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여전히 삶을 사랑하는가
에리히 프롬 지음, 라이너 풍크 엮음, 장혜경 옮김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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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순간. 삶의 생명력을 느껴라. 느끼지 못하면 그것은 '사라진다.'

매순간 온전한 것은 없다. 무엇하나 머무는 것 없도 없다. 모든 것은 흐른다. 감정, 시간, 상황. 흐르는 어떤 것을 가르키며 '무엇'이라 이름 짓고 나면 그것은 머물러 있는 것 처럼 보인다. 다만 그것은 흐른다. 가르키는 바다는 한번도 같은 모양이었던 적 없다. 가르키는 산도 한번도 같은 형태였던 적 없다.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것을 알아차리느냐, 알아차리지 못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모든 건 변한다. '나'도 변하고 '상대'도 변한다. 보존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변화한다. 들이마신 숨과 내뱉은 숨도 그렇다. 고로 가장 중요한 것은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변함을 자연스럽게 인정하는 것이다. 다만 변화 속에서 그것이 유한하고 유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모든 것은 일회적이다. 고로 모든 것은 희소하고 소중하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행복이 아니라 살아 있는 것이다. 인생의 최악은 고통이 아니라 무관심이다. 그것이 살아 있다는 자각을 잊는 것. 그것이 무관심이다. 무관심은 무감각에서 나온다. 무감각은 무생명에서 출발한다. 인간은 살면서 살아 있는 것에 감사함과 경이로움을 느낀다.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에 반해도 모자른 시간, 대부분은 무생명을 사랑한다. 다수의 남성은 이성보다 '스포츠카'에 매력을 느끼고, 다수의 여성은 '이성'보다 '명품가방'에 매력을 느낀다. 다수의 부모는 '자녀의 존재'보다 '복종'에 관심을 가지며 그것을 '소유'할수록 존재감을 확인한다. 세상이 소유에 대한 관심이 증폭하는 것은 그것이 '무생명'이기 때문이다. 무생명은 기본적으로 복종한다. 돌은 던지면 날아가고 종이는 접으면 접힌다. 생명은 이에 반한다. 생명은 발로차면 꿈틀거리고 던지면 다시 돌아온다. 무생명과 생명의 차이점이라면 '자율의지'다. 자율의지는 고로 생명을 생명답게 만든다.

'너를 사랑하지마라. 너 자신이 되지마라. 너 자신보다 중요한 것에, 너의 바깥에 있다. 권력이나 그 권력의 내면화인 의무에 복종하라. 이기적으로 행동하지마라'

'이기심'은 현대 윤리에서 '죄악' 시 한다. 어린 시절부터 사람들은 '이타심'을 강조한다. '남을 돕고 살아라. 규범과 규칙을 지켜라. 양보하고 공유하라'. 다만 이처럼 '이기심'을 죄악 시 하는 것은 자칫, 생명에 대한 근본적인 존재 이유를 부정할 수 있다. 모든 생명은 기본적으로 '이기심'을 근본으로 한다. 이기심은 지속을 가능케 한다. '이타심'은 듣기 좋지만 결국, 내면보다 외부에 중요도를 둔다. 스스로 외부의 상황에 기민하고 자신이 되기보다 다른 이와 관계 설정을 우선 시 한다. 한국, 일본과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은 기본적으로 이런 공동체, 집단 생존에 중점을 두는 사회문화가 형성됐다. 이처럼 중요도를 외부로 두면 생명에 대한 경이로움이 부정된다. 2021년 세계보건기구 WHO에 따르면 한국의 자살률은 세계 4위, 일본의 자살률은 세계 10위를 기록한다.

칼뱅주의는 16세기 프랑스 신학자 칼뱅(Jean Calvin)의 교리를 바탕으로 한 개신교 분파다. 신의 은혜와 축복이 오로지 선발된 사람에게만 내려진다고 봤다. 신이 택한 자들이 근면하고 절약하여 재산을 축적하고 이를 통해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번영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이는 프랑스, 스위스, 네덜란드, 스코틀랜드, 북미 등에서 퍼져 전세계적으로 영향을 끼쳤는데 서구 정치, 경제, 사회문화에서 그 영향을 미친다. 이런 개인주의적인 태도는 경제적으로 이용되면 현대 자본주 체제와 밀접한 관련이 된다. 칼뱅주의에 따르면 개인의 경제적 성공은 사회적 번영을 만들어낸다. 이런 사상은 우리가 부정적으로 보는 '이기심'과 거리가 멀다. 신에게 부여받은 어떤 것을 소중이 하는 것으로, 그것은 '생명중시'와 가깝다.

레코드 음악을 플레이하면 음악이 재생된다. 이것은 이미 녹음된 음악이 재생되는 것이지 레코드가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레코드와 같이 입력장치가 있다. "잘 지냈어?"라고 물으면 자신의 감정이 어떻든 다수의 사람은 "잘지냈어"하고 답한다. 이는 녹음된 음악을 재생하는 역할일 뿐, 음악을 연주한다고 볼 수 없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의 경이로움은 '자율의지' 즉, 주체성에 있다. 입력된 정보를 단순히 입으로 읊어 대는 수준의 기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과 말에 주체성을 담는 것이다. 사람은 오롯하게 깨어 있다고 착각하지만 대부분 x값에 y이 대응되는 함수 원리를 따를 뿐이다. A라고 물으면 B라고 답하고, C라는 상황이 주어지면 D라고 자동으로 답하는 기계 수준의 삶을 산다. 고로 '수동적'이고 '이타적'인 사고방식은 '복종'이라는 심리 현상을 만들어 낸다. 외부의 권력이나 타인의 명령, 상황과 현상이 주는 문제에 정해진 값을 그대로 내뱉으며 기계 같은 삶을 산다. 이처럼 주체적이지 못한 삶을 사는 사람은 인간 다수에 속하는데 그 광기가 역사에서 이용되면 파시즘으로 발현된다. 신의 권위를 이용하거나, 법과 국가의 권위를 이용하여 타인을 조종하는 현상은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다. 독특한 종교에 심취하거나 부당한 명령에 복종하는 군인들도 마찬가지다. 모두 자율의지를 상실하고 삶에 대한 주체성을 잃는 경우다. 현대인은 어떻게 자신의 삶에 멀어지는가. 어쩌면 생명에 대한 경시. 그것 때문이 않을까 싶다. 생명은 기본적으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고 주체적으로 삶을 살 때 꽃을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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