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무역센터가 붕괴한 이후 공포에 대한 동일한 '탈현실화'가 이어졌다. 희생자 수가 삼천 명이라고 계속 반복되는데도, 우리가 보게 되는 실제 참상은 놀랄 만큼 적었다[...]이는 제3세계의 재난을 보도하는 태도와는 명확히 대조적이다[...]이는 비극적인 순간에서조차 우리가 '우리'를 '그들'과 그들의 현실로부터 분리하고 거리를 유지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가 아닌가? 진정한 공포는 '그곳'에서 일어나는 것이지 '이곳'에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며 말이다.-26쪽
따라서 우리는 세게무역센터의 폭파가 우리의 가공적 영역을 산산조각 낸 실재의 침입이었다는 표준적 해석을 전도시켜야 한다. 실은 그 정반대다. 우리가 우리의 현실 속에 살았던 것은 세계무역센터가 붕괴되기 이전이었다. 우리는 제3세계의 참상이 사실은 우리 사회 현실의 일부가 아니라고, (우리 입장에서는) TV 화면에 나오는 유령 같은 환영으로만 존재하는 것이라고 인식하며 살아왔다. 그리고 9.11 사태는 이 환상과도 같은 화면의 환영이 우리의 현실에 들어온 것이었다[...]이미지가 우리의 현실(우리가 무엇을 현실로 경험하느냐를 결정하는 상징적 좌표)에 들어와 그것을 산산조각 낸 것이다.-30쪽
'징후' -- 혁명적 개입의 '기적'을 통해 사후에 보상받은 과거의 흔적들 -- 는 "잊힌 행위라기보다 '행동하지 못한' 잊힌 실패, 사회의 '타자들'과의 연대행위를 제지하는 사회적 결속의 힘을 중지하지 못한 실패"이다. [...]그리고 옛 동독의 많은 지식인들이(그리고 심지어 '보통 사람들'마저도) 느끼는 오스탈지아(공산주의 과거에 대한 향수)의 궁극적 이유는, 과거 공산주의 시대와 공산주의 치하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에 대한 동경이 아니라 거기서 '일어날 수 있었던 일', 또 다른 독일에서 가능할 수도 있었던 잃어버린 기회에 대한 동경 아닐까?-38쪽
'실재에 대한 열정'의 핵심은 권력의 더럽고 외설적인 이면과의 동일시 -- 완전히 그것을 떠맡는 영웅적 제스처 -- 이다. 이는 '누군가 그 더러운 일을 해야만 한다면, 그래 하자!'라는 영웅적 태도이며, 그 결과에서 자기 자신을 알아보길 거부하는 '아름다운 영혼'의 뒤집힌 거울상이다.-47쪽
보이지 않는 전쟁의 이런 편집증적 편재의 뒷면에 해당하는 것은 전쟁의 탈실체화 하닌가? [...]이제 전쟁도 그 실체가 박탈된 전쟁이 된다. 즉 컴퓨터 화면 너머에서 전투가 벌어지는 가상의 전쟁, 그 참여자들이 비디오 게임처럼 경험하는 전쟁, 사상자 없는 (적어도 아군 사상자가 없는) 전쟁인 것이다. [...]이런 전쟁에서 --우리가 언제나 유념해야 할 측면인데 -- 우리 일반 시민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정부 당국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다.-58쪽
9월 11일, 미국은 자신이 그 일부로 속해 있는 세계가 어떤 세계인지 깨달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미국은 그 기회를 잡을 수 있었지만 잡지 않았다. 대신 미국은 그 전통적인 이데올로기적 헌신을 재천명하는 편을 택했다. 가난한 제3세게에 대한 책임과 죄의식에서 벗어나, 이제 '우리가' 피해자다!라는.-70쪽
'테러와의 전쟁'은 단순히 자신을 방어하고 반격한다는 것만으로 적을 범죄자 취급하는 이상한 전쟁이다.-133쪽
'테러와의 전쟁'은 미국이 유럽을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경제적으로 식민지화하는 길고 점차적인 과정이 가공할 만한 결말, 그 마무리 작업 아닌가? 유럽은 다시 한 번 서양에, 즉 이제 세계적인 기준을 설정하고 있으며 사실상 유럽을 그 속주로 취급하고 있는 미국 문명에 납치당한 것 아닌가?-199쪽
세계 자본주의느 그 유명한 '자유로운 순환'의 물꼬를 텄지만, 여기서 자유롭게 순환하는 것은 '사물들'(상품들)이며, '사람들'의 순환은 점점 더 많은 통제를 받고 있다. 선진국 세계의 이런 새로운 인종주의는 어떤 면에서 과거의 인종주의보다 훨씬 더 잔혹하다.-20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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