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
비페이위 지음, 백지운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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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위미는 영화를 좋아했지만, 어머니는 좀처럼 보려 하지 않았다. 전에 위미는 속으로 불평하곤 했다. 어떻게 그 나이가 되도록 영화 볼 생각이 안 난담. 그러나 지금은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한다. 사람 많은 곳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사실 영화라는 것은 가짜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흰 천 쪼가리 앞에서 북적거리다니. 그냥 천 쪼가리일 뿐인데. 그것이 춥고 더운 것을 어찌 알까.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위미는 자신이 나이가 들었음을 느꼈다. 마음이 차가워진 것이다. 마음이 한번 얼면 그만큼 더 자라는 법이다. 사람이란 이런 식으로 한 차례 한 차례 나이를 먹어가고, 마음도 한 차례 한 차례 죽어간다. 세월과는 아무 상관 없이.

긴장이 담긴 어색한 즐거움과 혼란이 알게 모르게 점점 비밀로 발전해갔다. 하늘도 알고 땅도 알고, 당신도 알고 나도 안다. 비밀이란 감동적인 것이다.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따스한 향기처럼 번져나간다. 비밀은 그 비밀의 깊은 곳으로 서서히 침투해 들어가기를, 천천히 뻗어나가기를 갈망한다. 어느 정도까지 들어가면 비밀은 조용히 방향을 바꾼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정돈될 수 없는 방향으로 발전해나간다.

마음을 정하자 오히려 느긋해졌다. 가벼운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하루를 살면 하루치를 번다. 자신이 이미 죽었다고 치고 나니 나중에는 잠도 잘 오고 입맛도 살아났다. 밥도 맛있고 국수도 맛잇고 만두도 맛있고 땅콩도 맛있고 무도 맛있다. 뭐든지 다 맛있었다. 끓인 물도 아주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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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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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자기가 생각하는 방향으로 살지 않을 때, 거기에 부모가 반대할 권리는 없다. 반대는 할 수 있어도, 모욕할 권리는 없다. 왜냐하면 그건 부모 인생이 아니라 자식 인생이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의 원인은 대부분 사랑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자식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자식이 위험에 빠지는 광경을 두고 볼 수가 없다. 그들은 안락한 감옥을 만들어 자식을 그 안에 가두고 싶어 한다.

‘안전한 삶‘에 대한 기대는 망상이다. 안전띠는 매야 한다. 그러나 운전이 무섭다고 어디든 걸어 다니겠다는 것은 바보짓이다. 걸어 다니다가도 차에 치여 죽을 수 있다.

남녀차별이나 성희롱, 음주운전, 공공장소 흡연과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맹렬히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 결과 좀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었다. 그런데 왜 학벌이나 결혼 문제는, 그 부조리에 대해 "@이나 까세요"라고 말하지 못하는 걸까.

그 이유는 아마 정체성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인들이 정신적으로 허약해서라고 생각한다. 자기 삶의 가치에 대해 뚜렷한 믿음이 없기에 정체성을 사회적 지위에서 찾는 것이다. 사회적 지위는 대학 간판이나 자식 결혼식장에 모인 하객 수로 구체화된다. 그래서 다들 거기에 집착한다.

동물들의 침묵을 읽다 보니 몸도 마음도 너무 지쳐서 HJ가 집에서 가져온 여행의 기술을 조금 읽었다. 이 책은 망한 영화 잡지 키노나 합정동의 고만고만한 카페들, 고도로 계산된 포즈로 털털한 척하는 인디 여가수와 비슷했다. 알랭 드 보통도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좀 닮았다. 한국에서 아이돌 취급받는 거 하며, 시원하게 까진 대머리 하며, 스스로 대단한 깊이와 성찰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 자부심 하며. 몇 페이지 읽지 못하고 나는 금방 책장을 덮어버렸다.

선글라스를 쓴 채로 점점 붉게 물들어가는 해를 바라보고 있으니 정신이 다시 멍해졌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 깨달았다. 왜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경을 찾아다니는지, 왜 자전거를 타고, 왜 수십 킬로미터를 달리며 러닝하이를 느끼려 하는지.

사람들은 멍해지려고 그런 일들을 하는 것이다. 무슨 생각을 하건, 생각한다는 것 자체가 우리의 마음을 피로하게 만든다. 생각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대신 괴로움에 빠뜨린다. 이것이 선악과의 정체다.

생각은 현실을 넘어선 허구를 상상하는 능력이다. 생각 덕분에 우리는 애국이니 박애니, 살을 비비며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사랑을 넘어선 거대한 사랑을 상상한다. 구원이니 해탈이니, 근육의 나른함과 위장의 포만감을 넘어선 거대한 행복을 상상한다. 계급이니 국가니, 내가 표정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들을 넘어선 거대한 집단을 상상한다. 그리고 그런 거대한 허구를 상상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대한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거대한 행복을 얻지 못했으며, 거대한 집단 속에서 소외되었다고 여기게 된다.

어릴 때는 그런 일들이 매일 일어났다. 하루하루가 열광과 감탄, 발견과 깨달음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10대가 되고 20대가 되자 신세계라고 할 정도의 새로운 경험이 확 줄어들었다. 진짜 새로운 경험은 많지 않다. ...서른이 되자 그런 경험은 거의 남지 않았다. 어떤 신세계는 의도적으로 피했다. 출산이라든가 창업 같은 것.

인간은 열정을 금방 잃고, 섹스의 가능성이 있는 타인을 향해 수시로 한눈을
팔며, 오래도록 한 가지 대상에 충실할 수 없는 존재다. 결혼은 그런 자연스러운 충동을 억압해서 허구의 가치를 만들어낸다. 운명적 사랑, 백년해로라는 개념을. 우리는 운명을 구속함으로써 운명을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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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 인문 기행 2 중국 인문 기행 2
송재소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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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어를 배우며 일부러 중국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애정을 기울이다 보니 이런 책도 읽게 되었다. 소설이나 에세이만 읽다 이런 있어보이는, 뭔가 공부가 될 것 같은 책을 읽으니 새삼 어린 초등학생 시절 독서하던 기억이...


지난 여름에 산동성에 가서 중국 친구들이 나름 신경을 써준다고 주변의 유적지며 성이며 공자의 묘 같은 곳에 여기저기 데려다 주고 영어 가이드까지 붙여 주었는데 그다지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었다. 지루하고 지루한 역사 이야기로구나 몇년도에 뭘했고 뭘했고 그렇구나 싶었을 뿐. 딱 한가지 기억하는 건 몇 톤에 달하는 돌조각을 베이징에서 산동성까지 수천킬로 이동시키기 위해 중국 사람들이 겨울이 오면 길에 물을 부어 빙판길을 만들고 그 위에서 돌조각을 밀어 이동시켰다는 이야기. 그렇게 3년을 해서 돌조각의 여행은 끝났다 한다. 중국사람 대단하군!


이 책은 은퇴한 노교수가 중국의 특정지방을 여행하며 그 곳의 유적에 대해 설명하고 그 동네 술 이야기 차(茶)이야기도 곁들여 하는, 컨셉으로 따지자면 유유자적 풍광 유람기 정도 되는 그런 책이다. 그런데 읽어보면 그런 여유는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데 그건 바로 저자가 너무나도 중국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한학자로서 평생 중국을 연구하고 오가며 지냈으니 웬만한 가이드들보다도 더 중국을 잘 알고 발길 닿는 곳곳에 얽힌 이야기를 독자들에게 하나라도 더 들려주고 싶어하신다. 유유자적 여행기가 아니라 열정 여행기! 나 혼자 다녔음 아이고 지루허다 싶었을 동상하나 벽의 그림 하나에도 다 얽힌 사연이 있는 법 (그 역사에 그 인구에 그 땅덩이에 스토리가 없을수가 없다) 그걸 저자가 애정을 담아 꼼꼼히 알려준다. 


학생이라 어린 시절이었다면 저자의 이야기를 더 열심히 막 중국 사람들 이름도 외우고 연도도 챙겨보고 그랬을텐데 이제 나이가 들어(?) 휘리릭 가벼운 마음으로, 여행의 분위기만 즐기겠다는 정도로 가볍게 읽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꽤 재미있었다. 그동안 한국의 위인들에 대해서만 열심히 배웠었는데 중국에도 정말 인물이 많았구나, 굴곡많은 역사속에 자신만의 뜻을 품고 용맹히 살다 간 사람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아주아주 옛시절에 서른넷이니 서른여덟이니 하는 나이에 급제하여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사람들의 이야기들 또한 인상적이었다. 주변사람들이 손주 볼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해도 멋지게 살고 천년뒤에도 이렇게 기억되고 있다.


평균수명이 연장되고 초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며 최근에는 은퇴한 연장자들의 책들이 꽤 많이 출간되고 있다. 나이든 사람은 꼰대라고 편협히 볼 게 아니라 우리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같이 공존하고 서로 존중해야 할 파트너임을 받아들이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그들의 지식과 지혜는 나눌수록 값진 것이기에. 젊은 사람들의 소프트하고 감성적인 여행기도 좋지만 가끔은 이런 정제된 문체에 단단한 지식을 베이스로 한 여행기도 좋다 싶다. 다음에 중국으로 여행을 간다면 유적지의 구석구석을 예전처럼 허투루 한숨쉬며 지나치진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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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술과 차가 있는 중국 인문 기행 2 중국 인문 기행 2
송재소 지음 / 창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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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4대 미인

서시: 강의 물고기가 빨래하는 서시의 미모에 홀려 지느러미 흔드는 것을 잊어서 물밑으로 가라앉았다고 해서 ‘침어미인‘으로 불린다. 여자로서는 발이 크다는 결점이 있다.

왕소군: 한나라가 흉노와 혼인을 조건으로 화친을 맺는 바람에 왕소군은 흉노 땅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그녀는 가는 도중에 말 위에서 비파를 타고 있었는데 날아가는 기러기가 그녀를 보다가 날갯짓 하는 것을 잊어 땅에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미인‘의 칭호를 얻었다. 양쪽 어깨의 높이가 다르다는 결점이 있다.

초선: 후한 말기의 무장 여포로 하여금 동탁을 죽이게 한 미인으로, 그녀가 밤중에 달을 쳐다보고 있는데 달의 여신 항아가 자신의 미모가 초선에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여 구름 속으로 숨었다고 해서 ‘폐월미인‘으로 불린다. 양쪽 눈의 크기가 다르고 귀가 작았다고 한다.

양귀비: 당나라 현종의 마음을 사로잡은 미인으로, 그녀가 어느날 화원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꽃을 쓰다듬으니 꽃잎이 움츠렸다고 하는데, 꽃이 양귀비의 아름다우을 보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그녀는 ‘수화미인(꽃을 부끄럽게 한 미인)‘으로 불렸다. 그녀도 결점이 있었으니 겨드

겨드랑이에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목욕을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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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클 2017-10-27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에서 본 이미지 때문인지 초선이가 제일 예쁠 것 같은... ㅎㅎ 잘 지내셨죠? 간만에 인사 드려요 ^^

LAYLA 2017-10-27 21:2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야클님~~^^ 야클님 글 종종 보고 있었어요 특히 최근 그 100원 페이퍼는 정말 속이 시원했습니다. 회계 때문이라면 1원으로 하던지~~~ 왜 그러나 몰라요~~~

2017-10-27 21: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언어 공부 - 16개 국어를 구사하는 통역사의 외국어 공부법
롬브 커토 지음, 신견식 옮김 / 바다출판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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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국어 구사자의 언어공부 방법이라는 캐치한 문구에 현혹되어 집어들었지만 우리는 저자가 20세기 초반에 태어나 이미 사망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 당시는 지금과는 외국어 학습 환경이 전혀 달랐고 외국어 전문인력에 대한 수요와 공급 상황도 완전히 달랐다. 저자가 첫 커리어를 시작할 때 무작정 영어선생 자리를 얻고나서는 학생들보다 2주 정도 먼저 공부를 해 가며 가르쳤다는 이야기를 읽었을 때 든 감정이란 배신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요즘 세상에선 씨알도 안 먹힐 이런 이야기를 보려고 이 책을 산 거 아니거든요... 


외국어 학습법에 관해서도 그리 유용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외국어를 배우려면 최소 일주일에 10시간인가 공부를 해야 한다는 냉정한 이야기에 뜨끔하기는 했지만(의지만 앞설 뿐 학원수강 시간 외 혼자 공부하는 시간이 얼마나 적은지 반성) 그런 원론적인 이야기 외에는 외국어 학습에 관한 큰 팁을 얻을 수 없었는데 그건 저자가 외국어를 공부하던 시대에는 대로 된 외국어 교육기관이나 전문 교육인력이 없어서 그냥 외국어 사전 하나 끼고 사전을 첫페이지부터 정독해나가며 그 언어의 구조를 스스로 깨치는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사전을 처음부터 읽어나가며 언어의 구조를 대충 깨우치고 그 다음엔 외국어로 된 원서를 구해서 무작정 읽어나가고 가끔 운이 좋으면 그 외국어로 방츨되는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어 듣기 연습을 했다고 한다. 이렇게 혼자 공부해서 동시통역을 했다고 하니 저자가 언어에 있어서 얼마나 탁월한 감각을 가진 사람인지 감탄도 되고 동시에 그 시대엔 이렇게 얼렁뚱땅 해서 전문인력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니 동화같은 시절이었군 싶기도 한 것이다...(실제로 동시통역 하며 겪은 여러 실수들도 나온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는 21세기에 저런 학습법을 사용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영 쓸모없는 책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건 다국어 구사자의 언어를 소재로 한 에세이를 읽는 기쁨이랄까. 언어공부라는 제목 말고 조금 소프트하게 다국어구사자의 에세이 정도로 포지셔닝 했더라면 적당한 기대와 적당한 만족을 이끌어 냈을 거 같다. 사실 순수 에세이라 하기에도 조금 밀도는 떨어진다는 감이 있지만 어쨌든 다언어 구사자의 희소성이 그런 빈틈은 커버할 수 있다. 내가 개인적으로 더 궁금했던 건 저자가 동시통역사로 전세계를 여행한 경험을 담았다는 다른 책이다. 언어 학습 자체에 관해서는 이 시대에 유용하게 쓸 정보가 별로 없으므로 에세이, 시대기록의 차원에서 더 재미있을 것 같은 책인데 이 책은 한국판은 물론 영문으로도 번역이 되어 있지 않다. '언어공부'는 언어학습을 즐겨하는 이들이 가볍게 읽을만한 책. 외국어 학습에 대한 실용적인 팁을 얻고자 한다면 굳이 추천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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