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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학 중 영화이론에 관한 공부를 하였으나 여기에서 영화학에 관한 지지를 선언하고 일상적인 영화에 관한 자유로운 대화를 비하하겠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가 발전하기 위해선 둘 모두가 필요하며, 그 둘이 상호 작용을 통해 발전할 때 그들이 중간에 놓고 애정을 가지고 다루는 '영화'가 함께 발전 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굳이 영어로 된 원문을 시간을 들여 어설프게나마 우리말로 바꾸어 놓아 보는 이유는 이제는 조용해진 <디 워>로 불거졌던 영화비평의 효용성에 관한 논쟁에 있어서 영화에 관해 깊이 사유하는 것이 필요없는 것은 아니다고 말하고 싶어서입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진짜 이유는 내 자신을 위함, 즉 원문을 읽어내려가며 해석하는 과정을 통해 내 스스로의 영화에 관한 애정을 유지하기 위함일지도 모릅니다.

데이빗 보드웰은 영화에 관한 책 중 베스트셀러이며 몇 몇 학과에선 교과서(혹은 그와 거의 비슷하게)로 사용하는 <Film Art>의 저자입니다. 저 역시 10여년전 이 책을 읽었고, 아직도 제 책장에 이젠 제법 낡은 모습으로 꽂혀 있습니다.

원문은 데이빗 보드웰과 그의 아내의 블로그에서 찾으실 수 있습니다. 

  

   
 

Studying Cinema
David Bordwell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영화에 대해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일반적인 방식에서의 영화에 관해 이야기하고 사고하는 것이 학문으로서의 영화학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 것일까? 이 두가지의 영화에 관해 생각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도 하지만, 몇몇 차이점은 아무런 문제가 없다.

첫번째, 일반적인 영화에 관한 담론은 평가를 내리는데에 그 중점이 있다. "그 무비 정말 죽이더라!" "정말? 난 별로던데." 다시 말해, 이처럼 영화 리뷰어들은 티켓을 주고 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지 없는지를 말하며 영화를 평가하는데 중점을 둔다. 영화학 역시 이러한 평가 행위를 수반할 수는 있지만, 대부분의 영화학자들에게 특정 영화를 평가하는 것은 주요 목표가 아니다.

두번째로, 일반적인 대화에서는 역사적인 부분이 등한시되는데, 이러한 이유로 결국 작품은 전통이나 긴 맥락의 트렌드 위에서 논의되지 못한다. 대부분의 리뷰어들은 작품을 영화 역사의 맥락 안에서 사유하는 방식을 갖고 있지 못하다. 영화 역사의 맥락 안에서 작품이 이야기 되어질 때에도 그것은 대개 현재에 국한되며, 리뷰어들은 작품이 현재 사회 이슈를 반영한다고 말한다.

세번째이자 가장 중요한 점. 영화에 관한 일반적인 대화는 그리 분석적이지 못하다. 영화의 부분들은 서로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관해 이야기 되어지지 못하고, 플롯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스타일은 분석되어지지 못하고, 작품이 생산하고자 할지도 모를 사상적 공작은 연구되지 못한다. 리뷰어들이 설사 이러한 부분들에 관해서 "거슬리는 몽타지"라던지 "일관적이지 못한 모티브" 등이라는 표현으로 이야기를 할 때에도, 이것은 아주 미미할 뿐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영화학은 영화와 영화가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과정을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영화학자들은 왜 영화가 이러한 모습이며, 왜 영화가 이러한 방식으로 만들어졌으며, 왜 영화가 이러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는지와 같은 물음에 집중한다. 대부분의 영화에 관한 일상적인 대화와 대부분의 영화 저널리즘은 "왜"라는 질문을 하지 않는다.

무언가를 설명하는데에는 어느 정도 그것을 분석하는 과정이 수반된다. 분석은 전체를 연관되는 부분들끼리 나누고 그들이 어떻게 함께 작용하는지 고민하는 것이다. 따라서, 1930년에 특정 스튜디오가 어떻게 일을 했는지에 흥미를 가진 영화학자라면 그 스튜디오의 운영체계를 분리할 것이며, 학구적인 영화 평론가라면 작품을 씬이나 시퀀스 등으로 쪼개어 전체적으로 어떻게 구성되었는지를 연구할 것이다. 또한, 1930년에 스튜디오가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설명하고자 하는 영화역사학자는 스튜디오의 매일매일의 일과를 묘사할 것이며,  학구적인 영화 평론가는 어찌하여 그 씬이 특정한 의미를 지니며 특정한 효과를 야기하는지를 심도 깊게 묘사할 것이다. 분석과 묘사는 일반 대화와 영화 리뷰에서 매우 드문 일인데, 이는 비단 시간과 공간의 부족 뿐만이 아니라, 영화학자는 다른 집단에겐 그리 필요가 없는 '설명'에 흥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설명엔 여러 다른 종류가 있다. 역사학자들은 x와 y라는 현상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z라는 모습을 만들어내는 방식에 관한 일반적인 설명을 찾는다. 영화 분석학자와 이론가들은 x와 y가 주어진 시간에 어떻게 함께 작동하여 z라는 전체를 만들어내는지에 관한 기능적인 설명을 구한다. 이러한 기능적 설명은 다시 말하지만 일반적인 대화나 영화 리뷰에서는 그리 다루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영화학자들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 할 때, 그들은 또한 해석, 즉 우리들이 영화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확실치 않은 의미에 관한 주장들도 제공한다. 해석은 특정한 종류의 기능적 설명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해석은 영화의 스타일, 구성, 대화, 플롯과 같은 요소들이 영화 전체의 중요도에 기여한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영화학에 관한 가장 충실한 정의를 내리자면 그것은 질문을 제안하고 그것에 대답하려 노력하는 과정일 것이다. 영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대화는 이와는 달리 정보 공유, 다른 이들과의 사회적 유대, 그리고 다른 이들의 취향에 관해 알아가는 것 등과 같은 목적을 지닌다. 물론 영화학도 이러한 목적을 지니지만, 다른 학문들과 마찬가지로 토론과 비평을 통해 질문에 대답하려 노력한는 점에서 다르다. 결국, 영화학은 대답을 위해서 설명이 필요한 특정 종류의 질문들에 그 중점을 둔다. 

그러나, 영화학과 매우 닮은 모습을 지닌 영화에 관한 일상적인 대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팬들이 내놓은 이야기들이다. 팬문화는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씬에 관해 종종 매우 자세하게 묘사하기를 좋아하며, 때론 분석까지 이르기도 한다. 팬들의 대화 역시 다른 대화들과 마찬가지로 평가적인 부분들이 있으나, 그들의 전문화된 담론은 학계에서 진행되는 담론과 같기도 하다. 본 웹사이트의 다른 곳에 제안된 논쟁들은 이론, 역사적 논쟁, 그리고 영화분석이 결국 특정 질문에 관한 대답, 즉 설득력 있는 설명을 제안하기 위한 노력이라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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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오즈 야스지로 한나래 시네마 17
하스미 시게히코 지음, 윤용순 옮김 / 한나래 / 2001년 1월
절판


친근한 사람들이 나란히 같은 방향으로 시선을 던져 같은 대상을 시계에 담고 있을 때 오즈의 작품에는 꼭 헤어짐이, 출발이, 죽음이 도입된다.
[...]이 숏이 가져오는 신선하며 강한 충격은 딸을 생각하는 부모의 감개에 보는 자가 공감하기 이전에 화면에 나타나 있지 않는 툇마루를 사이에 두고 외부와 내부가 서로 통한다는 점에서 오는 것이다. 시선과 그 대상이 연속되는 숏으로서 나타나 그 인과 관계가 너무나 명백할 때 오즈에게 있어서는 꼭 내러티브에 사건이 도입된다. 그것은 헤어짐이기도 하며, 죽음이기도 하고, 가족의 붕괴이기도 하다. 그 순간에 추상적인 밀폐 공간은 갑자기 터무니없이 열린 세계로 변모한다.-127쪽

[...] 따라서 모든 작품은 영화가 조건으로서 짊어진 절대적인 부자유로부터 눈을 돌리게끔 하기 위한 일시적인 위안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 관객이 따분해 하지 않는 작품은 존재하지 않는 문법에 따르듯이 찍힌 부자유한 영화이다. 또한 가장 자유스러운 영화는 전략적으로 그 부자유를 철저히 함으로써 영화 자체의 한계를 두드러지게 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오즈 야스지로는 더없이 자유로운 작가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131쪽

[...] 영화인들로부터 시선의 어지러움이라 하여 경멸되는 아주 초보적인 기술적 실수를 그가 평생 고집한 것은 왜일까? [...] 그것이 류 치슈와 같이 적의가 없는 것이든, 하라 세츠코와 같이 우수를 자아내는 것이든, 상대의 눈동자를 정면에서 언제까지나 지켜 보는 일은 우선 없다. 우리들이 어떤 종류의 눈동자에 끌린다면 그것은 여기를 직시할 때가 아니라 무언가에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이나, 그렇지 않다면 문득 시선을 비켜 눈을 내리뜨거나 하는 때임이 틀림없다. [...] 다음으로 거론되어야 하는 것은 영화 자체가 그 한계 때문에 날조하지 않으면 안되는 허구이다. 그것은 응시하는 두 사람의 눈동자를 같은 하나의 고정 화면에 담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하는 영화의 한계로부터 도출된다. 응시하는 두 사람을 나타내는데는 지금 말한 바와 같이 시선의 중심에 놓인 카메라를 180도 팬하든가, 역구도의 숏에 의해 두 개의 화면을 연속시키는 것밖에 없다. 그러나 어떤 것이든 교착交錯하는 시선의 공간적인 동시성은 시간적인 계기성에 대체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응시하는 두 개의 눈동자에 대하여 영화는 언제나 패배할 수 밖에 없다.-137쪽

오즈의 서정은 서로 마주 보는 것에서도 아니고, 시선의 대상이 된 것이 가질 수 있는 심리적 상징성에 의해서도 아닌, 그저 같은 하나의 것을 두 사람의 존재가 동시에 눈에 담는다는 몸짓 그 자체에 의해 형성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이미지에 종속되지 않는 동적인 서정이라고 불러야 한다.-141쪽

오즈는 친한 사람들이 결코 정면에서 마주 보는 일 없이 무언가에 기대어 시선을 평행하게 던지는 것을 비스듬히 뒤에서 찍는다. 그들은 등과 허리와 그리고 때로는 발로 공감을 표현한다. 오즈에게 있어서의 서정은 따라서 움직이려고도 하지 않는 등이 이 한없는 웅변함 보여줄 때 최고조에 달한다. 남자들의 우정에 있어서 바의 카운터가 특권적인 무대 장치가 되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143쪽

[...] 이런 자세가 다다를 곳은 결국 만년의 오즈를 하나의 완성태로 상정하여 초기나 중기의 작품을 완벽함에 접근하기 위한 것, 필수이기는 하지만 대체로 무시하는 것이 가능한 과도기적인 단계로서 거기에 이의적인 가치밖에 인정하려 하지 않는 오만함이다. 그러나 그것이 '필름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문장 체험'을 매개로 하여 산 것이든 간에 하나의 작가적인 생애를 불순과 순수, 미완성과 완성이라는 대립에 의해 계측할 수 있을까? 산다는 것은 마침내 완성되는 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갱신되는 현재, 즉 결코 균형에는 도달할 수 없는 존재의 적극적인 모순 그 자체가 아닐까?-20쪽

오즈 '작품'에서 사람을 당황하게 하고 겁을 주는 것은 더할 수 없이 희막하고 오히려 애매하다고 할 수 있는 세부가 돌연 농밀한 연결 상태에 의해 친밀한 유희를 연출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조롭고 기복이 부족한, 오히려 일상 세계의 범용하고 희박한 반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진정한 오즈적 필름 체험이 생생하게 파동하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84쪽

여자들의 성역으로서 내러티브적 기능을 완수하는 2층 방은 최종적으로는 특권적인 주인을 배제하고 공허한 장소밖에 되지 않도록 후기 오즈 '작품' 속에 위치 지어진다. 그리고 1층의 주인들은 그것이 선의에서 그랬든 조금의 악의를 담고 그랬든, 2층이 동굴 같은 공간이 되는 순간의 도래를 몽상하면서 생활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93쪽

따라서 종종 문제되는 오즈적 '무無라는 것은, 종교적이며 형이상학적인 개념이 아니라 필름의 표층에 각인된 건축학적-형이상학적인 이미지인 것이다. 후기의 오즈가 촬영한 영화의 전부는 이 현재적인 '무'의 실현을 목표로 진행하는 생생한 현재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타계他界나 피안彼岸과는 전혀 무연의,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의 체험이다. 모든 것은 표층에 드러나 숨겨진 것은 하나도 있을 리 없다. 그것을 우선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면, 영화가 오즈 이외의 장소에서 이런 리얼리즘을 만난 적은 이전에도 없었으며 또한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93쪽

그리고 '무'의 생산을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로 보여 주는 것은 무인의 계단을 정면에서 찍은 거의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이다. 그것은 집의 다른 부분에서 잔혹하게 격리된 고독한 계단이다. 이미 성역으로 불러들이는 것도, 거기로의 침입을 거부하는 것도 아닌, 기능을 상실한 계단. 불가시의 벽임을 거부하고, 단순한 건축한적인 세부로 환원된 계단. 일관되게 시계로부터 멀어져 가던 계단이 그 부재의 특권을 박탈당하고 계단으로서 필름의 표층으로 부상하는 순간, 그것은 광폭하기까지 한 현존의 형상에 의해 후기의 오즈 '작품'의 기반을 그대로 완전히 부정해 버린다. 그것은 '작품'이 그 한계점에 가 닿으려 하는 가혹한 순간이다.-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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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하는 사람
텐도 아라타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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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그믐날, 화창한 겨울의 파란 하늘에 구름이 흩어져 있다. 그 모습이 적당히 디자인한 무늬처럼 보인다.
준코는 다카히코에게 근처 산사에 가자고 했다. 다카히코는 내일 다 같이 가는 게 어떻겠냐고 대꾸했다.
"내일은 붐빌 테고......가끔은 단둘이 데이트하는 것도 좋잖아요."
(그리고 예감이 들어요. 내일이면 내가 밖에 나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산사에는 이미 새해맞이 단장이 다 끝나 있었지만, 사람은 없었다.
다카히코에게 휠체어를 밀어달라고 해서 돌계다 옆 오르막길을 올라가 새전함 앞으로 갔다. 준코는 다카히코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종을 치고 새전을 던졌다. 그리고 가족의 행복과 태어날 아기의 건강과 시즈토의 무사함을 기원했다. 휠체어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다카히코가 기도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남편에게서 흰머리가 부쩍 많아진 것을 보며, 이참에 이 말만은 해두어야겠다고, 얼마 전부터 눈치채고 있던 일을 말했다.
"다카히코......당신......내 뒤를 따를 생각이죠?"-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의 등이 떨렸다. 준코가 병원에서 위 검사를 받고 로비로 나왔을 때 "그렇게 하면 되는 거야"하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던 것은 준코가 잘못되면 자기도 바로 뒤따를 거라고 결심했기 때문이리라. 그래서 그후로 다카히코는 준코의 상태에 일희일비 하는 일 없이 침착하게 간병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절대 안돼."
"......어째서?" 다카히코가 어깨 너머로 물었다.
"어째서라니요. 미시오가 있고, 손자가 태어나요!"
"......레지한테 맡기면 돼. 미노리도 있고."
"부모를 한꺼번에 잃으면 미시오가 얼마나 힘들겠어요? 아기한테도 분명 안 좋을 거라고요."
"나는 못하겠어......당신 없이 사는 거......"
가슴속이 요동쳤다. 마주 보고 있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준코는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말을 이었다. [......]
다카히코가 새전함에 손을 짚고 몸을 가누었다.-508쪽

(이어서)
"다카히코......올 한 해 참 좋았죠. 손자도 생기고, 미시오를 부탁할 상대도 생기고, 시즈토를 만나진 못했지만, 건강하다는 소식은 들었잖아요. 그렇죠? 좋은 한 해였어오."
준코는 다카히코의 허리를 부여잡았다. 준코의 손길을 느낀 다카히코가 앞을 향한 채 아내의 손을 꼭 잡았다.
"나요, 부모님 만나면 자랑할 거에요."
준코는 남은 힘을 쥐어짜듯 다카히코의 손을 맞잡았다.
"어때요? 저 남자 보는 눈은 있었죠, 하고 말이에요."
그 자리에 주저앉는 남편의 모습에 가슴이 쓰려와 허공으로 시선을 돌렸다.-508쪽

"넌 다섯 살 무렵에는 좋아졌지만, 태어나자마자 우유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알고부터 한 번도 분유를 주지 않았어. 시즈토는 분유도 곧잘 먹어서 일찍 모유를 끊었지만...... 너는 만 두 살이 될 때까지 젖을 먹였지. 그렇게 낳은 것이 엄마인 나니까 너한테 미안해서 항상 신경 썼는데...... 만 두 살이 된 직후에 네가 습진이 생긴 데를 마구 긁어서 약을 받아왔었어. 근데 그 약이 맞지 않아 설사를 했고...... 우유 성분이 섞여 있는 걸 모르고 정장제를 받아서 먹였더니 온몸이 새빨개진 거야. 아나필락시스 (주: 항원 병체 반응이 원인이 되어 일어나는 급성 알레르기성 반응) 직전 상태라며 의사는 최악의 경우도 각오하라고 했어. 미안해, 엄마가 제대로 못해서 미안해, 하고...... 병원에서 손을 꼭 잡고 있는데 네가 방긋 웃어주더구나. 그 웃음이 정말로 부드러워서...... 천사가 정말 있네, 그런 생각이 들더라. 다행히 회복되어서 집에 돌아왔을 때, 널 꼭 껴안고는 신에게 부탁했단다. 만약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다면 한 번 더 이 아이, 우리 미시오의 엄마가 되게 해주세요 하고...... 그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어."-6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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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11-11-16 07: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이책을 읽어 봐야하겠군요. 이것도 애도라. 얼마전 로쟈님의 책 <우울과 애도>를 좀 읽다가 엎어놓았는데, 엎어놓았다고 했더니 엎드려뻗쳐놓았느냐 하시더라구요. ㅎ 그책의 맥락과 같은 애도인가요? 잘 보았습니다. ^^

허스키 2011-11-16 12:20   좋아요 0 | URL
로쟈님의 <우울과 애도>를 읽지 않아서 같은 맥락의 '애도'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 참 좋다고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습니다. 요즘 쉽게 보이지 않는 가슴 따뜻하게 만드는 소설입니다.
 
행복한 책읽기 - 김현의 일기 1986~1989
김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9년 6월
구판절판


자기가 쓴 글들을 읽을 때마다, 문장과 문장 사이의 거리가 매우 멀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문장들 사이의 침묵이 점점 무서워진다.-30쪽

갑자기 떠오른 오규원의 말 한마디: 시인 지망생에게는, 이 시가 왜 좋은가보다는 이 시가 왜 나쁜가 말해줘야 한다. 그래서 선생은 감탄할 줄을 모르게 되나보다!-118쪽

5) 죽는다는 것은 사회적 관련하에서 죽는다는 뜻이다. [...] 그는 사라져 없어질 뿐이다. 죽는다는 것은 남의 기억 속에는 남아 있으나, 육체적으로는 접촉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를 기억하는 사람이 없어질 때, 다시 말해 혼자 살게 되었을 때 그는 사라진다. 어디로? 무 속으로, 무마저도 없는 무 속으로 (1985. 7. 16.)-190쪽

더 뚫고 나가기 위해서는 더 고통해야 하는데, 그의 고통은 자꾸만 제스처로 느껴진다.-212쪽

모든 작가들이 분석의 대상이 될 수는 있지만, 뛰어난 작가들과의 싸움을 통해서만 비평가도 자란다." [266) 좋은 책, 좋은 영화, 좋은 사람들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다. -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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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GUF 매일이 반짝반짝 - 아기와 나, 한 뼘씩 자란 500일
박은희(UGUF) 지음 / 앨리스 / 200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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홈페이지를 시작으로 여행 관련 책까지 이미 감각적인 사진과 홈페이지로 마음을 끌었던 uguf의 새 책.

퇴근하여 집에 돌아오니 배달되어 있는 포장을 뜯고, 저녁 준비를 하는 아내 옆 요리 작업대에 앉아서 앞 부분을 찬찬히 읽어 본다.

"UG와 지유가 잠든 새벽, 나는 오늘도 조용히 컴퓨터를 키고 아기용품을 사기 위해 여기저기 기웃거린다."

아내가 깔깔 웃는다. 내가 잠든 새벽 그녀가 참 자주 하는 행동.

"아기가 쓸 물건에도 나의 취향이 고스란히 반영되는 것이다. 뭐든지 예뻐야 한다."

아내가 요리하던 손을 멈추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란다.

뭐.든.지.예.뻐.야.한.다.

나 역시 놀란다.

아, 이거야 말로 아내가 모든 일에서 늘 주장하던 바가 아니던가.

예뻐야 한다.

음, 왠지 앞으로 나올 부분들이 더 기대되고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다. 언젠가, 이왕이면 곧 찾아 올 나와 아내의 아이를 생각하며 즐겁게 읽어야 하겠다.

근데, 아쉬운 점 하나. 그들의 이전 책들에 비해 이번 책은 편집 디자인이 조금 덜 예쁘다. 현재 가지고 있는 도쿄탐험 책과 비교해 봐도 이번 책보다 이전이 더 감각적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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