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2017년~2020년 사이에 나왔으면 잘 읽었을텐데 그 모든 격동의 페미니즘 시대를 지나쳐 지금 읽으니 이 책은 래디컬하지도 유효하지도 않게, 심지어 진부하고 보수적으로 느껴진다. 자매애를 사랑과 우정 사이 어디쯤에 놓아야 하는지가 중요한 질문이었던 시기는 이미 지난 느낌…
<빌러비드>를 경유한 마지막 장에서 모리슨은 이렇게 쓴다. “허구적 서사는 타자, 즉 이방인이 되거나 혹은 이방인이 되어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통제된 야생 상태를 제공한다. 이곳에서 동정심과 명료한 눈을 가져볼 수 있고 자기 성찰의 위험을 감수할 기회도 얻는다.”인간이 영원히 이야기를 가까이 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 주는 두 줄이었다. 우리는 너무 나약해서, 어떻게든 타자를 구축하고 거기서부터 신념을 배양하여 자아를 확보한다. 그러니까 부지런히 이야기를 읽어서 잠깐이라도 이방인이 되어보는 경험, 스스로가 쥐고 있는 이야기를 잠시 놓고 타자가 되어보는 경험, 자기 자신에게 소외되어보는 경험을 해야 한다…
표현력도 표현력이지만 그보다 구성이 돋보였다. 연대기적 서술을 거부하고 시간의 흐름과 관계없이 모자이크식으로 써내려간 게 인물이 겪는 혼란과 불안을 그대로 드러내 주는 느낌… 근데 끼엔도 이 여자 저 여자 자고 다녔으면서 프엉이 딴 남자 생긴 거에 왜케 충격 받는 거임;.. 전시성폭력이 끼엔과 프엉의 관계에 영향을 미친 방식이, 그러니까 전시성폭력이 서사 안에서 수행한 기능이 너무 후져서 전쟁의 슬픔조차 여자의 얼굴을 하지 못한다는 걸 느낄 수밖에….
최애편: 대리기사의 사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