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개인사 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유물들은 그 추억들이 간직한 표면적인 아름다움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애틋함의 정서 이면에 하나의 강력한 동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영 상실한 욕망의 대상에 대한 애도의 작업이다. 현재 우리의 정제성을 구성하고 있는 기억의 유물들은 그렇게 상실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그런 상실의 본질을 은폐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조직되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사실상 우리가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재의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미지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포기해야 했던 사랑의 대상에 대한 그림자이다. 이것이 단순한 반영 이미지가 아니라 검은 그림자인 이유는, 상실한 대상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무지가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무엇을 상실했는지 알 수 없어야 하며, 그러한 무지가 우리 자신의 안정된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개인사 박물관은 일종의 투쟁의 흔적들이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투쟁이며, 상실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한때 소년이었던 혹은 소녀였던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내기 위해서 받아들이거나 억압해야 했던 기나긴 애도 작업의 흔적들. - P38
사물은 논리적 시간 속에서 문명 이전의시작점을 의미하며, 산물은 문명의 과정 속에서 분화되어 산출된 욕망의 대상들이다. 사물과 산물 모두 욕망의 대상으로서 기능하지만,사물은 보다 근본적이며 파괴적인 것으로, 죽음 충동의 영역 전체를지칭한다. - P55
인간의 마음은 사유의 언어적 흐름 속에서 자신의 충동-사물을 멀리할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한다. 늑대인간의 무의식이 자신의 성충동에 대해서 시도했던 거리 유지의 최초 방식은 늑대 꿈의 공포라는 강박적 생각의 반복이었다. 이후 소년의 마음은 지칠 줄 모르는 사유의작업 속에서 종교 담론의 언어적인 연쇄를 도입하여 충동과의 거리를유지하는 데 부분적으로 성공한다. 늑대인간을 치료했던 프로이트가활성화하려고 했던 것 역시 바로 이러한 생각의 흐름이며, 언어적 연쇄의 힘이었다. 우리가 늑대인간과 루브르 왕궁의 역사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논리는 그와 같은 연쇄가 보다 정교할수록 사물과의 거리는 더욱 멀어진다는 사실이다. 언어 연쇄의 정교함은 사유의 정교함을 의미하고, 이는 더 많은 기표들이 더욱 자유로운 방식으로 연쇄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뜻한다. 만일 이러한 설명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면 언어의 정교함에 대립하는 두 가지 반대 사례를 떠올려보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그 첫 번째가 우울증이다. 우울증 또는 단지 우울함이라고 묘사될 수 있는 마음의 상태는 정 - P57
신병으로서의 멜랑꼴리와 유사한 증상을 보이는데, 생각의 속도가 현저하게 느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사유의 흐름이 느려진다는 것은 추상적이거나 문학적 표현만은 아니다. 우울한 상태의 마음은 생각하기를 거부하는 실질적 증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우울한 마음은 자신의 슬픔을 말로 설명할 능력이 없거나, 있더라도 그것을 거부하는 상태에 있다. 이는 자신의 상실을 타자의 언어로애도하지 않으려는 거부의 표현이기도 하다. 애도라는 것은 상실한대상을 현재의 언어 또는 타자의 언어로 설명하고 상징화하는 작업이다. 우울증이나 멜랑꼴리는 자신의 상실을 언어적 연쇄로 설명하기를거부함으로써 대상 a들의 순환이 정지된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이를애도의 기능장애라고 부를 수 있겠는데, 이때 출현하는 것은 상실된것의 빈자리, 즉 텅 빈 허무이다. 우울증이나 멜랑꼴리가 자기 파괴적충동에 쉽사리 노출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허무의 증상과 관련이 있다. 산물들(a) 또는 언어의 기표-연쇄를 통해 보호받지 못한 우울증자가 텅 빈 허무의 자리에서 마주치는 것은 다름 아닌 사물 그 자체, 충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울증과 멜랑꼴리는 기표연쇄가 빈곤해진 상태이며, 사유가 기민함을 상실한 상태이다. - P58
터너는 빛을 그린 것이 아니라 빛 너머의 타자를, 그에게는 초자연적인 힘인 동시에 신 그 자체였던 타자를 그렸던 것이다. 반면에 모네의 그림은 문자 그대로 빛을, 물질로서의 빛의 이미지를 그린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이미지는 그런 의미에서 빛의 현상 너머의 그 무엇도암시하고 있지 않다. 그들은 빛의 사실주의자들이었고, 새로운 광학기술의 도움으로 자신들의 객관성을 완성하고 있었다. 인상주의는 그렇게 해서 실증과학의 시대에나 가능할 수 있는 타자 없는 예술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따라서 터너와 인상주의자들 사이에는 이미지의구조적 차원에서 그 어떤 유사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 P124
정신병의 일종인 멜랑꼴리는 환자의 독특한 세계관으로 특징지어진다. 현대 의학에서는 ‘주요 우울증 major depressive disorder‘ 이라는 병명으로 분류되는‘ 이 병의 환자들은 세계를 극단적으로 유한한 공간으로인식한다. 여기서 유한하다는 표현은, 더 이상의 새로움이 존재할 수없는, 은유가 불가능한, 이미 결정 난 장소로 세계를 인식한다는 것을의미한다. 멜랑꼴리 환자에게 자신이 속한 세계는 참혹할 정도로 비루하며, 조금의 아름다움이나 살 만한 가치도 존재하지 않는 지옥보다 못한 곳에 불과하다. 차라리 지옥이었다면 죄의 사함이라는 가치있는 가정이 전제될 수도 있다. 그러나 멜랑꼴리 환자에게는 그러한갱생의 가능성조차 남아 있지 않다. 나아가서, 극단적으로 우울한 성향의 이러한 사람들에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의 존재의 비루함이다. 그들에게 자신의 자아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부정적 가치의 집적소와 같다. - P170
위 도식은 은유와 환유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안정된 신화를 구성해내는 정신의 구조이다. 여기서 오른편에 위치한 충동의대상은 유아기의 주체가 쾌락을 탐닉할 수 있었던 대상-타자의 자리이다. 중앙에 마름모꼴로 분할된 세로 직선은 거세의 계기이다. 아이는 어른들의 말을 통해 자신의 충동의 대상-타자를 포기할 것을 암시받는다. 이때 아이는 거세를 받아들이고 충동의 대상에 투자하던 리비도의 방향을 틀어 언어적인 방식으로 분절하는 은유의 구조 속으로들어간다. 인간 정신의 모든 환상들은 바로 이런 언어적 분절 장치 속에서 일관된 신화를 생산하는 통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리하여주체는 언어적으로 욕망하며 언어적으로 환상을 추구하는 추상적 존재가 되는데, 앞서 설명한 것처럼 바로 이러한 정신의 추상적 성격이인간을 충동으로부터 보호해주는 역할을 떠맡는다. 그런데 멜랑꼴리정신병에서는 언어적 분절의 기능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한다. - P180
여기서 우리는 멜랑꼴리의 치료가 단지 또 하나의 신화를 만들어내면서 욕망을 되살리는 과정만으로는 불충분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되살려진 욕망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점을설정해줄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와 같은 고정점의 역할은 오직 추상적 기표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데, 여기서 기표의 추상성이란개방성을 의미한다. 사랑, 평등, 박애, 우정, 모정, 부정 등의 단어들이 바로 그와 같은 추상적 기표들이다. 이들은 인간이 발명해낸 개념들 중에서 흔들리지 않는 보편성을 획득한 것들이며, 멜랑꼴리의 욕망의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릴 때마다 환자에게 다시금 욕망의 방향성을 제시하도록 허용하는 개방성을 가진 기표들이다. - P195
일반적으로 멜랑꼴리 환자들은 삶의 토양을 비옥하게 해줄 환상과신화의 결핍을 겪는 동시에 환자의 자아를 비난하고 파괴하려는 강력한 초자아를 가진 주체이다. 여기서 환자를 비난하는 초자아가 강력해진 이유는 환자의 충동이 신화에 의해 각색되고 은폐되는 기능이 무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환자의 숨겨지지 않는 충동은 역설적이게도 환자 자신의 초자아를 분노케 하는 원인이 된다. 만일 환자가 이러한 초자아의 공격에 자기 비난의 형식으로 반응하며 자기 파괴를시도하려 한다면, 보편적 선의 기표들은 바로 이러한 초자아의 분노를 중화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 분노하는 신에 대해서 인류가 할수 있었던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신에게 말하도록 하는 것, 즉 십계명을 창조해내도록 하는 것이지 않았는가? 인간의 욕망을 무작정 비난하는 신이 아니라 언어적인 방식으로 보편적 선의 방향성을 제시하는신의 존재는 인류가 감당할 수 있는 신이다. 모든 종교가 초자아를 - P196
이미지화하면서 출현하고 있었다면, 보편화를 추구하는 종교의 성공의 열쇠는 바로 말씀의 보편적 가치에 달려 있다. 구약이 신약으로 도약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사랑의 담론‘이 바로 그 전형적인 사례이다. 만일 멜랑꼴리의 병리학에서 가장 파괴적인 기능을 하는 것이 환자의초자아의 폭력이었다면, 이것을 중화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러한 폭력을 보편적 선의 기표로 개방하여 충동이 아닌 욕망의 질서 속에서 말해지고 사유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차원에서 프로이트가 종교의 기원을 강박증으로 설명하는 것은 또 다른 타당성을획득한다. 불안의 대상인 초자아에 대해서 강박증자들은 사유와 언어의 방어막을 통해 그 폭력을 비켜가려고 시도한다는 의미에서 종교는초자아를 언어적으로 포획하려는 강박증적 시도이다. - P197
승화는 바로 이러한 새로운 애도의 창안이 시작될 수 있도록 주체를모든 것의 시작점에 위치하도록 만드는 장치이다. 승화는 충동에 대한억압 없는 만족을 미끼로 주체를 공백의 가장자리로 유혹한다. 이곳에서 주체는 이제까지 자신의 세계를 지탱하던 모든 의미의 체계를 포기할 것과 자신이 의존하던 사회 속 좌표를, 즉 상상적 자아를 포기할 것을 요청받는다. 우울증자라면 이러한 요청을 기꺼이 수용하거나 혹은이미 그러했을 것이다. 라깡적 승화는 바로 그렇게 세계를 포기한 자가다시 애도하기를, 그리하여 욕망하기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하는 특수한장치이다. 충동에 적대적이며 욕망에 환멸을 겪는 주체가 다시 충동을삶의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도록 해주는 승화의 이와 같은 기능은 우울증의 치료뿐만 아니라 새로운 세계의 창안이라는 윤리적 실천의 가장핵심적인 기능에 다름 아니다. - P218
자아가 흩어지면 욕망의 민낯인 파편적 또는 ‘다형적‘인 충동들이 출현한다. 아이-어머니의 세계를 지배했던, 그러나 상징계의 법을 받아들임으로써 포기되어야 했던 부분 충동들의 세계가 바로그것이다. 그런데, 파편적으로 흩어진 부분 충동들의 상공을 떠다니는 것이 바로 응시, 시관충동이다. 응시는 다른 모든 충동들의 배후에서 가장 치명적인 불안의 정동을 흩뿌리는 저승사자이다. 시각적 이미지의 공간 속에서 추구되는 전체성에 대한 욕망이 응시의 출현을필사적으로 억압하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지가 흩어지거나 혹은 이미지 자체가 부재하면 응시의 공포가 출현할 것이기 때문이다. - P280
그리하여 우리는 성도착과 신경증에 관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즉, 무의식의 중핵에 도사린 근본적 결여, 어머니의 상실로부터 야기되는 결여의 웅덩이인 공백만이 유일한 실재이며, 성도착과 신경증은 바로 이러한 공백의 가장자리로부터 피어오르는최초의 환상에 대해서 취하는 두 가지 다른 양상의 태도라는 것이다. 성도착은 근본환상을 쾌락의 필터를 통해 재현하며, 신경증은 쾌락이 아닌) 쾌락원칙과 현실원칙이라는 억압의 필터로 재현한다. "성도착은 거세되지 않은 어머니라는 가장 일차적인 환상을 마주 보는 방식으로 그것에 매달려 있었던 반면, 신경증은 등지는 방식으로 그것에 매달려 있었을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욕망의 여정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그원적 결여로서의 공백과 자아 사이를 매개하는 환상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에는 차이가 없다. - P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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