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론 2
제레미 오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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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옆에 다크홀이 생겼다.

블랙홀과는 다르게 다크홀은 질량도 중력도 없다. 단지 관측되는건 비어있는 어둠 뿐이다. 인류는 이 미지의 구멍을 탐험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임무를 밑은 사람이 바로 '루크'다. 주인공 루크는 지구 최고의 우주인이다. NASA 최고의 파일럿이다. 루크는 이 다크홀을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다크홀을 통과한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과거 SF영화나 소설이 그리던 설정과 꽤 다르다. 비슷하면서 다르다. 루크가 도착한 곳은 '다중 지구'다. 80억개나 되는 지구가 각각 다른 역사를 만들며 우주 공간에 떠 있다. 그는 곧 알게 된다. 지구의 갯수가 80개인 이유를 말이다.

이 세계관에서 핵심은 '의식'이다. 각 지구에는 79억이 넘는 무의식과 단 하나의 의식이 존재한다. 각각 지구마다 '의식'이 하나씩 있으며 그 의식이 바로 '그 지구의 주인'이다.

항공우주공학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완전히 섞이며 만들어낸 이런 새로운 형태의 SF 소설은 '작가'의 이력에서 기인한다. '제레미 오' 작가는 서울대학교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현재는 정신과 전문의로 병원에 근무 중이다. 우주공학과 정신의학이라는 이질적인 두 분야를 아우르는 그의 독특한 이력은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고로 결국 '홀론'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제목이 아니다. 철저히 제레미 오 본인의 전공과 임상실험이 융합된 결과다. 항공우주공학과 정신의학이 다루는 두 소재를 아주 적절하게 섞었다. '다중우주'라고 하면 대개 우리는 '공간적 분기'를 떠올린다. 다만 제레미 오는 그것을 '의식'이라는 축으로 뒤틀었다. 차원이 아니라 마음. 공간이 아니라 '자아'로 '다중 우주'를 설명한다.

소설은 어떤 부분에서 '인터스텔라'를 닮았지만 사실상 아주 다른 이야기다. 또한 실제 꿈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일 줄 정도로 그 묘사가 기이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스토리라인이 아니라 개연성이 굉장히 어그러져 있는 구간이 있다. 다만 이 장치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소재를 볼 때, 꽤 의도된 설정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대로 지구가 80억개인 이유는 자아가 80억개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각 지구가 하나의 무의식 덩어리고 그 위에 주인으로 있는 단 하나의 의식만 존재한다. 그 하나의 의식이 곧 그 지구의 진짜 사람이다. 나머지는 무의식이 빚어낸 허상, 데이터, 껍데기나 다름없다.

사실 이런 설정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의식-무의식 구조'를 정반대로 확장한 개념이다. 프로이드는 인간 한 명 안에는 '이드, 에고, 슈퍼에고'가 있다고 봤다. 다만 제레미 오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개의 세계 안에 그것을 만들어 냈다. 지구라는 덩어리가 곧 하나의 인격이 되는 셈이다.

또한 이것을 단순히 사변적 개념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항공우주공학 전공자답게 다중 우주의 메커니즘을 물리적, 수학적 언어로 묘사한다. 질량이 없는 다크홀, 중력 없는 중첩 우주, 그리고 거기에 붙은 '의식 중심성 이론' 등.

실제로 현대 물리학에서도 양자중첩과 관측자의 문제는 늘 뜨거운 감자다. 슈뢰뒹거의 고양이, 양자 얽힘, 다세계 해석,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측'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단 하나의 현실로 수렴된다. 다만 만약에 이 '관측'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의식' 자체라면 어떠한가. 그런 의미에서 '홀론'의 세계관은 허무맹랑하면서도 꽤 합리적인 상상이다.

게다가 여기서 소설의 중심이 슬쩍 이동한다. 서사가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루크가 딸을 찾아 다른 지구를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여러 사건과 배반, 반전이 있다. 사실 어떤 반전은 대략 알아채게 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볼 수 밖에 없다.

한 여름 길고 긴 낮잠 끝에 어렴풋하게 남은 꿈의 흔적처럼 이 소설은 굉장히 몽상적이고 묘하다. 완전히 깨어난 뒤에도 그 여운은 오래도록 머리속에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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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이 계절을 함께 건너는 당신에게
하태완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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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완' 작가의 '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인간관계는 창밖으로 멋지게 쏟는 장대비와 같다. 집안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내다볼 때는 그저 음미하기 좋은 낭만이지만,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이겨내고 해쳐 가야 하는 악천후가 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재능을 갖지 않아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간혹 먼저 걸려오는 전화에 뒤늦게 한숨 쉬고 받는 정도다.

사람을 회피하진 않는다. 다만 먼저 나서지 않을 뿐이다.

그 불완전한 사회 생활을 공감해 주는 문장을 만났다. '인간 관계'가 창밖으로 내리는 장대비와 같다니...

실제로 그렇다. 창밖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기에 꽤 낭만적이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 앉혀주는 소리며 은은하게 어둑해지는 자연광이 마음까지 차분해진다.

다만 창을 열어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다. 창을 열고 나서면 아름답게 보이던 그 장대비가 무섭게 몸을 적시고 후유증을 남긴다.

나약함이 '약점'이 되지 않는 나이가 있다.

대략 우리 아이들의 나이쯤이지 않을까 싶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져서 울어도 누구도 손가락질 하지 않는 나이다. '그럴 수 있지'하고 사회가 받아 들이는 나이.

그 나이를 그 자리에 두고 수십년을 지나왔다. 언젠가는 두발로 서 있기만 해도 박수를 받았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언가를 역동적으로 하고 있어도 손가락질 받기 일수다.

겉으로 보기에 꽤 완전에 가까워져서 이제는 '나약함'이 '약점'이 되었다.

말실수를 하거나 자칫 걷다가 넘어질 뻔 한 순간에도 사람들은 쳐다 볼 것이며 때로는 비웃을 것이다. 몇번의 실수를 보여도 키득거리며 웃을 수 있는 젊은 시절이 스믈스물 지나, 이제는 '불혹'이라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렇게 나이가 스스로를 규정하고 나니, 완전하지 않은 내면과 완전을 종용하는 외면 사이에 격이 커진다.

야수를 만나거든 결코 뒤를 보여서는 안된다. 뒤를 보이면 야수는 덥썩 그 등을 물어 버린다. 그처럼 때로는 '빈곳', '약점'을 내놓고 싶지만 창밖에 내리는 그 장대비가 칼날처럼 위에서 아래로 꽂아 내린다. 몇번의 경험은 해를 보낼수록 더 강하게 해를 입힌다.

결국 어린 시절에는 옷 젖는 줄 모르고 온몸으로 즐겼을 그 장대비를 이제는 누군가의 것으로 치부하고 구경할 뿐이다.

'하태완 작가'의 다른 말처럼 그렇다. '삶은 내가 운전하는 택시'를 닮았다. 오가는 손님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온다면 반가운 것이고, 간다면 고마운 것이다. 내가 그렇듯 그들도 나름의 여정에 바삐 간다는 말에 꽤 위안을 받는다.

어제인가, 아이와 동네 문구점을 들렸다. 문구점을 향하는 바쁜 발걸음은 도로 어딘가에서 멈춰졌다. 아니는 아무렇게나 피어난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나비를 쫒느라 멈췄다. 기껏 온 길을 다시 뒤로 물러 갔다.

그렇게 다시 목적지에서 멀어지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낭만이라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하태완 작가의 비유처럼 '낭만'이나 '사랑' 같은 것은 몹시 효율적이다. 아무 이유나 목적도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나는 만남.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만나서 백해무익한 소비를 즐기는 것.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을 구매하는데 지갑을 열고 돌아오면서 오늘 구매한 저 장난감이 내일이면 부품 몇개를 잃어버린 채 분리수거함에 들어가겠구나 했다.

논리나 효율따위를 따지지 않는 나이에는 그것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 어느 순간이 되면 저절로 나이라는 녀석이 찾아오기 때문에...

아이를 야단하면 아이는 '낭만'을 잃어버린다.

마치 어느 순간, 그 존재가 아예 없던 듯 살고 있는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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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부로 칭찬하지 마라 - 심리학이 밝혀낸 아이를 성장시키는 칭찬과 꾸중의 원칙
김영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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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하지만 칭찬이 과해지면 춤은 노동이 되고 칭찬은 강요가 된다. 자기방어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반응이다. 고래는 원래 춤을 추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춤을 보기 위한 누군가의 요구가 '칭찬'으로 다가오면 고래는 '춤'을 추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가진다.

진심 어린 최초는 자발적이다. 스스로 즐겁다. 다만 결과를 유도하기 위한 인위적 칭찬은 강요와 명령에 가깝다. 상대의 동기를 자극하기 위해 끊임없이 부여하는 칭찬은 '중독'적이다. 언제나 진심어린 칭찬은 필요하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이다.

'잘했다'라는 말이 반복되면, 기대가 붙는다. 다음에도 잘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생긴다. 그때부터 춤은 '선택'이 아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방어하기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대놓고 거절하지 않는다. 거절하지 않고도 완수하지 않는 방법이 있다. 바로 '덜 해내는 전략'이다. 스스로 무능을 택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기불구화 현상'이다.

'자기불구화 현상'은 단순한 무기력이 아니다. 그것은 꽤 능동적인 방어다. 성공할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실패를 선택하는 것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실패했을 때, 진심이 들통나지 않기 위해서다.

'내가 못하는 게 아니야, 안하는 거지'

이런 회피는 칭찬을 자주 듣는 아이로로부터 자주 발견된다.

실제로 연구에서도 이 패턴은 뚜력하다. 중요한 시험을 앞둔 학생일 수록, 준비하지 않은 핑계를 만든다. 자기효능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노력 대신 회피를 선택한다. 사람들은 바보가 아니다. 누구나 결과를 알고 있다. 세상은 당연하게도 성공보대는 실패가 흔하다. 몇번의 실패 위에 성공이 올려지는 것처럼 실패를 감내하는 단계가 없다면 성공에 도달히지 못한다. 다만 최대한 실패가 나와 연결되지 않기 위해서 애초에 그 '싹'이 되는 '시도'를 지워 버리는 것이다.

예컨대 '어제 잠을 못자서', '요즘 컨디션이 안좋아서', '사실 이건 진심이 아니었어'와 같은 말들이 나온다. 이 말들은 모두 방어다. 자존심을 지키려는 미세한 전략이다. 최선의 노력을 다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진심'을 다 한 뒤에 얻는 '실패'가 스스로의 존재를 흔들 수 있기 때문이다.

실망시키거나 실패하지 않는 가장 완전한 방법은 시도하지 않는 것이다. 고로 어설프거나 진심이 없는 과도한 칭찬은 때로 아이를 무능력한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

칭찬이 과한 시대다. 야단치거나 혼내는 일이 아이를 망칠 수 있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조던 피터슨 교수의 '12가지 인생의 법칙'라는 책에 꽤 단호한 어조로 아이를 훈육하라고 말한다. 여러 연구에서 실제로 무조건적인 칭찬이 좋지 않다고 말한다. 어떤 경우에는 아이에게 야단을 치는 경우 아이가 성장하기도 하고, 어떤 경우에는 칭찬을 해야 한다고 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기준은 '진심'이다.

로체스터 대학교 심리학과에 재직 중이던 '에드워드 데시 교수'는 1999년 내적 동기에 관한 논문을 발표했다. 해당 논문은 지금까지 1만 5000번 이상 인용될 정도로 영향력 있는 논문이다. 이 논문은 보상 효과에 관한 논문으로 '실체가 있는 보상은 어떤 형태든 내적 동기를 낮춘다'라는 결론을 갖고 있다.

즉 '동기부여'를 자극하는 어떤 종류의 보상이 아이의 내적 보상을 낮춘다. 보상이 없으면 동기가 사라진다는 기존 통념이 꽤 무기력하게 무너진다. 실제로 '책 읽으면 게임 시켜줄께'라는 식의 거래는 아이의 순수한 지적 호기심을 없애는 거래다.

이런 저런 연구를 다 비교하며 아이에게 과학적 혹은 통계적 실험을 할 수는 없다. 아이를 대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은 많은 연구가 증명하듯, 그저 '진심'을 다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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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느슨함 - 돈, 일, 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품위 있는 삶의 태도
와다 히데키 지음, 박여원 옮김 / 윌마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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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n'이라는 단어를 보면 동양인은 반의어 'Lose'를 떠올린다. 무슨 말인고 하면 동양 사회에 깊이 박혀 있는 경쟁에 대한 이분법적 사고가 작동한다는 의미다. 누군가가 이기면 누군가는 져야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죽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다. 이러한 전제는 일본, 중국, 한국 등 현대 동양인들이 갖고 있다.

홍미롭게도, 이런 사고방식은 본래 서양 철학에서 출발했다. 데카르트가 그랬고 플라톤도 그랬다. 선과 악, 정신과 육체, 이성과 감정 등. 서양 사유는 오래전부터 세계를 이분법으로 나누어 생각했다.

현대에 와서는 정반대다. 이분법적 사고는 동양 사회가 더 심하다. 특히 일본과 한국이 그렇다. 서양은 이분법을 철학적인 도구로 써왔지만 한일 국민들은 이를 실생활의 생존 원리로 갖고 있다. 학교나 직장, 입시, 관계에서 언제나 이겨야 했던 과거 산업화의 역사가 사회를 이렇게 만들었다고 본다. 경쟁 사회에서 'Win'의 반의어는 분명하게 'Lose'다. '이기다'의 반의어는 '지다'가 저절로 되는 것이다.

다만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다.

이기다의 반대어는 이기지 않다,에 가깝다. 즉 이기지 않았다고 지는 것은 아니다. Win은 본래 고대 영어인 Winnan에서 출발했다. Win은 본래, 이기거나 정복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노력을 해서 얻어 내다'에 조금더 가깝다. 누군가를 밟고 서는 게 아니라 자기 몫을 차지하는 것이다.

영어까지 갈 것도 없이, 본래 우리말 '이기다'는 '익다'에서 출발했다. 영어 속 혹은 한국어 속 어원을 살피자면 실패에서도 얻는 것이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길 수 있다.

사실 그렇다. 이기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얻는 것이다. '어른의 느슨함'에서 '와다 히데키' 작가는 '당위적 사고'와 '이분법 사고'를 주의하라고 말한다. 그는 정신과 의서로서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겉으로 보기에는 잘나고 성실한 사람들 중 적지 않은 이들이 속이 비어있는 채로 삶을 산다고 말한다. 그들을 망가뜨린 건 실패가 아니라 '반드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과 좋거나 나쁘거나의 '이분법적 사고' 때문이라고 한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당위성은 우리를 성장시킬 수 있다. 다만 이런 당위성이 '이분법적 사고'와 만나면 크게 위험하다. 세상이 양극단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목표치가 지나치게 이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갖는 당위성은 결국 비현실적인 목표로 그들을 몰아간다. 전투력이 충만한 젊은 시절에는 그나마 이런 사고가 성장의 동력으로 발동한다. 다만 나이가 들면서 쇠퇴하기 시작하면 이는 스스로를 옥죄는 독이 된다.

앞서말한 당위성과 이분법 사고는 노인의 치매를 가속화한다. 노화로 인한 치매는 막기 어려운 면이 있다.

다만 환경과 사고방식, 생활의 변화는 충분히 이를 조절할 수 있다. 60대 이후가 되면 우울증 환자가 급격하게 늘어난다. 이 배경에는 '신경전달물질'인 세로토닌이 있다. 세로토난은 뇌의 안정감과 행복감을 조절하는 물질이다. 이 물질은 나이가 들수록 그 분비량이 저절로 줄어든다. 흔히 '행복 호르몬'이라고 부르는 '세로토닌'의 자연스러운 감소를 우리는 어떻게 관리 받아들여야 할까.

와다 히데키 작가가 제시하는 방법은 이렇다.

고기를 먹고, 햇볕을 쬐고, 걷는 것. 이 단순한 세 가지는 뇌의 생화학을 바꾸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별거 아니다. 어쩌면 우리도 쉽게 지어낼 수 있는 말인지 모른다.

다만 그가 말한 바를 살피면 여유있게 살라는 것이다. 결국 어떤 방식의 win이건 가장 확실한 win은 생존이다. 가장 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공룡은 인간보다 훨씬 강했지만 벌써 멸종했다. 어떤 경우에는 느슨한 것, 게으른 것, 부드러운 것이 살아남는다. 나무늘보가 그렇다. 본래 나무늘보는 강한 동물이었다. 날카로운 발톱과 빠른 반응속도를 가졌던 포식자였다. 다만 시대가 바뀌고 환경이 변화면서 점점 느려지고 결국 '게으른 생존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나무늘보보다 강한 포식자는 얼마든지 있었다. 다만 그들의 상당수는 모두 멸종했다. 그래서 누가 이겼는가. 나무늘보는 느리지만 아주 확실하게 현재 남아 있다.

'어른의 느슨함'은 이래도 되나, 싶은 빠른 현대 사회의 불안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말한다.

'느린게 때로는 가장 좋습니다.'

가끔은 스스로를 위한 채찍이 아니라 쉼이 이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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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
이상훈 지음 / 파람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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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4년 12월 4일, 조선 한복판에서 갑신정변이 벌어졌다. 흔히 '3일천하'라고 부르는 이 사건을 우리는 교과서에서 배웠다. 온건개화파와 급진개화파 중 젊은이들이 축이 된 급진개화파들이 일으킨 정변이라고 배운다.

그 대목에서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여러 상상력이 동원된다. 그때 만약 그들의 정변이 성공에 이르렀다면 과연 지금의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교과서에서 '흑백사진'과 함께 등장하는 '김옥균'이라는 이름은 거기서 익숙해진다. 다만 '김옥균'이라는 인물은 국사교과서에서 언급되는 수많은 인물들 중 하나인데다가, 너무 짧게 스치고 지나가는 사건의 중심인물이라는 점에서 실상 큰 관심이 생기기 힘든 인물이다. 다만 '이상훈' 작가의 소설 '김옥균, 조선의 심장을 쏘다'은 '김옥균'을 중심으로 당시를 꽤 현실감 있게 묘사했다. 소설에 따르면 김옥균의 '3일천하'는 표면적으로 들어난 사건일 뿐이다. 이 사건이 일어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역사적 배경이 존재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면 역사의 3일은 물리적 시간에 비해 큰 메시지를 준다.

이 사건을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했는가. 갑자기 궁 담벼락에서 불이나 시작한 그 사건의 전말을 학창시절에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다만 젊은 남녀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 전개가 '꽤 역사의 한줄'에 등장하는 사건으로 남는데에 있어서 묘한 인간적 쾌감이 있다.

'그렇지, 역사도 인간성 위에 세워진 흔적이지 않은가'

사람들은 김옥균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 일본과 손을 잡고 조선을 개혁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그에 대한 평가는 아주 갈린다. 사람들의 평에 따르면 그는 '영웅'이거나 '배신자'다.

온화한 방법으로는 조선을 개화할 방법이 없을 것 같다는 젊은이의 판단은 권력을 잡고 제도를 바꾸는 식으로 변화를 꾀했다. 어떤 방식으로든 백성의 삶을 변화하겠다는 믿음은 우리의 교과서에서 부정적인 평가로 바뀌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 어떠한 대안이 있었을까, 하고 생각해보면 단순히 그의 계획을 부정적으로 보기만도 힘들다. 무능하고 우유부단한 국왕을 설득해야하고 다수를 차지하는 이들의 권력을 가지고 와야 했다.

민주사회가 된 지금에 보기에 그의 행동은 분명 잘못됐다.

그가 택한 선택이 얼마 전, 대한민국에 일어난 계엄과 결을 닮았기 때문이다. 급진적이 방법으로 변화를 하려는 것에 대한 평가는 지금도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역사에서도 그렇다.

그의 시도는 참 불운하게도 '지나치게 인간을 믿은 탓'으로 보인다. 그는 정변을 준비하면서 꽤 많은 사람을 믿는 실수를 저지른다. 인간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무의미한지 그의 삶을 돌아보면 느껴진다. '고종'과 '일본'은 상황에 따라 그 얼굴을 바꾼다.

실제로 갑신정변이 성공에 이르렀다면 어땠을까.

정변 직후에 발표한 개혁안은 매우 현대적이다. 가령 과거제 폐지, 인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고문금지, 내각 중심의 행정 체계 도입, 상업의 자유 보장이 그렇다.

김옥균은 혁명 실패 후 일본으로 망명한다. 조선 정부는 그를 역적으로 몰고 고종은 끝까지 그를 용서하지 않았다. 무능한 국왕 하나가 국가의 역사를 이렇게 달라지도록 했다는 점을 보자면 '정치'의 본질은 기본적으로 '리더의 철학'을 근간에 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1894년, 결국 끊임없는 암살시도 위에 김옥균은 사망한다. 홍종우에 의해 상하이암살 된다. 그의 시신은 조선으로 옮겨졌고 능지처참됐다. 아주 짧게 스치고 지나갔던 역사적 인물의 '일생'을 살피면서 아주 많은 생각이 든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선택을 어떻게 회상하며 나머지 일생을 살았을까.

얼마전 유튜브에서 한물간 정치인의 이야기를 본 적 있다. 극단적인 정치인이었다. 다만 지금에 와서는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났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가난과 냉정한 현실이었다. 그의 삶을 보건데 '김옥균'의 삶과 너무 비슷했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 내던져야 하는 건 개인이 견디기 꽤 가혹했다.

100년이 지나고 지금 다시 김옥균을 읽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는 반복하지 않지만 되풀이 된다. 체제를 바꾸겠다는 의지, 그 의지를 실현하기 위한 급진성, 이상을 위한 현실의 동원. 이런 것들은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익숙한 장면들이다. 지금도 어떤 이들은 사회를 바꾸기 위해 거리로 나선다. 어떤 이들은 법과 제도를 통해 개혁을 시도한다. 또 어떤 이들은 모든 걸 포기한 채 방관자로 살기도 한다.

우리는 늘 결과만으로 판단한다. 고로 김옥균은 실패자고 역적이며, 나아가 비극의 주인공이라 기억한다. 다만 어쩌면 중요한 것은 '시도'와 '의지'였는지 모른다. 사실 진짜 변화는 늘 앞선 사람들의 피 위에 이루어졌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권리가 모두 당연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새삼 많은 생각이 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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