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과 나침반 - 목표는 크게, 실행은 작게
하와이 대저택 지음 / 논픽션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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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 읽고 루틴처럼 하는 습관이 있다. 책을 뒤집어 바코드 옆에 '금액'을 확인하는 것이다. 확인해도 크게 별것 없다. 2만원이 조금 넘거나 안 되는 가격이다. 그러나 항상 책을 덮으며 '가격'을 본다. 그러면 새삼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다. 고작 '2만원'으로 이런 걸 얻게 되다니...

책값은 그것이 갖고 있는 정보에 비해 너무 보잘 것 없이 적다. 세상이 거의 공짜로 던져주는 이 고급 정보를 놓칠 수는 없다.

미국의 자기계발 강연자이자 기업가인 '짐 론'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변 다섯 명의 평균이 바로 나다."

책은 그런 역할을 한다. 나의 주변 다섯을 위대한 인물로 채울 수 있게 돕는다.

사람은 환경에 영향을 많이 받는 존재다. 워렌버핏과 빌게이츠가 식사하는 자리에 따분하지만 앉아 있어야 한다면 그들의 '대화 주제'를 들을 수 밖에 없다. 그들을 두고 '어제 봤던 쇼츠'나 '최근에 올라간 게임의 업데이트'를 이야기 할 수 없다. 사람은 환경에 맞춰 영향을 받는다. 식사 자리의 '제프 베조스'와 '찰리 멍거', '일론 머스크'가 앉아 있다면 어찌 될까? 이들의 대화에 끼지 못해 고립되거나 어떻게든 주제를 찾지 않을까.

그런 식사 자리가 1회라면 입을 닫고 앉아 있을 수 있겠지만 주 1회, 월 1회라면 분명 나의 관심사도 그들과 같아질 것이다. 말하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에도 변화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주변 다섯의 평균이 '나'인 것은 맞다.

그리고 '책'은 그런 그들을 너무 값싸게 한 자리에 모아 둘 수 있게 한다.


'하와이 대저택'의 '밤과 나침반'도 그러한 역할을 충분히 한다. '밤과 나침반'은 '하브 에커'의 '백만장자 시크릿'를 읽고 난 뒤의 감상이 적혀 있다. '하브 에커'의 '백만장자 시크릿'은 나역시 굉장히 인상 깊게 읽은 책이다. 벌써 5년도 전에 완독했다. 이 책을 완독했을 때도 뒷면의 가격을 살폈을 것이다.

값싸게 나의 아침, 점심, 저녁 식사에 그들을 초대할 수 있는 것.

그들과 함께 식사한 이들을 초대할 수 있는 것. 그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아이폰은 정기적으로 '시스템 최적화', '업데이트'를 한다.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다 보면 특정 앱이 갑자기 꺼진다거나 화면 버벅거림을 느낀다. 이런 충돌을 막기 위해 업데이트와 최적화 작업은 필수적이다. 개발자가 아무리 테스트를 해도 실제 사용자 수백명이 쓰다보면 예상치 못한 오류가 발생한다. 외부 해커에 의해 바이러스가 침투될 수도 있다. 이것을 꾸준하게 업데이트를 통해 보완해 나가야 한다.

독서는 이런 업데이트 역할을 톡톡히 한다. 벌써 5년이 넘었던 '백만 장자 시크릿'의 내용을 다시 업데이트하게 됐다.

어떤 글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내용이고 더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그것에 대한 '시스템 최적화'가 필요하다. 꾸준하게 내용을 상기시키고 보완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밤과 나침반'을 읽으며 다시 '백만장자 시크릿'의 내용을 떠올려 보니 그렇다. 여기의 내용은 '일론 머스크', '빌게이츠'와 같은 도달하지 못하는 수준의 '부자'를 말하지 않는다. 우리 주변에 있는 이웃집 백만장자의 이야기를 담는다.

비슷한 도서는 '토머스 J 스탠리, 윌리엄 D 댄코'의 '이웃집 백만장자'라는 책도 있다. 이 도서에서 꽤 흥미로운 것은 실제 부자와 부자처럼 보이는 이들의 간극이 생각보다 크다는 점에 있다.


'독일 고급 승용차'를 구입하거나 리스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을 기준으로 이들중 백만장자로 분류되는 이들은 3분의 1밖에 되지 않는다. 결국 고급 승용차 구매자의 3분의 2는 자신의 능력을 넘어서는 지출을 '자동차'에 하는 셈이다.

'자산'은 '씨앗'를 심고 거기서 발생하는 '수확물'을 얻는 일처럼 관리해야 한다. 다만 그러나 '씨앗'을 볼 때, '미래의 수확물'이 떠오르지 않고, '맛있는 식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결코 풍요로운 '수확'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대부분의 자산가는 실제로 '고소득'보다는 평균적인 급여를 가진 이들이 많다. 이 또한 '이웃집 백만장자'에 나오는 내용이다.

흔히 고소득으로 분류되는 '의사'라는 직업군은 '자산가'로 속해지지 못했다. 결국 소득보다 중요한 것은 '지출관리'인 셈이다. 지출을 관리하는 것은 사실 '삶'을 관리하는 바와 같다. 어떤 선택을 하던, 대부분의 활동에는 '지출'이 발생한다. 고로 '지출'을 관리하는 일은 '선택'을 관리하는 일이고 '선택'을 통제하는 일은 '삶'의 능동성을 갖는 일과 같다.

이런 류의 책은 종종 찾아오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처럼 나의 삶에 다가와 새로운 자극을 주고 떠난다. 또 잠시 동안 서재에 다시 꽂혀 있다가 어느 순간 다시 밖으로 나와 나에게 새로운 자극을 주지 않을까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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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세계는
늘리혜 지음 / 늘꿈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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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환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소설은 주인공이 눈을 뜨며 다시 일상을 시작한다. 꿈에서 깨어나면 현실은 잠에 들기 전과 달라진다. 사용하는 일기장의 별자리가 달라지고 만나는 사람들의 관계도 달라진다. 하루가 지나면 하나의 챕터가 끝나듯 꿈과 일상이 달라지고 그 안에서 만족 혹은 아쉬워하는 감정이 든다.


 어떤 세계에서는 전혀 생각치도 못한 일상이 펼쳐지고 어떤 일상에서는 있음직한 일들이 혹은 꼭 바라는 일들이 벌어진다. 그러나 각각의 세계마다 주인공 '아영'은 그 세계에 맞춰 삶을 살아간다.


 '늘리혜' 작가의 인스타그램은 꽤 일관적인 분위기를 가진다. 감성적이고 몽환적이다. 소설 '나의 세계는'도 그렇다. 표지 역시, 소설이 담고 있는 분위기와 잘 맞는다. 그간 '늘리혜 작가'의 피드에 꾸준하게 올라오던 다양한 그림체와도 닮았다. 표지를 보며 그 분위기를 대략 짐작하고 첫장을 넘겼다.

 책의 흐름은 굉장히 빠르고 직관적이다. 300쪽이 조금 안되는 분량이지만 금방 읽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 챕터 하나를 나누는 기준인 '몽환적인 꿈'이 다음 세계관에 대한 기대를 불러 일으키는 것 같다. 주인공이 다음 세계는 어떻게 변해 있을까. 챕터 하나가 끝날 때마다 펼쳐지는 '일곱 색깔의 나라'는 어쩐지 예전에 자주 들었던 '몽환의 숲'이 떠오르게 한다.


 한 번의 선택으로 '다른 세계'가 열린다. 판타지와 로맨스를 이야기는 오간다. 간질 간질하면서도 끝까지 읽도록 만든다. 이웃이면서 단짝인 세라와 그녀의 짝사랑인 건우의 고백으로 내용은 시작된다.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벌어지는 현실에서 작은 선택마다 그 차이로 벌어지는 간극이 꼭 '나비효과'를 보는 듯 하다.


 소설의 주제와 별개로 예전, '늘리혜' 작가의 시 중에 매우 공감되어 기록해 둔 시가 하나 있다.  '모든 모습의 나에게로'라는 시다.


가끔 이런 상상을 하곤 해

각 시절의 나를 한 곳으로 모으면

서로 어떤 대화를 나눌까

어떤 눈으로 서로를 바라볼까.


<모든 모습의 나에게로>_늘리혜

*


 그 글이 5년도 넘었는데 글의 분위기는 여전히 일관적이다.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고자 하는 '매개'로 '나'라는 자아가 있고 그들은 서로 같은 '나'이면서 때로는 완전히 다른 '나'이기도 하다. 소설이 주는 분위기와 비슷해서 얼른 생각이 났다.


 기억이 어렴풋해지는 매우 철지난 시절의 '나'로 배경이 설정되어 있다. '교복'을 입고 학교를 다니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살았을까. 소설을 읽으며 잊혀졌던 그때의 '나'로 돌아가게 된다. 어쩌면 페이지를 넘기며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것이 '독서'라는 매력이 '늘리혜 작가'의 소설과 같은 매력인듯 하다.


 그간 해왔던 작은 선택으로 주변이 달라지고 '나' 자체도 달라진다. 소통할 수 없는 여러 순간의 나는 과연 모여서 어떤 대화를 나눌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봤다.


 소설의 세계관에는 '일곱 색깔 나라'가 있다. 각 나라는 서로 차원 달라 현실에서는 이어지지 못한다. 이런한 설정은 판타지 혹은 공상과학스럽지만 누구나 한번쯤 해 봄직한 '감정'과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일상을 닮았다. '빛'으


 결과적으로 수많은 세계를 지나도 결국 남는 것은, '매 순간'선택해온 '나'라는 사실뿐이다. '빛'을 고정했더니 '시공간이 왜곡된다는 상대성 이론처럼 나를 한점에 고정하자, 시간도 관계도 휘어지며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 꽤 흥미로운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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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디서나 배웠다
신정일 지음 / 파람북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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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는 말했다.

"나 이외는 모두가 다 나의 스승이다."

원효대사는 썩은 해골물에서도 배웠고 뉴턴은 떨어지는 사과를 보고 배웠다. 다산 정약용도 흔들리는 대나무 잎을 보며 사람의 마음에 대한 성찰을 했다. 그러고보면 반드시 '스승'이라는 명찰을 달고 있지 않아도 주변 모든 것이 '스승'이 되는 듯 싶다.

가르치고자, 자세를 고쳐앉고 '내리가르침'을 주지 않는다고 스승이 아닌 것은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작은 미물이나 일상의 현상도 모두 가르침을 줄 수 있는 '스승'이 되기에 무언가를 배우겠다는 '능동적인 자세'가 있다면 세상은 '배움' 투성이고 주변은 스승으로 넘쳐난다.

사단법인 '우리 땅 걷기'의 대표, '신정일 대표'는 배움에 대한 자신의 사색을 보기 좋게 정리하여 도서로 담아 냈다. 책을 읽다보면 그런 스승을 만날 일이 더 흔해진다. 사람의 일상이란 쳇바퀴 돌듯 같은 궤도를 돌아가는 와중에 조금의 전진을 하는 나선형 구조를 띄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삶은 비슷한 형태을 띄고 변형된 다른 형태의 다른 문제를 마주하는 바와 같다.

나의 궤도가 볼 수 있는 시야각이 있고 다른 궤도가 볼 수 있는 시야각이 따로 있으며 이 둘에는 서로 사각지대가 존재하여 어떤 이는 문제를 해결할 완전히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지 못한다. 다른 이의 문제 해결 방식과 시선을 조금만이라도 경험해 본다면 이는 내가 그리는 궤적을 더 크게 넓힐 수 있는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내가 그리는 궤적을 더 크게 그려내는 행위지 않을까 싶다. 공자의 말씀을 담은 '논어'에는 '인무원려 필유근우'라는 말이 있다. 멀리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가까이에 근심이 생긴다는 말이다. 어떤 경우에 사건을 '역사적'으로 생각하게 되면 참, 별거 아닌 것 처럼 보여지는 경우가 있다. 2000년 전의 스승이 알려준 방법을 2000년 후에 적용한다는 것 또한 문제 해결 방식을 꽤 인류 전방향으로 살피는 것과 같다.

며칠전 운동을 마치고 사워를 하는데 꺼끌꺼끌한 수염을 면도기로 잘라냈다. 무의식적으로 같은 결 방향으로 잘라내는데 사실 면도를 아무리해도 잘 잘라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그것은 '원래 그렇구나'하고 벌써 20년 가까이를 살았던 듯 하다. 그러다 불현듯 아무개의 말이 떠올라 반대 방향으로 면도를 했더니, 말끔하게 수염이 잘라졌다.

참 별것 아닌 일이지만 어쨌건 40세의 나이에 발견하지 하지 못했더라면 아마 수십년이나 같은 방식으로 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어디서 보건데, '원래 그렇다'라는 사고방식이 참 위험하다 한다. 본디 '원래'라는 것은 없으며 그 말은 스스로가 변하지 않기 위해 방어기제로 사용하는 말이라 했다. '이 방어 기제'는 변하지 않는다는 긍정적인 효과를 주는 것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 갇힌다는 부정적인 영향도 준다.


다시말해 나이가 들면 사람은 귀는 닫고 입을 열게 되는 경우가 많은데 점차 자신의 삶에서 확증편향적으로 '자신만의 '옳다'에 갇혀 타인의 '옮음'에 귀를 닫고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스스로의 세계에 완전히 갇혀진 사람을 '꼰대'라 부르는지 모른다. 고로 스스로 '나이든 꼰대'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잘못될 수도 있다.', '나이와 지위', 그것의 '생물과 무생물'의 여부를 따지지 않고 스승이라 여기가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 출간과 상관없이 매일 6천자 가량 글을 쓰고 있는데, 언젠가 지인이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매일 할말이 생기나요'

왜 그런고 생각해봤더니, 일상을 산다면 크게 사색거리가 없을 것 같다. 다만 나의 취미가 독서이다 보니, 책 속에서 다양한 생각을 할 기회가 많아진다. 그런 의미에서 '독서'는 꽤 많은 것은 언제 어디서든 배울 수 있는 괜찮은 취미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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퀀텀의 시대 - 인류 문명을 바꿀 양자컴퓨터의 미래와 현재
이순칠 지음 / 해나무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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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나무' 출판사에서 출간 된 '퀀텀의 세대'는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었다. 이순칠 교수의 책을 '퀀텀의 세대'를 통해 처음 접했는데, 그 덕에 나름 '양자역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맥락'을 파악할 수 있는 '척'할 수 있게 됐다.

개인적으로 '이순칠 교수'의 '퀀텀의 세대'는 놀라울 정도로 쉽고 재미 있었다. 해당 책에서 '대중'을 상대로 '양자역학'을 설명하기 위해 다양한 예시와 설명이 들어갔는데 그때 사용했던 일부 '예시'는 내가 종종 다른 무언가를 설명할 때 유용하게 쓰여기지도 했다.

인상 깊었던 예시는 '조르 쇠라'의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다. 세상에나, 이렇게 이해가 쏙쏙 잘 되도록 설명하다니..., 감탄하며 '이순칠'이라는 이름이 뇌리에 '빡'하고 들어왔던 기억이 있다. 벌써 4년 전에 읽었던 책이다.

그의 비유는 이랬다.

"어느 화창한 오후 파란색 호수, 초록색 나무와 잔디밭, 울긋불긋 화려한 복장으로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이 원근에 총천연색으로 별쳐져 보인다. 피크닉을 즐기고 있는 여자의 보라색 치마폭에 부튼 매우 작은 벌레 한마리를 생각해보자. 벌레의 몸은 몇 mm 정도만 볼 수 있다. 그러면 작은 벌레가 보는 세상은 오직 보라색으로만 이뤄져 있을 것이다."

이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는 예시는 내가 그 뒤로도 '근시안적 사고'의 틀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설명할 때 종종 빌려 썼다.

벌써 햇수로 6년이나 지난 책의 한 페이지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그 비유가 너무 신비하고 쉽고 놀라울 정도로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순칠 교수는 '분야 전문가'의 능력을 띄어 넘는 재능을 타고난 인물이라고 확신했다.


참고로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은 점을 찍어서 그림을 그리는 점묘법 그리미다. 치마폭의 벌레는 빨간색과 파란색의 점이 꽤 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세상을 발견한다. 다만 이 벌레가 조금만 왼쪽으로 이동하여 어느 순간 여인의 치마폭을 벗어나면 난데 없이 규칙을 벗어나는 '초록색 점'이 발견된다.

규칙은 여기서 파괴된다.

물론 이 글은 '출판사'에서 도서 협찬을 받고 작성되는 글이기는 하지만 고작 2만원짜리 도서 협찬을 받았다고 이정도의 호들갑을 떨어주진 않는다. 명확하게 당시 이순칠 교수의 글을 읽고, '도대체 다음 책은 언제 내시는 거야!!'하고 기다리던 중이었다.

이번 이순칠 교수가 출간한 '퀀텀의 시대'는 전작인 '퀀텀의 세대'과 상당히 유사한 이름을 갖는다. 실제로 두 권의 책을 모두 소장하고 읽었던 독자로서 두 권은 모두 같이 읽기를 권장한다.

'양자역학'이라는 무시무시한 소재를 다양하고 컬러플한 사진과 그림을 통해 설명하니 마치 생각보다 쉽네, 하고 느껴질 정도다. 이번 퀀텀의 시대는 도서의 중반까지는 '퀀텀의 세대'와 같이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먼저 하도록 한다.


이후 책의 오른편 페이지가 왼편 페이지 두께보다 줄어드는 순간부터 '그 활용'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적절하게 사용되는 유머와 전공과 관련 없이 흥미로운 역사적, 인문학적 사례와 사건이 적시 사용한다.

책은 글과 사진도 많고 글 간격도 시원시원하여 '비전공자'가 보기에도 후딱후딱 넘어가는 글이다. 페이지가 300페이지도 되지 않아 시작할 때 부담도 없다. 예정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그의 세번째 도서도 벌써 너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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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터널 메모리 : 기억을 캐는 의사들
박민 지음 / 이른아침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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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배경은 이렇다.

서기 2030년, 뇌파를 '시각'과 '청각' 정보로 바꾸어, 과거의 기억을 볼 수 있도록 재현해주는 '기술'이 발달한 시대다.

이 기술을 BVS(Brain Visualization System, 뇌 시각화 시스템)이라고 한다. 소설의 흥미로운 점은 먼 미래로 시대를 설정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다. 2030년이라는면 아이폰 시리즈의 숫자가 높아지고 카메라 화질이 어쨌다저쨌다하는 정도를 이야기를 할 수 있을 정도의 가까운 미래다.

일상이 크게 변하지 않은 어느 미래에 미래기술이 병원에 도입되면 어찌 되겠는가. 소설은 기술 도입 이후 발생하는 이야기를 담는다. 소설의 무대는 '시온대학병원', '신경외과 전공의'들의 시선에서 미래 기술이 사용되는 과정에 여러 사건이 모여 있다.


SF처럼 보이면서 추리소설의 성격을 띈다. 분량이 많지 않고 문체가 가벼워 쉽게 읽히고 재미있다. 의식없는 환자의 생사를 두고 의료진들이 인간으로써 하게되는 '도의적이고 윤리적'인 고민부터 '치료'에 어떻게 영양을 주는가. 그런 부분이 꽤 흥미롭게 보여진다.

BVS가 없는 시대에 '생명'에는 '가치'를 매길 수 없었다. 그 사람의 과거가 어찌됐건, 상황이 어쨌건과 상관없이 '생명'이라면 무조건적으로 우선시됐다. 가만 환자의 과거를 시청할 수 있는 시대가 되면서, '살릴 가치가 없는 사람', '사는게 더 고통인 사람'을 비롯해 의료진이 만나게 되는 다양한 '생명의 가치'가 발생한다.

여기서 '삶'에 대한 '결정'을 지을 수 있는 사람들이 '시청각 자료'를 보는 '제3자'들이 되면서 다양한 생각을 하게 한다.


소설 중반에 '이주찬 선생'이 나온다. 학생들보다 저 자신이 살고자 했던 이기적인 선생으로 그려졌다. 다만 추후 BVS를 통해 전후 사실 관계를 다시 보며 내용이 반전된다.

우리는 얼마나 단편적인 내용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가. 실제로 어떤 사건은 여지 없는 진실처럼 보이는 허구이며, 어떤 사건은 지나친 허구처럼 보이는 진실도 있다. 이러한 사건의 아이러니 속에서 얼마나 많은 오해가 발생하는가. 또한 사람이 죽고 나면 그 오해는 변하지 않는 '진실'로 굳혀져 얼마나 많은 억울한 사건이 있을 수 있겠는가 생각해 볼 만한 이야기가 많았다.

소설에서 들여다보기에 BVS가 구현한 진실도 어찌보면 한 사람의 입장에서만 바라 본 기억이지 않은가. BVS가 보여준 꽤 명징한 진실조차 진실의 반틈밖에 보여주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어쩌면 죽어가는 이들의 기억을 데이터로 변환하는 일이 더 많은 진실을 말하지는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사람의 기억을 데이터로 변경하여 시각화하는 일은 실제로는 구현하기 꽤 어려운 먼 미래의 기술이라 한다. 다만 어떤 면에서 'CCTV'나 다양한 온라인상의 기록처럼 데이터화 된 자신의 낯선 모습은 지금도 언제든 볼 수 있다.

'블랙박스', 'CCTV'과 과 같이 BVS 또한 아무리 기술이 발전해도 언제나까지 진실을 보여주기에는 불완전한 기술이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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