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곤 과정 - 빈곤의 배치와 취약한 삶들의 인류학
조문영 지음 / 글항아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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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자랑 운운한 100자평과 달리 책 내용은 그리 현학적이지 않다. 애초에 학자의 책에 "눈높이 맞춰서 쉽게 설명해줘~ 쉽게 쓰이지 않은 글은 잘못된 거야~"라는 건 반찬투정과 같다. 빈곤과 생활 생태에의 차분한 접근은 좋다. 하지만 학자로서 취하는 얄팍한 뉘앙스는 오히려 학자라서 아쉬운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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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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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산문집, 그러니까 에세이이다. 에세이는 비평이 아니다. 에세이로 비평을 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에세이라고 무조건 비평일 순 없다는 뜻이다. 둘은 다르지만 가까워질 수 있고 같아질 수도 있다. 지난 십여 년 동안 신형철은 그런 경우를 모색해온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모색이 성공했다고 보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래도 그의 고심은 이해한다. 비평이 비평으로서 살아남기 위한 방향을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니까. 그러나 누군가에게는 그의 모색이, 모색조차 시도하지 않는 안일한 웅크림일 수 있고, 그 웅크림이 신중해 보이기보다는 우유부단해 보일 수 있다. 창작의 경우, 문학은 올바르거나 착하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비평은 올바르거나 착해야 할까? 당연히 그건 아닐 것이다. 문학은 사람들이 올바르다고 착하다고 믿는 것들에 의문을 던지고 그 속을 파헤치는 쪽이고, 사람들이 올바르고 착하다고 믿는 말과 행동으로 저질러 버리는 악을 들춰 내는 쪽이니까.(이 말은 당연히 올바르고 착하게 살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그렇게 말하자면 신형철의 이 책은 문학의 본령을, 비평의 본령을 잘 준수하려다가 그 본령에서 굴러 떨어진 결과일지도 모른다. 앎의 깊이가 얕아져 가면서 대중지식인이 되어 가는 모습을 볼 때의 안타까움이란. 물론 그는 처음부터 비평가라기보다 에세이스트에 가까웠다. 비평은 텍스트의 충실한 해제여야 하는데, 그의 비평은 텍스트보다 텍스트를 다루는 자의 텍스트가 컨텍스트 이상으로 역류하는 경우였으니까. 이제 그가 글에서 지적인 무언가를 꺼낸다 해도, 새로운 담론을 제시한다 해도, 지금까지 해 왔던 두께와 깊이와 넓이보다 더 두껍고 깊고 넓지 않은 한 자신만의 문학/비평을 내세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그것이 에세이라고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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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 2019 제43회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
김초엽 지음 / 허블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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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절한 소프트SF로, 대중적으로 읽힐듯. 4년 전 처음 읽고 쓴 말이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여성이니 소수자니 진보 쪽으로 의미 있다는 식의 말들이 가끔 있는데, 그건 진보 쪽 논의를 낮잡는 말이다. 그냥 쓰윽 읽을 수 있는 여린 감성의 통속소설들이다. 긍정적 의미도 부정적 의미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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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초월론적 경험론 프리즘 총서 23
안 소바냐르그 지음, 성기현 옮김 / 그린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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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는 그 자체로 난해성의 상징이다. <차이와 반복>은 '반복이 차이를 낳는다'라는 놀라운 사실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책인데, 그 안에서 하는 말들은 더 복잡다단하다. 문장도 상당히 꼬여 있는데 해석하며 읽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왜 쉬운 해설서를 읽지 않나? 왜 더 풀어서 쓴 글이 나오지 않나? 하고 묻는다면 우문일 것이다. 왜냐하면 들뢰즈의 사유는 그가 써낸 방식(문체)으로 써야 정확한 것이고, 그렇지 않을 경우 사실 말하려던 의도도 변질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비단 들뢰즈만 그런 것은 아닌데, 들뢰즈는 특히 더 그렇다고 강조할 수 있다.

안 소바냐르그는 그러한 측면에서 들뢰즈를 깊이 있게 잘 이해하고 있다. 그의 독법은 들뢰즈가 가진 특유의 개성을 해치지 않으면서, 들뢰즈의 방식을 거의 '들뢰즈-되기'에 가깝게 구현함으로써 들뢰즈를 이해한다. 외부의 이해는 어떠한 오해를 전제로 하고 또 산물로 얻곤 하지만, 이 경우 설령 오해라 해도 차라리 유의미한 오해이다. 연구자로서의 엄정한 자세를 올곧게 유지하는 가운데 연구대상을 객관적으로 묘파한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들뢰즈의 고집도 대단하고 그걸 그대로 받아낸 소바냐르그의 고집도 대단하다.

참고로 '초월론적(transcendantal)'이라는 말은 '선험적'이라고도 번역되고, '초월적'이라고도 번역된다. 번역을 맡은 성기현 선생님이 굳이 초월'론'적이라고 옮기신 이유는, 아마도 초월적이라 해도 여기서는 하나의 이론(théorie)적인 틀로서 쓰였기 때문일 것이다. 단지 추측에 불과하지만 좋은 독법에 기반한 번역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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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라리스 민음사 스타니스와프 렘 소설
스타니스와프 렘 지음, 최성은 옮김 / 민음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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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중력과 부유하는 사유의 소설.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와 다른, 원작으로서 이 소설은 별개의 고유성을 갖는데, 두 작품 모두 성공적으로 각자의 자리를 확보한 것 같다. 과학적 상상력을 어떻게 개진시켜야 하는지를 보여준 좋은 전범 중 하나. 폴란드어 원서는 어떨지 몰라도 문장은 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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