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을 연결하는 최소한의 양자역학 - 지구 생물부터 우주 행성까지, 세상을 해석하는 양자역학 이야기 최소한의 지식 4
김상협 지음 / 지상의책(갈매나무)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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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 앞뜰'에 나란히 있는 두 개의 창, A와 B가 있다. 목격자가 없는 상황에서 한 '범인'이 건물 안으로 침입했다. 범인은 창 A와 B 중 어느쪽으로 침입했을까.

논리적으로 A와 B 둘 중 어느곳으로 침입해야 하지만 '전자'라는 범인은 '두 창'을 동시에 통과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범인인 전자'가 A 창에 있었다면 B 창에는 없어야 하고, B 창에 있었다면 A 창에는 없어야 한다. 그러나 사건 당시 목격자는 아무도 없었고 목격되지 않은 상황에서는 두 창을 동시에 지나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그런 일을 본 적 없다.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과 '그런 것을 본 적 없다'는 것은 완전히 다르다.

"어떻게 입자가 동시에 두 군데 있을 수 있죠?"

"왜 관측하면 결과가 바뀌는거죠?"

이 질문에 한 과학자가 답했다.

"이해하려고 하지 마시오. 그냥 그렇게 작동할 뿐입니다."

그럼에도 재차 이해를 시켜 달라는 말에 덧붙였다.

"우주는 당신을 이해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오."

양자가 가지고 있는 역설에 대한 이야기다.


전자는 A도 아니고 B도 아닌 것이 아니다. A이면서 동시에 B인 상태로 존재하는 것이다. 문제는 이후다. 우리가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다른 가능성은 무너지고 하나의 결과값만 남는다. 관측이 결과를 바꾼다는 의미다.

이는 역시나 비상식적으로 작동하는데, 인간은 여기서 '비상식적'이다,라는 말은 '자연의 존재'를 부정하는 말이 된다. 인간의 '인지력'을 절대값에 둔 커다란 오류다. 이 얼마나 대단한 오만인가, 인간의 '인지력'과 '우주의 이치' 중 '우주의 이치'가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라고 믿는 판단 말이다.

다행히 과학자들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태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쪽을 선택했다. 양자역학은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기술과 예측의 대상'으로 둔 것이다. 그것이 '왜' 그렇게 되는가,를 생각하는 대신, 수학적으로 증명하고 결과가 맞는지 확인할 뿐이다.

하나의 전자가 두 곳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는 것, 관측이 결과를 바꿀 수 있다는 것, 확률이 실재를 대신한다는 것.

양자역학은 '수천년 넘은 동양철학' 같은 모호함과 궤를 같이한다. 이 아이러니함은 21세기에 가장 정밀한 과학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고전물리학을 보면 직관적으로 '그럴 수 있겠다'하는 이해의 범주 내에서 발전해 왔다. 이는 아무리 천재 과학자들의 발견이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마주하는 가시세계에 관한 이야기라서 그렇다.

그러다 20세기에 이르면서 '양자역학'부터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굳이 따지고 들자면 X축도 Y축에도 속하지 않은 그 모호한 어딘가에 존재하는 '존재'에 관한 이야기.

그러나 좌표평면상 'X축'과 'Y축'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 경계 어디선가에도 분명 존재할 수 있다.


이처럼 수학이라고 하는 언어로 밖에는 관측할 수 없는 '미세한 세계'가 언제나 신비스럽다.

'김상협 작가'의 과학을 연결하는 최소한의 양자역학에서는 아주 쉽고 재미있는 방식으로 '양자역학'의 개념과 역사를 설명한다.

여기에서 들고 있는 많은 예시들은 물론 작가의 말에 따르면 완전히 상황에 부합하지 않지만 충분히 흥미를 줄 수 있고 이해할 수도 있다.

책은 '무시무시한 양자역학'을 다뤘다는 주제와 다르게 굉장히 쉽고 가볍다. 완독하는데 시간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는다. 다만 주제 하나하나마다 덮어놓고 생각할 거리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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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불행사회
홍선기 지음 / 모티브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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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대 초반 '간 나오토' 일본 전 총리가 취임 직후 기자회견 등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장과 희망이 아니라 최소한의 불행이라도 막자'

이것이 '최소 불행 사회'의 의미다. 최선이 아니라면 차선이라도, 차선이 아니라면 차악이라도 선택해야 하는 것이 이치다. '최소불행'이란 이미 예견된 암울한 미래에서 그나마 나은 선택을 하자는 의미로 사용된다.

시스템이 붕괴하는 사회에서 '개인의 승리'는 어떤 의미를 지니겠는가.

흔히 '각자도생의 사회'라고 한다. '시스템'이 우리를 지키지 못하게 됐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되는가,를 말한다. 도서는 시작과 동시에 '200억 자산가 김 회장'과 '반지하 독거노인 박 씨'의 이야기를 하며 '시스템'이 붕괴될 때, 승자와 패자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질문을 던진다.

'노동 수익'으로 '서울 아파트'를 사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면서 대부분의 젊은 층들은 '내집마련'이라는 이상보다는 '비트코인'이라는 대안을 찾았다. 소수점 여덟번째 자리까지 나눠 0.000000001 BTC라도 구매하는 것이 오늘과 같은 시대의 상징이다.

거대한 자본이 아니라도 언제든 '자산시장'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이라 그럴 수도 있겠다. 다른 자산에 비해 매매가 자유롭고 현금화 쉽다는 매력도 작용했을 것이다. 스마트폰 하나로 계좌를 만들고 단 몇 만원으로도 진입할 수 있따.

부동산처럼 계약서를 쓰지 않아도 되고, 은행처럼 심사를 통과하지 않아도 된다. 입장권의 문턱이 한없이 낮아진 이 시장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한때 '벼락거지'라는 말이 유행했다. 모든 자산이 동시에 상승하는 시장에서 이 게임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을 부르는 말일 것이다. 이것이 어쩌면 한국과 일본 사회가 놓인 '최소한 불행'이라도 피하자는 차악의 선택과 다르다고 할 수 없을 것 같다



책은 일본 버블 붕괴 전 후의 다양한 '사회 현상'과 이를 비추는 용어를 소개한다. '일본 사회'가 그래왔다는 이야기를 진행 할수록, '우리 사회'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루키'의 책에서 가지고 왔다는 '소확행'이라는 말이 단지 물리적으로 가까운 이웃나라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유행한 것은 아닐 것이다.

요즘 인터넷을 보면 '두바이 쫀득 쿠기'가 한창 유행이다. 본래 '경제'가 안 좋을 수록 '명품 향수'와 '립스틱'이 잘 팔린다고 한다. 이를 '립스틱 효과'라고 한다. 이는 비교적 낮은 비용으로 명품 브랜드를 경험하고 취향과 정체성을 드러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산을 보유하지 못한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참여'다. 소유는 불가능해도 '체험'은 가능하다. 시스템이 제공하지 못하는 계층 이동을, 소비를 통해 우회하려는 심리다.

일본은 버블 붕괴 이후 장기 불황 속에서 잃어버린 30년을 보냈다. 부동산과 주식 가격이 급락한 이후, 기업은 투자 대신 유보를 선택했다. 가계는 소비 대신 저축을 선택했다. 개인으로 보기에 꽤 적절한 선택들이다. 다만 이 선택이 '집단 내 시스템'에서 작동할 때는 아주 재앙적인 상황이 되기도 한다.

위험을 회피하는 선택이 반복되면서 도전과 혁신이 둔화되고 소비는 위축됐다. 임금은 동결되고 사회 전체의 활력이 사라졌다. 합리적 개인이 모여 비합리적 결과를 만들어낸 셈이다.

이 지점에서 '최소 불행'은 생존 전략이 됐다. 손실을 막는 것이 목표가 되고 성장은 부차적인 문제가 된다. 즉 확장이 아니라 '방어'에만 치중을 하게 되는 '수동적인 시스템'으로 체제가 바뀌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개인의 승리'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산 시장에서 성공한 사람은 역시 존재한다. 그러나 시스템이 약해지면 그 승리는 점차 고립된다. 사회 전체의 기반이 약해지면서 자산의 가치 역시 장기적으로 유지되기 힘들다. 결국 개인의 성공 역시 시스템 위에 있다는 의미다.


가치에 대한 투자가 아니라 단순히 '수요와 공급'의 원리로만 상승하는 자산은 '적정가치'를 알기 힘들다. 고로 그런 자산은 '불확실성'이 높아 가격변동성이 커진다. 물론 현명한 일부가 초기 투자를 통해 부유하게 되는 신화는 자산의 다양성을 중시하는 다원화 자본주의 사회에서 꼭 필요할지 모른다. 다만 사회 구성원 다수가 이런 자산에 목을 매고 있는 일은 적절치 않아 보인다.

시스템이 약해질수록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을 갖고 '선택'을 할 수 있다. 그 선택은 개인에게는 하나의 선택이겠지만 그것에 시스템 내에서 수천만, 수억의 선택이 되면 시스템의 체질이 변화하게 된다.

버블 역시 같은 맥락일지 모른다. 노동을 통해 축적하기 어려운 시대에, 자산 시장을 통해 도약하려는 시도다.

다만 생산보다는 거래가, 혁신보다는 시세가 더 큰 관심을 받게 되면 기업은 실적보다는 주가관리에 집중하고 개인은 역량 개발보다는 '시장 타이밍'을 찾기에 몰두한다. 이때 사회의 에너지는 미래를 만드는데 사용되지 안혹 현재의 가격을 예측하는데 소모될 뿐이다.

다시 본래의 주제로 돌아와서, '최소불행사회'는 '일본'의 과거와 현재를 통해 지금의 우리에게 질문을 하는 책이다.

'위기의 시대'에서 국가가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태도인 '최소불행사회'라는 타이틀을 과연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인가, 경계해야 할 것인가.

책은 쉽고 빠르게 현상을 훑거 넘어가지만 그 이면에 깔린 구조적인 질문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생각이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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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
전대호 지음 / 해나무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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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다보면 선호하는 결의 출판사가 생긴다. 개인적으로 '해나무' 출판사의 책은 거의 실패해 본 적이 없다. 물론 해당 출판사의 모든 책을 읽어 본 것은 없으나 읽다 보면 '아, 해나무 책이구나' 싶은 책들이 있다.

지금까지 읽은 '해나무'의 책은 이렇다.

'퀀텀의 세계', '공기전쟁', '우리에게 남은 시간', '분자 조각가들', '스몰 윈', 바다의 천재들', '해부학자의 세계', '우리는 어떻게 움직이는가'

어느 하나 거를 만한 책이 없다.

너무 무겁지도 너무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수준으로 '과학'과 '인문학'을 오가며 흥미를 불러 일으킨다. 이번 책인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 시간'도 그렇다.

일상을 살다보면 꽤 '현실'이 주는 무게에 짓눌릴 때가 있다.

오락가락하는 경제 그래프, 주가의 등락이나 환율, 다양한 국제 관계를 비롯해 현실에서 '생업'과 '커리어', '육아', '관계'에 이르기까지...

그런 것에서 훨씬 벗어나 '인류'가 그려온는 '과학사'를 듣고 있으면 마치 태양계를 벗어나며 보이저 2호가 찍어 보낸 '창백한 푸른점'처럼 모든 것이 작고 연약하게 느껴진다.

'마리 퀴리'는 자신이 아는 라듐에 대한 모든 지식을 '인류'에게 '공짜'로 공유했다. 금전적 이익이 과학정신에 반한다는 판단 때문이다. 그녀는 '이 역사상 가장 비싼 중 하나'가 될 수 있는 '특허'를 포기하고 15분 후, 자전거를 타고 클라마르 숲으로 가서 야생화를 땄다.

여기에 앉아 천원과 만원에 예민해져 있는 내가 부끄러워지는 장면이다. 과학사를 들여다 보면 거기에는 온갖 성공과 실패가 등장한다. 또한 '과학'이 주는 '차가움'이 아닌 몹시 인간다운 '장면'들이 있다. 이것들이 그 어떤 소설보다 나에게 감동과 영감을 주는 경우가 있다.


진부하기 그지 없는 '취미생활 : 독서'는 가끔 '무취무색인'임을 보여주는 자기 설명 중 하나다. 이 정적인 취미에서 최근 몇년 간의 고민이라면 '전자책'과 '종이책'의 갈등이다.

개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통신사 요금에 '밀리의 서재'가 포함되어 있다. 아이들을 위해 '윌라오디오북' 또한 구독중이다. 피치 못하게 '이북'은 내 생활에 침투해 왔다.

개인적으로 '전자책'은 '종이책'을 완전히 대체 할 수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종이책이 주는 물성은 단순히 손끝에서 만져지는 '촉감'을 넘어선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편지'라는 책은 18년 전, 군대에서 읽었다. 당시 나는 운전병이라 책을 세워 놓고 책을 읽을 시간이 꽤 많았다. 당시 얼마만큼의 페이지를 왼손으로 쥐고 있었고, 얼마만큼의 페이지를 왼손으로 잡고 있었는지. 당시 어느 페이지에서 내가 고개를 들었을 때의 장면. 이런 것들이 지금도 훤한다.

책이란 쉽게 말해서 단순히 정보를 입력하는 것이 아니라 '삶'에 녹아 나의 삶과 '작가'의 글이 마구 혼합되는 일이다.

마치 장자의 '호접지몽'처럼 책을 덮었을 때의 나와 책속에서 이야기를 펼치는 '화자' 중 누가 진짜인지 마구잡이로 섞여지는 일이다.

어떤 경우에는 마치 내가 그 간접경험을 했는지, 내 직접경험이 어디서 본 간접경험인지 헷갈리는 경우도 있다.


인류가 쌓아 놓은 방대한 과학사를 읽어가면서 나는 나의 자아를 100년의 시간, 대한민국이라는 장소에 한정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독일'과 '네덜란드', '미국'을 뛰어 넘어, 인종과 언어를 초월한 '자아'가 만들어지는 느낌이다.

'기적의 해'라고 일컬어지는 1905년, 다수의 물리학자들이 당시 광양자의 논문에 회의적일 때, 막스 플랑크는 '특허청'에서 일하는 '아인슈타인'의 재능을 초기에 알아보고 공개적으로 지지했다.

플랑크는 학회와 강연에서 이를 옹호했고 이어 아인슈타인은 '베를린'으로 초빙되어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 회원이자 베를린 대학 교수로 초빙된다. 여기에는 플랑크의 추천이 있었다.

과학도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이다. 위대한 업적은 혼자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거기에는 '사람'이라는 매개가 반드시 필요하다. 만약 그때 플랑크가 침묵했다면, '특허청 직원의 논문'은 그저 외피에 갇혀 사라졌을지 모른다.

이런 것을 볼 때, 과학은 '차갑다'는 시선은 분명 잘못됐다는 생각이든다. 과학은 굉장히 인간적이며 때로는 예술보다 더 많은 온기를 품고 있은지도 모른다.

책을 읽고 나서 이런 생각이 든다. 과학을 인간답게 읽는다는 것은 어쩌면 꽤 당연한 이야기였을 수도 있겠다...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마지막 책장이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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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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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최고의 괴테 연구가 '히로바 도이치'는 결혼기념일에 한 식당에 방문한다. 거기서 '홍차 티백'에 적현 괴테의 명언을 발견한다.

"사랑은 모근 것을 혼동시키지 않고 혼연일체로 만든다."

이 문장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괴테 연구가로써 평생을 공부를 했음에도 '그 문장'이 괴테가 한 말이 맞는가, 확신을 갖지 못한다. 그 뒤로 문장의 출처와 의미, 사유를 찾기 위한 다양한 과정이 잔잔하게 이어진다.

하나의 문장에 대한 깊은 사유를 우리는 얼마나 하고 살아가는가, 그것은 얼마나 중요한가, 역설적이게도 깊은 사유를 하는 동안 우리는 얼마나 더 중요한 것들을 놓치가 살아가는가, 그런 것들을 생각하게 한다.

개인적으로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라는 책의 특이한 점이라면 '번역체'다. 문장을 읽어 내려가며 꽤 다양한 사람이 비슷한 생각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인터넷상에서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없었다.

책을 읽다보면 아무리 잘 번역한 글이라고 하더라도 '원작자'의 '모국어'가 가지고 있는 특유의 '문체'가 녹아 있기 마련이다. '독일스러운 문체'가 있고, '프랑스스러운 문체'가 있고, '일본스러운 문체'가 있다.

소설을 읽는 내


내, 이 책의 원작이 '일본'이라는 생각을 전혀하지 못했다. 한일 양국가 문체의 특징이라면 대체로 주술관계가 짧다. 게다가 일본책의 특징이라면 글이 직선적인 느낌이 있다. 이 책에서는 문장을 풀어가는 과정이 다소 '영미권 번역체'스럽다고 생각했었다.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해 봤지만, 어쩐지 혼자만 느꼈던 모양이다.

왜 이 소설은 일본 소설 같지 않았는가,

대체로 감정이나 사유가 직선으로 제시되는 일본 문학의 특징이라면 독자가 인물의 생각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다만 그 생각을 해체하도록 요구받지는 않는다. 이것이 내가 느낀 일본 문학의 강점이다.

'명료함'

다만 이 소설은 그렇지 않았다.

문장은 결론을 향해 빠르게 달려가는 느낌이 없다. 모든 문장이 '보류'된 상태로 다음을 향해 넘어가는 느낌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방식은 '영미권 번역서'에서 자주 느껴졌었다.

다시 작가 '스즈키 유이'를 살펴봤더니, 세이난가쿠 대학에서 외국어학연구과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단다.

어찌됐건, 다시 소설로 돌아와서 주인공 '도이치'는 그 문장이 괴테의 말인지 단정하지 못한다. 출처를 좇고 번역을 비교하고, 맥락을 살피는 과정은 있으나 명쾌한 해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 그 문장을 둘러싼 시간과 일상, 관계를 조용하게 보여 줄 뿐이다. 결혼기념일의 식사, 아내와의 대화, 학자로서의 태도.


무언가 특별한 '스토리'를 기대한다면 이 소설이 성격과 다를 수 있다. 이 소설은 빠르지 않고 결론보다는 유보된 설명이 많다. 이것이 우리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어렴풋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것에 대해 깊이 몰입하다가도 일상을 살아가고, 다시 약몰입 상태로 두었던 주제로 다시 돌아가는 '화두'에 관한 이야기.

이 소설을 읽고 '무언가를 읽었다'라는 느낌보다는 '품격 있는 사람들의 대화'에 함께 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살면서 언제 이런 주제를 가지고 이런 깊은 사유의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겠는가, 하며 헛배부르지 않고 든든한 한끼를 챙겨 먹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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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의 힘 곤도 마리에 정리 시리즈 1
곤도 마리에 지음, 홍성민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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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도 마리에'는 꽤 유명한 인물로 '일본'에서만 인지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꼭 정리에 관련된 책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이름을 어렵지 않게 접할 수 있다. '정리'에 관한 책을 읽다보면 피할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본래 정리에 관심이 있는 편은 아니다.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정리'에 슬슬 관심을 가지게 됐다. 나이가 마흔 줄에 들어서면서 느끼게 되는 것이 하나 있는데 점차 '나'에 대해 뚜렷해진다는 점이다.

'나'에 대해 뚜렷해진다는 것은 이렇다. 보통 사람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청소년 시기에는 '가족'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가령 부모님이 먹는 '식사'를 그대로 먹게 되고 집에서 보는 TV프로그램을 보게 되며, 사용하는 물품과 씻는 빈도, 수면 시간 등의 영향을 환경으로부터 받는다. 부모님의 경제력이나 철학에 따라 소비패턴도 달라지고 학교나 친구들도 달라진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가면서 '부모님'의 영향력에서는 완전히 벗어나고 자신의 선택으로 환경을 채워 나가기 시작한다.

어떤 물건을 사고 어떤 물건을 버리고, 어떤 곳으로 이사를 가고, 어떤 직업을 선택하는 등. 성인이라면 당연히 스스로 하는 일들로 환경을 채우게 된다.

가만 생각해보면 내가 자랐던 환경과 지금 내가 살고 있는 환경은 꽤 다르다. 과거에 '나'는 꽤 불편하다고 생각해던 것들을 '집' 안에 들이지 않고, '와, 이거 뭐지?'하는 물건은 집안으로 들어온다.

일과를 마치고 '서점'에 들러 책을 구경하는 것을 '행복의 시간'으로 여기는 편이라 자연스럽게 집에 책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책이 채워지다보니 '귀'를 시끄럽게 하던 'TV'는 'LG스탠바이미'로 두어 옷장 구석에서 좀처럼 나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거실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소파'이며 반드시 '리클라이너'에 '패브릭'이어야 한다. 책을 받쳐 볼 수 있는 독서 쿠션이 반드시 필요하고 '식탁'이나 '책상'에는 북스탠드가 있어야 한다.

서론이 길었다. 아무튼 이렇게 환경과 주변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꾸밀 수 있는 것은 '성인'의 특권 같다. 다만 본의아니게 내가 좋아하는 이 환경과 공간을 침범하는 물건들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이들의 '스티커', '고장난 장난감', '출처를 알지 못하는 충전선', '어떤 제품의 사용설명서', '고지서', '치약뚜껑', '구멍난 양말' 뭐 이런 것들이 꾸준히 나오기 마련인데 정기적으로 의식하고 버리지 않으면 금방 내 공간을 침범하여 갉아먹기 시작한다.

'책'을 좋아하다보니, '뇌'속에 정보가 어지러운 상황을 피하고 싶어진다. 온갖 광고, 사용설명서를 포함한 불필요한 정보가 많아지니 피로도가 쌓인다. '귀'와 '눈'이 예민해지다보니 자칫하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지치고 피로하다. 눈을 어디에 두어도 잡념을 떠올리게 하는 물품들이 가득하다.

그래서 작정하고 거의 모든 걸 버리기 시작했다. 집안에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만들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기 시작했다. 그처럼 '하나하나' 버리다보니 '공간'이라는 것이 '신체'나 '머릿속'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건 아무리 좋은 음식을 먹어도 신체는 '노폐물'을 배출해야 한다. 또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머릿속은 '상념'과 '잡념'이 쌓여간다. 고로 정기적으로 운동을 하거나 '명상'을 하여 '리프레쉬'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언제 그랬는지 모르게 몸과 머릿속은 노폐물과 잡념으로 가득차게 된다.

탁한 물병을 눈 앞에 두고 세상을 살아가는 것처럼 어지러운 것들을 함께 이고지고 갈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했다. 고로 정기적으로 '정리'에 관한 책을 꺼내 읽는 편이다. '손웅정' 작가의 책을 보면서 이런 생각은 '확신'으로 바뀌었는데 그렇다고 그전도의 경지로 하지는 못하고 있다. 아이들이 이는 집이라 아직은 모든 것을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곤도 마리에'의 책을 읽다보니 이런 말이 자주 나온다. '설레는 것만 남기고 버려라'. 행복은 크게 한방이 아니라 작고 소소한 것이 빈번하게 올 때 얻을 수 있다. 실제로 영어에서는 '행복'과 '만족'이라는 단어를 함께 사용한다. 만족이라는 단어는 크기가 '꽉차있다'라는 의미로 사실 채울 수 있다면 작은 것을 채우는 것이 더 수월하다.

아무리 좋은 것들에 둘러 쌓여 있더라도 먼지가 자욱하면 그것을 발견하기란 쉽지 않다. 고로 '곤도 마리에'의 생각은 이렇다. 자신을 '설레게 하는 물품'을 제외한 나머지를 모두 버려라, 그렇게 하면 나는 나를 설레게 하는 물품들에 둘러쌓여 있고 어디에 있거나, 어디에 눈을 돌려도 나는 '행복'이라는 감정, '만족'이라는 감정에 둘러 쌓여 그것에 쉽게 노출되게 된다.

언어를 배우는 가장 중요한 요건중 하나는 '노출'이다. 미국에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영어'가 늘고, '한국'에서 태어나면 자연스럽게 '한국어'가 늘게 된다. 노출이란 '노력' 없이 어떤 것을 얻는 가장 근본적인 요건이다.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집안에 노폐물이 많이 쌓여 있구나, 이것저것 집안 구석구석을 둘러봤더니, '없어도 문제가 없는 것들'이 나의 생활 공간을 좀먹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을 버려야 할까,를 고민하지 말고, 무엇을 남겨야 할까, 를 고민하며 틈틈히 싹, 하고 정리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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