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대를 위한 비트코인과 화폐의 역사 - 청소년이 꼭 읽어야 할 과거·현재·미래 사회의 돈 이야기
김지훈(제이플레이코) 지음, 김혜원 그림 / 체인지업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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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태어나기 몇해 전, 서점을 갔다가 굉장히 독특한 제목의 책을 봤다. '코인'이라고 적혀 있었다. 독특하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열어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며칠 후, 강연장에서 강연을 마치고 정리를 하고 있었다. 정리를 하며 퇴장하시는 분들과 인사를 했다. 그때 한 중년의 여성이 다가왔다. 겉보기에 굉장히 비싸 보이는 밍크코트를 입고 계셨다.

'굉장히 열심히 사시는 것 같은데, 제가 중요한 정보 하나 알려 드릴까요' 하시고 '비트코인'을 말씀하셨다.

'속는 셈치고 비트코인을 500만원 너치만 사 놓으세요'라는 말을 하셨다. 금방 잊어버렸다. 다음날 호기심에 지갑을 만들었다. 며칠이나 지났을까. 코인은 아래로 아래로 움직였다. 얼마를 더 입금하고 잊어 버렸다. 다시 열어 봤을 때 코인은 엄청나게 올라 있었다.

그해, 주변에서 '비트코인'이라는 용어를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났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비트코인 방송을 했다. 심심찮게 뉴스에 비트코인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정치인 출신 작가와 과학자가 '비트코인'에 대한 설전을 벌이기 시작했고 법무부 장관의 여러 발언이 뉴스에 나왔다. 이렇게 레거시 미디어나 정부가 공식적으로 언급하는 '코인'이라는 것에 되려 신뢰감이 생겼다. 이후 세계적인 투자자와 세계 최고 부자가 부정적인 미래를 말했다. 다시 얼마 계속되는 거래소 해킹 문제가 발생했다. 그때마다 비트코인이 무엇인지에 대한 약간의 확신을 쌓아갔다.

그렇다면 과연 '비트코인'이란 무엇일까.

지나가는 그 많은 이벤트들이 본질을 흔드는데, 비트코인은 500만원에서 1억5000만원까지 상승했다. 무려 3,000%나 상승했다. 도대체 왜 비트코인의 가격은 올라가는 것일까. '돈이나 벌어보자'는 투기성 투자가 아닌 그 근본을 궁금해야 한다. 그렇다면 비트코인은 무엇일까.

비트코인은 디지털 코드다. 그 실체 없는 것에 돈을 투자하는 건 얼마나 멍청한 일이냐고 물는 사람도 있으나 그렇지 않다. 본래 화폐는 '명목화폐'라는 것이 존재한다. 인간은 좀더 편하고 가벼운 가치 저장 수단을 발견해내며 지금의 경제를 만들었다. 쌀보다는 은이 낫고 은보다는 명목화폐인 지폐나 낫다.

'실체가 없다는 것'은 굉장히 선구적 개념이다.

본래 '신용'이라던지, '금리', '대출'이라는 것도 모두 실체가 없다. 우리는 그 실체 없는 것을 담보로 '대출'도 받고 계약이나 거래를 한다. 꼭 토지나 주식이 아니더라도 '신용'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수 있다. 조금더 깊게 들어가보면 토지가 자신의 소유라는 것또한 실체없는 '법'이라는 공동의 허구적 상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다. '중국'에는 '토지'는 개인이 소유할 수 없다. '개인'이 소유한다는 개념 또한 꽤 최근에 만들어진 개념이다. '비트코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비트코인 비관론자들의 가장 큰 논리는 '실체 없는 코드'라는 것이다. '실체'라는 것은 굉장히 모호한 개념이다. '대한민국'에는 실체가 있을까. '종교'나 '기술', '회사', '특허', '법' 따위도 실체는 없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따르면 인간의 '인지혁명'은 허구를 믿는 능력 덕분에 일어났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믿으며 협력한다. '국가', '법', '종교', '회사', '주식시장' 모두가 허구다. 실체가 없다. 다만 수십억 인구는 이 허구를 믿고 협력하며 지금의 문명을 만들어왔다. 종이 위에 유화를 발라 놓은 것에 '예술'이라는 실체를 부여하면 그것은 모나리자가 되고 명작이 된다. 사람들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실체와 가치를 부여한다.

비트코인도 같은 원리다. 그것은 단순한 컴퓨터 코드다. 다만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코드가 가진 희소성, 탈중앙성, 신뢰성을 믿는다. 고로 가치는 발생한다. 모든 화폐는 결국 '신뢰'에서 출발한다.

원화의 가치를 믿는 사람들이 많을수록 원화의 가치는 올라간다. 단순하다. 어떤 경우에는 '원화'의 가치보다 '비트코인'의 가치를 믿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비트코인의 가치가 '원화'의 가치를 넘어 설 수도 있다. 모든 가치는 그렇게 형성된다.

'금'이나 '은'도 그저 빛나는 광물일 뿐이다. 사람들이 거기에 가치를 부여하면 가치가 생길 뿐이다. 결국 모든 화폐는 결국 '신뢰'에서 출발한다. 과거에는 금이 없었다. 금은 채굴이 어렵고 희소하다. 인간은 거기에 가치를 부여했다. 그 광물 덩어리가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원화'보다 더 가치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원화'와 '금'을 바꾼다. 상대적 가치가 발생하는 것이다.

비트코인의 미래를 이야기 할 때, 항상 빠지지 않는 것이 '워렌버핏'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다만 워렌버핏은 '가치투자'를 하는 사람이다. 적정 가치를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있을 때 그는 투자를 실행한다. 다시말해서, 그는 '주식'에 투자를 하는 사람이다.

과거 워렌버핏은 '금'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금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금을 사서 금고에 넣어두면 그 금은 거기서 그대로 있다. 땀을 흘리지도 않고, 아기도 낳지 않고, 이자도 내지 않는다.'

무엇이 떠오르는가.

바로 워렌버핏이 '비트코인'에 대해 한 말과 같다.

'비트코인은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는다. 지구상의 모든 비트코인을 25달러에 판다고 해도 사지 않을 것이다.'

실제로 비트코인의 투자 철학이 그렇다. 고로 비트코인과 워렌버핏을 연결 시키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과연 '금'은 투자에 적합하지 않은 광물일까. 그렇지 않다. 금은 교환이 꽤 불편한 가치저장 수단이다. 현재의 명목화폐는 금세공업자들에게 '금'을 맡기고 받은 영수증을 주고 받는 개념으로 시작했다. 금세공업자들은 현재 은행이 됐고 영수증은 화폐가 됐다.

기존 화폐에 대한 불편함이 생기면 점차 화폐는 진화하는 것이다. 조개껍데기에서 은으로 은에서 금으로, 금에서 달러로.

2008년 금융위기, 2020년 팬데믹, 각국 정부의 돈 찍어내기에 의해 기존 통화시스템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체감했다. 미국의 달러도 무한대로 찍힌다. 희소 자원이던 '화석연료'도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채굴된다. 그렇다면 무거운 영수중이 아니라 금세공업자가 내어 준 영수증으로 교환 방식을 바꾸었던 것처럼 금태환 폐지에 의해 달러가 독립해 낸 것과 같은 인류의 화폐 개혁이 일어나지 않을까.

비트코인은 총 2100만개라는 발행량 한도를 내새운다. 누구도 초과발행 할 수 없다. 중앙은행도, 정부도, 기관도, 그 누구도 주체성을 갖지 않고 오직 수학과 알고리즘, 분산된 네트워크 위에만 존재한다.

이 탈중앙화는 누구도 이 시스템을 조작할 수 없고 파괴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한다. 블록체인 위에는 모든 거래가 남고 전 세계 수 많은 컴퓨터가 이를 동시 검증한다. 고로 이 시스템을 조작하기 위해서는 전체 컴퓨터의 51%를 동시에 해킹해야 가능하다.

간혹 거래소 해킹와 같은 이슈는 있으나 '비트코인'은 역사상 단 한번도 해킹된 적이 없다. 또한 어떤 의미에서 '양자컴퓨터'가 개발된다면 어떠한가를 물을 수도 있다. 다만 양자컴퓨터가 개발되어 비트코인을 해킹한다고 하더라도 그때는 비트코인을 포함한 달러, 원화를 비롯해 모든 신용 시스템이 다 무너진다고 봐야 한다.

전쟁과 각 세계 간의 분쟁, 경제재제 속에서 비트코인은 아마 더 발전할 것이다. 수많은 거래소 해킹, 규제, 정치적 발언, 부정적 뉴스 속에서도 시스템은 단 한번도 넘춘 적 없다. 2009년 첫 블록이 생성되고 2025년까지 참여자는 꾸준히 늘었다. 기관 투자자도 늘었고 일부 국가는 법정통화로 채택한다.

비트코인이 흥미로운 이유는 그것이 굉장한 돈벌이 수단이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에 꽤 흥미로운 철학이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비트코인의 미래가 너무나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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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판소리 - 조선의 오페라로 빠져드는 소리여행 방구석 시리즈 3
이서희 지음 / 리텍콘텐츠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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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청가, 하여가, 단심가, 처용가...

학창시절 문학작품으로 만났던 작품들일 것이다. 아이가 요즘 어린이 고전을 읽고 있다. 그래서 더 반갑다. 그러고보니 판소리를 들어본 게 언제였던가, 싶다.

'판구석 판소리'는 출판사 리텍콘텐츠의 '이서희 작가' 글이다. 작가는 문화 예술을 쉽고 재밌게 풀어주는 작가로 활동 중이다. 제목 역시 '방구석 판소리'다. 역사적이고 예술적이면서 뭔가 박물관에서 볼 수 있을 것 같은... 혹은 예술의 전장에서 각을 잡고 들어야 할 것만 같은 판소리지만 방구석에서 편하게 들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신분을 넘어서는 사랑 이야기나, 부모를 위해 딸이 희생하는 이야기, 인생역전으로 신분 질서를 비틀어 내는 이야기, 왕을 속이는 권력 풍자까지...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넷플릭스 시리즈나 영화와도 주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사람 사는 이야기는 언제고 같다. 아무리 수백년이 지나도 사람 사는 모습은 거기서 가긴가 보다.

책의 하단에는 QR코드가 있다. QR코드를 찍으면 유튜브 영상과 연결된다. 이야기를 글로 읽으며 귀로 듣는다. 요즘 우리 아이들이 '오디오북'을 자주 듣는다. 눈을 허공에 두고 성우가 읽어주는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간다. 그러고보니 '판소리'는 조선판 오디오북이자 실시간 스트리밍 음악이지 않은가. 어쩌면 많은 조선 어린이들도 판소리를 통해 상상력과 문해력을 키우지 않았을까 싶다.

미국 하버드 대학의 음악인지 과학 연구팀은 인간의 뇌는 리듬과 스토리텔링이 결합된 음악을 들을 때 감정 공감 능력이 높아진다고 했다. 판소리는 그런 의미에서 복합적 자극제다. 청중은 소리꾼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북장단은 심장박동의 리듬을 갖는다. 스토리가 북의 리듬을 타고 심장으로 내리 꽂는다. 듣는 사람은 수동적 청자가 아니라 그 이상의 참여를 한다. 고로 판소리는 연극이자 음악이고, 책이자 대화인 셈이다.

이런 문화를 우리 조상들은 아주 예전부터 즐겼다. 많은 이들이 판소리와 오페라를 비교하기도 한다. 실제 판소리는 오페라와 닮은 부분이 있다. 다만 부르는 이와 듣는 이가 누구인가하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서양의 오페라는 왕과 귀족의 극장 속에서 자라났다. 거창한 무대 장치와 웅장한 오페라도 필요하다.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없는 위에서의 문화다. 반면 판소리는 평민과 장동뱅이의 입에서 시작했다. 거창한 무대 장치나 웅장한 오케스트라도 필요치 않다. 그저 북 하나면 충분하다. 또한 앞에 앉은 사람들을 관중이면서 대화상대로 인지했다. 수동적인 시청이 아니라 '소통'의 대상으로 두었다. 접근성 면에서 아주 뛰어나다. 본래 문화라는 것은 보존이 아니라 참여로 살아남는다.

요즘 아이들은 고전을 어려워하고 멀리한다. 과거에는 언제든지 쉽고 가볍게 들을 수 있던 이야기들이 점차 거리감이 생기면서다. 조선인들은 시장을 가거나 길거리에서 쉽게 판소리를 들었다. 그런 접근성은 현재 우리 아이들이 손에서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는 정도의 체감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방구석 판소리'는 고전을 우리 방구석으로 들여 오고자 한다.

문학 시간에 잠시 만났다가 평가문제로 받게 되는 고전이 아니라 이야기로 부르고 상상하며 즐기는 고전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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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적인 개인 투자를 위한 ETF 안내서
안해성 지음 / 지음미디어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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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에는 액티브 투자와 패시브 투자가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액티브 투자는 '내가 시장을 이길 수 있다'라고 판단하는 투자 방식이다. 패시브 투자라는 '시장을 이길 수는 없다. 다만 자본주의의 점진적 우상향을 믿는다'의 투자 방식이다.

자본주의는 기본 설계 자체가 그렇다. 우상향이 기본값이다. 인구가 증가, 생산성 향상, 소비 증진, 기술 진보를 신뢰한다. 보통 '미래는 밝다'라는 낙관주의자들이 '장기투자자'가 되는 이유다. 실제로 자본주의의 기본 설계가 그렇다.

액티브 투자의 경우에는 시장의 효용을 믿지 않는다. 시장은 합리적 지점을 찾아 정확하게 이동하는 것이 아니다. 거품과 저평가 구간의 틈새를 반드시 보이고 그 틈새를 찾아 선택적으로 투자하면 꽤 큰 투자수익을 얻을 수가 있다. 점진적 우상향 중에도 성장의 불협화음이 만들어지는 갭을 활용하여 더 많은 이익을 얻겠다는 투자성향이다.

패시브 투자는 꽤 느긋한 편이다. 시장은 어차피 점진 우상향이다. 시장과 싸워 이길 자신도 능력도 없다고 판단한다. 그저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인플레이션과 복리의 마법을 아주 느긋하게 따라가겠다는 투자 방식이다.

두 투자 방식에는 공통점이 있다.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신뢰다. 자본주의에 신뢰를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다시 말하자면 '시장 낙관주의자'들이 성공할 확률이 높은 편이다. 개중에서도 '액티브'는 역배팅이 가능하다. '갭'을 찾아 투자하기에 위와 아래를 찾아 맞춰 수익을 얻어내기도 한다. 다만 '패시브'는 '자본주의 시스템 설계'를 강하게 신뢰한다. 고로 '공매도' 나 '숏'을 합리적으로 보기 힘들어 한다. 장기적으로 시장이 우상향한다고 강하게 믿기 때문에 시장의 방향에 역행하는 투자를 선호하진 않는다.

실제로 '낙관주의자'는 부자가 되고 '비관주의자'는 스타가 된다는 말이 있다. 시장에 대해 낙관적인 사람은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고 그저 여유있게 기다린다. 다만 비관주의자들은 시장을 신뢰하지 않는다. 반드시 '위기'를 말한다. 실제로 이런 위기는 시장 사이클에서 종종 등장하는데 그때마다 그 타이밍을 맞춘 이들은 일종의 '스타'가 된다.

개인적으로 시장을 이길 자신이 있는 개인은 만나기 힘들다. 심지어 개인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시장을 이기긴 힘들다. 그럴 때는 자본주의의 기본 설계를 믿는 편이 낫다. 자본주의는 기본적으로 두발 자전거를 닮았다. 두 발 자전거의 특징이라면 나아가지 않으면서 넘어지지 않는 것은 있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면 무너지지 않고 멈추거나 속도가 줄어들면 반드시 넘어진다.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그렇다. 한 번 가동된 공장은 멈출 수가 없다. 비록 공장이 소비보다 많은 생산을 해도 공장은 끊임없이 생산물을 시장에 쏟아낸다.

필요한 만큼만 계획적으로 생산해내는 공산주의와는 원리가 다르다. 고로 어떤 경우에는 자본주의가 지나친 과잉 생산으로 공급과잉 현상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이런 공급 과잉으로 만들어진 현상이 '공황'이다. 이런 공급과잉을 해결하기 위해 '자본주의'는 스스로 '조정 메커니즘'을 발동시킨다. 가격이 급락하고 기업이 파산하고, 일자리가 줄어들고, 투자심리가 위축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과잉 생산과 과잉 투자, 과잉 부채는 정리된다.

누군가는 파산하고, 누군가는 손실을 입지만, 시스템 전체는 오히려 가벼워지는 셈이다. 이렇게 축소된 후에 다시 새로운 수요와 기술, 새로운 투자가 이어지고 시장은 재성장한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경기 순환이다.

'성장, 과잉, 위기, 조정, 회복, 다시 성장'

이 순환에서 특정 시점을 찾아내어 공격적인 투자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장기적으로 이 사이클이 만들어내는 큰 파동을 보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단기적 수익'이나 '성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큰 사이클'을 기다리지 못한다. 고로 꽤 많은 기관 투자자들이 '성과'를 위해 '액티브 투자'를 하지만 장기적으로 시장 성장률을 넘는 일은 흔하지 않다.

그렇다면 ETF는 무엇인가. 바로 후자인 패시브 투자를 말한다. 실제로 부의 편중 현상은 매우 극심한 편이다. 미국이라고 다르지 않다. 미국을 기준으로 최상위 5개의 기업을 포함한 90개의 기업과 나머지 1002개의 기업의 기여도를 보자면 거의 같다. 부의 편중은 위로 갈수로 극단적이다.

그렇다면 S&P500은 무엇일까.

S&P500은 미국을 대표하는 상위 500개의 기업으로 구성된 주가지수다. 이 지수 자체에 투자하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S&P500이라는 것이 결코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기업의 실적이 나빠지거나 시대에 뒤처지면 그 기업은 탈락한다. 그리고 성장하는 다른 기업이 그 자리를 채운다. 앞서말한 시장에서 부의 편중이 위로 갈수록 극단적이라고 했는데 S&P500은 끊임없이 스스로 우수한 기업을 교체하며 성장성을 유지하는 살아 있는 시스템이다.

개인이 매번 기업을 선별하고, 실력을 분석하고 교체하는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 시스템이 자동으로 그 작업을 수행해 준다. 장기적으로 보면 이 과정은 대부분의 액티브 투자자들을 이겨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와 '시장'에 대한 강한 믿음이다. 고로 아주 '국부론'이라던지 '현명한 투자자'와 같은 시장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경제 공부를 하며 마인드를 다잡기만 하면 된다. 실제로 워렌버핏의 말을 보면 그의 발언 대부분이 '시장'에 대한 신뢰다. 시장이 반드시 우상향한다는 강한 신뢰는 그를 세계 최고의 투자자로 만들었다.

실제로 S&P500은 1994년부터 2024년까지 30년간 11배의 성장을 했다. 다만 대부분의 투자자들이 그정도 수익으로는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액티브 투자'로 돌아선다. 실제로 대표적인 액티브 투자자 워렌버핏과 S&P500의 투자 수익률은 연평균 10%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물론 이 10%가 30년이 쌓였을 때 무려 14배의 차이를 발생한다.

다만 워렌버핏은 사실상 인류 전체를 봤을 때도 거의 없다시피한 투자자이다. 고로 버핏 스스로도 '대부분의 투자자들은 그냥 S&P500에 투자하는 것이 최선이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실제로 어떤 주식을 사고 얼마 뒤에 상한가를 맛 볼 수 있다. 아무개는 몇년만에 두 배의 수익을 올리기도 한다. 그러나 생각해 볼만한 문제는 워렌버핏의 연평균 수익률은 고작해봐야 19%다. 2배, 10배의 수익이 지속된다면 어째서 워렌버핏과 같은 사람이 더 나오지 않겠는가. 중요한 것은 몇 번을 맞춰내느냐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수익을 올릴 수 있느냐이다.

자본주의 투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복리의 마법'에 올라타는 것이다. 아주 간단히 말하면, 패시브 전략은 매주 저렴한 수수료와 안정성을 갖고 있다. 흔히 '시간;은 깡패다'라는 말이 있다. 결과적으로 아주 장기적인 관점에서 짧은 시간에 몇 배를 벌었냐는 것 보다는 꾸준한 우상향을 하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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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잘하는 아이, 수학도 잘하는 아이 - 20년간 수학을 가르치며 깨달은 것들
오선영 지음 / 한국경제신문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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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헬스트레이너 선생님께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다.

"회원님, 의사는 사후 관리를, 트레이너는 사전 관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건강을 잘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건강한 사람들은 의사를 만나지 않는다. 고로 의사와 헬스트레이너의 공통점이라면 건강을 관리한다는 것이고 차이점이라면 전자는 문제가 발생한 후에 만나는 사람들이고 후자는 문제가 발생하기 전에 관리하는 사람이란다.

그 예시가 꽤 적절해서 마음속 깊이 담고 있었다.

다만 사람들은 '트레이너'보다 '의사'를 더 자주 만나며 한 번 만나게 되면 꽤 오랫동안 고생하기도 한다. 사전 관리라는 것은 불확실성을 맞이하는 것이라 건강이 나빠질지 알 수 없는 상태로 만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건강에 있어서는 낙관적인 편이라 관리없이 지내다가 '병'을 마주하면 '불확실성이 해소'되며 다급하게 '의사'를 찾는다.

'관리'에는 '목적'보다는 '유지'가 중요하고 '치료'에는 '유지'보다 '목적'이 중요하다.

이런 맥락으로 볼 때, 교육도 비슷하다. 교육은 일정 소양을 채워 넣는 일이다. '관리'의 입장에 '문제가 발생하기 전'까지 대부분은 일상을 살아간다. 트레이너를 찾아 본 적 없는 이들이 곪을대로 곪은 상처가 덧나기 시작하여 병원을 찾는 것처럼 말이다.

곪은 기간이 길어질수록 '환부'는 깊어진다. 어떤 구간에서 '의사'는 포기해야 하는 구간을 설정하기도 한다. '한쪽 발'을 포기하거나 '시력'을 포기하거나, 때로는 '난치'라는 이름으로 '완치'를 목적으로 하지 않는 진료를 하기도 한다.

교육도 아주 비슷하다. 건강에 있어서 언제나 보기 좋은 '웨이트'만 중요한 것이 아니듯, '유산소'가 필요한 이들과 '웨이트'가 필요한 이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유산소'는 기초 체력을 길러주는 일이다. 기초체력이 없으면 대부분의 다른 운동에서도 지속성을 갖지 못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부터 유난히 사탕을 좋아하는 아이가 고학년이 되어 '비만'이나 '충치' 등의 문제로 병원을 들락날락 한다고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무너진 식습관'을 개선하는 것이다.

우리의 교육도 꽤 '학원'에 의존하는데 그런 의미에서 선행해아 하는 것은 '일상 습관'이지 않을까 싶다.

아침에 간단히 조깅을 하고 건강한 식단으로 아침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질병에 대한 예방이 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루 10시간, 20시간씩 헬스장에서 사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하루 1시간 이내의 꾸준한 습관 만으로도 상당한 육체적 건강을 유지할 수 있다는 말이다.

거기에는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얼마나 바쁜지를 가늠할 필요도 없다. 그저 하면 건강해지는 것이고 하지 못하면 그렇지 못할 확률이 높아질 뿐이다.

아이는 매일 일어나면 수학 문제집 두 장과 6급 한자를 몇자 공부한다. 당연히 강제로 하진 않는다. 모든 운동이 강제할 때 노동이 되듯, 공부도 스스로 할 때, 학습이 되지 그렇지 않으면 세뇌일 뿐이다.

아이가 이런 습관을 유지한지 벌써 3년이 넘었다. 지난 시간이 쌓여 어느순간 수학영재가 된다고 느끼진 않는다. 조깅의 목표가 '마라토너'가 아닌 것처럼 그저 의사를 만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기초체력을 기르는 일이다.

독서와 수학은 운동에서 '유산소'와 굉장히 닮았다. 독서와 수학이 무너지면 기본적으로 단숨에 좋게 만들기 힘들다. 어쩌면 거의 불가능하다. 기초체력이 튼튼한 경우 특정한 식단관리와 규칙적인 운동 습관이면 1년만으로도 어떤 이들은 눈에 띄는 변화를 만들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부수적인 공부에 앞서 '글을 읽고, 수를 읽는' 기초체력은 교육에서 반드시 중요하다.

강사는 어떤 의미에서 '의사'와 같다. 진단하고 개선하는 '사후처리'를 돕는 일을 한다. 그 말은 유능한 의사와 유능한 강사를 만난다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미 문제가 발생한 뒤에 만나야서 보통의 수준으로 다시 돌아가게 도울 뿐이다. 그렇다면 공부에 있어서 '트레이너'의 역할을 하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안타깝지만 이런 일을 하는 방법이란 기껏해봐야 '구몬, 빨간팬 등의 학습지' 혹은 '책' 밖에 없다.

수학은 나선형으로 교육과정이 이뤄진다. 기초를 모르고서는 그 위에 성을 쌓을 수가 없다.

적분을 하려면 복잡한 분수식을 다뤄야 한다. 분수를 다루기 위해서는 통분을 알아야 한다. 통분을 위해서는 최소공배수를 알아야 하고 최소 공배수를 알기 위해서는 약수와 배수를 알아야 한다. 약수와 배수를 알기 위해서는 곱셈과 나눗셈을 알아야 하고 곱셈과 나눗셈을 알려면 구구단을 알아야 하고, 구구단을 알려면 덧셈과 뺄셈을 알아야 한다.

미분을 배우려면 함수를 알아야 하고, 함수를 배우려면 방정식을 알아야 하고, 방정식을 알려면 사칙연산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린 재료가 무너지지 않는 성이 된다. 그러니 초등 수학이 쉽다고 덜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중에 어느 순간이 되서는 어디가 구멍인지 모를 환부가 발생하고 꽤 진지한 '의사'의 판단처럼 극단적으로는 아예 어떤 환부는 포기해야하는 진단이 나올 수도 있다.

교육이나 건강이나 기본적으로 습관 쌓기의 문제다. 바늘로 막을 것을 가래로도 못막는다고 나중에가서 고액과외와 명문학원을 찾아 다닐 것이 아니라, 저렴한 학습지라도 매일 꾸준하게 푸는 습관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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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입니다 - 빠다킹 신부의 행복 수업
조명연 지음 / 파람북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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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은 얼마나 큰가보다, 얼마나 자주 오는가가 더 중요하다.'

심리학자 '소냐 류보머스키'의 말이다.

사실 모든 것이 그렇겠지만 '빈도'가 '양'보다 중요하다. 1만년을 쫴어야 할 태양볕을 모아다 한번에 받는다고 더 많은 풀과 꽃이 자라는 것은 아니다. 뭐든 적당해야 하고 될 수 있으면 적당한 빈도로 나눠 받아야 한다.

'행복'이라고 다르겠는가. 행복을 양으로 측정할 수는 없지만 중요한 것은 '한방'이 아니라 꾸준함과 빈번함이다.

로또 1등만 당첨되면, 대출을 다 갚고 집을 소유하게 되면, 아이가 대학을 가면, 연봉이 오르게 되면...

수많은 이유로 미뤄지는 행복 중에 우리가 거머질 수 있는 소확행은 없을까. 큰 행복을 마다할 이유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작은 행복도 마다할 이유가 없지 않겠는가. 다시말해서 큰 행복으로 가는 길에 우리는 무수하게 작은 행복을 마주해야 한다.

하교한 아이를 안아주는 일이라던지, 맛있는 저녁식사를 한다는 등의 작은 행복 또한 얻어가며 큰행복으로 나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자기계발서들을 보다보면 '작은 성취'도 습관이 된다는 말이 있다. 실패도 성공도 모두 습관이다. 습관이 그것들을 만들기도 하지만 성취를 해내는 일조차 습관이 된다. 즉 100점이라는 달콤한 한 번의 결과가 아니라 매일 풀어내는 성취감에서 더 큰 행복과 지속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속적 성취를 느낀 이들이 100점에 다가간다는 것은 더 놀라운 일도 아니다.

행복이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행복은 어차피 한번 사용하고 말 '일회용품' 같은 것이다. 이미 지나간 행복을 다시 불러다 느낄 수도, 그것을 똑같이 재현해 낼 수도 없다. 온전히 그 순간에 주어진 것을 옴팡지게 받아 사용해야 한다.

하버드대학교 대니얼 길버트 교수는 행복에 대한 연구를 진행했다. 살람들은 대체로 큰 사건이 인생의 행복을 결정할거라고 믿겠지만 실제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그 사건이 미치는 영향은 예상보다 짧았다. 로또 1등에 당첨된 사람과 사고로 장애를 입은 사람은 둘다 1년이 지났을 때 비슷한 수준의 행복도를 얻는다고 한다. 이를 '심리학'에서는 '쾌락 적응'이라고 부른다. 좋은 일도 나쁜일도 결국은 다 일상이 된다.

우리의 몸에는 '항상성'이라는 것이 있다. 마치 우리의 체온처럼 어떤 외부적인 자극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 우리의 몸은 언제나 평균으로 돌아온다. 출렁거리는 낙폭을 상쇄하는 이런 항상성은 '행복'이나 '불행'도 마찬가지다.

만약 누군가를 좌절에 들게 하고 싶다면 한번의 시련으로 좌절에 들 수 없다. 그가 하는 모든 것에 시련을 두고 아주 작고 사소한 것을 빈번하게 실패하게 만들어 모든일에 무기력하게 만들어야 한다. 인간에게 좌절은 성장의 발판이 된다. 고로 한번의 좌절은 결국 그를 승리자로 만들어낼 것이다.

이처럼 누군가를 좌절에 드는 것을 예로들면 너무 쉽게 이해가 된다. 그렇다면 반대의 경우는 어떤가. 반대로 누군가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실제로 장기적으로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낙관적인 습관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다. 감사의 일기를 쓴다던지,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한다던지, 정기적인 운동을 하는 사람들 말이다. 이런 습관은 행복의 빈도를 높여 결국 원하고저하는 일에 달성할 확률 높인다. 실제로 한 실험에서는 매일 3가지 감사한 일을 기록하는 실험을 했다. 결과, 단 21일만에 참여자들의 행복지수가 상승했다.

결국 인생은 이벤트가 아니라 '리듬'이다. 매일 반복되는 박자 속에서 얼마나 많은 작은 즐겅무을 배치할 수 있느냐가 행복을 결정한다. 우리는 거대한 파도를 기다리는 서퍼가 아니라, 잔잔한 물결 위에서 노를 젓는 조정선수다. 한 번의 파도보다 매일 흔들리는 잔잔한 물결이 우리르더 오래, 멀리 데려간다. 행복은 크기가 아니라 빈도다. 조명연 신부는 우리에게 같은 이야기를 한다.

오늘 하루의 사소한 감사, 작은 기쁨이 반복될 때 인간은 가장 안정되고 행복하다고 말이다. '행복'은 사건이 아니라 '습관'이다.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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