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째 연애중 - 아웃 케이스 없음
박현진 감독, 김하늘 외 출연 / 에스엠픽쳐스(비트윈)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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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다진씨 좋아해요.

-전 6년 동안 만나는 남자친구가 있어요

-남자친구 사랑해요?

-그런 선이 아니에요. 우린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어딜 다녀왔는지 알고, 몇번째 이빨이 썩었는지도 알고, 뒷통수의 흉터가 어떻게 생긴건지도 알아요.

-그래서, 그 사람 사랑해요?

-...사랑이 뭐 별건가요?

-그럼 제가 다진씨 사랑해도 되는거죠?




특별해서 특별한 것이 아니라,

6년간이란 시간의 세례 덕택에 특별해진 사람과 헤어지지 못한다는 이야기. 

아닌건 아니라서, 예의없는 사람과는 칼같이 헤어지는 스타일의 나로선 엔딩이 이해되지 않았지만

아마 많은 오래된 연인들이 이렇지 않을까.

룸살롱가는 남편과 헤어지지 못하는 아내처럼

한번의 원나잇쯤은 알면서도 눈감고 넘어가야 하는 6년차 여자친구. 

나라면 발자국 소리만 들어도 어딜 다녀왔는지 아는 속썩이는 남자친구보단 다크써클이 섹시하다고 말해주는 새남자에게 홀랑 넘어갈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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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14 15: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4 2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15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세뇨리따 2014-07-21 1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크서클이 섹시하시네요!
 
헤이세이 머신건스
미나미 나쓰 지음, 전새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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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벌레이고 나는 성자라고 생각해야 이겨낼 수 있는 순간이 있다. 나는 너희처럼 하찮고 시시하고 천박하지 않으니 이 따위 치욕따위야 얼마든 감내하겠다는 오기가 삶을 지탱해주는 순간들. 하지만 나 역시 하나의 벌레에 불과함을 인정해야 하는 때가 있고, 그 순간이 나머지 삶의 방향을 결정짓는것 같다. 누구는 좌절하고 누구는 냉소하고 누구는 그나마 나은 벌레가 되겠다고 기를 쓴다. 아주 극소수만이 담담히 현실을 받아들이고 어른이 된다.(고 한다)


나는 굳이 따지자면 내 주변의 벌레들까지 사랑하는 벌레가 되고 싶었다. 일을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자는 입사초기의 거창한 다짐은 그렇게 탄생하였다. 입사한 지 만 일년이 지난 요즘도 그 약속을 지켜보고자 미움이 차오르면(이라고 고상하게 쓰고 조낸 뽝치면 이라고 읽는다) 화를 쏟아내기보다는 조용히 이너피스를 외치며 별모양 포스트잇을 떼내어 모니터에 하나씩 붙인다. 손은 떨리고 호흡은 불규칙하다. 착한 벌레로 살겠다는 다짐은 창대했으나 그 끝은 미약하다. 미움을 겨우 참아내고 있으니 말이다. 


천사표 벌레로 살지 못할 거라면 눈치 빠른 벌레로 포지셔닝하여 편하게 살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그렇게 영리하지도 못했다. 머리론 다 이해했다고 생각하면서도 상사에겐 아부를/남자사수에겐 애교를/동기에겐 가식을 그 3박자를 맞출수가 없었다. 박치인 주제에 오직 실력으로만 인정받겠다면 100점 만점에140정도는 해줘야 하는데 또 그렇게 일할 정도로 체력이나 야심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괜히 여기 치이고 저기 치이면서 별로 잘난것도 없는 주제에 나와 같은 벌레들을 미워하게 되는 내가 미웠다. 나는 왜 내가 벌레인걸 알면서도 왜 벌레처럼 살지 못하는걸까?


15세 최연소 문예상 수상작이 어떤건가 싶어 아무 기대없이 집어든 이 책을 보니 답은 간단했다. 나는 내가 얼마나 한심하고 찌질하고 볼썽사나운 벌레인지 진지하게 바라본 적도 없으면서 마치 벌레스러움에 대해 통달한 냥 굴고 있었던 것이다. '어둑해진 저녁에 형광등을 켰을 때 드러나는 어질러진 살림살이의 거뭇거뭇한 때와 카펫의 얼룩들'(76p)같은 벌레스러움을 직시한 적이 있었던가. 스스로의 벌레다움에 대해 분노하고 이럴 순 없다고 끝까지 부정하고 난리 부르쓰를 춘 다음에서야 삶의 방향을 정하는 갈림길에 서게 되는 것인데 나는 그 모든 과정을 건너뛰고 너무도 순순히 내가 벌레인게 당연하다며 수긍해버렸다. 성찰없이 무작정 천사표 벌레가 되겠다 하였더니 이렇게 몸과 마음과 머리가 지 멋대로 노는 사태가 도래한 것이다. 알을 깨고 나온적이 없으면서 알을 깨고 나왔다고 믿었다.


15살 소녀가 만들어 낸 14살 주인공이 자신의 벌레스러움을 깨닫고 단박에 어른이 되는 모습은 캬, 소리가 나올 만큼 경쾌하고 멋있다. 지난 몇 달간 내 마음을 그리 고생시키던 문제의 원인을 한 번에 짚어주니 내 속이 다 후련하다. 이것이 문학의 힘인가 보다. 심리학 서적이나 실용서 수십권으로도 못할 일을 백여쪽의 소설 하나가 해내었다. 애기가 쓴 소설이라 어느 정도는 허세일거라고 얕봤던거 미안해진다. '누구든 연습으로 이룰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섰다.'는 평가가 영 과장은 아닌듯하다. 십대에 하고 넘어왔어야 할 자기탐구라는 숙제를 열심히 해나가야겠단 생각이 든다. 이십대에는 부디 마칠 수 있기를 바라며.


* 책은 좋았는데 93쪽짜리 중편을 꼭 양장 단행본으로 내었어야 하나? 하는 생각은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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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세이 머신건스
미나미 나쓰 지음, 전새롬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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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지러울 정도로 빠른 시대의 질주가 새기는 통증에 농락당하며 조금씩 닳아가다가, 저도 모르는 새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자신을 확립할 방법을 잃어간다. 예컨대 사실은 놀고 싶고 재미있게 지내고 싶은데 어째서 책상에 달라붙어 살아가는 데 전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은 수식을 배워야 하는지 늘 의아해하며 고민하지만, 하라니까 하는 거다라는 핵심을 비껴난 결론에 다다른다.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것은 본능이 아니라 체면이다. -34쪽

..선생님은 포기했는지 "나는 어릴 때 자신감이 별로 없었단다."라고 말을 꺼내며 나름의 인생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자아도취에 빠져보는 거야. 나는 완벽해, 최고야, 대단해 하고 굳게 믿는 거지. 그럼 말이지, 사소한 단점이나 조금이라도 납득할 수 없는 결함이 생겼을 때 도저히 용납이 안 되면서, 자연스럽게 경쟁심이 생겨나게 돼.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 되는 거지. 그런데 이건 양날의 칼이기도 해. 자기 힘을 과신하면, 그 자신감이 꺾였을 때 정말로 절망해서 무너져버리거든. 콤플렉스를 경쟁심으로 연결시키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하지만 한번 내 것으로 만들어버리면 무서울 게 없단다. 분명히 계속 힘을 기를 수 있을 거야."
"못해요."
나는 즉답했다. 나는 스스로에게 도취되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언제든 내가 최우선이었고 무슨 일이 생겨도 내겐 아무 잘못 없다는 생각부터 했고 스스로를 완벽한 존재로 생각했었기 때문에, 왕따를 당한다는 굴욕과 마주하려니 너무 분해서 선생님이 말하는 '절망해서 무너져버리'는 지경에 빠진 것이다. 나는 거기에 해당된다. -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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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다, 내 인생 - 이 시대 최고 명사 30人과 함께 하는 한 끼 식사
신정선 지음 / 예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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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나가는 신문사 기자가 우리나라에서 잘나간다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의 인생에 얽힌 음식 이야기를 듣고, 쓰고, 엮어 책으로 만들어 내었다. 한 사람의 인터뷰이가 하나의 음식을 이야기한다. 신경숙이 엄마의 사랑으로 기억하는 푸릇한 깻잎장아찌, 승효상이 어린 아내에게 만들어 준 멸치 우린 물로 끓여낸 김치죽, 배한성을 철들게 만들었던 눈물어린 인절미까지. 주간지나 월간지 특집 한 꼭지로도 손색없을 그럴듯한 이야기 수십개 주르르 나열되어 있으니 독자 입장에선 진수성찬 앞두고 침 넘어가듯 어서 이 호화롭게 차려진 글들을 어서 읽고 싶어 속이 탄다.


저자의 필력이 좋고, 요리로 치자면 '원재료'라고 할 법한 인터뷰이들의 인생이 워낙 드라마틱하기에 책은 기대만큼 만족스러웠다. 싱크대 공장 직원에서 신라호텔 총주방장이 된 서상호씨 이야기나 무기중개상으로 번 돈으로 최고급 한정식집을 차린 조태권씨의 이야기 등 우리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롤러코스터 인생을 간접적으로 만나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리고 보통 사람들이 '인생의 음식'으로 꼽는 것이 어리고 힘들때 가족과 함께 먹은 음식인지라, 오래 산 이들의 옛추억을 독자로서 공유할 수 있단 점도 좋았다.  


읽는 내내 잘썼네 잘썼네, 감탄했지만 별이 하나 모자란건 너무 윤기 자르르하게 '잘'썼기 때문이다. 인터뷰를 토대로 저자가 다시 쓴 글이다 보니 너무 빤질빤질 다듬어져 이것이 진정 인터뷰이의 인생인지, 만들어진 소설인지 애매한 지점이 생긴다. 이에 대해 저자는 서론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질문과 답으로 분절되는 인터뷰 형식이 아니라 말하듯 풀어쓴 것은 독자에게 가깝고 편안하게 인터뷰를 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주인공이 주욱 말해주는 것처럼 쓰기는 했으나, 그 안에는 나의 질문과 느낌과 헤아림이 녹아 있음을 밝혀둔다. 서른 명과 나눈 문답을 내 머릿속에서 반죽해, 이야기라는 국수로 뽑아내고, 문장과 표현이라는 육수를 부은 셈이다. 


기획의도를 감안한다고 해도 인터뷰이의 목소리로 '밤이 되면 모든 소리가 자취를 감춘 고요의 캔버스에 물소리, 바람소리만 고였다가 나가지요' 라던가 '여름밤이면 까만 밤바다를 지나 희디흰 배로 물결을 밀고 오는 고등어 떼의 꿈을 꿉니다. 녀석의 향기로운 전율을 맞이하러 제주도행 비행기를 타야겠네요.'식의 곱디 고운 문장이 튀어나오면 내가 읽는 것이 진솔한 있는 그대로의 인터뷰이라기 보다는 저자의 시각으로 재해석한 또 하나의 '가상 인터뷰이'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유명인의 삶을 음식이란 소재로 진솔하게 그려내겠다는 이 책의 컨셉과 저자의 수려한 글발이 만들어낸 약간의 부조화랄까. 


또 한가지 아쉬운 점은, 서른 명이나 되는 유명인을 만나다 보니 깊이 있는 이야기로 더 들어가지 못한 부분이다. 훌륭한 인터뷰이에다가 저자의 글솜씨도 좋으니 독자로선 더 더 이야기를 듣고 싶은데 언제나 이야기가 좀 시작되고 더 궁금해질라 하는 차에 똑 끊겨버리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하지만 이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좋은 책이고, 추천하고 싶은 책임은 분명하다. 2012년에 읽은 교양서들이 다 괜찮아서 우리나라 출판계 수준이 상향평준화 되고 있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기사만 쓰기엔 아까운 글솜씨이다. 저자의 다음 책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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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2-01 1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어보고 싶네요. 혹할만한 리뷰를 쓰는 라일라님^^
조선일보 기자네요. 전에 중앙일보 기자가 쓴 책 역시 위에서 말한 것처럼 술술 넘어가는 문장이 좀 그랬는데. 이 책은 어떨지 모르겠어요

LAYLA 2012-02-02 00:07   좋아요 0 | URL
아치님
재미있어요. 보시길 추천해요 ㅎㅎ ^^ 너무 매끈해도 안되고 너무 투박해도 안되고 참 글쓰는 사람은 힘들겠어요. 쉽게 말할 수 있는 독자라서 속편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한 마음이랄까요 ㅎ

2012-02-01 11: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0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16: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2 00: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맛있다, 내 인생 - 이 시대 최고 명사 30人과 함께 하는 한 끼 식사
신정선 지음 / 예담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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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생이 냉면 맛을 알기 어렵듯이, 이십대가 그런 사랑을 이해하기 어렵겠지. 맛을 아는 사람이 최고로 꼽는 맛이 있듯이, 살아본 사람 눈에 보이는 감정의 물결이 있는 법이니까.

-이순재, 비빔냉면-22쪽

최근에 문 연 이태원 식당 '더 믹스드 원' 메뉴 짤 때는 사흘 밤을 꼬박 새웠어요. 미친 거죠. 입에서 냄새 나죠, 몸에서도 땀내 풍기죠. 하지만 완성됐을 때의 성취감! 제가 저를 쓰다듬으면서 "아, 역시 또 한 건 했다. 야, 에드, 잘했다." 하는 거죠. 속된 말로 '자뻑'인데 뭔가를 창조하는 사람은 자뻑이 있어야 해요. 후배들한테도 꼭 이야기해줘요. 네 음식에 네가 감탄하지 못하면 남들이 감탄 해주지 않는다고요. 내가 뭔가 하나 해냈구나, 라는 그 순간의 느낌 때문에 미친 듯이 일할 수 있는 거죠.

-에드워드 권-46쪽

주로 일했던 게 일식당이었어요. 스물여덟 살쯤이었는데, 어떤 스시집에서 일하다가 또 일하기가 싫은 거예요. 일도 너무 많고 엄했어요. 그때만 해도 일본 사람들에게는 아르바이트란 개념 자체가 없었어요. 한번 취직하면 거기서 평생을 보내는 거죠. 장어구이 집에 취직하면, 쌀 씻는 것만도 2년을 해요. 장어 만지려면 7년이 걸리고, 장어 구우려면 10년은 걸렸죠. 그런 곳에서 한두 달 일하고 그만두겠다고 말한다는 건 도무지 인간으로 취급해주기가 힘든 수준이었죠. 하지만 저는 허접한 사람이었으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거나 그만두려고 했어요.
... 밤늦게 영업이 다 끝나고 나서려는데 사장이 "팁통을 열어라"그러시는 거예요. 전부 놀랐어요. 팁을 모아두는 그 통은 매월 말에야 열어서 나눠 갖는 거였거든요. 그런데도 사장은 팁통을 열더니 정확하게 사람수대로 나눈 몫만큼 저에게 줬어요. 주위 직원들 반응이야 설명드릴 필요 없겠죠. 어색하게 돈을 받아들고 고맙다는 말도 없이 나왔죠. 30미터쯤 갔을까, 사장이 나오더니 절 불러요. 잠깐 와보라고 하는데 속으로 '참고 참았던 화가 폭발했구나'했어요.-55쪽

어쨌든 다시 들어갔죠. 몇 대 맞는 것쯤 겁 안 나던 나이였으니까요.
사장이 들어온 저를 보고 스시 카운터에 앉으라더니 "너 우리 집 초밥 먹어본 적 없지?" 묻더라고요. 사실 전 그때까지 초밥을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었어요. 가게에 남는 거야 물론 있었지만 괜한 자존심에 먹기가 싫더라고요. 사장이 "오늘 네 생일이니까 초밥을 만들어주겠다."고 했어요. 그러면서 한 점씩 만들어서 카운터에 올렸어요. 그냥 올리는 게 아니고 하나씩 올릴 때마다 "농어!" "장어!" "도미!' 하는 식으로 엄숙하고 힘찬 목소리로 이름을 부르면서요. 허투루 만든 게 아니고 사장이 최선을 다해 만들었다는 뜻인 거죠. 아,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는 걸 그때 알았어요. 진짜 상상도 못할 맛이었어요. '어떻게 이런 음식이 있지' 하면서 정신없이 입으로 집어넣었어요.-56쪽

다 먹고 나니 그제야 미안한 마음이 들었어요. "죄송합니다.' 했더니 사장이 그랬어요. "나는 못난 집에서 자랐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지만, 사람 볼 줄은 안다. 너는 언젠가는 꼭 세상에서 제일 비싼 초밥을 먹을 사람이다. 나쁜 마음먹지 말고 열심히 살아라."

-김대우-57쪽

...그러면서 차츰차츰 친해진 거야. 데이트를 시작했는데, 김 시인이 치질에 걸렸어. 고생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지. 돈이 없으니까 치료를 제대로 받기 어려웠어. 내 용돈을 치료비로 썼지. 그걸로도 모자라서 우리 집 다락에 있던 피륙을 한 필 두 필 몰래 빼다 팔아서 보탰어. 그러다 우리 아버지한테 들켰잖아. 난리가 났지. 절대로 만나면 안된다고 강제로 떼놓는 바람에 몇 달 동안 못 만난 거야. 그동안에 김 시인은 몸이 어지간히 회복돼서 서울대학교 부속 간호학교에 영어 교사로 취직했어. 우리 집에 몇 번 찾아왔지만, 아버지가 문전박대했다.
어느 날 외출하려고 집을 나서는데 익숙한 손이 내 팔뚝을 붙잡아. 첫마디가 아, 아직도 생생해 "마이 소울 이즈 다크" 그 소리 들으니까 눈물이 콱 쏟아지대. 그날부터 집에 안들어갔어. 결국 시어머니가 방을 하나 얻어주셨지. 그게 1949년. 살림을 시작한 거지. 아버지 몰래 내 물건을 하나씩 살살 옮겨왔어. 오늘은 옷가지, 내일은 책, 하는 식으로. 어머니가 명주 이불 해주시고 시어머니가 금반지 해주시고 그래서 우리는 부부가 됐어. -96쪽

시 한편에 300원 하던 시절이었지. 내가 양계하고 바느질감 얻어서 한 달 생활비 2600원을 벌었어.

지금도 김 시인의 작품을 꺼내 읽을 때마다 새로운 감동을 받아. 시는 그림 같고, 산문은 조각 같아. 정말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역시 최고다, 싶지. 지금이라도 달려가서 안기고 싶어.

-김현경 (고 김수영 시인의 아내)-97쪽

음식에서 제일 조심해야 할 게 과하게 익히는 거예요. 차라리 덜 익은게 맛있어요. 덜 구우면 물이 약간 배어 있어서 보드랍잖아요. 그런데 과하게 익히면 뻣뻣해지죠. 연출자도 요리사와 같아요. 재료, 즉 배우나 대본이 무엇이냐가 매우 중요하고, 재료가 지나치게 익지 않도록 잘 조절해야 하죠. 사람이 지나치게 성공해서 어느 수준을 넘어가 버리면 음식과 마찬가지로 질겨져요. 원재료 안에 있던 수분기가 없어지면 음식과 마찬가지로 사람도 매력이 없어지더라고요. 배우에게는 순수함과 인간적인 매력과 풋풋한 연기가 원래의 수분이겠죠. 그걸 잘 지키도록 요리사인 연출자가 도와주는 거고요.

- 이지나-156쪽

"내가 업어서라도 통학시켜주마. 그 학교 가라. 아들이 공부를 잘해서 필요한 돈인데 어떻게든 못 구해주겠냐"라고 했겠죠. 저희 어머니는 딱 한마디 하셨어요. "버스비 없다." 결국 저는 집에서 가까운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됐죠. 1등으로 입학하게 돼서 입학식 때 선배들 환영사에 답사를 맡게 됐어요. 어머니께 말씀드리니 좋아하시더라고요. 입학식 전날,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멀건 죽을 저녁으로 먹었어요. 두 살 아래 동생도 배고프다고 투정부리다가 같이 잠들었죠. 다음 날 일어나서 세수하고 방에 들어왔더니 밥상 위에 물을 가득 담은 대접이 놓여 있고, 그 옆에 인절미가 세 개 있는 게 아니겠어요. 아무런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말 그대로 "이게 웬 떡이야" 했죠. 바로 그때 ‘떡’이라는 소리에 자던 동생이 번쩍 눈을 뜨더니 순식간에 하나를 집었어요. 그런데 동생만큼이나 빨랐던 게 어머니였죠. 동생이 떡을 집기가 무섭게 어머니가 손등을 야멸치게 내려치신 거예요. 원래 때리는 분이 아니셨거든요. 그런 어머니한테 한 대 맞은 동생은 아파서가 아니라 놀라서 멍해졌죠.
-164쪽

어머니는 "형이 1등으로 들어가서 오늘 답사해야 되니까 이걸 먹고 가야 해. 배가 고프면 말이 나오겠니" 하셨어요. 그러더니 갑자기 울먹이시는 거예요. 저는 떡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허둥지둥 방을 나섰어요. 눈물이 쏟아지려고 해서요.
집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20분 정도 걸렸는데 그날은 가도 가도 학교가 나오지 않을 것만 같았어요. 눈물 젖은 어머니 모습도 떠오르고 철없는 동생도 생각났지요. 그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에 쌀이 점점 떨어지고 먹을 게 없다고만 생각했지, 생계나 생존에 대해서는 생각도 안 했어요. 하지만 그날, 인절미 하나를 먹고 학교 가던 날, 아, 이제는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구나 하는 선명한 자각이 저를 두드렸어요.
어머니가 준비한 인절미, 지금 생각하면 어디서 그런 걸 구하셨을까 싶게 작고 볼품없었어요. 손가락 마디 두 개 정도 됐을까. 차지고 쫄깃하지도 않았고 약간 꾸덕한 채로 콩고물을 살짝 덮고 있었죠. 그 인절미가 저를 소년에서 청년으로 만든 거지요. 열세 살 소년으로 집을 나섰던 저는 열세 살 청년이 돼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164 쪽

지금이야 아파트에 많이 사니까 층별로 다니면서 신문 돌리면 속도가 꽤 나지요. 하지만 그때는 걸어 다니기도 힘든 단독주택이었어요. 비가 오면 특히 난감했어요. 지금처럼 신문을 비닐로 싸는 기계도 없었고, 초인종을 눌러서 반드시 사람에게 전달해야 했죠. 비오는 새벽에 사람을 깨워 나오게 하려면 시간은 오죽 걸렸겠으며 마음은 좀 초조했겠어요. 개 있는 집도 얼마나 골치가 아프던지요. 대문 너머로 던져 넣은 신문을 개가 물어뜯기도 하니까요. 학교에 가면 보급소에서 연락이 와요. 어느 집에서 항의가 들어왔으니 다시 갖다 주라고요. 모든 정보가 신문에서만 나오던 때이니 하루 배달이 안 되면 정말로 큰일이었죠.
고생 많이 했어요. 하지만 그럴 때마다 상 위에 놓여있던 인절미가 생각났어요. 다시는 울면서 인절미를 먹지 말자, 엄마를 울게 하지 말자, 동생을 배고프게 하지 말자. 그때의 결심이 저를 단단하게 만들었어요. 제가 약속에 철저해진 바탕이 거기서 온 거죠. 개가 있는 집은 철저하게 표시를 해뒀다가 대문 옆에 끼워둔다든지 따로 꾀를 썼거든요. 약속을 못 지키면 불편한 건 나다, 아무리 불편한 약속도 일단 했으면 지켜야 한다. -배한성-167쪽

건축은 삶을 짓는 것이지요. 하이데거가 그랬던가요. 우리는 거주함으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거주는 건축을 통해서 이뤄진다고요. 건축이라는 건 삶의 존재 자체라고 할 수 있는 거죠. 삶이 스며든 건축에는 기억도 깃들겠고요. -252쪽

건축하는 후배들은 물론이고, 요리사, 화가 등 창조하는 고통을 선택한 젊은이들에게 조각가 콘스탄틴 브랑쿠시 얘기를 해주고 싶네요. 브랑쿠시는 무척이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어요. 어릴 때 고향을 떠나서 천신만고 끝에 파리에 갔지요. 간신히 친구의 도움으로 작은 아틀리에를 얻었는데, 거기 들어간 첫날, 벽에 선언하듯 써 붙인 글귀가 압권입니다.
"너는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아, 이 말 너무너무 근사하지 않습니까. 제 가슴에 선연한 빛줄기처럼 와서 꽂힌 말입니다. 자신의 창조적 재능에 관해서 믿고, 하는 일에 대해서는 자존감을 잃지 말고 왕처럼 절대 굴하지 말라는 것이며, 작업을 할 때는 노예처럼 성실하게 하라는 것이죠.
일단 자기 재능을 믿어야 합니다. 재능이 있다는 걸 믿어야 신처럼 창조도 하게 되는 것이죠. 가장 중요한 건 자존심에 관한 이야기일 겁니다. 저는 건축이 우리 삶을 바꾼다고 믿는 사람이거든요. 건축을 통해서 삶을 바꿀 수 있고, 나아가 삶을 개혁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처럼 위대한 직능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을가요. 그렇게 믿으니 이 일 자체가 저의 의지를 북돋워주고, -259쪽

어떤 어려움 앞에서도 단단히 서게 하는 거죠.

-승효상-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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