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 잘하는 아이, 수학도 잘하는 아이 - 20년간 수학을 가르치며 깨달은 것들
오선영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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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헬스트레이너 선생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회원님, 의사는 사후 관리를, 트레이너는 사전 관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건강한 사람들은 의사를 만나지 않는다. 고로 의사와 헬스트레이너의 공통점이라면 건강을 관리한다는 것이고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문제가 발생한 후에 만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관리하는 사람이란다.

그 예시가 꽤 적절해서 마음속 깊이 담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은 '트레이너'보다 '의사'를 더 자주 만나며 한 번 만나게 되면 꽤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한다. 사전 관리라는 것은 불확실성을 맞이하는 것이라 건강이 나빠질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에 있어서는 낙관적인 편이라 관리없이 지내다가 '병'을 마주하면 '불확실성이 해소'되며 다급하게 '의사'를 찾는다.

'관리'에는 '목적'보다는 '유지'가 중요하고 '치료'에는 '유지'보다 '목적'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교육도 비슷하다. 교육은 일정 소양을 채워 넣는 일이다. '관리'의 입장에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대부분은 일상을 살아간다. 트레이너를 찾아 본 적 없는 이들이 곪을대로 곪은 상처가 덧나기 시작하여 병원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곪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환부'는 깊어진다. 어떤 구간에서 '의사'는 포기해야 하는 구간을 설정하기도 한다. '한쪽 발'을 포기하거나 '시력'을 포기하거나, 때로는 '난치'라는 이름으로 '완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진료를 하기도 한다.

교육도 아주 비슷하다. 건강에 있어서 언제나 보기 좋은 '웨이트'만 중요한 것이 아니듯, '유산소'가 필요한 이들과 '웨이트'가 필요한 이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유산소'는 기초 체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기초체력이 없으면 대부분의 다른 운동에서도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유난히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가 고학년이 되어 '비만'이나 '충치' 등의 문제로 병원을 들락날락 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너진 식습관'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도 꽤 '학원'에 의존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선행해아 하는 것은 '일상 습관'이지 않을까 싶다.

아침에 간단히 조깅을 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질병에 대한 예방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루 10시간, 20시간씩 헬스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하루 1시간 이내의 꾸준한 습관 만으로도 상당한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바쁜지를 가늠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하면 건강해지는 것이고 하지 못하면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아이는 매일 일어나면 수학 문제집 두 장과 6급 한자를 몇자 공부한다. 당연히 강제로 하진 않는다. 모든 운동이 강제할 때 노동이 되듯, 공부도 스스로 할 때, 학습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세뇌일 뿐이다.

아이가 이런 습관을 유지한지 벌써 3년이 넘었다. 지난 시간이 쌓여 어느순간 수학영재가 된다고 느끼진 않는다. 조깅의 목표가 '마라토너'가 아닌 것처럼 그저 의사를 만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체력을 기르는 일이다.

독서와 수학은 운동에서 '유산소'와 굉장히 닮았다. 독서와 수학이 무너지면 기본적으로 단숨에 좋게 만들기 힘들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다. 기초체력이 튼튼한 경우 특정한 식단관리와 규칙적인 운동 습관이면 1년만으로도 어떤 이들은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부수적인 공부에 앞서 '글을 읽고, 수를 읽는' 기초체력은 교육에서 반드시 중요하다.

강사는 어떤 의미에서 '의사'와 같다. 진단하고 개선하는 '사후처리'를 돕는 일을 한다. 그 말은 유능한 의사와 유능한 강사를 만난다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문제가 발생한 뒤에 만나야서 보통의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게 도울 뿐이다. 그렇다면 공부에 있어서 '트레이너'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안타깝지만 이런 일을 하는 방법이란 기껏해봐야 '구몬, 빨간팬 등의 학습지' 혹은 '책' 밖에 없다.

수학은 나선형으로 교육과정이 이뤄진다. 기초를 모르고서는 그 위에 성을 쌓을 수가 없다.

적분을 하려면 복잡한 분수식을 다뤄야 한다. 분수를 다루기 위해서는 통분을 알아야 한다. 통분을 위해서는 최소공배수를 알아야 하고 최소 공배수를 알기 위해서는 약수와 배수를 알아야 한다. 약수와 배수를 알기 위해서는 곱셈과 나눗셈을 알아야 하고 곱셈과 나눗셈을 알려면 구구단을 알아야 하고, 구구단을 알려면 덧셈과 뺄셈을 알아야 한다.

미분을 배우려면 함수를 알아야 하고, 함수를 배우려면 방정식을 알아야 하고, 방정식을 알려면 사칙연산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린 재료가 무너지지 않는 성이 된다. 그러니 초등 수학이 쉽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어느 순간이 되서는 어디가 구멍인지 모를 환부가 발생하고 꽤 진지한 '의사'의 판단처럼 극단적으로는 아예 어떤 환부는 포기해야하는 진단이 나올 수도 있다.

교육이나 건강이나 기본적으로 습관 쌓기의 문제다. 바늘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다고 나중에가서 고액과외와 명문학원을 찾아 다닐 것이 아니라, 저렴한 학습지라도 매일 꾸준하게 푸는 습관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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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 빠다킹 신부의 행복 수업
조명연 지음 / 파람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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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얼마나 큰가보다, 얼마나 자주 오는가가 더 중요하다.'

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의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빈도'가 '양'보다 중요하다. 1만년을 쫴어야 할 태양볕을 모아다 한번에 받는다고 더 많은 풀과 꽃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뭐든 적당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적당한 빈도로 나눠 받아야 한다.

'행복'이라고 다르겠는가. 행복을 양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한방'이 아니라 꾸준함과 빈번함이다.

로또 1등만 당첨되면, 대출을 다 갚고 집을 소유하게 되면, 아이가 대학을 가면, 연봉이 오르게 되면...

수많은 이유로 미뤄지는 행복 중에 우리가 거머질 수 있는 소확행은 없을까. 큰 행복을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작은 행복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다시말해서 큰 행복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무수하게 작은 행복을 마주해야 한다.

하교한 아이를 안아주는 일이라던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한다는 등의 작은 행복 또한 얻어가며 큰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자기계발서들을 보다보면 '작은 성취'도 습관이 된다는 말이 있다. 실패도 성공도 모두 습관이다. 습관이 그것들을 만들기도 하지만 성취를 해내는 일조차 습관이 된다. 즉 100점이라는 달콤한 한 번의 결과가 아니라 매일 풀어내는 성취감에서 더 큰 행복과 지속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속적 성취를 느낀 이들이 100점에 다가간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도 아니다.

행복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행복은 어차피 한번 사용하고 말 '일회용품' 같은 것이다. 이미 지나간 행복을 다시 불러다 느낄 수도, 그것을 똑같이 재현해 낼 수도 없다. 온전히 그 순간에 주어진 것을 옴팡지게 받아 사용해야 한다.

하버드대학교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행복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살람들은 대체로 큰 사건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할거라고 믿겠지만 실제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그 사건이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짧았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과 사고로 장애를 입은 사람은 둘다 1년이 지났을 때 비슷한 수준의 행복도를 얻는다고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쾌락 적응'이라고 부른다. 좋은 일도 나쁜일도 결국은 다 일상이 된다.

우리의 몸에는 '항상성'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우리의 체온처럼 어떤 외부적인 자극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몸은 언제나 평균으로 돌아온다. 출렁거리는 낙폭을 상쇄하는 이런 항상성은 '행복'이나 '불행'도 마찬가지다.

만약 누군가를 좌절에 들게 하고 싶다면 한번의 시련으로 좌절에 들 수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에 시련을 두고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빈번하게 실패하게 만들어 모든일에 무기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에게 좌절은 성장의 발판이 된다. 고로 한번의 좌절은 결국 그를 승리자로 만들어낼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좌절에 드는 것을 예로들면 너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반대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제로 장기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낙관적인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사의 일기를 쓴다던지,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다던지, 정기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습관은 행복의 빈도를 높여 결국 원하고저하는 일에 달성할 확률 높인다. 실제로 한 실험에서는 매일 3가지 감사한 일을 기록하는 실험을 했다. 결과, 단 21일만에 참여자들의 행복지수가 상승했다.

결국 인생은 이벤트가 아니라 '리듬'이다. 매일 반복되는 박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작은 즐겅무을 배치할 수 있느냐가 행복을 결정한다. 우리는 거대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가 아니라, 잔잔한 물결 위에서 노를 젓는 조정선수다. 한 번의 파도보다 매일 흔들리는 잔잔한 물결이 우리르더 오래, 멀리 데려간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다. 조명연 신부는 우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오늘 하루의 사소한 감사, 작은 기쁨이 반복될 때 인간은 가장 안정되고 행복하다고 말이다. '행복'은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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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뇌는 최적화를 원한다 - 지금 당신의 뇌는 최상의 컨디션인가?
가바사와 시온 지음, 오시연 옮김 / 쌤앤파커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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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얼마 간이 그렇다. 급하게 혹은 과하게 먹어 급체한 듯. 꽉 막혀진 느낌. 그 느낌이 가슴이 아니라 뇌에서 느껴진다.

'짜증이 쉽고, 집중이 어렵다.', '머리는 맑지 않고 기억력도 예전같지가 않다.'

소화기관의 문제라면 응급처치로 체기를 내리기도 하지만 '정신적 문제'에는 그런 처방이 어렵다.

실제로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이런 현상은 더 커졌다. 동시에 들려오는 물음과 싸움, 이야기는 정보를 과다하게 했다. 이것들이 동시에 귀로 들어와서 나가지 못했다. 마치 과한 음식을 먹어서 체한 느낌이다. 뇌가 더부룩하다.

무언가 소화기관에 대한 문제 생기면 우리는 바로 소화제를 찾는다. 정신적 문제는 소화만큼이나 매우 중요하다. 다만 우리는 '정신력'이라는 폭력적이고 모호한 단어로 스스로를 혹은 타인을 재촉한다. 약해진 집중력에 있어서는 '정신력'을 운운한다. 소화의 영역에서는 '언급'되지 않는 정신력이 여기서 만큼은 유용하게 사용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는 방법은 여럿이 있다. 개중 '호르몬 조절'이 필수적이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예민해지는 원인을 찾는다면 사람들은 '스트레스'를 떠올린다. 일 때문이고, 사람 때문이고, 돈 때문이라고 한다. 맞다. 스트레스도 당연히 그 원인 중 하나다. 다만 그 스트레스도 평소에는 잘 처리를 하다가 어느 순간에는 처리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스트레스를 처리하는 능력이 떨어진 이유를 찾아보면 그 기저에 '수면'이 존재한다.

'수면'은 '침실의 기온', '조명 밝기', '잠들기 전 습관' 등의 다양한 원인으로 방해 받는다. 너무 덥거나 춥거나, 눅눅하거나 답답하거나 그렇다. 그러한 모든 감각 자극들은 뇌를 각성한다.

잠은 그저 어두워진 시간에 대한 '삭제'가 아니다. 잠은 멈춤이 아니라 준비의 과정이다. 자고 있는 동안 우리 몸은 활발히 움직인다. 알게 모르게 많은 호르몬을 분비하며 일상을 준비한다.

형광등과 같은 백색 등은 우리의 뇌 속 시상하부를 혼란시킨다. 뇌는 '아직 낮인가'하는 착각을 하고 이를 뇌로 전달한다. 멜라토닌 분비는 그렇게 지연된다. 졸음은 늦춰지고, 수면의 질도 얕아진다. 개중 가장 영향을 끼치는 것은 스마트 기기다. 스마트 기기가 내뿜는 블루라이트는 비록 적은 양이라고 하더라도 망막에 들어가며 우리의 뇌를 혼란시킨다. 뇌는 깊은 잠을 자지 못하여 정리할 시간을 갖지 못한다. 다음 날은 어김없이 피로하고 머리는 무거워진다.

게임이나 짧은 영상은 우리의 뇌를 자극하여 흥분상태로 만든다. 고로 자극을 끊고 어둠 속에서 준비하는 편이 좋다. 잠은 수동적인 행동처럼 보이지만 아주 능동적 관리가 필요한 복잡한 생리작용이다.

이 작은 차이들은 서서히 축적된다. 이런 작은 생활습관이 누적되면 '짜증'과 '산만함'으로 드러난다. 결국 뇌는 '과식'한 소화기관 처럼 더부룩해진다.

고로 잠에 들기 전에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적색의 약한 조명을 켜서 책을 보다가 잠에 드는 것이 최고로 좋다. 실제로 최근에 들어 자기 전에 유튜브를 보거나 야식을 먹는 일이 생겼다. 아마 그런 이유로 최근 집중력 이슈가 생긴 듯하다. 책에서 말하는 좋은 방법을 활용해야 겠다는 생각이든다.

우리 모두는 뇌를 태우며 산다. 문제는 쌓인 피로를 어떠헥 회복시키느냐다. 그리고 수면이야말로 뇌 회복의 유일한 경로다. 이걸 무시하면 뇌는 예민하고 산만한 상태로 고착된다. 반대로 존중하면, 뇌는 언제든 최적화를 재개한다. 결국 뇌는 고장이 나지 않는다. 우리가 사용법을 잊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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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론 2
제레미 오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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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 옆에 다크홀이 생겼다.

블랙홀과는 다르게 다크홀은 질량도 중력도 없다. 단지 관측되는건 비어있는 어둠 뿐이다. 인류는 이 미지의 구멍을 탐험하기로 한다. 그리고 그 임무를 밑은 사람이 바로 '루크'다. 주인공 루크는 지구 최고의 우주인이다. NASA 최고의 파일럿이다. 루크는 이 다크홀을 향해 날아간다. 그리고 다크홀을 통과한 순간, 완전히 다른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과거 SF영화나 소설이 그리던 설정과 꽤 다르다. 비슷하면서 다르다. 루크가 도착한 곳은 '다중 지구'다. 80억개나 되는 지구가 각각 다른 역사를 만들며 우주 공간에 떠 있다. 그는 곧 알게 된다. 지구의 갯수가 80개인 이유를 말이다.

이 세계관에서 핵심은 '의식'이다. 각 지구에는 79억이 넘는 무의식과 단 하나의 의식이 존재한다. 각각 지구마다 '의식'이 하나씩 있으며 그 의식이 바로 '그 지구의 주인'이다.

항공우주공학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이 완전히 섞이며 만들어낸 이런 새로운 형태의 SF 소설은 '작가'의 이력에서 기인한다. '제레미 오' 작가는 서울대학교에서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했다. 그리고 현재는 정신과 전문의로 병원에 근무 중이다. 우주공학과 정신의학이라는 이질적인 두 분야를 아우르는 그의 독특한 이력은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고로 결국 '홀론'이라는 제목은 단순한 제목이 아니다. 철저히 제레미 오 본인의 전공과 임상실험이 융합된 결과다. 항공우주공학과 정신의학이 다루는 두 소재를 아주 적절하게 섞었다. '다중우주'라고 하면 대개 우리는 '공간적 분기'를 떠올린다. 다만 제레미 오는 그것을 '의식'이라는 축으로 뒤틀었다. 차원이 아니라 마음. 공간이 아니라 '자아'로 '다중 우주'를 설명한다.

소설은 어떤 부분에서 '인터스텔라'를 닮았지만 사실상 아주 다른 이야기다. 또한 실제 꿈속을 헤매는 듯한 착각일 줄 정도로 그 묘사가 기이하다.

깔끔하게 떨어지는 스토리라인이 아니라 개연성이 굉장히 어그러져 있는 구간이 있다. 다만 이 장치는 '의식'과 '무의식'이라는 소재를 볼 때, 꽤 의도된 설정으로 보인다.

앞서 말한대로 지구가 80억개인 이유는 자아가 80억개이기 때문이다. 이 세계관에서는 각 지구가 하나의 무의식 덩어리고 그 위에 주인으로 있는 단 하나의 의식만 존재한다. 그 하나의 의식이 곧 그 지구의 진짜 사람이다. 나머지는 무의식이 빚어낸 허상, 데이터, 껍데기나 다름없다.

사실 이런 설정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의식-무의식 구조'를 정반대로 확장한 개념이다. 프로이드는 인간 한 명 안에는 '이드, 에고, 슈퍼에고'가 있다고 봤다. 다만 제레미 오는 한 사람이 아니라 한 개의 세계 안에 그것을 만들어 냈다. 지구라는 덩어리가 곧 하나의 인격이 되는 셈이다.

또한 이것을 단순히 사변적 개념으로 그리지 않았다. 그는 항공우주공학 전공자답게 다중 우주의 메커니즘을 물리적, 수학적 언어로 묘사한다. 질량이 없는 다크홀, 중력 없는 중첩 우주, 그리고 거기에 붙은 '의식 중심성 이론' 등.

실제로 현대 물리학에서도 양자중첩과 관측자의 문제는 늘 뜨거운 감자다. 슈뢰뒹거의 고양이, 양자 얽힘, 다세계 해석, 모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측'이라는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 단 하나의 현실로 수렴된다. 다만 만약에 이 '관측'이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의식' 자체라면 어떠한가. 그런 의미에서 '홀론'의 세계관은 허무맹랑하면서도 꽤 합리적인 상상이다.

게다가 여기서 소설의 중심이 슬쩍 이동한다. 서사가 아버지와 딸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루크가 딸을 찾아 다른 지구를 찾아 떠나는 과정에서 여러 사건과 배반, 반전이 있다. 사실 어떤 반전은 대략 알아채게 되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까지 볼 수 밖에 없다.

한 여름 길고 긴 낮잠 끝에 어렴풋하게 남은 꿈의 흔적처럼 이 소설은 굉장히 몽상적이고 묘하다. 완전히 깨어난 뒤에도 그 여운은 오래도록 머리속에 남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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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이 계절을 함께 건너는 당신에게
하태완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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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태완' 작가의 '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인간관계는 창밖으로 멋지게 쏟는 장대비와 같다. 집안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내다볼 때는 그저 음미하기 좋은 낭만이지만,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이겨내고 해쳐 가야 하는 악천후가 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재능을 갖지 않아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간혹 먼저 걸려오는 전화에 뒤늦게 한숨 쉬고 받는 정도다.

사람을 회피하진 않는다. 다만 먼저 나서지 않을 뿐이다.

그 불완전한 사회 생활을 공감해 주는 문장을 만났다. '인간 관계'가 창밖으로 내리는 장대비와 같다니...

실제로 그렇다. 창밖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기에 꽤 낭만적이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 앉혀주는 소리며 은은하게 어둑해지는 자연광이 마음까지 차분해진다.

다만 창을 열어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다. 창을 열고 나서면 아름답게 보이던 그 장대비가 무섭게 몸을 적시고 후유증을 남긴다.

나약함이 '약점'이 되지 않는 나이가 있다.

대략 우리 아이들의 나이쯤이지 않을까 싶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져서 울어도 누구도 손가락질 하지 않는 나이다. '그럴 수 있지'하고 사회가 받아 들이는 나이.

그 나이를 그 자리에 두고 수십년을 지나왔다. 언젠가는 두발로 서 있기만 해도 박수를 받았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언가를 역동적으로 하고 있어도 손가락질 받기 일수다.

겉으로 보기에 꽤 완전에 가까워져서 이제는 '나약함'이 '약점'이 되었다.

말실수를 하거나 자칫 걷다가 넘어질 뻔 한 순간에도 사람들은 쳐다 볼 것이며 때로는 비웃을 것이다. 몇번의 실수를 보여도 키득거리며 웃을 수 있는 젊은 시절이 스믈스물 지나, 이제는 '불혹'이라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렇게 나이가 스스로를 규정하고 나니, 완전하지 않은 내면과 완전을 종용하는 외면 사이에 격이 커진다.

야수를 만나거든 결코 뒤를 보여서는 안된다. 뒤를 보이면 야수는 덥썩 그 등을 물어 버린다. 그처럼 때로는 '빈곳', '약점'을 내놓고 싶지만 창밖에 내리는 그 장대비가 칼날처럼 위에서 아래로 꽂아 내린다. 몇번의 경험은 해를 보낼수록 더 강하게 해를 입힌다.

결국 어린 시절에는 옷 젖는 줄 모르고 온몸으로 즐겼을 그 장대비를 이제는 누군가의 것으로 치부하고 구경할 뿐이다.

'하태완 작가'의 다른 말처럼 그렇다. '삶은 내가 운전하는 택시'를 닮았다. 오가는 손님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온다면 반가운 것이고, 간다면 고마운 것이다. 내가 그렇듯 그들도 나름의 여정에 바삐 간다는 말에 꽤 위안을 받는다.

어제인가, 아이와 동네 문구점을 들렸다. 문구점을 향하는 바쁜 발걸음은 도로 어딘가에서 멈춰졌다. 아니는 아무렇게나 피어난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나비를 쫒느라 멈췄다. 기껏 온 길을 다시 뒤로 물러 갔다.

그렇게 다시 목적지에서 멀어지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낭만이라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하태완 작가의 비유처럼 '낭만'이나 '사랑' 같은 것은 몹시 효율적이다. 아무 이유나 목적도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나는 만남.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만나서 백해무익한 소비를 즐기는 것.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을 구매하는데 지갑을 열고 돌아오면서 오늘 구매한 저 장난감이 내일이면 부품 몇개를 잃어버린 채 분리수거함에 들어가겠구나 했다.

논리나 효율따위를 따지지 않는 나이에는 그것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 어느 순간이 되면 저절로 나이라는 녀석이 찾아오기 때문에...

아이를 야단하면 아이는 '낭만'을 잃어버린다.

마치 어느 순간, 그 존재가 아예 없던 듯 살고 있는 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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