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변부인 김승옥 소설전집 4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장바구니담기


아버지의 친구들 중에는 그럴듯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중 몇 사람이 고맙게도 수정이 금년에 졸업한다는 걸 기억해두었다가 서로 취직시켜주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그분들로서는 물론 가장을 잃은 수정의 가정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어주겠다는 뜻에서였는데, 그러나 수정의 어머니는 수정이까지 벌지 않아도 될 만큼 아직은 넉넉하니까, 라는 이유로 그 도움들을 사양했다.
김씨의 생각으로는 여자란 직장생활을 하며 아무래도 거세지고 여자다운 맛이 달라져버려서 앞으로 결혼생활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된다는 것이었다.
일부에서는 맞벌이 할 수 있는 여자를 아내나 며느리로 맞으려는 풍조가 높아가고 있지만 그건 가난한 생활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보려는 최후의 발악에 불과할 뿐, 결코 맞벌이 부부 자체가 이상적인 부부형태인 건 아니다. 집안살림만 해도 여자에게는 중노동인 것이다.

만일 아내가 맞벌이 할 수 있는 여자이기를 바라는 그러한 남자라면 나는 아예 딸을 주지 않겠다.
-51쪽

왜 한때나마 그런 사람을 보고 싶어 안타까워 했을까?
왜 그런 사람을 어머니는 나와 맺어주려고 해을까? 자신이 밉고 어머니도 원망스럽다.
수정은 자기가 속해 있던 세계 전체가 자기를 속였다는 느낌에 떨고 있었다.
그 여자의 기분, 그 여자의 꿈, 그 여자의 육체, 그 여자의 운명, 요컨대 그 여자에게 속해 있는 모든 것은 내팽겨쳐져 실은 아무의 보호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 여자는 비로소 깨달았다.
그 동안은 그나마 어머니라도 자기를 보호해주는 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오늘 보니 아니다.

소리나 꽥 지르고 뻔뻔스럽고 진심은 감춰두고 거짓만 내보이며 그리고 여자를 폭력으로 지배하려는 사내한테 나를 떠맡겨버리려 한 것이다.
일부러 그런 사내를 고르려고 해도 힘들 것이다.

그만큼 어머니는 내 운명에 무책임한 것이다. 이젠 내가 귀찮아진 게 틀림없어
아무한테나 줘서 처지해버리려는 생각밖에 없는 거야.

수정은 끝없이 비참한 느낌에 빠져들어갔다.
자기를 보호해주고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란 여자는 얼마나 무력한가!
자기의 힘만으로써는 도저히 이 세상에서 자기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을 수 없을 것 같다.-97쪽

"도둑인 건 사실이죠"
"내가?"
"도둑? 내가?"
"처녀 도둑. 후후훗"

말하면서 종숙은 대담한 자세로 명훈의 가슴을 힘껏 껴안았다. 단추를 잠그지 않은 바바리코트의 앞깃이 벌어지면서 네글리제만의 풍만한 가슴이 명훈의 가슴에 부딪쳤다. 명훈은 이제 익숙해진 그 여자의 젖가슴의 탄력에 별다른 감흥을 느끼지 못하면서 여자가 말한 '처녀 도둑'이라는 말만이 귀에 거슬렸다.
어째 올가미를 씌우는 수작인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역시, 그 동안 그런 내색을 내보인 적은 없었지만, 다른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육체관계에 대한 책임을 남자에게만 돌리며 자신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게로구나, 생각하니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129쪽

어쨌거나 경숙이 일러주는 방법이란 수정으로서는 도저히 실행 불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경숙과 자기와는 경우가 다른 것이다.
결혼을 하나의 계약이라고 본다면 경숙은 계약자로서의 권리를 가지고 남편의 잘못을 추궁할 수가 있다. 그러나 자기는 무슨 권리로 현장을 습격한다는 따위의 어마어마한 짓을 할 수 있단 말인가? 사랑하니까? 사랑한다는 것도 권리일 수 있을까? 글쎄, 사랑한다는 게 권리일 수 있다고 해도 그 권리란 사랑하지 않아버린다는 데밖에는 쓸 수 없는 권리가 아닐까?-198쪽

그 여자 역시 섹스에 대한 근원적인 경멸감 내지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가정이란, 그리고 남편이란 섹스의 대상 이상의 존엄한 그 무엇이었던 것이다.
섹스에 대하여 무지해 보이는 남편이 오히려 믿음직스러워 보였고, 순진한 남편을 통하여 자신의 몸 속에서 병균처럼 끓고 있는 자극에의 욕망이 건강한 육체의 당연한 권리가 아니라 죄스러운 것임을 깨닫곤 해왔던 것이다.
가정에서의 섹스란 엄하게 다스려 조그맣게 가둬두면 둘수록 가정의 다른 부분들, 즉 육아라든가, 문화적 취미생활이라든가, 친척들과의 보다 활발한 왕래라든가, 재산을 불려나간다든가 하는 일에 전념할 수 있다고 생각해왔다.
질펀하고 시뻘건 낮짝을 한 자극적인 섹스란 놈은 어디까지나 가정 밖으로 몰아내놓고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 시뻘건 낮짝을 하고 있는 녀석과의 교섭이란, 내 가정이 제대로 잘 굴러나가고 있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 때때로 영화구경을 가거나 보석반지를 사듯, 자신에게 속해 있는 죄스러운 욕망을 달래주는 정도로 슬그머니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261쪽

질투란 하면 할 수록 상대가 아니라 하는 내 가슴만 멍이 들도록 두들겨패는 것이다.-291쪽

"일본 책은 안 보셨습니까?"
"일본어는 다 잊어버렸어요. 내 이전 세대와 나는 그런 점에서 큰 차이가 있지요 번역투일망정 나는 모든 지식과 교양을 한글로 섭취한 최초의 세대, 김현이 말한바 4.19세대임에 틀림없어요"-398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