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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먼 스테인 2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0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평점 :
1권은 좀 지루했지만 역시 2권부터는 필립로스답게 몰아치듯 써 내려간 글들에 매혹되고 말았다.
한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지울수 없는 오점이나 실수가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아주 재미있는 소설.
우리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가? 모두가 알고 있다니... 어떤 일이 어떻게 해서 그런 식으로 일어나는지를 안다고? 인간사를규정하는 사건들, 불확실성들, 사고들, 불화, 충격적인 부조리의 연속인 난맥상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도? 아무도 알 수 없는 거요. 루 교수 "모두가 알고 있다"라는 말은 상투어를 이용한 호소인데, 경험을 진부하게 만들어버리는 출발점이다. 무엇보다 못 견디게 싫은 것은, 상투어를 내뱉는 자들의 위선적인 진중함과 권위의식이다. 우리가 유일게 아는 것은, 상투적이지 않은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아는 것도 실은 알지 못한다. 의도? 동기? 결과? 의미? 모르는 건 전부 놀랍게 느껴진다. 하지만 더놀라운 건 우리가 안다고 믿는 것들이다. - P17
가장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감정선들만으로 형성된 이 남자, 하나의 권력으로서 파란만장한 내력을 지닌 이 유력자, 우아하게 교활하고 서글서글한 매력이 있고 겉보기에는 대장부의 완전체 같은 사람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엄청난 비밀이 하나 있다. 나는 어쩌다 이런 결론에 이른 것일까? 왜 비밀이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콜먼이 포니아와 함께 있을 때 뭔가 숨기는 게 있으니까. 그리고 그녀와 함께 있지 않을 때도 그는 뭔가 숨기는 것이 있다. 그가 지닌 비밀이 바로 그의 매력이다. 결여된 무언가가 사람을 현혹하고, 그동안 내내 나를 끌어당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다른 누구도 아닌 그 자신만의 비밀로 지니고 있는 수수께끼 같은 무언가가. 그는절반의 모습만 보여주는 달처럼 자신을 연출한다. 내게는 그의 모습을완전히 보이게 할 재간이 없다. 공백이 존재한다. 그게 내가 말할 수있는 전부다. 두 사람이 결합하면 공백 한 쌍이 된다. 그녀에게도 공백이 있다. 콜먼은 확실히 저명한 인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여차하면완강하고 과단성 있는 적자신을 모욕하는 헛소리를 받아들이느차라리 사임하는 쪽을 택한 성난 거물급 교수-이 되기도 하지만, 그에게도 어딘가 공백이 있다. 지워진부분이, 삭제된 부분이 있다. 그게 뭔지 나는 짐작조차 할 수 없지만.... 사실 이 직감이 이치에 맞는 건지. 아니면 그저 다른 인간에 대한 나의 무지가 비현실적으로 드러난건지 결코 알 수 없지만. - P24
"당신이 훤히 보여요. 콜먼. 정말로 보인다니까요. 내가 뭘 보는지궁금하지 않아요?" "당연히 궁금하지." "당신은 내가 당신한테서 노인의 모습을 보고 있는지 궁금하겠죠. 안 그래요? 당신은 내가 당신한테서 노인의 모습을 보고 도망칠까봐두려워하고 있어요. 내가 당신한테서 젊은 남자들과 다른 점들을 볼까봐. 기운 빠진 모습이나 이미 사라져버린 것들을 볼까봐, 그래서 날 잃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어요. 당신이 너무 늙었기 때문이죠. 하지만 내가 뭘 보고 있는지 당신 알아요?" "뭔데?" "어린아이요. 꼭 어린애처럼 사랑에 빠진 당신이 보여요. 그래선 안돼요. 그러면 안 된다고요. 그것 말고 또 뭐가 보이는지 들어볼래요?" "그럼." "그래요. 이젠 그게 보여요. 노인이 보여요. 죽어가고 있는 노인이보여요." "이야기해봐." "당신은 모든 걸 잃었어요." "그렇게 보이나?" - P54
"그럼요. 춤추고 있는 나를 뺀 모든 게 보여요. 내가 뭘 보는지 궁금하죠?" "뭔데?" "당신이 그런 패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거요. 콜먼, 그게보여요. 당신이 노발대발하고 있는 게 보여요. 그리고 그러다 끝을 맞을 거라는 것도요. 성난 노인으로요. 그래서는 안 되는 거였어요. 나는그게 보여요. 당신의 울분이요. 분노와 치욕이 보여요. 노인으로서 시간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있는 당신이 보여요. 그건 죽음이 가까워지기전에는 이해하지 못하는 거죠. 하지만 지금 당신은 이해하게 됐어요. 그래서 두려운 거죠. 되돌아갈 수 없으니까요. 다시 스무 살이 될 수없으니까요. 그 시절이 다시 오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이런 식으로 인생이 끝나는 거죠. 그리고 죽어가는 것보다 더 싫은 것. 죽게 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게 바로 당신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그 빌어먹을 개자식들이죠. 당신한테서 모든 걸 빼앗아간 자들이요. 당신 안에서 그게 보여요. 콜먼. 내가 잘 아는 일이기 때문에 볼 수 있어요.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걸 바꿔놓은 그 빌어먹을 개자식들. 당신의 인생을 빼앗아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놈들. 당신의 인생을 빼앗은 다음 자기들끼리쓰레기통에 던져넣기로 결정했죠. 당신은 당신한테 딱 어울리는 춤추는 여자애를 찾아온 거예요. 그자들은 뭐가 쓰레기인지 정하고, 당신을쓰레기라고 정했어요. 개소리라는 게 뻔한 일을 가지고 한 남자를 모욕하고 명예를 떨어뜨리고 망가뜨린 거죠. 자기들에겐 아무런 의미도그야말로 아무런 의미도 없는 추잡한 말 한마디를 가지고요. 그리고그게 당신을 분노하게 만드는 거예요." - P55
우리는 오점을 남긴다. 우리는 자취를 남기고, 우리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불순함, 잔인함, 학대, 실수, 배설물, 정액- 달리 이 세상에 존재할 방법이 없다. 불복종과는 상관없다. 은총이나 구원 혹은 속죄와도 상관없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내면에 존재한다. 내재되어 있다. 타고난 것이다. 규정지어진 것이다. 밖으로 드러나기 전에 이미 오점은 존재한다. 아무런 신호도 없이 이미 존재한다. 오점은 표지가 필요치 않을 정도로 본질적이다. 오점은 불복종보다 선행하고, 불복종을 포함하며, 모든 설명과 이해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 농담에 지나지 않는 이유이다. 그것도 아주 잔인한 농담. 순수성에 대해 환상을 갖는 건 소름끼치는 일이다. 미친 짓이다. - P69
마크 실크는 자신이 영원히 증오할 수 있도록 아버지가 계속 살아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증오하고, 증오하고, 증오하고, 또증오하다가, 제 분이 좀 풀리면, 어쩌면 비난 장면이 최고조에 달해서자식으로서의 불만이라는 응어리로 콜먼을 초주검이 되도록 채찍질하고 난 다음에야 용서하기로 했던 모양이었다. 그는 연극이 끝까지 상연될 때까지 콜먼이 이 세상에 머물 거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자신과콜먼이 실제 인생이 아니라 아테네 아크로폴리스의 남쪽 산허리에 있는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진 노천극장 위에 서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 P179
는 있을까? 하지만 삶이란 목적이 숨겨져 있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 관습이란 고찰을 허락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 사회란 심한 결함이 있을지 몰라도 그 자체의 모습에 전념하는 것이라는 생각, 개인이란 그 사람을 규정하는 사회적 요인들과 완전히 별개로 그 요인들을넘어 실재하는 것이고 사회적 요인들이 실제로 그 개인에게는 실재하지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요컨대 인간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이 모든 혼란들은 유서 깊은 규칙 목록에 대한 그녀의 확고부동한헌신에서 다소 벗어난 곳에 놓여 있는 것처럼 보였다. - P206
그렇게 콜먼의 정체를 알게 되자 나는 그를 둘러싼 미스터리를 점점더 알 수 없게 되었다. 모든 것을 알게 된 참이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니스틴에게 들어 알게 된 사실이 원래 내가 콜먼에 대해 갖고 있던 생각과 통합되는 대신 콜먼을 미지의 인물로, 더욱이 일관성 없는 인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의 비밀이 어떤 비율로, 어느 정도로까지 그의 일상을 결정하고, 그의 일상적 사고에 침투했던 걸까? 그 강렬했던 비밀도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덤덤하게 느껴지고, 결국엔 아무 중요성 없는 것으로, 오래전 자신과 한 내기나 대담하게 실행했어야 했던 무언가로 바뀌어 잊히고 말았을까? 그는 그 결정으로 자신이 추구하던 모험을 손에 넣었을까, 아니면 결정 자체가 모험이었을까? 사람들이 오해하는 게 재미있었던가, 아슬아슬한 줄타기에 성공하는 걸 무척 좋아했던 걸까, 거짓 신분으로 살아가는 인생이 그에겐 여행 같았던 걸까? - P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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