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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 - 이 계절을 함께 건너는 당신에게
하태완 지음 / 북로망스 / 2025년 5월
평점 :
품절
'하태완' 작가의 '우리의 낙원에서 만나자'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인간관계는 창밖으로 멋지게 쏟는 장대비와 같다. 집안에서 편안한 차림으로 내다볼 때는 그저 음미하기 좋은 낭만이지만, 바깥으로 나서는 순간 이겨내고 해쳐 가야 하는 악천후가 된다."
'인간관계'에 대한 재능을 갖지 않아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는 일이 드물다. 간혹 먼저 걸려오는 전화에 뒤늦게 한숨 쉬고 받는 정도다.
사람을 회피하진 않는다. 다만 먼저 나서지 않을 뿐이다.
그 불완전한 사회 생활을 공감해 주는 문장을 만났다. '인간 관계'가 창밖으로 내리는 장대비와 같다니...
실제로 그렇다. 창밖으로 가만히 들여다 보기에 꽤 낭만적이다. 차분하게 마음을 가라 앉혀주는 소리며 은은하게 어둑해지는 자연광이 마음까지 차분해진다.
다만 창을 열어 밖으로 나갈 용기는 없다. 창을 열고 나서면 아름답게 보이던 그 장대비가 무섭게 몸을 적시고 후유증을 남긴다.
나약함이 '약점'이 되지 않는 나이가 있다.
대략 우리 아이들의 나이쯤이지 않을까 싶다. 자기 발에 걸려 넘어져서 울어도 누구도 손가락질 하지 않는 나이다. '그럴 수 있지'하고 사회가 받아 들이는 나이.
그 나이를 그 자리에 두고 수십년을 지나왔다. 언젠가는 두발로 서 있기만 해도 박수를 받았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무언가를 역동적으로 하고 있어도 손가락질 받기 일수다.
겉으로 보기에 꽤 완전에 가까워져서 이제는 '나약함'이 '약점'이 되었다.
말실수를 하거나 자칫 걷다가 넘어질 뻔 한 순간에도 사람들은 쳐다 볼 것이며 때로는 비웃을 것이다. 몇번의 실수를 보여도 키득거리며 웃을 수 있는 젊은 시절이 스믈스물 지나, 이제는 '불혹'이라는 '흔들리지 않을 거라는 별명'도 갖고 있다.
그렇게 나이가 스스로를 규정하고 나니, 완전하지 않은 내면과 완전을 종용하는 외면 사이에 격이 커진다.
야수를 만나거든 결코 뒤를 보여서는 안된다. 뒤를 보이면 야수는 덥썩 그 등을 물어 버린다. 그처럼 때로는 '빈곳', '약점'을 내놓고 싶지만 창밖에 내리는 그 장대비가 칼날처럼 위에서 아래로 꽂아 내린다. 몇번의 경험은 해를 보낼수록 더 강하게 해를 입힌다.
결국 어린 시절에는 옷 젖는 줄 모르고 온몸으로 즐겼을 그 장대비를 이제는 누군가의 것으로 치부하고 구경할 뿐이다.
'하태완 작가'의 다른 말처럼 그렇다. '삶은 내가 운전하는 택시'를 닮았다. 오가는 손님을 아쉬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그저 온다면 반가운 것이고, 간다면 고마운 것이다. 내가 그렇듯 그들도 나름의 여정에 바삐 간다는 말에 꽤 위안을 받는다.
어제인가, 아이와 동네 문구점을 들렸다. 문구점을 향하는 바쁜 발걸음은 도로 어딘가에서 멈춰졌다. 아니는 아무렇게나 피어난 풀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나비를 쫒느라 멈췄다. 기껏 온 길을 다시 뒤로 물러 갔다.
그렇게 다시 목적지에서 멀어지는데 문뜩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낭만이라는 것은 굉장히 비효율적인 것이 아닐까. 하태완 작가의 비유처럼 '낭만'이나 '사랑' 같은 것은 몹시 효율적이다. 아무 이유나 목적도 없이 그냥 시간을 보내기 위해 만나는 만남. 아무런 생산적인 일도 하지 않고 만나서 백해무익한 소비를 즐기는 것.
그 용도를 알 수 없는 싸구려 플라스틱 장난감을 구매하는데 지갑을 열고 돌아오면서 오늘 구매한 저 장난감이 내일이면 부품 몇개를 잃어버린 채 분리수거함에 들어가겠구나 했다.
논리나 효율따위를 따지지 않는 나이에는 그것을 마음껏 즐겨야 한다. 어느 순간이 되면 저절로 나이라는 녀석이 찾아오기 때문에...
아이를 야단하면 아이는 '낭만'을 잃어버린다.
마치 어느 순간, 그 존재가 아예 없던 듯 살고 있는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