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살쯤 어린 친구와 하는 순수한 취미의 사이드 프로젝트가 있는데 그 친구가 물었다.
- 어떻게 회사 다니면서 이거까지 해?
- 그건 어쩌면 회사를 다니니까 그런건지도 몰라. 회사를 다니면 어떻게든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헤매게 되거든. 춤을 추든지, 그림을 그리던지, 동호회를 하던지... 그런거지.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하고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린다. 아침 일찍 인력 시장에 나가서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받으면 일당 14만원을 받는다고 한다. 본인이 택한 삶의 방식인데 마음이 괴로운 것도 일절 없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한다고 했다. 나의 세대와는 또 다른 그 방식이 나는 좋다고 생각하고 부럽기도 하다. 우리세대는 부모들과 달리 쿨하다 생각했지만 세대의 특성으로서 '아등바등함'은 이 세대는 이렇고 저 세대는 저렇다고 잘라 말할 수 있는게 아니라 매년 조금씩 옅어지는 식으로 차이가 만들어지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내 세대는 지금의 20대와 비교하자면 더 짙게 아등바등거리며 살고 있고 그게 인에 박혀서 여유롭게 사는 것이 두려운 사람들이 많다.
맡은 업무의 돈 단위가 커져서 이상한 소리를 잘도 한다.
- 돈 들어올데 있어?
- @@땅 매각하잖아.
- 70억? 그건 조금이잖아.
내 소유의 70억이 있다면 요즘 5% 금리로 따지면 세금 40%를 제하고도 다달이 1750만원이 이자로 들어오는데...나는 이자만 받아먹고 사는 삶을 꿈꾼다. 이자만 나뭇잎을 갉아먹는 송충이처럼 뜯어먹고 살다가, 죽기전에 병원비라던지 큰 일로 뭉텅이로 몇 번 크게 원금을 헐어쓰고 죽을 때쯤 딱 잔고가 아슬아슬하게 0에 수렴하는 인생. 정말 멋진 인생일 것이라 생각한다.이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야망들 중 돈에 관한 야망이 가장 무색무취하단 생각이 든다. 누구나 가지는 야망이니까. 그러니까,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이라면 야망을 가져도 좀 예쁜 걸로 가지고 싶어서.
올해 봄에는 처음으로 봄이 오는 것이 반갑지 않았는데 가을이 되어보니 가을이 되는 것이 슬프지도 않았다. 너무나 신기해서 나는 버스를 타면 차창밖으로 붉게 물든 단풍을 마치 단풍을 처음 본 따뜻한 나라의 관광객처럼 유심히 보고 보고 또 보았다. 어떻게 겨울이 닥쳐오는데 마음이 무너지지 않을 수 있는걸까? 겨울이 오고나서 보니 더 놀라웠다. 나는 달력에서 동지를 확인하고 그래, 저날까지만 참고 견디자. 그러면 어떻게든 또 봄과 여름이 오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내가 죽어도 계절은 가고 봄이 오고 가을이 오는 것이라면 내가 선택할 것은 죽느냐 아니냐 정도라는 것. 그 심플한 것을 받아들이는데 거의 40년에 가까운 생이 소요된 것일까. 그렇다면, 괴로운 40년 뒤에 받아들일 수 있는 40년을 가진다는건 남는 장사일까 손해보는 장사일까.
이제는 적지 않은 나이라 노화의 조짐을 여러모로 느끼는데 어제는 모임에서 지인이 찍어준 내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단순히 지쳐보인다거나 나이가 들어보인다는 걸 넘어서 분위기의 측면에서 내 얼굴에 흰 머리가 하나도 없는 새카만 머리가 무척 어색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충격을 받고 당장 피부과 예약을 했다. 나는 내 노화의 원인을 무척 정확하게 알고 있다. 마음고생. 아무리 밤을 새고 물 대신 커피를 마시고 밥 대신 케이크를 먹는 내 생활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해도 나는 인정할 수 없다. 그런 것들 따위 마음의 고통이 가져오는 노화와는 비교할 수 없답니다. 마음이 주는 고통은 얼굴을 시들게 할 때도 그냥 시들게 하는게 아니라 찌그러뜨려서 기분 나쁘게 늙게 만든다.
사이드 프로젝트를 하는 어린 친구가 또 물었다.
어떻게 일을 하면서 사이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계속 더 나아질 수 있냐고.
글쎄,
나는 그 친구보다 더 살아온 10년의 세월의 힘이 너무 크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가는 할먀미 같이 보이기 때문에 잠시 생각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 현실이 너무 힘드니까, 여기서라도 마음의 위안을 얻고 싶어서 그런가봐.
그건 사실이다. 일을 할 땐 회색의 마음으로 하고 사이드 프로젝트를 할 땐 황금의 마음으로 하니까. 회색이 힘들어서 위안을 얻으려 황금처럼 일하고 그러고 나면 황금의 광휘가 남아서 그런지 다시 회색으로 돌아가도 숨을 쉬며 회색의 시간을 넘길 수 있다. 마음이 괴로운만큼 도망치기 위해 더 열심히 황금의 마음으로 임하니 결과물도 좋은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올해는 막바지이고 나는 무엇도 후회하지 않는다.
정말 열심히 살았던 한 해 였고
내 스스로 충만함을 느낀, 내 야망의 실현과 진보도 있었던 한 해 였다.
다만 아직 70억이 없을 뿐이다.
지인들과 모여 온갖 이야기를 하던 중 술에 취해 말했다.
-내 계획은 말이야.
난 분명히 내 계획이라 말했다.
이건 꿈 같은 게 아니니까.
-지금 하는 일, 프로젝트가 마무리 되면 이탈리아로 갈거야. 거기서 집을 빌릴거야. 그리고 한 반년, 일 년 살건데, 집을 2-3명은 살 수 있는 집으로 빌려서 그 동안 누구든 나를 찾아올 수 있게 만들거야. 그렇게 살아보고 싶어.
친구들은 당연히 놀러오겠다며 소리를 질렀다.
정말로,
이건 꿈이 아니야.
나는 초대하고 싶은 친구들의 얼굴이 이미 머리속에 다 있다.
내가 삶이 괴로웠다고 하면 아무말 없이 들어줄 친구들이.
우리는 이탈리아의 빈티지 조명이 만들어내는 주홍빛 불빛 속에서
베란다로 들어오는 포근한 저녁 바람을 맞으며
그 나라의 풍요로운 땅이 뱉어낸 농산물로 만든 무언가를 먹으며
와인을 따라 마시겠지
그리고 기분이 좋으면 탁, 즉흥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젤라또를 사먹으러 휘청이며 걸어나갈거야.
자정이라도 상관없어.
그렇게
괴로웠던 시간이 만든 단물의 계획은 너무도 달콤해서
상상하는 것 만으로도 이미 반쯤은 이루어진 듯 만족스럽다.
고통이 길었던 만큼 단맛의 농축도 깊었겠지.
나는 그 곳에서,
아 이런 생활도 무료하군. 멍하니 있다가 그렇게 내뱉는,
그런 사치스러운 권태를 백분 누리고 말거야.
정말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