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의 아기 - 세계적 심리학자 폴 블룸의 인간 본성 탐구 아포리아 8
폴 블룸 지음, 김수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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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의 가장 오래된 질문 중 하나는 이것이다.

'정신과 물질, 무엇이 먼저인가'

이 질문에는 두 개의 해석이 있다. 하나는 관념론이고 다른 하나는 유물론이다. 관념론은 정신이 우선한다고 본다. 인간의 의식, 사고, 감정, 신념이 세계의 근본이라는 의미다. 반대로 유물론은 '물질'이 우선이라고 본다. 인간의 의식은 '물질적 조건'에 의해 형성된다고 본다.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봤다. 그리고 종교나 도덕도 사회적 산물이라고 여겼다.

이 둘은 물과 기름처럼 섞일 수 없는 완전히 다른 해석이다. 하나는 '사람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라고 말하고, 다른 하나는 '존재하니까 생각한다'고 말한다.

모든 현실은 물질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의식, 도덕, 종교, 예술도 모두 물질적인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즉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그것이 칼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 산업혁명 시기, 사회 불평등과 계급 갈등이 심해져가면서 노동과 계급이라는 물질적인 설명은 아주 유용한 해석 방식이었다. 다만 인간은 단순히 이익을 위해 움직이지 않는다. 인간은 특이하게 이익에 반하는 행동만 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자신을 희생하고, 비합리적인 신념이나 상징을 위해서 목숨도 바친다.

즉 시간이 지나면서 유물론이 이런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데 부족하다는 점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기서 다시 '이원론'이 나온다. 이원론이란 물질과 정신은 둘다 실재한다는 생각이다. 이 둘은 모두 실재하고 분리된 실체다. 육체와 정신은 별개의 성질을 가지고 있고 물질과 관념도 마찬가지다.

몸이 죽어도 마음은 살아남을 수 있다는 발상이다.

이원론은 유물론과도 관념론과도 충돌할 수 있지만 이 둘을 모두 포용하기도 한다. '폴 블룸'의 '데카르트의 아기'는 이 철학적인 논장의 장에 '심리학자로서 개입'한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원론적 직관을 갖고 태어난다. 물질과 정신을 구분하고, 정신적 존재에 더 큰 무게를 둔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 '갓 태어난 아기'가 필요하다.

'아기들은 움직이는 인형을 보면 '의도'가 있다는 생각을 한다.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표정을 보면 '감정'이나 '목적'이 있다는 추론을 하기도 한다. 불공정한 상황에 분노하고 자기를 괴롭히는 사람과 돕는 사람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다. '갓 태어난 인간'의 이런 특성은 '사회화 이전' 즉, '말도 하기 전 아기들'에게서도 발견된다. 다시말해서 인간은 도덕성, 이원론, 영혼과 같은 관념론적인 개념을 '학습'이 아니라 '본능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린시절부터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다'라고 배운다. 혹은 '겉모습으로 판단하지마라'라는 말도 배운다. 심지어 수천년 전에 죽은 누군가의 영혼을 위해 기리는 일도 한다. 우리 인간은 수만 년 동안, 누군가의 마음을 읽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고로 앞서 말한 우리의 본성은 '진화의 과정'에서 얻어진 산물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표정', '말투', '의도'를 본능적으로 해석하려는 심리장치를 진화 과정에서 갖게 되었고, 그것이 곧 정신의 실쟁성을 믿게하는 토대가 되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초월적 진리를 믿었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바는 그러한 초월적 진리는 없다는 것.

'진화'에 의해 만들어진 '두뇌'의 자동 반응을 이야기 한다. 다시말해서 '데카르트의 아기'는 철학적 관념론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보다는 인간이 왜 그렇게 관념론적인 사고 방식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는지를 탐구한다. 우리가 이런 사고방식을 갖게 된 것은 '진화'의 방향이 그랬기 때문이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할 수 밖에 없도록 태어난 존재라는 것.'

우리가 가진 신념과 감정, 정의와 도덕은 어쩌면 어딘가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이미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던 진화의 산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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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챙겨
김영희 지음 / 상상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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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지고 보자면 나도 여행을 참 많이 다녔다.

여행을 취미로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여행을 다닌다'라는 의식도 없던 편이지만 대략 생각해보니 그것들이 다 여행이더라... 싶다.

아마 첫 해외 여행이라면 일본 '큐슈' 지역이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수학여행으로 갔던 곳이다. 나가사키 원폭 박물관을 갔던 기억이 있는데 느낀 바라면, '일본차들은 왜 그렇게 작고 깨끗한가' 또한 질서를 지킬 수 밖에 없을 정도로 좁았던 좁은 길 정도의 인식이었다.

이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뉴질랜드'를 갔다. 목적은 여행은 아니다. 유학으로 갔던 곳에서 '오클랜드'의 구석구석을 다녀왔고 3년을 거기서 거주했다. 이후 뉴질랜드 북섬의 '화카타네' 지역과 네이피어지역에서 수 년을 더 살았고 로토루아 지역에을 방문하여 여행을 했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 서울에서 1~2년을 거주하다가 '랑기오라'와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얼마 간 지냈다. 귀국 직전에는 퀸스타운, 시드니, 싱가포르 등지를 여행이나 사업차 다녀왔다.

시간을 더 보내고 베트남, 태국을 다녀왔고 얼마 뒤에는 중국 상하이를 다녀 왔으니, '저는 여행을 잘 다녀 본 적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할 자격은 없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대체로 '저는 여행을 잘 다니지 않습니다'라고 말하고 사는 타입이었다.

돌이켜보니, 그 밖에 국내여행도 적잖게 다녔던 것 같은데...

사실 그 목적을 '여행'이라고 두지 않아서 뭔가 '여행'의 흥분되는 감정을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아이와 다녔던 여행에서는 '아이에게 좋은 걸 보여주자'가 대부분이었고 유학하던 시기에는 그게 그냥 삶이었다. 수출을 위해 바이어를 만나러 갔을 때도 그냥 사업차 갔던 것들이다.

다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그 모든 것들이 다 여행이었다라고 볼 수 있다.

여행의 장점이라고 한다면 분명 멀리멀리 떠나지만 최종 목적지가 결국 집이라는 점이다. 최종 목적지가 집이 아닌 여행은 거의 없다. 항상 돌고 돌아 집으로 돌아온다. 집으로 도착하지 않는 여행은 흔히 '이민'이나 '이사'라고 부르니, 결국 내가 돌고돌아, 제주 이곳에서 일상을 살고 있어서 그 모든 것이 여행이 되어 버린 셈이다.

김영희 작가는 칭찬합시다, 느낌표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작한 제작자다. 그 역시 삶에서 필연적으로 다양한 지역을 돌아 다녔을 것이다. 나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의 그런 외부 경험을 쌓은 사람은 과연 '삶'을 무엇으로 바라보고 있을까.

그의 에세이를 살펴보자니, 그에게 '삶'은 곧 여행인 듯 하다.

뉴질랜드 남섬에서 누군가는 수백만원을 들여 큰맘 먹고 찾오는 여행지에서 나는 그들을 마주했다. 나의 머릿속에는 짧은 주말 뒤에 있을 주간 일상의 일정이 있었고 그들의 머릿속에는 그 순간을 즐기기 위한 다양한 계획이 있었을 것이다.

삶을 '일상'으로 정의하는 순간 얼마나 지루하고 재미가 없어지겠느가. 내가 지금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예정만 되어 있더라도 나는 내가 나가 있던 모든 순간을 즐기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그 순간을 즐기지 못했던 이유 중 가장 큰 이유는 '그 순간이 영원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었다.

어쩌면 내가 거주하고 있는 이 '제주'도 누군가에게는 기다리고 기다리던 '여행지'일 것이다. 내가 오늘 그들의 기분을 이곳에서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이곳과 이순간이 나에게는 그저 일상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변한다라는 변하지 않는 유일한 진리만 마음속에 갖고 있더라도 나는 오늘 아침을 특별하게 맞이 하지 않았을까.

뉴질랜드에서 '소매품 매장 점장'을 하고 있었을 때, 당시에는 참 당연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니 낭만적인 것이 하나 있다. 그들이 구매하는 목록이다. 다양한 일상 용품중에서 꾸준한 매출을 발생시키는 것 중 하나는 '엽서'다.

축하 카드라던지 기념일 카드 같은 것들이 종류별로 있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매일같이 사고 손편지를 주고 받았다. 어떤 이들은 카운터에 엽서를 놓고 빠르게 글을 써서 가짜 꽃과 함께 구매하고 나갔다.

그 당시에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은 있었고 카카오톡이나 다양한 메신저들이 있었다. 그러나 10대부터 90대 할 것 없이 그 사람들은 그 카드를 사러 매장을 방문했고 '카톡 보내면 되지, 왜 저런 걸 사지?'하던 낭만 없던 청년은 지금에 와서 그들의 낭만을 부러워하고 있다.

삶이란 그런 듯 하다. 효율이나 득실만 따지고보자니 돌이켜봐서 남는게 하나가 없다. 사실 다시보건데 가장 많이 남는 것이라면 '당시' 참 비효율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다. '여행지'에서 잃어버린 스마트폰이라던지, 바가지를 썼던 기억, 상한 아이스크림을 먹었던 기억.

해외에서 다양한 업종에서 일했고 다양한 커리어를 쌓았지만 그것이 지금 내게 무엇을 남겼는가, 떠올려봤더니 그닥 크지 않다. 어쩌면 삶에서 가장 유익한 것은 어쩌면 비효율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런 여유로움과 낭만이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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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에 빠지지 말 것 사랑을 할 것
슈히 지음 / 딥앤와이드(Deep&WIde)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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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비싸고 예뻐도 맞지 않으면 신발은 상처만 남긴다. 벗어 두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있더라도 아프게 한다면 반드시 벗어야 한다. 그것이 신발의 본질이다. 본질을 상실한 '신발'은 반드시 벗어야 한다.

어떤 신발은 익숙까지 시간이 걸린다. 걷다보면 내 성격과 성향에 맞게 신발 밑창이 닳기 시작한다. 발을 감싸는 헐거움도 점차 맞게 된다. '새것'으로 진열장에 진열되어 있을 때 없던 무언가가 점차 생겨가며 나의 흔적을 남기게 된다.

과거 가장 좋아하던 신발 중 하나가 있었다. 흔히 '명품구두'였다. 평생 그런 구두를 신을 일이 있을까, 싶은 그 구두를 아껴 신었다. 그러다가 그래, 아끼면 똥된다. 그런 기분으로 아낌없이 신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의 반짝거림은 상실하고 완전히 허름한 구두로 바뀌었다. 얼마나 신었던지 웬만한 운동화보다 편하게 느껴졌다.

어딜가나, 그 구두만 신었다. 험한 일정이 있을 때도 생각없이 그 구두를 신고 나갔다. 복장은 물론 상황에도 어울리지 않은 '구두'는 어느덧 나를 '상황에 적절치 않은 사람'으로 만들었다.

꼭 그런 것 같다. 아무리 나에게 맞는 구두라고 하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반드시 바꿔 신어야 하는 그런 것...

맞지 않아 아픈 신발을 신고 한참 걸었던 경험도 있다. 어떻게 보여지는지를 신경쓰며 아픈 발 쯤이야, 언젠가 벗어버릴 귀가 시간을 기다리며 참았던 적도 있다. 구두로 빗된 이야기는 사람의 이야기다. 인간관계 뿐만 아니라 삶의 대부분에 적용되는 철학이 하나 있다.

바로 '지속가능성'이다. 

뭐든 '지속가능성'이 중요하다. 인간관계도, 돈도, 직업도, 공부도 그렇다.

나에게는 꽤 과분한 직업, 연봉, 인간들이 스치고 지나갔던 적이 있다. 그것이 지속 가능했다면 나는 더욱 좋은 위치에 있었겠다. 다만 나는 그것들을 다음 주인에게 양도하고 자리를 떠났다. 내가 비워둔 그 자리 덕분에 누군가는 더욱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았겠지만 나는 한동안 참고 방황하고 힘들어했다. 버텨보려 했던 시간에 대한 '매몰비용'을 탓하며 자신을 허비하곤 했다.

그렇지 않은가. '어린왕자'에서 왕자는 지구에 도착해 수천 송이의 장미를 바라본다. 그러다 사실은 아름답고 고귀한 장미가 지구에서는 특별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에 '여우'가 말한다.

'장미꽃이 소중한 이유는 네가 그 꽃에게 바친 시간 때문이야'

어쩌면 우리는 상대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넘겨 준다. '자신의 시간', '자신의 '삶' 말이다. 자신의 삶을 내어주고 상대에게 가치를 부여한다. 상대를 아끼는 것은 어쩌면 상대에게 묻혀둔 자신의 시간과 삶 때문일지 모른다.

아주 냉정하고 이기적인 사랑은 상대보다 자신의 시간과 감정에 대한 미련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것이 맞는지 모른다. 내가 들였던 시간과 감정 그런 것들이 상대와 관계를 만들어 냈으니 말이다. 그러나 잊고 있는 것이 있다. 나는 내가 내어준 시간과 삶만큼이나 상대의 그것을 앗아왔다.

내가 내어 준 것만 생각하기에 그토록 이기적인 사랑이 다시 상대의 입장에서 보면 엄청난 빚을 지은 셈이다. 상대의 시간과 감정, 삶을 일부 앗아왔다니...

함부로 그에게 할 수 없는 이유다.

인간관계는, 고로 애초에 ‘좋은 사람’을 고르는 일이 아니다. 나의 시간과 감정을 내어주고 상대의 시간과 감정을 앗아오는 일이다. 그렇게 서로의 것을 주고 받는다. 그렇게 나의 것을 내어주고 상대의 것을 가져오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상대와 나에게 모두 흔적을 남긴다. 신발 밑창에 난 닳아 사라진 흔적들 처럼 말이다.

결국 관계는 지속될수록 삶을 닮은 구두를 완성해가는 과정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은 관계는 그 자체로 유해하다. 나를 깎아내고 상대의 것을 훔쳐 오는 행위다. 그것은 결국 ‘소진’이다. 자신을 소진하고 상대의 것을 소진시키는 행위다. 진짜 좋은 관계는 나를 성장시키고 가끔 아프더라도 함께 쉬어갈 수 있는 여지를 남겨야 한다.

구두도, 사람도, 인연도...

닳았다고 바꿔 버리면 결코 나에게 맞는 신발은 찾을 수 없다. 그렇다고 아픈데도 버텨서는 안되다.

신발은 분명 매우 중요한 아이템이지만 신발이 없다고 죽을 수는 없다. 사실 잠을 자고 씻고 생활하는 대부분의 시간에서 언제나 신발은 '신발장'에 있을 뿐이다. 

때로는 신발을 벗고 맨발로 걸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다. 맨발로 걷는 길은 다소 아플 수 있지만, 그제야 진짜 나의 걸음걸이를 다시 찾게 된다. 결국 서로 얽혀 벗어나지 못하는 관계가 아니라 때로는 가끔 자신이 온전하게 되는 시간도 분명 필요하다. 자식과 부모, 하물며 배우자와의 관계도 그렇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고 지속하는 태도다. 그런 맥락에서 슈히 작가의 신간 '사랑에 빠지지 말 것, 사랑을 할 것'은 관계 속에서 자신을 지키는 법을 이야기한다. 사랑에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하는' 사람으로 남기 위해 필요한 용기와 태도, 그리고 내가 내 편이 되는 사랑의 방식에 대해 담담하고 단단하게 풀어낸다. 지금, 아픈 신발을 벗고 맨발로라도 걷기 시작해야 할 누군가에게 이 책은 작고 확실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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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실몽실 몽상구름 - 백 번 자살 시도 끝에 살아난 여자의 찬란한 생의 기록
최애니 지음 / 아빠토끼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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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부정적인 것일수록 더 중독적일까.

누군가는 고통을 참지 못해 죽음을 택하지만, 누군가는 그 고통을 품는 삶을 택한다. 이렇게 고통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 일부는 가진 고통을 반복 재생하며 크기를 키워낸다.

'고통'을 담는 그릇이 커질수록 고통도 함께 커진다. 고통의 크기가 더 커지면 다시 담아내는 그릇도 커진다. '우울'이라고 하는 고통이 우리에게 중독성을 부여하고 반복적 고통의 쳇바퀴를 돌도록 만드는 이유는 그것이 '중독성'을 가졌기 때문인지 모른다.

우리의 뇌는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분하지 않는다. 다만 '쾌락'을 유발하는 자극에만 반응할 뿐이다. 게임, 알코올, 쇼핑, SNS 혹은 어떤 사람들...

이것들은 도파민을 강력하게 분비하게 하여 쾌락을 준다. 쾌락은 '행복'과 분명 다르다. 그것은 우리를 좀 먹는 결과를 낫는다. 쾌락이 만든 보상 신호는 반복을 유도한다. 반복은 더 강한 자극없이는 무감각해지며, 기존의 강도에 내성을 만든다. 그리고 그것은 더 큰 쾌락을 요구한다. 우리를 쾌락으로 이끄는 것에는 '좋고 나쁨'이 없지만 '나쁨'이 주는 쾌락은 '피로, 스트레스, 외로움'과 동반한다. 그것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억제하는 경향이 많아서 결국 '중독'이라는 결과를 만들어낸다.

어떤 이들은 우울과 슬픔을 곁에 두고 산다. 그것들이 평생 함께 해야 하는 것처럼 따라 다니게 되는 이유는 감정에 대한 익숙함이다. 중독에는 '해독'이 필요한 일이겠지만 어쩐 일인지 '해독'이라는 낯선 감정보다는 '익숙한 고통'을 선택하며 다시 굴복한다.

우울은 감정이지만 어느 순간에는 습관이 된다. 습관은 체계를 갖춘다. 아침에 일어나고, 밥을 먹고, 일을 하는 틈틈히 슬픔을 확인한다. 안주머니 속에 감춰둔 우울과 슬픔을 매순간 꺼내보며, '그래, 어디 안가고 잘 있지' 확인한다.

그것은 루틴이 되어 그 감정에 '정'을 들인다. 마치 이제는 '내것'인 것 마냥 가슴에 잘 품고 다니다가 누군가에게 들키면 안되듯 조용히 혼자서 꺼내 보게 한다.

예전 한 외국 공인광고를 본 적이 있는데, 의욕이 없는 한 남자와 열정적으로 감정을 표출하는 한 남자가 동시에 등장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고나서 결국에 다양한 감정을 표출하는 그 남성이 화면에서 사라지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자신만 가지고 있는 꽁꽁 숨겨둔 그 감정은 다른 이들은 모르게 잘 감춰두어 어느 순간 '그것을 잘 숨기는 노하우'는 매우 익숙해진다. 남들도 속이고 스스로도 속이던 어느날 그 속주머니속 감정이 점차 성장하여 목을 졸라온다.

불행이 하나의 위안이되고, 그것이 도피처가 되고, 나아가서는 신념으로 바뀐다. 이때부터 우울은 스스로 만든 세계가 된다. 거기서 신념이 굳어진 세계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쉽지 않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관의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렇다.

부정적인 감정은 '확신'을 기반으로 한다. 본래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삶을 불확실하고 부정적으로 볼수록 그것에 대한 적중률은 더 높아진다. 고로 점차 적중률이 높아지면 부적인 사고 방식에 확신을 갖는다. 세상이 잘못됐다는 확신, 내가 피해자라는 확신, 내 고통은 정당하다는 확신, 이 확신은 매우 강력하다. 고로 우리는 슬픔과 분노에 중독되고, 피해자 서사에 몰입하며, 고통받는 나에 몰두한다. 그 슬픔이 유일하게 나를 알아주는 감정이라고 착각한다.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하는 것은 억지 긍정이 아니다. 어쩌면 '다른 선택의 가능성'을 볼 수 있는 '눈'이지 않을까 싶다. 만약 우리가 다른 세계의 존재를 긍정할 수 있는 '눈'을 갖지 못한다면 어쩌면 우리는 따뜻하고 익숙한 지옥에 다시 자리하게 될지 모른다.

'몽실몽실 몽상구름'에스는 백 번 자살 시도 긑에 살아난 생에 대한 기록이 적혀 있다. '최애니'작가는 날 것 그대로의 감정을 고백하며 스스로의 감정을 언어로 전환해 나간다. 이 글이 어떤 이들에게는 위로가, 어떤 이들에게는 공감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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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근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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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읽는 아주 단순한 이유는 '오락성' 때문이다. 작품은 문학적 깊이나 실험보다는 몰입도와 서사 전개가 중심이다. 글은 군더더기 없고 깔끔하다. 불필요한 수식이 없고 직관적이며 스토리라인도 직선적이다. 고로 문자가 넘어가지 않아서 다시 뒤로 돌아가서 읽는 경우가 거의 없다.

독서를 쭉쭉 뻗어가게 하는 힘은 '책태기'를 아주 효과적으로 극복하도록 만든다. 시각적 설명보다는 사건과 대화 위주의 전개가 많아 영상처럼 읽히는 느낌을 준다. 복잡한 메타포나 설명도 없다. 미스터리 장르의 전형적인 구상을 따르되 클리셰를 재료로 써도 질리지 않는 꽤 희한한 매력이 있다.

지금 이 시점에서 '게이고'의 책을 다시 읽은 이유는 앞서 말한, '책태기' 때문이다. 글이 잘 안 읽히는 느낌이 들 때, '게이고'의 작품 두어개를 보고나면 말끔하게 치료가 된다. 이후 다시 '책벌레'처럼 글의 몰입할 수 있게 된다.

게이고의 '비정근'이라는 소설을 들고 침대에 뒹글거리며 책을 읽다가, 초등학교 2학년 우리 딸이 옆에서 보고 있는 책을 봤다. 아이는 '전천당'이라는 초등학생 소설을 보고 있었는데, 얼핏 글자 크기와 테스트의 양이 더 많아 보인다.

게이고의 책은 출판사 의도가 담겼는지 모르겠지만 책의 두께에 비해 책이 가볍고 종이질도 가볍다. 고로 벽돌책처럼 보이는 외관에 비해 페이지는 많지 않고 '탁, 탁' 책장을 넘겨 가는 재미도 있다.

'비정근'이라는 소설은 역시나 나의 최애 작가 '게이고'의 단편 모음이다. 총 6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벼운 분량, 빠른 속도감은 여전하다.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던 비정규직 초등학교 교사의 내용이다. 정규 교사가 휴직하면서 그 자리를 채우는 기간제 교사의 이야기다.

단편 중심의 구성이라 장면 전환이 빠르고 배경이 '초등학교'라 '추리소설'에 맞지 않는 '풋풋함(?)'도 느껴진다. 여섯편을 진행할 때마다 '자신이 누구고 왜 초등학교에 근무하게 되는지, 짧은 소개를 하고 시작한다. 고로 사실상 어느 편을 먼저 펴서 보거나 상관 없는 책이다.

'비정근'은 게이고의 초기 문체를 만날 수 있는 책이다. 문장의 매우 짧고 간결하다. 복문보다는 단문 위주로 되어 있으며 역시나 대화중심으로 이뤄져 있다. 게이고의 작품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정서를 묘사하고 내면 묘사가 많아지는데 초기의 작품은 배경도 감정도 모두 생략되어 표면적이고 직설적으로 글을 써 내려간다. 고로 게이고의 작품도 후기 작품을 보게 되면 생각만큼 가볍게 읽혀지지 않는 작품도 더러 있다. 다만 '비정근'은 그의 초기 작품답게 쉽고 간결하다. 그냥 가볍게 주말 오전에 뒹굴거리면서 봐도 괜찮다. 아이가 옆에서 인형놀이를 하며 시끄럽게 떠들어도 몰입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최근 읽는 글들이 꽤 묵직한 글들이 많았는데 이럴 때 한번씩 힐링하게 하는 책이다. 꼭 나와 같은 다독가가 아니라 '가볍게 독서를 취미로 해볼까'하는 사람들에게도 아주 좋은 시작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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