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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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 삶의 생명력을 느껴라.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사라진다.'

매순간 온전한 것은 없다. 무엇하나 머무는 것 없도 없다. 모든 것은 흐른다. 감정, 시간, 상황. 흐르는 어떤 것을 가르키며 '무엇'이라 이름 짓고 나면 그것은 머물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다만 그것은 흐른다. 가르키는 바다는 한번도 같은 모양이었던 적 없다. 가르키는 산도 한번도 같은 형태였던 적 없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건 변한다. '나'도 변하고 '상대'도 변한다. 보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들이마신 숨과 내뱉은 숨도 그렇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함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변화 속에서 그것이 유한하고 유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일회적이다. 고로 모든 것은 희소하고 소중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인생의 최악은 고통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자각을 잊는 것. 그것이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무감각에서 나온다. 무감각은 무생명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살면서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함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에 반해도 모자른 시간, 대부분은 무생명을 사랑한다. 다수의 남성은 이성보다 '스포츠카'에 매력을 느끼고, 다수의 여성은 '이성'보다 '명품가방'에 매력을 느낀다. 다수의 부모는 '자녀의 존재'보다 '복종'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소유'할수록 존재감을 확인한다. 세상이 소유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는 것은 그것이 '무생명'이기 때문이다. 무생명은 기본적으로 복종한다. 돌은 던지면 날아가고 종이는 접으면 접힌다. 생명은 이에 반한다. 생명은 발로차면 꿈틀거리고 던지면 다시 돌아온다. 무생명과 생명의 차이점이라면 '자율의지'다. 자율의지는 고로 생명을 생명답게 만든다.

'너를 사랑하지마라. 너 자신이 되지마라. 너 자신보다 중요한 것에, 너의 바깥에 있다. 권력이나 그 권력의 내면화인 의무에 복종하라.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마라'

'이기심'은 현대 윤리에서 '죄악' 시 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은 '이타심'을 강조한다. '남을 돕고 살아라. 규범과 규칙을 지켜라. 양보하고 공유하라'. 다만 이처럼 '이기심'을 죄악 시 하는 것은 자칫,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부정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을 근본으로 한다. 이기심은 지속을 가능케 한다. '이타심'은 듣기 좋지만 결국, 내면보다 외부에 중요도를 둔다. 스스로 외부의 상황에 기민하고 자신이 되기보다 다른 이와 관계 설정을 우선 시 한다. 한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은 기본적으로 이런 공동체, 집단 생존에 중점을 두는 사회문화가 형성됐다. 이처럼 중요도를 외부로 두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부정된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 WHO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4위, 일본의 자살률은 세계 10위를 기록한다.

칼뱅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 칼뱅(Jean Calvin)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개신교 분파다. 신의 은혜와 축복이 오로지 선발된 사람에게만 내려진다고 봤다. 신이 택한 자들이 근면하고 절약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북미 등에서 퍼져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서구 정치, 경제, 사회문화에서 그 영향을 미친다. 이런 개인주의적인 태도는 경제적으로 이용되면 현대 자본주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된다. 칼뱅주의에 따르면 개인의 경제적 성공은 사회적 번영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상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는 '이기심'과 거리가 멀다. 신에게 부여받은 어떤 것을 소중이 하는 것으로, 그것은 '생명중시'와 가깝다.

레코드 음악을 플레이하면 음악이 재생된다. 이것은 이미 녹음된 음악이 재생되는 것이지 레코드가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레코드와 같이 입력장치가 있다. "잘 지냈어?"라고 물으면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다수의 사람은 "잘지냈어"하고 답한다. 이는 녹음된 음악을 재생하는 역할일 뿐, 음악을 연주한다고 볼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의 경이로움은 '자율의지' 즉, 주체성에 있다. 입력된 정보를 단순히 입으로 읊어 대는 수준의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말에 주체성을 담는 것이다. 사람은 오롯하게 깨어 있다고 착각하지만 대부분 x값에 y이 대응되는 함수 원리를 따를 뿐이다. A라고 물으면 B라고 답하고, C라는 상황이 주어지면 D라고 자동으로 답하는 기계 수준의 삶을 산다. 고로 '수동적'이고 '이타적'인 사고방식은 '복종'이라는 심리 현상을 만들어 낸다. 외부의 권력이나 타인의 명령, 상황과 현상이 주는 문제에 정해진 값을 그대로 내뱉으며 기계 같은 삶을 산다. 이처럼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간 다수에 속하는데 그 광기가 역사에서 이용되면 파시즘으로 발현된다. 신의 권위를 이용하거나, 법과 국가의 권위를 이용하여 타인을 조종하는 현상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독특한 종교에 심취하거나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자율의지를 상실하고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는 경우다. 현대인은 어떻게 자신의 삶에 멀어지는가. 어쩌면 생명에 대한 경시. 그것 때문이 않을까 싶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 때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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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허겁지겁 먹고 말았습니다
린 로시 지음, 서윤정 옮김 / 책이있는풍경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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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차는 '자율주행' 기능이 달려 있다. 자율 주행은 꽤 똑똑하다. 저절로 앞차와 간격을 맞추고 차선을 지킨다. 때로는 주차가 되는 경우도 있다. '자율주행'이라는 기능은 꽤 편리한 기능이지만 믿고 맏기기 힘들다. 그 믿음의 담보가 목숨이기 때문이다. 무척 편리한 이 기능은 말 그대로 '보조'로 밖에 사용할 수 없다. 누군가에게 '자율주행을 보여 주겠노라' 말하면 손과 발을 떼고 엉거주춤한 상태로 수초 혹은 수분 정도 지켜본다. 그것이 '자율주행'에게 맡길 수 있는 정도의 신뢰다. 사람은 스스로 주체적으로 살고 있다고 믿지만 그렇지 않다. 한번도 주체적인 삶을 살아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아주 약간만 느껴보고 죽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뇌는 '자율주행' 기능이 있다. 이 자율주행은 '무의식'이 담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이 관장하는 자율 주행에 몸을 맡기고 '의식'은 다른 곳으로 떠난다. 언젠가 때가 되면 저절로 움직이는 것들이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하던 행동을 반복한다.

물을 한 잔 들이키고 화장실로 들어가서 칫솔을 입에 문다던지, 어떤 이들은 본인도 모르게 잠자리에서 SNS를 확인한다. 누군가는 눈을 뜨지마자, 허겁지겁 상황이 주어진 행동을 취하기도 한다. 이들은 과연 주체적으로 살고 있을까.

버릇이 되다시피 깊게 배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인(印)이 박혔다.'라고 한다. 인(印)은 도장을 뜻하는 말로 하도 여러 번 되풀이해서 그것이 '뇌'에 각인되어 버린 것이다.

비가 내리는 겨울, 혹한기 훈련을 했던 적 있다. 혹한기 훈련 중에는 군용 텐드를 설치하고 그 주변으로 물이 흐르는 선 긋어준다. 물줄기는 처음에는 아주 앏게 그 자국을 따라가지만 시간이 지나면 그것은 '길'이 된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면 물은 그 자리를 반복하여 지나가고 결국 그것은 '인(印)'으로 남는다. 뇌도 비슷하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라도 하나의 실선이 긋어지면 아주 얇게 자국을 따라간다. 그 몇 번이 반복되면 그것은 '길'이 되고 결국 인(印)으로 남는다. 한 번 물길이 크게 트이고 나면 물길을 다시 바꾸는 것은 쉽지 않다. 다른 길을 내는 것은 거의 초인적인 힘을 주어야 한다. '시간'이 무념무상히 만들어낸 현상을 인간은 인고의 세월을 견뎌내어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래된 숲길에는 사람 다닌 자국이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길'이 됐다. 처음에는 한 명, 다음에는 두 명이겠지만 점차 그 길은 두터워진다. 언젠가 날을 잡고 한 사람이 최소한의 시간으로 같은 길을 내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결국 사람은 다님길로만 다닌다. 그것을 '습'이라 한다. '습'은 '인'으로 박힌다. 그러면 결국 인간은 그저 박혀진 '인'데로 '습'을 행하며 산다. 다님길은 점차 넓어지고 커진다. 고로 더 쉽고 빨라진다. 무의식은 그렇게 작동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3살부터 새겨 온 수많은 행동 중의 반복을 '인'으로 박아두고 산다. 고로 스스로 생각하여 사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지나온 물줄기대로 흘려가며 산다. 삶의 축복은 주체성에서 나온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축복이다. 다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마치 반쯤 죽어 있는 좀비처럼 '본능'과 '무의식'에 이끌려 살 뿐이다. 머리를 감을 때, 머리 감는 손가락 끝은 머리감는 일에 충실하고 있나. 양치질을 할 때는 칫솔모가 치아 사이 사이에 잘 닦아내고 있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것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다. 스마트폰에 눈을 붙이고 있거나 귀를 붙이고 있다. 지나간 어제를 생각하고 다가 올 내일을 걱정하며 이를 멀티태스킹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멀티태스킹에 능숙하다고 착각한다. 다만 그것은 착각이다. 애초에 뇌는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의식을 가지고 해야하는 일에는 확실히 멀티태스킹이 불가능하다. 의식은 시계바늘과 같다. 딱 하나의 지점만 가르킬 수 있다. 2시를 가르키며 동시에 4시를 가르키는 일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의식이 모든 일을 다 할 수 없기에, 인간의 뇌는 그 중요도에 따라 일부 업무를 '무의식'에 전담시킨다. 바로 '자율주행'이다. 자율주행은 '의식'이 아니다. 즉, '사람'이 아니다. 쉽게 말해 과거 데이터를 통해 학습된 반복을 이행할 뿐이다. 삶은 어느 정도 과거의 데이터가 유용하게 사용된다. 다만 그것이 곧 미래도 책임지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당연한 일임에도 우리는 미래와 현재를 모두 자율주행에 맞춘다. 주사위 굴리기에서 지난 3번의 독립시행이 4번 째 시행에 영향을 주는 것은 아니다.

밥을 먹을 때, 밥알의 식감은 어떤가. 혹은 목 넘김은 어떤가. 그 향은 어떻고 미세하게 올라오는 짜고 달고 신 맛들은 모두 온전하게 느끼고 있는가. 아니면 그저 식사를 무의식에 맡겨두고 TV나 책을 보고 있진 않은가. 멀티 태스킹은 온전해야 할 의식은 '식사'에 0.5 정도를 사용하고 다른 무언가에 0.5 정도를 사용한다. 비워진 각각의 0.5는 무의식이 채운다. 반 좀비 상태로 식사하고 말하고 살아간다. 앉아 있다면 바닥에 닿아 있는 엉덩이의 촉감은 어떤가. 서 있다면 발바닥에 닿는 땅의 감각은 어떤가. 누워 있다면 등에 닿는 내 몸의 무게감은 어떤가. 숨을 쉴 때, 들숨과 날숨은 완전히 들어오고 나가는가. 콧속을 지난 공기가 가슴을 들어 올리게 하고 다시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가. 내 얼굴 근육, 어깨 근유그 다리와 팔 근육에는 의식없이 힘이 들어간 부분은 있지 않은가. 의사가 '식후복용'이라고 적힌 약봉지를 건내주는 것은 그것이 '식사'와 연관되서가 아니라, 규칙적으로 세 번을 나눠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온전히 깨닫는 것은 하루 세번 정해진 시간에 깨닫는게 좋다. 그것이 '식사 시간' 만큼 좋은 게 또 어디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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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김명철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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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철이 나아간다. 멈출 수 없다. 전철을 운행하는 기관사가 자신이라고 해보자. 브레이크가 고장이 났다. 앞에는 선로를 정비하는 다섯 명의 인부가 있다. 그 옆 선로에는 한 명의 인부가 있다. 이 상황에 선로를 바꾸지 않는다면 다섯 명을 치어 모두 사망에 이르게 하고 선로를 변경하면 한 명의 인부만 사망에 이르게 한다. 이 경우 선로를 바꿔야 하는가.

이 질문에 선로를 바꾸는 것은 여지가 없다고 여긴다. 다만 다른 상황을 생각해보자. 나는 전철 밖에서 전철을 지켜보고 있다. 전철은 브레이크가 고장났고 그대로 직진하면 앞에서 일하는 인부 다섯을 치여 사망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만약 내가 옆에 있는 무고한 이를 전철로 밀어 넣어 전철을 멈추게 한다면 인부 다섯은 살아 남을 수 있다. 이 경우 옆에 있는 무고한 이를 전철로 밀어 넣어야 하는가. 누적 판매수 300만부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일부다.

만약 1000명의 무고한 시민을 사망에 이르게 할 테러범을 잡았다고 해보자. 이 테러범은 1000명을 살해할 계획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다고 해보자. 그를 고문해서라도 정보를 알아내는 것은 '정의로운가'. 1000명의 무고한 시민을 살리기 위해 다수는 고문에 동의할지 모른다. 다만, 만약 정보를 얻어내는 유일한 방법이 그의 6살 어린 딸을 고문하는 방법 밖에 없다면 어찌해야 할까. 무고한 6살 딸을 잔혹하게 고문하는 것에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처럼 정의란 명확하게 구분 지을 수 없다. 사회가 정의롭기 위해 어떤 부분에 더 가치를 둬야 하는가.

최대 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것을 공리주의라고 한다. 전체 행복의 총량이 많은 쪽으로 가치 판단을 내리는 것이다. 이는 듣기에 따라 그럴 듯해 보이기도 하지만 꽤 적잖은 오류가 있다. 만약 콜로세움에 관객을 채우고 그 안에 검투사 한 명을 사자와 함께 넣었다고 해보자. 수 많은 관객은 검투사와 사자와의 결투에 쾌락을 느낀다. 여기서 검투사가 느끼는 불행감과 관객이 느끼는 쾌락의 총량을 고려해보면 검투사를 사자 우리에 집어 넣는 행위는 '정의로운' 행위가 된다. 정의란 이처럼 어떤 시기에는 맞고 어떤 시기에는 틀리기도 하며, 어떤 가치관과 철학, 윤리관을 갖느냐에 따라 완전히 다른 것으로 탈바꿈 된다.

1400년 전, 관직에 종사하던 남편을 둔 한 여인은 갑작스러운 비극을 맞이한다. 남편이 딸을 살해하고 이어 그녀 또한 살해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정은 그렇게 완전히 파탄난다. 일가족을 모두 살해한 남편의 살해 동기는 이랬다. 전쟁에 참여 전에 돌아갈 곳이 없는 결사 항전의 배경을 만들기 위해서다. 일가족을 자의로 몰살한 그 가장은 계백장군이다. 자신의 혈육마저 살해하고 참전했던 계백장군의 충정은 때로는 의로움의 상징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때로 사람들은 돈 많은 사람들의 '기부'를 당연시 생각한다. 평생 사용하지도 못할 돈을 쌓아두고 '기아'에 허덕이는 '아프리카 난민'을 외면하는 부자들을 비난한다. 그렇다면 빌게이츠나 일론 머스크, 제프 베이조스와 같은 부자들의 재산을 세금의 형태로 걷어서 아프리카 난민에게 나눠 주면 그것은 과연 '정의'로운가.

마이클 조던을 예로 들어보자, 마이클 조던은 팀내에서 엄청난 연봉을 받았다. 경기에서는 모든 선수가 다 열심히 뛰는데, 조던만 엄청난 연봉 계약을 하는 것은 정의로운 일인가. 그것은 공정한 일일까. 반대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특정 선수의 경기력을 보기 위해 더 많은 티켓판매가 일어난다고 해보자. 그럼에도 모든 선수에게 비슷한 연봉이 주어지는 것은 공정한가.

'정의란 무엇인가'는 '공리주의, 공동체주의, 자유주의' 등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대한 여러가지 논쟁을 꽤 흥미로운 예시와 함께 하여 서술한다. 이 책이 대한민국에서 300만 권이나 팔렸다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깊은 사색을 하고 있는 사회라는 점에서 놀랍고 뿌듯하다. 이미 10년도 넘은 이 책을 당시에는 보지 않다가, 오늘에서야 완독을 했다. 책은 '정독'과 '재독'을 통해 여러번을 사색하고 곱씹어봐야 할 명저다. 지금에서야 읽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고, 지금이라도 읽었다는 점에서 안도감이 남는다. 강력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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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과학 4.0 - 인공지능(AI)에서 아르테미스 프로젝트까지
박재용 지음 / 북루덴스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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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스페이스x가 대형 우주선인 스타십을 발사 했다. 이 스타십은 달과 화성에 화물과 사람을 보내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으며 그 속에는 150t까지 적재할 수 있다. 가히 엄청난 프로젝트다. 그러나 이 스타쉽은 발사 4분 뒤 빙글빙글 돌다가 곧 이어 폭발했다. 이때 굉장히 특이한 현상이 일어났다. 이 엄청난 프로젝트가 실패로 끝나는 순간, 사람들은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큰소리로 환호했다. 다시 말하자면 로켓은 역대 가장 큰 규모의 로켓이며 엄청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간 프로젝트다. 그러나 로켓이 폭발하자 모두가 환호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프로젝트에 함께한 이들에게 실패는 굉장한 의미였다. 발사 후 공중에 띄웠다는 자체로 굉장한 것이라는 의미다. 이들은 과연 어떤 배경을 가졌던 것일까.

그들의 능력은 어느날 갑자기 태어난 것이 아니다. 화성으로 로켓을 쏘아 올리는 신기술 전에는 무수히 작은 실패가 쌓여 있었다. 그들은 초등학교 시절, 삼각형의 넓이를 구하는 문제에서도 실패를 했을 것이고, 중학교 시절 '피타고라스의 정리'에서도 좌절했을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 '미적분'에서도 비슷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이 중 단 한번이라도 실패를 끝으로 여겼다면, 이들은 평범한 '수포자'가 되어 '스타쉽'은 물론 우주공학 회사에 취업 조차 하지 못 했을 것이다. 실패가 무딘 이들이 모여 있는 집단에서는 그렇다. 첫시도의 실패는 당연한 것이며 실패로 인한 깨달음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즐거운 경험일 것이다. 기술이란 이처럼 수많은 실패위에 쌓여진다.

'모빌리티', '우주', '로켓', '정보통신', '생명공학', '기후와 재생에너지' 등 우리의 미래를 결정할 과학들은 실패의 결정판이다. 이 결정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실패로 쌓여 있으나 성공을 이뤄낸다. 결국 성공이란 실패라는 블록으로 만들어지는 구조물인 것이다. 실패가 쌓이지 않으면 성공은 없다. 수 년 전, 테슬라의 전기차가 처음으로 국내에 소개됐다. '테슬라'를 구매하기 위해 200만원을 예약금으로 걸어 놓은 적 있다. 그러다 '현대 코나ev'가 먼저 출시됐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후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은 '예약 취소'다. 하루 빨리 전기자동차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테슬라 예약을 취소하고 '코나ev'를 구매한 뒤 나는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았다. 몇 번이나 리콜에 불려다니며 배터리를 교환하는 번거로움을 견뎌야 했다. 시동이 걸리지 않아 중요한 약속에 참석하지 못하기도 했다. '에러'로 인해 작동이 되지 않는 당황스러운 경우도 많았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전기차로 인해 이동에 대한 부담을 줄였고 엔진오일 교환 기간을 신경쓰지 않게 됐다. 충전시간에 대한 고민은 생각보다 크지 않았다. 이는 생각하는 방식의 차이일 뿐이었다. 귀가 후 스마트폰 충전하듯 집 충전기에 전원을 꽂아 두면 언제나 다음 날, 언제나 완충 상태였다. 미래의 자동차라고 여기는 '전기자동차'는 이제 일상이 됐으며 오히려 내연기관 자동차의 번거로움이 신경쓰인다. 결국 소비자가 기술을 선택하고 기술이 소비자의 생활습관을 바꾸면 그때서야 조금씩 성장한다.

제주에 살다보면 다른 지역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된다. 가령 '풍력발전소'나 '전기차'와 같은 것들이다. 풍력발전기는 대체로 자연경관을 해친다. 다만 제주 '정석비행장' 근처에서 볼 수 있는 '풍력발전기'는 되려 이국적이다. 또한 꽤 현대적이다. 제주도민 혹은 관관객들 중 일부는 일부러 이 곳을 찾아 사진을 찍어가곤 한다. 이 또한 에너지를 생산하는 용도 외에 '관광산업'으로 또다른 수익창출을 해내는 것이다. 제주의 사람들이 특별하게 '친환경적'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러나 제주 소비자들은 자신의 편의에 따라 '전기차'를 구매하고 어떤 이들은 친환경과 관련 없이 '풍력발전기'가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기는다. 현재 제주도 내 전기차는 그 누적 판매가 3만대를 넘었다. 비율로 봤을 때 전국에서 거의 압도적이다. 다른 대부분의 지역은 전기차 비율이 1%대에 머무는 반면 제주는 독보적으로 7.52%를 기록하고 있다. 결국 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소비자'의 니즈이지, 기술이 아니다. 친환경이나 '미래 기술'에 대한 동경은 지나치게 이상적이다. 경제학을 공부한 나로써 '미래 기술'에서 핵심은 '사업성'이다. 사업성은 단순히 독보적인 기술 확보로 유리해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전기차를 구매한 이유도 전기차가 배기가스를 내뿜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소음과 떨림이 없다는 이유 때문이다. 고로 기술은 반드시 사업성을 띄고 있어야 한다. 미래 산업 중 일부는 엄청난 사업성을 가지고 있는 산업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산업도 있다. 단순히 기술을 발전시키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그 기술을 사용해야 할 중요한 명분을 만들어 줘야 한다. 삼성전자는 접어내는 스마트폰을 출시하고도 한동안 고전을 면치 못했다. 사람들이 스마트폰을 왜 접어야 하는지에 대해 공감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를 삼성은 '디자인'으로 해결했다. 사람들은 '플립'이라는 접는 스마트폰을 '신기술'이라고 구매하지 않는다. 그것이 예쁘기 때문에 구매한다. 결국 기술은 사업에서 '설득력'을 갖춰야 번성할 수 있다.

실제로 얼마 전 발표된 챗gpt의 경우에는 엄청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수익성'에 대해 고민이 많다고 한다. 뭐든지 알려준다는 인공지능은 그저 봉사활동을 하고 수익을 만들지 않는다. 수익성이 없는 기술은 아무리 독보적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퇴보한다. 고로 우리 미래 산업에 다양한 기술은 단순히 기술로만 완전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하면 소비자에게 설득력이 있을지를 고민해 봐야 한다. 인공지능과 빅데이터는 사실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체제'의 벽에 걸려 정체되기도 한다. 아이러니하게 14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은 사회주의라는 정치 형태를 만나 기술의 진보를 앞당기기도 했다. 고로 분명 기술은 다양한 변수나 상황에 맞게 진화해 나가야 한다. 우리 미래를 결정할 다양한 과학 기술은 역시 '인문학'과 '철학', '마케팅'을 만나 번영한다. 고로 이과와 문과는 양쪽 날개가 되어 미래 기술을 번영시킬 수 있다. 단순히 기술만 발전할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기술이 사람들의 니즈를 자극할지 다양한 관점에서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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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고 인 더 다크
사쿠라 히로 지음, 김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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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아내가 지하실로 사라졌다. 사라진 이유는 얼굴에 남은 흉터 때문이다. 튀김 요리를 하다가 작은 화상을 입은 것이다. 남편은 내용을 쪽지로 전달 받는다. 금방 나을 것이라고 생각지만 하루가 지나도, 일주일이 지나도, 한 달이 지나도 아내는 올라오지 않는다. 그간 일중독이었던 남편은 일에 심취한다. 그러다 아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떠올려보려고 해도 도무지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다. 결국 남편은 그때서야 아내를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녀는 끝내 지하실에서 올라오지 않는다. 남편이 내려가려고 해도 결코 불을 켜지 못하게 한다. 소설은 평범한 공무원 남편과 프로그래머 아내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그들은 평범한 부부다. 문과적 남자와 이과적 여자가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함께 살아간다. 이 이야기를 작가 '사쿠라 히로'는 '피아졸라'에 빗대어 말한다.

피아졸라는 '탱고'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는 탱고보다는 재즈와 클래식을 열망했다. 그는 주로 바흐나 슈만의 음악을 듣고 재즈 음악을 연주하곤 했다. 그러다 그는 스승 블라제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을 듣는다. 자신이 쓴 작품에 '자신의 것'이 없다는 것이다. 이후로 그는 자신이 좋아하던 탱고, 재즈, 클래식을 접목시켜 새로운 장르를 만들었다. 이렇게 여러가지가 섞여 자신만의 새로운 스타일이 만들어지자 세계는 그를 '탱고의 황제'라고 불렀다. 피아졸라의 '탱고'는 다시 말해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이 섞여 새로운 것으로 재탄생하는 것을 말한다.

문과적 남편과 이과적 아내, 이 둘은 각자 플룻과 기타 연주한다. 이 두 악기는 쉽게 섞여지기 어려워 보일 수 있으나 이 둘은 적당히 섞여 새로운 매력을 만들어낸다. 소설속 가상 부부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관계는 그렇게 형성된다. 수소는 수소와 섞이면 그저 수소일 뿐이지만, 산소와 섞일 때는 물이 된다. 하나는 불을 잘 타도록 하고, 다른 하나는 불을 만나면 폭발력을 키우지만 이 둘이 결합하면 '물'이라는 새로운 성질로 재탄생된다. 전혀 닮지 않은 것끼리 조화를 이루어 살아가면 혼자일 때, 감히 할 수 없는 새로운 시너지가 생긴다.

우리는 때로 '자율 의지'를 갖고 살아간다고 생각한다. 과연 그럴까. 칸트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타율'이라는 단어를 만들었다. 타율이란 외부로부터 주어진 결정에 다라 행동한다는 의미다. 예를들어 당구공을 손에서 놓으면 공은 아래로 떨어진다. 그것은 공의 자율 의지가 아니라, 중력이라는 자연 법칙의 지배를 받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선택을 할 때,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착각한다. 다만 식사를 선택하거나 옷을 선택할 때도 거기에는 자율 의지가 없을 수 있다. 기호라는 것은 애초에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다. 기호는 오래된 외부적 환경에 의해 만들어진다. 즉 자율적 선택이라는 것의 대부분은 전혀 자율적이 않을 수 있다. 때로 자율선택이라는 것은 '자유'가 아니라 '복종의 실천'일 수도 있다.

이런 것을 따지고 보면 때로 '운명론'을 믿는 쪽이 공감되기도 한다. 칸트는 이런 타율적 행동에서 벗어나기 위해 목적에 반응하는 행동을 경계하길 바랬다. 행위에 집중하다보면 그것을 왜 하고 있는지 물어 볼 필요가 있다. 가령, 부자가 되기 위해, 좋은 집을 사기 위해, 여유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등. 다만 이런 것들은 외부에서 주어진 목적에 반응해 행동하는 타율적인 삶이다. 칸트의 말대로 인간의 존엄을 존중하기 휘새서는 그 존재 자체가 목적이어야 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 움직이는 것 이들의 대부분은 생각보다 외부적인 환경에 노출되어 있다.

간혹 유럽이나 미국만 보더라도 인기 가수의 대부분이 '솔로'이다. 다만 한국, 일본, 중국 등 동아시아 지역의 경우에는 '아이돌'이라고 통칭하는 그룹이 '인기'있는 편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강수량이 풍부하여 '벼농사'를 짓던 '아시아'인들이 집단을 인식하는 방식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밀농사를 짓는 이들은 다수의 집단을 한번이 인식하는 일을 어려워 한다. 다만 동아시아 지역의 경우에는 단체로 구성된 집단을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는 인식의 방식이 생겨난다. 고로 취향이라는 것 또한, 아주 오래 지난 조상들의 선택 방식의 영향이지,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취향이 아닐 수 있다.

사람의 '뇌'라는 것이 이처럼 불완전하다. 우리는 행복한 한때를 떠올리는데 1초면 충분하다. 다만 그 행복한 한때의 하루는 대략 10시간 혹은 수년의 시간이다. 고로 인간의 기억은 엄청난 시간을 압축하고 변형해야 기억이라는 것을 할 수 있다. 때로 기억되어 있는 기억장치에서 불러오는 과정에서 인간의 뇌는 컴퓨터처럼 '불러오기'를 통해 과거 기억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때마다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도록 기억을 재구축한다. 이것을 '재구성 이론'이라고 하는데, 고로 인간은 어떤 무언가를 기억하고 떠올릴 때마다, 뇌에 보관된 것이 아닌 새로이 만들어지는 변형된 것을 가지고 오는 것이다. 고로 진실은 언제나 완전하지 않고 그때 그상황에 따라, 그 감정에 따라, 그 시기에 따라 언제든 재구성된다.

내가 바라본 과거와 상대가 바라본 과거가 다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그 둘이 서로 갖고 있던 시간이 같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불러들이는 과정에서 만들어내는 재구성 작품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먹고, 같은 시간을 보내는 가족이라고 하더라도 때로는 아주 다른 기억을 가지는 경우가 많다. 알고 봤더니 자신과 전혀 다른 기억을 가진 상대에게 실망하기도 하고 때로는 미안해 하기도 한다. 관념에서만 존재하는 없다는 것과 있다는 것은 고로 우리의 뇌가 각각 만들어낸 환영일지 모른다. 우주 물리학에서 '다중우주 이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데, 아마 객관적인 우주가 몇개 인지를 차치 하더라도 과연 지구상에는 최소 80억개의 우주는 존재 하는 것 같다. 이제 막 태어나는 우주, 방금 막 사라져 가는 우주 등. 고로 가족이라는 것은 새로운 우주를 하나 가지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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