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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포럼 - 키워드로 읽는 2020년대 한국문학
소영현 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평점 :
엊그제였나. 오랜만에 대형 서점에서 문예지들을 훑어 읽다가 상처받았던 대목으로 시작하고 싶다.
저는 페미니즘적 관점이 없이는 시를 읽을 수도 없다고, 시 수업에서 반드시 페미니즘을 함께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시인이 되기 전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죠. 성차별주의를 옹호하는 사람의 시는 우리 문학에 조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인구의 절반이 나머지 절반에게 종속되어 착취당해야만 한다고 믿는 사람의 시는 좋을 수도 없고 읽혀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여성으로서 혹은 페미니스트로서 위와 같은 발언은 페미니즘이 아니라 파시즘이라는 것을 너무나 정확하게 알고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문학을 비평하는 사람이 저러한 폭력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을 볼 때, 페미니스트로서 매번 상처받는다. 나는 피해자요 만인은 가해자, 라는 식의 시선은 타자와 다름에 대한 배제, 다양성에 대한 궁극적인 차단을 시사한다. 나아가 페미니즘이 여성을 억압하는 모순에 대해서는 생각지 못한 채 그저 당장의 백래시를 반찬 투정 수준으로 늘어놓는 데 급급하다면, 문학의 정치를 올바름과 논증의 영역으로 가져갈 수 없다. 당연히 시를 읽기 위해서는 페미니즘이 필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것의 전제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순간, 페미니즘은 더 이상 페미니즘이 아니게 된다. 성차별주의를 옹호하는 사람과 그의 시가 옳은지 그른지 따지는 게 아니다. 성차별주의를 옹호하는 사람과 그의 시를 조금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안티-페미니즘적이라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시가 좋을 수도 없고 읽혀야 할 이유도 없다고 말하는 것 또한, 괴벨스적인, 아니, 괴벨스 이하의 프로파간다에 불과하다. 비평이 그런 프로파간다로 전락할 때, 문학은 도구화되고, 문학의 제도는 단일성의 지옥에 빠지며, 기성의 젠더 지배질서는 오히려 공고해진다. 여성이 남성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오래된 폭력이듯, 문학이 페미니즘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 또한 거대한 폭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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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의미에서 '비평포럼'이라는 제목 아래 묶인 이 책은, 한국 문학의 현장성을 느끼는 것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책이었다. 공부를 통한 치유가 이런 거였을까 싶을 정도. 조연정 선생의 글은 90년대 영미권 여성운동가들 수준의 렌즈로 들여다보는 기분이라 심심했다. 오혜진 선생의 글은 매우 재미있었는데, 조금만 더 들어가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더 폭넓게 다루면 좋지 않을까? 어차피 문학비평이니 선생의 목소리도 좀 더 노골화하시면 더 좋겠고. 김형중 선생의 글은 시의적절한 진단 같기도 했는데, 한편으로는 다소 안전하다는 인상이 들었다. 양경언 선생의 글도 좋았지만 답을 정해놓고 말하는 것 같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그래도 같은 부를 구성하는 다른 이들의 글보다는 덜 '답정너'라서 좋았다. 이희우 평론가의 글은 잘 다듬어져 있는 글이었는데, 그만큼 너무 흔한 소재와 주제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이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이 앤솔러지가 정한 키워드들 자체가 너무 당대의 목소리를 좇느라 경황이 없는 수준에 그쳐서였던 것 같다.
이 책은 작금의 한국 문학비평의 공론장에서 나오는 담론을 잘 보여준다. 담론의 방향성이 얼마나 편협하며, 또한 담론의 볼륨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고스란히 나타낸다. 많은 독자들이 공감하는 문학에 주목하는 것은 쉽다. 문지가 이 시점에서 이런 비평 앤솔러지를 낸 것은, 한국의 공론장에서 문지가 갖고 있는 이미지를 쇄신하고 출판사라는 영리 단체의 존재 가치를 인준받기 위함이다(비단 이 앤솔러지만이 아니라, 일부러 자사의 계간 문예지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서 페미니즘적인 소설가를 뽑는다든지, 페미니즘적인 비평가를 뽑는다든지 하는 것들, 또 문지에서 그간 외면해온 경향의 시와 소설에 '의도적으로' 주목하여 문지문학상을 수여한다든지 하는 것들도 그러한 일환일 것이다. 여담이지만 문지는 이렇게 외부로부터 받는 혐의에 대해 자기 증명을 하기 위해 급급할 게 아니라, 본래 하던 방향성에 대한 성찰과 강화를 줄기차게 이어가야 할 것 같다. 그걸 손놓은 지 십 년은 된 것 같은데, 영 아쉽다. 그래도 여전히 이런 비평 모음을 내는 건 문지의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비평이 가진 역할이 무엇인지, 문학 읽기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할 때 기초를 잘 지킨 말들이 있어 위로가 되었다. 예를 들면
비평이 어렵다는 말을 종종 듣지만, 비평의 어려움은 세계의 복잡성을 환기하는 말이거나 세계가 다르게 의미화되어야 한다는 말에 가깝다. 비평의 어려움은 세계에 대한 이해의 어려움에서 온 것이다. 비평은 결국 세계 읽기인 것이다.
라고 쓸 때, 비평은 '어려움'이라는 요소가 잘못의 혐의로 안일하게 단순화되는 것에 저항한다. 문학이 가진 어려움, 그리고 문학을 어렵게 읽는다는 비판으로부터, 비평은 그 자신과 문학을 방어해 낸다. 세계가 어려우니 그것을 읽어 내는 언어 또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내가 느끼는 '사랑'이 그냥 성욕이나 우애 따위의 전형으로만 정형화되지 않고 복잡다단한데, 그걸 왜 단순하게 해야 하는가? 단순한 것이 옳다거나 좋다는 식의 폭력에 대해, 비평은 저러한 언어를 통해 극복한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평범하고 단정했다. 심지어 급진성을 부르짖는 영문학자 황정아 선생의 발언조차
무엇을 갖든, 어떤 안락을 누리든, 그것이 궁극적으로는 중요하지 않다는 감각을 기억하게 하는 것, 삶과 기쁨의 토대가 다른 곳에 있음을 결코 잊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권여선 소설에 스며 있는, '비판'보다 더 강력한 급진성이다.
라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일차원적인 급진성 동경, 일차원적인 진보주의 동경을 정갈하게 전시하는 데 그친다. 권여선 소설보다도 권여선 소설을 통해 비평가 자신이 추구하는 정치성향을 과시하고 강요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아닌 척'하는데도 노골화될 때, 그것은 권여선 소설에 대한 또 다른 무례가 되고 만다. 텍스트는 중심으로 데려오되, 비평하는 사람의 내면에서는 이미 바깥으로 버려지는 형국이다. 분석이 수단을 위해 쓰일 때, 그건 더 이상 비평이 아닌, 목적론적 어용의 쓰기로 굴러 떨어진다. 문학 작품을 분석할 때, 사회의 변화를 부르짖는 메시지 말고는 할 말이 없는 비평이라면, 그건 문학을 도구적으로 소모하는 비평의 자세일 따름이다. 사회의 변화, 중요하다. 문학이 사회의 변화를 주장할 수 있는가? 당연히 가능하다. 문제는 그것을 어떻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그것에 대해 끈을 놓지 않는 게 문학을 비평할 때 수반되어야 할 기본적인 전제일 것이다.
혹은 현 시점의 문학 작품들에 대한 진단이 정확할 때 비평 언어가 빛나기도 한다. 가령 다음과 같은 경우가 그렇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한국문학에서 소수자들의 친밀성의 영역이 다양한 형태로 재현적 가시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성과 퀴어를 포함한 소수자적 존재 누구라도 타자적-주체적인 복합성을 띠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 또한 명백해졌다고 하겠다. 요컨대, 정치적-경제적 층위로 엉켜 있으며 분리 불가능한 사적-공적 존재라는 점을 외면한 채로 소수자 차원의 존재론적 가시화만으로, 그러니까 현실 가족의 다양한 양태를 재현하는 방식만으로는 문제의 진면목을 들여다볼 수 없다.
소수자의 복합적인 타자성은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한국 문학의 장에서 이러한 이야기는 굉장히 자명하게 이야기되어 왔다. 여기에 정치성과 경제성이 끼어드는 것 역시 말할 나위 없는 사실일 것이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자명하게 발화되는 풍토가 만들어진 것은 매우 바람직한 결실이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진단은 한국 문학의 '현 단계'를 바라볼 때 명백히 내릴 만한 진단이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소수자 차원의 존재론적 가시화만으로는 문제의 진면목을 들여다보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진단도 옳다.
그런데 문제는 그 진단 이후이다. 한국 문학의 장은 오랫동안 그러한 '소수자 차원의 존재론적 가시화'를 늘어놓는 데 경사되어 있지 않았던가? 더 다양한 소수자의 상황만이 아니라, 소수자의 깊은 내면이나 소수자의 논리에 의해 굴절되는 소수자의 자화상이라든지, 소수자 자체의 폭력성이나 소수자의 자기 혐오 같은 것들이 면밀하고 긴밀하게 다루어졌던가? 이에 대한 비판적인 재고가 없었다는 것은 비평의 나태처럼 읽혀 안쓰러웠다. 변화가 필요해, 현실의 억압을 잘못됐어, 수준의 이야기는 웬만한 지식인이면 누구나 할 수 있다. 그 이상과 그 이후로 나아가야 한다. 문학은 잘잘못을 따지기 위한 도덕 판단이 아니다.
이러한 식의 투쟁적인 비평은 주류남성-비주류여성의 이분법 자체를 철폐하는 근본적인 데까지는 접근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페미니즘 비평에 긍정적인 역할로 관여하고 있는 문화연구자(이기는 하지만 학술논문은 적고 자기 주장을 하는 글들에 더 치중하고 계시다는 점에선 비평가라고 보는 게 더 적절해 보이는) 오혜진 선생은,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것에 대해, 그 자체가 권력 지향적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전제에 따라 주류를 비판하는 식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도리어 비평에서는 절대적 주류라는 점에서, 이 같은 비평의 위치 점유는 연대를 빙자한 휩쓸리기, 즉, 쉽고 안전한 길을 택하는 것이다.
동시대의 변화를 부르짖는 목소리와 결이 같다는 것은, 그만큼 동시대의 눈치에 휩쓸려 간다는 뜻이다. 비평이 문학 작품을 읽고 미지를 선도하거나 도래할 언어를 예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아카데미에 물들었거나 동시대 군중심리에 끌려가고 있다는 뜻이다. 남들이 다 좋아라 하는 것을 따라가는 데 혈안이 되어 있는 유행 추종은 동시대를 호흡하는 미래-미지 추구와 다른 것이다. 비평이 유행을 추종할 경우 그것은 문학 작품 혹은 독자의 식민지에 불과해지며, 미래-미지를 추구할 경우엔 비평 그 자체가 하나의 사상을 욕망할 수 있게 된다. 비평가의 자기 객관화가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감히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