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신 지연 - 제44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민음의 시 338
나하늘 지음 / 민음사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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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받은 걸 단숨에 읽었다. 언어의 빈 자리를 망연하게 빛낸다. 자기 연민에 젖은 과잉된 서정적 자아가 없어서 좋다. 서정적 자아가 문제가 아니라, 과잉된 것이 문제다. 많은 시인들이 첫 시집 이후에 저지르는 그 오류를 이 시인은 극복할 수 있을 것 같다. 벌써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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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정신병자들 - 오은교 평론집 문학동네 평론선
오은교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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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킹」이 낡은 '꽃뱀' 기표를 이용하여 우물에 독을 타는 전형적인 무고 논리를 반복한다면, 최근의 새로운 경향이라 할 만한 것은 가해자로 지목된 남성들이 무고를 주장하기 위해 '퀴어 정체성'을 소환한다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김경욱의 「하늘의 융단」이다. 스쿨 미투로 고발당한 중년의 고등학교 교사 '곽춘근'은 자신의 성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가며 거짓된 외피에 고통받는 클로짓 게이다. 스쿨 미투로 동료 교사가 이미 날아간 가운데 곽춘근은 돌연 학내 익명게시판을 통해 "스타킹 올이 나갔다면서"(178쪽) 여학생의 다리를 만진 혐의로 고발당한다. 곽춘근은 억울하기야 했지만 남학생보다 오히려 여학생을 대할 때 성적 긴장감에서 자유로운 까닭을 밝힐 수는 없었다"(180쪽)며 오히려 "남학생이었다면 손대지 않았"(184쪽)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고함의 근거로 성정체성을 내세우며 스쿨 미투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성적 지향'의 문제로 전환된다. 곽춘근을 향한 비판은 퀴어의 수치심과 연결된다. 그는 진상조사위원회의 심사를 받는 중 성정체성을 커밍아웃하면 오해를 풀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을 한탄하며 끝내 해명 불가능한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퀴어는 권력형 성범죄에 연루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위계에 의한 성폭력은 특수한 '성욕'이 제어되지 못해 발생하는 '욕구'의 문제가 아니라 성욕이 '특수한 상황'에서 제어되지 않아도 되는 '권력'의 문제라는 점을 이 소설이 은폐하고 있다는 점이 문제인 것이다.

퀴어 진실의 담지자로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방식은 이기호의 「위계란 무엇인가?」에서도 나타난다. 소설가이자 문창과 교수인 화자 '나'는 야심한 시각에 학부생 '박채연'의 방문을 받는다. 민소매에 반바지를 입은 이 학생은 정신과 약물치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짐작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새벽에 그의 연구실을 찾아오는 기행을 벌인다. 둘은 어느새 밤새 수다를 떨며 새벽녘 공원을 산책하는 "우정"(127쪽) 관계로 발전하지만, '나'는 "내 안에 채연을 향한 다른 마음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132쪽)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날 술에 취해 '나'의 연구실에 찾아온 박채연은 학과 선배 '정현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동행을 부탁하는데, 그곳에서 경미한 몸싸움이 일어나고 이후 '나'는 학내 익명게시판을 통해 "문에창작과 이 모 교수가 같은 과 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으며, 심지어 그 연애 상대가 학과 선배를 폭행하는 현장에까지 동행했다는 것, 그 폭행을 보고도 만류하지 않았다는 내용"(134쪽)의 고발을 당한다. 박채연과 정현지의 관계는 남다른 사이로 암시되지만, '나'는 물론 이를 밝히거나 확신할 수 없다. 박채연이 잠적하고 정현지가 졸업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되고, '나'는 정년 보장 심사를 무사통과한다. 이후 '나'는 지루한 폭력 예방 동영상 강의 속에서 '위계'가 "지위나 계층을 나타내는 등급"인 위계位階가 아닌 "속임수나 방대방에게 오인, 착각을 일으키고 상대방의 그러한 심적 상태를 이용하는 것"(137쪽)인 위계僞計라는 것을 알게 되며 채연과 나눈 마지막 전화통화를 떠올린다. 사라진 채연은 억울함을 호소하는 '나'에게 "무서운 것과 불안한 것은 정말 차원이 다른 이야기인 거 같아요. 제 말이 맞죠?"(138쪽)라는 겁박의 말을 남긴 채 전화를 끊었다. 위계의 의미가 '권력'의 행사에서 '오인'으로 인한 심리적 조종으로 전환되며 결국 '교수-학생' '작가-지망생' '중년-청년'이라는 이 소설의 모든 권력관계는 철거되고 상대에게 오해를 사게 했을 소통의 실책만이 위계 폭력의 원인이 된다. "저는 그냥 한번 무서운 게 더 나을 것 같은데…… 불안한 건 계속 이어지잖아요?"(126쪽) 이제 위력을 행사하는 주체는 을의 위치를 이용하여 '나'를 영원한 불안 속에 가둔 채연이다.

이 소설의 화자가 자신의 심리적 무고함을 내어주면서까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위계 권력의 작동이란 상대적이라는 것, 무분별한 온라인 폭로가 사태를 종합적으로 보지 못한 이들의 오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 비밀스러운 퀴어의 진실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해자로 지목된 당사자가 해명을 온전히 할 수 없는 사정이 있다는 것 등이다. 수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물음, '위계란 무엇인가'는 결국 정보 비대칭으로 인한 '실수'와 '착오'로 축소되고 개별화된다.

익명게시판, 인권센터, 조사위원회로부터 공격과 심판을 받아 생계의 위험에 처하는 중년의 남성 선생들을 그리는 이 문학적 작업들은 지금 한국사회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여성의 성폭력 경험 고백과 미투 운동의 의의를 무력화하는 수사와 상응할 뿐 아니라 현실의 권력 구조와 남성 동성 문화의 폭력성을 괄호 안에 둔 채 여성 인권과 퀴어 인권을 경쟁시키는 허구적 구도를 적극적으로 양산한다.

- pp.26-29


작품 분석 빼고 외부의 논의들은 다 올바르고 조리에 맞는 이야기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문학비평임을 감안하고 볼 때, 단지 올바르고 조리에 맞는 것에 그쳤기에 단순하고, 그래서 안타깝다. 저자가 이 비평에서 언급한 김종옥, 김경욱, 이기호 등의 단편소설들은 퀴어를 이용한 남성 젠더의 권력관계를 "은폐"하거나 "왜곡"하는 내용이 아니고, "수년간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었던 물음"을 "'실수'와 '착오'로 축소"시키고 "개별화"시키는 목적이 아니다. 이 소설들은 그러한 권력관계로 인한 사회적 문제점들을 지적하느라 우리가 놓쳤던 우리 자신의 추악함을 돌아보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당연히 이 소설들이 갖고 있는 결함과 아쉬움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남성 젠더라서 갖게 되는 젠더 권력관계에 대한 이분법적 인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여성 작가들이 쓴 남성 젠더의 폭력에 대한 고발을 다룬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점이라든지, 퀴어를 남성 젠더의 억울함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적 도구로 대상화했다는 점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소설들이 남성 젠더의 권력과 여성·퀴어에 대한 폭력을 들은 고발하는 내용을 써서 내용-주제의 일차원적 관계를 구현하는 데 급급한 그런 소설들보다는 입체적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들이 갖고 있는 결함과 아쉬움은 그런 사회적인 요소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그런 건 '문학평론가'보다 '문화연구'를 전공한 '사회학자'들이 유용하게 수행해낸다.


이러한 소설들에 대한 사회과학적 분석을 제외하면 할 말이 없는 비평이라면, 그것은 비평으로서 안일한 고민의 부산물이랄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들만 이야기하려고 창작하거나 비평하는 게 문학이라면, 그것은 문학이어야 할 이유가 없다. 거리로 나가야 한다. 그럴 시간에 노동자들과, 여성들과, 약자들과 함께 싸워야 한다. 문학비평은 어떤 문학 작품에서 피해자-가해자라는 구도가 나왔을 때 피해자와 연대하거나 가해자를 두둔하는 일이 아니다. 또, 문학비평은 문학작품에서 당대 사회의 문제 제기와 쟁점에 대한 유행 어린 목소리들을 읽어냈을 때, 동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일도 아니고, 약자의 호소에 귀 기울이는 일도 아니며, 지배 계급의 유착을 공고히 하는 일도 아니다. 그럴 때 문학비평은, 사회가 연대라는 이름으로 빠뜨리거나 놓치는 것들을 톺아본 문학에 대한 오롯한 해석을 시도하는 이해의 과정이다. 이해는 옹호나 반대와 다르다. 적어도 여성으로서, 여성이기에 그렇게 배웠음을 잊지 않으려 한다.


해당 비평집이 갖고 있는 면면을 다 헤아리지는 못했다. 분명 이 비평들을 묶어놓았을 때 발하는 장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비평적 감식안은 여성의 비평가적 관점을 '남성 젠더의 위계질서'에 맞춤한 이항대립으로 풀어낸 결과로 생각되어,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여성으로서 문학을 비평한다는 것에 대한 사유는 좋은 것이고 필요한 것이라 늘 마음에서 곱씹고 되돌아보는 지점이다. 하지만 문학을 비평하는 것에 대한 사유가 오로지 여성으로서의 '나'만이 아니라 다른 '나'로서의 측면도 여성으로서의 '나'와 관계한다는 점을 망각한다면, 여성으로서의 '나'를 존중하지 못하는 태도가 될 것임을, 다시 한번 새기는 기회가 되었다.


물론 아래와 같은 대목에서는 저자의 젠더 의식이 반영된 비평적 독해가 어느 정도 빛난다.


드물지 않게 양산되고 있는 고발 서사들이 피해는 반드시 명명백백 밝혀져야 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 고발자의 욕망은 확실해야 한다는 함정에 빠져 도리어 당사자를 동여매는 일이 얼마나 빈번한지를 떠올리면, 이 소설은 오해를 무릅쓰고라도 기어이 다른 길을 가길 택한다.

성적 관계에서 동의를 다루는 언어라고는 ‘매우 동참’ 아니면 ‘강간’뿐일 때, 우리가 지금껏 거쳐온 모든 혼란한 성적 관계들을 명명할 수 없다. 동의했다고 말하기엔 심란하고, 강간이었다고 말하면 더 심란한, 허다했던 그런 일들 말이다. 이 소설은 이러한 성적 동의의 이분법을 깨고 여성 섹슈얼리티의 복잡성을 말하고자 애를 쓰며 운다.

- pp.239-240


또한,


하지만 현대 소설은 ‘스토리’가 아니라 스토리‘텔링’이 요체인 장르다. 핵심 사건만이 전부가 아니다. 특정한 인격과 역사와 버릇을 가진 인물들이 그들이 겪게 될 사건과 조화롭게 엮여갈 때 하나의 세계는 설득력을 얻는다. 우리는 이를 내러티브라고 부르며 잘 빚어진 소설은 요약하는 순간 궁색해진다.

- p.242


라고 쓸 때, 저자는 젠더 의식만이 아니라, 소설의 근원적 존재론에 대한 적절한 질문을 던진다. 이렇듯, 저자의 시선은 문학의 존재론에 집중할 때 더더욱 빛난다. 이 시선이 지금, 여기에서 싸우고 있는 사회운동의 그것과 결이 같아질 때 진부해지듯이 말이다. 읽으면서, 이만큼 탁월한 안목이 있으니 문학에 대한 더 많은 통찰력을 보여줬으면 하는 바람이 느껴졌다. 젠더 의식을 반영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젠더 의식을 반영한다면 사회운동으로서의 문학, 진보를 위한 메시지로서의 문학이라는 도구적 대상화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자기방어적 공격성, 특정 젠더에의 혐오, 지배 이데올로기의 이분법을 그대로 받아들인 채 젠더 갈등을 답습하는 관점 등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학은 젠더 의식을 반영하고도 문학이어야 한다. 젠더 의식에 함몰된 방법론이 아니라. 책 제목의 표현을 빌리자면, 세상이 제정신인 이야기를 병자로 취급한다 해도, 단지 제정신인 이야기밖에 할 수 없는 게 문학이라면, 굳이 문학을 문학의 형식으로 들여다볼 이유가 없다. 사회운동의 형식이면 족하다. 거리로 나가 싸우면 된다.


같은 맥락에서 저자는 왜 자신의 배경지식들을 활용치 않는지 의아했다. 한양대와 서울대에서 독일문학을 공부한 기반이 저자의 문학적 토양에 영향을 주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이 비평집을 읽으면서 저자에게서 명백히 충분한 문학적 내공을 느끼곤 했지만, 저자가 그것을 그리 열심히 활용하지 않고 오직 사회운동에서 하는 이야기들을 답습하는 데에 그치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사회운동에서 하는 올바른 이야기들, 맞는 말들을 그대로 복사하기-붙여넣기 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문학비평이 아니라 사회비평이 될 것이다. 문학을 비평할 때 사회운동 말고 할 얘기가 없다면, 비평가로서의 자의식보다 사회운동가로서의 자의식이 앞서고 있는 게 아닐까. 문학이 사회운동의 면모를 갖지 말아야 할 이유 따윈 없지만, 페미니즘을 다루면서, 문학을 사회운동으로만 좁히는 관점을 견지하고 그러한 페미니즘만이 주효하다고 추구한다면, 그건 페미니즘에 대한 적극적인 왜곡이자, 굴절된 자기투사이며, 의도치 않은 자기 백래시가 될 것이다.


여러모로 재작년 여름에 읽었던 이지은 비평집과 비교할 때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이지은 평론가의 비평집도 문학에서의 페미니즘을, 약자와의 연대를, 올바른 사회 변혁을 바라보고 있지만 달랐다. 그것은 아마도 이지은 비평집에 대한 천희란 소설가의 추천사처럼, "미학적 윤리와 정치적 올바름 사이의 긴장을 이해"하는 데서 비롯한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사회적으로 변화와 개혁을 부르짖지 말라는 게 아니다. 문학에서 정치적 올바름을 이야기하지 말라는 게 아니다. 올바른 이야기를 올바르지 않은 방식으로 이야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


여담으로, 이 비평집과 별개로, 제발 남성 젠더의 문학인을 비판할 때 "그가 ~한 까닭은 그가 백인 남성이기 때문이다."로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여성으로서 그렇게 끝나버리는 비평의 문장들을 읽을 때 부끄러워진다. 문학인이 갖고 있는 사회적 외연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고, 필요불가결한 일이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는 문장들은 비평으로서 무책임하다. 권력을 오남용하는 남성 젠더만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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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과 그 적들
조영일 지음 / 비(도서출판b)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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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단‘이라는 유동적 개념을 규명 못하는, 헐거운 논리들. 한편으로 이런 접근은 필요하기에, 이렇게 쉽게 소비되어 아쉽다. 권력을 비판한다는 건 그 잘못됨을 비판하는 것이지 권력 자체를 비판하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 권력 자체가 옳거나 그른 건 아니므로. 그나마 ‘비평의 빈곤‘은 재밌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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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포럼 - 키워드로 읽는 2020년대 한국문학
소영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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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였나. 오랜만에 대형 서점에서 문예지들을 훑어 읽다가 상처받았던 대목으로 시작하고 싶다.


저는 페미니즘적 관점이 없이는 시를 읽을 수도 없다고, 시 수업에서 반드시 페미니즘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되기 전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죠. 성차별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의 시는 우리 문학에 조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구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에게 종속되어 착취당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의 시는 좋을 수도 없고 읽혀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여성으로서 혹은 페미니스트로서 위와 같은 발언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것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문학을 비평하는 사람이 저러한 폭력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을 볼 때, 페미니스트로서 매번 상처받는다. 나는 피해자요 만인은 가해자, 라는 식의 시선은 타자와 다름에 대한 배제, 다양성에 대한 궁극적인 차단을 시사한다. 나아가 페미니즘이 여성을 억압하는 모순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한 채 그저 당장의 백래시를 반찬 투정 수준으로 늘어놓는 데 급급하다면, 문학의 정치를 올바름과 논증의 영역으로 가져갈 수 없다. 당연히 시를 읽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페미니즘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 아니게 된다. 성차별주의를 옹호하는 사람과 그의 시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게 아니다. 성차별주의를 옹호하는 사람과 그의 시를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안티-페미니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시가 좋을 수도 없고 읽혀야 할 이유도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괴벨스적인, 아니, 괴벨스 이하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비평이 그런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때, 문학은 도구화되고, 문학의 제도는 단일성의 지옥에 빠지며, 기성의 젠더 지배질서는 오히려 공고해진다. 여성이 남성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래된 폭력이듯, 문학이 페미니즘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거대한 폭력이다.


-


그러한 의미에서 '비평포럼'이라는 제목 아래 묶인 이 책은, 한국 문학의 현장성을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책이었다. 공부를 통한 치유가 이런 거였을까 싶을 정도. 조연정 선생의 글은 90년대 영미권 여성운동가들 수준의 렌즈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심심했다. 오혜진 선생의 글은 매우 재미있었는데, 조금만 더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더 폭넓게 다루면 좋지 않을까? 어차피 문학비평이니 선생의 목소리도 좀 더 노골화하시면 더 좋겠고. 김형중 선생의 글은 시의적절한 진단 같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다소 안전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양경언 선생의 글도 좋았지만 답을 정해놓고 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래도 같은 부를 구성하는 다른 이들의 글보다는 덜 '답정너'라서 좋았다. 이희우 평론가의 글은 잘 다듬어져 있는 글이었는데, 그만큼 너무 흔한 소재와 주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이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이 앤솔러지가 정한 키워드들 자체가 너무 당대의 목소리를 좇느라 경황이 없는 수준에 그쳐서였던 것 같다.


이 책은 작금의 한국 문학비평의 공론장에서 나오는 담론을 잘 보여준다. 담론의 방향성이 얼마나 편협하며, 또한 담론의 볼륨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고스란히 나타낸다.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는 문학에 주목하는 것은 쉽다. 문지가 이 시점에서 이런 비평 앤솔러지를 낸 것은, 한국의 공론장에서 문지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쇄신하고 출판사라는 영리 단체의 존재 가치를 인준받기 위함이다(비단 이 앤솔러지만이 아니라, 일부러 자사의 계간 문예지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서 페미니즘적인 소설가를 뽑는다든지, 페미니즘적인 비평가를 뽑는다든지 하는 것들, 또 문지에서 그간 외면해온 경향의 시와 소설에 '의도적으로' 주목하여 문지문학상을 수여한다든지 하는 것들도 그러한 일환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문지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받는 혐의에 대해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 급급할 게 아니라, 본래 하던 방향성에 대한 성찰과 강화를 줄기차게 이어가야 할 것 같다. 그걸 손놓은 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영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비평 모음을 내는 건 문지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비평이 가진 역할이 무엇인지, 문학 읽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할 때 기초를 잘 지킨 말들이 있어 위로가 되었다. 예를 들면


비평이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비평의 어려움은 세계의 복잡성을 환기하는 말이거나 세계가 다르게 의미화되어야 한다는 말에 가깝다. 비평의 어려움은 세계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에서 온 것이다. 비평은 결국 세계 읽기인 것이다.


라고 쓸 때, 비평은 '어려움'이라는 요소가 잘못의 혐의로 안일하게 단순화되는 것에 저항한다. 문학이 가진 어려움, 그리고 문학을 어렵게 읽는다는 비판으로부터, 비평은 그 자신과 문학을 방어해 낸다. 세계가 어려우니 그것을 읽어 내는 언어 또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느끼는 '사랑'이 그냥 성욕이나 우애 따위의 전형으로만 정형화되지 않고 복잡다단한데, 그걸 왜 단순하게 해야 하는가? 단순한 것이 옳다거나 좋다는 식의 폭력에 대해, 비평은 저러한 언어를 통해 극복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하고 단정했다. 심지어 급진성을 부르짖는 영문학자 황정아 선생의 발언조차


무엇을 갖든, 어떤 안락을 누리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는 감각을 기억하게 하는 것, 삶과 기쁨의 토대가 다른 곳에 있음을 결코 잊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권여선 소설에 스며 있는, '비판'보다 더 강력한 급진성이다.


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차원적인 급진성 동경, 일차원적인 진보주의 동경을 정갈하게 전시하는 데 그친다. 권여선 소설보다도 권여선 소설을 통해 비평가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성향을 과시하고 강요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아닌 척'하는데도 노골화될 때, 그것은 권여선 소설에 대한 또 다른 무례가 되고 만다. 텍스트는 중심으로 데려오되, 비평하는 사람의 내면에서는 이미 바깥으로 버려지는 형국이다. 분석이 수단을 위해 쓰일 때, 그건 더 이상 비평이 아닌, 목적론적 어용의 쓰기로 굴러 떨어진다.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사회의 변화를 부르짖는 메시지 말고는 할 말이 없는 비평이라면, 그건 문학을 도구적으로 소모하는 비평의 자세일 따름이다. 사회의 변화, 중요하다. 문학이 사회의 변화를 주장할 수 있는가? 당연히 가능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그것에 대해 끈을 놓지 않는 게 문학을 비평할 때 수반되어야 할 기본적인 전제일 것이다.


혹은 현 시점의 문학 작품들에 대한 진단이 정확할 때 비평 언어가 빛나기도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한국문학에서 소수자들의 친밀성의 영역이 다양한 형태로 재현적 가시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성과 퀴어를 포함한 소수자적 존재 누구라도 타자적-주체적인 복합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요컨대, 정치적-경제적 층위로 엉켜 있으며 분리 불가능한 사적-공적 존재라는 점을 외면한 채로 소수자 차원의 존재론적 가시화만으로, 그러니까 현실 가족의 다양한 양태를 재현하는 방식만으로는 문제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없다.


소수자의 복합적인 타자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의 장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굉장히 자명하게 이야기되어 왔다. 여기에 정치성과 경제성이 끼어드는 것 역시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명하게 발화되는 풍토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실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진단은 한국 문학의 '현 단계'를 바라볼 때 명백히 내릴 만한 진단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수자 차원의 존재론적 가시화만으로는 문제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도 옳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진단 이후이다. 한국 문학의 장은 오랫동안 그러한 '소수자 차원의 존재론적 가시화'를 늘어놓는 데 경사되어 있지 않았던가? 더 다양한 소수자의 상황만이 아니라, 소수자의 깊은 내면이나 소수자의 논리에 의해 굴절되는 소수자의 자화상이라든지, 소수자 자체의 폭력성이나 소수자의 자기 혐오 같은 것들이 면밀하고 긴밀하게 다루어졌던가? 이에 대한 비판적인 재고가 없었다는 것은 비평의 나태처럼 읽혀 안쓰러웠다. 변화가 필요해, 현실의 억압을 잘못됐어, 수준의 이야기는 웬만한 지식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이상과 그 이후로 나아가야 한다. 문학은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도덕 판단이 아니다.


이러한 식의 투쟁적인 비평은 주류남성-비주류여성의 이분법 자체를 철폐하는 근본적인 데까지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페미니즘 비평에 긍정적인 역할로 관여하고 있는 문화연구자(이기는 하지만 학술논문은 적고 자기 주장을 하는 글들에 더 치중하고 계시다는 점에선 비평가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이는) 오혜진 선생은,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것에 대해, 그 자체가 권력 지향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전제에 따라 주류를 비판하는 식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도리어 비평에서는 절대적 주류라는 점에서, 이 같은 비평의 위치 점유는 연대를 빙자한 휩쓸리기, 즉, 쉽고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동시대의 변화를 부르짖는 목소리와 결이 같다는 것은, 그만큼 동시대의 눈치에 휩쓸려 간다는 뜻이다. 비평이 문학 작품을 읽고 미지를 선도하거나 도래할 언어를 예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카데미에 물들었거나 동시대 군중심리에 끌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남들이 다 좋아라 하는 것을 따라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유행 추종은 동시대를 호흡하는 미래-미지 추구와 다른 것이다. 비평이 유행을 추종할 경우 그것은 문학 작품 혹은 독자의 식민지에 불과해지며, 미래-미지를 추구할 경우엔 비평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을 욕망할 수 있게 된다. 비평가의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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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구조
조영일 지음 / 비고(vigo)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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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리가 후달린다. 논문이라기엔 실증적이지 않고 비평이라기엔 이해력 부족. 이 책에 문단에서 숨기는 이야기 따윈 없다. 문단 비판? 해야지. 필요하지. 근데 이렇겐 어림없다. 문학 작품에 대한 해석, 문학 장과 체제에 대한 분석이 부재했을 때, 비판은 한없이 안일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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