 것. (이것은 업무인가 복지인가)

 

책을 받아들었을 때만 해도 가네코 후미코가 누군지 아는 바가 없었다. 영화 박열도 보지 않았으니까. 나는 한국사를 주제로한 5분짜리 지식채널e만 봐도 열혈의 가슴 되어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일제강점기를 다루는 한국영화들과는 부러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애국심이 쉽게 고취되는 사람은 민족주의에 경도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하는 법이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영화 박열을 보지 않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었다. 말하고 움직이며 숨 쉬는 후미코를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최희서는 짱이다.......) 나는 나의 원제는 무엇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원제에서 알 수 있듯, 가네코 후미코는 자신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갖고 사는 인간이었다. 스스로를 궁금해하는 사람의 삶은 결코 지루해지지 않고, 그런 이의 글은 삶만큼이나 진실되다.

 


"운명적으로 불운한 탓에 나는 나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네코 후미코는 짧은 생애 내내 한번도 기초적인 사회 공동체의 보호를 보장받지 못했다. 무적자(호적에 오르지 못한, 서류상 세상에 없는 사람)였기 때문이다. 후미코는 그토록 바라던 학교도 가지 못하고, 친척들 사이에선 식모살이를 전전하며 갖은 수모와 학대를 다 당하고 성장한다. 일찍부터 모든 사람의 기쁨은 타인의 슬픔에 의해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쳤던 후미코에게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미코의 입속에는 이런 말이 맴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라곤 나 자신이 태어났고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뿐이다. 그렇다. 나는 내가 태어나 살아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할머니가 아무리 태어났지만 태어나지 않은 것이라고 해도, 나는 태어나 숨 쉬고 있다.” 세상이 아무리 그를 구박해도, 후미코는 언제나 자기의 주인이었다.

 

그래서 가네다 후미코라는 여성의 캐릭터를 부각하기 위해 흔히 부여하곤 하는 박열의 연인이었던같은 수사는 필연적으로 실패한다.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의 연인인 것이 아니라, 박열이 후미코의 연인인 것이다. 두 문장은 의미상 동어반복이지만, 소유격조사 는 앞뒤 체언의 소유관계를 분명한 뉘앙스로 나타낸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를 저토록 강하게 만든 것은 무엇일까. 나는 그것을 찾고 싶었다. 그것을 찾아 내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후미코는 책의 말미에서 박열과의 만남을 명료하게 회상한다. ‘내내 찾아오던 어떤 것을 박열의 가슴속에서 발견했고, 그래서 박열을 선택한다. 둘은 교제를 시작하기 전에 한 중국요릿집에서 만나 서로의 사상과 가치관에 대한 합의를 맺는다. 후미코는 자신은 조선인이 아니기 때문에, 만약 박열이 민족운동가라면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다.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위치를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후미코의 이름 앞에 따라붙곤 하는식민지 조선을 사랑한따위의 수사는 가네코 후미코가 처음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했을 거라는 착각을 일게 하지만, 이것은 우리(한국인)의 바람일 뿐이다. (그가 박열과 함께 일제의 만행에 저항하는 활동을 했던 것은 맞지만, 투쟁의 기반은 조선에 대한 사랑이라기 보단 민족과 국가를 초월한 인권의식에 뒀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다) 내가 나는 나를 읽으면서 후미코에게 가장 감탄했던 것은 바로 이런 계급에 대한 민감한 인식과 정확한 표현력이다. 할머니 손에 이끌려 조선으로 떠난 후미코가 포착했던 충남 부강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어 있다. 



"돈이 있어 빈둥 눌고 지내며, 도시에서는 약간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 그런 계급들이 으스대고 있었다"

 


이 얼마나 적확한 표현인가. 후미코는 도시와 시골본토와 식민지 사이 생겨난 잉여를 갈취하며 성장한 신생 계급의 모습을 빈둥거리지만 도시에서는 약간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는이라는 한 문장으로 냉정하게 축약한다. 대충 부르주아라고 퉁칠 수도 있었을텐데. 후미코의 관찰력은 용의주도하다.

그는 박열과의 교제 또한 결국 우리 사이에 양해가 성립했다는 표현으로 나타낸다. 나는 둘의 관계를 표현하는 데는 이 문장이 가장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필시 둘 사이에는 성애적 로맨스, 전투적 동지애, 사상적 의지가 한데 뒤얽힌 어떤 감정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고 뭉갤 수도 있겠으나(그리고 실제로 그런 이미지로 소비되곤 하지만, 후미코에게 박열과의 애정관계가 셀링 포인트여선 안된다) 나는 양해야말로 알맞은 단어라고 생각한다. 서로를 기꺼워하는 마음으로 용납하는 관계. 사랑보다 굳셀 것이다.

 


"하지만... 하지만... 뭐라해도 사람은 사람인 것이다."


 

후미코는 동지들과 사회주의를 공부하며 해방운동을 펼치다가 마침내 대역사건으로 수감 되고 만다. 매사를 기민하게 감각하는 그이기에 사회주의 방법론의 한계권력의 본질적 속성에 의문을 갖기도 하지만, 끝내 후미코는 뭐라해도 사람은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인간이다. 사람은 사람인데. 사람은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응당 받아야 하는 대접이 있는데.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보장되어야 하는 최소한의 양식적 삶이 있다는 사회주의자들의 믿음을 나는 좋아한다. 그런 믿음이야 말로 사람을 사람답게 만든다.

 


"곧 이 세상에서 나라는 존재는 사라질 것이다.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영원의 실재 속에서는 존속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가네다 후미코는 감옥에서 자살로 생을 마친다.(자살인지 타살인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서류상 자살로 되어있다) 옥중 결혼으로 박열의 호적에 들어간 덕에 후미코의 시체는 해방 이후 문경에 묻혔다. 한평생 무적자로 설움과 괄시를 받았던 후미코가 결혼으로 호적을 얻었다는 사실이 못내 슬프게 다가온다. 그저 나로 태어나 살아있음을 분명히 느끼고 숨쉬는 것만으로 존재를 증명할 순 없는 걸까?

 

올해는 여성의 날 112주년. 대한민국에서 호주제가 폐지된 지는 12년이 지났다. 후미코는 죽음 앞에서 위와 같은 말로 책을 맺었다.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질 뿐, 자신은 영원의 실재 속에서 존속할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책의 방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네코 후미코의 육체라는 현상은 현상적으로 없어졌지만, 그의 영혼과 정신은 책이라는 실재 속에서 영원히 존속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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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전집 1 - 시 김수영 전집 1
김수영 지음, 이영준 엮음 / 민음사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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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변주곡
김수영

욕망이여 입을 열어라 그속에서 
사랑을 발견하겠다 도시의 끝에
사그러져 가는 라디오의 재갈거리는 소리가
사랑처럼 들리고 그 소리가 지워지는
강이 흐르고 그 강 건너에 사랑하는
암흑이 있고 3월을 바라보는 마른 나무들이
사랑의 봉오리를 준비하고 그 봉오리의
속삭임이 안개처럼 이는 저쪽에 쪽빛
산이

사랑의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우리들의 
슬픔처럼 자라나고 도야지우리의 밥찌끼
같은 서울의 등불을 무시한다
이제 가시밭, 덩쿨장미의 기나긴 가시가지
까지도 사랑이다

왜 이렇게 벅차게 사랑의 숲은 밀려닥치느냐
사랑의 음식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 때까지

난로 위에 끓어오르는 주전자의 물이 아슬
아슬하게 넘지 않는 것처럼 사랑의 절도는
열렬하다
간단도 사랑
이 방에서 저 방으로 할머니가 계신 방에서 
심부름을하는 놈이 있는 방까지 죽음 같은
암흑 속을 고양이의 반짝거리는 푸른 눈망울처럼
사랑이 이어져가는 밤을 안다
그리고 이 사랑을 만드는 기술을 안다
눈을 떴다 감는 기술──불란서혁명의 기술
최근 우리들이 4·19에서 배운 기술
그러나 이제 우리들은 소리 내어 외치지 않는다

복사씨와 살구씨와 곶감씨의 아름다운 단단함이여
고요함과 사랑이 이루어놓은 폭풍의 간악한
신념이여
봄베이도 뉴욕도 서울도 마찬가지다
신념보다도 더 큰
내가 묻혀 사는 사랑의 위대한 도시에 비하면
너는 개미이냐

아들아 너에게 광신을 가르치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랑을 알 떄까지 자라라
인류의 종언의 날에
너의 술을 다 마시고 난 날에
미대륙에서 석유가 고갈되는 날에
그렇게 먼 날까지 가기 전에 너의 가슴에
새겨둘 말을 너는 도시의 피로에서
배울 거다
이 단단한 고요함을 배울 거다
복사씨가 사랑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할 거다!
복사씨와 살구씨가
한번은 이렇게
사랑에 미쳐 날뛸 날이 올 거다!
그리고 그것은 아버지 같은 잘못된 시간의 
그릇된 명상이 아닐 거다

<1967. 2. 15>

─「사랑의 변주곡」, 『김수영 전집1(시편)』(1981), 민음사


나로 하여금 이번학기에 주구장창 시집을 사게 만들었던 <시교육론>수업이 끝나간다.
수업의 말미에 서서 생각하건대 아무래도 강의명은 훼이크인듯..
시'교육론'이라기보단 <현대시선독> 정도가 어울리지 않았나 싶다. 
국교과 개설 수업이니 아무래도 이름에 교육이 들어가야했겠지만서도..ㅎㅎ

아직 제임스테이트라는 외국시인의 시와 교수님 본인의 시를 교재로 하는 수업이 2주정도 남았지만,
김수영의 시로 1차적으로 수업을 마무리하는 듯한 느낌이다.
황현산의 평론을 부교재로 같이 공부했는데, 깊이가 생기는 시공부같아서 더 좋았다. 그 평론도 참 명필이라서..

어떻게 5-60년대에 시를 쓰면서 이렇게 모던할수가? 
어찌보면 미래파시인들보다도 더..
'시적인 단어' 없이도 충분히 시적인, 일상의 단어를 가지고 농밀한 시를 쓰는 김수영이야말로 "현대시인"이다

이번 학기를 마칠 때가 점점 오고 있다 
현대시를 읽는다는 것은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겐 쉽지 않은 일이다 
관심이 없는 이상, 보통은 교과과정에 있는 시들만 접하게 되고 
대부분 교과서에 실린 시들은 서정시이다.
예전엔 나도 서정시를 꽤 좋아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도무지 재미가 없다
시골풍경이나 자연을 예찬하는, 내가 모르는 방언이 시어로 사용되어 손쉽게 도취적 마비를 일으키는 그런 시들보다 
자신에 대한 모멸감이 섞인 희화로 인간의 누추함을 고발하는, 일상의 언어와 논리의 결락에서 작동하는 시의 힘이 더 아름답다.

지금은 눈이 온다
시를 더 많이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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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11-24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능시험 중심의 교육 때문에 서정시는 문제 출제자가 원하는 해답을 찾기 위해 해석해야 할 텍스트가 전락했어요. 그래서 학생들이 서정시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참사 후 3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곳 저곳에서 그날을 기억하는 활동을, 저마다의 다양한 방식으로 하고 있다는 것
우리가 이런 책들을 꾸준히 찾아 읽으며 타인의 슬픔에 대한 공부를 멈추지 않는다는 것
공감하고 분노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는 것

이 모든 의지들이 우리 사회를 조금 더 나은 곳으로 견인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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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 - 제1회 문학동네신인작가상 수상작, 3판 김영하 컬렉션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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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집보다 더 구렸다..
중2 감성으로 점칠된거 같음 (이라고 쓰면 청소년 비하이려나ㅠ)

난 이런 류의 비린내 나는 유치함이 싫다ㅠ ..
여기 나오는 여성 인물은 죄다 한국 남성 작가들이 묘사하는 여성의 전형이다 ㅋㅋ
정액을 몇 리터 씩 마시다 도망친 여자, 막대사탕을
물고 섹스하는 여자(형동생 모두와ㅋㅋ), 나체 퍼포먼스를 하는 매혹적인 여자~~~~~~~~~

성적인 이미지를 미학으로 쓸수는 있지만 왜 늘 문학속 여자들의 성적 이미지는 뭔가 엄청 퇴폐적이고 음습하고 상처받고 자살하고 이래야하는지..? 그래야 ‘예술적’이라고 생각하는건가
ㅇㅅㅇ..
하여튼 자살/섹스 아니면 별 의미가 없는 여자캐릭터의 향연이라 불쾌했고
사실 그런 가치판단 이전에 그냥 재미가 없었음....
시니컬하고 쿨해야만 소설이 되는게 아닌데

김영하 단편집 읽을때 유일하게 건져올렸던 장점인 특유의 말맛도 없구.. (ㆀ˘・з・˘)
그래도 난 김영하 좋아하니까... 다음엔 산문집을 읽을래...... ㅠ

+)
이 작품도 개정 전 표지가 오조 오억배 낫다
문학동네 디자인 왜때문에 점점 쇠퇴하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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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 4
진이정
 
일어나자마자 너무 배가  고파, 우유 공양을 했다
수자타도 없이, 나는 스스로에게 공양했다
아버지, 별빛이 먹고 싶어요
동경에 살지 않는 게 다행이야
몸에 음식이 들어가면 왜 마음이 방자해질까
붉은 깃발 아래의 일상적인 식욕이여
나의 동심은 신작 만화영화를 견디지 못한다
밤새 비가 내리고, 나는 거품도 없는 오줌을 누기에 바빴다
너의 전자파가 밤새 내 세포분열을 도왔어
관세음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실 때
나는 딴 생각을 했다, 딴 생각이 나다
미국의 별 아래 우리는 산다라는 생각
나는 가난해, 나는 푸르러, 나는 쓰러져,
나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밤새 밥통의 밥이 말라 있었다, 잠시라도 가만히 있는 것은 없다
졸작을 남기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오늘도 교향곡 하나를 작곡했다
먹기 위해 한 생만을 낭비한 것은 아니다
나, 위대한 적도 있었다
겸손할 필요가 없었던 시절, 나는 취해 있었지
초막에서 궁궐로, 나는 급행을 탔던 거야
어찌 하여, 너는 하여가를 부르느냐
나의 단시는 너무 길어, 음유시인의 사회에서 배척받고 있단다
오는 길이 적막강산이었습니다
휘파람새와 동행했지요
오래 전 내가 죽인 개구리 뒷다리들,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나를 위로해 다오, 커피 한 잔의 식곤이여,
우주를 통째로 소화시키려다 이 무슨 꼴?
아는 여자들은 짜증이 난다
진짜 칼로 너와 싸우고 싶어
진짜 연애, 진짜 아이, 진짜 인생에서 나는 멀리 떨어져 있다
나는 구호 식품에 의존해 있으므로, 시인이다
일본에서도 시인은 거지란다
내겐 적정량의 범죄가 필요해
그리곤 반성은 필요치 않으리라
나는 게으름 중독에 걸려 있어, 나는 나태사할지도 몰라
나는 미련이 없다, 그래서 살아 남았다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아아 멀고 먼 인생의 비단길이여
깊고 깊은 미묘한 진리여,
숨 넘어가기 직전, 그대의 이름을 꼭 한번 부르리
아버지의 사십구 재, 바라춤이 아름다웠다
블루스의 달인이던 당신은 만족했으리라
나도 죽거들랑, 누군가 춤추어 다오
마누라가 나타나기까지, 나는 목욕하지 않으리
원효대사는 바로 내 해골바가지로 물을 드셨던 거다
고구려 병사가 나의 국적을 물었다
전 허망한 나라에서 왔습니다요,
다행히 말이 통했다
나도 허망한 나라에서 살고 있어
착한 고구려 병사는 나를 봐주었다
어디에나 인간은 있다
나도 울었다 그리고 국내성을 향해 절했다
나라가 망하니, 나의 절만 남는구나
분황사에서 불공을 마저 드리리라

―진이정,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4」, 『거꾸로 선 꿈을 위하여』(1994), 세계사 

갖고싶다 진이정 시집.. 미친듯이 갖고 싶어..ㅜ
대체 왜 재판을 안찍는거지 진이정 정도 되는 시인을..

진이정은 기형도와 자주 비견된다
기형도는 얼마전 아예 새로운 껍질을 쓰고 전집이 새로 나와 불티나게 팔렸는데
심지어 오규원을 제치고 광명에 문학관까지 생겼는데 
진이정은 시집 조차 구하기가 어렵다

교수님은 기형도는 '감상적'이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는 시라고 말씀하셨다 ㅎ..
사실 난 가끔 교수님이 이런 말씀하시면 조금 문학엘리트주의(?)적인 면모가 보여서 살짝 꺼려진다
물론 이성복의 영향을 엄청나게 받은 기형도가 이성복 보다 먼저 문학관을 갖게 된것은
그 둘의 생사에 따른(이성복은 아직 살아있으니까ㅋㅋ) 요절 이미지의 후광이 분명 작용한 것일테니 
교수님의 불만도 일견 합리적이긴 하지만.. 어쨌든, 대중에게 사랑받는 시=쉬운시,서정시 이런식으로 생각하시는거 같아서 대중의 한사람으로서 좀 불만이,,ㅎ ((((((((((((기형도 좋아하는 나)))))))))))))

아무튼,
진이정은 요절한 요설시인(라임..)
근데 계속 읽다보면 요설이라는 생각이 안들정도로 이미지가 깊게 들어온다. 
난해함으로 치면 오히려 김이듬이나 서대경이 한수 위 같음..ㅜ
의식의흐름 수준으로 내뱉는 문장들이 모여서 시가 된 것 같은데 
어디로 튈지 모르는 시적 상상력이 참 대단하다.. 

그의 시는 늘 우주까지 확장된다 
자신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생각의 스케일이겠지
세계 속에서 나는, 이 우주에 한 점도 찍지 못하는 나는 무엇인가 
물음을 던지는 영원히 젊은 시인..

제발 재판 찍어주새요...ㅠ
하루빨리 한국문학계에서 진이정이 재조명을 받았으면 좋겠다..
기형도 만큼은 힘들지라도 '진이정시론' 이 등장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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